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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우석훈이 자꾸 하고 싶었던 말은 '짱돌'이나 '바리케이트'는 아닌 것 같다. 사회적 협의니 세대간 연합이니, 구조니, 시스템이니 하는 말을 자주 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조'의 문제를 '개체'의 문제로 보려는 경향이 많다. '88만원 세대'의 문제는 상식적으로 보아도 '구조'의 문제가 맞지만, 386세대나 그 앞 세대가 '못난 놈'으로 매도하는 것은 사실 '구조'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비겁한 수사에 불과하다.
당장 삼성의 문제만 보아도 그렇다.

1차 저지선은 삼성 계열사 사장이 책임진다. 구조본이 다치지 않게 하는 게 지상 명제다. 이들이 총대를 메지 못하면 최종 저지선은 김인주, 이학수 등이다.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전무를 사수하는 게 구조본의 절대 목표다.
- 시사인 9호, 12쪽,김용철 변호사 증언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스스로 징역에 들어가더라도 절대로 지켜야 하는 지상 과제가 있다. 그것은 국민들에게 '구조'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이 싸움은 '본질'과 '개체' 간의 피말리는 결전이 될 것이다. 삼성은 활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번 사건이 개별 사건으로 처리되도록 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일신을 도모하는 일이다. 구조가 낱낱이 드러나면 이제까지 편법, 탈법, 위법으로 만들어놓은 모래성이 다 무너지기 때문이다.

靑 “‘삼성 특검’ 수사대상 너무 광범위” 거부권 시사(기사클릭)

신당 ‘삼성 특검안’ 수정 시사(기사클릭)

'88만원 세대'에서 피해야 할 대목과 주시해야 할 대목이 있다. 피해야 할 대목은 프랑스와 영국 등 사회적 타협을 이뤄낸 나라들, 아니면 최소한 일본 같은 나라를 당장 롤 모델로 삼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석훈은 사회적 합의를 이룬 국가들이 합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단 몇 쪽으로 설명하는 바람에 젊은 독자들로 하여금 현 정부와 386 이전 세대에 대해서 공분을 갖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아니라고생각한다. 사회적 협의에는 비용이 따르는데, 우석훈이 예시로 든 나라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값을 치렀다. 영국만 놓고 보자.

다가올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하던 19세기를 살았던 스튜어트 밀은 '생산의 원칙'과 '분배의 원칙'이라는 두 가지 경제 현상이 공존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생각의 단초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영국 소녀들의 노동과 임금에 대한 그의 관찰이었다. 15세 소녀들의 노동이 성인 남성에 비해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은 대부분 1/3 혹은 절반 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을 보면서 밀은 '분배의 원칙'이라는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요소들이 개입한다고 보았다. <책 54쪽>

존 스튜어트 밀은 신자유주의, 그러니까 뉴라이트 계보의 가장 상위에 링크된 인물이다. 중앙일보가 예전에 뉴라이트를 홍보하러 다닐 때 그 기원을 '밀'까지 타고 올라가는 계보도를 그린 바 있다. 하지만 우석훈은 존 스튜어트 밀을 극찬하여 말하길 "경제학사를 통틀어 단 한명의 천재를 고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밀을 꼽을 것이지만, 또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을 곱으라고 해도 역시 밀을 꼽을 것"이라고.

프랑스에 대해서는 자랑스런 68혁명의 세대들에 대한 예시가 소개되는 데, 386과 68세대를 매우 흥미롭게 비교했다. 68세대는 자신들의 투쟁을 사회적 협의로 승화시켰지만, 386은 한낱 허울 좋은 절차 민주주의 따위로 덮어버리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386은 샤르트르라는 지성이 부족했고, 지성의 저변도 부족했다. 이 책의 도움을 얻어 '존재와 무'라는 책을 구매하려고 했는데, 전국 서점에 모두 다 품절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구조에 한발 다가가기도 전에 두 발짝씩 퇴보하는 지금의 상황인데, 우석훈은 '인질'의 비유로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오랫동안 인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6년 동안 사교육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정상으로 돌아오기 어렵다. 당연한 일이다. (중략) 지금 막 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이 완전하게 인질극이 된 6년간을 거친 첫 세대인데, 이들 중 좋은 대학에 간 소위 이 세대의 엘리트들이 대학에 드렁와서 제대로 적응을 못하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 224쪽>

이 구절을 보고 요즘 대학생들이 홍대 앞에서 흥청망청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상투적이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서울대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5월에도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원에서 인문대 남학생이 목숨을 끊었다. 학교측에 따르면 최근 2년간 10명의 서울대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정신건강 이상을 호소하는 학생도 늘고 있다. 2004년 대학생활문화원에서 상담을 받은 학생은 190여명이었으나 2005년은 280여명, 2006년은 300여명으로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대 보건진료소에서 직접 정신과 치료를 받은 학생수도 2004년 159명, 2005년 493명, 2006년 680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올 6월까지만 해도 211명의 학생이 정신과를 다녀갔다.
- 경향신문 7월 13일자


물론 이 사건이 6년간의 트라우마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사교육의 완벽한 감시 아래 있었던 이른바 한국식 엘리트들이 겪고 있는 현상은 썩 건강한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3년간 논술강사로 일했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트라우마는 학생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강사에게도, 학부모에게도 없지 않다.

국회 교육위 소속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21일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입시·보습학원 수는 2001년 12월말 1만3천7백8개에서 2006년 6월말 현재 2만7천7백24개로 5년 사이에 1만4천16개가 증가했다. 참여정부 출범 직전인 2002년 말의 1만6천6백95개와 비교해서는 1만1천29개가 늘어 66.1% 증가한 것이다. 이같은 학원 숫자는 전국 초·중·고교수 1만8백89개의 3배에 가까운 수치다.
연도별 증가를 보면 2002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2,987개, 2003년 2,120개, 2004년 3,243개, 2005년 4,044개가 각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 경향신문 2006년 9월 21일자

내가 직장을 때려치우고 돈을 덜 받는 곳으로 가게 된 이유다. 채용이나 입시와 같은 선발은 결과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문제는 선발시스템에 대한 기준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숫자가 거의 모든 것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과정을 모두 왜곡하기 때문에 의식 있는 교사나 부모들의 열의를 모두 좌절시키고, 대신에 '위기감'을 키우는 데, 이것을 마케팅으로 활용하고 심지어 부모에게 협박해서 돈을 뜯어먹는 것이 사설학원의 구조다. 이러한 현상이 교육부와 학원 간의 짬짜미의 혐의가 짙다고 책에 밝히고 있다. 일개 학원 강사였던 나를 포함해 우리나라의 많은 강사들은 까놓고 사기를 치느냐 아니면 얼마간 견디다가 떨어져 나가느냐 하는 선택에 들게 된다. 직장 채용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기업문화에 맞춰 모델링된 선발체계가 전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하다.

지난해 대기업 마케팅팀에 입사한 김모씨(29)는 최근 불안에 떨고 있다. 이력서에 기재한 ‘가짜 경력’ 때문이다. 김씨는 해외 배낭여행은 물론 동아리 활동 경험이 전혀 없었다. 4.0이 넘는 고학점 외에 뚜렷하게 내세울 게 없었던 김씨는 고민 끝에 친구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은 배낭여행 경험과 동아리 활동, 아르바이트 경험을 모두 꾸미기로 했다.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영상 제작 동아리에서 주된 활동을 했다고 기록했다. 밟아보지도 않은 유럽에서 한달간 배낭여행했다고 자기소개서에 썼다. 화려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만든 김씨는 원서를 낸 대기업 세 군데 모두 합격했다.
- 경향신문 2007.8.12일자



그러나 이보다 더 위험한 상태는 스트레스도 없고 병증도 없는 편안한 상태의 이들이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가족아동학 전공팀은 다음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제11회 가족아동학 심포지엄’에서 위와 같은 조사자료를 발표했는데, 초등학생들이 다니기 싫은 학원을 억지로 다니고, 학원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우리들의 생각과는 딴판으로 오히려 만족도를 표시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서울대 우울증과 비교했을 때 더욱 절망적인 상태가 된다. 6년간 사교육을 받았던 지금의 대학생들이 '유괴'에 비유한다면, 사교육에 이제 발을 들여놓은 초등학생들은 '마약'에 비유할 수 있다. 이미 사교육에 최적화돼 버린 것이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감정을 배제한 인간들과,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대량생산되고 세뇌교유과 쾌락에 만족하는 인간들의 모습과 점점 닮아가고 있는 모습은 오싹하기 이를 데 없다.
우석훈이 결말에 던지는 화두는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그는 이것을 '창조적 파괴'라고 하였다. 젊은이들의 선택은 두 가지가 있다.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룰'이라는 좁은 소로를 따라가면서 점점 로봇으로 변모해가느냐, 룰을 거부하고 가시밭길로 가느냐. 이미 어떤 선택을 할지는 나와 있다.

서울지역 7개 대학신문이 대선을 맞아 지난달 7개 대학(고려대·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한양대) 학생 20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치·사회 의식 조사 결과 서울대생 응답자의 40.5%가 자신의 정치성향을 ‘보수적’이라고 밝혔다.
- 경향신문 11월 12일자

"하이힐 위에서 혹사당하는 여학생을 위해 발 마사지기를 도입해야 합니다.”
의료기기 업체의 광고 문구가 아니다. 이번주에 시작된 서울대 총학생회선거 후보의 공약이다. 이 후보는 피곤에 지쳐 음악감상실이나 학교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남학생을 위한 남성전용 휴게실 도입도 핵심공약으로 제시했다.
- 경향신문 11월 7일자

자꾸 서울대만 예를 들어서 좀 뭣하지만, 신문에서 다뤄주는 대학이 서울대밖에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은 결국 로봇이 될 텐데, 젊은이들이 모두 로봇이 된다면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이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현실화될 것이다. 가진 자들의 시나리오가 벌어질 것이며 종국에는 벨기에처럼 무정부상태로 가다가 독립을 할지도 모른다.

벨기에라는 국가를 과연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다. 플랑드르 지역인 알의 마크 데메스메커 부시장은 “우리가 벨기에에서 얻는 ‘부가가치’는 거의 없다”며 “차라리 분리하는 편이 낫다. 600만 플랑드르인은 스스로도 충분히 유럽의 부유한 소국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11월 13일자

우석훈은 싸우라고 하지만, 한마디를 덧붙여야 했다. 그것은 협상의 기술이다. 여기에 관련해서는 내가 '시사저널 사태'로 한창 기자들과 싸우고 있을 때, 백승기 발행인이 나에게 해준 말을 인용한다.
"전쟁터에서 총 들고 피터지게 싸워도 한쪽 테이블에서는 웃으면서 협상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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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勳 2008-01-1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굳ㅋ 잘 읽었습니다. 논문으로 발표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추천해 드렸습니다.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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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때의 일이다. 서양의 문예사조사를 가르치던 노 교수는 문예사조를 결정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발표했는데, 일명 '반발의 원리'였다. 내용인 즉슨 예컨대 16,17세기에 부흥했던 고전주의는 과거의 미를 추구하며 조화와 형식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는데, 이후에 등장한 낭만주의는 이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개성을 추구하였다. 뒤에 나타난 사실주의나 상징주의도 반발, 혹은 반발의 반발로 태어났다는 일관된 원칙이 '반발의 원리'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원리가 훨씬 오래 전부터 정리되었다고 옆에 앉은 선배가 귀띔해 주었다. 문예사조와 관련해 한 가지 더 귀기울일 만한 원리는 최신의 사조가 이제까지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며, 그래서 한 시대의 사조는 '독식'에 대한 욕구가 강력하다. 비단 문예사조만 그러할까. 철학사는 물론 학문의 영역을 넘어 '승계구도'를 가지고 있는 모든 구성원 내면에 탑재된 욕망이다.

내가 88만원 세대를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문예사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책이 지향하는 행동이 바로 '반발'이며, 이 책이 우려하는 현상이 바로 '승자 독식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이름을 '승자 독식 세대'나 '배틀로얄 세대'로 지으려고 했었다는 서문을 보아도 글쓴이들이 이 개념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우석훈의 글에서 '무한경쟁'이라는 말이 다가온다. 사실 나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몰랐다. 세계와 경쟁하고 영원히 경쟁해야 하는 추상적이고 비장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 책을 읽고 개념을 바로 잡았다. 경쟁을 위해 필요한 선결 조건은 바로 '룰', '협의', '장치'인데, 이것을 모두 걷어치운 상태에서 아무런 형평성도 없이 싸움을 붙이는 것이 무한경쟁이 의미하는 본뜻이었다. 이 정도까지 왔다면 사실 '경쟁'이라는 말은 불필요하다. '무한약탈' 정도 될 것이다.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이전 세대와 88만원 세대가 벌이는 세대 간 승부나 돈과 권력과 시스템 등 모든 것을 갖춘 삼성과 김용철 변호사, 사제단, 몇몇 소신 있는 언론사가 펼치는 전쟁은 마치 대기업에 맞선 중소기업의 처지를 생각나게 한다. 벌칙 없는 싸움이라면 탈벌, 편법, 위법에 능숙한 자가 언제나 이긴다. 그래서 여기서 제기된 과제는 '경쟁 구도'를 만드는 것이다. 진짜 인생 걸고 싸울 만한 경쟁의 틀이 필요하다. 그 틀을 만들기 위해서는 요구할 수 있도록 구체화시켜야 하며, 이것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협력해서 싸워야 한다. 이런 과정 역시 하나하나가 다 과제이다. 결국 우석훈의 결론도 '싸우라'는 것인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을 써야 할 것이다. '싸움의 기술'을 만들어내기에는 88만원 세대는 훈련이 잘 안 돼 있다. 알라딘과의 인터뷰에서 우석훈은 20대의 70%가 이 책을 읽어주기를 기대했다고 하는데, 실제 20대 구매자는 기대치의 1/3이 조금 넘는다. 이렇게 된 이유 역시 이 책에 기록돼 있다. 오로지 마케팅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정체 불명의 오합지졸로 바라보거나 심지어 미래를 좀먹는 죄수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점점 좁은 문으로 '양떼몰이'를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대는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고, 그들 역시 점점 좁혀 들어오는 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한창 대학2년생의 로망에 취해 있을 때, 학교에서 한자사전과 국어사전을 들고 다니고, 도서관에서는 철학사나 문학작품을 읽은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88만원 세대'와 그 후배들을 '할당량 세대'라고 부르기로 했다. 할당량 세대는 20대는 물론 초등학교, 유치원생까지 포함하는데, 하루나 일주일 단위로 해야 할 몫이 정해져 있는 세대이다. 물론 그 몫을 정하는 계획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다. 좋은 초등학교, 좋은 중학교,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으로 언제나 지상과제가 놓여 있기 때문에 할당량을 거부한다거나 '좋은 목표'의 궤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가 느끼는 사회적 압력이 대단하다. 물론 나도 할당량을 강요받았으나 나를 가르친 스승들은 한사코 그러한 강요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주문했다. 나는 주류에서 다소 벗어나 아웃사이더로 남는 길을 택했는데, 그때의 결정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강요를 받아들였다면 태평로 삼성그룹 앞에서 삼성을 양해 성토할 기회도 없었을 테고, <시사IN> 기자들과 함께 싸우며 새매체를 일으키는 데 참여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고분고분하게 다 받아들이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간 20대들을 보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출입카드가 달린 목걸이를 차고 다녀야 하고, 지금까지의 강요보다 더 어려운 강요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내는 주체가 아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의 생각이 아니다. 그저 회사에서 그의 머리에 미리 입력해놓은 문장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휴머노이드가 미리 입력해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제 말을 기계적으로 생성해 내뱉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삼성 로봇’이 사람과 너무 똑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 <시사IN> 9호, 진중권의 칼럼 "'기계'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오다" 중에서

중앙일보의 기자들은 어떤가. 자신들의 사주가 구속되던 날 현장에서 도열하면서 한목소리로 '회장님 힘내십시오!'라고 외치는 모습에서 '주류'의 피곤함이 엿보인다. 얼마 전에 만난 기자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통쾌하게 논평을 했다.

"기자의 월급이 올라갈수록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는데, 반대로 기자가 박봉이면 엄청난 '사회적 불만'을 지면에 쏟아낸다."

결국 이러한 주류의 굴욕 하나하나가 88만원 세대를 더욱 고착화시킨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누구에게 기대를 걸 것인가? 우석훈은 이 계획에서 작정하고 386을 배제하려 한다. 이 책에서도 386에 대해 논한 지면은 몇쪽 되지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중략)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68세대들이 공교육 체계를 대학까지 연장시키면서 다음 세대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20살에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반면 우리나라의 386은 학벌주의와 겨에엘리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지금 10대와 20대가 맞게 된 조금 황당한 상황들은 사실 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7~178쪽>

글쓴이는 이 이 책에 대해서 386의 피드백을 별로 얻지 못했다고 고백했는데, 그것은 당연하다. 이 책은 '88만원 세대'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쉽게 보았던 부분은 386과 88만원 세대 간의 타협점을 제시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자가 386에게 느낀 반감과 실망의 골이 이만큼 깊음을 말해 주는 것이겠지만, 덕분에 386도 이 책이 던지는 의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협의'보다는 '저항'에 무게중심이 있는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88만원 세대에게 맡긴다는 의미인지 '싸우라'는 선언 외에 어떤 명확한 제안도 발견할 수 없다. 결국 싸우기 위해서는 '구조'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토플책을 내던지고 바리케이트를 세우라는 과제를 88만원 세대들이 수행할 수 있을까? 기득권자들은 엄청난 미션을 부여함으로써 88만원 세대들이 모의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조직이나 세대내 협의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그들은 '각자'에게 유배된 상태다.
프랑스처럼 중고등학생이 전국적으로 들고일어설 수 없을 바에야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하면서 세대를 대변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88만원 세대와 처지가 비슷한 10대가 연대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구성한다면 사회변화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현행 선거법에서는 선거권을 만 19세에게 부여하고, 피선거권은 그보다 훨씬 뒤인 25세 이상으로 한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25세라는 근거조차 불명확하므로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동일하게 18세로 정한다면 게임은 해볼만 할 것이다. 결국 수탈당하는 세대가 수탈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말인데, 기성세대는 그들의 반발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20대를 착취하는 룰은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부당함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잘못된 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20대에게 맡겨진 과제라면 매우 절망적이다. 우석훈에게 책을 몇 권 더 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세대 간 대결구도를 세대 간 화합 구도로 전환하는 책을 하나 쓰라. 아니면 20대가 짱돌을 던지고 바리케이트를 던지기까지 결단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라.
정작 20대의 각성을 요구하는 방법밖엔 없단 말인가. 길을 돌고 돌아도 마주치는 출구는 바로 이 지점뿐 없단 말인가. 오호 통제라. 순환논리의 터널이 너무나 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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