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기대감소의 시대
폴 크루그먼 지음, 윤태경 옮김 / 황금사자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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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폴 크루그먼이 대중에게 말을 거는 까닭

폴 크루그먼의 책은 너무 쉽게 읽혀서 경제학과 나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런 특징은 어느 정도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크루그먼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전문적 내용을 담으면서도 비전공자도 읽을 수 있는 얇은 경제서적을 써보지 않겠냐"는 한 출판사의 제의를 받은 것이 서술의 직접적인 동기이다. 경제에 흥미를 갖는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정리'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대중이 알아야 할 지식과 속지 말아야 할 지식, 경제정책의 기본적 생리, 지향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

크루그먼에게 경제학을 쉽게 소개한다는 것은 일종의 전쟁처럼 절박한 과제다. 정부관료나 자본가 등 기득권 세력은 경제를 종교화시켜 대중에게 강요하는 방식을 취한다. 종교적 관념으로 포장해 대중을 현혹시키면 경제정책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개별적인 이권도 이 틈새에서 나온다. 폴 크루그먼이 보았을 때 이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 크루그먼의 용어를 사용하면 '경제적 복지'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때문에 그는 경제문제를 상식의 차원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대중들이 경제문제를 상식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폴 크루그먼이 <기대감소의 시대>(황금사자)에서 밝힌 명제는 아주 간단하다. 국가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즉 국민 대다수의 생활수준을 결정짓는 요소는 생산성, 소득분배, 고용이다. 그는 이 세 가지만 해결되면 나머지 경제문제는 저절로 풀리고 반대로 이 세 가지를 해결하지 못하면 각종 경제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예컨대 인플레이션 자체는 위 세가지 중요 요소가 아니지만 제조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기업경영자가 투자결정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며, 인플레이션 공포가 국민에게 공포감, 불안을 야기하여 저축 동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생산성, 고용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경제라는 종교 걷어내기

"국가경쟁력은 미래의 생활수준과 아무 관련이 없다.. 슬프게도 국가경쟁력이란 말은, 이 낱말을 말하는사람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벌거벗은 임금님 옷과 같다."

국가가 국민을 현혹하는 데 쓰는 단골 메뉴가 바로 국가경쟁력이다. 무역적자 역시 악용되기 쉬운 소재이다. 크루먼에 따르면 사람들은 무역적자가 일자리를 없애버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1980년대 미국은 무역적자가 풍선처럼 부풀었지만 새로운 일자리가 계속 생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IMF만 생각해 보자. IMF의 가혹한 요구를 맞추기 위해 우리는 인정사정 없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기업은 대규모 순수익을, 국가는 대규모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국민들이 무역적자는 나쁘고 무역흑자는 좋다는 이분법에 빠져 있으면 당국자들이 국민을 속이기가 더욱 쉬워진다.

사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국민을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국가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더라도 전혀 견제를 받지 않는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점을 크루그먼은 우려한다. 그는 미국인들을 예로 들며 저조한 정책성과에 안주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58쪽) 지금 시대 전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으며 그래서 책 제목을 <기대 감소의 시대>로 뽑은 것이다. 이렇게 국민들이 기대감소의 시대를 살아갈 때 아주 역설적인 상황들이 생긴다. 일례로 미국의 의료기술이 발달할수록 미국인의 전반적인 의료복지 수준은 오히려 떨어진다.  


기대감소 시대의 빚은 국민과 그 자식들이 뒤집어 써

의료보험료가 어떻게 산정되고 누가 부담하는지를 안다면 회사 의료보험이라고 하더라도 남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료시스템에 대한 관심도 없고 기대도 없기 때문에 최고 기술을 여러 번 남용하고, 그 비용은 본인 부담자들을 위협하고 의료보험 비가입자들을 양산한다.

이것은 경제정책을 몇몇 소수에게만 맡길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몇 년 전 의료보험제도 개혁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 골자는 "많이 내고 적게 받는다"였는데, 기대감소 시대의 국민들은 결국 큰 이익이 무엇인지를 보기보다는 당장 내 지갑에서 사라지는 돈이 더 아쉽기 때문에 의료개혁 법안에 반대하고, 개혁을 추진하 정치인들을 외면한다. 마치 기업의 주주들이 한해 수익률을 근거로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앞서 언급했던 세 가지 본질적인 경제 이슈에 중점을 두는 것은 정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지만, 기대감소 시대의 정부, 국회에서 논의되는 비율은 5%가 되지 않는다.

이러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정부는 국민 입에 단 이야기로 현혹시키고, 부담되는 부분은 말을 하지 않거나 추진을 하지 않게 된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국가에 치명적인 정책들을 남발하고 결국 그 빚은 미래의 세대들이 지게 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폴 크루그먼이 절박하게 신호를 보내야 하는 대상은 국가관료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고 바로 일반대중이다. 일반대중이 경제 흐름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 없이 정부에서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몇몇 대기업, 정치권력, 거대언론이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가 고착화된다. 이것이 바로 크루그먼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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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31 12: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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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 장하준의 경제 정책 매뉴얼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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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는 국가정책의 틀 안에서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지론을 설파하며 신자유주의자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데, 최근 출간한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부키)에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논거를 일일이 기각하는 반대논거를 들고 있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를 대해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글에서는 장하준이 예시한 신자유주의 진영의 논거와 신문기사를 통한 정부의 입장을 대비하고 이에 대한 장하준의 논박을 소개할 것이다. 그 첫 번째 주제로 자유무역주의와 민영화에 대해서 알아본다. - 리뷰어 주
 

세계 금융위기로 시작된 신 브레튼우즈 화두와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 등으로 신자유주의의 근본적인 궤도 수정이 요청되고 있다. 최근의 논의는 '자유'와 '통제' 사이에 방점이 찍혀 있는데, 요점은 국경을 허물고 시장이 통합되는 추세에서 투기자본의 횡행과 고위험을 막기 위해 위험통제의 기구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것이 '슈퍼 IMF'로 불리는 신 브레튼우즈 논의다. 세계 2차대전으로 공황을 경험했던 나라들이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을 성사시켰듯이, 이에 준하는 강력한 시스템이 등장할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광범위한 공감대를 얻고 있다. 이와 더불어 시장의 위험성이 커지면 그 고통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 지고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약자들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해야 한다는 논의가 미국 대선을 뜨겁게 달구며 젊은 오바마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중산층, 서민들에게는 '감세정책'을 고수익자들에게는 '증세정책'을 펼치겠다는 공약과 전국민 의료보험제도를 시행하겠다는 공약으로 미국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한국의 주류는 아직도 신자유주의를 숭앙하며 정책기조를 이어갈 전망이다. 


산업정책은 실패했으니 자유무역으로 가야 한다?

한승수 총리는 11월 9일 SBS 시사프로그램인 `선데이 뉴스플러스'에 출연해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채택 전망과 관련, "과거 1930년대 대공항 당시 각국은 자국산업 보호를 위해 노력했지만 모든 나라가 손해를 봤다""그래서 무역과 투자를 늘려야 하며, 자유무역적인 정책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08-11-09, 연합뉴스)

이는 장하준이 예시한 신자유주의 진영의 지론과 토시 하나 다르지 않다.

1930년대에는 각국 정부들이 다양한 관세 장벽을 서로에게 부과하는가 하면, '나부터 살고 보자beggar-the-neighbor'는 식의 정책까지 펼치면서 자국 산업의 성장과 안정을 추구했으나 이는 부질없는 시도에 불과했다.
- 신자유주의적 관점 예시,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18~19쪽


장하준에 의하면 이는 단선전인 편견에 불과하다. 산업화 국가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중앙은행이나 효과적인 금융 규제가 없는 탓에 끊임없는 금융 불안을 겪어야 했으나 효과적인 금융 규제를 통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금융 부문의 안정과 그에 따른 성장을 실현하게 되었다. (23쪽)
산업국가(이른바 선진국)들은 규제 정책을 통해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데, 예컨대 18세기의 영국은 수입 규제와 수출 진흥 정책을 통해 당대 최고의 산업 국가였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위협하였다(21쪽) 미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보호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국가였는데, 19세기 중반부터 2차 세계 대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보호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는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또한 유치 산업 보호정책의 지적인 모국으로서 독일과 일본이 이를 적극 수용해 성공을 거뒀을 정도였다. (22쪽)

이런 논의를 통해 볼 때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적 흐름과 시대의 문맥을 읽기보다는 특정한 시대나 상황을 단순히 인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논거로 활용했을 뿐다. 장하준은 그의 책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논의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예외적인 사례들을 일반적인 사례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승수 총리가 이를 토시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옮긴 셈이다.

자유무역을 통해 선(先) 성장 후(後) 분배를 이룬다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오래된 주장인데, MB정부와 노무현 정부 역시 FTA 등 전폭적인 개방과 자유무역을 통해서 파이를 키운 뒤 이를 분배하는 정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도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감소나 특정 분야에 대한 정부의 지원 축소와 실업률 증가, 이로 인한 삶의 근거지 상실 등의 문제를 인정하지만 단기적인 조정 비용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FTA를 통해 농산업이 재앙을 맞는다는 사실을 뻔히 보고 있음에도 아무런 대책 없이 이를 강행하려 한다. 장하준에 의하면 불평등과 빈곤 확산은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고 대다수 국민에게 고통이 미친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정부가 돈 안 되는 것을 과감해 쳐버리고 파이를 늘렸다고 하더라도 이미 정부 부문의 대규모 민영화와 기업하기 좋은 정책 등으로 인해 조세 기반이 상당히 무너진 상태에서 무슨 재정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보위할 수 있을 것인가. 때문에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무역 옹호론은 그럴 듯하지만 허약하기 짝이 없는 주장들이라고 비판했다. (33쪽)

 
▲ 이명박 정부의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를 거의 종교적인 차원으로 신봉하고 있지만, 설득력 있는 설명은 하지 못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명박 대통령, 한승수 국무총리, 곽승준 전 정책기획수석. 
 

신자유주의의 아이콘 '민영화'

 
신자유주의가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분야는 '민영화'이다. 민영화는 순수히 시장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경영 성과 등을 지속적으로 감시받기 때문에 효율성이 증대된다는 입장이다. 민영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국영기업'을 부패와 비효율의 상징으로 매도한다. 즉, 국영 기업 운영은 부족한 예산 자원을 낭비하는 값비싼 시도이며, 국영 기업의 경영자는 실적에 대한 압력을 전혀 받지 않으며, 고용된 경영자이기 때문에 기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동기도 없으며, 심지어 능력을 향상시킬 동기조차 없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경영에 대한 압력이 없기 때문에 경영자는 방만경영을 일삼고 관료들은 부패한다는 것도 신자유주의자들의 주된 비판점이다. 

"아시아 3위 경제인 한국 경제를 감세, 규제완화, 민영화를 통해 변화시키고 글로벌 시장 불안에도 불구하고 경제 성장을 7%로 높이겠다" - (2008-03-03, 청와대 뉴스, Financial Times에서 이명박 대통령 언급 인용)

MB노믹스의 핵심은 `작은 정부` `공공개혁` `규제 완화`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추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국민이 현 정권에 바라는 것이고 현 정권이 가장 잘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이 산업은행 민영화, 신보ㆍ기보 통합, 주공ㆍ토공 통합이었다. (2008-11-02, 매일경제신문, 곽승준 전 국정기획수석 인터뷰)

 
이명박 대통령은 '효율성'의 관점에서 민영화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MB 정부의 브레인으로 통하는 곽승준(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공개혁'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공공부문의 비효율과 부실, 부패를 기정사실화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민영화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장하준에 의하면 민간 부문의 인센티브, 보상, 감독 체계 등이 국영 기업보다 낫다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은 근거가 없다. 실질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민간 기업의 경영자는 기업의 현재 주가를 극대화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것은 경영 목표나 기업의 장기적 이익 또는 국가경제 전반에 도움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주가 극대화를 위해 대규모 인원 감축을 하면 실업률이 올라가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초래하며, 당장 이익이 나지 않는 장기적인 투자 부문을 폐기함으로써 기업의 잠재적 성장가능성과 기업가치를 떨어뜨릴 공산이 크다. 특히 경영자가 스톡옵션으로 보상을 받는 경우는 기업의 장기적인 이익보다 경영자 개인의 스톡옵션을 위해 눈에 보이는 '지표'만 관리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117쪽)

'감시'에 있어서도 맹점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다양하게 분포된 수많은 주주들이 민간 기업의 경영 실적을 제대로 감시하기는 사실 거의 불가능한데, 이는 주주들이 상대적으로 작은 지분을 갖고 있어서다. 실제로 감시하기 쉬운 시스템은 민간 기업이 아니라 국영 기업인데, 만약 국영 기업이 방만하게 운영될 경우 납세자인 국민의 세금이 낭비되므로 국민 대중은 최소한 민간 기업의 주주들만큼은 국영 기업의 경영자를 징계할 인센티브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국영기업은 중앙 집중적 구조로 되어 있어서 정부기관이 경영 감시를 쉽게 할 수 있다. (118쪽)

장하준은 이명박 대통령과 곽승준 전 국정기획수석의 논리를 한 문장으로 논박하고 있다.

상당수 국가는 재정 수입을 늘리는 수단으로 민영화를 도입한다. 그러나 여러 연구에 따르면 민영화가 생각만큼 정부 예산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영 기업은 외국 투자자나 국내 내부자(insiders)'에게 헐값으로 팔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거래는 상당한 부패를 동반하기도 한다. - 123~124쪽

민영화가 오히려 부패를 부추길 수 있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데, 재정부와 국세청, 법률사무소 김앤장 등 정부와 사기업이 대대적인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론스타의 사례나, 이명박 대통령의 친인척이 연계되어 있어 특혜 논란이 일고 있는 '인천공항 맥쿼리 펀드 매각설' 등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민영화는 정부 소유의 기업을 민간에 판다는 말인데, 매매 주체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마련이다. 즉 정부 쪽에서는 수익성이 가장 떨어지는 국영 기업을 매각하고 싶겠지만, 민간 부문에서는 가장 수익성이 높은 국영 기업을 매입할 것이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국영기업을 누가 거들떠 보겠는가. 정부가 민간기업의 입맛에 맞게끔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을 때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국영 기업이 수익성이 높아진다면 이 기업을 매각할 이유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수익을 잘 내는 국영기업을 정부가 소유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영화를 시킨다는 것은 정부와 기업 간의 커넥션이 있다는 오해를 증폭시킬 우려가 크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영 기업을 외국의 민간 업체에게 팔 때이다. 이 때는 자원에 대한 권리가 외국계 기업으로 넘어간다는 뜻이므로 이용자들이 상당한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외국계 기업에서 이용가격을 갑자기 두 배로 높인다고 했을 때 정부로서는 제재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장하준은 국영기업을 민영화시킬 때 단지 매각에 따르는 이익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분배와 정치적ㆍ사회적 비용 등 다양한 비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전기나 수도 등 필요불가결한 자원을 국민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다면, 이 공급활동에 따르는 손실을 단순히 손익계산서에 따라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휴대폰 보급이 일반화된 오늘날에도 일정한 거리에 따라 의무적으로 공중전화를 설치하고 이를 이동통신사에 부담하게 하고 있는데, 손익계산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불필요한 비용의 발생이므로 당장 공중전화를 뽑아버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정말 급하게 전화를 이용해야 하는 이용자는 전화를 쓸 수 없게 된다. 장하준은 '민영화'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놓기보다는 조직의 개혁이나 인센티브 체계, 감독 시스템의 개선작업을 통해 효율성과 생산성 등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영화에 대한 장하준의 주장을 종합하면, 단순히 민영화가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을 넘어서 민영화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민영화는 경제적 효율성과 국민에 대한 서비스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정부가 '공공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진중인 민영화 정책은 국영기업에 대한 지나친 폄하와 매각 수익 등 단순지표에 치우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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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11-10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영화를 폭넓게 이해한다. 참 좋은 말이지만요, 누가 이해하느냐... 저 위에 눈 버린 인간은 아닌 거죠. 자기 인간 심어놓는 이런 짓거리는 어디서나 결과가 더럽죠.

승주나무 2008-11-11 10:10   좋아요 0 | URL
이론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저의 모습이 한심스럽기는 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상황에서는 촛불을 들고 나가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뿐이란 사실만 확인할 뿐이죠.. 하지만 권불십년이라고 했습니다. 막연한 미래라도 준비하려 합니다^^;
 
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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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이 꺼내놓은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한국사회를 강타한 문제작 <88만원 세대>(레디앙)를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만나지 못해 원고를 안고 '출판사 삼고초려'를 했던 우석훈이 자신의 경제대안시리즈(4부작) 최종 작품에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꺼내놨다. 천하삼분지계란 후한 말기에 군사 제갈량이 유비에게 설파한 비책이다. 적벽대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유비가 형주. 익주를 얻으므로서 조조의 위국(魏國), 손권의 오국(吳國) , 유비의 촉국(蜀國) 으로 천하가 삼분되어 수십년간 천하는 정족지세(鼎足之勢 : 다리가 세개 달린 화로에 빗대어, 삼국이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는 형세를 말함)의 형세를 유지하게 된다. 비록 정사(正史)에서는 조조의 위국과 손권의 오국이 사실상 이파전을 벌였고 유비의 촉나라의 존재감이 유명무실했다는 지적은 있지만, 유비의 촉나라가 의미 있는 균형감을 제공해준 것은 주지하는 바다.
우석훈에 따르면 제1부문은 시장주의를 따라 작동하는 시스템, 우리의 경우는 재벌/대기업 부문을 말한다. 제1부문의 기업들이 독점기업으로 전환되면서 시장의 폐해가 나타났고, 193년 대공황 이후 재정/금융정책 또는 제도로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도래하자 이 문제를 정부 또는 국가라는 '공공 부문'으로 통제하는 흐름이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국가개입이나 공공부문이 주도적으로 시장을 통제하는 일련의 흐름을 제2부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전두환 등이 재벌을 휘어잡고 경제정책을 통제하며 '국가독점주의'를 유지하던 시절이 제1부문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개입은 선진국들이 쏠쏠한 재미를 본 정책이며 개발도상국들도 국가개입으로 인해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한국의 경제적 성공은 제3세계 국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나 대체로 '독재'를 통한 경제성장을 하고자 하는 국가들에서 '한국식 경제발전 모델'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사항이다.
최근 외국의 사례를 보면 리먼브라더스 등 미국의 대규모 투자기업이 정부의 통제 없이 파생상품을 남용하면서 한창 대박을 터뜨리던 시기는 제1부문이 강성했던 시점이며, 부동산 위기에 이어 파생상품의 위기가 폭발해서 대규모 구제금융 처방으로 국유화되는 최근의 과정은 제2부문의 활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개의 부문은 경제시스템의 주된 주체이지만, 우석훈은 두 축만으로는 안정적인 경제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결국 신자유주의의 폐해(비정규직의 대규모화, 금융사태 등)와 개발독재의 전횡(경제규모의 수 배에 달하는 부동산 과잉성장(우리나라의 경우 2008년 1월 1일 기준 공시지가는 GDP의 3.6배, <부동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과 제3세계의 독재 등)을 빈번하게 노출시키며 경제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3부문이라는 조정자가 필요한데, 이는 '가공'의 기구가 아니라 3~4만 달러 이상의 국민경제를 실현하고 있는 국가(스위스, 스웨덴, 네덜란드 등)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논증하며 실제 사례를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

왜 제3부문이 필요한가 - 스위스 성공사례 분석

우석훈을 몇 번 만나고 인터뷰를 해본 바에 의하면 그는 매우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다. 사회적 모순을 가장 먼저 체감하며, 위험한 경제정책이 가져올 폐해의 쓴맛을 가장 먼저 본다. <괴물의 탄생>(개마고원)에서 그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정신분열증적 국민경제'라고 평가하며 "그야말로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몇 달을 보냈는데, 아마 저의 이런 심정을 공감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고 썼다. (256쪽)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가지고 인터뷰할 때 그는 "전쟁이 일어나면 내가 가장 먼저 희생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쟁이 과연 멀리 있지 않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프랑스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이래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 등을 맡으며 인생의 4분의 1을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에서 지냈는데그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 적합한 경제모델의 사례를 면밀히 검토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중앙형 시스템이 가장 두드러지는 나라인데, 좌파들이 국가기구를 장악하면서 중앙시스템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갖게 된 나라가 되었다. 수도가 비대해진 점이 대표적 증거다. 우석훈은 프랑스가 우리나라에게는 대안적 모델 같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스웨덴의 '대타협 모델' 혹은 '사민주의 모델' 역시 한국에서 현실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부수립 당시부터 극우 혹은 우파가 정권을 장악해 장기간 국민들을 세뇌한 상황에서 사민주의 모델이 무슨 수로 정권을 장악하겠는가. 김대중과 노무현이 우파 정권에 대해서 정권교체를 이뤄내지 않았느냐고? 인도의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지도자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나 화려한 투쟁경력이 기업카르텔의 콧대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잘라말했다. 야당에서 정부 쪽으로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또는 이른바 좌파라는 사람들이 정권창출의 깃발을 손에 잡는 순간 갖가지 위협, 특히 그 중에서도 어떤 정부건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위협, 즉 '자본이탈'이라는 위협의 볼모가 된다. 브라질의 룰라와 남아공의 만델라가 그러하다. (<9월이여,오라>(녹색평론) 168쪽)
그러면 우파들이 숭앙해 마지않는 '미국식 모델'은 어떤가? 우석훈은 미국식 모델을 한국에 적용한다면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처럼 전형적인 중남미형으로 급속히 양극화되기 쉽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미국식 모델의 주된 구호는 '대기업의 고성장을 이룬 후 국민들에게 분배한다'는 것이지만, 언제 한번 고른 분배가 이루어진 적이 있을까? 재벌들은 항상 배고플 뿐이다. 기업의 수익이 극대화되도 직원들의 연봉은 올라가지 않는다.
우석훈이 주목하는 것은 '스위스 모델'이다. 스위스는 이렇다 할 지하자원이 없고 겨울도 6개월이나 되고 유럽에서 가난하기로 유명한 나라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사정이 비슷하다. 게다가 세 지역의 언어가 달라 지역분쟁이 적지 않으며 극우파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마저 비슷하다. 1971년에야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아닌가.(우리나라는 1948년, <대한민국 선거이야기>(역사비평사))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독일이나 프랑스의 위성경제 정도로 간주되던 스위스가 잘 살게 된 것은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스위스의 잠재력은 노동에 대한 전혀 다른 가치관 위에서 경제활동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며, 생태나 환경의 문제가 국민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정규직 체제가 정착된 것도 주요한 특징이다.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나 충전이 필요한 직장인의 경우 봉급을 낮추는 대신 일주일에 이틀만 출근하는 시스템이 현실화된 것이다. 일주일에 5일 동안 이들은 식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독서하고 사색하고 전문성을 강화한다.
대학등록금은 연간 50만원밖에 안 하는데, 그것도 갑자기 올랐다며 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나섰다. 대학진학률 역시 18~20% 정도밖에 안 된다. '학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스위스의 경제 특징들이 일견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목을 조르는 내부 모순들(비정규직, 등록금 1,000만원, 일중독증 등)에 대한 완충장치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는가를 보면 전율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스위스는 직접민주주의의 가치에 기반한 분산형 구조이며 지역공동체 혹은 지자체의 힘으로 만들어낸 제3부문이 경제의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복지국가의 모델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에 기반한 자치의 힘으로 제3부문을 일궈냈다는 게 매우 중요하다.


▲ 우석훈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파시즘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극좌와 극우의 격한 대립을 경험했던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 환멸과 정치에 대한 반감을 악용한 지도자가 포퓰리즘을 이용해 파시즘을 실현하고 내부모순을 상대국에 대한 적대감(이를테면 일본)을 극대화시켜 전쟁상황을 만들 수도 있고, 전쟁상황 속에서 평소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몰살시키는 일이 상상 속에서만 머무르리라는 법은 없다. 더군다나 이미 우리나라에 한번씩 있었던 일이다. 우석훈이 말하는 공포의 시나리오가 아닌가 싶다. 사진은 1976년 태국 정치파동 당시. 극우 단체가 국경 수비대의 지원에 힘입어 방콕의 타사마트 대학을 점령하고 좌파 여학생을 목매달아 죽이고도 모자라 사체를 의자로 내리찍고 있다. 사진을 찍은 닐 울비치는 이 작품으로 1977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전쟁과 파시즘 얼마나 가까이 왔나 - 괴물과의 혈투

우석훈은 기회가 날 때마다 '전쟁'과 '파시즘'의 발생가능성을 경고해 왔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는 나치의 독일이 세계대전을 일으킨 것은 경제상황이 급속히 악화된 몇 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로, 인접국 프랑스는 독일이 침공해올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경계'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석훈은 '파시즘'의 징후를 분석하며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는 현재를 '파시즘 전 상황'으로 규정했다. 파시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대중들이 지도자를 거부하기 어려운 하나 이상의 미덕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명박에게는 반감만을 갖기 때문에 그가 파시즘의 주인공이 되기는 힘들다는 분석이다. 즉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포퓰리즘 단계가 극우파와 결합되면 일반적으로 파시즘이 발동할 조건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정도가 파시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물 정치'와 '지역 정치' 같은 후진적 정치 성향이 대중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파시즘의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명박에게 환멸을 느낀 대중들을 황홀하게 홀릴 수 있는 지도자가 갑자기 나타나 '시스템'이 아니라 '카리스마'로만 권력을 이어나가려고 한다면 파시즘적 상황이 꿈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17대 대통령선거에서 우리가 목도한 '허경영 신드롬'은 우리가 파시즘 위험도에 노출돼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석훈은 한국에서 파시즘이 일어난다면 '건설자본+성장주의'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 있으며, 우파나 좌파 모두에게서 나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의 우파는 시장 절대주의자들이고, 좌파는 공공성 절대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극단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우석훈이 '괴물'이라고 부르는 한국의 현상들을 보면 건설자본/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과  극단적인 중앙형 시스템(경기/서울 수도권 인구가 전국 인구의 절반), 토호형 경제를 들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는 완충장치가 없다는 것이 괴물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승자독식사회이자 패자멸망사회인 한국에서는 게임을 할수록 선수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단 한 명의 게이머만 남는 극단적인 '배틀로얄' 시스템이다. 패자는 일단 게임에서 지면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다음 경기는 승자들로만 이루어지며 이런 구조가 반복된다.


▲ 약자들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가 3일 국회 보건복지가족위 소속 한나라당 이애주 의원에게 제출한 국감 자료에 따르면 국내 자살자 수는 2000년 6437명에서 2007년 1만2174명으로 연평균 13%씩 늘었다. (도표 : 경향신문)

우리나라는 현재 약자들이 죽어가는 단계가 매우 발전(?)돼 있다. 우석훈은 '개미지옥'이라고 불렀는데,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무시무시할 만큼 적절하다고 하겠다. 일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비정규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미 1,000만에 육박했다. 이쯤 되면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정규직 역시 '영혼'을 팔지 않을 수 없다. 직장만 준다면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다 내다 버릴  수 있다는 정서가 매우 강력한 것이 한국사회다. 반대로 이들을 채용하는 기업들은 '너 말고도 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운동장 한 바퀴야'라며 직원을 기계 다루듯 할 수 있다. 그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비공식 경제(informal economy, '지하경제'라고도 부른다)가 도사리고 있는데 '다단계'와 '사채시장'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지하경제의 규모는 2005년 집계 당시 160조 안팎으로 GDP의 20%로 추정됐는데 지금은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의 뉴스에 의하면 사채이자는 3,000%에 달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만약 제3부문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약자들은 지하경제의 먹잇감이 되거나 파시즘 전체주의가 되어 내부모순을 '전쟁'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해소하려 할지도 모른다.


실패에 대한 경쟁력과 완충장치(안전장치)


물론 우석훈은 우리나라에서 제3부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모델도 몇 가지 제시해 놓았다. 그 부분은 책의 내용을 참조하는 게 좋겠다. (이미 많은 내용을 발설해 버려서)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우석훈이 시원하게 제시해놓지 않은 제3부문의 '실패에 대한 경쟁력'을 살펴보는 게 좋겠다. 우석훈은 제3부문이 추구하는 지상가치는 '공공선'이라고 규정하였다. (258쪽) 공공선이란 쉽게 말해서 사라들이 아끼고 사랑해서 없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게 만드는 가치를 말한다. 예컨대 org라는 공공기관의 도메인을 가지고 있는 위키피디아는 제아무리 이해관계자들이 집단적으로 '삭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1시간도 되지 않아 복구된다. 그것은 위키피디아의 키워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애정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말미에서 우석훈은 "평화의 맛을 한번 본 사람은 이를 잊을 수가 없다"고 썼는데, '평화'라는 말을 제3부문으로 고쳐 써도 틀리지 않다.
제1부문과 제2부문은 모두 '절대강자'를 주요한 역할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를 보면 장수의 목이 날라가면 군대는 와해되고 전멸되는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제1부문과 제2부문 역시 절대강자가 사라지면 모든 부문의 구성원들이 위태롭게 된다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3부문의 경우 직접민주주의와 풀뿌리 자치주의에 기반한 공동체들의 연대이기 때문에 포트폴리오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포트폴리오 효과와 실패 경쟁력은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의 저자 클레이 서키에게 들을 수 있는데 그 책에서 저자는 오픈 소스(제3부문의 약자공동체와 비교할 수 있다)와 상용 소프트웨어 업계(대기업과 국가 중심의 제1부문, 제2부문과 비교할 수 있다)가 실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며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가를 증명하였다.
클레이 서키에 의하면 오픈소스 프로젝트 중 상당수는 실패하고 그나마 성공작들도 대부분 평범한 수준이지만, 오픈소스는 상용 소프트웨어보다 많은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위력적인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실패를 겪었기 때문에 위협적인 경쟁자이다. 즉 오픈소스의 실패는 공유가 되고 집단학습이 이루어지지만 상용소프트웨어의 실패란 곧 '시장 퇴출'을 의미하므로 상당히 많은 경쟁자들이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3부문(오픈소스)의 개방적인 사회 시스템 전반은 동등계층의 생산에 의존하므로 어느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실험적이면서도 비용은 훨씬 더 줄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시스템 자체가 실패로 인한 비용을 낮춰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새로운 발견과 인식의 증진이 생겼다면 '저작권'이나 '특허'를 걸어서 보호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기 때문에 이런 자산은 금방 불어날 수 있다.
이를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약자들을 위한 '완충장치'가 생기는 셈이며, 우석훈이 말한 '개미지옥'은 '그물 보호대'로 바뀌므로 빠지더라도 곧 나올 수 있고 뒤에 오는 사람에게 이곳에 함정이 있다고 알려줄 수도 있다.
봉준호가 한강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듯이, 우석훈은 우리 사회 전체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괴물을 어떻게 가두는지에 대한 매우 유력한 해법도 제시했다. 저자의 진단에 대해서 한국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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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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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이 언론에게 영감을 제공하다


요즘 오버한다 싶을 정도로 광고를 하고 다니는 책이 있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출간된 <부동산 계급사회>반값아파트다 후분양 제도다, 규제완화다 정치적인 수사로 점철됐던 부동산 담론에 몹시도 허무해하던 차에 부동산 문제에 관한 실증적인 분석서이자 대중적인 책이 출간됐기 때문에 흥분되지 않을 수 없어서다.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책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 책은 <법률사무소 김앤장> 이후로 후마니타스의 가능성을 보여준 책으로 평가한다. 후마니타스 영업 담당자와 대화할 기회가 좀 있는데, <김앤장>을 출간하고 나서 지식인 사회로부터 굉장한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후마니타스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이 주된 칭찬의 내용이다. <김앤장>이 왜 놀라운 책인지 나는 어느 리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경제민주화>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었다), <김앤장>은 삼성보다 무서운 집단이라 언론사들도 함부러 손을 못 대는 곳이었다. 경향신문이 자사의 주간지인 뉴스메이커에 김앤장 비판기사를 썼다가 김앤장의 협박에 못 이겨 사과기사를 내보내고 유감표명을 하고 나서 경향에서 김앤장에 관한 기사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후마니타스에서 책이 출간되고 나서는 경향과 한겨레 등 여러 신문사에서 김앤장에 관한 신문사의 취재 내용을 덧붙여 서평기사와 취재기사를 절묘하게 왔다갔다하는 기사를 내보내었고 론스타 문제가 불거지면서 '김앤장'은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이 후마니타스의 <김앤장>이라는 것이 지식인 사회의 평가였다. 





기자도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를 4년 동안 캐냈다

<부동산 계급사회><김앤장>과 여러 가지로 닮았다. 국회의원과 현장전문가의 합작품이라는 게 가장 큰 공통점일 것이다. 국회의원이라는 방패가 있기에 여러 가지 정치적인 압박이나 법적인 위협을 피할 수 있고, 유관기관에 자료요청을 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이 책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강점이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저자 손낙구 씨는 4년간 당시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현재 진보신당 대표)의 보좌관을 지내면서 국회에서 근무했다.
여러 가지 정책을 개발하고 부동산시장의 문제점을 밝혀내기 위해 신문기사는 물론 정부통계자료를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등 일반인과 언론사가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영역까지도 손을 뻗칠 수 있었다. 저자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자.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모든 것을 통계로 입증한다'는 필자 스스로 만든 원칙을 지키는 일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문제라도 통계를 찾아내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으니, 내용은 알찼지만 속도는 더뎠다. 1주일 걸려 A4 한 쪽 쓰는 일이 다반사였고, 일주일 내내 국회 도서관을 이 잡듯이 뒤져 겨우 통계 하나를 찾아내고 나서 혼자 만세를 부른 적도 있다.... 책상과 뒤편 책꽂이에 쌓인 A4 프린트물이 필자 키의 3배는 되는 듯했다.
- 이 책을 쓴 이유 중에서..

내가 눈시울이 젖은 부분은 저자가 자료수집이 난항에 처했을 때마다 먹었던 마음을 들려줄 때다.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필자를 다잡아 준 것은 지하방이나 비닐집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이들에 대한 부채감과 반성이라는 거다. 어찌 보면 소박한 계기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지만, 해마다 빼놓지 않고 들려오는 고시촌의 화재 소식이나 일 떠나 혼자 지키는 집에서 화재로 숨진 아이들의 이야기는 '부동산'이라는 구조적인 모순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분명한 문제의식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관통하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조율의 책이 최소 5년 동안 탄생할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심상정 의원도 원외로 물러선 상태에서 자료요청을 집요하게 해줄 수 있는 국회의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국무총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회의원을 동네 어린애 쳐다보듯 무시하는 상황이라면 정부기관이 자료요청에 성실히 따라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은 최소 5년 동안 열심히 해도 부족할 만큼 많은 과제를 주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뉴스 30개만 추려 보면

이 책은 단지 저자가 사람 키의 3배에 달하는 자료를 가지고 썼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료들을 적절하게 녹여냈다는 것이 매력이다. 서문만 읽어봐도 저자의 센스나 문체, 진정성과 절박성을 모두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가지고 벌써 3개의 기사(블로거뉴스)를 만들어냈는데, 그 외에 뉴스가 될 만한 것이 무척 많다. 실제로 이 신문에서 뉴스로 다뤄진 내용도 많이 있다. 간략히 20가지만 추려서 나열을 해보면


1.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금메달(클릭)
2. 1가구3주택 이상만 과세해도 신도시 50개 생긴다(클릭)
3. 지하방의 기원(클릭)
4. 스타벅스 커비값이 비싼 이유(33~35쪽)
5. 부동산 스트레스를 아시나요?(46~47쪽)
6. 투기 앞에 무력한 중앙정부(52~53쪽)
7. 말죽거리 투기 잔혹사 - 3년간 20배 상승(71쪽)
8. 기업 연구개발 투자 <<< 부동산 투자(72~73쪽), 자본이익보다 토지이익에 열올리는 대기업(116~118쪽)
9. 부동산 5적의 투기동맹(74쪽)
10. 토지 이용권과 토지 소유권(82~83쪽)
11. 주택이 저출산에 미치는 영향(104~105쪽)
12. 주택이 고령화사회에 미치는 영향(106~107쪽)
13. 토지문제가 제조업 공동화에 미치는 악영향(108~110쪽)
14. 전체 경제에서의 건설업 비중 위험한 수준이다 (114쪽)
15. PIR - 도대체 집값이 연봉의 몇 배야?  (152쪽)
16. 미성년자에게 빌려준 담보대출이 363억원이라고?(153~154쪽)
17. 은행지점당 인구수, 非강남이 강남의 6~7배(160~161쪽)
18. 아파트 값이 서울대 합격생 수와 수능 점수를 결정한다(162~163쪽, 166쪽)
19. 부동산값이 싸면 사망률이 올라간대요(171~173쪽)
20. 집먹는 하마의 매직 - 주택보급률33.5%↑, 자기집5.7%↑, 셋방살이5.5%↑(188, 190~191쪽)
21. 국가별 집 안심률과 집 걱정률 비교(195~196쪽)
22. 서울 한강 이남의 부동산 수익률은 주식,저축 투자이익의 3~5배(200)
23. 세계 비싼 아파트값 올림픽 대회서 삼성동 아이파크 당당히 1위(평당 5,000만원)(204쪽)
24. 판자집, 움막, 동굴에 11만명이나 산다(218~221쪽)
25. 전,월세 말고 '일세'도 있어요(229)
26. 집 50채 가지고서는 부동산 부자 100등 안에 못 들어(241쪽)
27. 역대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투기 조장 아니면 일시적인 투기 자제의 반복(294쪽)
28. 임대사업자에 대한 비정상적인 특혜 문제다 (310~312쪽)
29. 고위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제 해야 한다(313쪽)
30. 자기 동네에서 쫓겨나는 사람들(329쪽)


편의상 30개를 추렸지만 이 외에도 뉴스거리는 무한하다. 기자들이 얼마나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해주느냐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겠지만, 향후 100년은 부동산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한국사회에서 부동산에 관한 건강한 담론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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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8-08-29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봐야 할 책이네요. +_+

승주나무 2008-08-30 21:37   좋아요 0 | URL
그럼요.. 부동산문제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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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드디어 나와바리에 도달하다

 

 
88만원 세대로 유명한 우석훈은 우리 시대에 '현장의 문제'에 가장 민감한 촉수를 들이대는 지식인이다. 본의 아니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학 시절 동아리방에서 유명한 구라꾼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 그는 이 시절 후배들을 괴롭히며 내공을 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는 헛소리를 좋아합니다. 헛소리란 게 참 놀라운 거거든요. 백마디 헛소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진리에 도달하게 되지요." - <죄와벌>의 라주미힌

얼마 전 개마고원 출판사의 영업자가 한탄을 늘어놓았다. 우석훈의 한국경제대안시리즈 제1권인 <88만원세대>(레디앙)의 압도적인 영향력 때문에 중요하기로는 그보다 밀리지 않는 제2권 <샌드위치위기론은 허구다>와 제3권인 <촌놈들의 제국주의>(개마고원)가 부각을 못 받고 있어서다. 인터넷 서점이 주최한 간담회에서도 다른 출판사 책(88만원세대) 이야기만 하니 죽을 맛이었을 거다. 나는 다른 의미로 울상이다. 88만원세대의 프레임이 비단 출판사의 이해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우석훈의 진면목을 붙잡는 굴레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우석훈의 진짜 전공은 통상협상과 기후협약 등 국제적인 문제이다. 그는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를 쓰면 논쟁의 한가운데에 들어갔다. "한미 FTA가 강행된다면 연소득 6,000만원 이하인 봉급생활자와 그 4인 가족들은 이민을 심각해 검토해 봐야 한다"는 유명한 말은 이 책의 결론이다. 그리고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갈라파고스)를 번역하며 세계 기아의 실상과 구조를 쉽고 명쾌하게 소개했다. 대안시리즈 1,2단계는 국내문제에 제한된다.

3권에서 처음으로 그는 '국제적 문제'를 이야기했다. 대외의존도가 80% 넘는 우리 사회에서 국내 문제란 곧 국제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석훈은 처음부터 국제문제를 건드리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이 반가운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희망인 10대'만'을 위하여

우석훈의 4부작(4부는 현재 집필중)이 대체로 현재인을 무시하고 쓴 경향이 있지만,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현재적 가치는 거의 제로(0)에 가깝다. 그것은 철저히 의도된 방향설정에서 기인한다. 쉽게 말해 우석훈의 이 책은 30년 후에 보내는 편지이다. 우석훈은 386 세대에 위치해 있지만 386을 가장 미워하는 386 중의 하나이다. 동시에 386 친구들에게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작가일 것이다. 이런 반감이 아니더라도 386 이상 '어른'들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보아야 하겠다. 우석훈이 기다리는 30년 후의 지도자들이 나타나기 전에 이들이 말아먹는다면 사정이 또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갈 확률은 별로 없어 보인다.

서문에서도 작가는 이 책을 10대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구성에서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석훈 강연회에 좇아가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항상 '통계'나 '도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듣게 된다. 도표를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을 때가 있지만, 도표를 넣는 것과 책의 판매가 정확하게 반비례하기 때문에 도표 처리가 가장 힘들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도표를 최소화했다. 분량도 최소다. 300쪽을 거뜬히 넘는 이전의 시리즈(대체로 330쪽 내외)보다 50쪽 이상이 줄어들었다. 이러한 취지를 따라서 나도 리뷰를 좀 쉽게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불만이 있다면 '촌놈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설명이 썩 개운하게 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소 간단하고 쉬운 예를 덧붙여 본다. 고우영 화백의 '십팔사략'이라는 만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이란 사마천의 '사기'를 필두로 중국 각 시대의 정사로 꼽히는 18가지의 역사서를 간추려 편집한 다이제스트판 역사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원제는 '고금역대 십팔사략(古今歷代十八史略)' 몇 번째 권인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흉노나, 동호, 동월, 갈족 등 중국의 이민족(오랑캐라 불리는)은 처절한 흥망성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약소국 백성의 정부인을 함부러 빼앗아 아내로 삼는다든지 욕을 보이고, 파리목숨처럼 쉽게 죽인다든지 약육강식의 결정판 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강국의 입장에서는 재미를 볼 수도 있었겠지만, 약소국의 입장에서는 절치부심하며 뼛속까지 치욕감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때 약소국 젊은이의 가슴 속에 담겨 있는 생각은 폭력 없는 세상이 아니라, '얼른 힘을 길러 저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이다. 때문에 약소국이 강대국이 되더라도 인권유린과 겁간, 약탈 행위는 영원히 반복되었고 그만큼 오랑캐라는 편견도 쌓여 갔다. 너무 멀리 간 듯 하다면 군대생활을 한 병사들의 예를 들 수도 있다. 쫄병 때는 선임병에게 시달리며 '내가 선임병 되면 괴롭히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다들 한번쯤 하게 된다. 그런데 선임병이 되었을 때 이전보다 더 후임병들을 괴롭히는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선후배 군기가 좀 있는 남자 학교라면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전체'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고, 자신이 아픈 부분에 대해서만 부분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만약 선임병이 후임을 괴롭힌다면, 힘 센 족속이 약한 족속을 괴롭힌다면 그것은 '괴롭히는 구조'부터 해결해야 할 일이다. 단지 마음이 나빠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계급차이든 상황의 차이이든 대립적인 관계가 펼쳐지는 패턴을 관찰하고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전략을 짜야 한다. 사실 이것은 지적인 능력은 물론 개혁에 대한 열의와 성실성이 담보되어야 해결할 수 있는 어려운 문제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반복된다는 점인데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이든지 굴종이든지 피억압자는 억압자를 닮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기 마련이다.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는 책에는 이러한 과정이 세심하게 소개돼 있다.

체험의 특정한 단계에서 피억압자는 억압자와 그들의 생활 방식에 대해 강렬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 생활방식을 공유하고 싶은 생각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소외 상태에 있는 피억압자는 어떻게 해서든 어떻게 해서든 억압자를 닮고자 하며 모방하고 추종하고자 한다. 이런 현상은 특히 중산층 피억압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상류층의 저명한 인물들과 동등해지기를 갈망한다. <페다고지, p79>

우석훈이 말하는 '빌어먹을 386'과 기득권, 보수세력들은 약자인 십대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따라오게끔 유혹하며, 착취하고 패고 억압하는 구조 자체를 이식시키려 한다. 그것이 '교육 파시즘'의 기본 방향이다.


평화와 욕망의 밀월관계를 꿈꾸며

이 책의 부제는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다. '평화'라는 키워드가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촌놈들의 제국주의에 다름아닌 우리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점과 함께 '평화'라는 의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우석훈은 사람들이 평화에 투자하지 않고 그 대신 전쟁에 투자하게 되는 과정을 명쾌하게 풀어냈다. 자기 울타리에서만 아니라면 전쟁은 큰 돈을 벌게 해주므로 환영할 만하다는 것이다. 결국 남의 울타리가 자기의 울타리가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단견이기는 하지만, 군산복합체가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문제와 군대가 민영화되고 있는 문제(블랙워터라는 용병그룹은 이라크에서 무고한 인명을 파리처럼 살상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일로 법정에 오르는 일도 많았다)를 특히 우려했다.

평화에 투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가 뭘까? 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하고 본질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물이나 공기, 가족과 같은 가장 고맙고 소중한 존재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괴롭히는 것을 일삼는다. 성폭력이나 폭력사건 피해자 10명 중의 1명이 친족에게 당하며 80% 가까이가 동료나 친구 등 아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최근의 보도는 이를 뒷받침해준다. 참다 못한 맹자가 이렇게 한탄했다.

"닭이나 개가 달아나면 이를 찾을 줄 알지만, 마음이 달아났는데도 찾을 줄 모른다."(맹자, 고자상)

이런 예도 들었다. 사람이 손가락 하나가 구부러지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 사방 천지, 외국까지 안 가는 곳 없이 찾아다니지만, 마음이 구부러지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중을 알지 못하고 본질을 알지 못하는 세태라고 비판했다. 맹자는 고담준론에 기대며 이런 비판을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인간의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석훈은 결론에서 '파토스'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는데, 이는 '욕망'을 뜻한다. 대학 시절 이성과 감정의 우위에 대해서 친구와 늦도록 토론했던 기억이 나는데, 결론은 감정의 절대적 우위였다. 물론 처한 상황에 따라서 하는 역할이 다르지만, 결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것은 대개 감정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거지 같은 상황이 어떻게 연출되었나. 왜곡된 이성과 무식한 욕망이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왜곡된 이성은 무식한 욕망에 논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상호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이성'이라는 초라한 무기로 대항했다는 점에서 비극이 있다. 그에 비해 우석훈은 '욕망'이라는 키워드로 '맞불'을 놓으려고 한다. 지금은 흘러간 개그 코너인 '사모님'에서 사모님은 민망한 자세로 서 있는 김기사를 보며 '난 이 각도가 너무 좋드라~~'라고 희롱하는데, 우석훈의 욕망이라는 결론이 너무 기분이 좋아서 이 글을 밤새도록 쓰고 있다. 전쟁에 대한 욕망 못지 않게 평화에 대한 욕망도 강렬하다는 것쯤은 우석훈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으면 알 수 있다.

"평화의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잘 잊지 않는다"(261쪽)

 

☆『촌놈들의 제국주의』|우석훈 지음ㅣ개마고원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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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i 2008-07-16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호 시사IN에 우석훈씨 글이 실렸던데, '386을 가장 미워하는, 386에 가장 미움받는'이란 부분이 이해가 가는군요.^-^

승주나무 2008-07-16 18:21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시사인에서 우석훈씨의 글을 자주 보게 되는데,
발랄한 글을 맛에 계속 길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한번 버럭을 해봐야겠어요
386부분은 만날 때마다 그가 강조하는 내용이었지요.

마노아 2008-07-16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88만원 세대를 지금 읽고 있어요. 보니까 출간 1년 정도 됐더라구요. 지각생이에요^^;;
근데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우석훈씨 번역이 아닐 텐데요. 앞에 '해제'만 쓰지 않았나요?

승주나무 2008-07-16 18:21   좋아요 0 | URL
아~! 글쿤요.. 근데 왜 저는 번역을 했다고 생각했을까요.
해제가 너무 강렬해서이거나..
아니면 제가 진짜로 '우빠'겠죠?
우왂!!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