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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AYLA
  • 5월 27일 오전 3:29 공개
백지 앞에서 밑줄긋기

소설을 쓸 때의 나와 특정 감정을 느꼈던 순간의 나 사이에는 시간적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일기를 쓸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 날 있었던 일을 써야 했기에 내가 느낀 감정을 인정하기까지의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진짜를 쓰고 싶었다. 진실하고 싶었다. 그것이 촌스러운 생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인간으로서는 그토록 비겁하게 살아왔을지언정 작가로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게 글쓰기는 남에게 보이고 싶은 내 모습을 꾸미기 위한 장식도, 타인의 호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도 아니었다. ...나는 진짜가 되고 싶었다. 그게 어떤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아주 짧게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눈 이별과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이별은 전혀 다르다는 걸 그때의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사랑하는 존재와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영영 헤어진다는 건 한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일이라는 것도.
아플때면 어쩔 수 없이 아픈 부분을 의식하게 된다. 만성적인 위경련을 겪는 사람은 위를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무릎이 아픈 사람은 무릎을, 마음이 아픈 사람은 마음을 의식한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무릎이나 마음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매순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데됴.
그 순간 밖에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습니다. 아기는 머리를 움직여 그 시끄러운 소리를 따라가려고 애썼습니다. 그게 자기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라는 걸 아직 모르는 거였지요. 몇 주 지난 뒤 다시 만난 조카는, 벌써 자동차 소리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극에 놀라고, 그게 뭔지 평가하고, 받아들일지 말지 분류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동안 그 자극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배운 거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언젠가는 예쁜 돌멩이가 보일 때마다 멈춰 서거나 웅덩이를 만날 때마다 뛰어넘거나 하지 않고 여기에서 저기까지 곧장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어른이 되면 세상일에 너무 익숙해져서 큰 산이라든지 보름달이라든지 다른 사람의 사랑 같은 걸 당연히 여기게 됩니다. 그런 것들의 위대함을 다시 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새로운 눈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잊어버려도 괜찮단다. 그가 말했다. 또 그러는 편이 좋아. 사실 우리는 때로 잊어야 하지. 잊는 건 중요한 일이란다. 일부러라도 그래야 해. 그래야 좀 쉴 수 있거든. 듣고 있니? 우리는 잊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영영 잠을 잘 수 없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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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을매일씁니다님도 <백지 앞에서>를 재미있게 보고 리뷰를 남기셨네요. 리뷰를 읽어보시겠어요?
  • 2026-05-27 03:29 좋아요  l  좋아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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