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프카라면 '독신자의 불행'에 대해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펠리체 바흐어와 두 번의 약혼과 두 번의 파혼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카프카는 결국 독신으로 살다 죽었지만 독신자로 살고 싶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독신자의 불행을 잘 알고, 평생 독신자의 불행에 대해서 생각한 카프카는 왜 독신자로 살아야 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글쓰는 자유를 위해서다. 펠리체 바흐어와 결혼생활을 하면서 카프카는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을지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돌려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견적이 안 나왔다. 카프카의 글쓰기는 자유이자 생존인데 그것이 위협받을 바에는 차라리 독신자의 불행을 선택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카프카는 약혼을 두 번이나 했느냐 하는 것이다. 약혼을 깬 것보다 약혼을 한 것이 나는 더 궁금하다. 카프카는 가족들과 관계가 좋지 못했다. 형제 관계도 별로였다. 마음의 집이 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결혼생활과 글쓰기가 공존할 수 있다면 약간의 자유를 희생하면서도 해볼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결혼생활과 글쓰기 생활이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제까지의 연구와 비평은 카프카의 파혼에 집중한 반면, 두 번의 약혼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다. 영화 <올드보이>에서도 '왜 가뒀느냐?'가 아니라 '왜 풀어줬느냐?'는 질문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유지태가 말하지 않았던가?

두 번째 파혼 원인은 아버지와 연관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아버지의 강력한 통제력 하에서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장남 카프카에게 결혼이란 것은 아버지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말할 것이다. 결혼은 펠리체 바우어와의 결합도 있지만, 카프카 집안과 펠리체 집안의 거래적 성격이 강하다면 글쓰기의 자유는 더욱 제약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혼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댁의 구속'과 '처가의 구속'은 실체가 있는 구속이니까.

카프카는 마음의 집이 될 사람을 애타게 찾음과 동시에 독신자의 불행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독신자의 불행>에는 그런 감정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몸이 아프게 되면 자신의 침대 한구석에서 몇 주일씩이라도 텅 빈 방을 바라보아야 하고, 언제나 대문 앞에서 작별을 해야 할 뿐 한 번도 자신의 부인과 나란히 층계를 올라올 수 없고, 자신의 방안에 있는 앞문들은 단지 낯선 집안으로 통해 있을 뿐이며, 늘 한손에는 자신의 저녁거리를 들고 집으로 와야 하고, 낯선 아이들을 놀라워하며 바라보아야 하지만 "나에겐 아이들이 하나도 없구나"하고 줄곧 되풀이해서도 안 되며, 젊은 시절의 기억에 남아 있는 한두 독신자들을 따라 외모와 태도를 꾸며 나가야 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카프카 단편전집』, 「독신자의 불행」


카프카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은 '독신주의자'라는 평가일 것이다. 위의 문장을 보면 독신주의자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약혼을 두 번이나 했다가 파혼을 하는 과정 역시 독신주의자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아마도 카프카가 자신은 독신자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체념적으로 깨달으면서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고 덧붙인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카프카는 어쨌든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파혼이며 독신자의 길이다. 고통스러운 결단의 과정에서 카프카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상처투성이이긴 하지만 자유롭게 글을 쓰는 카프카 자신이다.


다만 오늘날이나 후에는 실제에서도 하나의 육신과 하나의 진짜 머리, 그러니까 손으로 치기 위한 이마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서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느 말이다.

『카프카 단편전집』, 「독신자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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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06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카프카 일기 멋모르고 도전했다가 깨갱댔는데...
경지가 느껴지는 글이군. 흠.

승주나무 2023-03-06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무슨 경지 씩이나 ㅎㅎㅎ
 

※ 소설의 조연들은 언젠가는 다뤄보고 싶은 주제다. 주인공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작가가 세심하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남겨 놓은 조연들을 꽃피워볼까 해.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그 (보쒸에)에게 불운이 닥쳤다. 그의 쾌활성은 그러한 불운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기와가 자주 떨어지는 지붕 밑에서 살아.” 그가 자주 하던 말이다. 그에게는 모든 사고가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별로 놀라는 일이 없는 그는, 불운을 잔잔하게 맞았고, 농담을 이해하는 사람처럼 운명의 짓궂은 장난에 미소를 보냈다. 그는 가난하였으되, 명랑함을 숨겨 둔 그의 안주머니는 결코 고갈되지 않았다. 마지막 한 푼은 신속히 고갈되었지만, 그의 웃음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레 미제라블 3권(펭귄클래식코리아)


라주미힌(죄와 벌)에 이어서 보쒸에를 만나면서 나는 소설 속 위대한 조연들에 관심이 생겼다. 솔직히 보쒸에는 이름을 잊어버려서 한참을 찾았다. 메모를 해두지 않았다면 더 오래 걸렸을 것이다. 보쒸에는 아베쎄(ABC)의 멤버로 좀처럼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베쎄는 레 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단체로, 파리의 대학생 및 청년 노동자들의 모임이다. 카페 뮈쟁을 본부로 사용하고 있으며 프랑스어 Abaissé의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한 아베쎄는 '낮은 자들' 혹은 '비천한 자들' 이라는 뜻이며'아베쎄의 친구들'은 비천한 이들의 친구로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목과 통한다. 레 미제라블 역시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한국 최초의 번안 제목은 <너 참 불쌍타>였다. 빅토르 위고는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는 인물과 공간에 애정을 두는 작가였기 때문에 알려질 수 있었다. 


보쒸에는 외투처럼 불운을 입고 다닌다. 그에게 불운이 찾아오는 것은 운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지극히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불운이 그를 쾌활하고 독특한 캐릭터로 만든 것이다. 보쒸에가 가르쳐주는 것은 불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리수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 불운의 공기는 네가 게을러서도 아니고 운이 나빠서도 아니고 미세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것에 불과하다. 미세먼지를 없애기 위해 공지청정기를 매일같이 돌리고 세스코 서비스를 풀옵션으로 받는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미세먼지'는 마셔야 할 수밖에 없다. '만들어진 불운'은 그야말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원인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보다는 보쒸에처럼 반 정도는 자연스레 마실 생각을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보쒸에의 가르침에 숙명론적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불운은 당연한 것이니 별소리 말고 고 달게 받아들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불운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어쨌든 전진한다. 순례자처럼. <사당동 더하기 25>에 나오는 순례자들처럼. 반대쪽으로 전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불운의 공장들을 격파하려는 보쒸에 같은 사람들이다. 보쒸에가 아베쎄 멤버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보쒸에는 불운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면 구조를 깨뜨리는 데 인생을 걸어서 불운이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처럼 펼쳐지지 않고 스캔들 또는 찻잔 속의 태풍처럼 적당한 생채기로 남아 있는 세상을 원했다. 우리에게 닥친 불운 중에서 자연스러운 불운과 만들어진 불운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은 보쒸에로부터 배웠다. 스물 다섯에 일찍 대머리가 되어 버린 보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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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1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3-02-01 14:03   좋아요 1 | URL
혹시 내 댓글 밑에 답글 썼나?
그렇게 쓰면 내가 볼 수가 없어.
반드시 엮기로 써야 볼 수가 있지.
내 댓글에 <댓글달기>로 말야.
이렇게...

2023-02-01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1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1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3-02-01 16:2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

2023-01-31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도 선생님이 조언하신것처럼 엑셀에 매일 읽는 성경읽기와 관련해서 기록을 조금씩 하고 있는데요. 과연 독서의 질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 경기도의 한 독자님





저도 이 분처럼 논어나 경서, 인문고전을 또박또박 메모하고 틈틈이 코멘트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문장이나 생각에 대한 내 최초의 해석인 셈인데요. 놀라운 점은 해석도 하나의 생명이기에 성장한다는 점입니다. 메모를 다음에 보면 이전의 메모가 생각의 출발이 되고, 다음에 보면 또 그 지점이 생각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양화> 편의  한 구절을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면 덕 있는 사람의 말을 버리는 것이다."(논어 양화편)

♡ 나의 해석 : 무비판적인 수용은 범죄다.


유명한 도청도설입니다. 이렇게 써두고 몇 번 읽으면 나의 무의식은 그 다음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물이 흘러가다가 파인 홈을 만나면 일사불란하게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말을 들으면 퍼뜨리는 게 맞는데 왜 이 좋은 걸 하지 말라고 한 걸까요? 말한 사람이 고민 끝에 얻어낸 좋은 말은 당장 듣는 사람의 좋은 말이 될 수 없고, 듣는 사람 역시 자신의 좋은 말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이것이 바로 좋은 말이 전해지는 방식이죠. 좋은 말이 나쁜 사람에게 가면 당장 나쁜 말로 둔갑합니다.


저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접했던 말을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반복하는 앵무새 같은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분들이 자신에 차서 신나게 이야기하면 주변에 있는 분들은 옳은 말로 착각합니다. 저도 모르게 좀비PC가 되어 여론조작의 디도스 공격에 이용되는 줄도 모르고. 주변에 있는 분들은 대개 순진한 분들이니까 퍼뜨리진 못하지만  동조합니다. 이렇게 여론이 가랑비이 옷 젖듯 조작됩니다.


방송사들에서 조잡한 내용을 가지고 동네 시장 양말장수 아저씨처럼 쉴틈없이 떠들면 지나가다 얼핏 들은 사람에게 쏙 박힙니다. 가끔 저런 황당한 이야기를 진짜 믿는 사람이 있을까 어이 없을 때가 있지만 그건 안일한 생각입니다. 실제 많은 사람들에게 그와 똑같은 이야기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해서 들은 뒤에야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메모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도청도설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저는 메모를 한 것 중에서 제가 글에 쓸 내용과 관련된 것은 빨간 볼펜으로 ○표시를 해둡니다. 그러고 한참 기다리죠. 성급히 쓰려고 하면 글을 망친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이 열심히 작업해서 숙성이 되면 그걸 가지고 요리를 하듯 글을 이어갑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글쓰기는 의식과 무의식의 협업이다


메모는 의식이 시작하지만, 마무리는 무의식이 관여합니다. 그러니까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메모가 있는 셈입니다. 메모를 생각의 계단으로 삼아서 자주 들여다보세요. 계단이 무르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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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1-19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모를 생각의 계단으로 삼아서 자주 들여다보세요. 계단이 무르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흠..좋은 말이다!^^

승주나무 2018-01-19 23:10   좋아요 0 | URL
오~ 고마워요. 누나가 꾸준히 댓글 달아주니까 저도 꾸준히 쓰게 돼요^^ 고마워요~~
 



소셜네트워크가 토론 등 사회의 작동 방식을 파괴하고 있다

20억 명에 달하는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데 도움을 준 것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러분의 행동은 프로그램화되고 있다

(차마스 파리하피티야 전 페이스북 부사장의 스탠퍼드 강연)


페이스북이 아이들의 머릿속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안다(페이스북 초대 회장을 지낸 션 파커)



신속하면 부정확해진다


당신은 책 한 권을 빨리 읽기를 원하나요? 아니면 책 한 권을 맛있게 읽기를 원하나요? 보통의 사람들은 책을 맛있게 읽기 어렵습니다. 많은 책들이 이미 머리속에 있기 때문에 읽어야 할 책이 읽고 있는 책을 밀어내는 압력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고 나서 남는 게 왜 하나도 없을까? 하지만 그건 사소한 고민일 뿐입니다. 새로운 책장을 펼치면 흥분할 만한 내용이 펼쳐지니까요.


가끔 시장을 지나면서 양말 파는 아저씨를 봅니다. 아저씨는 마치 양치기 또는 목동 같고 행인들은 소나 말, 양 같아 보여요. 한 시도 멈추지 않고 말하고 빠른 속도로 콩을 튀기듯 소리를 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멈춰서서 양말을 한두 켤레 사갑니다. 꽤 장사가 잘 되는 편입니다. 그 분들 중에서 집에서 양말을 사야겠다고 계획한 이가 얼마나 될까요? 사람의 중추신경이라는 것은 아주 약하기에 조그만 자극에도 흔들리고 무너지기 쉽습니다. 양말 장수는 인간의 그 특성을 잘 알고 있지요. 양말 장수뿐만 아니라 대중을 상대하는 미디어 기업이나 출판업자에게 양말 장수의 지식은 생존의 필수 조건입니다.


빠른 속도에 의존하는 이 시장은 꽤 넓은 편입니다. 이런 시장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머리속이 하얘지거나 남는 게 없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신속한 것은 부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산책을 하다가 나무 아래 또는 풀꽃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땅을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5초 정도 정지해서 집중하면 그때야 개미의 세계가 보입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절대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나는 독서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서하는 시간 안에 그저 빨리 읽으려고만 한다면 책의 5%도 읽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명확히 단절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좀비 인간의 탄생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는 등 정보를 이런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무서운 까닭은 또 있습니다. 책이 책을 밀어내는 압력보다 더 강한 압력은 신문이 신문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세월호, 故 이민호 군 사건이 우리의 관심사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 생각해 보세요. 신문이 우리의 중추신경에 있는 중요한 가치들을 다 밀어내었기 때문입니다.


포털 뉴스를 클릭하면서 빠르게 받아들이면 비판정신을 가지고 신문을 보는 기회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뇌에 들이붓는 것처럼 편협한 정보와 편협한 견해를 가진 인간이 되죠. 이런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편견이 생깁니다. 이런 과정이 쌓이면 인간은 '좀비PC' 그 자체와 같아집니다. 해커가 좀비PC를 통해서 디도스 공격을 하는 것처럼, 주류 미디어와 주류 출판업자가 좀비인간을 이용해 자신의 의도에 따라서 여론을 조작합니다.


빠르게 읽으면 미디어 리터러시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건강한 언론이라는 것은 정보를 심삭숙고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독자층이 형성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우리나라에 그런 게 있을까요? 저는 책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책을 맛있게 읽는 독자층이 존재한다면 광고비를 쓸 수 없는 출판사가 좋은 책을 냈을 때 금방 발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출판사가 왜 베스트셀러에 목매달고,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인기 작가에게 선인세를 30억원 지불할까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보여준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에 지속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선경지명을 갖춘 리더가 아니라, 의견을 갖춘 평범한 시민이라고 말했죠.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나요? 지금 대한민국은 좀비인간을 대거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이 좀비인간인지도 모르는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기괴한 집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느리게 읽기의 한 가지 방법으로 제안하는 저의 메모 독서는 '자유'를 위한 도전입니다. 신문과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남의 의도에 따라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는지, 나 자신을 위해서 받아들이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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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터슨>을 보았습니다. 

마음속에서 시심이 폭발해서 견딜 수가 없군요. 

그래서 다섯 개의 영화를 더 묶어서 시 형식으로 짧게 감상을 써봤어요.

아마추어 시인이니까 이런 것도 괜찮겠죠?





네가 나폴리 바다의 숨소리를 들려주었을 때

글자들은 모두 달아나버려도 좋았다 

- 영화 <일 포스티노>



나는 소리만 들어도 네가 뜨는지 내리는지 알았다. 

오랫동안 활주로에 서서 네가 날기만을 기다렸으니까. 

-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내 심장은 백번도 더 불붙었지만

끝내 타버리지 않았다. 

재가 되어버린 네가 그립다. 

- 영화 <지니어스>




사랑은 권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는 사랑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사랑이 이상하게 꼬여버렸어. 

- 영화 <시인의 사랑>







시집만 보지 말고 나를 봐주세요. 

나만 보지 말고 내 친구를 봐주세요. 

메아리 소리가 아직 남아 있을 거예요.

귀를 기울이면 - 영화 <동주>




아하! 몰랐나요?

내가 여태 시를 들려줬잖아요?

하지만 받아적지 않았어도 괜찮아요. 

방금 당신 심장이 적었잖아요. 물방울에.

- 영화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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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1-13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너도 영화광이구나!
하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영화도 좋아하지.ㅋ

아, 일 포스티노는 다시 봐도 좋을 영환데 아직 다시 보지 못했다.
조만간 봐야겠네. <동주>도 그렇고.
그런데 <시인의 사랑>은 보다 결국 잤어. 재미었던데...ㅠ

승주나무 2018-01-14 20:18   좋아요 1 | URL
일 포스티노 꼭 보세요. 주인공이 영화 찍고 일주일 후엔가 안타깝게 세상을 떴어요. 그의 인생 영화가 되었죠. 시인의 사랑은 제 지인의 이야기가 영화화된 거라서 관심 있게 봤습니다^^ 현 시인이라고 있어요. 제주도의 명물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0487

stella.K 2018-01-15 13:58   좋아요 1 | URL
앗, 그래? 그럼 다시 봐야겠네.
평은 좋은 편이긴 한가 보더라.
졸릴 때 봐서 그런가..?ㅋ

승주나무 2018-01-18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면제 영화로도 괜찮죠. 깨어 있을 때 한번 봐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