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6] 동양의 시간에서 '나의 시간'을 찾다

길을 가다가 전화를 받습니다. 카드론 이자를 할인해주는 행사를 한다는 전화입니다. 이런 전화 요즘 너무 많이 와요. 텔레마케터도 사람이니까 최대한 정중히 거절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마지막 말에 내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번 달 30일까지 행사 기간이고, 그 후에는 더 높은 금리 적용되니까 생각해보세요. 

시간을 정해놓으면 시간이 자꾸 신경 쓰입니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했었는데, 평생토록 집안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남편에게 아내가 “빨래 좀 개켜줘. 7시까지 좀 부탁해.”라고 얘기합니다. 남편은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7시가 임박했을 때 재밌는 일이 벌어집니다. 한 번도 빨래를 개켜본 적이 없는 남편이 빨래를 개키고 있는 겁니다. 시간이란 건 참 신기합니다. 누구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지지만 24시간에 대한 감정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활용이 각자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간만에 주말에 가족과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한 시간이 금방 가버리죠. 시간이 느리게 가다가 갑자기 빠르게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울에 비해서 내 고향 제주도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는 느낌을 줍니다. 사람들도 천천히 걸어가지요.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서 지하철 5호선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내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느린 시간에 있다가 무척 빠른 시간으로 옮겨 왔으니 내 몸도 그 리듬에 적응하는 거지요. 내가 동양철학을 보면서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자기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성격이 굉장히 급하고 기분파에다 서두르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서두를 때마다 항상 넘어지고 빠뜨리게 됩니다. 동양철학은 인생 한두 해 살고 말 게 아니니까 마라토너처럼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라고 조언합니다. 

군자는 편안하게 머무르며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을 무릅쓰며 요행을 바란다. 
- <중용> 14장

무척 빠른 시간 안에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시간의 간섭을 엄청나게 많이 받습니다. 시간의 격한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흘리고, 헤어지게 됩니다. 유치원 버스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아이가 밥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여유를 부리면 마음이 급해져서 아이를 혼내게 됩니다. 우는 아이를 보면서 후회를 하고, 그 날 아침은 아이나 부모나 모두 속상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거죠. 시간은 결국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의 감정과 연결돼 있으며, 그것은 결국 성격과도 연결됩니다. 아이의 성격에 맞게 육아를 해야 하는 것처럼, 아이의 시간을 만들어주고 보호해주는 것도 무척 중요합니다. 부모가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면 아이는 자기의 시간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의 시간에 머물지 못하면 사람은 무척 불안해집니다. 누구나 자기의 시간이 있죠. 나는 순임금이 보여준 ‘자기 시간’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순임금은 밭에서 농사를 짓다가 황제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대단한 것은 밭일을 할 때나 나랏일을 할 때나 순임금은 자기 페이스를 유지했다는 겁니다. 

맹자가 말했다. "순이 깊은 산중에서 삶에 목석과 함께 살고, 사슴과 멧돼지와 놀아, 그가 깊은 산속의 시골사람과 다른 것은 거의 없었다. 그가 한마디 착한 말을 듣고 한 가지 착한 행동을 보게 되자, 마치 장강과 황하가 터져 나오듯, 도도히 흘러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 <맹자> 13-16

요임금은 순임금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테스트를 해본 결과 나라를 물려줘도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요임금은 그 자식 아홉 아들과 두 딸을 순임금에게 시집보내고, 백관들로 하여금 순임금을 섬기게 하고 나라의 곳간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순임금은 단지 부모님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주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고 사랑하지 않자 갈곳 없는 사람처럼 쓸쓸해 했다고 합니다. 순임금은 효(孝)를 상징하는 성인(聖人)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사람을 현혹시킬 만한 미녀와 재산과 권력보다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있었죠. 동양의 이상적인 삶은 자족하는 삶입니다. 자족하는 삶은 그냥 마음을 먹는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방해와 간섭을 뒤로 하고 마음 편한 상태에서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으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부모님 역시 ‘자기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동양의 군자처럼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고, 아이의 삶 역시 자족하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부귀한 처지라면 부귀한 대로 행하고, 빈천한 처지라면 빈천한 삶을 살며, 오랑캐 땅에 처하면 오랑캐의 법에 맞게 처신하고, 환난을 당하면 환난기의 방식으로 행동하니 군자는 어디를 가든 자족하지 않음이 없다. 
- 중용 14장

그러면 이제부터는 시간을 어떻게 극복하고 자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자기 시간을 갖고, 자기 페이스를 누구나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것을 이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간은 감정과 연결돼 있다고 했는데, 사랑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은 사랑이 가득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줍니다. 하지만 사랑을 별로 받고 자라지 못한 사람은 항상 사랑이 부족해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빨아들이지요. 아주 사무적인 남자, 요구만 하는 사람, 좀처럼 이야기를 섞기 어려운 사람, 딴지를 잘 거는 사람 등 주위에는 사귀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사랑의 채워짐’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부담스러운 캐릭터가 된 것이죠. 이런 사람들과 사귀어야 한다면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연민하고 사랑을 채워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사랑의 그릇이 크지 않아서 노력하면 충분히 채워줄 수 있지만, 이미 그 시기를 지나버리면 그릇은 커지고 사랑의 양이 적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때로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도 하니까요. 사랑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채워지면 자기의 시간을 찾아가기가 수월해집니다. 맹자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과 관계를 해야 하는데, 공간과 시간의 제약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 자기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맹자가 만장에게 일러 말했다. “한 고을의 우수한 선비는 바로 한 고을의 우수한 선비와 사귀고, 한 나라의 우수한 선비는 바로 한 나라의 우수한 선비와 사귀고, 천하의 우수한 선비는 바로 천하의 우수한 선비와 사귄다. 천하의 우수한 선비를 사귐으로써도 부족하다면, 또 나아가 옛사람을 논한다. 그의 시(詩)를 외고, 그의 책을 읽고도,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그래서 그 세대를 논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나아가 옛사람과 친구로 사귀는 것이다.”
- <맹자> 10-8

내가 동양철학으로 육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바로 '시간‘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동양철학이라고 부르는 중국 철학은 통일 진나라 이전의 사상서들을 말하는데, 대개 2,000년도 넘는 책들입니다. 2,000년이 넘는 시간을 자기 시간 안에 불러들였으니 그 혜택은 엄청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에도 2,000년을 거슬러 오른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고전은 바로 시간이니까요. 나의 시간 안에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 들어온다면 거기에는 내가 애타게 찾던 시간도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80년이라면 고작 80년의 시간 동안에 나의 시간을 찾기는 어렵겠지요. 철학이나 역사만 놓고 보면 2,000년 정도지만, 생물학이나 천문학을 보면 수십억 년의 시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단지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족(自足)과 편안함이니까요. <장자>의 첫머리에는 시간과 공간의 수많은 층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나옵니다. 대붕(大鵬)이라는 새는 등 넓이도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남명이라는 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이 삼천리이며 폭풍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 여섯 달이 되어야 쉰다고 합니다. 그리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번 날면 늘릅나무와 빗살나무까지‘ 겨우 날아갈 수 있고, 간혹 도달하지 못해 넘어지기도 하는 매미와 텃새는 대붕을 비웃습니다. 사는 기간이 짧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도 짧을 수밖에 없고 말도 역시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먼 옛날에는 큰 참죽나무가 있었는데 이것은 팔천 년을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데 팔백 년을 산 팽조는 지금껏 최장수라고 소문나서 사람마다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니 슬픈 일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작은 것과 큰 것의 분별이라 할 것이다.
- <장자> 1-2

인생에는 두 가지 시간 선택이 있습니다. 짧은 인생 맘껏 즐기다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나의 몸이 수십 수백억년 동안 살아간 우주와 함께 하고, 수천 수만 년 동안 살아간 인류와 함께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몸에 맞는 옷으로 입되 항상 자기와 다른 세계에서 다른 시간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인도’에는 수천 년의 시간이 공존한다는 말이 있는데, 인도뿐만 아니라 세상 어느 곳이든 아주 많은 시간들이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나의 시간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내 시간 안에 많은 시간이 있을수록 유리하겠지만 억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이 먼저 부모님에 맞는 시간을 선택하고 그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우니까요. 이것이 바로 동양이 말하는 ’자족(自足)‘하는 삶의 비결이며, ’자기 시간‘을 찾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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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5. 질문을 가지고 노는 육아법

태초에 질문이 있으라! 질문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입니다. 인문학을 한마디로 말해 ‘좋은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질문의 가치는 엄청납니다. 나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 다음에 말을 듣습니다. 어떤 질문을 받는 순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표정은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의외의 질문을 받았거나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긴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짧은 시간에 표정이 하는 말을 들으면 사실 대답은 표정의 확인일 뿐이죠. 나는 다름 사람에게도 자주 질문을 던지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을 던지면 ‘즉시’ 효과를 발휘하니까 평소에 좋은 질문을 만드는 연습을 합니다. 이 좋은 걸 육아에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손해일까요? 때로는 질문은 긴 잠을 깨우는 맑은 죽비가 되기도 합니다. 맹자가 제나라에 머무를 때 제나라는 새로 종을 만들었는데, 종에 소의 피를 뿌리는 흔종(釁鍾) 제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나라 선왕은 관리들이 희생양 소를 이끌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양으로 바꾸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은 소가 부르르 몸을 떨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가여워 양으로 바꿨지만, 백성들은 왕이 소 한 마리를 아까워해서 구차하게 양으로 바꾼 것이라고 흉을 봤습니다. 제선왕은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답답한 지경이었습니다. 맹자가 한마디 질문을 던지며 왕의 마음을 풀어 주었습니다. 

왕은 백성들이 왕을 인색하다고 여긴 것을 이상하다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었으니, 저들이 어찌 그 마음을 알겠습니까? 왕께서 만약 그놈이 죄 없이 도살장으로 가는 것을 측은하게 여기셨다면, 소와 양을 어째서 가리셨습니까?
- 맹자1-7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나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이나 불쌍하기는 매한가지인데, 제선왕은 소가 끌려가는 것만 보았을 뿐 양이 끌려가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를 양으로 바꾸는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제선왕은 자기도 모르는 마음을 어떻게 알았느냐며 깜짝 놀랍니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통해서 진실을 드러냈는데, 이 방법을 산파술(産婆術)이라고 부릅니다. 맹자도 공자도 산파술의 대가였습니다. 공자가 어떻게 제자의 물음에서 질문을 뽑아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강함'에 대해서 질문하자 공자가 대답했다. "남쪽 지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북쪽 지역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 중용 10장

질문을 하는 순간 질문을 받는 사람의 표정과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질문을 하는 사람 역시 마음이 읽힙니다. 자로는 평소에 강인한 인물이어서 자기의 ‘전공’(?) 분야인 ‘강함’에 대해서 스승에게 질문을 하고 인정을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공자는 제자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혹시 너의 강함을 말하는 것이냐?’고 되묻습니다. 질문에 이어서 공자는 ‘강함’이라고 해도 다 같은 ‘강함’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강함’이 있다고 설파합니다. 즉, 너그럽고 유연하게 가르쳐 주고 무도한 것에 대해 섣불리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쪽 지역의 강함이니 이것이 바로 ‘군자의 강함’입니다. 하지만 힘이 세고 싸움을 잘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함은 ‘강한 자의 강함’이라고 구분합니다. 
아이들이 밥을 안 먹을 때, 전화기를 달라고 투정을 부릴 때, 엄마 아빠를 때릴 때, 침을 뱉을 때, 잠옷을 입고 유치원에 가겠다고 억지를 부릴 때 부모는 화딱지가 납니다. 한 대 쥐어박아주거나 큰소리로 혼내면 주눅이 들어서 행동을 멈추지만, 다음에는 더 심하게 행동합니다. 아이와 군비(軍費)경쟁을 계속 해야만 할까요? 
아이가 ‘문제의 행동’을 하면 머릿속에 역할극이나 소꿉장난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예를 들어 병원놀이를 할 때 아이는 한 번은 의사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간호사가 되기도 하고 환자가 되기도 합니다. 역할을 번갈아가면서 바꿉니다. 의사가 된 날은 청진기를 배에 들이대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고, 간호사가 된 날은 의사의 말에 따라 주사를 놓는 일을 하고, 환자가 된 날은 어디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시늉을 합니다. 병원놀이처럼 실제 세계의 역할도 계속 달라집니다. 다만 지금은 아이가 나쁜 행동을 하는 아이 역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조금 어른스러운 역할놀이로 이야기를 해볼까요? 세미나 놀이를 생각해 봅시다. 세미나를 할 때 발제자가 있고 토론자가 있는데, 아이들과 일상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행동으로서 발제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서로 갖겠다고 싸우는 모습은 이렇게 질문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서로 자기가 갖겠다고 하거나, 두 친구가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난감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중재하는 게 좋을까요?”

이렇게 질문으로 해석하면 아이들이 싸우는 것이 단순히 투정으로만 보이지 않고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가 중재하는 입장, 아이들은 다투는 입장이 되지만 나중에는 아이들이 중재하는 입장으로 바뀔 여지는 충분하죠. 가정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은 학교나 사회에서 때로는 이런 방식으로 때로는 저런 방식으로 펼쳐집니다. 결국 사회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의 기원은 ‘가정’에 있는 셈입니다. 
둘째 민서를 차에 태우고 어린이집에서 집으로 가려고 합니다. 민서가 차의 앞자리에 앉았는데 안전벨트를 매지 않아서 벨트를 메라고 말을 했습니다. 

“민서야, 안전띠 매야지!”

민서는 “안전띠 아니거든, 안전벨트거든!”이라고 소리칩니다. 이것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안전띠와 안전벨트의 연관관계가 무엇인가?”

그제서야 나는 민서에게 “민서야, 안전띠와 안전벨트는 같은 말이야.”라고 말해줍니다. 민서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맵니다. 사실 아이들은 온몸으로 부모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없는 질문’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있는 질문’을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것이죠. 때문에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상황은 이렇게 질문으로 번역하는 게 가능한데, 번역을 하면 부모는 어떻게 대응할지 감을 잡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질문으로 번역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아이의 행동을 질문으로 한번 번역해보기 시작하면 점점 쉬워질 테니까요. 
동양의 질문법 중에서 가장 감명을 줬던 것은 이른바 '나 질문법‘이었습니다. 어떤 현상을 보면 거기서 ’나‘를 발견해내는 방법입니다. 모든 현상에는 ’나‘가 반영돼 있는데, 감춰져 있다 보니 ’나‘를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가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 문제에서 ’나‘가 사라질 때 문제의 원인도 사라지고, 해결의 가능성도 사라집니다. 그 현상에 ’나‘가 없었다면, 왜 그 현상이 내 옆에 있는 것이고, 왜 나에게 온 것일까요? 바로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춰진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 질문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부터 ’나 질문법‘의 응용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부모님 강연을 하면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때마다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 아이가 자존감이 너무 낮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아이는 책을 혼자서 읽는 법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아이는 책을 읽고 나서 책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라면 잘 못 하는데 걱정이에요.” “우리 아이는 학습만화에만 빠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머니들은 아이의 부정적인 특징을 분석하는 데 전문가 같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러면 아이의 좋은 점은 뭔가요?” 라고 물어보면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 질문법‘은 부모님이 생각하는 의문을 더 나은 질문으로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부모님이 아이에 대해서 떠오르는 질문에 ‘나’를 담아 보면 됩니다. 
“우리 아이가 자존감이 너무 약한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은 “나의 어떤 태도가 아이의 자존감을 약하게 만들었을까요?”로 바꿔서 질문을 해결하려고 하면 훨씬 더 나은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이가 책을 항상 읽어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는 질문 역시 “내가 어떤 모습을 보였길래 아이가 스스로 읽는 방법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까요?”로 바꿔보면 문제가 분명히 보입니다. 이게 효과를 발휘하는 까닭은 애초에 어머니들이 던졌던 질문에는 ‘나’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존감이 약한 이유가 부모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이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질문법’은 아이가 잘못한 원인이 부모에게 있다는 말이기 때문에 부모로서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면서 문제의 원인을 가만히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부모와 만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왜 부모에게 책을 읽어달라고만 하고 스스로 찾아서 읽을 줄 모를까요? 스스로 찾아서 읽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부모입니다. 결국 원인은 부모에게 있는 것이죠. 맹자는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좇아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잘 썼는데, 어찌 보면 집요해 보이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바른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맹자가 평륙에 가서, 그 대부에게 말했다. "그대의 창을 가진 병사가 하루에 세 차례나 대오를 이탈하였다면, 이를 없애버리지 않겠습니까?" 
공거심(대부) : "세 차례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맹자 : "그렇다면 그대가 대오를 이탈함 역시 많을 것이오. 흉년과 기근이 든 해에 그대의 백성 중에 늙고 허약한 사람의 시체가 개천이나 산골짜기에 굴러다니고, 젊은이는 흩어져 사방으로 떠나간 사람이 거의 천 명이나 될 것입니다." 
공거심 : "이것은 공거심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맹자 : 이제 다른 사람의 소와 양을 받아서 그를 대신하여 그것을 기르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를 대신하여 목장과 풀밭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목장과 풀밭을 찾았으나 찾아낼 수 없었다면, 그 주인에게 그것을 되돌려 주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두커니 서서 그것이 죽는 것을 빤히 보고 있겠습니까?"
공거심 :  "이것은 공거심의 잘못입니다."
- 맹자4-4

맹자는 제나라의 왕에게도 이 사례를 이야기하고 청문을 한 끝에 왕에게 “이것은 과인의 잘못이오.”라는 대답을 들어냈습니다. 연애를 할 때는 상대방이 궁금하고 호기심이 생기고 알고 싶습니다. 모든 게 의문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상대방이 궁금하지 않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지요.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궁금함은 사랑입니다. 육아를 하면서 아이와 어떤 일을 경험할 때 궁금한 부모와 궁금하지 않은 부모에 따라서 반응이 전혀 달라집니다. 궁금함은 사랑의 시작이고, 궁금하지 않음은 사랑의 끝입니다. 아이의 행동을 질문으로 번역해서 스스로에게도 던져 보고, 아이와 물음표(?)를 서로 나누면서 대화를 계속 하면 사랑은 떠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애착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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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4] 아이는 배우는 부모를 배운다

수원역을 지나가는데 누가 나에게 말을 겁니다. 

“혹시 도를 아십니까?”

전국 어디서나 도인들을 볼 수 있지만, 나는 부모님이야말로 진정한 도인이자 교육자라고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다 보면 도 닦는 기분이 드는 부모님이 많을 겁니다. 그 때는 도 닦는 기분이 아니라 진짜 도 닦는 겁니다. 밥을 안 먹고 뛰면서 돌아다니는 아이, 숟가락을 손으로 쳐서 밥알을 땅에 다 떨어뜨리는 아이, 밥상을 북으로 삼고 숟가락과 포크로 탕탕 두드리는 아이, 서로 TV가 잘 보이는 쪽에 앉겠다고 싸우는 아이들, 발을 밥상 위에 올리는 아이, 갑자기 일어서며 그릇을 엎어버리는 아이를 혼내지 않고 끝까지 밥을 먹이는 일은 웬만한 도인의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 때문에 도인이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배우자 때문에 도인이 되는 분도 참 많습니다. 무척 권위적이고 완고한 남편과 함께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던 한 어머니는 자신은 ‘독재자의 성’에 수십 년 동안 갇혀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이 육아 고민을 이야기할 때 척척 대답하고 심리학에 대한 식견도 대단했습니다. 자못 도인의 풍모가 느껴졌습니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 도인의 경지가 된 겁니다. 갑자기 도 닦는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동양철학이 도와 가르침을 연결해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용>은 첫머리부터 ‘교육’ 이야기를 하는데, 거창하면서도 오묘합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바로 그 성의 결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며, 도를 익히고 수련하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떠나버리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진중하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 
- 중용1장

마치 하늘에서 사람을 내려보낼 때(아이가 태어날 때) 고유한 바코드를 찍어준 것처럼, 사람마다 타고난 하늘의 명령이라는 게 중용의 철학입니다. 급한 성품을 타고 났다면 급한 성품대로, 쾌활한 성품을 타고 났다면 쾌활한 성품대로 잘 기르는 것이 바로 도(道)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평상시에 자신의 아이의 성격에 대해서 불평하며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부모님, 실제로 성격을 바꾸려고 하는 부모님들은 도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때문에 무척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이든 진지하게 생각하는 버릇과 한 번 빠지면 엄청나게 몰입하는 버릇이 있어서 싫어했지만 결국 이 성격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첫째 민준이는 눈이 커서 그런지 눈물이 많습니다. 어떤 날은 약해 빠졌다고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걸 고치려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눈물이 많다는 것은 감정이 풍부하다는 뜻이고, 풍부한 감정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도는 나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고, 나와 상관없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닙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중용의 화두는 집에서 도 닦는 부모님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하늘로부터 명령을 받은 사람의 품성을 다 모아 보면 결국 ‘인간성(人間性)’이 완성됩니다. 인간의 도인 것이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살다 보면 가끔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인간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다름 아닌 ‘수도(修道)’입니다. 도망간 마음을 잡고 나의 중심을 잡으려고 하루 하루 애를 쓰는 것. 그것이 바로 중용이 말하는 ‘가르침’[敎]입니다. 동양은 가르치는 것과 가르치려 드는 것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사람의 병폐는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함에 있다.”(7-23)
- 맹자7-23

그래서 감히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교육을 시킨다기보다는 교육 효과가 있을 뿐이죠. 서울여자대학교 김창옥 교수가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학창 시절 교수님께 들었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공고를 나와서 성악과에 들어갔을 때 예고 나온 친구들에게 잔뜩 주눅이 들어서 과시욕이 생기고 어깨와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대학생 김창옥에게 성악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악은 보여주는 게 아니야. 보여지는 거지. 
음악은 들려주는 게 아니야. 들려지는 거지. 
- YTN 공감인터뷰 ‘김창옥 편’

아이를 키우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아이는 부모가 의도하지 않는 것을 더 잘 배운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이런  저런 모습으로 갔으면 하는 마음을 갖지만 아이는 도리어 의도하지 않는 것을 배우죠. 민준이가 밥을 안 먹고 딴짓을 계속 하자 참다 못해 민준이에게 “밥을 계속 안먹으면 밥 치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민준이는 이 말을 듣고도 계속 딴전을 피웁니다. 그래서 정말 식판을 싱크대 위에 올려 놓아 버렸습니다. 민준이는 안 된다며 울고불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게 교육 효과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민준이는 동생 민서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민서 너 밥 안 먹고 딴짓 하면 밥 치운다.” 이렇게 얘기하고 나서 민준이는 민서 식판을 들고 가 버렸습니다. 민서는 밥을 내놓으라고 막 울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아이에게 밥을 먹게 만들기 위해서 식판을 치웠던 것인데, 민준이는 내 의도를 보지 않고 식판을 치운 것을 기억하고 있다가 동생의 식판을 치워 버린 것입니다. 
어느 부모이든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자식에게 많은 것을 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받아들이는 것은 부모의 의도만이 아니란 것을 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이가 돈을 버느라 지친 엄마의 표정을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엄마의 행복하지 않은 표정을 보면서 아이도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표정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과는 부모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어떤 부모님은 말로는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표정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부모의 관념이고(사실은 ‘나는 행복해야만 해’라고 생각하는 거죠) 행복하지 않다는 표정은 실제 세계입니다. 아이들은 실제 세계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까지 계속 의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양은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모두 배우는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부모도 아이에게 배우고, 아이도 부모에게 배운다는 것이 동양의 생각이었고, 부모가 아이를 가르친다는 일방적인 모습은 동양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공자 역시 자신이 틀릴 때가 있고, 누군가가 지적해주면 고마워했습니다. 

진나라의 사패가 물었다. "소공은 예를 압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예를 압니다."
공자께서 물러가시자, 사패가 무마기에게 읍하고 다가가서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군자는 편을 들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군자도 역시 편을 드는가요? 노나라 임금은 오나라에서 부인을 맞아 왔는데, 그들은 같은 성씨였기 때문에 부인을 오맹자라 불렀습니다. 그런 임금이 예를 안다면 누가 예를 모르겠습니까?"
무마기가 이 말을 공자께 아뢰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행복하구나. 내게 잘못이 있으면 남이 꼭 지적해 주니 말이다."
- <논어> 7-30

육아는 예술과도 같습니다. 아름다운 가르침은 항상 향기가 피어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났습니다. 타고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를 가르쳐주신 김덕신 선생님을 아직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수업 시간에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엉덩이를 들썩이다 보면 어느새 의자가 책상 옆에 튀어나와 있습니다. 선생님은 자리로 들어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도 엉덩이를 들썩이며 의자가 계속 옆으로 튀어나왔고 선생님은 몇 번 더 지적하셨는데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수업을 하다 멈추시고 지휘봉을 가지고 무서운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 무서운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선생님의 얼굴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오싹거릴 정도로 충격이었습니다. 제 자리 옆에까지 오신 선생님은 지휘봉으로 내가 아니라 ‘내 의자’를 치셨습니다. 

"너 때문에 우리 승주가 지적받잖아. 얼른 자리로 들어가고 다음부터는 나오지 말아!"

선생님께 혼날 줄 알고 잔뜩 겁을 먹고 있었던 나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엉덩이를 들썩이는 습관이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20년도 넘은 이 사건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마치 위대한 예술작품을 본 것처럼 내 마음에 남아서 향기를 내고 있습니다. 내 어머니도 훌륭한 스승 중 한 명이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칠순을 앞두고 있고 초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제주 해녀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보면서 가르치려 하지 않고 가르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남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좋은 말은 가슴속에 담아둡니다. 그리고 잘못이 있다면 사과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공동집필을 참여해 쓴 책을 어머니께 선물로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30여 명이 참여해서 제가 쓴 분량은 4쪽 남짓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쓴 분량이 너무 작다며 아쉬워하셨습니다. 저도 제가 조금 밖에 쓰지 못한 책을 선물해드리기가 민망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며칠 동안 이 일을 가슴에 담아 두시다가 마침내 전화를 하셔서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아들이 고생해서 쓴 책인데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어머니께 반드시 내가 쓴 책을 선물해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듬해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선물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부모로서 잘못한 일이 많았는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과를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게 된 데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컸습니다. <중용>에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용기다.”(知恥 近乎勇, 20장)라는 말이 나옵니다. 설령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할지라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고, 사과해야 할 일은 사과를 해야 하는 모습은 가족에게만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용기를 배웠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여러 가정의 부모와 교유하다 보면 많은 아이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는 잘못을 하고 나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니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마치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두려움을 이기고 사과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부가 서로에게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고, 부모가 아이에게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합니다. 사과를 했을 때 재미난 놀이를 더 많이 할 수 있고, 재밌는 대화를 계속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동양에서는 배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거의 같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우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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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 2013-12-1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기억은 향기가 나네요.
그 기억을 살려 향기나는 글을 쓰는 승주나무를 응원합니다.
다음에 꼭 뵙고 인사드릴게요.

승주나무 2013-12-10 14:27   좋아요 0 | URL
찐빵 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글로 보답할게요. 저도 다음에 한번 뵙고 싶네요. 내년 5월 가정의 달에 맞춰 이 글이 책으로 나올 예정인데, 따뜻한 봄에 한번 뵙기를 바랍니다^^
 

대학 때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김수영, 정지용, 기형도 등의 시집을 많이 읽었는데

죄다 한자로 쓰여 있어서 기본한자 1,800자를 공부하면서 시집을 읽었다.
한자 공부한느 게 너무 어려웠다.

2001년 우연히 선배의 손을 잡고 서당에 갔다.
동양철학의 세계를 처음 봤을 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한자가 두 개 이상 연결되었을 때는 엄청난 화학 반응이 나오는데,

때로는 핵물리학적인 반응이 나온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훈장님에게는 대학, 중용, 맹자, 논어를 배웠는데 따로 사기열전, 삼국유사 등 동양고전을 찾아 읽었다.

그때는 왜 읽는다는 생각도 없이 읽었다.

 

동양고전을 13년 동안 읽으면서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번역본을 찾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철학을 읽는 10년은 좋은 번역본과의 전쟁이었다. 좋은 책으로 처음부터 시작했더라면 논어만 10여권을 읽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0년만에 묵점 기세춘이라는 선생의 책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동양철학뿐만 아니라 서양철학, 심리학, 구조주의 등 거의 모든 철학을 평생 동안 공부하신 내공이 번역 곳곳에 담겨 있다. 그 분의 번역 작업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거의 다 구매를 하고 읽고 있다. 출판의 기회를 찾기가 참 어려우셨다고 쓰셨는데 이해가 간다. 일반 독자들이 조금만 눈이 밝다면 최소한 지금 도올의 자리에 그 분이 있을 것이다. 노자, 장자, 논어, 묵자까지 나왔는데 나머지 책도 번역해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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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읽는 동양철학] 13. 동양철학을 육아서로 읽는 방법


지금까지 동양철학을 육아서로 읽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나도 10여 년 동안 동양철학을 읽으면서 육아서로 읽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5년 동안, 가족들을 만나러 다니는 2년 동안 ‘육아서’로서 동양철학을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5년 전 첫째 민준이가 태어나고 나서 목욕시키고 밥도 먹이고 잠도 재우고 뒹구는 동안 노자의 철학을 몸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육체를 다스리는 넋과 정신을 다스리는 넋을 몸에 실어 하나로 하되 서로 헤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 숨을 오로지 하여 부드러워지되 젖먹이처럼 할 수 있겠느냐?

- 도덕경 10장


해본 사람들은 다 공감하는 이야기이지만 아이 재우는 거, 아이 먹이는 거, 아이랑 노는 것 중에서 하나도 만만한 게 없습니다. 하다못해 자장가를 불러줄 때도 정신을 집중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부릅니다. 아이랑 놀다가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내 들통이 납니다. 엄마 아빠와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얘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얘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나는 얘를 사랑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부터 동양철학을 집중적으로 읽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육아서로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심리학자 매슬로가 노자 도교를 탐독하고 연구한 사례를 소개했는데 매슬로는 도교와 불교철학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매슬로가 제안한 용어 중에서 B-인지(존재인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관찰할 때 대상이 관찰자에게 가지는 가치, 이해관계, 욕구나 좌절 등 여러 감정적인 자극과는 전혀 무관하게, 대상을 그 자체로서 정당하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B-인지를 존재인지, 자기초월적 인지, 이타적 인지, 객관적 인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심리치료사나 상담사가 자신을 찾아온 내담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발휘하는 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란 굉장히 많은 감정이 연결돼 있는 관계이지만, B-인지를 익히면 감정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해주기도 합니다. 매슬로는 노자에게서 B-인지 개념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그러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B-인지는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고 수용적이다. 동양철학자들, 특히 노자와 도교 철학자들이 이와 같은 일종의 '수동적' 인지를 가장 잘 기술하고 있다. 

- 매슬로, <존재의 심리학> 206


매슬로뿐만 아니라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과 <심리학의 원리> 등을 쓴 ‘현대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역시 인도철학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현대심리학의 고전적 반열에 오른 지성들이 깊이 공부한 만큼 동양철학은 심리학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이 육아서로서 제격인 이유는 이야기의 소재가 무척 구체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동양철학이 직관적이고 뜬구름잡는 이야기 같다고 편견을 갖지만 동양철학, 그 중에서도 유학과 제자백가의 철학은 무척 현실적입니다. 유학은 중국 한나라의 공식 철학으로 선포되었고 조선시대의 국시이기도 했습니다. 다분히 정치적인 학문이고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치가 무척 많았습니다. 경서 중에 <시경(詩經)>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중국은 땅이 넓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통일이 되어도 몇몇 지역에서 들고일어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잘 다스려질 때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중앙정부의 백성임을 자처하기도 했습니다. 국가가 잘 다스려질 적에 중앙정부는 전국 곳곳에 채록관(採錄官)을 파견했습니다. 채록관은 백성들이 왕을 욕하는 말이나, 욕하는 노래 등을 모아다가 중앙정부에 보고하였고 중앙정부는 이를 정책에 집중적으로 반영했습니다. <맹자>에 나오는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사람들’ 이야기를 보면 그 흔적을 알 수 있습니다.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을 홀아비라 하고, 늙고 남편이 없는 사람을 과부라고 하며, 늙고 자식이 없으면 독거노인이라 하고, 어리고 아비가 없으면 고아라고 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 궁핍한 백성으로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입니다. 문왕(文王)이 정책을 착수하여 인정을 실시함에 반드시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우선했습니다. 『시경』에는, ‘부유한 사람은 살아갈 만하지만, 이 외롭고 의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가련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 맹자2-5


정치인뿐만 아니라 선비들 역시 철학을 펼칠 때 엄격하게 지킨 원칙이 있었습니다. 형이상학 같은 어렵고 추상적인 말을 하지 말고 당시 서민들이 쓰는 언어와 상식 안에서 철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서문에는 선비들이 따르던 철학하기의 원칙이 있습니다. 


(전국 곳곳에 학교를 설립한 취지를 보면) 학교의 교육 내용은 모두 지도자가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체득한 나머지에 근거하고, 서민들이 날마다 쓰는 평범한 일상의 용어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 <대학> 서문


일반 서민의 생활에서 쓰는 용어를 많이 쓴 사례는 동양철학의 책 곳곳에 나옵니다. 맹자는 자신이 설파한 핵심 개념인 사단(四端 : 인의예지(仁義禮智)), 그 중에서도 인(仁)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갓난아이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데 우물가에서 어떤 아이가 기어서 우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봤다면 그 사람이 사채업자이든 살인범이든 불량배든 간에 아기를 구해 놓고 본다는 것이죠. 그 사람이 아이를 구하는 것은 아이 아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도 아니고, 아이를 구해준 보상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중용> 역시 핵심 개념인 ‘중용’을 설명할 때 ‘부부’ 이야기를 합니다. 


어리석은 부부라 하더라도 도를 알 만큼 뻔하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다 헤아리지 못하며, 못난 부부도 실천할 수 있을 만큼 쉽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다 해내지 못한다. 

- 중용 12장


동양철학에서 육아서의 가능성이 보이나요? 부모님들에게 동양철학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까지 2년 정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책을 가지고 놀이를 하면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랑을 확인해 행복하게 해주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사람에 대한 이해’를 강의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심스럽게 인문학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주 천천히, 부모님들의 눈빛을 확인하면서 이야기를 건네는데 반응이 무척 놀라웠습니다. 마치 꼭 들었어야 하는 이야기를 뒤늦게 배운 것처럼 인문학 강의의 흡수가 굉장히 빨랐습니다. 어머니들은 내 인문학 창고에 있는 것을 다 내놓으라고 압박했습니다. 다 꺼내놓았지만 동양철학만큼은 꺼내지 않았습니다. 육아와 동양철학은 얼핏 보면 별 연관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로 심리학과 철학, 사회학, 문학 쪽에서 육아 이야기를 꺼내놓다가 간헐적으로 몇몇 구절을 꺼냈을 때 뜨거웠던 반응을 잊을 수 없습니다. 본격적으로 동양철학을 육아와 연관시켜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는데, 강의가 끝나고 나면 어머니들의 책상에는 논어책이나 노자 책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대학 때 역사학을 전공해서 지금은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는 한 엄마는 “선생님 때문에 20년 만에 사서삼경 책을 꺼내들었어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논어나 노자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몇 권 소개해주면 다음 강의에는 그 책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이 냄비 근성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만큼 똑똑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구매하는 것도 소비인 만큼 꼼꼼히 따져보고 사는 어머니들이 동양철학 책을 기꺼이 구매해서 읽는다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동양철학 책을 어떻게 육아서로 읽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아주 쉽습니다. 마음속에 아이들과 배우자, 그리고 가족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됩니다. 사람의 두뇌는 참 신기한 물건이어서, 마음속에 하나의 대상을 생각하면 내가 잠을 자고 있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그 대상에 매달립니다. 내가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논어책을 읽으면 벌써 두뇌는 동양철학을 육아서로 읽을 준비를 마쳐 놓습니다. 저 역시 이 방법을 통해서 육아에 관한 동양철학의 구절을 하나하나 건져냈고 부모님들에게 공감을 얻었습니다. 예컨대 공자가 제자와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서도 가족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논어 구절은 훌륭한 ‘가족 강의’가 됩니다. 한 구절만 응용해 봅니다. 이른바 ‘너나 잘하세요’ 정신입니다. 


자공이 다른 사람을 비교하며 논평하자 공자가 말했다. "사야, 너는 나보다 뛰어난가 보구나! 나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단다.“ 논어14-31


자공은 공자가 아끼는 제자 중에서 안연 다음으로 비중이 큰 제자입니다. ‘사(賜)’는 자공의 이름입니다. 뒷말과 험담은 우리에게 무척 익숙합니다. 부모 강의를 가면 배우자에 대한 성토, 아이들에 대한 성토를 하는 부모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지적을 하는 것은 무척 쉽지만, 그 점을 고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아이가 맘에 안 드는 것이 있다면 그 점을 계속 늘어놓을 게 아니라 하나라도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고, 해결을 하려고 노력하면 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노력 끝에 아이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면 대단한 일이지요. 혹시 내가 가족의 단점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았는지 이 구절을 통해서 돌아볼 수 있습니다. 동양철학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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