<포식자들의 시간> - 역사의식이 결여된 신(新)독재자들의 귀환
구세계는 일정한 보호책을 전제로 했다. 그 세계에는 특정 기관들의 독립성에 대한 인권, 소수 집단의 권리, 국제적 파급 효과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포식자들의 시대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진행 중인 모든 과정이 끝까지, 극단적인 결과를 볼 때까지 가고야 말 것이다. 그중 어떤 과정도 어떤 방식으로든 억제되거나 통제되지 않을 것이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기'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이 책의 저자, 줄리아노 다 엠폴리는 서문에서 '아스테카 서기관의 관점에서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구세계의 숨결과 그 자리를 차지할 신세계의 서릿발 같은 지배를, 개념들보다는 이미지에 기대어 파악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밝혔다. 덕분에 우리는 세계 권력의 지각 변동을 내부자의 시선에서 꽤 세심하게 훑어볼 수 있다. 저자가 직접 현장에서 포착한 유엔 총회의 분위기, 각국 정상의 면모들, 그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과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모호한 연결고리 속에서 날아드는 서늘한 예감까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만 같다. 무함마드 빈 살만을 다루는 장에서는 실제로 그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짜릿한 기분마저 들었다. 편안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 새롭게 세계를 장악한 ‘보르자형 인간들’의 면면을 헤집어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저자는 트럼프와 무하마드 빈 살만 같은 '보르자형 인간'의 특징으로 행동, 특히 충격 효과를 일으키는 '경솔하고 무모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에 관심 있을 뿐, 그 뒤에 따를 결과나 여파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이들과 쌍둥이처럼 똑 닮은 자들이 있으니 바로 샘 올트먼, 마크 저커버그, 일론 머스크 같은 테크 억만장자들이다. 이들은 기술 발전 아래 '모든' 인간이 노동에서 벗어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들은 AI의 도래로 이미 사람들이 겪고 있고, 또 앞으로 겪게 될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우려와 규제를 자신들의 이상향을 가로막는 성가신 방해물로 여길 뿐이다. 그렇기에 이 달라 보이지만 너무나도 똑같은 두 부류가 영합한 결과는 핵폭탄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의 질서가 순식간에 무너지며 무한 폭력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이러한 '포식자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 정상으로 회귀한 것에 가깝다’며 ‘피비린내 나는 권력 추구를 어떤 규칙 체계로 제어할 수 있었던 그 짧은 시기를 예외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정자들이 어떻게 이 불온한 세력의 발원 조짐을 외면하고 테크 기업가들이 별다른 규제 없이 종횡무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는지 직접 눈으로 마주한 장면들을 통해 예리하게 분석하며, 기존 질서를 힘과 속도로 부수며 밀고 들어온 '보르자형 인간들'의 공통된 특성과 함께 허점 또한 명쾌하게 짚어낸다. 결여된 역사의식과 그로 인한 무지함, 그렇기에 이런 시대에는 오히려 강력한 무기로 작용하기도 하는 그 어리석음에 대하여. 그리고 또다시 반복되는 듯한 역사의 흐름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변수가 하나 있다. 바로 그 발전을 주도한 테크 엘리트들조차도 종국에는 예측이 불가능한 AI 기술이다. 아무리 강력한 포식자도 결국은 생태계의 일부일 뿐이다. 부드러운 살점에 박아 넣었던 송곳니가 딱딱한 금속에 부딪혀 박살 나는 때가 와도 과연 자신들이 만든 이상향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인지, 혹은 그때까지 인류가 온전히 존속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것인지? 이 책이 쓰인 시점에 '종말 시계'는 자정에서 90초 전을 가리켰고, 지금은 5초 더 줄어든 85초 전을 가리키고 있다. 끝을 향해 질주하는 듯이 보이는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시작은 현실을 직시하고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그만두고 현대의 아스테카 서기관이 구세계의 끝자락에 남긴 기록을 읽는 것이다. 담고 있는 내용과 달리 한 손에 들어오는 가볍디가벼운 이 아담한 책이 복잡하고 암담해 보이는 현 상황의 핵심을 명료하게 정리하며 나아갈 좌표를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마음은 무겁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속 시원한 기분을 선사하며.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