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가 귀족적인 사회였다는 설명이 그대로 이해된다. 평민도 귀족적이었고 천민도 귀족적이었다.

유교는 아래로 침투하면서 평민이나 노비에 대해서도 양반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 대한 문화적 지침을 제공하였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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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품은 마음속에 씨앗을 심는다


제주4.3 다큐멘터리 <돌들이 말할 때까지>를 보고 왔다. 좋은 영화의 첫 번째 조건은 마음속에서 계속 자라고 움직이는 것이다. 마치 마음에 씨앗을 심어 놓은 것처럼. 처음에는 심심하고 밋밋한 느낌이었다. 김경만 감독은 조사원들과 생존자 면담에 동행하면서 개입을 최소화했다. 거의 0에 수렴하는 개입이었다. 다섯 명의 할머니가 주인공이었다. 여성 영화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다큐를 보면서 생각이 계속 나아갔다. 뭔가 불필요한 것이 제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이 글은 바로 제거된 것에 대한 이야기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무엇이 제거되었나?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4.3 생존자 할머니 다섯 분의 이야기를 따라서 이어진다. 전주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기뻐했던 모습이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갇혀 있는 기간이 짧으면 석방 후 끌려가서 총살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안 갇힌 것보다 갇힌 것이 낫고, 짧게 갇히는 것보다 길게 갇히는 것이 낫다. 집보다 감옥이 더 안전한 역설을 제주 4.3이라는 사건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제주4.3에 대한 재현 또는 작품화에서 과잉된 감정과 목소리, 해석이 불편했다. 특히 남성 생존자의 증언을 듣다 보면 시국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학살의 불가피성 등이 개진될 때가 많다. 사건에 대한 해석은 자유이지만, 해석이 일어나도록 하는 게 아니라 이미 해석을 해버린 상황에서 제주4.3을 생각하게 된 순간은 마치 내 생각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그것을 요새말로 "답정너"라고 할 것이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답정너가 없다. 일체의 해석과 개입을 줄이고 생존자의 이야기에 충실하다. 그래서 사건이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의 이야기가 더 커져야 한다.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온전히 큰 목소리로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상황논리, 국제정세, 정치, 이념 등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삶에 집중한다는 것은 제주4.3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국제정세나 시국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람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하는 데 성공하면 시국도 정치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이야기가 튼튼한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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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는 바틀비 씨와 쌍둥이 같다. 잊을 수 없는 인물을 소설에서 만나면 꼭 인사를 해야겠다

그렇지만 아무도 좀머 씨를 봤다거나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2주일이 더 지난 다음 리들 아줌마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기로 했고, 그 후 몇 주일이 지난 다음 신문에 아저씨를 찾는 광고가 아무도 그 사람이 좀머 아저씨란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아저씨의 여권용 사진과 함께 나왔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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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유명한 중편소설 《변신》을 읽고 놀랐던 점은 그레고르 잠자가 그렇게 흉측한 벌레가 되었는데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말했다. "지금 나는 방에서 유령을 보았어요."

"마치 수프 속에서 머리카락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불쾌하게 말하시는군요."

「불행」


<나>는 유령을 본 것을 "수프 속에서 머리카락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하지만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유령이 나타나더라도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의 원인과 불행의 본성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할 여유도 가지고 있다. 불행 또는 유령의 잦은 방문이 《변신》과 연결되는 지점이 독특한데 《변신》의 경우는 카프카의 몸으로 방문했다. 집이 아니라!


불행의 방문이 잦았던 것처럼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익숙하다. 마치 오래되었만 언제나 적응이 안 되는 관계처럼. 흥미로운 건 불행이 아이의 모습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왜 아이의 모습이었을까? 그것도 소녀의 모습으로.


"나는 아이입니다. 왜 그렇게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을 쓰십니까?"

"그리 마음 상하진 마세요. 물론 당신은 아이입니다민 그렇게 어리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어른입니다. 만일 당신이 소녀였다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나와 한 방에 틀어박혀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불행」




소녀를 의인화한 「불행」은 '죽음'을 의인화한 그림책 『오래 슬퍼하지 마』를 생각나게 한





집과 몸은 연관이 깊다. 미디어 전문가 마셜 매클루언이 "집은 몸의 연장"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만의 사적 공간이자 안정적인 재생산의 장소인 집에 불청객이 방문한 것은 몸이 흉측한 괴물로 변신한 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집에 방문한 불행이라는 손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방문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불행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다. 불행이 '세게' 상처를 내는 것보다는 사소한 스크래치 정도로 넘어가 줬으면 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불행의 경우 운명의 서슬퍼런 명령이기에 불행도 어쩔 수 없겠지만, 불행 스스로가 결정할 있는 내용물이라면 협의나 흥정도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둘은 오랫동안 불행의 견적에 대해서 협의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의 본성은 나의 본성이며, 내가 원래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할진대 당신도 그렇게 할 도리밖에는 없을 텐데요."(<나>)

"그게 친절한 것입니까?"(불행)

"나는 전에 있었던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나>)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불행)

「불행」


암 투병중인 중년의 사나이가 도서관의 논어 읽기 모임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암세포가 있는 부분을 손으로 다독이면서 인사를 한다고 말했다. 나에게 찾아온 암이라는 불행과 매일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불행은 안 만나면 좋겠지만 누구도 불행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때로는 흥정을 해야 할 일도 있다. 불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경우 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행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 원인이 나와 연관돼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와 완전히 상관 없는 불행도 있을 테지만 내가 일으킨 날갯짓이 불행을 부른 경우가 더 많다.


카프카는 왜 어린 소녀를 불행의 전령으로 택했을까? 불행이 사뿐히 걸어 오기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서였을까? 불행이란 게 앞문을 닫으면 뒷문으로 들어오는 날렵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오래 슬퍼하지 마』의 죽음보다는 어리고 가벼워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 같다. 불행이 떠나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기분으로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조용히 산책을 하려고 했으나 외출은 하지 않고. 불행이 전혀 방문하지 않는다면, 불행이 나를 완전히 떠나버린다면. 카프카는 불행의 의미에 대해서 나에게 다시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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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카의 소설에서는 하급 공무원 또는 심부름꾼을 유심히 살퍄보게 된다. 그들이 카프카가 그리는 자본주의 최전선의 전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갈 수 없소.당신은 체포되었소."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도대체 이유가 뭐죠?"
K가 물었다. "우리는 그런 걸 말해줄 입장이 아니오. 방으로 돌아가기다리시오. 이제 소송 절차가 시작되었으니, 때가 되면 모든 걸 알게될 겁니다. 당신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충고해주는 것도 내 임무를 벗어나는 거요. 프란츠 말고는 듣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지만 말이오. 사실 저 친구도 규정에 위배되는 걸 알면서도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이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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