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비처럼 어디선가 와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다만 기억만을 남겨 놓고.-29쪽
그런 건 만성화 된다구. 일상 생활에 함몰해서 어느 것이 상처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거기에 있지. 상처라는 건 그런거야. 이거다 하고 끄집어 내어 보여줄 수도 없는 것이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건 대수로운 상처는 아냐.-102쪽
녹슬어 버린 것이다. 녹슬어서 굳어진 것이다. 이렇게 혼자서 있으면, 점점 나 자신이 상실되어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166쪽
"지금도 듣고 있지, 좋아하는 곧도 있고. 하지만 가사를 암송할 만큼 열심히 듣지는 않아. 예전만큼은 감동하지 않아." " 왜 그래요?" " 왜 그럴까?" "가르쳐 줘요"하고 유키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적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렇지."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좋은 건 아주 적거든 무엇이든 그래. 책이나, 영화나, 콘서트나, 정말로 좋은 건 적거든. 록 뮤직만 해도 그렇지. 좋은 건 한 시간 동안 라디오를 들어도 한 곡 정도밖에 없어. 나머진 대량 생산의 찌꺼기 같은 거야. 하지만 예전엔 그런 거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 무엇을 듣건 제법 재미 잇었어. 젊었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게다가 사랑을 하고 있었어. 시시한 것에도,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떨림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어. 내가 하는 말 알겠어?"-188쪽
"틀렸어. 취미를 가질 수가 없어, 도저히.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야. 맛좋은 음식점을 찾아내 잡지에 내어 모두에게 소개하지. 이곳으로 가시오, 이런 ㄴ걸 먹으시오. 하지만 어째서 일부러 그런 일을 해야 하지? 다들 제멋대로 저 좋은 걸 먹고 살면 되지 않아. 안 그래? 어째서 타인에게 음식점 지시까지 일일이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째서 메뉴의 선택법까지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거야? 그리고 말이지, 그런데서 소개를 받는 음식점이란, 유명해짐에 따라서 맛도 서비스도 자꾸자꾸 떨어지게 돼. 십중 팔구는 말야.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이지. 그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야. 무엇을 찾아내선 그걸 하나 하나 점잖게 경멸해 가는 거야. 새하얀 것을 찾아내어 때투성이로 만들어 가는 거야. 그것을 사람들은 정보라고 부르지. 그런 일에 이젠 진절머리가 나."-193쪽
열다섯 살이었다면 사랑에 빠졌어, 하고 나는 새삼 느꼈다. 그것도 봄의 눈사태와도 같은 숙명적인 사랑에. 그리하여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 지독히 불행해져 있을 게다.-201쪽
나에게 있어서의 사랑이란 어색한 육체를 가지게 된 순수한 개념이며, 그것은 지하 케이블이니 전선이니를 뭉기적 뭉기적 통과해 가까스로 어떻게 어떻게 해서 어딘가로 연결돼 있는 그런 물건이었다. 굉장히 불완전한 물건인 것이다. 가끔가끔 혼선도 있다. 번호도 알지 못하게 된다. 전화가 잘못 걸려오는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 탓이 아니다. 우리들이 이 육체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한은 영원히 그런것이다. 원리적으로 그런 것이다.-206쪽
"벌써 서른네 살이야. 싫어도 모두 어른이 되지."하고 나는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구. 바로 그렇지. 자네 말대로야. 하지만 인간이란 묘하다구. 일순에 나이를 먹는단 말일세. 참말이지. 나는 예전엔 인간이란 건 1년, 1년 순번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거라고 생각했었지." 고혼다군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듯 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렇진 않지. 인간은 일순에 나이를 먹는다구."-219쪽
사월의 초순. 트루만 카포티의 문장처럼 섬세하고, 변하기 쉽고, 다치기 쉽고, 아름다운 사월 초순의 나날.-256쪽
미녀였지. 알몸으로 죽어 있었거든. 미녀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지. 하지만 죽고 말면 말이지, 미녀고 뭐고 별로 관계가 없거든. 알몸이란 것도 관계 없고 그저 그런 송장이지. 내버려두면 썩어가지.-270쪽
이따금 그녀가 부러워졌다. 그녀가 지금 열세 살이라는게 말이다. 그녀의 눈에는 갖가지 일들 모두가 신선하게 비치리라. 음악이며 풍경이며 사람들이. 나 역시 옛날에는 그랬다. 내가 열세 살때, 세계는 훨씬 단순했다. 노력은 당연히 보답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말은 보증 되어야 하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295쪽
골프채가 하늘을 가르자, 흇 소리가 들렸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소리의 하나다. 비참하고 서글프게 들린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골프라는 스포츠를 이유도 없이 싫어하고 있기 때문이다.-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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