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독서 메모


아직도 생각난다. 1998년 7월과 8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가난을 알고 싶어서 막노동을 했다. 겨울에는 선과장과 감귤 과수원에서 단순 막노동을, 여름에는 도로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가난을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가난했던 것 같다. 특히 영혼까지 가난한 동료들에게 호되게 당했던 기억이 아픈 상처마냥 쓰라리다. 막노동을 끝내면 해질녘이 된다. 다음날 새벽같이 나가야 하니 밤늦게까지는 읽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야 한다. 일분 일분이 소중한 시간이다. 그 시간에 나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썼다’. 당시 필사하기는 꽤 유행했는데 누구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다 베껴 썼다고 했고, 누구는 박경리의 <토지>를 다 베껴썼다고 했으니 믿거나 말거나다. 내가 <에티카>를 ‘메모’하기로 한 까닭은 책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책 전체를 베껴쓰는 것은 엄두를 낼 수 없었고, 기껏해야 마음에 드는 구절을 베끼는 것이니 내 독서 방법은 엄밀히 말하면 ‘초록(抄錄)’ 또는 ‘초서(抄書)’ 라고 해야 옳다. 



▲ 이런 노트를 5~6장 정성스레 초록한다고 생각해 보라. 가뜩이나 글씨도 괴발쇠발인데. 인내심이 금방 동난다. 



좋은 말이 자라는 마음 밭에서 딴 열매


누군가 말했다. 필사는 극단적으로 느린 독서법이라고. 초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애를 태울 만큼은 느린 독서다. 읽고 싶었던 책이 많았던 스물한 살의 나는 메모를 한 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 노트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다른 책을 잡았다. 어떤 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노트를 던졌던 분노의 손맛만큼은 생생히 기억한다. 하지만 이내 다시 돌아왔다. 다음 구절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스스로에게 욕을 하면서 메모를 했지만 7~8월 여름 내내 책 한 권 읽고 나서 이 방법을 그만뒀을까? 그렇지 않다. 그 시기의 독서방법을 20년째 하고 있다. 나는 노트에 독서를 새긴 것이 아니라 내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겼으며, 그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서 나에게 향기를 내뿜고 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완독한 사람들이 간혹 경험하는 느낌이 있다. 마치 공중을 나는 듯한 느낌에 소리를 지르게 되는 현상을 누군가는 ‘마녀의 빗자루 효과’라고 한다.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서 인간 감정과 마땅히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윤리를 축조한 <에티카>의 마지막 대목에는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이 있다. 감정과 이성이 합수(合水)하며 완성되는 대목이다. 도서관에서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겨우 억제하고 집으로 버스를 타고 왔는지 마녀 지팡이를 타고 왔는지 몰랐던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정말 좋은 구절은 눈으로만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메모를 하게 했는데, 메모가 심장에 새겨질 줄은 몰랐다. 나의 심장은 좋은 꽃과 열매가 자라는 밭처럼 좋은 말들이 자란다. 거기서 수확한 말들은 나의 말이라고 불러도 문제가 없지만, 뿌리가 있는 말이다. 작가의 말은 수많은 말들과 함께 자라는 향기로운 꽃이다. 



나의 저작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우리의 저작이라고 불러야 한다. -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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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권 수' 따지면서 읽지 말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ㅡ 발터 벤야민






해마다 연말만 되면 '독서결산'이라는 제목의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2017년에는 100권 중 몇 권 읽었고, 2018년에는 인문교양 50권 도전, 100권 도전 따위의 제목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몇 권 읽었다는 말 자체가 무상하게 느껴진다. 만약 2017년에 55권의 책을 읽었다면 55라는 숫자가 나의 독서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특히 '메모 독서'를 할 때 '권 수'를 생각하면 그만두고 싶어질 것이다. 


건강하고 지혜로운 독서 생활을 위해서 새로운 개념 도입이 필요하다. ‘접속 시간’ 또는 ‘회수’ 단위로 접근해보자. 책을 즐겨 찾는 웹 사이트라고 생각하면 쉽다. '권 수'로 독서를 생각하면 한 권 읽기도 전에 다음 책을 의식하지만 접속 시간이나 접속 회수로 생각하면 한결 여유롭게 독서를 할 수 있다. 예컨대 페이스북에서 페이스를 빼고 "북"에 접속한다면?


이 새로운 개념은 독서를 하는 목적에도 부합한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목적은 많이 읽기 위해서인가? 자기 키만큼 많은 책들을 읽으면 내면이 풍요로워질 것인가? 그보다 현실적인 목표는 '내 마음의 한 줄'을 찾는 것 아닐까? 책을 읽다가 가슴을 울리는 한 줄의 문장을 만나면 책을 잠시 덮고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그 문장에 대해서 생각하고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살펴본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독서의 모습 아닐까?


예전에 책 좋아하는 친구들을 따라 100권 읽기 도전 비슷한 걸 해봤다. 책을 읽는 내내 100이라는 숫자가 따라다녀서 독서에 집중할 수 없었던 조바심. 이렇게 읽다가 잃을 수도 있겠구나. 독서를. 마음이 조급해지고 권 수에 집착하게 되고, 정해진 기한이 다가오면 책을 읽는 건지 숫자를 읽는 건지 모르겠다. 만화책이나 얇은 책을 슬쩍 집어넣어서 억지로 권수를 맞추면 왠지 쓰라린 패배감이 들고 스스로 우습다는 생각에 슬펐다. 다시는 책의 권 수로 나의 독서를 재단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권 수를 가지고 독서를 하는 폐해는 이처럼 크다.



몇 권 대신 '몇 분, 몇 번'을 쓰면 달라지는 점



예전에 독서 취미를 갖고 싶어 하는 지인을 도와준 적이 있다. 독서를 하고 싶은데 바빠서 읽을 시간이 없는 일반적인 경우였다. 나는 이른바 '전투 독서' 또는 '틈새 독서'를 권했다.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 안,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이나 각종 짜투리 시간을 대비해서 뻗으면 닿을 거리에 책을 두고 틈틈히 읽으라고 했다. 만약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10분의 책을 읽었다면 10분이라는 독서시간이 내 생활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신기한 것은 독서시간이 점점 늘어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10분으로 출발하지만, 20분이 되고 30분이 되고 1시간이 된다. 어느새 독서가 생활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몇 분 동안 책에 접속했는지를 헤아리는 것은 독서 습관을 강화시키는 데 유용한 방법이다.


'몇 번'은 '몇 분'을 보완해준다. 오늘 나는 몇 번 책을 잡았는지 물어볼 때는 '혹시 한 번도 책을 안 잡은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유도한다. 이 척도는 독서가 0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 안전판 역할을 한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책을 붙잡아 한 줄이라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루에 책을 10번 정도 보아야 한다는 기준은 물론 없다. 0이 아니기만 하면 된다.


위 척도에 따라서 독서가의 기본 독서량을 정리해 보았다.


독서가는 매일 0분, 0번에 빠지지 않는다.


메모를 하며 독서를 하다 보면 한 권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접속 시간으로 따지면 오히려 마음이 여유롭다. 메모를 하는 동안은 독서에 접속해 있기 때문이다.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메모를 할 수 있어서 독서 척도를 바꾼 셈이다. 굳이 메모 독서를 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몇 권 읽은 것이 자랑이 되지 않는 독서 생활을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에 내가 쓰는 독서 척도를 제안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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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8-01-10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많은 공감이 되네요☺

승주나무 2018-01-10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 님//공감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stella.K 2018-01-11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제된 글이 정말 독서 칼럼 같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네. 접속 회수!

작년까지만해도 마음만 있고 읽지 못 했던 책
중고샵에서 싸게 구입할 수 있어 마구잡이로 샀는데
올핸 좀 자제하려고. 역시 사 놓고 안 읽더군.
물론 언젠간 읽긴 하겠지만 욕심을 좀 버려야겠다 싶어.ㅋ

승주나무 2018-01-11 15:08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저도 사 놓고 미처 못 읽은 책이 쌓여 있어요. 책 읽는 사람의 영원한 고민이죠~~ 새해에도 즐독하세요^^
 

초서(抄書) : 책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만을 뽑아서 씀. 또는 그렇게 쓴 책

(국립국어원)



정약용 책 500권의 비밀



다산 정약용은 생전에 500권이 넘는 책을 썼다.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500권은 한 생애에 이루어지기 어렵다. 비밀은 바로 초서(抄書)에 있었다. 정약용은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은 옮겨적고 연관된 다른 구절과 배치하는 편집 방법으로 많은 책을 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순수 정약용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약용과 비교되는 조선시대 철학자로는 『송자대전』의 주인공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자신의 생각으로만 책을 써냈다고 한다.





책을 쓰는 방법론에서 서로 전혀 달랐던 우암 송시열(위)과 다산 정약용(아래)



나는 책을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다산의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러니까




책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연결된다.



예를 들어 <논어>의 한 구절은 프랑스 영화감독의 자서전과 묘하게 일치한다. 논어 11편인 '선진(先進)'편의 제목이기도 한 구절이다.




공자가 말했다. 옛사람들이 몸에 익힌 교양은 촌사람식이었다. 지금 사람들의 교양은 완전히 문화인풍이다. 어느 쪽이 진정한 교양인인가 하면 옛사람들 쪽일 것이다. (논어 '선진'편)





'선진'은 과거를 살았던 선배나 부모 세대를 말한다. 문화 혜택도 교육 기회도 경제적 여유도 적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 세대가 지금보다 교양인일 수 있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프랑스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자서전을 보면 단번에 이해가 된다. 영화 문화의 퇴보를 걱정하는 대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문장을 논어 구절과 함께 감상해보자.




맥 세네트(1880~1960, 초기 미국 무성영화 코미디의 두드러진 개척자)의 관객은 이상적인 대중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새로 정착한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자 계층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무성영화는 그들에게 잘 맞아떨어졌다. 이 초창기 관객의 자손들이 오늘날의 관객들을 이룬다. 이들은 대학을 나왔고, 광고, 신문, 주간 영화평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이들이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원칙들은, 가장 "예술적"이고 가장 오락적임과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홍보매체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그들을 위해 영화 산업은 영웅주의나 사랑, 혹은 - 무엇보다도 최악으로 - 심리학을 공장처럼 쏟아내고 있다. 

(장 르누아르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장 르누아르>)



만약 메모를 하지 않았다면 동양고전과 서양 문화의 아이디어가 접점을 찾는 일도 어려웠을 것이다. 순간 뇌리에 스치다가 이내 사라졌겠지. 책과 책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르네 데카르트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망설이는 사람은 데카르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일단 한 권의 책을 집어들고 읽어보라. 다음 읽을 책이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다.





'김소진 사전'이 준 영감





20년 동안 메모 독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방법. 서지정보와 읽은 시간은 나중에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작고한 김소진 소설가에 관한 유명한 에피소드는 '자신만의 데이터'에 관한 중요한 실마리를 준다. 소설가 김소진은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었다. 물론 '김소진 사전'이 국어사전의 맥락을 뒤집지는 않았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기 언어를 가지고 쓴다는 게 얼마나 절대적인지 알지 않은가? 나도 김소진을 흉내내 책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우리말을 예문과 함께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어를 아름답게 구사하고 싶으니까.





소설가 김소진은 잘 다듬어진 한국어를 구사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어서 그것을 소설쓰기에 반영했다고 한다.



가끔 독서 메모를 담아 둔 엑셀 파일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많은 분들께 엑셀 파일을 보내드렸다. (엑셀파일 용량이 9MB) 보내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나만의 독서 경험이므로 데이터의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4회독을 하면 내 뇌에 각인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구절들이 나를 붙잡아주는 효과를 준다. (4회독의 방법은 "4번 읽을만한 책을 소개합니다"를 참조) 이 느낌은 장기하가 부른 '그때 그 노래'에 담긴 가사가 잘 살려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지. 

이게 그때 그 노래라도 그렇지. 

달랑 한 곡 들었을 뿐인데도, 

그 많고 많았던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다니.





독서 메모를 다시 읽을 때는 읽을 당시의 느낌과 맥락이 신기하게 되살아난다. 심지어 10년 전에 읽었던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의 독서메모를 엑셀로 옮기는 작업을 할 때는 마치 어제 책을 읽었던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만의 데이터가 주는 신비로움이다.




책 읽으면서 처음 메모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이었다. 그때는 공책 한 권에 메모를 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라는 책이 워낙 난해하기도 했지만 7월과 8월 여름 내내 한 권의 책밖에 읽을 수 없었다. 그때 읽었던 경험이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도움을 주었다. <미디어의 이해>라는 명저를 남긴 마셜 매클루언은 감각에도 계급이 있다고 말했다. 가장 낮은 계급의 감각은 시각이다. 시각은 사기를 잘 당한다. 틱 나한 스님은 '눈'의 사기에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만약 눈이 어떤 음식의 정량을 바라보았다면 그것의 반만 먹는 게 '진짜 정량'이라는 것이다. 착시도 빈번해서 독서를 교란시킨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독서는 가장 약한 감각인 '시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시각을 넘어서야 독서가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공부방에서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소리 내 읽기를 시키고, 그림책 필사를 시킨다. 시각보다 큰 감각은 청각이다. 그리고 감각 중에서 '장군'에 해당하는 감각은 '촉각'이라고 한다. 마셜 매클루언은 연인들이 키스를 할 때 눈을 감는 까닭은 촉각의 강력한 느낌을 시각으로부터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말했다. 메모 독서는 가장 강력한 감각인 촉각을 이용한 독서 방법이다.




눈으로 책 읽기는 '구경'이지만, 메모하면서 책 읽기는 '참여'다. 책의 기록에 기록으로 동참하는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차원이 다른 독서경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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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1-09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우 도전이 되는 페이퍼다.
난 책은 읽어도 정리나 요약을 잘 못하겠더라구.
특히 나이들고 팔이 아파서 항상 건너 뛰게 되더군.
암튼 정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스럽긴 해.ㅠ

승주나무 2018-01-09 13:2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요번에 <공자, 인간과 신화>라는 책을 메모하고 워드까지 하느라 며칠을 소비했어요. 할 때는 힘들고 그만두고 싶었지만 책 내용이 가슴속에 나무처럼 솟아난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아요. 정리 고민 잘 해결되길 바래요^^
 

그림에는 나에 대한 그 아이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래도 반가웠다. 애증은 서로 교차하는 거니까 무관심보다는 낫지 않은가?



OO아, 책벌레 선생님이 글 남긴다.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학교에서는 그렇게 되기 어려운 것 같아. 교실 모든 친구들 신경쓰다 보니 너랑 얘기 많이 못해서 미안하다. 

그 대신 너한테 '맛있는 거 사줌'권 한 장 줄게. 편한 시간에 연락해라. 그땐 맛난 거 사줄게. 010-XXXX-XXXX. 책벌레 오승주 샘 연락처다. 연락 기다릴게. 

나를 싫어하는 학생이 둘 있었다. 한 명은 나의 실수로 인해서 나랑 멀어지게 되었고, 한명은 그냥 싫어하는 아이다. 마지막 수업을 한 번 남겨둔 어제 아이들에게 글쓰기에 도움되는 책을 한 권 소개했다. 글 고쳐쓰기 연습을 시키자 그 아이가 활동지 한쪽에 그린 그림을 봤다. '책벌레'라고 적혀 있었다. 나를 그린 듯했다. 이 그림을 보자 이 아이와 관계를 잘 매듭져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움'도 역시 하나의 감정이니까 아직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어차피 활동지는 쓰지 않을 거니 그 친구의 볼펜과 종이를 가져다가 손편지를 썼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연락해"라고 말했다. 아이는 예의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멀어지는 나를 향해서 "사양"이라고 조그맣게 말했다. 하지만 손편지가 그 아이에게 미친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이미 아이들 사이에서 소문이 다 났고, 담임선생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아이가 편지를 받자마자 담임선생님께 가서 자랑한 것이다. 


이 아이는 나의 '예의 선생님'이다. 어른과 선생님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커서 살얼음판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한 학기 내내 친해지려고 시도했지만 그렇게 될 수 없었다. 내가 좀 더 비굴해져야 했는데, 그것은 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긴장은 계속 있었고, 한 동안은 그 아이가 내 꿈을 지배한 적도 있었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부담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논어』에서 증자가 맹경자에게 해준 말이 생각났다. "새가 장차 죽으려 할 때에는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대목이다. 이제 이 아이와 헤어질 때가 되자 나도 착한 마음이 생겨서 손편지를 쓰기에 이르렀으니 같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얼굴을 움직일 때는 상대가 공격하거나 거만하게 굴지 않도록 해야 하고, 정색을 해야 할 때는 굳은 신뢰가 바탕에 있어야 하며, 말로 나타낼 때는 상대방이 깔보거나 배척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외에 세세한 부분은 담당자에게 맡기면 됩니다. 

- 『논어』, 「태백」


이 구절은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다. 주자와 리링 선생은 1인칭으로 해석했는데, 나는 오규 소라이가『논어징』에서 주장한 해석을 따라 2인칭으로 해석했다. 증자는 공자보다 46세 어리며, 맹경자는 맹무백의 아들이다. 계손씨, 숙손씨와 함께 노나라의 '삼대천왕'이다. 그래서 '삼환'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기세는 노나라 왕을 능가했다. 『논어』에서 '증삼'은 '증자'로 표현될 때가 많았고, 공자가 부를 때만 이름을 썼기에 증자 제자들이 책의 편찬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논어』에서 증자는 분위기를 일시에 가라앉히는 역할을 한다. 요즘 청소년들이 본다면 '쓸데없이 진지 빤다'고 할지도 모른다. 나도 논어를 읽다가 증자가 나오면 자세를 고쳐 앉고 경청한다. 하물며 증자의 유언 앞에서랴! 나는 증자의 세 가지 경고를 다 어겼다. 손편지의 주인공은 이를 고발했다! 그 아이는 내가 얼굴을 보았을 때 거만했고, 공격적이었으며, 내가 정색해서 이야기할 때는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꺼내면 깔보고 배척했다. 게다가 나는 그 아이의 세세한 부분에만 집착했다. 증자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래서 반성문으로 쓴 것이다. 


OO이에게. 

OO아 안녕. 수업시간에 긴장된 분위기 만들어 미안하다. OO이가 충격 받았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이 수업이 싫어졌을 것 같다. 나라도 싫었을 것 같다. 미안. 

너 덕분에 교실에서 긴장된 분위기를 안 만들려고 노력하고 반 전체에게 화 내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O이가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셈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니? OO이는 이미 내 수업에서 마음이 떠났는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ㅡ 오승주 샘


공교롭게도 두 아이는 같은 반이다. 앞서 손편지를 썼던 아이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불만스런 말을 계속 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고, 그런 상황이 이 아이에게 준 충격이 컸다. 이 아이는 순전히 나의 실수와 부족함에 의해서 멀어지게 되었으니 할 말이 없다. 이 손편지 이야기도 담임선생님께 그대로 전달되었다. 아무리 담임선생님이라지만, 그 선생님은 정말 아이들 마음의 저수지 같은 분이다. 많이 배웠다. '왜 말했어요?'가 그 아이의 일성이었다고 한다. 


기막힌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이 아이의 마음을 전달받은 경로가 담임선생님뿐이 아니었다. 시험 기간에 학교 주변 공공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말을 건 사서 선생님께 나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여과 없이 전달한 것이다. 나는 두 배로 부끄러웠다. 어떤 기대를 하고 손편지를 쓴 것은 아니다. 이 아이들에게 나의 미안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미안한 마음을 받아줄지 어떨지는 아이들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근신하며 처분을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증 선생님(증자(曾子)는 증씨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잘못하기 전에 선생님의 말씀에 더 귀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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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5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12-15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난 두 아이라고 해서 너의 아들내미들이면 어쩌나 했다.
책만 읽고 안 놀아주는 뭐 그런 거...ㅎ

선생님이 참 어렵긴 해.
그래도 그렇게 노력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거
언젠간 아이들도 알게 될 거라고 믿어. 힘내라!^^

승주나무 2017-12-15 19:07   좋아요 0 | URL
내 아이들은 서로 좋아요^^

선생님의 양보는 10년이나 20년쯤 뒤에 기억되지 않을까 합니다.
욕심은 안 부릴래요~
 

근원적인 차별은 역차별을 초래하며, 이런 모든 차별에 의해서 양성평등의 가능성들이 모두 상쇄돼 버린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다가 '잘못된 교육'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되었다. 실제 경험했던 사례를 바탕으로 선생님이 여학생을 예뻐하면서 동시에 남학생을 무시하고 차별한다면 이 선생님에게 교육 받는 학생들은 남녀관에 왜곡될 수 있다는 발언을 했다. 남녀관의 왜곡을 선생님의 차별적 교육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만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하나의 상황을 더 예로 들었다. 한 대기업에서 매우 드물게 부장으로 승진한 한 여성의 경우였다. 여성 부장 밑에는 많은 남성 과장들이 있었다. 여성을 상사로 둬야 했던 과장들은 은근히 부장을 무시하고 보고를 누락하며 저항했다. 화가 난 여성 부장은 남성 과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장 심한 과장의 뺨을 때렸다. 남성 과장들은 자연스레 제압당했지만 뒷맛이 씁쓸한 장면이다. 여성 부장이 마치 남성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현재 우리의 사회가 남성 위주의 차별적인 사회이기도 하지만, 여성 위주의 역차별 사회이기도 하다고 진단했다. 마치 풍선 효과처럼 차별과 역차별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라보는 관점이 흥미로웠다.


한 학생이 '유교사회의 잔재'라는 말을 했을 때 이를 좀 구체화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 부엌에서 벌어지는 풍경과 TV가 있는 안방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라고. 이것이 근원적인 차별이며, 유교문화의 잔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남자들이 명절 때 부엌에서 '일'을 하고, 여성들이 좀 쉬면서 TV를 보고,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남성들이 적극적으로 한다면? 근원적인 차별이 조금씩 해소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비췄다.


이 이야기 끝에 나온 학생의 결론이 바로 맨 처음 소개한 이야기다. 근원적 차별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족해 보였지만, 아이들은 명절 때마다 부엌 풍경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명절 풍경 외에 또 다른 근원적 차별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이런 대화가 생각을 정리하고 명쾌한 언어로 재구성되는 모습을 보니 가슴에 벅찬 감동이 밀려와 글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다음 주가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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