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6] 가족끼리 눈치보게 하는 일은 없어야지요


아이들이 밤에 자기 전에 하는 일은 우유 마시고, 양치질하고, 화장실 가는 일입니다. 저녁에 밖에서 우유를 마시고 와도 자기 전에 꼭 우유를 달라고 합니다. 우유 먹을 배가 없기 때문에 몇 모금 마시다가 남깁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자동기계'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은 '반자동 기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예전부터 해왔거든요. 철학자 스피노자는 <에티카>라는 책을 쓰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마치 삼각형이나 사각형처럼 다루겠다고 선언합니다. 인문학을 볼 때 무서운 것은 가족을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선의가 있는 모습으로만 보지 않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처럼도 본다는 점입니다. 가족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누군가요? ‘엄마’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집단에서든 가장 힘이 센 자, 또는 왕을 중심으로 일상생활의 질서가 정해집니다. 아이들은 힘이 센 엄마에게 매달리고, 남편은 아내의 눈치를 봅니다. 이 글은 가족 중에서 가장 힘이 센 분을 위해서 썼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권력자가 부러워 보이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권력자는 피곤합니다. 견제를 많이 받아 시달리는 일이 많고, 견제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두들 자기 눈과 입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은 참 피곤한 일입니다. 중국사에서 수많은 시해 사건들을 보면 절대권력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조선시대 역시 왕에게 지적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부서도 있을 정도로 왕들의 일상은 고단했습니다. 정말 권력을 잘 쓰는 사람들은 권력의 중심에서 조금 비켜 서 있습니다. 스파르타의 입법가 리쿠르고스는 공화국을 세운 후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여 정치적 권력을 분산시켰습니다. 리쿠르고스에게 권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 후세의 스파르타 사람들은 독재정치가 될 요인이 아직도 강력하고 우세하게 남아 있다고 보고 군주의 폭력과 분노를 제어하기 위해서 왕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이 중에서 테오폼푸스 왕이 남긴 말이 유명합니다. 왕비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합법적인 권력’을 자식들에게는 더 적게 물려준다고 왕을 힐난하자 테오폼푸스 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더 적어진 것이 아니오. 왕의 권력은 더욱 커진 것이오. 왜냐하면 이 권력이 더욱 오래갈 것이기 때문이라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영웅전>, '리쿠르고스 편'

왕의 절대적인 권력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축소한 덕분에 스파르타의 왕들은 적들의 시기나 그로 인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반면 스파르타의 이웃 국가인 아르고스나 메세나의 왕들은 자신들의 왕권을 너무나 철저하게 고수하며, 대중들의 요구에 조금도 굽히지 않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사람은 단 두 사람만 모여도 권력관계가 생깁니다. 가족에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리는 없습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절대 권력자의 복종’을 강조합니다. 절대 권력자 역시 복종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절대 권력자가 복종하는 대상이 없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폐해를 살펴볼까요?

“법조문에 따르면 당연히 유죄입니다만, 폐하께서 현명하게 헤아려 살펴 주십시오.”
- 사마천, <사기열전>, ‘혹리열전’

고대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형법을 담당하는 관리가 사형이나 최고형을 내리기 전에 황제에게 허락을 받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예전에 교수형을 처할 때 대통령 결재를 맡거나, 미국에서 사형을 처하기 전에 주지사의 사인을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마천이 살던 시대에는 가혹한 관리들이 많이 있었는데, 황제의 눈치를 보면서 법조문을 고무줄처럼 바꾸는 폐해가 많았습니다. 법을 엄밀하게 집행하지 못한 관리의 태도도 잘못이지만, 애초에 이런 구조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절대권력자인 황제의 잘못입니다. 집안의 권력자, 예컨대 ‘엄마’가 권력자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거나 아이들을 혼낼 때 엄마가 일일이 판단을 합니다. 하지만 엄마도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이렇게, 저런 경우는 저렇게 판단하기 쉽습니다. 엄마의 판단이 일관되지 않으면 판단에 영향을 받는 가족이나 아이들은 예측을 하기가 참으로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정말 피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엄마 역시 복종하는 원칙이 있다면 엄마의 눈치를 보는 일은 사라집니다. 

제가 알고 있는 노부부는 수십 년 동안 자식을 기르면서 두 가지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처 번째 원칙은 “아이가 잘못을 할 경우 아이의 해명을 들어보고 나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아이가 큰 잘못을 했을 때는 혼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큰 잘못을 하는 순간 아이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부의 자제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가지 원칙 이야기를 했더니 “어릴 적에 잘못을 할 때 항상 이야기를 하게 해서 피곤하기도 했지만 내 마음을 설명할 수 있었서 좋았습니다.”라고 답하더군요. 원칙이 비교적 잘 지켜진 것입니다. 원칙의 생명은 집행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지키려고 해야만 원칙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원칙이 깨지면 잘못을 인정하고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과정을 통해서 빛이 날 수 있습니다. 
원칙은 ‘명분’과 같습니다. 명분이란 어떤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마땅한 것을 말합니다. 정치 역시 ‘명분’과 같습니다. 권력-원칙-명분의 관계가 깨지면 어떤 혼란이 찾아오는지 <맹자>에는 분명히 소개돼 있습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자, 왕이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천 리를 멀다고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셨으니, 장차 어떤 방법으로 나의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어찌 꼭 이익만을 말씀하십니까? 단지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내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하신다면, 대부들은 어떻게 내 고장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하며, 선비나 백성들도 어떻게 내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하여, 위아래에서 서로 이익추구를 하게 되면, 나라는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만 량의 병차(약 100만 대군)를 소유한 나라에서 그 나라의 국왕을 시해하는 사람은 반드시 천 량의 병차를 소유한 나라의 제후며, 천 량의 병차를 소유한 나라에서 그 왕을 시해하는 사람은 반드시 백 량의 병차를 소유한 고장의 대부입니다.”
- 맹자1-1

동양철학은 원천(源泉)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뜻이 잘 드러나지 않고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통하는 말이 많습니다. 예컨대 뙤약볕이 작렬하고 더워서 못 견딜 즈음에 ‘하지(夏至)’가 찾아옵니다. 여름이 끝에 도달해서 겨울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손과 발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맹추위 즈음에 ‘동지(冬至)’가 찾아옵니다. 아이가 아직 어린데 ‘권력관계’를 벌써부터 생각해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부모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두어 살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잘 지켜보십시오. 힘에 의한 위계질서가 보일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권력관계의 구조를 비켜갈 수 없습니다. 
결국 아이들에게 원칙과 명분을 가르치고 부모가 몸소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면 가족을 지배하는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민주주의는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 체제를 말합니다. 부모 역시 견제 받는다는 사실을 아이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차 크게 어떤 일을 하려는 임금은 반드시 소환하지 못하는 신하가 있습니다. 상의할 일이 있으면 그에게 찾아갑니다. 덕망을 존중하고 도의를 즐기기를 이와 같이 아니한다면, 그와 더불어 어떤 일을 하기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탕왕은 이윤에게 먼저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왕이 되었고, 제환공은 관중에게 배운 뒤에 신하로 삼았으므로 힘들이지 않고 패업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천하의 각 토지는 비슷하고 덕행도 비등한데, 서로 뛰어날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가르친 사람을 신하로 삼기 좋아하고,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사람을 신하로 삼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탕왕이 이윤에게, 환공이 관중에게도 감히 소환하지 못하였습니다. 
- 맹자4-2

그러면 이번에는 우리 가족을 지배하는 원칙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칙을 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부부가 서로 협의하는 경우가 있고, 시간을 두고 원칙을 만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원칙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리 가족은 아이들과 함께 세운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함부로 도와주지 않고, 아이가 반드시 도움을 청해야 도움을 준다는 원칙이 그것입니다. 막내 민서는 완력이 약하다 보니 차 문을 여는 게 서툽니다. 내가 차문을 열어주려고 했더니 민서가 화를 냅니다. 나는 힘 약한 아이도 스스로 하려고 한다는 걸 알고 그때부터는 함부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차 문 열기 힘들어?’ ‘도와줄까?’ 물어봅니다. 아이가 도와주라고 하면 그때 도움을 줍니다. 동의의 절차를 밟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렇다고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아이의 행동을 보면서 자주 물어보고 의향을 물어보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아이가 과자 봉지를 뜯는데 힘들어 하면 힘든지 물어보고 도와줄까 물어봅니다. 어떤 날은 아이가 힘들어도 스스로 끝까지 과자를 까려고 노력할 때도 있고, 어떤 날은 도와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날도 있습니다. 부모는 지레짐작하지 않고 질문을 하면 그만입니다. 이 원칙을 한동안 실천했더니 아이들이 먼저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아이들 역시 부모에게 도움을 청할 때는 '예쁘게' 말해야 합니다. '아빠 우유 줘' 대신 '아빠, 우유 주세요.'하고 예쁘게 말하는 원칙을 정해 놓았더니 따라하려고 노력합니다. 밖에 나가면 다른 어른들에게 부탁할 일이 많은데, 예쁘게 말하면 어른들이 대견해 하고 잘 챙겨주니 편안하니다. 
원칙을 정하되 자주 물어보는 것 역시 하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와 권력관계, 명분과 원칙은 어린 아이들의 생활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어릴수록 민주주의 감각을 키워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민주주의를 책을 통해서 배웠지만 이미 아이들은 민주주의 감각이 타고 났으니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부모 스스로 복종하는 원칙이 있다는 것은 가족생활의 든든한 보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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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5] 공자에게 배우는 사랑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부모 자신의 관념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부모님들과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질문입니다.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질문이죠. 한 어머니가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는 관념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남과 다를 바 없지만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때, 아이들의 소망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에 의해서 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한 어머니가 존경스러웠습니다. 어떤 부모든 자기만족을 위한 사랑을 인정하기 쉽지 않거든요. 우리의 교육체계와 사회적 분위기에서 아이들은 '통제'와 '교육'의 대상이지 '대화'의 상대자는 아닙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일종의 신분과 차별이 존재합니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가려져 있을 뿐이죠. 우리 아이들은 민법상 미성년자(未成年者)로 규정됩니다.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되어 통제의 대상이 됩니다. 부모님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아이의 의향을 물어보고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이 익숙하신가요?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에게 의향을 물어보지 않고 결정하기 때문에 원래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순응적인 아이가 되어 갑니다. 예전에 어린이를 위한 민주주의 특강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강연에 참석한 가족이 저자 선생님과 나눈 대화가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여기 오기 싫었는데요 엄마가 억지로 끌고 왔어요. 그러면 엄마는 독재를 하는 건가요?"(아이)
"본인이 원치 않겠지만, 본인을 위해서 좋은 거라면 '선의의 독재'는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엄마)
"역대의 모든 독재자들이 자신의 독재를 '선의의 독재'라고 불러 왔습니다."(강사)
"하하하!!"(청중)

아이가 공개 석상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는 것은 평소에 보기 어려운 장면이어서 신선했고, 부모님 역시 아이를 키우는 마음이 말로 명확하게 표현되어서 잊히지 않았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처럼 이 부모님도 마음속에 사랑이 맴도는 모습입니다. 사랑이란 마치 예술작품처럼 마음속에서 소중하게 빚어내고 몸 밖을 나가 상대에게 전달됩니다. 다행히도 전달할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돼 보냈던 사람에게 돌아오면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사랑'입니다. 아이와 이렇게 사랑하고 계신가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연애시절로 되돌아가 봅시다. 연애결혼을 한 엄마와 아빠는 결혼하기 전에 서로 사랑했던 사이입니다.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고, 엄마에게 아빠의 사랑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를 선택한 것 아닐까요? 그 결실이 바로 아이입니다. 그런데 연애할 때 했던 것처럼 아이한테 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아이와는 연애를 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아이도 사람이고, 아이에 대한 사랑이나 연인에 대한 사랑은 한핏줄입니다. 

나는 공자에게 두 가지 사랑법을 배웠습니다. 공자는 스승으로서 제자를 사랑하는 방법, 아버지로서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물론 당시 시대적 상황과 고정관념 때문에 군신관계처럼 설정돼 있지만, 진심과 본질만 걷어내서 보면 배울 만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집중하는 사랑'을 소개합니다. 

자로가 물었다. "들은 것은 곧 행해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형이 계시는데 어떻게 들은 것을 바로 행하겠느냐!"
염유가 물었다. "들은 것은 곧 행하여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들었으면 바로 그것을 행하여야지!"
공서화가 물었다. "유가 '들은 것은 곧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는 선생님께서 '부형이 계시다.'고 말씀하시고, 구가 '들은 것은 곧 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는 선생님께서 '들었으면 바로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어리둥절하여 감히 까닭을 묻고자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는 소극적이기 때문에 그를 나아가도록 해준 것이고, 유는 남보다 두 배나 적극적이기 때문에 그를 물러서도록 해준 것이다."
- <논어> 11-21

<논어>를 여러 번 읽으면서 공자와 제자의 문답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제자의 성향에 따라서 공자의 대답이 달라졌습니다. 즉, 공자의 대답 안에는 제자가 반영돼 있었습니다. 자로와 염유는 같은 질문을 했지만 공자는 정반대의 대답을 해줍니다. 스승인 공자는 제자들의 평소 언행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놓고 있다가 질문을 했을 때 맞춤형 답변을 해준 것입니다. 제자에 따라서 달라지는 공자의 답변 방식 때문에 공자를 '스승의 표상'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집중하는 사랑'은 아이를 둘 이상 키우는 부모님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에 아이에 맞게 사랑을 주는 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지만, 손가락들은 저마다 자신이 사랑을 덜 받는다고 생각하죠. 부모님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로 잰 듯 사랑을 나눌 수도 없고, 특히 마음이 가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자식 사랑의 셈법은 골치 아픈 문제입니다. 기계적으로 사랑을 나눠주려는 부모도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면 두 아이 모두 사랑을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공자가 제자를 사랑한 방식대로 한다면, 아이의 평소 성격이나 감정 상태에 맞게 아이를 사랑해주고 북돋아 주면 아이는 온전히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민준이는 감성적이고 자연 관찰을 좋아합니다. 민준이 손을 잡고 오솔길을 걸으면서 단풍나무나 솔방울을 만지기도 하고, 눈을 감고 새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날씨가 좋고 따뜻한 날은 가만히 앉아서 개미 구경도 합니다. 민서는 활동적이고 장난을 좋아합니다. "불룩불룩 뿡!" 하고 외치면서 엉덩이로 들이미는 장난을 칠 때도 있고, 헝겊으로 된 축구 골대를 펼쳐 놓고 던지기 놀이도 합니다. 민서가 화가 났을 때 손가락을 집개 모양으로 하고 "이만큼 화났어?" 하고 물어보면, 민서는 제 손가락을 양쪽으로 크게 늘립니다. "아!"하고 아픈 시늉을 하면 울던 민서가 까르르 하고 웃습니다. 아이들이 같이 있을 때는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를 찾아서 하기도 하지만, 아이와 둘이 있을 때 충분히 집중해서 놀아주면 대개 만족하고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아이들의 성향을 알고 있으면 아이들이 행동할 때 적절한 반응을 해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성격에 맞는 부모의 반응을 보면 아이들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공자의 제자들도 집중하는 사랑 때문에 스승을 마음 깊이 따랐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독특한 사랑법은 '수고롭게 하기'와 '존중하기'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이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논어> 14-8

아이를 수고롭게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아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려고 애쓰는 부모님이 많습니다. 이건 아이를 망치는 길입니다. 나는 요즘 아이들에게 집안일의 세계를 보여주는 일을 분주히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거나, 이불을 털거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보면 호기심이 생깁니다. 여러 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접근합니다. 빨래를 널고 있으면 자기도 널겠다고 하면 빨래 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무거운 빨래 대신 양말이나 속옷 등을 아래쪽에 널게 합니다. 아이들은 아빠 따라서 양말과 속옷을 탁탁 털어서 고사리 손으로 빨래걸이에 넙니다. 아이들에게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을 말해주기도 하고, 음식물쓰레기 버리러 갈 때는 함께 갈까 하고 물어보기도 합니다. 민준이는 매주 화요일 재활용 쓰레기를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화요일은 신경 써서 일찍 일어나려고 하고 아빠와 같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립니다. 종이 쓰레기 같은 무거운 쓰레기는 내가 들고, 민준이는 비닐 쓰레기 같은 가벼운 쓰레기를 가지고 갑니다. 이렇게 몇 번 하다 보면 민서도 따라 나섭니다. 남자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님은 특히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점점 가정의 권력이 엄마에게 넘어가고, 남녀의 성비율이 차이나면서 남자들은 점점 배우자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배우자를 구하더라도 사랑을 받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들었는데, 강사가 "여성들이여, '훈남' 찾지말고 가사분담해줄 남편을 찾으세요"라고 말하더라고요. 여성들은 능력 있고 잘 생기고 매력 넘치는 사람보다는 현실적으로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할 것입니다. 남자 아이들이 '집안일'에 경쟁력이 있다면 선택받을 확률이 더 높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가르쳐줄 때는 막무가내로 하지 않습니다. 공자의 방법을 응용했습니다. 자도 자식을 수고롭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켰는데, 아들과 나눈 대화를 소개합니다. 

공자께서 백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시경>의 <주남>과 <소남>을 연구한 적이 있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연구하지 않으면, 그는 마치 담벽을 마주 대하고 서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논어 17-10)

진항이 백어에게 물었다. "당신은 특이한 가르침을 들은 게 있겠지요?" 그가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일찍이 홀로 서 계실 때에 제가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지나가는데, '시를 배웠느냐?'하고 물으시더군요. '배우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말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물러나 시를 배웠지요. 
다른 날 또 홀로 서 계실 적에 제가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지나가는 데, '예를 공부했느냐?' 하고 물으시더군요.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하니, '예를 공부하지 않으면 남 앞에 설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물러나 예를 공부했지요. 들은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논어 16-13)

공자는 자식에게 시경과 예를 공부하게 하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밝힐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챙기지 않습니다. 공자의 자식이 생각해보고 옳다고 생각하면 공부를 하는 식입니다. 어찌 보면 권위적인 가장인 것 같지만, 자식과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이 방법을 따라서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강제로 시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궁금해 할 때까지 충분히 기다리고, 호기심을 가지면 그때부터 방법을 알려줍니다. 재활용 쓰레기 버리러 갈 때도 함께 가자고 하기 전에 쓰레기 버리는 시간을 말해주고, 쓰레기 버리러 간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입니다. 아이들이 충분히 생각하고 나면 먼저 함께 가자고 제안합니다. 민준이는 요새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보다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를 좋아합니다. 음식물 쓰레기 버릴 때는 카드를 올려놓고 버튼을 누르는 방식인데, 이 방법이 재밌나봐요. 아이들은 부모가 집안일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직접 보고, 하는 방법을 듣고, 재미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결국 아이들이 '수고'를 자처하게 만드는 셈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수고롭게 하는 방법은 이와 좀 다를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이 학원 저 학원 보내면서 시시각각 챙겨줍니다. 심한 경우는 부모님이 마치 매니저처럼 챙기기도 합니다. 대치동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부모가 대학의 입시요강과 전형을 꿰뚫고 아이가 해야 할 일들까지 도맡아서 아이는 그저 공부만 했습니다. 아이는 점점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동양의 방식을 응용하면 좋겠습니다. 아이에게 학원에 보내기 전에 아이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떤 과목이 부족하고 학원에 보내야 할 것이 있는지 이야기 나누고 아이가 자기 학원 시간을 선택하도록 합니다. 아이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하기 마련입니다. 대학을 보낼 때도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비전이나 큰 줄기를 조언해줄 뿐, 입시 요강을 찾거나 자기소개서 등을 쓰는 일은 아이가 도맡도록 해야 합니다. 입시 요강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일부를 도와줄 수는 있지만 부모가 주도해서 하는 것은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수고로운 일을 부모가 모두 해버리면 세상 물정 몰라서 점점 남들에게 뒤쳐져서 결국에는 부모를 원망하는 지경이 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집중하는 사랑과 존중하는 사랑을 익힐 수 있다면 부모와 아이의 마음이 서로 편안해질 것입니다. '돌아오는 사랑'을 부모도 알고 아이도 안다면, 그 가족은 핏줄처럼 따뜻한 사랑이 항상 흐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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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4] 동양이 부정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아이가 가장 예쁠 때가 언제인지 부모님들께 물어보면 ‘잠 잘 때’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새근새근 천사같이 잘도 자지요.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압니다. 천사들이 눈을 뜨면 울고불고 싸우고 부모님 속을 썩입니다. 아이들만 속을 썩이면 다행이죠. 나이가 늘 때마다 어린이집, 유치원에 나가면서 아이에게도 '사회'라는 것이 생기면 부모의 애간장은 더욱 탑니다. 민준이가 어린이집 다닐 때 한 살 많은 형에게 맞고 온 일이 있었습니다. 참 속상했습니다. 부모 마음이라 그런지 선생님에게 항의하고, 그 형의 집에 가서 부모와 결판을 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더군요. 내 마음을 일시정지시키고 잠시 생각해 봤더니 그것이 아이들의 사회이고, 소중한 경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민준이와 그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왜 민준이를 괴롭히게 되었는지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부모들은 자신이 겪는 부정적인 상황을 인내하고 잘 견디지만 자기 아이만큼은 그런 상황을 안 만나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기라도 하듯 부정적인 상황이 될 여지를 원천적으로 없애거나, 불안한 상황만 되어도 빨리 반응하고 진압을 해버립니다. 하지만 아이가 만나는 부정적인 상황을 부모가 제거해 버리는 순간 아이는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된다는 것 아시나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정적인 상황을 피하고 싶습니다. 일단 눈에 안 보였으면 하는 마음에 빨리 상황을 무마하려고 하죠. '청양고추' 같은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매운 음식을 먹으면 우리는 냉수나 얼음물을 마십니다. 하지만 얼음물은 혀의 감각을 잠시 마비시킬 뿐 다시 매운 기운에 시달립니다. 매운 기운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방법은 따뜻한 물을 마시거나, 침이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따뜻한 물이나 침이 천천히 매운 기운을 사그러들게 하면 더 이상 맵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매운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서경>이라는 경서에는 '만약에 약이 눈을 캄캄하고 어지럽게 하지 아니하면, 그 병은 낫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의사가 환자에게 투약하고 나서 치유되어 가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일시적인 증세가 유발되었다가 결과적으로 완쾌되는 것을 '명현'(瞑眩)현상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부정적인 상황과 시련을 묵묵히 견뎌내고 나서 성장하는 모습을 시처럼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한 해의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새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 논어9-27

부정적인 상황은 마치 예방접종 주사와 같습니다. 미리 작은 균을 경험해 봄으로써 항체를 키우는 과정과 같습니다. 아이가 부정적인 상황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찬찬히 살펴보면 차분하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는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대응을 할 것입니다. 민준이를 괴롭혔던 한 살 많은 형은 어린이집에 같이 다니는 사촌누나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사촌누나가 민준이만 예뻐 해서 질투가 난 거였습니다. 만약 부모가 부정적인 상황에서 차분히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정을 모르고 지나갈 뻔했습니다. 손쉬운 선택은 종종 문제를 해결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심리학자들도 역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A.매슬로 역시 “모든 악덕에는 저마다 선한 면이 있는데, 두려움이나 분노 등의 원인을 밝혀 나가다 보면 그런 선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양에서는 부정적인 상황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합니다. 

진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지고 따르던 제자들이 병이 나서 모두 일어나지 못하였다. 자로가 화가 나서 찾아뵙고 말씀드렸다. "군자도 궁해질 때가 있는 겁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라야 궁함을 견딜 수 있다. 소인은 궁해지면 곧 함부로 행동하지."
- 논어15-1

학창시절 열심히 만들었던 오답노트를 생각해 보세요. 틀렸던 문제를 복기하고 반복해서 틀리지 않기 위해서 틀린 이유를 살펴봅니다. 인생에도 오답노트를 만들 수 있는데, 부정적인 상황을 피하면 오답노트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잘 배울수록 군자에 가까워지고, 부정적인 방법을 피할수록 소인처럼 함부로 행동하다가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입장이나 나의 감정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릅니다. 해마다 태풍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보지만 태풍이 지구의 온도를 조절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태풍은 부정적인 건가요, 긍정적인 건가요? 철학자 스피노자도 편협한 차원에서 좋고 나쁨의 가치를 판단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선과 악 그 자체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단지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우리가 사물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형성되는 개념일 뿐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고 악일 수 있으며 또한 양자와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엑는 좋고, 슬픈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 스피노자, <에티카>(서광사), 210쪽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점을 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해 예견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양식일 뿐 미래의 상황에 대응하는 지혜를 담은 책입니다. 주역 점을 치면 어떤 경우도 완전히 안 좋은 것이 없고 완전히 좋은 것도 없습니다. 삶의 운 바로 옆에는 죽음의 운이 붙어 있어요. 살자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자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죠. 서당 다닐 때 훈장님은 “주역은 어떤 극한 순간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고, 그 방법을 논한 책”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역의 지혜에 따르면 그 상황을 피하지 말고 일단은 직시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마냥 피해야 할 상황이 아니고 마냥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고 다시 보면 쓸만하다는 거죠. 여기서 더 나아가 <맹자>는 부정적인 상황이 성장을 위한 거름이라고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이 사람에게 장차 큰 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수고로이 하고, 그 신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어 보고, 나아가 그가 하는 일마다 어그러뜨리고 어지럽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고, 그가 할 수 없는 바(능력)을 북돋운다. 사람은 항상 잘못이 있은 뒤에 고칠 수 있고, 마음에 곤란을 받고, 생각이 막힌 뒤에 분발하여 일을 하고, 얼굴색에 나타나고, 말소리로 나타난 뒤에 이해를 한다. 
안으로는 법도와 전통이 있는 세습 신하나 진중한 선비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이나 우환이 없는 임금의 나라가 항상 멸망한다. 그런 뒤에야, 우환 속에서는 생존하고, 안락 속에서 비로소 사멸한다는 것을 안다."
- 맹자 12-15

동양철학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보여주는 태도를 종합하면 무척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부정적인 상황을 만나면 피하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반응입니다. 수동적으로 반응하다 보면 매번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점점 문제는 복잡해져서 피할 수도 없고, 대처할 능력도 기르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아이들이 부정적인 상황을 만난 것은 엉겅퀴를 만지는 일과 같습니다. 살살 도망치려고 하면 상처를 내고, 손을 힘을 주고 꽉 쥐면 괜찮습니다. 대한민국은 약자들이 살아가기에는 정말 가혹한 곳입니다. 강한 자들은 대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잔인하게 괴롭히지만, 무서운 상황에서도 피하지 않고 주시하고 맞서면 점점 꼬랑지를 내립니다. 어린이집에 가거나 학교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사귈 때부터 이미 이와 같은 논리가 작동합니다. 무엇에든 맞서고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부정적인 상황을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우라는 게 동양철학이 하고 싶은 말입니다. 부정적인 상황만큼 훌륭한 스승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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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3] 남들과 같아지려고 하지 마세요


"주변에서 제가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별나다고 얘기를 한다. 주위 엄마들한테 질시 아닌 질시를 많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제 고집대로 가니까. 그러면서도 늘 겁이 났던 게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혹시 내가 미처 포착 못해서 사장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한 어머니가 자식 키우는 어려움을 호소하셨습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육아를 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입니다. 일단 주변 어머니 커뮤니티와 고립되기 쉽습니다.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지고 육아를 하시는 부모님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애로사항입니다. "너, 미쳤어?" "아이 망치려고 작정했구나!"하는 주변의 힐난을 들어봤다는 부모님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태권도, 피아노, 미술, 영어 등 남들 시키는 사교육을 다 시키려고 하는 분들 중에서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별다른 대안도 잘 안 보입니다. 그런데 "멀리 내다보는 생각이 없다면, 반드시 멀지않아 근심이 있게 될 것"(논어15-11)이라는 공자의 말처럼 아이를 그렇게 키웠을 때 어떤 결과가 찾아올 것인지 미리 생각해본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치동 일대에서 논술 강사를 하면서 아이들의 논술문을 수 천장 첨삭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논술문은 대부분 같았습니다. 글이란 것은 글 쓴 사람의 인격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들어가갸 하는데, 그런 것들이 안 보이는 천편일률적인 논술문을 보면서 나는 무척 슬펐습니다. 그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매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고, 많은 돈을 썼죠. 그래서 내신성적도 좋고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고사 성적도 무척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력은 참으로 우수하지만 '그 이후'가 안 보였습니다. 자기 마음을 온전히 글로 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 세계의 교육시스템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표입니다. 교육열의가 유난히 뜨거운 대한민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기의 글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은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요? 이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대학 교수들도 아이들이 쓴 리포트를 받고는 한숨을 내쉽니다. 기본적인 표현과 문법조차 어긋나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죠. 한 갤러리를 운영하시는 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은 서울의 대학에서 가끔 강의를 한다고 합니다. 글쓰기나 발표하기, 자기 생각 표현하기 등 할 줄 아는 학생들이 거의 없어서 무척 답답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은 아이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부모님들이 들인 열정과 시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못 배운 아이'가 되어버리는 현실이 기막히지 않나요? 지금 우리 아이가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부모님들과 학교, 학원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련의 모든 행동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같아지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다르게 태어난 아이들이 같아지려고 애쓰면 자기의 글을 점점 쓸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 '같아지려는 노력'은 수천 년 전부터 동양에서 전해내려온 문화와 전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양의 문화는 이단을 배척하는 문화, 즉 '같아지려는 노력'을 해왔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이단을 멸시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로막는 동양의 폐쇄적인 문화에서도 불구하고 동양문화를 빛냈던 인물들은 명확한 개성을 뽐내고 있습니다. 자부심과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기 때문이죠. 맹자의 자신감 넘치는 한마디를 들어볼까요?

맹자가 말했다. "모든 사물의 이치는 나에게 다 갖추어져 있다. 자신을 반성하여 성실하면, 즐거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 <맹자> 13-4

이래서 '미워할 수 없는 동양'인가 봅니다. 다양한 것을 배척하면서도 자신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너와 나, 국가와 가정을 동일시하면서도 진실의 일면을 보여주고, 모순과 역설 투성이면서도 그 안에서 묘한 진리의 빛을 비춰주기 때문입니다. 이 오묘한 동양의 빛에서 걸러낸 나의 두 영웅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두 사람은 동양에서도 상당히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맹자와 자공! 두 인물은 이른바 '정통'을 잇고 있지만 정통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두 인물을 비판하는 동양문화와 두 인물의 활약상을 보면서 나는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주자가 쓴 <맹자집주>의 서문에는 '맹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수록돼 있습니다. 대표적인 비판은 '영기'(英氣)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뛰어난 기상과 재기(才氣)'라고 하지만, '나서기 좋아하는 성정'으로 해석됩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겸손이 몸에 배어 있는 이상적인 선비의 모습과는 달리 격정적이고 거침 없이 말을 하고 물불 가리지 않는 맹자의 모습에 대해서 후세 선비들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자가 쓴 '맹자집주'에 등장하는 여러 주석가들의 주석 안에는 맹자를 "영기는 일이 성사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평가합니다. 맹자의 영기가 드러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역성혁명(易姓革命)'입니다.

제선왕이 재상에 관하여 물으니 맹자가 대답했다. 맹자가 물었다. "왕께서는 무슨 재상을 물으십니까?" 제선왕이 말했다. "재상이 다른가요?" "같지 않습니다. (같은 성의) 귀족과 친척의 재상도 있고, 성(姓)이 다른 재상도 있습니다." "청컨대, 동성 귀족 친척의 재상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임금이 큰 잘못이 있으면 간(諫)하고, 이를 반복하여도 듣지 않으면 (임금의) 자리를 바꿉니다." 
왕은 갑자기 얼굴색이 변했다. 
"왕께서는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왕이 신에게 물어서, 신이 감히 올바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의 얼굴색이 안정된 뒤에, 다른 성의 재상에 관하여 물었다. 
"임금이 잘못이 있으면 간하고, 이를 반복하여도 듣지 않으면, 떠나갑니다."
- <맹자> 10-9
 
맹자는 임금 자리는 백성들이 만들어준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백성의 뜻을 거스르면 왕의 재산도 권력도 무의미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왕들이 볼 때 무척 위험한 사상이죠. 그래서 <맹자> 책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금서로 지정돼 유폐되어 있다가 송나라 시대 주희에 의해서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무제 임금은 맹자를 싫어해서 방에 맹자 초상화를 걸어 놓고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맹자'의 별명은 '이빨'인데, 그만큼 거침 없이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것이 바로 '맹자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양철학을 읽는 게 즐거운 까닭은 맹자는 맹자답게 살았고, 공자는 공자답게 살았고, 장자는 장자답게 살았던 모습을 보면 나도 '나답게'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논쟁적인 인물은 '자공'(子貢)입니다. 자공은 요새 말로 '믿고 쓰는' 공자의 제자이자 파트너입니다. 자공이 자금을 대면 공자는 유세를 하고, 공자의 브랜드는 자공의 사업에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관계는 스승과 제자입니다. 자공은 말이 많은 것과 투기, 요새말로 하면 '제태크의 달인'이었는데 그것이 주로 공자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논어>에도 공자가 자공을 비판한 대목이 나오는데 "사(賜 : 자공의 이름)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고 물건을 사재어 투기를 하였는데, 그의 예측은 여러 번 적중하였다."(논어11-18)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중에서도 무척 논란이 되는 편이 '화식열전'인데, '화식(貨殖)'이라는 말은 바로 논어의 이 구절을 붙인 것입니다. 자공에 대한 일화는 사마천 <사기열전> 중 '중니제자열전'에 수록돼 있는데, 전체 글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중국사에서 비중이 큰 인물로 다뤄집니다. 사마천은 "자공은 말재주가 뛰어났지만, 공자는 항상 이 점을 꾸짖어 경계시켰다."(중니제자열전)고 기록했습니다. 제나라가 공자의 조국인 노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공자가 급히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자로, 자장, 자석이 나서기를 청했지만 공자는 거절했습니다. 자공이 나서기를 청하자 공자는 자공을 '노나라 구하기 대표선수'로 선출했습니다. 자공의 활약은 <오월춘추> 등에 기록돼 있는데 사마천의 평가를 보면 얼마나 큰 활약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공은 한 번 나서서 노나라를 보존시키고 제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며,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를 강국이 되게 하였으며, 월나라를 제후국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다. 즉 자공이 한 번 뛰어다니더니 각국의 형세에 균열이 생겨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에 각기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사기열전, 중니제자열전)
 
공자와 맹자가 활약했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사적을 기록한 <국어>와 <전국책>에는 공자와 맹자 언급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가는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자공만큼은 어느 유세가 못지 않게 현실감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자공에게는 주홍글씨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맹자와 자공을 무척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욕하는 자신의 성격을 승화시켜서 확고한 족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맹자는 거침 없이 말하는 성격을 학문적으로 승화시켜 <맹자>를 읽을 때는 사람을 시원하게 만듭니다. 자공은 이상적이고 유약해 보이는 유학의 전혀 다른 면을 드러내 신선함을 더해 주는 인물입니다. 공자의 정신을 받드는 사람도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격변의 시대에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인물입니다.  내가 이 두 인물을 사랑하는 까닭은 나 역시 맹자와 자공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나도 영기가 있고 말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나설 때마다 부끄러웠고, 말을 하고 나서도 후회가 되었습니다. 나의 성격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기도 했지만, 그게 바로 '나'라는 생각이 미치자 나의 성격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서기 좋아하는 나의 성격은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동력이 되었고, 말이 많은 성격은 많은 부모님들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이렇게 글을 쓰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내 아이가 뭐 하나 잘 하는 것 없고, 행동 하나 하나가 맘에 안 든다면 아이와 함께 <치킨 마스크>(책읽는곰)를 읽어보세요. 자기가 그렇게 고치고 싶어하던 성격이 결국 자기를 지켜주는 무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성격이 있듯, 가족도 나름대로의 인생 스타일이 있습니다. 다른 가족과 같아지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남들이 헐뜯고 비판하는 성격이나 단점일수록 보듬어 주세요.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정성껏 닦아주다 보면 세상 하나밖에 없는 꽃이 자랄 테니까요.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이 나 다운 것이고, 나 다운 것이 인간적인 것입니다. 맹자와 자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자기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보여줬던 열정만큼은 위대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거나 글을 쓰게 해보면 아이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남들과 같아진다는 것은 '나'가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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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22] 아빠들을 위한 변명


한때 시민운동에 투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 동안 언론운동을 하는 동안 아내가 고생을 했고, 첫째 민준이가 태어났습니다. 사회운동을 통해서 현실을 바꾸고 싶은 열정이 뜨거웠지만 가정에서는 차가운 가장이었습니다. 그 즈음 아는 동생과 술 한잔 하면서 들었던 말이 내 인생의 중요한 반전이 되었습니다.

 

"형님은 치국평천하를 하세요. 저는 수신제가를 할게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뒤통수를 뭔가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래성 위에 집을 짓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동생을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대학>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구절인데, 광고에도 소개가 돼 많은 분들이 알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은 나와 너를 같이 보고, 나라와 가족을 같은 의미로 보는 습관이 있다고 했는데, 이 구절 역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대학>은 각각의 개념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서술돼 있습니다.

 

사물에 다가가야만 지혜가 지극해질 수 있고, 지혜가 지극해야 뜻이 정성될 수 있고, 뜻이 정성되어야만 마음을 바르게 다잡을 수 있고, 마음을 바르게 다잡아야만 몸을 닦을 수 있고, 몸을 닦은 후에야만 일가를 가지런히 할 수 있고, 일가를 가지런히 한 후에야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고, 나라를 제대로 다스린 후에야 천하가 태평해진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예외없이 몸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 <대학> 경문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소개하면서 '너=나', '가정=국가'로 보는 동양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비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와 내가 같다는 동양의 주장과 너와 내가 같지 않다는 서양의 주장을 결합해야만 성숙한 시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운다는 것은 부모 자신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서양과 동양의 지혜를 모두 흡수해야 합니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파묻힌 지 16년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왜 이걸 공부해야 하는지 모른 채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고 보니 내가 왜 인문학을 이렇게 공부했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바로 아이와 가족을 위해서 써야 할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슬프다! 영토를 가진 자들은 알지 못한다. 영토를 가진 것은 민생의 근본이 되는 큰 물건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큰 물건을 가지는 것은 그 물건이 단순한 물건이어서는 안 된다. 단순한 물건으로 보지 않으므로 능히 물건을 물건답게 할 수 있다. 
- <장자> 11-7

 

위 구절에서 '영토' 대신 '아이'로 바꾸고, '민생' 대신 '인생'으로 바꾸면 가족의 이야기가 됩니다.

 

슬프다! 아이를 가진 자들은 알지 못한다. 아이를 가진 것은 인생의 근본이 되는 큰 물건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큰 물건을 가지는 것은 그 물건이 단순한 물건이어서는 안 된다. 단순한 물건으로 보지 않으므로 능히 물건을 물건답게 할 수 있다. 
- <장자> 11-7을 '가족'에 맞게 각색

 

가족을 다르게 표현하면 '생명'을 낳고 키우는 인류의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존재 이유는 바로 '아이'이며, 아이의 존재 근거는 바로 '엄마'와 '아빠'입니다. 육아의 언어는 '인식의 언어'를 넘어 '존재의 언어'이어야 합니다. 때문에 아이를 낳고 길러보지 않은 사람은 육아를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아내는 엄마가 되고, 나는 '아빠'가 됩니다. 그리고 나의 누나는 고모가 되고, 아내의 언니는 '이모'가 됩니다. 나의 어머니는 '할머니'가 됩니다. 이 이름들은 모두 주어가 생략된 표현입니다. '아이'가 주어입니다. 아이의 엄마, 아이의 아빠, 아이의 할머니, 아이의 고모, 아이의 이모입니다. 결혼을 하는 순간 아내와 남편의 인연을 맺는데, 이 역시 주어가 생략된 언어입니다. 바로 '남편의 아내'이며, '아내의 남편'입니다. 이미 가족 구성원이라는 '존재'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생명을 기를 준비를 끝낸 것입니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의 마음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독서전문가'로서 부모님들을 만났습니다. 인천의 공공도서관에서 '행복한 독서클럽'이라는 평생학습강좌를 두 학기 동안 맡았습니다. 부모님들과 책을 읽고 독서토론을 하고, 여러 가지 독서 방법을 알려주는 강좌였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듣는 부모님들은 책 이야기보다 '아이와 다툰 이야기', '배우자와의 갈등'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모습이 당황스러웠지만, 바로 그것이 책을 읽는 바른 태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부모님들과 아이들을 초대해 '책 놀이'를 본격적으로 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재미 있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점점 '부부갈등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발견한 것입니다. 부부관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육아' 자체가 상당히 망가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훌륭한 아이로 성장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친한 엄마 아빠'라는 사실입니다.

 

아빠로서 주위의 가족을 바라보면 '아빠'가 눈에 걸립니다. 대기업 다니는 아빠나 중소기업 다니는 아빠, 자영업을 하시는 아빠, 심지어 시민활동을 하는 아빠 할 것 없이 가족들과 편안히 앉아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회구조적 현실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빠 없는 하늘 아래 살아가야 합니다. 평일에 아내와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는 남편이 얼마나 될까요? 평일 저녁에 아이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자기 전에 책을 읽어줄 수 있는 아빠가 얼마나 될까요? 아이는 한동안 아빠를 그리워하다가 마음속에서 아빠의 자리를 조금씩 줄여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이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에게 아빠의 존재감은 점점 줄어들어서 어느덧 '약자'가 되어 있습니다. 집안일과 육아일에 대한 부담이 대부분 엄마에게 쏠려 있는 집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친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아내와도 소원해지면 아빠의 존재감은 더욱 작아집니다. 아빠도 스스로 '위기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빠는 여기서 또 한 가지 패착을 하기 쉽습니다. 돈, 진급, 명예 등을 통해서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예컨대 진급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어' 공부를 해야 하는 회사가 많습니다. 중국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가족과 보내는 주말 중에 하루를 희생합니다. 가족과의 끈은 더욱 얇아집니다. 만약 이 순간 아내와 남편이 친하다면 남편은 가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고, 가족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가족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아빠의 판단은 어긋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와도 친하지 않고 아내와도 친하지 않은 고립된 상황에서 아빠의 선택은 위태롭기만 합니다.

 

남해의 황제 숙과 북해의 황제 홀이 중앙의 황제 혼돈과 어느 날 중앙에서 만났다. 혼돈은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혜를 보답하고자 상의한 끝에 그에게 구멍을 뚫어주기로 하였다. 사람은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을 쉬는데 혼돈은 유독 구멍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갔다. 그러나 이레째 되던 날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 <장자> 7-5

 

만약 숙과 홀이 혼돈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한 번 물어보기만 했더라면 혼돈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빠가 가족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한번 물어본다면 아빠와 가족이 서로 불행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가족에게 두 번 죄를 졌습니다. 한 번은 세상을 바꾼다고 시민운동을 하면서 가족에게 소홀했습니다. 가족은 외로웠죠. 그리고 한 번은 가족을 풍족하게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한다고 가족에게 소홀했습니다. 가족은 또다시 외로웠죠. 그것은 가족이 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의 마음을 아는 것이었고, 가족과 대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천 가족을 만나면서 나는 가족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선의가 충만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왠일인지 사랑이 가족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내와 남편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가슴 아프게 남아 있었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합니다. 이 모든 현상은 가족 간에 감정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고,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동생과의 술자리에서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치국평천하'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수신제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정을 내리고 가족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넨 순간 내 인생의 반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가족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아빠들의 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들에게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노력이 가족이 원하는 것인지 한번 물어보세요. 어쩌면 인생을 달라지게 하는 중요한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두 번이나 외롭게 만든 나 같은 가장은 못난 가장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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