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평생 비주류 반체제 인사로 남았다는 것이 만인의 스승이 된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체제의 이론이 된 유교도 출발점에서는 역시 반체제 이론이었다. 공자의 행동이 이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반체제 이론은 그것이 목적한 사회가 실현되면, 곧바로 체제 이론으로 전환한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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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이나 인물들이 실수하는 게 재밌다. 공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남장한 것을 잊어버리고 소녀에게 다가가 질문하자 소녀가 남자인 줄 알고 몹시 불편해하는 장면

이슬은 내 눈을 피하고는 애원하는 눈으로 내 동생을 쳐다보았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이 횃불 때문에 더 붉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내 변장을 깨달았다. 지금 나는 양반 청년이었다. 안전하게 여행하려고 한 변장이 이슬과 대화할 때는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했다. 내가 몇 걸음 뒤로물러나자 이슬이 어깨의 긴장을 풀고 겨우 대답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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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그레고르 잠자가 생각나는 구절. 잠자가 영업 사원이 되어 끊임없이 기차를 타야 하는 처지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나는 전차 승강장 위에 서 있다. 이 세계에서, 이 도시에서, 나의가족에게서 나의 처지를 되돌아볼 때 나는 정말 불확실하다. 더군다나 내가 어떤 방향에서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요구에 어떤것들이 있을지, 나는 임시로라도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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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아날로그 인간


한 컴퓨터로 여려 명이 메일함을 이용하면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컴퓨터를 주로 쓰는 사람은 로그아웃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메일을 열었을 때 사소한 비밀이 들킬 수도 있다. 문제는 잠시 그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도 로그아웃을 잘 안 한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그 컴퓨터는 몇 번의 주인을 바꾸며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한다. 만약 그게 컴퓨터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집에서는 가족이라는 연극을, 학교에서는 학생이라는 연극을, 회사에서는 회사원이라는 연극을, 식당에 가면 손님이라는 연극을, 알바를 할 때는 알바생이라는 연극을 하다가 다시 나로 로그인할 수 있을까? 이것을 '노동'으로 옮기면 헤겔과 칸트 간의 유명한 논쟁이 있다. 헤겔은 자신의 24시간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투잡(two job) 쓰리잡을 해도 상관 없다고 한 반면, 칸트는 인간은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두잡만 해도 정체성의 큰 혼란이 온다는 것이다. 헤겔이 디지털파라면 칸트는 아날로그파이다. 쉽게 누구의 의견을 손들어주기 쉽지 않다. 이 주제를 카프카는 「상인」이라는 손바닥 소설로 이야기했다. 인간은 엔간해서는 멀티가 잘 안 된다. 뇌과학자들은 멀티플레이는 없다고 아예 단언한다. 뇌를 소모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카프카의 손바닥 소설 「상인」은 로그아웃과 로그인을 여러 번 반복하다가 자신이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상인의 이야기다.


이제 어느 평일날 저녁 가게문이 닫히고, 갑자기 내 눈앞에 내 가게의 끊임없는 용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시간들을 보게 될 때면, 아침에 멀리 보내버렸던 흥분이 다시 되돌아오는 밀물처럼 내 마음속으로 밀려들어온다. 그러나 그것은 내 안에서 참지 못하고, 아무런 목표도 없이 내 마음을 휩쓸어간다.

「상인」


하지만 상인은 그러한 기분을 살릴 수 없다. 마치 신기루 또는 꿈처럼 그런 감정을 가지고 출근하고 있었다는 느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니 사무실 입구, 또는 지하철역이나 주차장 등 사무실에서 가까운 어디쯤에서부터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상인은 상인 직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매우 낯설어 한다.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의 돈을 가지고 있고, 자신과 상관 없는 사람들의 생각과 취향을 한 계절 전에 예측해야 하는 일(시장 조사)은 언제나 낯설다.

「상인」


하루에도 열 번의 로그아웃/로그인과 열 번의 아바타 뒤집어쓰기를 하는 현대인의 기억은 짧아지지 않을 수 없다. (숏트/릴이 대세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



온전한 나로 되돌아오기 전에 방해하는 요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끝내 온전한 나로 되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 온전한 나로 되돌아온 기억이 아득하기 때문에 이제는 온전하지 않은 내가 온전한 내가 되어 버리는 상황이다. 온전하지 않은 나의 감정과 기억은 분열적일 수밖에 없고 간헐적일 수밖에 없다. 끊김현상이 잦은 음악처럼 간헐적 감수성은 짧지만 자극적인 감정을 원한다. 숏츠 또는 릴스가 점점 더 유행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릴스 등 쇼트폼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 네이버-카카오도 본격 참전한다는 동아일보 기사(2023.3.15)



긴 기억, 긴 이야기, 시간이 필요한 감정들은 이제 옛 이야기가 되었다. 소설은 부커 상을 받았다는 단신으로 자극할 뿐이며, 유일한 긴 이야기는 '드라마'뿐이다. 드라마는 전형적인 소설의 응용이며 중간광고처럼 자극적인 장면으로 시청자를 콕 찔러줘야 한다. 카프카 「상인」의 엘레베이터 긴 독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장면이 있기 전에 갑자기 상인은 자기가 홀로라는 것을 깨달았고, 엘리베이터에서도 혼자가 되고 화가 나서 이를 갈면서 외치는 것이다. 누구에게 외치는 것인지 역시 불분명하다. 엘리베이터를 아래층으로 내려보내고 초인종으로 누르고 나서 소녀가 문을 열고 인사를 한다. 처음에 소녀는 딸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맞다. 상인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어떤 곳이라고 보는 게 합당한 것 같다. 혼자 있는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소녀가 사는 곳은 어디일까? 상인은 왜 인사를 한 걸까?


「상인」은 자본주의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인간의 분열적이고 간헐적 기억과 감정이 강렬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현상을 다뤘다. 독방에 갇히기 두려운 죄수처럼 홀로 있는 상황이 견딜 수 없는 현대인들은 같이 있다는 착각을 만들어낸다. 귀멸의 칼날의 루이가 조잡하게 긁어모은 가족처럼.


▲ 일본 애니 『귀멸의 칼날』 하현6 루이의 에피소드는 가장 슬픈 가족의 형태라는 점에서 현대 가족의 모습을 가장 잘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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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3-16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 드라마가 있는데 애써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회의가 들기도 하지. 솔직히 드라마도 보는데 꽤 시간 걸려.
요즘엔 영화도 20분짜리 만든다고 하더군.
90분도 길다고.
난 며칠 전 <닥터 지바고> 소장용을 싸게 팔아서 언제고 봐야지 하는 걸
아예 사버렸거든. 그게 무려 3시간짜리야. 앉은 자리에서 다 볼 수는 업고
3, 4번에 잘라서 보려고. 이런 영화 요즘 같은 세상에 절대로 안 보지. ㅋㅋ

승주나무 2023-03-16 16:29   좋아요 1 | URL
맞아요. 드라마도 길어요. 그래서 지무비나 팅잘 같은 유투브 채널로 대신하기도 해요. ㅎㅎ

2023-03-16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23-03-16 16:28   좋아요 1 | URL
오~ 좋겠네요. 파란흙, 여유로움, 수양버들, 알지 님. 다 그리운 이름들이군요.
저는 제주도라 참석은 어려울 것 같아요.
반가운 소식 전해줘서 고마워요.
쬐끔 약오르기는 해요 ㅎㅎㅎ
 

상인이 하는 일을 통해 철저히 도구화되고 자기 자신과 진정한 관계 맺기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자본주의 인간형의 모습을 꿰뚫는 구절이다

나는 몇 시간 전에 미리 결정을 내려야 하고, 심부름꾼의 기억력을 일깨워주어야 하고, 염려되는 실수를 미리 경고해야 되며, 그리고 한 계절에 벌써 다음 계절의 유행을 생각해내야만 하는데, 그것도 내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될 것이 아니고, 가까이하기 힘든 시골 주민들의 유행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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