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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 20일 오후 10:36 공개
자부심이 생기는 학술서
일단 케임브리지 역사 시리즈는 매우 높은 확률로 훌륭합니다. 19세기말에 몰아친 역사학의 변화(과학화+분업화)를 케임브릿지 역사학과가 수용하고 케임브릿지 출판부의 전폭적 지원으로 100년 넘게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 해당 분야의 전세계 최고 전문가들이 참가해서 만들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언어권에서 특출난 역사책들이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하버드 역사 시리즈와 함께(제 생각에는 더 훌륭하게) 현 시점에 잘 검증된 역사학 결과물들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책 내용은 다른 분들이 많이 쓰실테니 전 리뷰에 한국 사람 입장에서 이 책의 의미에 대해서 좀 써보려고 합니다.


이런 케임브릿지 역사 시리즈에서 몽골제국사를 내는데 에디터로 서울대 교수로 한국에서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가 선정되었다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껴도 되는 일입니다. 케임브릿지 역사 시리즈가 나온다는 것은 해당분야에 대한 연구가 세계적으로 충분히 성숙했다고 평가받는다는 뜻이고 에디터로 참가한다는 것은 그 성숙한 분야를 이끌어나간 학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몽골제국사'라는 개념은 지역기반으로 봤을 때는 러시아사, 서남아시아사, 중앙아시아사, 중국사, 한국사 등에 포함됩니다. 각 지역의 역사가 아니라 '몽골제국사'라는 개념으로 묶인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이 연구 업적을 통해서 통합적으로 볼 이유를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살아있는) 학자들이 이번에 편집자로 참여한 미칼 바란과 김호동 교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케임브릿지 한국사 프로젝트는 한국 정치권의 부적절한 개입과 한국사학자들 간의 의견 차이, 코로나19 사태 등 여러 요소들로 인해 아직 결과물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만 10년 만에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점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십명의 학자가 흩어져서 자기의 주장이 아니라 합의된 주장을 서술하고 리뷰를 받는 프로세스를 진행하려면 편집자들이 상당한 리더십을 보여야 합니다.(물론 몽골제국사도 오래 걸렸고 일부 저자분들은 편집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뛰어난 한국인 학자가 역사학계나 인문학에서 기여하고 있는 경우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국의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면서 글로벌 학계의 그 분야를 리드하고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사례입니다.(물론 김호동 교수는 하버드대 역사학 박사입니다. 당시 박사 연구주제는 19~20세기 위구르 역사였습니다.)


다만 이 책은 교양서적이 아니고 해당 역사에 관심이 깊은 매니아 혹은 학부 전공생 정도에 초점을 맞춘 학술서적입니다. 벽돌책을 깨보겠다는 각오까지는 없으시면 김호동 교수의 "몽골 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왜 몽골 제국사라는 개념이 중요한 지는 이 책에서 쉽게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연구를 잘하는 것, 책을 잘 쓰는 것, 강의를 잘하는 것은 약간씩 다른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김호동 교수님은 앞쪽 두 가지는 탁월하시다라고 생각합니다.(강의는 요즘 인강 강사같은 강의력을 교수들에게 기대하는 분들이 많아서...) 특히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외국 역사 책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 책을 혹시 읽으신다면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를 옆에 펼쳐놓고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예복습에 도움이 되는 간략한 설명과 지도가 주는 스케일 감각을 유지하면서 상세한 역사책을 읽는 것은 아주 도움이 됩니다.


저도 전공자는 아니지만 우연하게 김호동 교수의 교양수업을 듣고 너무 놀라서 전공수업까지 수강하며 힘겹게 따라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배경지식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타과 학생의 무식한 질문에도 해당 분야 최고의 석학이 상세하게 답변해주시는 모습에 놀랐습니다.(다른 전공 수업도 들어보니 당시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님들은 모두 그러시더라고요)


한국의 훌륭한 역사학자들이 80년대부터 박사학위를 취득해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유튜브나 강연 프로그램으로 뜬 강사들이 부정확한 내용을 듣기좋게 포장해서 유명세 기반으로 책을 팔고 있는데 그런 책보다는 평생을 역사학 연구에 쏟아붙고 그 고민을 담아낸 책들을 더 많이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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