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북 친구인 한 독자분이 나의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베껴 적은 사진을 올려주셨다. 

A4로 두 장이나 베낄 게 있었다는 게 놀랍다. 



천천히 곱씹으며 책을 읽어 나가는 중..
일주일 정도 해보니 참 좋다..

간간히 필사에 내 생각을 적고
어디서나 할 수 있고..

지금 몇 가지 책을 한 번에 읽다보니
속도는 더디지만 효과는 좋다.

요즘 메모 독서법과 관련해서 많이 쓰고 있다. 

저자 열풍과 SNS의 대중화로 SNS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잠재 작가가 된 상황에서, 

쓰기보다는 읽기가 개선되어야만 '책 쓰기'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메모 독서법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실행을 하는 페친의 실천력을 보면서

나의 실천력을 되돌아봤다. 


일단 쓰기로 약속한 글들을 주말께 다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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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1-07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복이 많은 작가로군!
부럽다.^^

승주나무 2018-01-07 18:15   좋아요 0 | URL
인정, 어 인정^^
 

편협한 독서에 빠지지 않는 방법


책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눈과 귀를 열어두는 것입니다. 눈과 귀를 가리면 읽고 싶은 책만 읽게 되고, 그만큼 사고는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철학 서가'를 먼저 찾는 것은 제 오래된 습관입니다. 철학으로 생각이 맑아지면 좋겠지만, 생각이란 게 철학만 읽었다고 맑아지는 게 아니기에 썩 좋은 습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저를 내던지기도 합니다. 실용서 코너로 가거나 시집 코너 등을 두리번거리면서 '뜻 밖의 책'을 찾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좋은 친구의 조언을 듣는 게 가장 탁월합니다.


《서유기》는 임건순 작가의 추천으로 읽었습니다.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를 쓰면서 원래 《과학혁명의 구조》가 들어갔던 자리에 《서유기》를 대타로 넣을 수 있었던 까닭은 올해 부지런히 읽고 완독했기 때문입니다. 임건순 작가는 저와 거의 동년배로서 요즘 가장 핫한 동양철학자입니다. 《제자백가, 공동체를 말하다》, 《묵자, 공자를 딛고 일어선 천민 사상가》, 《오자, 손자를 넘어선 불패의 전략가》, 《순자, 절름발이 자라가 천 리를 간다》 등 지은 책 제목만 보더라도 개성이 확연합니다. 그는 '삼국지를 읽을 바에는 차라리 서유기를 읽으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서유기》를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2003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완역본이 출간되었더군요. 성실히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서유기 이야기를 집대성한 '오승은'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1. 민중의 편에 선 치열한 승리 《서유기》 오승은 정본


《서유기》는 7세기 초엽 당나라 스님 현장 법사가 불경을 가지러 천축으로 여행하였다는 역사절 사실을 토대로 중국인의 상상력을 과감하게 펼쳐낸 흥미진진한 대작입니다.  삼장 본인이 쓴 여행기 『대당서역시(大唐西域記)』와 그의 제자인 혜립과 언종이 쓴 『대당 자은사 삼장법사전(大唐 慈恩寺 三藏法師傳)』이 실제 기록입니다. 하지만 경을 얻기 위해 나라를 떠나 머나먼 여행을 한다는 테마는 당시 정치가 혼란스러웠던 시대에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2~13세기 원~명나라 초에는 희곡으로 창작되고 상연되어 크게 인기를 끌다가, 16세기 중엽 명나라 시절에 현존하는 100회본이 완성되었습니다. '중국판 파우스트'라고 할 만합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흩어진 이야기를 모아 엮었습니다. 민중을 교화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사대부들은 삼장법사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갖가지 이야기가 정본이 되기 위해 수백 년 동안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오늘날 독자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명나라의 하급관리 오승은의 《서유기》입니다.


오승은(1500? 1504?~1582)은 학관(學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뇌물을 쓰지 못해 번번이 과거에 낙방했습니다. 50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합격했고, 60여 세에 이르러서야 동남부 지방의 일개 현승(縣丞)이라는 미관말직을 그것도 2년만에 사직하고 자손도 없이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평생 뜻을 펴지 못하고 가난에 시달렸지만 어릴 적부터 총기가 있었고 학문적 열정을 놓지 않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시대의 참상을 풍자하고 비판할 것입니다. 당시 도교의 맹신자였던 세종은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도사들에게 이끌려 밤낮 종교 의식을 치르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환관들과 간신이 매관매직을 일삼고 부정부패와 가혹한 세금, 착취가 들끓을 수밖에 없었죠. 여기다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중앙정보부'를 연상시키는 동창과 서창, 금위위 같은 정보기관이 역모를 색출하고 유언비어를 단속한다는 명복으로 사방에 배치돼 전국의 도로가 공황상태일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서유기》에는 당대의 상황과 권력자들의 행태가 치밀하게 반영돼 있고 가공의 인물과 허구적 상상력으로 표현돼 있기에 저항문학의 고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서유기》 10권을 읽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특히 뒤로 갈수록 질리지 않았죠. 저는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에서 손오공을 아이로 놓고, 삼장법사를 부모로 놓고 그 성장에 주목했습니다. 특히 가족관계도 나이를 먹으며 성숙해지는 모습을 다뤘죠. '저팔계'의 역할이 문학작품에서도 가족관계에서도 무척 중요합니다. 가족관계에서는 아이를 괴롭히고 부모의 눈을 가리는 모든 현실적인 요소를 상징합니다. 《서유기》에서도 저팔계는 별 능력은 없지만 스승인 삼장법사를 속여서 손오공을 혼내게 하고 쫓아내게 하는 능력만큼은 역대급이었죠. 현실에서 저팔계 같은 인물이나 요소가 항상 있죠. 최근에 중학생들과 함께 읽어던 《동물농장》이 떠오릅니다. 소설보다 더 거짓말 같고,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가 막힌 사실을 환상의 세계에 담아내는 것이 제 꿈이 되었습니다. 아직 그 세계가 근사하게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서유기》를 더 열심히 읽으면서 다듬어가려고 합니다. 



2. 논어와 공자를 보는 눈을 확 바꿔준 최술


청소년을 위한 논어 책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자료를 이것저것 읽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인 평사리 김관호 편집주간 님이 뜻 밖의 전화를 주셨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참신한 논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는 마땅히 최술의 《수사고신록》과 《수사고신여록》을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최술이라는 작가 이름도, 책 이름도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청소년을 위한 좋은 논어책을 써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평사리 출판사는 인문고전을 맛깔스럽게 다듬어 대중들이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출판사입니다. 최근 출간된 《군주론》과 《루터의 두 얼굴》이 출판사의 특징을 잘 표현하는 듯합니다. 


인터넷서점에 '논어'만 검색해도 국내도서만 800건(인터넷 교보문고 기준)인데 거기다 한 권을 붙이겠다니 왠지 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최술의 말을 들으면 미래의 독자를 위한 논어책이 왜 쓰여져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학자들이란 오로지 장구나 익히며 과거 공부에만 매달릴 줄 알았지, 일찍이 의리를 탐구하고 글의 수미를 고찰하여 원류를 변증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의 작업을 보고 크게 놀라면서도 끝내 나의 말이 옳다고 여기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 《수사고신여록》


최술은 공자의 전기를 철저히 고증해 《수사고신록》을 썼고, 공자의 제자들과 공자의 진실을 잘 담아내려고 했던 현자들을 철저히 분류해 《수사고신여록》을 썼습니다. '수사(洙泗)'란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 곡부 북쪽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라는 두 강의 앞머리를 딴 글자로, 공자는 이 두 강 사이에 학당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공자나 유가의 별칭으로 '수사'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최술은 논어에 관여했던 당대의 석학들을 조목조목 비판합니다. 논어의 주석가를 꼼꼼히 보지는 않았지만, 제게도 익숙한 이름들이 최술의 도마 위에서 사정없이 비판의 칼날을 받고 있었습니다. 최술에 따르면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는 동한(東漢) 시절 '장우(張禹)'가 엮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생들 사이에서 장우의 명성은 절대적이어서 "《논어》를 배우려면 장우의 《논어》를 읽어라."라는 말까지 돌았다고 합니다. 반고가 저술한 《한서》「장우전」에도 "배우는 사람들이 거의 장우의 《논어》를 따르게 되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논어》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는 《논어》에 큰 영향을 미친 장우라는 사람은 어떤 인물일까요? 최우는 장우를 싸잡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최술에 따르면 장우는 학식이 비루하고 천박했습니다. 왕망(王莽 : 후한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건국해 황제 노릇을 하다가 살해당한 관료)에게 빌붙어서 부귀나 보전하려다가 끝내는 왕망의 찬탈과 시해에 동조했죠. 《논어》에는 반역자 공산불요와 필힐이 공자의 방문을 요청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최술은 장우 자신이 스스로를 향한 조롱을 벗어나려고 시도했을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현행본 《논어》를 엮은 장우에 대한 최술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멋대로 《논어》를 다시 엮음으로써 반드시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게 되고, 채택해서는 안 될 것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 - 《수사고신록》


사정이 이와 같은데도 최고의 학자라고 추앙받는 후한의 정현과 삼국시대의 하안은 장우의 논어에 주석을 보탰고 송나라 대학자 주희까지 거들었으니 왜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사실을 압도하고 말았습니다. 주자 이후의 학자들 역시 선배들의 명성에 압도돼 밝은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공자의 시대상황을 정확히 고찰하고 공자의 실체와 맥락을 정확히 파악한 후에 《논어》를 비판적으로 읽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사리출판사 김관호 주관님이 왜 전화를 주셨는지 그 깊은 뜻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최술이 신뢰한 책은 《논어》, 《춘추좌전》, 《맹자》였고, 사마천의 《사기》는 중요성은 인정하면서 엄밀하게 따져보고 비판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공자가어》와 《공총자》, 《한비자》 등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미래의 일꾼인 아이들에게 어떤 《논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아직도 묵묵부답인 상황입니다. 오승은처럼 평생 과거에 낙방하고 벼슬 기간이 짧았던 데다 귀한 아들과 어머니를 동시에 잃고 병으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쓸쓸하게 살다 간 최술과 그의 수제자 진리화. 그들이 평생을 매달린 까닭은 후세의 독자인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걷어내고 귀중한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우리의 시간도 소중하지만 미래의 인재인 아이들의 시간은 더욱 소중하기에 동양정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논어》를 제대로 읽고, 졸렬한 실력이지만 조그만 책을 써보려고 합니다. 오승은의 《서유기》를 추천해준 임건순 작가님, 최술의 《수사고신록》과 《수사고신여록》을 추천해준 김관호 주간님께 이 글을 빌려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여러분이 발견한 2017년의 작가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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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1-0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문화평론가 김갑수.ㅋㅋ
네가 발견한 거에 비하면 한참 격떨어지나...?ㅋㅋ

책은 어떻게 잘 나가고 있나?
올해 좋은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건강하고, 가정에 평안과 행복이 항상 깃들길 바래.
새해 복 많이 받아.^^

승주나무 2018-01-04 00:44   좋아요 0 | URL
네. 김갑수 찾아서 읽어볼게요.
격이 어딨어요. 제가 인문고전에 치우친 거죠. 책은 다양하게 읽어야 하잖아요.
누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 유럽 근대의 뿌리가 된 공자와 동양사상
황태연.김종록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막스 베버의 《유교와 도교》, H.G.크릴의 《공자, 인간과 신화》와 곁들여 읽으며 그 합을 추출해내야 정당한 동양과 정당한 서양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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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인 읽기가 다소 필요한 책이다. 중국이 유럽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과연 이 책이 객관적인 자세로 동양과 서양 모두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klklk 님 100자 평


서양 우월주의자가 서양에 대해서 글을 써서 기분이 유쾌하지 않듯이, 이 책은 동양을 특히 중국을 우월한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 개운치 않습니다.

taekwon 님 100자평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책을 읽다가 잠시 중단했다. 인터넷서점을 검색해서 100자평을 보았는데, 내 생각과 맞는 평들이 있었다. 서양인들이 우리 문화나 철학에 대해서 뭐라고 하면 기분이 좋지는 않다. 막스 베버가 동양을 그렇게 비판할 때 반감이 들었다. 하지만 상대가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이며,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묵묵히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것은 동양인이 근거 없이 동양을 찬양하고, 서양에 대한 비교우위를 강조할 때다.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는 동서양 철학교류사의 대가인 황태연 교수의 <공자와 세계> 등을 재구성한 책이다. 동서양의 학문 발전에 공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고찰한 책이기에 이번에 청소년 공자 책을 쓰기 위한 목록에 넣고 열심히 읽고 있다. 하지만 감정적인 서술이 불편한 건 사실이다. 함께 독서목록에 넣고 분석했던 막스 베버의 <유교와 도교>, H.G.크릴의 <공자, 인간과 신화>를 아울러 보면서 그 합을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읽어야 동서양이 관점을 객관적으로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공자를 읽을 때는 첫째도 비판적으로 읽고, 둘째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인류에 큰 획을 남긴 위대한 인물인 만큼 지뢰도 엄청나게 많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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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언 - 산업혁명기, 협동의 공동체를 건설한 사회혁신가
G.D.H. 콜 지음, 홍기빈 옮김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KPIA)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공자가 사회 혁신가라고?


로버트 오언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위대한 사회 혁신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산업혁명이 영국을 휩쓸어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공장의 부품으로 전락할 때 사회를 발견하고 협동의 원리라는 소중한 전통을 남겼다. 협동조합으로 질 좋은 생필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할 수 있었고, 아동교육과 보육, 성인교육과 각종 대중교육시스템은 혁신의 알맹이였다. 노동자들에게 질 높은 위생과 교육, 생필품이 제공되니 자신감을 찾은 그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나아가 정치적 권리를 위한 폭넓은 단결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공자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가 '유교 문화의 잔재'라는 말을 할 때 연상되는 인물은 공자다. '공자님 말씀'이라는 비유 역시 입바른 소리만 하는 고리타분한 이미지다. 그런데 공자에게 '혁신가'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영 어울리지 않은 느낌도 들 것이다. 공자는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높은 자리에 올라갔던 것도 아니고, 뜻을 얻었던 적도 없다. 평생 견제와 배척 속에 살면서 정치적으로 이뤄놓은 것은 거의 없이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그에게 '혁신가'라니? 공자 연구의 고전으로 꼽히는 H.G.크릴의 《공자, 인간과 신화》에는 비교적 담담하게 기록돼 있다. 



그의 생애에는 별로 극적인 요소가 없었다. 클라이막스도 순교도 없었으며, 그의 주요 포부 중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실패자로 여긴 것도 분명하지만,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 《공자, 인간과 신화》


사정이 이와 같다면 공자가 동양인을 대표하듯 떠받들여지는 것은 그저 신화에 불과한 것인가? 공자 스스로가 기여한 것은 없을까? 공자에 관심 갖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떠오를 의문을 나도 가졌다. 어떤 분야의 원조를 ㅣ신격화하는 동양 특유의 훈고학적 전통이 있고, 공자 역시 그렇게 포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공자 스스로 이뤄낸 부분도 분명하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내가 로버트 오언과 공자의 '혁신적'인 공통점을 찾아내려고 한 까닭은 위대한 혁신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공자와 로버트 오언의 공통점


첫 번째 공통점은 '교육'이다. 두 사람 모두 교육에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과 정력을 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쏟은 노력은 혁신의 혁신을 거듭하는 뿌리가 되었다. 그들이 거둔 혁신은 대개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먼저 공자의 교육을 받은 제자들이 이뤄낸 것부터 살펴보자. 

공자는 무혈혁명을 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왕위를 세스반 군주로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빼앗아 공적을 기준으로 선발된 대신들에게 그것을 부여하고, 정부의 목적을 소수의 권력강화에서 전체 백성의 행복과 복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이지적인 확신만으로는 혁명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생애를 바친 주의주장에 대한 참된 정열을 제자들에게 불붙이려고 노력하였는데, 이 점에서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 '도道의 기사단'은 (아더 웨일리의 적절한 표현을 빌자면) 후세 기독교 기사도에서 발견되는 것 못지 않게 헌신적인 정신으로 충만하였다. - H.G.크릴의 같은 책


오언의 경우는 뜻밖의 추종자들에게 복음 수준의 영향력을 끼쳤다. 

이렇게 실패로 끝난 공동체 건설의 노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노동계급 사이에 오언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었다는 점이었다. 영국을 떠나기 전에 오언이 주로 직접 대화를 트고자 했던 대상은 부유하고 영향력이 큰 이들이었지만, 이미 그때부터 그의 핵심 학설들은 당시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던 도시 노동자 계급에 훨씬 친화적이었고 이들을 풍부한 토양으로 삼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특히 좀 더 젊은 세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오언주의가 희망의 복음으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고, 바람직한 이상뿐만 아니라 경제를 건설할 정책의 핵심 요소들까지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 G.D.H.콜 《로버트 오언》


이미 위의 인용문에서도 나타나듯 오언은 급진주의와 정치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10시간 노동제 운동에 헌신하였지만(말년에는 8시간 노동제를 옹호한다) 국회의원, 기업가, 종교 지도자를 만나 설득하는 데 집중했다. 오언의 혼을 담은 '공장법 입법'은 누더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당시 영국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반향을 얻으며 통과되었다. 공장에서 고용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은 10세가 아니라 9세로 낮아졌고, 노동 시간 제한은 10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이었으며 식사시간을 포함할 경우는 13시간 반이었다. 하지만 16세 이상의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 규제가 없었고 어떤 종류의 감독 조항도 없었다. 강제성의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벌금은 두 배로 늘었지만, 법령을 집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사실상 무의미했다. 오언조차도 이 법은 자기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한국에서 김영란법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보면 오언의 공장법 처리 과정이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오언이 추진한 공장법은 오늘날까지도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법은 보통의 시장에서 채용한 노동의 조건에 대해서도 국가가 규제를 가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확립했으니까. 



오언과 공자는 비주류에 관심이 없었고 사회의 주류를 설득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공자는 민중의 편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로버트 오언 역시 노동자에 관심이 없었고 정치 투쟁은 더더욱 싫어했다. 로버트 오언은 국회의원, 종교지도자, 기업가들을 설득해서 노동법을 통과시키려 애썼다. 당연히 예상되는 결론이지만 권력자들은 처음에는 오언의 말에 관심을 표했지만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관심을 가진 까닭은 오언이라는 지렛대를 이용해 노동자 계급과 대다수의 하층민들에게 이미지 광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언이 종교를 비난하고 사회적 책임의 부담을 늘리므로 오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공장법 추진 결과를 부자와 권력자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마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과정을 지켜본 노동자, 젊은이, 하층민 등은 오언의 생각은 부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필요하다는 걸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공자의 언행이 담긴 《논어》를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귀족과 관리를 위한 책이다. 노동자나 서민, 백성을 위한 말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공자에게 백성은 '타자'에 불과했다. 대화의 대상은 철저히 귀족층으로 제한되었다. 심지어 "여자와 하인들은 잘 해주면 기어오르려고 하고, 거리를 두면 원망하는 족속들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나지 않는가? 고대 세계의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공자 철학의 목표는 백성이었다. 백성을 정치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은 대신 모든 책임을 지도자에게 돌렸다. 군주가 선량하고 유능하다면 백성을 처벌하지 않아도 되며, 흉년에 백성 세금을 늘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며, 백성에게 군사 교육과 기본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백성을 현금인출기 정도로 생각하던 귀족들에게 백성 자체가 국가의 존립 이유이며 국가 운영의 목적이라는 공자의 주장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강조할 만한 점은 둘 다 '도덕 개혁가'였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심성을 잘 다스려 사회 변혁을 이룬다는 주장은 한가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편이었다. 로버트 오언은 당시 권력자들의 선한 심성을 자극하려고 무척이나 애썼고, 공장 노동자들이 정직하게 노동하고 전 생애에 걸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서 시민의 심성을 가질 수 있도록 애썼다. 공자 역시 국민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모든 사람에게 일정한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는 주장과 패기 있는 평민을 교육받은 '군자'로 만들려고 노력한 것은 결국 세습적인 귀족질서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귀족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제기한 파괴적인 이론에 의해 수세에 몰리고 나서야 명확한 정치 철학을 발전시켰다. 당대의 정치 문화가 합리적인 수준으로 높아지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가한 것은 공자의 공적이다. 


로버트 오언과 공자를 사회 혁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중요한 까닭은 앞으로 사회를 혁신하려고 할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급격한 것을 싫어한다. 적극적인 정치 참여보다는 어떤 권리 주체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대중을 지배하는 자들 역시 급진적인 사람들과는 대화 자체를 거부한다. 이 두 계층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젠틀하고 합리적인 캐릭터가 필요하다. 오언과 공자 같은 캐릭터 말이다. 나는 이들이 '뜻 밖의 혁신'을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역동적으로 변한다고 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인간적인 덕목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시대에 휘말리지 않고 인간의 가치를 지키는 방법이다. 스스로 성과를 내기 위해서 혼신을 기울이기보다는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혁신의 기회를 넘겨준 것은 내가 배우고 싶은 점이다. 사회 혁신가들이 빠지기 쉬운 가장 위험한 함정이자 유혹이 자기 세대에 이루려는 욕심이 아닐까? 진정한 혁신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키우고 스스로 거름이 되는 사람이야말로 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로버트 오언과 공자는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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