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6년 3~4월 - 통권 87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
- 세상을 보는 녹색 색안경

1. 다른 시선

우리는 한쪽 눈을 감은 채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요즘 나타나는 현상은 ‘약자들의 약자들에 대한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철 파업, 철도 파업은 불공정한 탄압과 회사 측의 일방적 조치에 대한 반발이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발을 묶는 불법 행위’라고밖에 보지 않는다. 법이 정당하게 집행되고 있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행위의 위법성만 따지려 한다. 언론도 노동운동의 사정을 자세히 보도하지 않고, 눈에 드러난 것만 기사화해서 전달하는 단세포 매체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노동운동도 자본가들의 횡포도 모두 비판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1) 철도파업에 대한 신문기사

철도파업에 버스·택시잡기 ‘전쟁’
입력: 2006년 03월 02일 18:10:48  : 1  : 1
 
철도노조 파업 이틀째인 2일 출퇴근길 직장인들과 등·하교길 학생들이 수도권 전철에 집중되면서 우려했던 큰 혼란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국철과 수도권 전철은 파업으로 직접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지하철 노선과 버스, 택시에도 여파가 미쳐 연쇄 혼잡 사태가 빚어졌다.
◇출퇴근 모두 고생길=이날 오전 수도권 전철 구간의 각 역무실에서는 직장인들이 회사에 제출할 ‘지연증명서’를 끊느라 또다른 혼잡을 빚었다. 평일 하루 1~2장 발부되는 지연증명서가 이날에는 신도림역에서만 70~80장, 시청역에서 60여장 발부됐다.
회사원 백모씨(26·여)는 “아침에 30분이면 오는 거리를 1시간 걸려 출근했다”며 “열차가 만원이어서 5대를 그대로 보냈다”고 푸념했다. 그는 “오늘은 아예 밤늦게 집에 들어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퇴근길 상황도 마찬가지. 지하철 1호선 서울역 통로는 전동차를 타려는 사람들과 내리는 사람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을 방불케했다. 학생 곽모양(17)은 “등교길에도 엄청 고생했는데 또다시 ‘만원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다”고 하소연했다.
철도 이용객들의 불편도 이어졌다. 대학 입학식을 위해 부산에서 올라온 최서영씨(20·여)는 “부산역은 서울역보다 2~3배는 더 붐비고 혼란스럽다”며 “가족이 내려갈 표가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버스 타기도 쉽지 않아=이날 오전 노량진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조윤상씨(24·여)는 “노량진역에서 15분 넘게 전동차를 기다리다가 결국 버스 타러 나왔는데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왕십리역 인근 노상에서 황귀남씨(36)는 “택시를 30분 넘게 기다리고 있다”며 “택시 잡는 경쟁도 심해 벌써 몇번째 새치기를 당했다”고 불평했다.
퇴근길 시청역 출구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서수미씨(23·여)는 “전철을 타고 부천에서 출근했는데 생각하기도 싫다”며 “버스를 타고 퇴근하려는데 10분이 지났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터미널·공항도 ‘북적’=전철이 파행을 빚자 수도권 지역으로 출퇴근하거나 지방을 오가는 시민들은 고속버스터미널과 공항으로 몰렸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이날 오전 이용승객이 평소보다 40% 이상 늘었다. 김포공항도 마찬가지. 대한항공은 이날 여객기 탑승률이 평소(60~65%)보다 높은 85%를 웃돌았다. 아시아나항공도 이날 김포~부산 노선에 2편을 증편했다.


(2) 철도파업에 대한 녹색평론의 글

노동운동의 ‘희망없음’을 되뇌면서 냉소적․비관적으로만 이 문제에 응대하거나, 노동문제들의 모든 투쟁을 백안시하는 태도는 우리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다 접어두고라도, 최근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것이 비록 정부와 철도공사의 엄청난 이데올로기 공세와 파렴치한 탄압에 의해 단 나흘 만에 종결되고 말았지만, 그 파업의 최대 목표가 다름 아닌 ‘철도의 상업화’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엄연한 풀뿌리 민중의 공유재인 철도를 소수 대자본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려는 기도를 막는 것이야말로 이번 파업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는 것은, 그러나 우리사회 전체에 충분히 전달되지도, 알려지지도 못하였다. 그뿐 아니라 철도 노동자들은 또 한번 고립된 채‘ 국민의 발’을 볼모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주류 언론들에 의해 매도당해 버렸고, 그 언론들이 주도한 ‘여론’에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편승해 버렸다.
하지만 이번 파업의 전후 맥락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들이라면, 이번 투쟁에서 ‘사회 공공적 노동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좀더 복잡한 맥락과 논의가 그 속에 있었을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은 되지만, 어쨌거나 비정규직 악법 저지를 위해 ‘총파업’을 선언했던 민주노총이 이번 철도 노조의 파업에 효과적으로 연대하지 못했던 점, 그리고 우리 시민사회 전체가 철도 파업의 의의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응원을 보내지 못했던 점 등은 물론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위와 같이 동일한 사건을 보는 시선은 전혀 다르다. 대체로 언론은 시민들의 불편을 중심으로 다루었고, 녹색평론은 사건의 본질을 내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들이 오늘날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격렬한 투쟁 방식에 대해서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전근대적인 투쟁방식도 있지만, 점점 본질을 보는 눈이 멀어지는 세태에도 원인이 있다. 게다가 언론 등의 매체들은 이러한 피상적 가치관을 조장하고 있다. 녹색평론은 사건 이면에 있는 사정에 대해서 시선을 제공함으로써 폭넓은 이해를 돕고 있다.
 
2. 자본주의의 감시자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난 이후에 자본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노골적인 생리를 드러내고 있다.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 자본은 지역 경제를 파괴하고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진통을 겪고 있는 쌀 협상과 스크린쿼터 축소 등이 그것이다.
현 정부 역시 국가경쟁력, 경제 발전을 이유로 우리의 농촌을 개발기지로 만들고 우리 생활의 근간이 되는 영역을 하나하나 뿌리 뽑고 있다.
녹색평론은 농민과 노동자, 약자의 입장에서 거대 자본과 당국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잘 아시다시피 정부와 보수 정치권에서 농업은 부차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입니다. 전체 시장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부분, 가령 GDP라는 숫자로 대변되는 경제구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기 때문에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쌀협상 과정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는데요. 쌀농사, 농업을 아주 버리기는 아직 국민정서나 농민의 요구 때문에 어렵고, 그래서 이런저런 수사(修辭)들을 덧붙이는 수준에 불과한 대응으로 일관해왔습니다. 애초부터 잘못된 쌀협상안을 두고 국정감사까지 거쳤고, 3차례나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회의장 점거하고 한 달간 단식농성을 벌여도 우리 농업을 살리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대응을 모색하기보다는 눈치만 보다가 비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부정책도 농업을 근본적으로 지키기보다는 어떻게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반발을 최소화할까에 맞춰져 있습니다.
……
현 정부는 대자본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 내에서도 농림부 쪽은 좀 다르겠지요. 물론 기본적으로 농업을 포기한 농정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래도 농업이 명목상으로라도 유지되어야 예산도 챙기고 조직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정부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대자본의 이익을 대변해서 농업을 쓸어버리려 하고, 농림부 관련 기관에서는 되지도 않을 기업농 육성 운운하면서 무언가 꼬투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뻔히 알면서 말이지요. 농업지원 예산 119조원이니 하는 논리가 다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정부 내에서도 말하자면 알력이 있는데, 그나마 농림부 쪽이 열세로 밀리고 있는 형국이지요. 농업기반공사가 한국농촌공사로 이름을 바꾼 것도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할 겁니다.
과거에는 법적 용어가 전부 ‘농민’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된 이후에 법조문을 손질하면서 전부다 ‘농업인’, ‘농어업인’이렇게 고치지 않았습니까. 소위 ‘경영인’으로서 존재를 규정한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이해관계 논리 속에 농민을 철저하게 편입시킨 것입니다. 사실 ‘농민’이라고 하면 자본주의 체제 혹은 제도 속에 완전히 편입된 개념이 아니거든요.
마찬가지로, 그래도 ‘농업기반공사’라고 할 때에는 어떻게든 농업을 가지고 어떻게 해보겠다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이제는 ‘농촌공사’라는 이름 그대로 농촌을 ‘개발’하는 쪽으로 가겠다고 하는 현 정권의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봅니다. 토지공사, 주택공사, 도로공사처럼 길닦고 아파트 짓는 개발의 대상으로서 농촌을 보고 있는 것이지요.

현재의 농업 정책은 한마디로 속수무책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야당의원들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국회 투쟁을 벌여도 그것은 무너져 가는 농업 앞에서는 헛된 몸부림에 불과하며 보여주기 위한 전시행정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수십, 수백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해도 자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농업의 미래는 없다.
위 글에서는 당국의 이중성과 함께 책임을 회피하려는 면피주의적 성향을 볼 수 있다. 농업 회생을 위한 고민은 온데간데없고 적당히 포장해 얼버무리려는 행정편의적 발상만이 남아 있다.
농민이라는 용어가 ‘농업인’으로 바뀌고, ‘농업기반공사’가 ‘농촌공사’로 바뀐 것은 자본주의의 사슬이 농촌에 드리워졌음을 말해준다. 그 구체적 현상으로는 농촌을 ‘수확’의 대상이 아니라 ‘개발’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글처럼 농민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던 국가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서구에서 넘어온 자본주의 체제에는 완전히 편입될 수 없었다. 농촌을 개발한다는 것은 농촌을 도시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지금까지 ‘식량’이라는 개념에 ‘가치’를 평가하겠다는 말이다. 즉 ‘돈’으로 모든 작물을 구획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다.

모든 소농경제 국가, 예컨대 일본, 한국, 중국 등은 어느 나라든 강력한 국제 농산물 시장의 압력에 직면해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심한 역설이 발생합니다. 공업화의 논리에 의해 농업이 트랙터 등 근대적 설비를 투입하면 그 결말은 농업의 파산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 즉 해결되지 않는 사상적인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대규모 농업 추진자들은 농업도 공업과 마찬가지로 기계화를 추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살육을 통해서 대규모 토니를 획득한다면 농업의 기계화도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동아시아 소농사회는 타자에 의한 대규모 살육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거나 미국이 일본을 점령했지만, 식민지 초기와 같은 대규모 살육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대규모 농업에 기초해서 기계화를 일본 농업에 시도하더라도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다.
동아시아 농업경제학자들에게는 공통의 꿈이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여 완전히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다는 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아시아 인구를 생각한다면, 유럽과 같이 대규모 살육을 하지 않는 한, 실현 불가능합니다. 근대 서양이론에 입각한 경제학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반동적인 것이 됩니다. 혹은 적어도 현실에 괴리된 것이 됩니다. 그것들이 현실성을 갖는 유일한 조건은 유럽인처럼 대량살육을 하는 경우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현 가능성은 없습니다. 따라서 반동적인 것이 되든가, 비현실적인 것이 되든가 그 어느 한쪽이 될 뿐입니다.


미국이나 유럽과 동아시아는 토양부터 다르다. 그들처럼 대규모 설비를 갖추고 다국적 농업을 하는 것은 우리 토양에 맞지 않다. 우선 농지 확보부터 만만치 않다. 결정적으로 대규모 농장을 거느린 국가에서는 ‘식량’이란 매출을 목적으로 한 ‘상품’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들은 소출한 농산물의 대부분을 사료로 이용할 정도로 자급률이 충분할 뿐만 아니라 주요 수출 품목이기도 하다. 우리가 ‘식량’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농산물을 ‘상품’으로 취급한다면 이들 다국적 기업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글의 화자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소농사회 체제를 권장하고 있다.

3. 농업과 환경을 생각하는 녹색 고민

환경은 우리 생활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친다. 파스칼은 위도(緯度)가 3도쯤 달라지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법률은 완전히 바뀐다고 하였다. 그때는 자오선(子午線)이 진리를 결정하며 수년간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 법률이 근본적으로 변한고 한다. 온난화로 인해서 지구의 환경이 험악하게 변해가고 있는데, 아직 우리는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환경은 우리 생활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우리 사회는 환경의 경고를 애써 무시하는 형태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녹색평론이 ‘녹색’을 내세우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유기농법이 하나의 대안적인 운동으로서 표방되고 추진될 때에는, 단순히 하나의 농법으로서가 아니라 그 바탕에 매우 심오한 목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생태적인 삶으로의 전환, 농촌공동체의 회복, 순환적인 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공동체성의 회복, 그리고 자립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의 지역적 실현, 이런 것들을 유기농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것으로 아는데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목표와 이상이 자꾸 퇴색되고 거세되면서 상품으로서의 유기농업, 웰빙 상풍으로서의 유기농산품, 이것만 남아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유기농업생산과 유통이 제도권에 편입되었습니다. 원래 운동이었던 일도 이게 상품성이 있고 정치적으로 효용가치가 있고 하면 제도권화시키는 것이 권력의 속성입니다. 그렇게 되면 운동은 끝나는 것이지요. 그 무렵에 나는 유기농운동은 끝났다 하고 봤습니다. 왜냐하면 정부에서 인증을 해주고 친환경 마크를 붙이기만 하면 백화점에서 팔아도 되고 슈퍼마켓에서 팔아도 되는데, 이제 우리가 운동으로서 할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어버린 거지요. 우리가 원래 지향했던 지속가능한 세상, 생태적인 자치 공동체마을, 이런 거하곤 아무 관계도 없이 하나의 상품으로 시장에 편입된 거지요. 자본이 유기농운동도 흡수해버린 셈이고, 우리는 죽을 고생을 해가지고 결국 자본 좋은 일을 시켜주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이것은 대안이 아니지요.

유기농법은 소공동체를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농업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친환경적인 농법으로 농지를 회복시키고 자연생태의 순환과 균형을 유지한다. 친환경적인 먹거리의 생산은 안정적인 먹거리를 제공하고 농가의 풍요로운 소득을 지속시킬 수 있다. 유기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이다. 도시인과 농민,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유대관계가 형성되면 풍부한 먹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으며 농촌은 지속적인 수입원으로 인해 활성화된다.
하지만 유기농이 알려지면서 정부가 유통에서 생산을 제도권 안으로 편입시켰고 대형 자본이 공동체 구조를 휘저으면서 이전의 가치와 의미는 대부분 사라졌다.
유기농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정적인 농가소득이었다. 현재는 수백조 원의 지원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농가부채로 환원된다. 농민은 트랙터와 농기구, 비료 등을 지원받으며 빚을 쌓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의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결국 농가소득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수입 때문에 쌀농사 망한다, WTO 때문에 농업 망한다 하는 것도 결국은 미국 같은 나라들의 대규모 기업농하고 비교했을 때 가격 경쟁이 안 되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소득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관행농이든 유기농이든 문제는 그것이 농민들의 생계를 보장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농업소득이 안 되기 때문에 한국농업이 무너지는 겁니다. 농업소득이 안 되도록 하는 정책으로만 일관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농업소득이 없기 때문에 후계 농민세대가 없습니다. 문화생활, 교육 같은 문제 이전에 사실은 농사를 지어서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생활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농업이 이렇게까지 무너지지는 않았을 거고, 농민들의 위기감과 분노가 이토록 깊지도 않을 겁니다. 아무튼 기본적으로 농업소득이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 결국 농업회생의 핵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대안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업의 불안은 농업인구의 이탈로 나타난다. 안정적인 농업기반 아래 후계 구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국의 무책임한 정책과 자본의 논리에 더럽혀지면서 농촌은 스스로 자생할 힘을 잃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2004년 말 현재 농민은 341만명(총인구 4,800만명의 7.4%), 농가호수는 124만 가구이다.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기 전인 1960년 1,460만명(총인구 2,500만명의 58%), 233만 가구에 견주면 근 반세기 만에 얼마나 농업과 농민이 파괴와 쇠락의 길을 걸어왔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국민총생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960년 32.9%에서 겨우 3.5%(2003년)로 줄어들었다. 또한 농민인구 가운데 60세 이상이 1,374,778명으로 자그마치 40%나 된다. 반면에 20대와 30대는 각각 8%, 7%로 50대와 60대의 절반도 채 안 된다. 이대로 가면 농민은 사라져가는 멸종위기의 희귀종으로 분류되고 농업 또한 박물관이나 가야 만나볼 수 있는 희귀한 직종이 되고 말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한국 농업은 미래가 없다. 

연령별 농가인구(단위 : 명)

유아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

197,740

313,498

269,982

244,855

477,835

565,834

801,470

446,571

126,737

출처 : 통계청, KOSIS, 농림어업, 연령/성별 농가인구(2006년 2월)에서 재작성

농업과 농민을 살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참여정부는 이제 민주화 잔치는 끝났다는 듯이 국토의 균형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아예 온나라 땅을 부관참시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정부는 농지법을 개악해 농지소유 상한을 철폐하고 도시민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끔 문호를 개방했다. 농지를 다른 용도로 개발하는 투기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농업은 아예 그만두게 하겠다는, 농업 보조금조차 건설산업 보조금으로 전환한 ‘건설족 정부’다운 발상이었다. 참여정부의 농업․농민정책은 명백히 대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논과 밭의 환경가치는 홍수조절 효과 13조원, 수자원 함양과 수질정화 효과 4조원, 대기정화와 기후순화 효과 5조원, 토양보전과 오염원 소화 효과 1조원, 경관 가치 1조원 등 연간 24조원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농지는 그런 생태기능뿐만 아니라 먹을거리 안전 기능, 고용유지 기능까지 갖고 있다. 실업자와 도시빈민,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다름아닌 바로 농업과 농지이다. 그런데 그런 가치있는 농지를, 마지막 남은 농토를 뜯어먹는 흡혈귀들이 다름아닌 참여정부와 공무원과 토지건설 투기자본들인 것이다.

자본의 횡포는 농촌뿐만 아니라 환경까지도 위협한다. 환경 위협에 대한 부대비용은 자본의 비용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청주의 경우 현재 평균기온이 13.4℃이다. 충분 전체 평균기온이 11.5℃인데, 청주의 경우 기온이 더 높은 것은 도시열섬 현상 때문이다. 알려진 대로 2100년까지 우리나라의 평균기온이 최저 4.2℃에서 최고 17.4℃가지 상승한다면, 청주의 평균기온은 최저 17.6℃에서 최고 30.8℃까지 상승하게 된다. 이는 적게 상승하게 되면 제주도 기후보다 조금 높고, 많이 상승하게 되면 열대기후가 됨을 의미한다. 사람의 생활양식에서 기온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이러한 변화는 생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정치, 경제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조나단 뱀버 교수는 “인류가 아직 지구온난화의 실질적 경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며, 자신의 마당과 살림에 영향을 미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내가 살고 있는 청주의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여름이 길어지는 현상을 누구나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주에서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논의하고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지구온난화 문제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각 지방자치단체의 장기적인 종합계획과 정책의지, 시민사회단체 차원의 종합계획은 물론 정책의지 자체가 없으며, 시민사회에서도 환경단체조차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 환경은 이미 무방비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 환경에 대해서 심각하게 문제의식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점점 악화되는 환경을 정화하거나 오염 속도를 늦추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학교운영 시스템은 모든 것이 전자화되어 가고 있다. ‘교단 선진화’라는 명목으로 교사 1인당 1대의 컵퓨터가 보급되고, 학생 관리에서 학사일정 관리, 교육계획 및 평가, 기타 업무까지 모든 일에 컴퓨터를 활용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교사들이 학교에서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자기 책상 컴퓨터를 켜는 일이며, 아주 쉽게 문서를 인쇄하고, 특별한 일이 없어도 퇴근할 때까지 모두 컴퓨터를 켜놓는다. 교사 개인의 주머니에서 전기세와 인쇄용지 값이 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사들이나 학생들이나 에너지를 아끼려는 절실한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
또한 요즈음에는 심야전기를 이용한 히터를 사용하여 난방을 하는 학교가 많다. 이는 1985년부터 유연탄이나 원자력 등 기저발전설비의 이용률을 높이기 위해 밤에 남아도는 전기를 보급하는 심야전력 제도에 따른 것인데, 이러한 심야전기 사용은 원자력발전소를 꾸준히 건설하고 유지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제공함으로써 의도하지 않는 사이에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요즈음 북향이나 서향의 학교 건물이 많아지면서 하루 종일 전등을 켜놓아야 하는 경우도 많아 에너지 낭비는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학교에서 에너지 전환을 실천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인 지원이 없다는 것이다.
현행 ‘신에너지․재생에너지 개발, 이용, 보급 촉진법’ 12조에 의하면 일정 면적(3,000㎡) 이상 신축하는 공공건물에 대하여 총 건축공사비의 일정 비율을 신․재생에너지 설비에 의무적으로 사용하게끔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각급 학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적 공백이야말로 학교가 지구온난화와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학교가 환경오염의 온상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시스템이 자생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교육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가장 확실한 교육의 방법은 실천이다. 이론상의 교육은 공허하며 이미 그 실효 불가능성을 노출한 바 있다.
환경에는 자연환경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환경, 안보환경, 교육 환경, 정서 환경 등 여러 가지 환경이 있다. 녹색평론은 이 모든 방면에서 환경을 저해하는 현장을 담담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환경 하나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4. 녹색평론에서 담론 찾기

<트루먼 쇼>를 현대세계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인다면, 이 고도의 지배를 잊게 만드는 것은 대개 미디어가 주는 ‘자극의 중독’이다.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고등학생 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휴대폰, 인터넷 중독이다. ‘폐인’이라는 말은 이제 금기어가 아니라 문화적 몰입을 나타내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아이들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의무적인 노동시간 이외는 대개 ‘중독’된 어느 한 매체에 고정시켜 시간을 소비한다. 인터넷 쇼핑, 온라인 고스톱, 텔레비전 드라마, 스포츠 중계, 이 현대적인 미디어의 막대한 저장권 바깥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퍽 드물다. 그래서 주체적인 교양과 관련된 행위,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읽은 것을 스크랩하거나, 삶의 실제에서 길어올린 경험들을 자기 인식으로 그러모으는 ‘편집’의 습속은 어느새 사라진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매체를 ‘선택한다’고 생각하고, 제 의지로 ‘향유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가당치 않은 착각이다. 이제 텔레비전,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들은 좀 과감하게 말하자면 현대적인 의미의 보육기관―고아원―이 된 것 같다. 그 속의 현대인들은 이 보육기관이 일러주는 삶의 방식을 충실히 복제하는 정신의 고아들이 아닌가.
인터넷 포털 사이트 초기화면의 뉴스들을 보라. 어느 여가수가 녹화하다가 바지가 찢어졌다는 기사가 톱으로 오르고, 맨 구석에 아프리카 동부의 대기근으로 1천만명이 굶어죽을 위기에 놓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게 ‘뉴스 편집’이다. 이 얼마만한 ‘퇴폐’인가.
이제 인간의 ‘앎’은 경험이 아닌 ‘접속’이다. 세계의 숨은 터럭 하나까지 다 드러내는 미디어, 그러나 오직 ‘자극으로 편집된 세계’에 우리는 다만 ‘접속’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상을 뭔가 ‘알고 있다’는 착각들을 하며 산다.

☞ “우리가 어떤 사물을 선이라고 판단함으로써 그 사물에 대해 노력하고 의지를 갖게 되며, 충동을 느끼게 되고, 또한 욕망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떤 사물에 대해 노력을 하고, 의지를 갖게 되며, 충동을 느끼고, 욕망함으로써 그것을 선이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이용해서 위의 현상을 비판하시오.
위의 글을 통해 우리는 ‘누가 우리를 조종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자극적인 기사에 손이 가고 그것을 조장하는 매체의 전략을 보면 매체가 우리를 조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매체 또한 우리의 기호에 지배받고 있는 것이다.
여론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지배와 조종을 받고 있다면 이들을 지배하는 이는 없을까. 바로 그들 자신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서로 굴레를 만들어 옥죄고 그 안에서 생활한다. 소비자는 자극적인 기사를 외면할 수 없고, 생산자는 자극적인 기사를 만들지 않을 수 없을뿐더러 자극적인 기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사물과 정신에 대한 가치판단보다 앞서 충동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다. 누군가 올바른 눈을 가지고 여론을 생산했을 때 그의 기사는 자극적인 기사들 사이에서 배척될 것이다. 이들의 폐단은 스스로만 옥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올바른 것들을 배척시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지속 불가능한 체제라는 치명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지속 가능한 체제’란 한정된 지하지원에 영향을 받지 않고 태양이 뜨는 한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을 의미한다. 수렵채취 사회나 농경사회는 재생 가능한 자원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자원의 고갈 없이 영구히 유지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사회였다. 그러나 산업사회는 매장량이 한정된 화석연료의 소비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 가능성이 없다. 더구나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경제성장, 즉 생산과 소비의 증가를 추구하는 제도이기에 지속성은 더욱 짧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소비지향적 산업사회가 지속되면 자원고갈은 불가피하고, 결국 화석연료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에너지가 고갈돼 운송비가 증가하면 원거리 무역에 의존하는 대량생산보다는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소량생산 체제로 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화석연료가 고갈되면 지금의 산업사회는 종말을 고하고 자급자족 체제로 재편될 것이고, 지금처럼 적은 칼로리의 식량수확을 위해 더 많은 칼로리의 화석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하는 기계식 농업도 막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예전처럼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를 최소화하는 생태적 사회가 필연적으로 다시 올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화석연료의 고갈에 따르는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겪게 될 것이며, 우리가 상상하는 제3차 세계대전을 능가하는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그 파국을 연착륙시킬 수 있는 방법은 인류가 미리 능동적으로 생태주의 체제로 전환해가는 것이다. 생태주의는 인류가 인류사의 대부분을 실제로 그렇게 살았었다는 점에서 관념적이
거나 공허하지 않은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이다.

☞ 글쓴이의 예견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시오.


‘효율성’을 내건 상하수도의 민영화는 물의 공공성을 위협한다. 실제로 경제수준에 관계없이 물의 사유화가 진행된 곳에서는, 물값은 올랐지만 질은 떨어지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물이 필요한 사람보다는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물을 공급하고, 깨끗한 물을 유지하고 제공하기 위한 투자는 뒤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민영화 이후 물값이 1.5배 상승했으며, 가나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소득의 50%를 물값으로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금인상과 무분별한 취수로 ‘물기 없는 땅’을 늘어나게 해 지역주민,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이 더 먼 곳으로 물을 뜨러 다니느라 더욱 고되게 일해야 했고, 어린이들은 그 때문에 학교마저 그만두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세계적 수준의 제품생산을 유도하기 위한 국제적 수준의 품질관리 시스템이라는 아주 그럴듯한 말로 국민을 현혹시키고 있지만, 이것은 한국정부의 계획이라기보다는 이미 IS)(국제표준화기가)가 세운 세계적인 물 사유화 진행 순서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 ISO는 올해까지 ‘상하수도 서비스 표준’을 도입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먹는 물 분야 서비스’에 대한 국제규격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국제규격이 제정되면 물산업이 발달한 선진국 중심으로 시장 개방압력이 거세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인구의 9%인 5억 5천만명 정도가 민간기업에 의해 상하수도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으며, 정부의 분석에 따르면 2015년까지 그 비율이 17%로 증가할 전망이라고 한다. 다국적 기업은 이러한 흐름에 따라 물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의 물시장에 대한 직접투자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2004년 기준에 따르면 중국 상하수도 사업의 60% 이상을 다국적 기업이 점유하고 있으며, 동남아의 경우도 수에즈, RWE 등 다국적 기업이 높은 비율로 점유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앞으로 10년 후 20여개의 다국적 기업이 세계 물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 효율성과 환경의 상관관계에 착안해 위의 글을 논평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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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 대학고전총서 8
홍인표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2년 7월
평점 :
품절


요즘 인터넷 열강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사서를 언제 한 번 정리하려고 하였는데, 다행히 커리큘럼 안에 들어 있어서 조금이나마 정리를 합니다.

맹자의 믿을 만한 텍스트는 참으로 구하기가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항상 맹자의 텍스트는 2%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나온 홍인표 교수의 '맹자'는 제가 바다 건너 남명 학당에까지 가서 듣고 온 책입니다.

 

이미지가 없어서 조잡하지만 스캔해서 올립니다. 그렇지만 홍인표 교수의 번역은 C급입니다. 안 그래도 논어에 비해 문장 맛이 떨어지는데, 기계적 번역을 하고 있어서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성백효 판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번역은 무난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종무 선생의 번역은 대체로 깔끔하며 독창적입니다. 상세한 해설을 원하시면 홍인표 교수의 책을, 깔끔한 문장 맛을 보시고 싶다면 김종무 선생의 민음사 
판을 권합니다. 이 리뷰는 논술 버전에 맞춰 쓰여졌으니 간혹 냄새가 나긴 날 겁니다.

나의 맹자 읽기


사람은 대저 스스로를 모욕한 이후에라야 남이 자신을 모욕하며, 자신의 일가를 훼손한 이후에야 다른 집안에게 파괴되며, 자국이 스스로를 멸망시킨 이후에라야 적국에게 멸망을 당한다.

서경의 태갑에 이르기를 하늘이 낸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없다.

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 家必自毁, 而後人毁之; 國必自伐, 而後人伐之. 

太甲曰:  󰡔天作孽, 猶可違; 自作孽, 不可活. 󰡕

- 출처ː 󰡔맹자(孟子)󰡕 「이루장구」 상-8


1. 맹자의 시대

- 맹자의 사상적 위치와 필연성


온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合綜)과 연횡(連橫)을 놓고 고심하고 있었고, 공격과 정벌전쟁을 능사로 여기고 있었다. 이런 형편에 맹자는 오히려 요순과 삼대 성왕의 덕을 계술, 천명했으니, 유세한 임금들과 부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은퇴하여 만장 등의 제자와 함께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재해석하고 공자의 사상을 계술, 천명하여 『맹자(孟子)』 7편을 지었다.

사마천, 『사기열전』


세운(世運)이 쇠퇴하여 정도가 희미해져 사악한 학설과 포악한 행위가 또 일어나자,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자가 있고,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자가 있었다. 공자는 걱정하여 『춘추(春秋)』를 지으시니, 『춘추(春秋)』는 천자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나를 아는 것도 아마 오직 춘추에 있을 것이고, 나를 죄책하는 것도 아마 오직 춘추에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성왕은 출현하지 않고, 제후는 방자(放恣)하니, 처사(處士)들은 함부로 의론을 제기하여,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언론이 천하에 가득 차서, 천하의 언론은 양주에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 돌아갔다. 양씨는 나만을 위한다고 주장하니, 이는 임금도 무시한 것이고, 묵씨는 겸애(兼愛)를 주장하니, 이는 부모도 무시한 것이다. 부모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함, 이것이 금수(禽獸)인 것이다.

世衰道微, 邪說暴行有作, 臣弑其君者有之, 子弑其父者有之.

孔子懼, 作春秋. 春秋, 天子之事也. 是故孔子曰:  󰡔知我者其惟春秋乎! 罪我者其惟春秋乎! 󰡕

聖王不作, 諸侯放恣, 處士橫議, 楊朱̖ 墨翟之言盈天下. 天下之言, 不歸楊, 則歸墨. 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

- 출처ː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하-9


당시 중국인들은 통일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여, 그것이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현상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설들은 합종과 연횡, 모략 등 전략적인 방향에 치우쳐 마치 현대의 신자유주의와 패권주의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배부른 자를 위한 철학이듯 당시의 학설들도 왕과 지배세력을 위한 철학이라 생각하였다. 그 중에서는 묵적처럼 서민을 위한 철학도 있었으나 맹자는 부모와 자식 간의 고유한 관계를 훼손하는 철학이라 하여 물리친다. 때문에 맹자의 학설은 필연적으로 과거 지향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루(離婁)의 시력, 공수반[公輸子]의 솜씨일지라도, 캠퍼스와 곱자가 없으면 원과 사각형을 그릴 수 없다. 사광(師曠)의 청력일지라도 육률(六律)이 아니면 오음(五音)을 바로잡을 수 없다. 요순의 도일지라도 인정(仁政)이 아니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릴 수 없다. 임금의 마음이 어질고 또 그렇다고 소문이 난 경우에도 백성에게 그 은택이 돌아가지 않고 후세에 모범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선왕(先王)의 도를 행하지 않은 때문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어기거나 저버리지 않고, 전통을 따르네”라고 했듯이, 선왕의 법도를 좇다가 잘못된 경우는 아직 없다.

孟子曰:  「離婁之明, 公輸子之巧, 不以規矩, 不能成方員: 師曠之聰, 不以六律, 不能正五音; 堯舜之道, 不以仁政, 不能平治天下.

今有仁心仁聞而民不被其澤, 不可法於後世者, 不行先王之道也.

故曰, 徒善不足以爲政, 徒法不能以自行.

詩云:  󰡔不愆不忘, 率由舊章. 󰡕 遵先王之法而過者, 未之有也.

- 출처ː 󰡔맹자(孟子)󰡕 「이루장구」 하-1


하지만 그것이 제도와 전통을 옹호하지 보수주의인 것은 아니다. 옛 제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을 현대에 맞게 발전시키자는 것이 맹자 사상의 요지이다.


청컨대, 교외의 논밭은 1/9로 조법을 시행하고, 성중(城中)에서는 1/10로 공법(貢法)을 시행하여 스스로 세금을 내도록 하십시오. 경(卿) 이하는 반드시 규전(圭田 : 수확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경작하는 논밭)을 가지게 하되 규전은 오십 무씩, 장정(壯丁)은 이십오 무씩 배당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죽거나 이사를 가더라도 고향을 떠나지 않습니다. 고향의 농지에서 같은 정전(井田)을 경작하면, 나들이에 서로 친밀하며, 지켜보면서 서로 도와주고, 병이 나면 서로 부축해 주니, 백성들이 친근하고 화목해집니다. 사방 1리에 정전을 실시하면, 한 정전은 구백 무이며, 그 중간이 공전(公田)입니다. 여덟 가구는 모두 사전(私田) 백 무로, 공전을 함께 경작합니다. 공전의 일을 끝낸 뒤에 감히 사전의 일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군자와) 야인을 구별합니다.

請野九一而助, 國中什一使自賦.

卿以下必有圭田, 圭田五十畝.

餘夫二十五畝. 

死徙無出鄕, 鄕田同井. 出入相友, 守望相助, 疾病相扶持, 則百姓親睦.

方里而井, 井九百畝, 其中爲公田. 八家皆私百畝, 同養公田. 公事畢, 然後敢治私事, 所以別野人也.

- 출처ː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상-3


이는 원래의 정전제도를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경제제도로 변경시킨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개혁의 핵심은 토지개혁이다. 오늘날 말로 하면 부동산 개혁이다. 실제로 위 단락을 제시문으로 해서 오늘날의 부동산 문제나 사유재산 문제에 대해서 논하라는 논제를 출제할 수 있다. 대체로 고대의 토지는 군주와 귀족의 사유재산이었고, 농민은 귀족의 토지를 받아 땅을 부쳐먹는 농노에 불과했다. 하지만 맹자가 주창하는 정전 제도는 농민들에게 사유재산을 부여함으로써 일의 능률을 높이고 그것을 통해 납세토록 하여 국가의 부강에 또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즉 백성 중심의 경제 제도를 제안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묵자가 평민의 관점에서 옛날 주나라의 제도를 반대한 반면, 맹자는 평민의 관점에서 옛 제도를 재구성한 것이니만큼 의미가 있다.


사상적인 면으로 보았을 때, 후세의 학자들이 맹자를 존중하는 것은 그가 공자의 사상을 확충(擴充)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자는 성(性)에 관해서 좀처럼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좀더 넓혀 성(性)에 관한 일가를 이루었다. 이는 공자와 맹자 시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자의 시대는 소탈하고 단순하여, 주로 처세(處世) 이야기가 많았다. 주나라에 대한 충성도도 여전했으며 주나라 천자를 끼고 각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는 형세였다.

하지만 맹자의 시대는 전국시대로 건너오는 전환기로 주(周) 제국에 대한 충성도는 사라지고 없다. 그 대신 강국이 천하를 통합한다는 약육강식의 사고방식이 주를 이뤘으며 그 방법 또한 치밀하고 섬세했다. 맹자의 사상이 매우 정치하고 공격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논리학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고대의 제왕은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여기서 차마 사람을 해치지 못하는 정치가 있었다.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를 시행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손바닥 위에서 물건을 움직이듯 쉬울 것이다. 사람이 다 차마 다른 사람을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까닭은, 이제 어떤 사람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빠지려는 것을 보았다면, 누구나 다 놀래고 측은해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 마음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고 있기 때문이 아니며, 마을의 친구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 아니며, 그 어린아이가 지르는 소리를 듣기 싫어해서(또는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고 원망하는 소리를 싫어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통해서 살펴보건대, 측은한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임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한 마음은 인(仁)의 발단(發端)이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발단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발단이며,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발단이다. 사람이 이 네 가지 발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그가 사지(四肢)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네 가지 발단을 가지고 있으면서 착한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사람이다. 그 임금이 착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임금을 해치는 사람이다. 무릇 자신에게 네 가지 발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모두 확충할 줄 안다. 그것은 마치 불이 처음 타 들어가고, 샘이 처음 솟아 흐르는 것 같다. 진실로 그것을 확충할 수 있다면, 넉넉히 사해(四海)를 보전할 수 있지만, 진실로 그것을 확충할 수 없다면 자기 부모조차 제대로 섬길 수 없다.

「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之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 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

- 출처ː 󰡔맹자(孟子)󰡕 「공손추장구」 상-6


어린아이가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인의예지의 핵심 원리를 생각해낸 맹자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못지않게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철학자이다. 어린아이의 예를 통해 발견한 원리는 바로 인(仁)이다. 인(仁)은 공자 시절부터 유학의 핵심 개념으로 채택되었다. 때문에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모두 개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仁)이라는 개념 안에 파생되어 나온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의할 사항은 맹자의 성선론은 모든 사람의 성(性)에 선(善)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지, 모든 사람의 성이 모두 선(善)으로 귀결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보존하고 확충(擴充)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성인이 되고 어떤 사람은 파렴치한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요청된 개념이 양지(良知 : 사람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지능), 양능(良能 : 타고난 재능), 야기(夜氣 : 밤 동안에 생기는 선한 기운=평단지기), 평단지기(平旦之氣 : 새벽의 청명한 기운 : 야기)이라는 용어이다. 우리가 양심(良心)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나타난 개념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이 이렇지 않다는 것을 맹자는 잘 알고 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은 새벽의 맑은 기운을 쉬이 이기고 낮 동안 저지른 인간의 죄악은 밤이 새도록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은 맹자에게는 명백한 사실이었고 그것을 우산(牛山)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하였다.


우산의 나무는 일찍이 무성했었다. 그것이 큰 나라의 교외에 있었기 때문에 도끼를 가진 사람들이 이를 찍어대니, 무성하게 자랄 수가 있겠는가? 밤낮으로 자라는 바요, 비 이슬이 적셔주는 바라, 싹과 가지가 돋아남이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소와 양이 또 들어와서 그것을 뜯어먹었다. 그래서 저와 같이 민둥산이 되었다. 사람이 그 민둥산을 보고 일찍이 재목이 없었다고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라 하겠으랴?

사람에게 존재하는 것도,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겠으랴? 그 양심(良心)을 방치해 버리는 것은 역시 나무에다가 도끼를 대는 것과 같다. 하루하루 이를 찍어내면, 무성하게 자랄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길러지는 양심과 새벽의 기운은 그 좋아하고 싫어함이 사람과 서로 근접하다는 것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대낮에 하는 행위가 또 이것(양심과 새벽기운)을 어지럽히고 없애버린다. 이것을 어지럽히는 일을 반복하면, 밤이 길러지는 기운은 존재할 수 없다. 밤에 길러지는 기운이 존재할 수 없다면, 그는 금수(禽獸)와 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가 금수와 같은 것을 보고서는 일찍이 재질이 없었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성정(性情)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약에 그것을 배양만 잘 한다면 자라지 않는 사물이 없고, 그렇지 못하면 어떤 사물이라도 자라지 못할 것이다.

孟子曰:  「牛山之木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伐之, 可以爲美乎? 是其日夜之所息, 雨露之所潤, 非無萌蘖之生焉, 牛羊又從而牧之, 是以若彼濯濯也. 人見其濯濯也, 以爲未嘗有材焉, 此豈山之性也哉?

雖存乎人者, 豈無仁義之心哉?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 旦旦而伐之, 可以爲美乎? 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夜氣不足以存, 則其違禽獸不遠矣. 人見其禽獸也, 而以爲未嘗有才焉者, 是豈人之情也哉?

故苟得其養, 無物不長; 苟失其養, 無物不消.

- 출처ː 󰡔맹자(孟子)󰡕 「고자장구」 상-8


맹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외물(外物)의 유혹과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윤리학』에서 식욕과 성욕은 사람과 금수가 공유하는 것이고, 사람이 금수와 구별되는 것은 오직 이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고할 수 있는 마음은 인간만이 가진 특성으로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므로 대체(大體)라 할 수 있고, 귀와 눈 등의 감각 기관은 사람과 금수가 공유하는 것이므로 소체(小體)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눈과 귀 등 감각 기관의 자극에 쉽게 지배되기 때문에 성(性)의 본체를 보존하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이 폐단은 본인에게 한정될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로막고 마비시키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도 이성적인 정신이 발붙일 수 없게 한다.


맹자가 대불승에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왕을 현명하게 하고자 합니까? 내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하건대, 여기 초나라 대부가 있는데, 그 아들에게 제나라 말을 가르치려고 하면, 제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가르치게 하겠습니까? 초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가르치게 하겠습니까?”

대불승이 대답했다.

“제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가르치게 하겠습니다.”

맹자가 말했다.

“한 명의 제나라 사람이 그를 가르치고, 여러 초나라 사람이 그를 방해한다면, 비록 매일 종아리를 때린다 하더라도 그에게 제나라 말을 하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를 데리고 제나라의 장악(莊嶽) 거리에다 몇 년만 있게 한다면, 비록 날마다 종아리를 때려서 그가 초나라 말을 하게 하여도 역시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대는 설거주가 착한 선비라고 하니, 그로 하여금 궁중에서 지내게 하여, 궁중에 있는 사람들이 어른이나 어린이, 지위가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 모두 설거주같이 좋은 사람이라면, 왕이 누구와 더불어 착하지 못한 짓을 하겠습니까? 궁중에 있는 사람이 어른과 어린이 지위가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 모두 설거주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왕이 누구와 더불어 착한 일을 하겠습니까? 한 사람의 설거주가 홀로 송왕을 어찌하겠습니까?”

孟子謂戴不勝曰:  「子欲子之王之善與? 我明告子. 有楚大夫於此, 欲其子之齊語也, 則使齊人傅諸? 使楚人傅諸? 」 曰:  「使齊人傅之. 」 曰:  「一齊人傅之, 衆楚人咻之, 雖日撻而求其齊也, 不可得矣; 引而置之莊嶽之間數年, 雖日撻而求其楚, 亦不可得矣.

子謂薛居州, 善士也. 使之居於王所. 在於王所者, 長幼卑尊, 皆薛居州也, 王誰與爲不善? 在王所者, 長幼卑尊, 皆非薛居州也, 王誰與爲善? 一薛居州, 獨如宋王何? 」

- 출처ː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하-6



이에 따르면 맹자나 공자 같은 철학자가 없기 때문에 세상이 혼탁한 것이 아니라 너무 적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일본의 한 네티즌이  독도를 둘러싸고 한국과의 외교마찰을 빚고있는 고이즈미 정권을 강력히 비판한 것에 대해 “일본을 비난하지 말라” “매국노다” “한국이 나쁘다” 등 다른 네티즌들의 비난과 욕설을 받자 재차 반박하며 논란을 벌인 일이 있다. 

“주장할 것은 해야 한다고 하지만 상대방의 사정과 주변 상황, 역사적인 경위를 계산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동북아에 긴장만 고조시키고 있다”며 고이즈미 정권을 비판한 것인데, 이같은 내용의 글에 네티즌들의 비난이 이어지자 그는 “무서운 것은 (비난 글에는) 상대를 비난하기만 할 뿐 자성의 목소리는 하나도 없다”고 꼬집었고 한다. 사람은 대체로 주위의 사람들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면 비록 그것이 옳은 주장이라 하더라도 쉽게 배척하게 된다. 맹자의 사상이 세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은 전국시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어울리지 못하는 점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된 정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백성 천(天) 따지


천자문 맨 첫머리는 ‘하늘 천 따지’이다. 맹자에게는 하늘이 곧 백성이었고, 천심(天心)은 곧 민심(民心)이었다.


제자 만장(萬章)이 맹자에게 물었다.

“요 임금이 천하를 순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아니다. 천자는 천하를 남에게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순 임금이 천하를 얻은 것은 누가 주었기 때문입니까?”

“하늘이 주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주었다고 함은 구체적인 언어로 명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다. 하늘은 말이 없다. 다만 행위와 정사를 통하여 나타내 보일 따름이다.”

“행위와 정사를 통하여 나타내어 보인다고 함은 무슨 말씀입니까?”

“천자는 어떤 사람을 하늘에 추천할 수는 있어도, 하늘에게 천하를 그에게 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제후는 사람을 천자에게 추천할 수는 있어도, 천자에게 제후의 자리를 그에게 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대부는 사람을 제후에게 추천할 수는 있어도, 제후에게 대부의 자리를 그에게 주라고 가용할 수는 없다. 옛날에 요 임금이 순을 하늘에 추천하자 하늘이 그를 받아들였고, 또 백성들 앞에서 내세우자 백성들도 그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하늘은 말이 없다. 다만 행위와 정사를 통하여 나타내어 보일 다름이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하늘이 추천하자 하늘이 그를 받아들였고, 또 백성들 앞에 내세우자 백성들도 그를 받아들였다’고 함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자 모든 신명들이 흠향했다면 하늘이 그를 받아들인 것이요, 그로 하여금 정사를 주관하게 하자 모든 정사가 다 잘 되어 백성들이 안심했다면 백성들이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즉 하늘도 (천하통치 임무를) 그에게 부여했고, 백성들도 그에게 부여했다는 말이다. ……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은 우리 백성들 눈을 통해서 보고, 하늘은 우리 백성들 귀를 통해서 듣는다’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萬章曰:  「堯以天下與舜, 有諸? 」 孟子曰:  「否. 天子不能以天下與人. 」

「然則舜有天下也, 孰與之? 」 曰:  「天與之. 」

「天與之者, 諄諄然命之乎? 」

曰:  「否. 天不言, 以行與事示之而已矣. 」

曰:  「以行與事示之者如之何? 」

曰:  「天子能薦人於天, 不能使天與之天下; 諸侯能薦人於天子, 不能使天子與之諸侯; 大夫能薦人於諸侯, 不能使諸侯與之大夫. 昔者堯薦舜於天而天受之, 暴之於民而民受之, 故曰: 天不言, 以行與事示之而已矣. 」

曰:  「敢問薦之於天而天受之, 暴之於民而民受之, 如何? 」

曰:  「使之主祭而百神享之, 是天受之; 使之主事而事治, 百姓安之, 是民受之也. 天與之, 人與之, 故曰: 天子不能以天下與人.

……

太誓曰:  󰡔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 , 此之謂也. 」

- 출처ː 󰡔맹자(孟子)󰡕 「만장장구」 상-5


민중 중심의 철학을 논할 때 맹자는 매우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국가의 주인은 백성이라는 것이다.


백성이 귀중하며, 사직은 그 다음이고, 임금이 가장 가볍다. 따라서 민심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된다.

현대역 : 국민이 가장 귀하며, 국가는 그 다음이고 대통령이 가장 가볍다. 따라서 표심을 얻으면 대통령이 되고, 대통령의 신임을 얻으면 국무총리가 되고, 국무총리의 마음을 얻으면 장관이 된다.

孟子曰: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是故得乎丘民而爲天子, 得乎天子爲諸侯, 得乎諸侯爲大夫.


뿐만 아니라 비록 임금일지라도 잡배와 같은 일을 일삼으면 권좌에서도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제선왕이 물었다. “탕이 그의 임금인 걸왕을 물리치고, 무왕이 그의 임금인 주왕을 정벌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역사에 전합니다.”

왕이 물었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인애(仁愛)의 파괴자가 바로 역적[賊]이고, 도의(道義)의 파괴자가 바로 흉악자[殘]이므로, 역적이자 흉악자는 한 잡배[一夫]일 따름입니다. 주(紂)라는 잡배를 처단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입니다.”

齊宣王問曰:  「湯放桀, 武王伐紂, 有諸? 」 孟子對曰:  「於傳有之. 」

曰:  「臣弑其君可乎? 」

曰: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


주왕(紂王)은 은나라의 포학한 군주였다고 전해지는데, 주나라 무왕은 은 왕조를 멸하고 주를 죽였다. 맹자는 이것을 ‘시해’라고 볼 수 없다고 여겼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논어)는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을 임금에게 적용해, “임금이 임급답지 못하면” 신하는 그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당대에는 매우 파격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져 왕조시대인 중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금서(禁書)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이론은 피통치자의 반항의 권리를 긍정하고, 피통치자의 혁명권을 인정한 셈이다. 그후 중국 봉건사회 내에서 통치자에 대한 일정한 견제 역할을 하였고, 혁명 중에는 고무적인 작용을 했다.


4. 맹자의 텍스트에서 담론 찾기


일을 할 때는 지레짐작[正]해서는 아니되며, 마음속으로는 그 일을 잊지 않으며, 조장(助長)해서도 안 된다. 송나라 사람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송나라 사람 중에 자기 밭에 벼싹이 자라지 아니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를 다 뽑아 올린 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서 그 집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피곤하다. 내가 벼싹을 자라게 도와주었다.’고 하였다. 그의 아들이 뛰어나가서 이를 살펴보니, 벼싹은 이미 말라버렸다. 천하에는 벼싹을 자라게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익이 없다고 하여 버려두는 것은 김을 매지 않는 사람이요, 이를 억지로 자라게 도와주는 것은 싹을 뽑아 올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해를 끼치는 것이다.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 無若宋人然: 宋人有閔其苗之不長而揠之者, 芒芒然歸. 謂其人曰:  󰡔今日病矣, 予助苗長矣. 󰡕 其子趨而往視之, 苗則槁矣. 天下之不助苗長者寡矣. 以爲無益而舍之者, 不耘苗者也; 助之長者, 揠苗者也. 非徒無益, 而又害之. 」

- 출처ː 󰡔맹자(孟子)󰡕 「공손추장구」 상-2

☞ 조장이 왜 안 좋은가?

한 농부의 논밭이 수해를 만나 배추밭이 다 잠겨버린 일이 있었다. 나중에 물이 빠지고 보니 배추들이 거의 다 널브러져 썩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기계가 갈지 못한 구석에 심은 배추들만은 멀쩡하게 썩지 않고 있었다. 그걸 농부는 땅 갈기와 풀 뽑기 등의 작위적 행위가 토양생태계를 파괴하여 작물의 생존력을 약하게 만든다는 원리를 깨우치게 되었다. 즉 갈지 않은 땅에는 순환이 있고 숨통이 열려 있어 물이 차 있어도 땅속에서 숨을 쉰 것이다. 단지 기계로 간 땅이 이러한데, 화학 농약을 잔뜩 뿌린 토양은 어떨까.

조장 중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그 결과가 보이는 것도 있고, 긴 시간이 지나서야 그 결과가 보이는 것이 있다. FTA 같은 것이 그것이다. 단기간의 경제 성장을 위해서 식량 안보를 팽개치고 영화 산업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 당국의 방침이다. 이는 조장 중에서도 막대한 조장이다. 식량과 문화는 경제 논리로 어찌하지 못하는 것인데, 실적을 앞세워 지켜야할 것들을 팽개치는 결과는 추후에 부메랑처럼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 역시 누가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독히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려는 사람 중에서 개인적으로 독차지함이 있었다. 옛날에 시장을 이룸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을 바꾸었고, 담당관원은 이를 관리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느 비열한 사나이가 반드시 높은 언덕을 찾아서 여기에 올라가 좌우를 바라보면서 시장의 이익을 싹 거두어 갔다. 사람들이 다 이를 비열하다고 여겼으므로, 이를 따라서 세금을 징수하였다. 상인의 세금을 징수함은 바로 이 비열한 사나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人亦孰不欲富貴? 而獨於富貴之中, 有私龍斷焉. 󰡕

古之爲市也, 以其所有易其所無者, 有司者治之耳. 有賤丈夫焉, 必求龍斷而登之, 以左右望而罔市利. 人皆以爲賤, 故從而征之. 征商, 自此賤丈夫始矣.

- 출처ː 󰡔맹자(孟子)󰡕 「공손추장구」 하-10

(이 글의 관점을 토대로 오늘날 이와 비슷한 사례를 들어 서술한다면)

☞ 론스타가 법률의 허점을 이용해 등록세 수백억원을 가로챈 점, 건설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직위를 이용해 좋은 땅을 사들이고 막대한 수익을 얻는 일.

배임죄(背任罪) : 형법에서, 다른 사람의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그 임무에 위배되는 행위를 함으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얻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익을 얻게 하여 임무를 맡긴 본인에게 손해를 입힘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화살 만드는 사람이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어질지 않으랴마는,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상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오직 사람을 손상할까 두려워한다. 무당이나 목수(관을 만드는)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직업의 선택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어진 곳에 사는 것이 좋다. 거처를 선택하여, 어질지 못한 곳에 산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대저 어짊이란 하늘의 존귀한 직위이고, 사람의 안전한 주택이다. 아무도 이를 막지 못하며 예의도 없고 의리도 없다면, 사람의 노예가 된다.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고서 노예됨을 부끄럽게 여기면, 이는 활을 만드는 사람이 활 만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화살 만드는 사람이 화살 만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같다. 만약에 이를 부끄러워한다면, 어진 행동을 하는 것만 같지 않다. 어짊은 행하는 사람은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화살을 쏘는 사람은 자기를 바로 한 후에 화살을 쏜다. 쏘아서 과녁을 맞추지 못해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반대로 자기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뿐이다.

孟子曰:  「矢人豈不仁於函人哉? 矢人唯恐不傷人, 函人唯恐傷人. 巫匠亦然, 故術不可不愼也.

孔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智? 󰡕 夫仁, 天之尊爵也, 人之安宅也. 莫之禦而不仁, 是不智也.

不仁̖ 不智̖ 無禮̖ 無義, 人役也. 人役而恥爲役, 由弓人而恥爲弓, 矢人而恥爲矢也.

如恥之, 莫如爲仁.

仁者如射, 射者正己而後發. 發而不中, 不怨勝己者, 反求諸己而已矣. 」

- 출처ː 󰡔맹자(孟子)󰡕 「공손추장구」 상-7

☞ 직업관과 관련해서 위의 입장을 비판하시오.

직업을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 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애꿎은 피해를 주거나 법률에 저해되지 않는 한 위의 직업관에는 동의할 수 없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이 화살을 만들지 않는다면 적국의 화살이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직업이라는 것은 대상과 목표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회사나 사회, 국가에 기여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직업을 선택하는 중요한 척도는 ‘환경’이 아니라 ‘신념’이다. 비록 경찰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검찰은 사람들을 구속시키지만 그의 일로 인해 피해를 보는 대상과 혜택을 보는 대상의 구분이 분명하다. 군인의 총구가 향하는 방향이 분명한 것처럼, 땅에 씨를 뿌리는 농민의 희망 또한 분명하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참여’한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비록 어딘가에는 피해가 되더라도 그것이 향하는 바는 세상의 이로움이다. 다만 그 사람의 직업관과 신념이 상식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천시(天時)는 지리(地理)만 같지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같지 못하다. 주위 3리의 내성과 7리의 외곽을 포위하고 공격하여도 승리를 못한다. 포위를 하고 공격을 한다면 반드시 천시를 얻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도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천시가 지리만 같지 못해서다. 성벽이 높지 않은 것이 아니고 성을 둘러싼 냇물이 깊지 아니한 것도 아니며, 병기와 갑옷이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음이 아니고 양식이 많지 않음이 아니건만, 이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바로 지리가 인화만 같지 못해서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나라 안에서 살 구역을 삼을 때는 봉해진 강토의 경계로 하지 않고, 국방을 공고히 함에는 산이나 내가 험준함으로 하지 않고, 천하에 위세를 보일 때는 병기나 갑옷의 유리함으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도(正道)를 얻은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많고, 정도를 잃은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적다. 도와주는 사람이 적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친척도 배반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것이 극단에 이르면, 천하의 사람이 귀순한다. 천하 사람이 귀순한 바로써 친척이 배반한 바를 공격하므로, 군자는 혹은 전쟁을 하지 않거니와, 만약에 전쟁을 한다면 반드시 승리한다.

孟子曰: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三里之城, 七里之郭, 環而攻之而不勝. 夫環而攻之, 必有得天時者矣; 然而不勝者, 是天時不如地利也.

城非不高也, 池非不深也, 兵革非不堅利也, 米粟非不多也; 委而去之, 是地利不如人和也.

故曰: 域民不以封疆之界, 固國不以山谿之險, 威天下不以兵革之利. 得道者多助, 失道者寡助. 寡助之至, 親戚畔之; 多助之至, 天下順之.

以天下之所順, 攻親戚之所畔; 故君子有不戰, 戰必勝矣. 」

- 출처ː 󰡔맹자(孟子)󰡕 「공손추장구」 하-1

☞ 위 그을 우리나라의 경제․사회 등 전반적인 경쟁력과 관련해서 서술하시오.

우리나라는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자연환경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매년 석유를 수입하는 데만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고 있고, 이것이 국가경쟁력의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풍부한 인적자원이 있어 세계 여러 나라의 주요한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세계화 시대의 인적자원은 자국의 인적자원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외국인 근로자가 내한해 일을 하고 있고, 우리 역시 많은 나라로 이민가서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광복 이후 일본에서, 미국에서 핍박받으며 살았던 경험을 오늘날의 외국인 근로자에게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으며, 오랜 순혈주의와 단일민족 감정은 혼혈인 등 소수 계층에게 폭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이들을 끌어안고 경쟁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들 대신 3D 업종에서 땀을 흘리고 있으며, 혼혈인들도 우리의 자식이므로 인적자원으로 부족함이 없다.

우리 세계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적자원의 개념을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우리와 관계된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맹자의 제자) 진대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제후들을 만나지 않은 것은 다소 편협한 사고가 아닌가 합니다. 이제라도 한 번 이들을 만나보시면, 크게는 왕업을 성취할 수 있고, 작게는 패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록에는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곧게 한다.’ 하였습니다. 아마도 해볼 만한 것 아닐까요.”

맹자가 말했다.

“옛날 제경공이 사냥을 할 때, 우인(虞人 : 경험이 많고 능숙한 사냥꾼)을 오색 깃털의 깃대로 부르자 오지 아니하니 그를 죽이려고 했다. 지사(志士)는 시궁창에 빠질지라도 피하지 않고, 용사(勇士)는 머리를 잃어도 피하지 않는다. 공자는 여기서 어떤 의미를 취하셨을까? 자기를 불러야 할 방법으로 부르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신 것이다. 제후들의 부름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간다면 어떠하겠는가? 또한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곧게 한다.’라고 한 것은 이익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만약 이익을 가지고 따진다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곧게 하여 이익이 된다면, 역시 하겠는가.

옛날 조간자(趙簡子)가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 해(奚)와 함께 전차를 몰아 사냥을 하도록 하였는데, 하루 종일 한 마리의 새도 잡지 못하였다. 총신(해)은 돌아와 이렇게 보고하였다. ‘천하에 엉터리 사냥꾼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왕량에게 고했다. 왕량은 ‘다시 한번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고, 떼를 슨 후에야 다시 사냥하게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열 마리 새를 잡았다. 총신이 돌아와 다시 보고하기를, ‘천하의 뛰어난 사냥꾼입니다.’ 하였다. 조간자가 ‘내가 직접 너와 사냥해야겠다.’ 하고 왕량에게 말하니 왕량은 허락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를 위해 나의 말모는 규칙을 지키면 하루종일 한 마리도 못 잡다가, 그를 위해 편법으로 전차를 몰아 새들을 사냥하면, 하루아침에 열 마리나 잡았습니다. 『시경』에는,

‘말 달리는 규칙을 잃지 않아, 화살을 쏘면 정확히 맞는다.’라 하였습니다. 나는 소인과 함께 말몰이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니 사양하겠습니다.‘라 하였다.

비록 말을 모는 사람이라도 (자기 규칙을 어기고) 사냥하는 사람과 자리를 함께 하기를 부끄러워하고, 자리를 함께 하면 금수를 잡아 산더미처럼 쌓아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도리를 그르쳐서 그 사람들을 따른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대는 옳지 않다. 자기를 굽히는 사람이 다른 사람 치고 다른 사람을 곧게 한 적은 이제까지 한번도 없었다.”

陳代曰:  「不見諸侯, 宜若小然; 今一見之, 大則以王, 小則以霸. 且志曰:  󰡔枉尺而直尋󰡕 , 宜若可爲也. 」

孟子曰:  「昔齊景公田, 招虞人以旌, 不至, 將殺之.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 孔子奚取焉? 取非其招不往也, 如不待其招而往, 何哉?

且夫枉尺而直尋者, 以利言也. 如以利, 則枉尋直尺而利, 亦可爲與?

昔者趙簡子使王良與嬖奚乘, 終日而不獲一禽. 嬖奚反命曰:  󰡔天下之賤工也. 󰡕 或以告王良. 良曰:  󰡔請復之. 󰡕 彊而後可, 一朝而獲十禽. 嬖奚反命曰:  󰡔天下之良工也. 󰡕 簡子曰:  󰡔我使掌與女乘. 󰡕 謂王良. 良不可, 曰:  󰡔吾爲之範我馳驅, 終日不獲一; 爲之詭遇, 一朝而獲十. 詩云:  「不失其馳, 舍矢如破. 」 我不貫與小人乘, 請辭. 󰡕

御者且羞與射者比. 比而得禽獸, 雖若丘陵, 弗爲也. 如枉道而從彼, 何也? 且子過矣, 枉己者, 未有能直人者也. 」

- 출처ː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하-1

☞ 원칙을 강조하는 방식의 장단점을 각각 서술하시오.


제나라에 어떤 남자가 아내와 첩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 남편은 외출을 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돌아왔다. 그의 아내가 음식을 준 사람이 누군지 물으면, 다들 부귀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가 그의 첩에게 말했다. “남편이 외출을 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은 뒤에 돌아와 그 음식을 준 사람을 물으면, 다들 부귀한 사람들이었는데, 일찍이 뚜렷한 사람이 집에 방문한 일이 없었으니 내가 남편이 가는 곳을 엿보려고 하네.”

일찍 일어나서, 비스듬히 남편이 가는 데를 따라가니,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그와 더불어 서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동쪽 성곽 분묘(墳墓) 사이의 제사지내는 사람에게 가서, 그들의 먹고 남은 음식을 빌어먹고, 부족하면 또 둘러보고 다른 곳으로 갔다. 이것이 그가 실컷 먹고 만족하는 방법이다.

그의 아내가 돌아와서 그의 첩에게 말했다. “남편이란 우리가 우러러보며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다. 지금, 이 같은 꼴이라니!” 하고는 그 첩과 더불어 그 남편을 원망하면서 서로 뜰 가운데서 울고 있는데, 남편은 이 사정도 모르고 으스대며 아내와 첩에게 교만을 부렸다.

군자의 입장에서 이를 본다면, 사람이 부귀와 영달을 추구하는 방법 중 그 아내와 첩을 수치스럽게 하거나 서로 복받쳐 울지 않게끔 하는 것은 매우 드물 것이다.

齊人有一妻一妾而處室者, 其良人出, 則必饜酒肉而後反. 其妻問所與飮食者, 則盡富貴也. 其妻告其妾曰:  「良人出, 則必饜酒肉而後反; 問其與飮食者, 盡富貴也, 而未嘗有顯者來, 吾將吳良人之所之也. 」 蚤起, 施從良人之所之, 吳國中無與立談者. 卒之東郭墦閒, 之祭者, 乞其餘; 不足, 又顧而之他, 此其爲饜足之道也. 其妻歸, 告其妾曰:  「良人者, 所仰望而終身也. 今若此. 」 與其妾訕其良人, 而相泣於中庭. 而良人未之知也, 施施從外來, 驕其妻妾.

由君子觀之, 則人之所以求富貴利達者, 其妻妾不羞也, 而不相泣者, 幾希矣.

- 출처ː 󰡔맹자(孟子)󰡕 「이루장구」 하-33

☞ 부귀와 영달을 도모하려는 사람이 위와 같은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5. 다양한 출전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의 출전


양혜왕이 말했다.

“과인(寡人)은 나라에 대하여 온 마음을 다 바쳤을 뿐입니다. 황하(黃河) 내륙이 흉년이 들면, 백성들을 황하 동편으로 이동시키고, 곡식을 황하 내륙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황하 동편이 흉년이 들어도 같은 방법을 썼습니다. 이웃 나라의 정치를 살펴보건대, 과인처럼 마음 쓰는 것도 없는데, 이웃 나라의 백성이 더 적어지지 아니하고, 과인의 백성이 더 많아지지도 아니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왕은 전쟁을 좋아하시니, 전쟁을 비유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둥둥 북을 치자 창칼이 맞붙어 싸우다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이끌고 달아날 때, 어느 사람은 백 발짝 뒤에서 머물고, 어느 사람은 오십 발짝 뒤에서 머물러서는, 오십 발짝으로 백 발짝을 비웃는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양혜왕) “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백 발짝은 안 되었지만, 이 역시 도망친 것입니다.”

“왕이 이를 아신다면, 백성들이 이웃 나라보다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농사철을 어기지 아니하면, 곡식을 다 먹을 수 없고, 초촘한 그물을 웅덩이와 못에 넣지 않는다면, 재목을 다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곡식과 물고기를 다 먹을 수 없고, 재목을 다 쓸 수 없다면, 이야말로 백성들로 하여금 산 자를 길러 내고 죽은 자를 보내는 데 유감이 없다면, 왕도(王道)의 시작입니다.

梁惠王曰:  「寡人之於國也, 盡心焉耳矣. 河內凶, 則移其民於河東, 移其粟於河內. 河東凶亦然. 察鄰國之政, 無如寡人之用心者. 鄰國之民不加少, 寡人之民不加多, 何也? 」

孟子對曰:  「王好戰, 請以戰喩. 塡然鼓之, 兵刃旣接, 棄甲曳兵而走. 或百步而後止, 或五十步而後止. 以五十步笑百步, 則何如? 」 曰:  「不可, 直不百步耳, 是亦走也. 」 曰:  「王如知此, 則無望民之多於鄰國也.

不違農時, 穀不可勝食也; 數罟不入洿池, 魚鼈不可勝食也; 斧斤以時入山林, 材木不可勝用也. 穀與魚鼈不可勝食, 材木不可勝用, 是使民養生喪死無憾也. 養生喪死無憾, 王道之始也.



학교(學校)의 출전

設爲庠序學校以敎之: 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

- 출처ː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상-1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출전

청컨대, 교외의 논밭은 1/9로 조법을 시행하고, 성중(城中)에서는 1/10로 공법(貢法)을 시행하여 스스로 세금을 내도록 하십시오. 경(卿) 이하는 반드시 규전(圭田 : 수확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경작하는 논밭)을 가지게 하되 규전은 오십 무씩, 장정(壯丁)은 이십오 무씩 배당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죽거나 이사를 가더라도 고향을 떠나지 않습니다. 고향의 농지에서 같은 정전(井田)을 경작하면, 나들이에 서로 친밀하며, 지켜보면서 서로 도와주고, 병이 나면 서로 부축해 주니, 백성들이 친근하고 화목해집니다. 사방 1리에 정전을 실시하면, 한 정전은 구백 무이며, 그 중간이 공전(公田)입니다. 여덟 가구는 모두 사전(私田) 백 무로, 공전을 함께 경작합니다. 공전의 일을 끝낸 뒤에 감히 사전의 일을 합니다. 그럼으로써 (군자와) 야인을 구별합니다.

請野九一而助, 國中什一使自賦.

卿以下必有圭田, 圭田五十畝.

餘夫二十五畝. 

死徙無出鄕, 鄕田同井. 出入相友, 守望相助, 疾病相扶持, 則百姓親睦.

方里而井, 井九百畝, 其中爲公田. 八家皆私百畝, 同養公田. 公事畢, 然後敢治私事, 所以別野人也.

此其大略也. 若夫潤澤之, 則在君與子矣. 」

- 출처ː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상-3


대장부(大丈夫)의 출전


“공손연과 장의(전국시대의 유세가)가 어찌 대장부라 아니할 수 있는가? 한번 노하여 제후가 두려워하였고, 편안히 지내니 천하는 전쟁이 종식(終熄)되었습니다.”

맹자 : “이것이 어찌 대장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예(禮)를 배우지 아니했습니까? 사내가 관을 쓰는 것은 아버지가 이를 가르쳐 주고, 여자가 시집가는 것은 어머니가 이를 가르쳐줍니다. 문 앞까지는 보내고는 주의하기를 ‘네 시집에 가서는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조심하여, 남편을 거슬리지 말아라.’ 합니다. 순종(順從)을 정도로 삼는 것은 아낙네의 도리입니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고,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고,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고,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해나가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하며, 부귀도 그의 마음을 음탕하게 할 수 없고, 빈천도 그의 마음을 이동할 수 없으며,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대장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景春曰:  「公孫衍̖ 張儀豈不誠大丈夫哉? 一怒而諸侯懼, 安居而天下熄. 」

孟子曰:  「是焉得爲大丈夫乎? 子未學禮乎? 丈夫之冠也, 父命之; 女子之嫁也, 母命之, 往送之門, 戒之曰:  󰡔往之女家, 必敬必戒, 無違夫子! 󰡕 以順爲正者, 妾婦之道也.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與民由之, 不得志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

- 출처ː 󰡔맹자(孟子)󰡕 「등문공장구」 하-2


자포자기(自暴自棄)의 출전


자신을 해치는 사람은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은 더불어 어떤 일을 할 수 없다. 말을 하여 예의를 비난하면, 이를 자신을 해친다 하고, 나 자신은 인의(仁義)를 행할 수 없다면, 이를 자신을 포기한다고 한다. 어짊이란 사람의 편안한 집이며, 의로움이란 사람의 올바른 길이다. 편안히 살 집을 비워 놓고 살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리고 가지 아니하니, 슬프도다!

孟子曰: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

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

- 출처ː 󰡔맹자(孟子)󰡕 「이루장구」 상-10


선각자(先覺者)의 출전


하늘이 이 백성을 생육하심에 선지자(先知者)로 하여금 후지자(後知者)를 깨우치게 하고, 선각자(先覺者)로 하여금 후각자(後覺者)를 깨우치게 한다. 내가 백성들의 선각자니, 나는 장차 이 도리로 이 백성들을 깨우치려고 한다. 내가 이들을 깨우치지 아니하면 누가 개우치겠는가?

천하의 백성을 생각하여 한 사내와 한 아낙이 요순의 은택을 입지 아니하면, 마치 자기가 밀어서 그들을 물구렁텅이로 들어가게 한 듯이 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스스로 천하의 중책을 맡았다.

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予, 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覺斯民也. 非予覺之, 而誰也? 󰡕

思天下之民匹夫匹婦有不被堯舜之澤者, 若己推而內之溝中. 其自任以天下之重如此,

- 출처ː 󰡔맹자(孟子)󰡕 「만장장구」 상-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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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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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들어서며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통합(intergation)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생물학을 예로 들어보자. 생물학은 생물의 거의 모든 걸 두루 연구하는 박물학, 즉 자연사(natural history)에 대한 연구로 시작됐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러 카를 폰 베어(Karl von Baer), 에른스트 헤켈(Ernst Heackel) 등의 연구로 발생학(embryology)이 생물학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유전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멘델의 연구가 재발견되고 분자생물학적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자연사는 꾸준히 넓은 의미의 생태학 또는 야외생물학으로 발전해 왔다.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20세기 생물학은 크게 보아 자연사, 유3전학, 실험발생학의 세 분야로 나뉘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던 것이 최근에 들어 사뭇 학제적이고 통합적인 성격을 띤 진화발생생물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 흔히 ‘이보디보(Evo-Devo)'라는 애칭으로 불린다.)이 등장했다. 이보디보는 표면적으로는 발생생물학과 진화생물학의 만남이지만 실제로는 생화학, 생물물리학, 세포생물학, 유전학, 생리학, 내분비학, 면역학, 신경생물학 등 생명현상의 물리화학적 메커니즘을 밝히는 기능생물학(functional biology) 분야들과, 행동생물학, 생태학, 계통분류학, 고생물학, 개체군유전학은 물론, 세균학, 균학, 곤충학, 어류학, 조류학 등의 개체생물학(organismic biology) 들을 포함하는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 분야들이 통합되어 생명 현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8쪽

사실, 고전적이고 중세적인 연역의 대안으로 귀납의 방법을 창안한 사람은 베이컨이 아니다. 그는 단지 그 방법을 정교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납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충분히 들을 만하다. 다음 세기에 그의 명성은 주로 그 부분에 모여 있었다. 그가 생각했던 귀납의 절차는 단순한 사실들의 일반화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베이컨은 "식물 종의 90퍼센트가 노랗거나 빨갛거나 흰 꽃이고 곤충이 찾아든다." 같은 관찰 문장을 귀납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현상을 기술하되 편견을 갖지 말고 그것들의 공통된 형질을 모아 중간 단계의 일반성을 가지도록 만들고, 그런 다음 상위 수준의 일반성으로 나아가는 것을 귀납의 절차라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앞의 문장을 베이컨의 귀납법에 따라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된다. "꽃들은 특정한 종류의 곤충을 유인하도록 설계된 색깔과 구조를 진화시켰으며 그런 곤충들은 꽃을 배타적으로 수분시킨다." 이렇게 프란시스 베이컨은 르네상스 시대에 팽배했던 기술(記述, description)과 분류에 관한 전통적인 방식을 넘어서는 추론 방법을 제시했지만, 현대 과학의 핵심을 형성하는 개념 형성의 방법, 경합 가설 그리고 이론에 대해서는 별다른 예견을 하지 못했다. -68쪽

대수기하학의 창시자이자 근대 철학자이며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프랑스 학자인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서사의 선도자이다. 이전의 베이컨처럼 데카르트는 학자들에게 과학하기를 요구했다. 그의 바로 뒤에는 젊은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있다. 데카르트는 명확한 연역을 통해 각 현상의 핵심적인 골격만 남기는 과학적 방법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계는 3차원이므로 우리가 지각한 것을 세 좌표계의 틀에 맞추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 데카르트 좌표계(Cartesian coordinate)라고 불리는 것이다. 세 좌표계를 이용하면 어떤 대상이든 길이, 너비, 높이를 정확히 명시할 수 있다. 이로써 수학적 조작을 통해 본질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기초 형식에서 대수 기호를 제공식화함으로써 이 방법을 완성했다. 따라서 이것은 복잡한 기하 문제를 풀거나, 나아가서 가시적인 3차원 영역을 넘어서는 수학 영역을 탐구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가장 소중한 비전은 지식이 궁극적으로 수학으로 추상화될 수 있는 상호 연계된 진리 체계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비전은 1619년 11월의 어느 날 밤에 일련의 꿈을 통해 다가왔다. 기호들(뇌성, 책, 악령, 달콤한 메론)의 돌풍 속에서 그는 우주가 합리적이며 인과율로 연결된 통일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런 개념을 물리학에서 의학까지, 즉 생물학에서, 심지어는 도덕적 추론에까지 적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18세기 계몽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친, 학문의 통일성에 관한 믿음에 토대를 놓았다. -71쪽

중국에서는 왜 데카르트나 뉴턴과 같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것들이었다. 중국인들에게는 추상적으로 체계화된 법칙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이것은 진(秦) 왕조(기원전221~206년) 시기에 봉건제가 군현 제도로 전환될 당시, 엄격한 통치 법률을 제정한 법가(法家) 사상가들이 중국 지식인들에게 안겨준 비참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의 엄격한 법치주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반사회적이어서 개인의 욕망보다 국가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법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사실은 중국 학자들이 세상 만물을 창조한 인격적인 신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우주에서 자연을 창조한 이성적 존재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꼼꼼하게 기술한 대상들은 보편 원리를 따르지 않으며, 우주적 질서 내의 존재자들이 따르는 특별한 규정 안에서 움직인다. 말하자면 신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 즉 일반 법칙이라는 개념이 꼭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탐색하려는 시도 또한 거의 없었다. -76쪽

과학은 제 갈 길로 갔다. 과학자, 과학적 발견 그리고 전문 학술지는 15년마다 두 배로 늘었다. 이것은 170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과학의 성공은 우주가 질서 정연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에 다시 믿음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계몽사상의 이러한 필수 전제는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최초로 생각해 낸 수학, 물리학, 생물학 분야 안에서 더 굳건히 자라났다. 그렇지만 그 중심 방법인 환원주의의 화려한 성공은 계몽사상 프로그램 전체의 복구와는 정반대로 작용했다. 과학적 정보가 기하학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별 연구자들은 지식의 통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철학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그런 문제들에 대해 더욱 깊이 밝힐 것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들은 1700년대 후반 생물학에서 사회과학으로 가는 길목으로 여겨진 개념이자 금단의 영역인 마음의 물리적 토대를 밝히는 일에 더욱 주저했다.
큰 그림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데에는 더 소박한 이유가 있었다. 과학자들이 그 일을 할 만한 지적 에너지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대다수의 과학자는 장인(匠人)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전문 분야에만 집중한다. 그들의 교육 과정은 세계의 드넓은 윤곽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최첨단 분야에서 가능한 한 빨리 자신만의 발견을 하기에 필요한 훈련을 받는다. 왜냐하면 경계 부분의 연구는 비용도 많이 들고 위태롭기 때문이다. 수백만 달러짜리 실험실에 소속된 생산성 있는 과학자들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으며 그것에 이득이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에 선발된 2,000명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업적에 대한 상징으로 옷깃에 달고 있는 장식에는 과학을 뜻하는 금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자연 철학을 뜻하는 보라색이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어쩌겠나! 대부분의 선도적 과학자들의 시선이 그 금에만 고정되어 있으니!-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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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블 - 악의 역사 1,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화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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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악'에 주목하는가.

'악'은 음습하고 지저분하고 두려운 존재다. 눈을 부릅뜨고 '악'을 주시한다는 것은 한낮에 '태양'을 주시하는 것만큼이나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누구나 가까이 하기를 싫어한다. 하지만 우리가 악을 이렇게 멀리 하는 사이에 '악'은 그 '공포감'을 십분 활용한다.

나의 악에 대한 생각도 뭇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악에 대한 사고관에 전환을 가져온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이 책의 초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저자로 하여금 '악'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서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 세계는 어둡고 음습한 범죄나 추리, 법정이 주를 이룬다. 거기서 드러나는 불안정한 인간의 심리와 여러 가지 악의 유형을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몬스터'라는 만화책에서 완전무결한 '악'의 상징인 '한스'의 천사같은 생김새는 나로 하여금 '악'에 대해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신문읽기를 하면서 우리 사회가 '악'에 얼마나 무방비한지를 절감했다. 이렇게 시작한 블로그 스크랩이 벌써  1년째다. '악학(惡學)'이라는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서 세상의 '악'의 이야기들을 모아 왔는데, 벌써 5페이지를 넘었으니 300건 정도의 '악행'이 쌓인 셈이다. 이 이야기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서 하나의 학문적 영역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으나, 다행히 이 책의 저자가 20년에 걸쳐 '악'의 전모를 밝혀놓은 역작을 만나게 되었다.

악의 이데아는 없는가

저자에 의하면 '악'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실존적'이다. 즉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 일부분에 내가 '참여'하고 있는 '유착'에 주의를 하라는 말이다.
플라톤은 "거짓말이 악인 이유는 그 말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말 안에 진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말로 악을 '결여'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선이나 신과 같이 이데아 개념을 적용하기에는 그 완결성에 흠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총체적 악'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근원이 없는 생명은 없다. 만약에 '악'이 완결성을 상실한 '결여'일 뿐이라면 이토록 사람을 옥죄고 세계에 '치밀한 고통'을 안기는 시스템은 허구에 가까울 것이다.

악마는 하느님의 작품이다?

악마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로 골똘히 고민한 적이 있었다. '악'이 탄생한 목적이 있을까. 그저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그 무게감은 현저히 떨어진다.
'악은 필연이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 나는 악이 '설계자의 의도' 또는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 원소'로 보기에 이르렀다.

신의 아들들은 하늘의 판관들이고 주가 거느리는 만신들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이 욕망과 자만심 때문에 죄를 짓는다. 자만심 때문에 죄를 지은 경우에는 하늘에서 내던져졌고, 욕망 때문에 죄를 지은 경우엔 자발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그 죄의 대가로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다. 그들은 지상(계곡 안이나 땅 밑에)에서든 공중에서든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꾀어 죄를 짓게 한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유혹자의 대장이다. 때로 모든 죄는 그들에게 귀속되지만, 야훼는 분명히 그들에게 계속해서 악행을 저지를 권한을 준다. <본문 중에서>

악은 '파괴'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동서양의 '파괴'의 양상을 보면 '완전한 파괴자'와 '완전한 재건자'로 나뉜다. 완전한 파괴자는 그야말로 대상을 '파멸'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재건자'는 시바 신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한 후 그 위에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이 논리를 기독교에 적용시킨다면 '사탄'(악)은 인간을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목동이라 할 수 있다.

사탄이 유다를 선택해 악마의 영을 유다에게 집어넣은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택해 자신의 영을 예수에게 보낸다. 이러한 유비 관계는 더욱 가까워진다. 구원이라는 커다란 계획 안에서 신은 항상 예수가 구세주이고 유다가 배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가 수난을 당하기 위해서는 유다의 배반이 필요했으므로 신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의 과정에서 예수뿐만 아니라 유다도 자기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중에서>

저자에 의하면 '구약 시대'에는 '원죄'의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타락'과 '원죄'라는 말은 신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로 '악마'가 신약성서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신의 왕국과 악마의 왕국이 싸움을 벌여 급기야 신의 왕국을 이기게 된다고 설파함으로써 신약성서의 중심개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세상의 악을 뿌리칠 메시아를 예견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가졌던 불만은 악을 보면 화들짝 덮어버리려는 예민함이었다. 기독교에서 악은 배제의 대상이지 '연구'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것은 반면에 '음성적인 악'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취약성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가 배교(背敎)죄로 기소돼 사형 위기에 처한 압둘 라흐만(41,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종교에 유연성이 없을 때 얼마나 많은 병폐가 생기는지 절감하게 된다.

바보야, '약(弱)한 것'이 '악(惡)'한 것이야!

지하세계는 죽음뿐만이 아니라 다산성과도 연관되고, 신화나 제의 안에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악마는 성과 연관되기도 한다. 디오니소스, 마그나 마터, 키벨레, 미트라, 이시스, 피타고라스주의와 연관된 의례들은 진위가 얼마나 의심스럽든지 간에 이후에 이교도와 마녀의 의식에 규범이 될 만한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
그리스에서 비록 철학(다이아드)이나 종교(헤카테, 에리니스, 라미아스)로부터 여러 근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여성의 원리가 악의 원리로 인정된 적은 없다. 라미아스는 셈족의 릴리트와 쉽게 합쳐져, 밤에 나타나 남자를 유혹하거나 영아를 살해하는 음란하고 흉악한 여성성을 가진 영으로 창조되었다. 이 이미지는 중세에 점차로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자연적인 영역으로 바뀌어, 결국 마녀라는 개념으로 고착되었다. <본문 중에서>

한 과학자는 남성의 정자가 여성의 난소에 비해 생명 탄생에 기여하는 바가 적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열등감으로 여성에 대한 탄압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과학자는 미래에는 남성 없이 여성만으로도 임신이 가능하여, 남성이 '잉여존재' 로 전락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견을 내놓았다. 사실 역사는 '편견'의 역사이다. 특히 권위 있는 자의 편견은 수천 년 동안 철옹성의 지위를 차지한다. '약'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니 '악'이 되어버리는 유행가같은, 장난같은 이야기가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신자유주의 체제로 미친 듯이 흘러갈수록 '악'은 왜곡된다. 노동자들의 생존 투쟁은 '집단이기주의'로 오독되고, 농업포기정책을 추진하며 미국의 시커먼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려는 참여정부는 '구국(救國)의 결단'으로 미화된다.

이제는 언론과 기득권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도 '사용자'의 입장에서 '노동투쟁'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에게 지하철 파업이라는 것은 아침 출근을 엉망으로 만들고, 유통 마비로 인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끼치는 괘씸한 행위일 뿐이다. 프랑스 노동계와 고교생, 대학생이 모두 거리로 몰려나와 26세의 사회 초년생을 위해 투쟁하고 '여론 지원'을 보내는 것을 우리 식으로 보면 '거대 집단이기주의'라고 해야 할까. 

'악'을 잘못 이해한 죄로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은 크다. 특히 악은 조직화가 가능하므로, 공동으로 연계한다면 멀쩡한 개념조차 뒤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이 악의 개념이 혼동된 시대야말로 '악'에 대한 개념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하기에 적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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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07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벌써 다 보셨군요. 이거 정말 어렵던데. 먼 소린지 모르겠어서 발췌독 하고 있답니다.

승주나무 2006-04-0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다가 짜증이 나서 불평을 좀 늘어놓으려고 했죠. 근데, 쓰다 보니 할 말이 많아지더라고요^^;;

류사 2006-04-0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제 끝내신 것, 감축드리옵니다. ^^

승주나무 2006-04-0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니 류사 님//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다음 숙제는 이미 제출해 놓았는뎁쇼
ㅋㅋ 2권으로 진군해야죠^^;;

stella.K 2006-04-08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류사님이...! 이거 우리끼리 흉도 못 보겠군요.ㅜ.ㅜ
 
데블 - 악의 역사 1,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화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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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악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악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악을 정의할 수 없다. 제한적이나마 의사소통을 위해서 자의적으로 정의를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은 애매모호한 개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적인 일관성을 갖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범주를 통해 정의하기보다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실존적으로 악을 인식해야 한다.-16쪽

지금껏 나는 악을 우리에게 행해진 어떤 것으로 다루어왔다. 하지만 우리는 악을 행하기도 한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악이 미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어느 누구도 악을 행하지 않고 살 수 없다.
..............
적어도 악의 문제에 대한 대답의 일부분은 내 안에 들어 있다. 그런데도 나는 대개 악을 외부로부터 다가온다고 이해한다. 스스로 악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악을 저질렀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위험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자신의 악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는 경향이다.-21쪽

악마를 이해할 때 심층 심리학적인 입장, 특히 융의 견해가 가장 시사적이다. 융은 심리 발달을 개별화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은 처음에 자신에 대한 혼돈스러고 미분화된 생각만을 갖는다. 그 사람은 성장하면서 점차로 선과 악의 입장을 분별한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키워가며 악을 억압한다. 이러한 억압과정이 너무 지나칠 경우에 그 삶의 그림자는 괴물처럼 되어 결국 폭발해 그 사람을 압도해버린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세 번째 단계, 즉 조정의 단계가 있는데, 여기서 선과 악이 모두 인지되고 인식의 차원에서 다시 조정된다. -33쪽

①악마는 객관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② 악마는 역사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③ 악마에 대한 역사적 정의는 그 자체로 실존적인 악의 정의와 관련해서 얻어질 수 있다. ④ 악마란 사회 속에서 악으로 이해되는 인격화된 무엇이다. ⑤ 악마라는 개념은 이러한 인격화를 이해하는 전통으로 이루어진다. -53쪽

선과 악처럼 모든 것들이 신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기본 전제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이 선하다고 생각하고 악이 신에게서 기인하지 않기를 원하는 한, 사람들은 신성 안에 대립되는 힘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립은 점차 구체화되어 짝이 형성된다. 신의 본성은 여전히 악의 원천이지만, 이제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으로(문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짝을 이루게 된다. 선한 본성은 하나님과 관계되고, 악한 본성은 신의 적이 된다. 이러한 짝을 '이중체'라고 한다. -68쪽

우주는 단순히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신성과 더불어 고동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신의 권위를 그러내는 이 세상에 악의 원리라는 것이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악의 원리는 신성한 계열의 일부로, 살아 있는 우주의 일부로만 존재할 수 있다. 죽음, 질병, 거짓, 사기 등 이 모든 것은 자연적인 질서가 파괴된 상태이며 따라서 악이다. -90쪽

플라톤은 전쟁, 살인, 착취, 거짓말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거짓말이 악인 이유는 그 말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말 안에 진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악은 선의 결핍으로만 존재한다. 마치 스위스 치즈에 나 있는 구멍들이 치즈의 부족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플라톤은 존재론적으로 악이 없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악이 없다고는 주장하지 않았지만, 창조자에게서 악에 대한 책임은 없어진다고 했다. -186쪽

지하세계는 죽음뿐만이 아니라 다산성과도 연관되고, 신화나 제의 안에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악마는 성과 연관되기도 한다. 디오니소스, 마그나 마터, 키벨레, 미트라, 이시스, 피타고라스주의와 연관된 의례들은 진위가 얼마나 의심스럽든지 간에 이후에 이교도와 마녀의 의식에 규범이 될 만한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
그리스에서 비록 철학(다이아드)이나 종교(헤카테, 에리니스, 라미아스)로부터 여러 근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여성의 원리가 악의 원리로 인정된 적은 없다. 라미아스는 셈족의 릴리트와 쉽게 합쳐져, 밤에 나타나 남자를 유혹하거나 영아를 살해하는 음란하고 흉악한 여성성을 가진 영으로 창조되었다. 이 이미지는 중세에 점차로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자연적인 영역으로 바뀌어, 결국 마녀라는 개념으로 고착되었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기본 전제는 여자는 천부적으로 남자보다 열등하므로 악의 원리라는 위치까지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고전 시대에 수준 높고 지능적인 마술은 주로 남자의 역할로 여겨지고, 반면에 쉽고 경험으로 하는 마술은 여자들의 분야로 여겨졌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223쪽

이 종말론적인 신정론이 가지고 있는 중대한 문제점은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를 당황하게 했던 질문과 같은 것이다. 만일 주께서 악마를 멸망시킬 권능을 가지고 있고 그를 멸망시키고자 했다면, 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까? 이 질문은 늘 신학자들을 괴롭혀왔다. 신은 왜 그렇게 엄청난 악을 허락했을까? 신이 다른 영에게 자신의 도움으로 파괴를 허락하고 심지어 권한을 부여했다면, 신은 그 파괴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는가? 신은 궁극적으로 그런 일을 스스로 원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 져야 할 책임을 무마해보려는 히브리인과 예언서 시대의 유대인이 벌인 노력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마스테마가 하는 것이면 야훼도 한다. -261쪽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예민하게 악마를 직접적으로 의식했다. 악마는 기독교의 본질에 타격을 주지 않으면서 쉽게 내버려질 수 있는 정도의 주변적인 개념은 아니다. 악마는 신약성서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신의 왕국과 악마의 왕국이 싸움을 벌여 급기야 ㅅ힌의 왕국을 이기고 있다고 설파하면서 신약성서의 중심을 차지한다. 악마는 기독교의 신론에서 중요한 대안을 형성하기 때문에 신약성서에서 악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80쪽

악마는 악한 인간들의 왕이기도 하다.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악마의 부하 또는 아들이라고 불린다. 베드로 자신도 예수를 꾀어 예정된 길에서 십자가의 길로 가도록 동요하게 했을 때, 악마라고 불렸다. 이상하게도 예수는 베드로가 수난을 피하려고 하자 악마라고 불렀다. 이들 두 사도의 공통점은 구원이라는 신성한 계획에 자신들의 개인적인 두려움을 개입시킨 것이다. 유다가 가장 일반적으로 악마와 관련되고, 누가는 유다에게 실제로 사탄이 들어갔다고 말한다. 유다는 너무나 가까운 예수의 상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둘의 관계와 신화에서 너무나 자주 나타나는 이중체들의 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알 수 있다. 사탄이 유다를 선택해 악마의 영을 유다에게 집어넣은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택해 자신의 영을 예수에게 보낸다. 이러한 유비 관계는 더욱 가까워진다. 구원이라는 커다란 계획 안에서 신은 항상 예수가 구세주이고 유다가 배반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가 수난을 당하기 위해서는 유다의 배반이 필요했으므로 신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의 과정에서 예수뿐만 아니라 유다도 자기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01쪽

악마의 이야기는 잔인하지만, 악의 실존적 공포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세계관은 모두 환영에 불과하다.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이반의 아이는 창조물 전체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물 전체와 같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어떤 세계관을 가졌든지 간에 그녀의 고통을 과소평가하고, 그러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느다고 선언하거나 거기에 정교한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려 한다거나, 더 위대한 선이란 관점-그러한 선에 신의 이름이든 아니면 인간의 이름이 부여되든-에서 그 고통을 설명한다면, 그러한 견해는 그녀의 삶과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공허하고 헛되게 만들 것이다. 악이 현존하고 그 와중에 세상은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이 우주는 무엇으로 존재하든 창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우주에서 말한다. 내가 당신과 함께 사랑할 것이다"라고.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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