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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 -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대한민국의 알몸
김용진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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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을 읽은 페이스북 이용자들과 함께 댓글을 달면서 함께 읽기를 진행했다. 리뷰와 댓글을 보태니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자가 화가 난 까닭은?

 

위 키리크스가 251,287건의 외교문서를 폭로한 이후 대한민국에서 새로 18만건의 외교문서가 공개되었다. 위키리크스에 침묵하던 언론은 이번에는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폭로자가 위키리크스가 아니라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다. 그것도 1981년 외교문서다. 20년도 더 지난 외교문서에 수많은 언론이 열광한 이유는 뭘까?

 

[그들은 아는, 우리만 모르는](개마고원, 이하 '그들은')을 읽은 15명의 독자들은 59개의 댓글을 달며 함께 읽기에 참여했다.(바로가기). '그들은'은 미국 외교 전문 속에 비친 대한민국 정부와 정치인, 관료들의 모습을 현직 기자가 탐사 저널리즘의 전문성과 열정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김용진 기자의 이력보다 이 책을 잘 표현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옛이름이 되어버린 [미디어포커스]의 데스크와 KBS 탐사보도팀장을 역임했으나 MB정권때 프로그램이 폐지당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부산으로 전보되었다가 다시 울산으로 옮겨졌다. 마치 누군가가 보기 싫다고 자꾸 밀어낸 것처럼 저자는 서울에서 점점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밀려났다.

책 을 읽은 박정희 씨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분노를 조절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김세교 씨는 더 나아가 "절반 정도 읽었을 뿐인데도 참담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정부의 외교정책이 국익보다 국민을 상대로 한 프로파간다에 주안점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오일수 씨 역시 "책을 읽는 내내 이렇게 분노해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오영미 씨 표현대로 "이렇게 국민을 외면하는 정부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떤 대목에서 화가 났는지는 가지각색이지만 내가 책에서 화가 난 점을 다섯 가지만 꼽자면 아래와 같다. (괄호는 책의 쪽수)

 

1. 미국 정부의 FTA 재협상 입장을 확인하고 동의했으면서도 국민들에게는 '재협상은 없다'고 외치는 사이에 FTA 재협상 당사자들은 미처 대응할 기회를 놓쳐버렸다.(275)

2. 남북 대치는 정권 초기부터 정해진 입장이면서 대통령이 이 상황을 편안하게 여겼으면서도 정부는 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북한이 어깃장을 놓았다는 식으로 몰고 갔다. (325)

3. 정부는 국민에게 굴종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미국에게 배우처럼 연기를 해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연기를 해준 대가를 지불했다. (113)

4. 2007년 9월 7일 故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의 복수의 '정보원'(사실상 간첩)들은 미국에 대응할 대통령의 필승카드를 누설함으로써 쇠고기 시장을 매우 불리하게 만들어버렸다. (336)

5.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직후 주한 대사는 "한국 새 정부의 생각을 주조하고"라는 표현을 썼다.

 

서준규 씨의 절규가 가슴을 찌른다. "대한민국은 자주와 민주가 있는 나라잖아요. 국민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이 땅에 살고 있지 않나요?"

 

 

▲ 포털 검색에서 1981년 외교문서를 쳐보면 관련기사가 3페이지가 넘어간다. 2012년에 언론은 왜 1981년의 외교문서에 이렇게 큰 관심을 나타내는 걸까?

 

[논쟁] 정권 교체 VS 국민 변화

 

책 을 읽은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한국 정부의 영혼 없는 사대주의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는 입장이 엇갈렸다. 정권교체가 우선이라는 주장과 정권교체보다 더 본질적인 국민의식의 문제라는 주장이 부딪쳤지만 이 두 가지는 상호적이기 때문에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다.

김 재원 씨는 이 책을 "정권교체를 위한 필독서"라고 불렀고 오영미 씨도 이 주장에 동의하며 "정권교체가 필수"라고 말했다. 김문성 씨 역시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은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주류 정치집단이며, 이들은 뭐 하나 탐욕적ㆍ음모적이지 않은 게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 좀더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독자들도 많았다. 정철희 씨는 이 책을 "국민의식전환용 필독서"라고 불렀다. 권오철 씨는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이 나라는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라고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현석 씨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위키리크스로 본 관료들은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때 잡음이 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미국의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외교정책과 국내 권력자들의 권력욕, 관료들의 보신주의가 맞아떨어진 데다, 론스타 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까지 가세한 4각의 편대가 완성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압제는 점점 더 세련되어 지고 숨겨져서, 그 모양새를 알기 어렵"게 되었다(배범호)

세련된 압제는 일정 정도 역사적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더해졌다. 김진태 씨는 현재의 미국 외교 정책은 미국의 창건자 중 한 사람인 해밀턴의 중상주의, 즉 "돈이 되면 뭐든지 한다"는 기조에 기반한다고 말했다. 주한 대사관이 론스타 문제와 무기 판매 문제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다. 한국 역시 김세교 씨의 지적처럼 신라시대에는 당나라,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일제, 미군정, 미국정부에 기생하던 노예근성이 천여년 동안 반복되어 왔다.

 

 

위키리크스로 본 한국 언론의 자화상

 

박 준 씨가 제기한 정보비대칭 문제도 음미해볼 만하다. 정보공개를 최대한 하는 외국에 비해 한국 정부는 정보를 꽁꽁 숨겨놓는다. 그 사이에 대한민국의 국익은 산으로 가고 있다는 비판이다. 박준 씨는 정보비대칭이라는 환경 속에서도 국민이 나름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을 주문했다.


위키리크스가 처음으로 외교전문을 공개했을 때 영국 주요언론지 가디언 등 글로벌 언론은 대대적인 검증 작업에 착수해서 큰 성과를 이뤄냈다. 반면 우리 언론은 그다지 보도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이 점을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다. 때문에 김재원 씨는 주류 언론의 문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저자인 김용진 기자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위키리크스의 정보들이 현 정권에 타격을 주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보도를 꺼린다. 이는 현 정권과 주류 언론이 사실상 공동 운명체라는 말이다.

둘째, 전문성의 약화에 있다. 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정부 광고를 끊거나 기업에 압력을 가해 기업광고를 끊는 등의 방식으로 비판 언론사에게 큰 타격을 준다. 그리고 김용진 기자의 경우와 같이 언론사 내에 탐사보도를 하는 조직이나 개인들을 제거함으로써 언론의 손과 발을 잘라버린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은 기자정신과 탐사 저널리즘의 전문성, 애국심 등 기자가 갖춰야 할 모든 점을 두루 갖춘 저널리즘 교과서라고 생각한다. 기자를 하나의 직장인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기자 지망생이라면 큰 영감을 받을 것이다.

언 론의 진화된 모습을 읽어낸 독자도 있었다. 이희진 씨는 [닥치고 정치]와의 비교를 통해서 "[닥치고 정치]가 저자의 추론에 근거해 아니었으면 좋겠으나 아마도 그랬을 것이 뻔한 이야기들의 아귀를 끼워맞춰 개안으로 이끌었다면, '그들은'은 그 추론을 방증할 만한 얘기들을 그야말로 쏟아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닥치고 정치]와 '나는 꼼수다'는 언론 전체에 대한 에디팅과 쇼(난장)의 결합이다. 기사의 편린들을 모아서 모자이크를 짜맞추지만 '~라고 추정되는'을 많이 사용하기에 소송 등 외부공격이 잦다. 하지만 '그들은'은 위키리크스라는 새로운 언론의 모델과 정통 탐사 저널리즘의 만남이 시너지를 일으키는 경우다. 폭로된 외교전문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며, 이를 토대로 한 기사 역시 부정할 수도 공격할 수도 없다. 나는 '그들은' 같은 모델이 종국에는 더욱 파괴력을 발휘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함께 읽기를 진행하면서 독자들의 생각을 하나씩 보태어 보았더니 무척 흥미로웠을 뿐만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실체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음을 느꼈다. 우리는 하나 하나가 대단히 중요한 정보원일 뿐만 아니라 국가도 무시 못할 만큼의 권력이다. 단, 연결돼 있을 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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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1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12-03-22 07:32   좋아요 0 | URL
진심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답답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 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최미양 옮김 / 율리시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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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선하게 생긴 노인이 재판장으로 불려 왔다. 그리고 변호사석, 검사석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이 재판은 신과 종교,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관한 치열한 법정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배역>

 

재판장 : 소셜북스 회원

 

피고 : 스캇 펙

 

검사 : 스피노자

 

변호사 : 파스칼

 

 

 

<검사 변론>

 

 

존 경하는 재판장님. 본 법정은 신과 인간에 관한 중요한 논의를 하는 자리입니다. 스캇 펙 피고는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해 마지 않는 심리치료사입니다. 그리고 그가 심리 연구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 역시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인격신'으로 상정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자신의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이 하느님의 권력의 대리자가 되며 하느님처럼 될 것을 강요받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은총에의 부름은 사랑으로 돌보고 수고하는 삶에의 부름이며,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삶에의 부름이다"(<아직도 가야 할 길>(열음사판) 440쪽)

 

피고는 이런 주장을 책의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본 검사는 피고의 이런 주장이 대중의 오해를 호도하며 폐해를 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이며 자기 스스로를 포함해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됩니다. 인간은 신의 일부이자 결과로서 존재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스캇 펙 박사가 피고석에 설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신과 인간의 이러한 관계를 모르고, 쉽사리 신에게 인간의 정서를 부여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며, 더욱 그는 신이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만들었으며 신을 숭배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위험한 까닭은 신의 완전무결성을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이 인격신이거나 목적을 위하여 작용한다면 그는 자신이 결여하는 어떤 것을 필연적으로 욕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신에게 표상을 귀속시킨 것입니다. 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한에 있어서만 인간을 사랑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실체인 신과 인간의 관계를 둘로 나누는 순간 커다란 혼란이 야기됩니다.

 

 

<변호사 변론>

 

 

 

존 경하는 재판장님. 검사는 신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무신론에 가깝습니다. 모든 존재에게(미생물까지도) 신적 요소가 담겨 있고 인간도 신의 일부라고 하는 주장은 범신론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검사의 신관(神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신이라는 추상적인 논변보다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신앙은 증명과는 다릅니다. 증명은 인간적인 것이고 신앙은 신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인식에서 신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 잴 수도 없습니다. 검사는 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버렸는지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신 이 있다는 것은 불가해(不可解)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영혼이 육체와 함께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세계가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원리가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원리가 없다는 것도 불가해합니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 검사도 자신의 철학을 위해서 '신'을 요청했을 뿐입니다. 세계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신으로 하여금 한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피고와 본 변호인에겐 있고 검사에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스피노자 검사가 보시는 바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영성을 경험했고,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스캇 펙 피고의 신앙은 정당합니다.

 

 

<검사>

 

 

 

재판장 님, 신의 존재는 불가해하지만 신에 대한 인식은 가해합니다. 파스칼은 무지로부터의 환원(귀류법)을 통해서 신에 대한 인식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 컨대 만일 지붕 위의 돌이 머리에 떨어져서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들은 돌이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해 떨어졌다고 여기고 다음과 같이 증명할 것입니다. 만일 돌이 신의 의지에 따라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정이(왜냐하면 주변의 많은 사정이 흔히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연히 일치할 수 있는가? 바람이 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다음처럼 반박할 것입니다. 왜 바람이 바로 그때 불었는가? 왜 그 사람은 바로 그곳을 지나갔는가? 만일 여기에 대하여, 전날까지도 날씨가 좋았지만 갑자기 날씨가 거창해지고 그때 바람이 불었으며 그 사람은 벗의 초대를 받았다고 답한다면 물음은 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다음처럼 논박할 것입니다. 왜 바다가 거칠어졌는가? 그 사람은 왜 그때 초대를 받았는가? 이처럼 그들은 계속해서 원인의 원인을 물어서 끝내는 신의 의지, 곧 무지의 피난처에 도피할 대까지 그렇게 끊임없이 물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또한 인간의 신체 구조에 대해 경탄하며, 그러한 위대한 기술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이로부터, 그것은 기계적 기술이 아니라 신적 또는 초자연적 기술에 의하여 만들어져 어떤 부분도 다른 부분을 손상시키지 않게끔 되어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러므로 기적의 참다운 원인을 탐구하는 사람,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경탄하는 대신에 학자로서 자연물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을 흔히 이단자나 불경한 사람으로 여기며, 일반 대중들이 자연과 신들의 대변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비난받게 됩니다.

이것은 그들의 뻔한 수법입니다.

 

본 재판정은 누가 누가 신앙이 깊은가를 가리는 경기장이 아니라 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판받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감정이나 행위에 대한 논의보다는 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본 검사는 판단하는 바입니다.

 

 

재판은 격론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스캇 펙 박사의 최후진술 시간이 되었다.

 

 

<최후진술>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재판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많은 방청객님들. 이 노구의 변변치 못한 노인네를 아껴주셔서 정말 감사하며, 이렇게 피고의 몸으로 재판에 오게 된 점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저 는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검사와 변호사, 저는 모두 신앙의 편견에 빠진 기독교인들을 비판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기독교인들 때문에 수입이 늘었다"고 농담함으로써 기독교가 인간의 심리를 혼란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을 이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노력에 대해서는 검사님도 인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제 가 쓴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 표현은 논의의 본질이 아닙니다. 다만 스피노자 검사는 인식을 통해 신을 지적으로 사랑하는 경지를 이야기했고, 저는 "무의식"을 통해서 신과 합일되는 경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미 스피노자 검사 또한 인간이 자신의 본질과 원인을 이해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서 신에게 다가가고 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우스갯소리의 소재로 삼은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벗어난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도 중요하며, 무의식 역시 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제가 스피노자 검사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논변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부분은 과학 자체가 하나의 종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 역시 스피노자 검사, 파스칼 변호사, 제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부분입니다. 저는 화해를 바랍니다.

우 리 세 명의 과정은 한마디로 영적 성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영적 성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영적 성장이란 쉬운 길을 가려고 하고 날짜가 지난 지도나 낡은 관행에 집착하려고 하며 변화를 싫어하는 본능 등을 극복하고,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려는 자연의 저항을 이겨 내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스피노자 검사가 신앙의 허위에 대해서 파고든 것을 저는 영적 성장으로 간주하고자 합니다.

 

나머지는 재판장님의 판결에 맡기겠습니다. 이 노인은 어떠한 처분을 받든지 유감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재판관이라면 어떻게 판결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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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이펙트 - 전 세계 5억 명을 연결한 소셜네트워크 페이스북의 인사이드 스토리 에이콘 소셜미디어 시리즈 6
데이비드 커크패트릭 지음, 임정민.임정진 옮김 / 에이콘출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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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페이스북은 대학 2년생의 감수성으로 봐야

<철학이야기>의 저자 윌 듀런트는 "대학 2년생"에 대해서 추억했다. 대학을 경험한 철학자들은 모두 대학 2년생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소개했다. 대학1년 새내기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대학 3학년이 되면 취업의 압박이 시작되니 대학 2학년은 순수하게 대학을 학문의 전당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해인지도 모르겠다.
마크 주커버그는 대학 2년 시절인 2004년 여름 학교를 그만두고 캘리포니아의 팔로알토로 간다. 팔로알토는 실리콘밸리 안의 도시다. 페이스북은 이제 하버드대학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야생의 시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페이스북의 초심은 바로 2003~2004년 이 시기를 말한다.
내가 페이스북을 대학 2학년으로 부르는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기자님이 대학생일 때를 생각해 보세요. 갖가지 이론을 공부하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죠. 세상을 추상적이고 매우 이상적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대학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자유롭죠. 그리고 ‘사람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가치를 배웁니다. 그런 것들이 제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결국 페이스북이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합니다.”(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이펙트, 32쪽)

"무엇가 할 수 있는데 왜 아직도 공부만 하고 있죠?"(함께 일하고 싶은 대학원생들에게 주커버그가 종종 하는 말)

결국 페이스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학 2년생의 감수성을 활용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이폰 서비스와는 보는 관점이 확연히 달라져야 페이스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언어를 배울 때 문법을 배우듯, 페이스북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단어만 암기하는 수준으로는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이용할 수 없고, 도리어 이용당할 수도 있다.


페이스북은 배우면서 진화하는 중

F8, 오픈그래프, 페이지 인사이트 강화, 인터페이스 전면 개편 등.. 페이스북은 정신없이 진화하고 있다. 진화의 속도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이것은 페이스북 시스템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의 구성원의 열정이기도 하다.

페이스북 사장을 지냈고 지금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션 파커는 페이스북의 회사 미션에 대해서 자신감 있게 말했다.

"회사 미션 가운데 하나는 실리콘밸 리에서 가장 멋진 회사가 되는 것이었죠. 회사는 재있고 락앤롤과 같 은 곳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201쪽)

<페이스북 이펙트>에는 회사 내 분위기가 자세히 소개되었다. 그래 피티 아티스트인 데이비드 최에게 사무실 벽에 그래피티를 그리게 했고, 자신의 여자친구를 불러 여자 화장실에 독특한 그림을 그리게 했다. .회사에서 걸어갈 거리에도 임대 주택이 있었는데, 주말이면 직원들이 그곳에서 파티를 즐기곤 했다.

 

▲ 마크 주커버그, 더스틴 모스코비츠, 션 파커(왼쪽부터) 뒤로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데이비드 최의 벽화가 보이는데, 그는 벽화를 그려준 대가로 주식을 받았으며, 그 주식의 현재 가치는 수천만 달러에달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크 주커버그의 학구열이다. 그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인 워싱턴포스트 사장 돈 그레이엄을 모델로 삼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워싱턴포스트 사무실을 방문해 그 레이엄 사장의 업무를 지켜봐도 좋은지 부탁했다.(198) 허락을 얻은 주커버그는 곧바로 워싱턴으로 날아가 그레이엄과 4일을 붙어 다녔다. 심지어 뉴욕 출장에까지 동행해 그가 기업 애널리스트들 앞에서 프리 젠테이 션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현재 그의 나이가 26세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변이 없는 한 젊은이들은 죽을 때까지 주커버그의 영향력 아래 있을 것이다. 주커버그는 영원히 대학 2년생인 채로 있다.


대학생의 경제학

페이스북이 대학에서 시작한 시스템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학교야말로 실제 소셜네트워크가 밀접해 있는 곳이며, 인생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시기다. 세미나를 곧잘 열어서 토론하고, 농활이나 봉사활동, 해외인턴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런 경험을 하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다. 만약 마크 주커버그가 대학이 아닌 다른 곳에서 페이스북을 시작했다면 지금의 인재들을 만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풀이 굉장히 넓어지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이라는 조건은 천재가 천재를 만날 수 있는 최적이다)

마케팅의 관점에서 봐도 대학은 굉장히 중요한 공간이다. 첫 자동차 구매, 첫 은 행 거래, 첫 신용카드를 사용 등 평생에 걸친 소비 습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가 바로 대학 시절이다. (169) 그리고 이들은 처음 선택한 수단을 수십 년 동안 바꾸지 않고 사용할 가능성이 크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는 이것을 증명하며 "기준점 효과Anchoring"라고 불렀다. 예컨대 슈퍼에서 희매가격이 25,000원, 판매가격 23,000원이라고 표시되면 소비자는 싸게 샀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대학생"이라는 키워드가 중요한 본질적인 이유는 페이스북 이용자 대부분이 대학생이거나 대학생 출신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학생의 입장에서 페이스북을 생각하고 페이스북의 미래를 예견해본다면, 페이스북 전략을 어떻게 수립해야 할지 큰 방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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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9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0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똥파리 - Breathles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영화 <똥파리>의 한 장면. 상훈(오른쪽)은 사랑하는 애인에게도 한 번 웃어주지 못할 정도로 폭력에 깊이 노출돼 있었다.


<똥파리>가 상기시켜준 가정폭력의 기억

"세상은 엿같고, 핏줄은 더럽게 아프다" 영화 카피처럼 온통 욕지거리 투성이 영화를 보고 나는 점집에 가서 무당에게 욕바가지를 한껏 얻어들은 것처럼 후련함을 느꼈다. 

 책이나 영화 중 유독 글로 남기고 싶은 작품들은 대체로 자기고백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 <똥파리>를 보았을 때 영화가 보여준 '폭력의 언어'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결손가정'이라는 말이 대한민국에서는 참 우습다. 결손하지 않은 가정이 어디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나오는 폭력이 끝에까지 쉬지 않고 이어진다. 영화 중간에 삽입된 10초 남짓한 장면이 모든 '폭력'을 설명해 준다. 아들(상훈)이 아버지를 때리는 근친폭력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이다.

단지 나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휘두른 폭력의 실체를 모두 알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날마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울먹이며 "승주야 너는 커서 아내를 울리지 마라, 아내를 때리지 마라"라고 하신 말씀이 평생 남아 있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는 공처가가 됐고 아내의 눈물에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은 못난 남자가 됐다. 유년 시절 가정폭력의 경험이 얼마나 생생하냐면 어머니가 들려준 묘사가 한순간도 빠짐없이 지금도 남아 있다.

뱃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배삯을 받는 날은 노름방에 직행한다. 그 날도 노름방에 들어가는데 술까지 한잔 해서 뒷주머니에 수표가 반쯤 나와 있었다. 동네 사람이 어머니에게 제보를 해서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표'를 빼내기 위해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도 못할 만큼 폭력을 휘둘렀고 어머니는 그 매를 다 맞으면서 끝내 수표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어머니는 그 일로 한동안 숨어 다녀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을 내면으로부터 밀어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고, 얼마나 많은 책을 소요한지 모르겠다.

나는 일상의 폭력을 일상의 집요함을 통해 극복한 케이스이지만, <똥파리>의 '상훈'은 그렇지 못하다. 극단적인 폭력과 극단적인 사건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 버렸다. 극단적인 사건은 한 사람의 전 인생을 억누르는 경우가 있다. 상훈의 경우가 그렇다. 
 


똥파리의 언어는 바로 '폭력' 그 자체

 <똥파리>는 첫장면부터 충격적이다. 뉴스나 블로그 등을 보면 첫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꽤 많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를 흠씬 패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가 남자를 때려눕히고 여자에게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거기다 침까지 뱉는다.

이 장면은 '폭력'을 언어로 이해하지 않으면 좀처럼 해석되지 않는다. 즉, 상훈은 연민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도 '폭력'이며, 자신의 사랑표현조차도 '폭력'을 쓴다. 육체폭력이 되지 못하면 '언어폭력'이라도 쓴다. 폭력이라는 알파벳이 새겨진 것처럼 그의 폭력적인 문자는 영화 전체를 헤집고 다닌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는 사채빚을 받으러 간 집에서 한 남자가 가족들을 사정없이 패고 있을 때, 동생들에게 '작업'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남자를 때려눕히면서 "밖에서는 X도 아닌 것이 집에서만 김일성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무능력자와 김일성, 폭력을 한 문장에 담아내면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베어냈다. 폭력이란 행위 그 자체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미 징후를 드러낸다. 말이 들어갈 수 있다면 폭력이 낄 수 없다. 고립과 무능력만큼 폭력에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영화는 당시 정치상황과 사회구조를 설명하는 어떠한 장면도 남기지 않았고, 단지 사적인 공간만으로 사회 전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모습도 날카롭게 그려내고 있다. 예컨대 가족을 죽인 죄로 15년을 복역한 상훈 아버지의 모습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한창 때는 가족들에게 허구헌날 폭력을 일삼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출소한 후에는 아들에게 밤마다 폭력을 당해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자해를 한 것이 가족에 대한 죄책감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폭력을 쓸 수 없는 처지'에 대한 욕구불만에서 나온 '자기에게로의 폭력'으로 이해한다. 죄책감에 의한 자살시도로 해석될 만한 근거장면을 찾을 수 없다. 폭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못할 때 처할 수 있는 극단적인 형태를 상훈의 아버지가 보여주었다면, 더 이상 폭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작정할 때 처할 수 있는 극단적인 형태는 바로 주인공 '상훈'이 보여준다.

상훈이 자신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연희와 사랑을 쌓아가며 점차 폭력의 언어가 치유되고 폭력 자체를 폐기할 수 있게 된 상황과 폭력의 언어를 버렸을 때 상훈이 감당해야 할 상황은 일종의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결말을 봐야 하는 영화의 배열 자체를 가지고 (상훈의 슬픈 결말에 대해서) 한탄을 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로 인해 폭력 언어를 포기했을 때 사회로부터 어떤 단죄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더욱 분명하게 느꼈다는 점을 소득으로 생각할 수 있다.


리얼리티 <똥파리>의 활주로 역할을 해준 <워낭소리> 고마워

뉴스보도에 따르면 <똥파리>는 <워낭소리>보다 흥행속도가 더 빠르다고 한다. <워낭소리>는 300만이라는 기적적인 숫자를 바라보다가 막을 걷었고, <똥파리>가 새로이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최근의 보도는 <똥파리>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워낭소리>의 가치를 평가하고 싶다. <똥파리>라는 독립영화가 등장할 수 있도록 텃밭을 일궈준 공로자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연나라의 '곽외'라는 사람이 생각난다.

연나라 소왕(昭王)이 천하의 현자를 구하자 곽외가 "먼저 이 곽외부터 쓰면 저보다 현명한 사람들이 어찌 천리길을 마다하겠습니까?"라고 자천했다. 연 소왕이 곽외를 스승으로 삼자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오고 추연(鄒衍)이 제(齊)나라에서 오는 등 많은 현자들이 몰려들었다.
- 사마천 <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워낭소리>는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텔링과 드라마타이징으로 훈훈한 감동을 주는 독립영화이지만, <똥파리>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리얼리티가 살아날 수 있도록 활주로 역할을 해준 <워낭소리>에 대해서 <똥파리>의 관객들은 고맙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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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4-23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똥파리가 이런 느낌의 영화였군요. 날 것 그대로의 충격이라니, 심호흡이 필요하겠어요.

승주나무 2009-04-23 21:53   좋아요 0 | URL
한번 기지개 펴시고 보세요^^

프레이야 2009-04-23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까말까 망설여지는 영화에요.
독립영화의 활주에 박차를 가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선 끌리지만
보고나면 하루종일 그놈의 욕설과 폭력적인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보고싶은쪽으로 더..

승주나무 2009-04-23 21:54   좋아요 0 | URL
요즘 위선을 벗고 까놓고 이야기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김앤장의 변호사님들처럼 젠틀하게 웃으며 세상에서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없는 짓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보다 대놓고 폭력쓰고 언어폭력쓰는 이 영화가 더 정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직한 폭력...멋있잖아요 ㅎ
 
드림 위버 - 소설로 읽는 유쾌한 철학 오디세이
잭 보웬 지음, 박이문.하정임 옮김 / 다른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철학책을 읽게 되는 계절

대학 입학 때부터 철학책을 즐겨 읽었는데, 지난 십여 년의 구비구비마다 철학책을 읽게 되는 계절이 있다.
국문학과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 공대에 들어갔지만 문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문학의 자양분을 얻었다. 문학에는 글을 읽는 행위와 이야기로 나누는 행위, 그리고 직접 글을 쓰는 행위가 있는데 글을 쓰고 싶었던 나는 내 글을 쓰기에 철학이 너무 빈곤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철학의 긴 여정이 그 때부터 시작된다. 윌 듀런트의 <철학이야기>와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철학의 초심자에게 좋은 도우미가 돼 주었다. 러셀이나 코플스톤 같은 철학사를 여행하면서 서양철학(근대철학까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는데, 서양철학을 보면서 허무함이 몰려왔다. 나는 동양사람인데 서양철학으로서 대부분의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면 올바른 철학여정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미처 공맹과 노장, 그리고 한비자나 '자' 자 들어가는 동양철학으로 물흐르듯 넘어갔다.
기형도나 안도현 시인 등과 결별한 시점도 이 즈음일 것이다.
군 생활 동안 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조그마한 불법을 저지름으로써 철학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모두 잠든 심야에 근무가 없는 날에는 화장실 불빛 밑에서 <에티카>를 다시 읽고 플라톤을 읽었다. 운 좋게 행정병으로 선발된 것도 있지만 부대 분위기가 독서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어느 정도 '짬밥'이 찼을 때는 주말마다 사무실로 가서 하루 종일 독서에 빠져들곤 했다. <소피의 세계>를 만난 것도 그 즈음이다.
그러다가 전역 후에 철학을 꽤 오래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사회 현안에 깊이 천착하고 싶어서 대중 교양서를 많이 읽었다. 우석훈이나 장하준, 박노자 같은 사람을 통해서 내가 연결돼 있는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읽어낼 감수성을 익혔다.

하지만 지금은 이 책들을 뒤로 하고 다시 철학책을 읽고 있다. 아무래도 변덕이 있는 것도 이유겠지만 십여 년간 독서의 방향타를 다듬어 왔고, 사회와 함께 책을 읽는 훈련을 해오면서 내가 어떤 책을 읽고 행동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지금 필요한 책은 철학책과 고전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회문제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살펴본 바로는 수십 년 동안 엉켜 있는 모순의 실타래가 있다. 그것은 당대의 지성만으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을의 큰 선비는 다른 마을의 큰 선비와 벗하고, 한 나라의 큰 선비는 다른 나라의 큰 선비와 벗하며, 천하의 큰 선비는 역시 천하의 큰 선비와 벗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옛 현인들을 논하고, 그의 시를 음미하며, 그가 쓴 책들을 낱낱이 살펴본다면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때문에 그의 시대를 논하고 먼 옛 현인까지도 벗삼는 것이리라.
"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萬章章句 下-8


맹자의 위 구절을 요즘 자주 들여다 본다. 마치 <드래곤볼>의 손오공이 원기옥을 모으며 세상의 모든 생물들에게 힘을 조금씩 모으듯 우리가 쌓아온 지혜의 우물에서 자꾸 물을 긷고 싶다.
인류가 정성스럽게 쌓아온 지성의 보고를 최대한 이용해 낡은 시대의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인간형, 새로운 사상이 요구된다는 것을 직관으로 느낀다. 나는 이런 패러다임을 창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리더십(ledership)이 아니라 펠로우십(fellowship)으로 새로운 패러다임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박이문 교수는 이 차이가 대표적인 철학사 서술 방식의 차이라고 말한다. 즉 역사 중심적인 철학사와 문제 중심적인 철학사가 분리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익숙하게 읽었던 철학사는 물론 역사 중심적인 철학사다. 철학과에서 교육을 받을 때도 역사 중심적인 철학 교수법을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은 철학자가 제시한 철학을 현재 나의 문제, 나의 시대의 당면문제로 전환해서 재구성하는 것을 나의 책임으로 돌렸던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당시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철학자들의 메시지로 풀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작업은 일반 독자가 하기에는 너무나 단단했다. 오랜 세월동안 누적되고 얽힌 당면문제가 철학자의 몇몇 사상으로 단숨에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철학 교육자들의 상상력 부재를 증명하였던 셈이다.

사춘기를 넘어 이만큼 성장한 철학소설 <드림위버>

<드림위버>뿐만 아니라 철학사 전체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감지된다. 이것이 비록 철학의 최신 흐름이 아니라 외서가 국내에 소개되는 순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만, 철학사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당대, 현실의 문제 나의 주변의 문제로 철학사의 관심사가 전환되는 것은 철학사의 하나의 진전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독일에서 60만부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는 현재적 가치에 충실하면서, '현재적 물음'이라는 것이 사실은 영원한 질문의 다른 표정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드림위버>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소피의 세계>는 비유의 힘이 강하다. 이 무기를 통해 기본 명제로 달려갈 수 있지만 그 명제가 나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소피의 세계>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를 보면, 소피가 철학 선생을 만났을 때나, 힐데와 소피가 만났을 때 느끼는 낯섦은 그것을 뜻하며, 그것을 지켜보는 주위의 반응은 걱정스럽다. 그들의 의식 속에 소피의 고뇌를 해석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마약'이나 '연애'를 유력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드림위버>는 바로 <소피의 세계>를 비롯한 기존 철학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기존의 철학사는 보학(譜學), 즉 자신들의 족보를 밝히는 작업에 치중하다 보니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물질화, 비문화화, 비인간화, 소외화에 대해서 별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있지 않다. 대중들은 직면한 문제와 철학의 관심사가 멀어지는 순간 철학을 배부른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브릿지 역할을 하는 것이 <드림위버>를 비롯한 새로운 철학, 즉 당면문제 중심의 철학 서술작업이다.
 
이와 관련된 철학 담론 중에서 흥미로운 주제는 바로 '철학사=철학' 담론이다. 철학사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작업이 역사가 아니라 '철학'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시대의 관점에서 철학사를 살펴보기 때문에 현재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들이 현재성을 불어넣기 위해 한 작업이라고는 과거의 철학사를 현대어로 번역한 수준에 불과하다. 박이문 교수도 "철학사는 과거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하나의 역사라는 점에서 철학적 지식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곧 철학적 사유는 아니다"고 규정했다.
그 외에도 내가 철학을 보면서 가장 중시하는 '사랑의 방향'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역사적 철학은 자신의 애정을 선대 철학자들에게 쏟는다. 철학자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승하기 위해서는 평생을 철학자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당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들은 당대인에 대한 애정으로 넘친다. 비로소 자신과 같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당대인들의 문제를 공감하며 그것을 철학으로 표현한다. 내가 철학서를 고를 때 이 기준은 무척 중요하다.

이제 <드림위버>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안'이라는 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학자인 학구적인 배경에서 태어난 아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적 담론에 쉽게 빨려들어갈 수 있다. 이런 캐릭터가 그러하듯이, 그는 늙수그레한 지성을 가지고 당면문제에 대해서 엄밀히 따져보고 가공의 노인과 함께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고,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에서는 부모님과 그 문제를 환기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로 만들어내는 방식이 <드림위버> 서술의 큰 틀이다. 철학을 잘 이해하고 잘 이해할 수 있는 '숙련된 조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설정은 차라리 솔직하고 전략적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이 책을 보는 대중들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주기는 하지만 철학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필요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세계의 지성은 총 155명인데 단지 철학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리처드 도킨스 같은 과학자(실은 과학철학자)나 헤르만 헤세 같은 문학자, 칼 융 같은 심리학자, 유클리드 같은 수학자가 등장한다. 이것은 철학의 주제가 철학자에서 철학자로 계승된 이전의 방식을 넘어서는 '철학의 다양성'을 확보한 진전으로 볼 수 있다. 하루에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다 보면 오래 전 느끼다 만 '법열'(法悅)이 생기는데 나의 생각이 자라는 느낌은 언제든지 기분이 좋다. 때문에 박이문 선생이 <드림위버>의 추천사에서 밝힌 평가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의 본질이 사유에 있고, 사유의 본질이 어떤 특정한 대답의 발견에 앞서 어떤 문제를 끝없이 추구하는 열린 과정에 있다는 점을 전제할 때, 이 책은 <소피의 세계>보다 성숙하고 철학적 방법이다. - <드림위버> 추천사


※ 리더스가이드라는 사이트에서 현재 <드림위버>에 대한 서평이벤트를 하고 있네요. 묵직해서 가격에 부담을 느끼신다면 신청을 해도 될 듯. 서평을 쓰면 책을 보내주니까요^^

<드림위버> 서평이벤트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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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3-24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철학. 하면 찔림과 그리움이 한번에 밀려옵니다. 철학 소설이나 너무나 궁금하네요

승주나무 2009-03-25 13:44   좋아요 0 | URL
이 철학소설은 거창하게 철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수만을 이야기에 녹입니다. 철학자들의 이름과 개념은 옆에 붙은 주석을 통해 알 수 있어요. 주석은 귀찮으면 그냥 통과해도 무방합니다.

마늘빵 2009-03-24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거 읽으셨군요. 저도 지금 읽고 있는 거 덮고나면 읽으려고 대기 중인데.

승주나무 2009-03-25 13:44   좋아요 0 | URL
네.. 아프락사스 님이 떠오르던 책이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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