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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엔트로피
- 엔트로피 카지노, 당신의 지갑을 확인하라



엔트로피 카지노


나는 지금 어둡고 음습한 라스베가스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그보다 더 화려한 여인이 돈 많은 남자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나와 같이 전재산을 탕진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눈에 띈다. 한 손에는 술병과 다른 손에는 빈 지갑을 들고 어디로 가는지 기약도 없이 헤매고 있다. 이것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자식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는 이곳에서 마음껏 즐겼다. 태어나기도 전에 모든 자원과 가능성을 빼앗겨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시작해야 하는 불쌍한 후손들을 생각하니 마냥 즐겁게 천혜의 자원을 낭비하는 게 죄스럽게 느껴진다.
개중에는 대박을 터뜨려 인생 역전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카지노 측의 상술에 불과하다. 이 게임은 언제나 카지노가 돈을 버는 게임이며, 우리들의 지갑은 점점 줄어드는 게임이다. 의심이 들면 당장 복권 뒷장을 펴 보라. 1등 당첨금 총액은 말단 당첨금 총액의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지구의 어디에선가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그 주위 환경에서 그보다 더한 무질서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화란 점점 더 큰 무질서의 바다를 만드는 대가로 점점 더 큰 질서의 섬을 창조하는 것이며, 오늘 풀 한 포기가 자라는 것은 미래에 그 곳에서 풀 한 포기가 적게 자람을 의미한다.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집을 나서면 다 돈이다.


이 말은 '집을 나서면 다 에너지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어도 우리들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우리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죽음에 도달하고 있다. 음식물은 우리 몸에 영양을 공급하지만, 이면에 활성화 산소를 꾸준히 증가시킴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함수관계를 이루며 끝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 바로 엔트로피(Entropy)1)이다.


엔트로피 법칙



1.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때문에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오직 그 형태만이 바뀐다.
2.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며, 오직 한 방향, 즉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할 뿐이다.


즉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에너지는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인 반면, 엔트로피는 사용해버려서 재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를 말한다. 정밀한 공정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써버린 에너지나, 사후에 감당해야 할 부대 현상(산업쓰레기 처리문제나 산업재해 등의 질환과 환경 문제 등)의 총계를 엔트로피라 한다. 때문에 엔트로피는 증가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항상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저장고에서 빼서 쓰는데, 저장고가 무한하다거나 늘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점점 줄어드는 에너지를 짜내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엔트로피의 양은 전보다 몇 배나 더 많아져 우리와 열 종말(heat death ; 에너지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의 거리가 빠른 속도로 단축된다.


오락실에서 스트리트파이터를 즐겨 해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켄(Ken)의 에너지가 100인 상태에서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노란 칸은 줄어들고 그 부분이 검붉게 보인다. 에너지 바가 모두 검붉어졌을 때 켄은 게임에서 패배한 것이다. 바로 검붉은 부분이 엔트로피이며 노란 부분이 에너지이다. 그래서 그 둘의 합은 항상 100이 되며, 그 게임이 끝나지 않는 한, 검붉은 부분이 다시는 노랗게 될 수 없다.


이 법칙이 문명화되기 이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직관으로 이해했고, 그 핵심 진리들을 그들의 문명과 세계관에 통합시켰다.
위에서 표현된 어머니의 말씀 이외에 '공짜는 없다' 또는 '엎질러진 우유를 놓고 울어봤자 소용없다' 같은 속담을 통해서도 누구나 이 법칙에 정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엔트로피 이론의 입장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세 부류로 묶을 수 있다. 이른바 기술적 메시아주의, 수정주의, 생태주의 정도로 표현될 수 있는데, 「엔트로피」가 저술된 기본 개념은 생태주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신문의 과학면에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에 많은 과학자가 몰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무한의 자원이 숨어 있으며 우리들은 그것을 찾아서 향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물려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메시아 이론이다. 수정주의는 '꼭, 그렇지만은 않아(개그콘서트 버전)' 하고 말하며 맹목적 메시아 이론에 제동을 걸었지만, 메시아와 취지는 같다는 입장이다. 엔트로피가 말하는 생태주의는 그와는 다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원의 보고는 둘째치고, 과학 문명이 낳고 있는 곳곳의 부작용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생태주의에 입각한 엔트로피를 받아들인다면 과학의 이면성을 긍정하므로 과학의 외연이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조화,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과학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독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진정한 과학도라면 과학이 우리 문명을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도 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철학도가 해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나의 입장이기도 하다.


엔트로피 패러다임



우리는 17세기 뉴턴주의의 '세계 기계라는 패러다임(world machine paradigm)'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다.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로크, 스미스 등은 17세기에 기계적 세계관(the mechanical world view)을 일반 대중에게 크게 보급시켰던 천재들인데 이들이 자연을 대했던 사고방식은 현재에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자연은 무한한 보고이므로 최대한 탐구하고 이용한다면 최대의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이 구상했던 모든 기술은 자연의 저장고로부터 에너지를 변환시키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것들은 엄연히 엔트로피 법칙 내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사람보다는 기계를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관이며, 양(quantity)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질(quality)을 분리시켜 제거함으로써, 기계적 패러다임의 제작자들은 전부가 죽은 물질로 구성되는 차갑고 무감각한 우주를 만들어 버렸다. 자연에 대한 접근은 있되 자연 자체는 없는 것이다. 이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오해만큼 엔트로피는 축적되고 있었으며, 알 수 없는 엔트로피의 역공에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이들의 이론이 환경에 대한 문제를 염두해 두었는지 판단해 보라, 이들의 이론이 사회문제나 경제 양극화 문제를 배려했는지 판단해 보라.


로크는 원시 시대에는 자연의 한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부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으나, 돈이라는 교환의 수단이 존재하게 된 이상 자산을 무한정으로 모으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부지런히 노력해서 돈을 많이 모은 사람들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땅의 개간에 있어서도 입장은 같다. 자연 상태로 버려진 100에이커의 땅에서 생산하는 양을 개간한 땅 10에이커에서 수확한 사람(자연상태의 100에이커와 가공된 10에이커의 농작물 산출량은 같다는 착상에서 나온 생각이다)은 인류에게 90에이커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경제 이론에서 같은 주장을 펼치는데, 경제 활동에 도덕성을 부과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 손'의 응징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경제 활동 스스로 자본 투자, 직장, 재원, 생산 등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스미스와 로크 모두 물질의 풍요를 갈구하는 인간의 이기성을 미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엔트로피 법칙에 의한 '양적 도달 이론'2)으로 이들의 이론을 보자. 사실 이들의 미덕이 용인되는 선은 한계가 있다. 그들의 이론은 한계점 전까지 가치를 얻는 것이지만, 한계점이 넘어도 멈출 수가 없기에 위험한 이론이다. 자연 상태로 버려진 100에이커를 로크의 말에 따라 열심히 개간한 결과를 보라. 표토는 황폐화되었고, 병충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사용한 농약은 작은 생태계를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농약에는 거뜬한 슈퍼 병충해를 키워왔을 뿐이다.
이웃 나라와의 잦은 전투로 오히려 노예국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리우스가 받은 조롱을 슈퍼 병충해들은 재연하고 있다.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또 할 줄도 모르던 테베스 사람들을 훌륭한 전사로 만드시느라 그토록 애를 쓰시더니, 그 값을 톡톡히 받으셨군요."
- 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쿠르고스 편 중에서


이들의 이론을 대할 때 한가지 염두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역동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고, 사회 전체가 가난과 생존의 위협에 괴로움을 당하던 시대이다. 에너지는 바닥이 나고 직면한 엔트로피 분수령을 해결해야 하는 지상과제가 이들 앞에 던져진 시기였다. 그만큼 이들의 필체는 강경하고 무한한 희망을 담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시대적 관점'에 한해서 의미 있게 이들을 바라볼 수 있지만, 이들의 이론이 지금도 우리 사회를 움직일 수는 없다. 유통기한이 끝난 우유를 먹으면 복통과 설사가 찾아올 뿐이다. 독립선언문과 헌법에 로크의 철학을 고스란히 새겨 넣은 미국이 '자원의 엄청난 쓰레기장'이자 '막대한 엔트로피 채무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처음부터 자연의 한계를 생각하고 계획을 짰어야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눈치 빠른 독자들을 벌써 알아챘겠지만, 엔트로피 이론은 독자들의 관심을 동양으로 환기시킨다. 서양과 동양이 미덕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접점이 바로 엔트로피 패러다임이다.



서양인들은 진리와 지혜에 대한 동양식의 접근을 이해하는 데 많은 곤란을 겪었다. 서양인들은 부지런히 행함으로써만 이 세계의 온갖 숨겨진 신비를 벗길 수 있다고 믿었다. 서양인들은 그런 시도가 인간을 더 큰 지혜로 이끌고 궁극적으로 우주의 최상의 설계자와 대면하게 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끊임없이 진리의 단편들을 모아서 잇고, 주위의 세계를 조작하고 정돈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해 왔던 것이다. 동양 종교가들은 서양인의 열광적인 행동이 세상에 무질서와 혼란을 가중시킬 따름이고, 그들이 추구하는 신성의 현시(現示)로부터 오히려 유리시킨다고 말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지혜를 가르친 모든 위대한 설법가들은 저엔트로피3) 생활에 고유한 가치관들을 신봉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가, 예수, 마호메트,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인도의 성인들은 모두 검소하고, 청빈하고, 재산을 사회와 나누는 모범적인 생을 이끌어 갔으며 누구보다도 자연의 한계와 생태를 잘 이해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기계적 패러다임이 지금도 우리의 신앙이 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전에 겪었던 인류의 엔트로피 분수령에서 찾고 있다.



13세기와 16세기 사이에 걸쳐 서부 유럽은 엔트로피 분수령을 맞고 있었다. 중세식 생활 방식의 기본적인 에너지였던 삼림 자원이 차츰 귀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구의 증가는 이러한 부족 현상을 더욱 악화시켰고, 새로운 대안의 추구는 결국 나무를 석탄으로 대체하게 만들었다. 나무에 기초했던 에너지 환경이 석탄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자, 서부 유럽 사회의 생활 방식은 그 전체가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나무로부터 석탄으로의 에너지 전환은 중세 시대의 붕괴와 산업 혁명의 출현의 배경이 되는 주요 원인이었다.
……
14세기 중엽쯤에는 드디어 분수령에 이르게 되었다. 인구 때문에 에너지 근간이 흔들린 것이다. 토양의 척박화와 삼림 고갈의 심화는 서북부 유럽 지역의 인구 문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12세기 풍차를 사용함으로써(수차를 더 많이 사용하여) 이전에는 경작할 수 없었던 땅을 농토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삼림을 더욱 황폐시키고 인구를 더 증가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
먹여 살려야 할 도시 인구의 증가는 경제 문제를 크게 악화시켰다. 도시는 11세기 잉여 농산물의 교환 장소로서 출발하였다. 이제 농산물보다 인구가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 되자, 거래할 잉여 농산물이 없어졌고 따라서 도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중세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전체 조직이 한꺼번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를 기초로 하는 시대로의 전환기에 이른 것인데, 그런 전환기는 부분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산업에서의 분수령은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무를 대체할 에너지원을 어디서 구할 것이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이다. 근대는 이 문제를 '근대적'으로 푸는데 일단은 성공한 듯하다.



근대의 증기 엔진은 석탄의 채굴을 촉진하도록 설계되었고 또한 최초로 그렇게 사용되었다. 채탄 과정에서 석탄을 캐기 위해 땅 밑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광산을 환기시키고 축축한 석탄을 끌어올리는 것이 차츰 문제로 대두되었다. 17세기에는 광산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정도까지 깊게 파 들어가자 물이 나왔고, 따라서 공정에서 배수 작업이 문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기술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그 해결책이 바로 증기 엔진이었다. 최초의 증기 펌프로 1698년 세이버리(Thomas Savery)가 특허를 얻었다.
채탄에 사용되었던 증기 펌프는 새로운 석탄의 환경으로부터 곧바로 출현했던 수많은 기계적, 구조적인 발명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석탄을 캐는 문제가 증기 펌프의 도입으로 해결되자, 곧 마찬가지로 중대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석탄은 무거웠기 때문에 말이 끄는 마차로 장거리를 수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 영국의 길은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석탄 마차의 무게 때문에 길은 엄청난 바퀴 자국으로 뒤덮여 비가 올 때에는 진흙탕으로 되어 운반이 거의 불가능했다. 동시에 석탄 수송용 말들을 유지하는 것에도 차츰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경작지가 심각하게 부족했기 때문에 말먹이와 사람 식량을 다 생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수송 위기는 증기 기관차의 발명과 철도의 부설로 해결 국면에 들어갔다. 증기 펌프와 마찬가지로 증기 기관차도 석탄의 환경에 의해 필요성에 대한 직접적 기술적인 해결책이었다. 이와 같은 증기 펌프와 증기 기관차의 협동은 이후의 산업 시대의 기술적인 바탕이 되었다.


중세와 근대의 구분을 에너지원의 전환으로 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근대 이전까지 품고 있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베이컨이 과감히 깨뜨려 주었으며, 뉴턴은 수학적으로 해석해 주었다. 우리들의 근대는 보기 좋게 중세를 벗어났으나, 우쭐하는 새에 다시 엔트로피 분수령이 찾아왔다. 영화의 포스터와 같이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놈'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들은 근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현대란 좀더 복잡다단해지고, 인간성의 상실을 통감하게 된 근대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란 것도 근대의 기계적 패러다임에서 나왔으므로, 다음 세기에는 근대를 극복한 패러다임이 요구되는데 저자는 그것을 엔트로피의 시대라고 하였다.


정적이고 절대적인 기계적 물리학은 상대적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도전을 받았고, 세계는 진보와 진화의 장이라는 인식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허구임이 밝혀졌다. 이밖에 철학에서의 로크의 세계관에나 경제에 있어서 아담 스미스의 이론은 당연히 엔트로피의 세계관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엔트로피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당위성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끈 엔트로피 분수령에 다시금 우리에게 찾아왔으며, 이대로 나아간다면 종말을 재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성과 기계적 패러다임에 의존한 산업과 문명은 한계에 봉착했으며 이제는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종 지표에서 우리들의 자원과 환경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전의 패러다임이 포함하지 않은 엔트로피 개념이 시대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 세계관은 절대적이며 무한하다는 원리를 가진다. 문제는 이들이 자연을 본 시각에 있다. 이들에게 자연은 미지의 보고(寶庫)였으며, 우리가 자연을 이용하고 탐험할수록 자연은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보물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시켰다. 이러한 믿음이 현재에도 유효할까.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의해 구축된 사회가 자연을 얼마나 피폐시켰는지 잘 알고 있다. 한 경제학자의 말처럼 사회 문제는 도시 기구가 확장됨에 따라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지만,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밖에 증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도박이 막판으로 치달을수록 판돈은 올라가게 마련이다. 판돈을 올리면 이제까지 잃었던 돈을 한번에 충당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은 엔트로피 카지노가 우리들을 죄어 매는 전략의 일환일 뿐이다. 판돈을 충당하기 위해 우리는 카지노측이 제공한 사채업자들에게까지 손을 건넨다. 그 결과는 예측이 가능하다. 사채업자는 처음에는 낮은 이자율로 우리들을 꼬득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가면, 이자를 1할에서 2할로, 2할에서 3,4,5할로 멈추지 않는다.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판돈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이 도박판을 끌고 가면서 망각한 점을 환기시켜 보자. 판돈이 커지면 잃었던 돈을 한 번에 만회할 수 있지만, 우리들이 가진 자산을 손쉽게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나와 내 가족, 친구들, 나아가 미래의 자식들의 재산까지도 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카지노측이 그토록 염원하는 야심찬 노림수이다.



부는 부채와 같은 속도로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없기 때문에 부와 부채의 1대 1 상관 관계는 언젠가는 깨지게 된다. 즉 부채에 대한 상환 거부나 상환 불능이 생기게 마련이다. 복리에 의한 증가는 인플레이션, 파산, 몰수와 같은 부채 상환의 반작용으로 항상 상쇄된다. 이와 같은 작용은 으레 폭력을 발생시키곤 한다.


경제 발전이란 것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원으로부터 차츰 어려운 자원으로 바꾸어 감에 따라 좀더 복잡한 공정을 사용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며, 생태학적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은 자연 환경을 보다 심하게 착취하는 방법의 발전이다. 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때 국민총생산(GNP)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국민총비용(Gross National Cost)이라고 해야 하며, 우리가 발견한 에너지원의 혁신은 자연을 착취해 에너지를 얻는 방법의 혁신이며, 점점 열종말을 부추기는 혁신일 뿐이다.


 


위험한 엔트로피


엔트로피의 위험성은 꾸준히 증가하는 축적량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 시간의 예를 든다.



시간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소비된 시간의 진짜 양은 사용되어 버린 에너지의 양을 그대로 나타낸다. 우주에서 유용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갈수록 일어나는 사건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것은 '실제'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 종말의 최후 평행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사용 가능한 자원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무한한 시간만 놓여져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보다 위험한 것은 그 폐해를 우리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예상할 수 없으므로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 대부분의 전복은 조치 가능한 사태를 방치한 결과이다. 로마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보라.



"로마의 멸망은 로마의 융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로마는 환경의 자원으로 융성한 것이 아니라 중동 아시아, 이집트, 북 아프리카 등을 철저히 약탈한 것으로부터 융성되었던 것이다. 로마 대도시를 유지했던 바로 그 과정이 로마를 멸망시켰다."(무정부주의자이자 생태론자인 북친(Murray Bookchin)의 견해)
일단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하자, 로마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도시가 커질수록 더 많은 에너지 투입이 요구되었고,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올수록 무질서가 커졌다. 무질서가 커질수록 여러 종류의 혼란에 대처하는 제도의 하부 구조는 많아졌다. 그 과정이 무한하게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군대에 의해 유지되었던 에너지 공급이 차츰 줄어들었고, 끝내는 군대가 사용하는 에너지 양이 군대가 얻어오는 양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과도한 경작 때문에 농산물 수확량도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노예를 먹이고 재우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도시 기관들이 거대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게 되자 그것들은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과대하게 팽창했던 도시는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었고, 군대에 의하여 짓밟혔고, 급기야는 그 에너지 환경과 알맞은 평형을 이루게 되었다. 멸망하고 나서의 로마 인구는 3만 명 정도였다.


저자는 현대 도시도 로마와 비슷한 방법으로 식민지화함으로써 지탱되었으며 결국 로마의 길을 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서울 거리를 걸으며 우리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작은 우리 마을을 지나다니며 아는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주위가 물이지만,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없는 셈이다. 백만 이상 사는 도시의 거주자는 5만 정도의 소도시보다 3배나 많은 세금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많은 범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비효율성 때문에 뉴욕과 클리블랜드는 거의 파산할 뻔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엔트로피의 입장에서 수도 이전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본래부터 생물의 계에 속하는 인간이 기계와 전문화를 타고 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신에게 도전하는 무모한 거인족(타이탄 족)에 다름 아니다. 생물학자들은 과도한 전문화는 한 종을 멸망케 하는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한 종이 특정한 형태의 생태계에 과도하게 전문화되면 그 종은 환경에 적절하게 적응할 수 없게 된다. 전환에 필요한 다양성과 융통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의를 하다 한숨을 쉬었던 교수처럼 '여기를 나가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는 모진 환경에서 건강히 살아남았던 조상들과 같은 종족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엔트로피가 모아놓은 탄산가스가 우주로 배출되는 복사열을 차단하여 발생하는 온실효과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증가하면 종은 극심한 시련을 겪게 된다.



인간이 중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손에 돌을 든 검고 작은 동물로부터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대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데 줄잡아 2백만 년이 걸렸다. 그것이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다.
- J. 브로노프스키, 인간등정의 발자취 중에서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가 급변하는 자연과 사회의 엄청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겪는 부작용을 다방면에 걸쳐 체험하게 될 것이다.


벌써 우리들은 기계에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지배란 기계가 우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치밀하게 우리를 조종함을 말한다.



규모가 커지고 중앙 집중적으로 될수록 인간의 역할이 또 하나의 생산 요소 정도로 전락하는 경향이 심화된다. 예를 들면 자동차 조립 과정에서 근로자들은 기본적으로 기계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산 과정 자체가 개인이 아닌 기계를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서 인간은 작업 과정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급자족 능력이 감소된다. 근로자는 필연적으로 생계를 위해 기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 일의 생산된 결과만이 평가를 받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정밀하고 전문화된 공정일수록 사람이 하던 일이 세밀한 기계로 옮겨지는 현장을 우리는 많이 목격했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외출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문명과 기계화의 이로운 점을 나쁘게만 말한다고 반문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목적이 가치를 전도시키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는가 하는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기계화는 우리의 정신 뿐만 아니라 생존까지 위협한다. 미국 정부가 치명적인 무기 공정(트라이던트(tirdent) 잠수함 생산)에 10억 달러를 투자했을 때 1만 6천 명의 고용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같은 액수로 다른 분야에 투자한다면(저자는 태양 에너지 수집판 생산의 예를 들었다) 2만명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즉 4천 명이 거리로 나앉았다는 이야기이다.


정보의 과잉 현상도 이에 못지 않다. 사람의 신경조직은 한 번 일정한 분량의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주어지면 사람은 자연히 외면해 버린다. 정보과잉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우리 학생들이다. 어느 교육자의 고백처럼



의사 소통은 내용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받는 것, 즉 말을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세대를 우리가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화의 부족과, 정보의 엄청난 쓰레기를 여과 없이 내보내는 무책임한 생산자들, 이런 일방적 흐름이 소통을 모르는 아이들의 정신을 점점 고갈시키고 있다. 결국 엔트로피 카지노는 현재의 우리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미래의 우리들의 재산까지 착취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들의 미래는 우리들의 미래 세대에게 달려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미래의 우리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죄어드는 서민들


에너지가 점점 줄어들게 되면 남은 에너지를 두고 과열 경쟁이 벌어진다. 경쟁의 생리가 그러하듯이 크고 강한 놈이 작고 약한 놈을 잠식시키며 합종과 연횡, 생존과 도태의 국면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게 경쟁은 점점 과열 양상으로 치닫고 비로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질 때, 에너지 흐름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죄어드는 경제적 환경의 희생물로서 점점 더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에너지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되면, 정부는 복지 또는 다른 명목에 의해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야만 한다. 실업이란 결국 엔트로피 과정의 이면에 불과하다. 에너지 고갈이 빨라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거나 불완전한 고용 상태에 처한다.


소비자는 높은 물가로 고통받고, 노동자는 낮은 실질 임금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 게다가 에너지 흐름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쓰레기를 치우고 없애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몫도 역시 납세자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바로 현대인의 비애이다.



'미국인'은 어쩌면 세계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민인지도 모른다. 그는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제공할 힘이 없는데, 그의 돈은 풍선처럼 인플레를 타고, 역사적 상황과 다른 국가의 힘에 따라 떠나가 버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자기가 만든 것이라곤 전혀 없다. 그는 휴식과 여흥으로 인하여 늘 지쳐 있고 자꾸만 살이 찌면 건강도 신통치 않다. 그가 마시는 공기, 물, 음식은 모두 독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죽을 때는 기가 막혀 죽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기의 성생활이 다른 사람들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는 좀더 일찍 태어났거나 아니면 좀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등의 생각을 한다. 그는 도대체 그의 자녀들이 왜 그 모양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애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는 실상 별로 상관도 안하고 왜 상관 않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아내가 무얼 원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른다. 잡지의 광고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원래 못생겼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의 모든 소유물이 모두 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불안해진다. 그는 만약 직장을 잃는다면, 만약 경제가 실패한다면, 만약 전기·수도회사가 망한다면, 만약 경찰이 파업을 한다면, 만약 트럭 기사들이 파업을 한다면, 만약 아내가 도망간다면, 만약 아이들이 가출한다면, 만약 죽을 병에 걸린다면,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걱정들 때문에 자격이 있는 전문가를 만나 상담한다. 그러나 그 의사들 역시 그들 자신의 걱정 때문에 다시 자격이 있는 전문가들과 상담한다.


해결책


방법은 간단하다. 에너지를 덜 쓰면 된다. 에너지를 덜 쓰는 체제로 사회는 점점 변화해야 하며, 그것을 저자의 언어로 표현하면 고엔트로피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어서 전환해야 한다. 즉 지금까지 이루어온 고엔트로피 구조를 하나씩 저엔트로피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한 사람의 체질을 바꾸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스무 여러 해 동안 해오던 방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데는 그만큼 거부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어쩌랴. 점점 엔트로피 분수령은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만일 너무 오래 지체된다면, 치러야 할 액수는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는 엔트로피 청구서 한 장이 올려져 있다. 우리는 지독한 채무자이며 연체자이다. 과학과 기술로 이미 써버린 것을 충당할 만큼의 대체물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까닭에 살육과 재해를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될 자격을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될 뿐이다. 우리와 함께 하는 자연의 모든 것을 없애버릴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대신에 자연을 좀더 안전하게 보살필 의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계를 돌보는 하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새로운 에너지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공짜로 오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오만함'을 꺾어야 하며,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각 개인이 소모하는 에너지의 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면서 보지 않으려 하고, 감추려고 하고, 안주하려고 하는 게으른 본성을 자극해서, '절망'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는 없다.


다시, 카지노에서


어둡고 음습한 카지노. 바에서는 매혹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담배연기 자욱한 천장에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술병 깨지는 소리, 환호성 지르는 소리, 이런 소리 저런 소리의 잡탕이다. 그 한 켠에서 당신은 기계 하나를 끌어안고 분주히 동전을 넣고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좀처럼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 때 입구 쪽에서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절한 복장의 여인이 주위를 살피며 두려운 표정으로 당신에게로 걸어오고 있다. 그녀는 당신의 아내(엔트로피)이다. 당신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녀는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 집에는 아버지를 자랑으로 여기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 당신은 나의 희망이며, 우리의 가정을 힘차게 이끌어갈 수 있음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다고 그녀는 호소한다. 그녀는 하늘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축복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할 텐가.
벌써 위쪽에서는 거래가 이뤄졌다. 엔트로피 카지노의 사장은 당신이 아내를 때리고 술병을 부수고, 쫓아내는 데 이미 많은 돈을 건 상태다. 이 똑똑한 사장은 인간이 낼 수 있는 행동의 믿을 만한 데이터를 놓고 베팅을 한 것이고, 그 상대자들은 당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순진하며 도의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정의 행복을 믿는다. 그 결과는 대개 예측할 수 있다. (천사를 욕보이지 말라)
찢기고 얻어맞고 상처받고 쫓겨난 아내의 집에는 아이들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아빠는 안오고 엄마만 와서 아이들에게 입을 맞춘다. 아이들이 대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그들이 '철이 들어서'이다. 이것이 눈에 안보일 수 없을 만큼 커지기 전까지 대개 그녀들은 이 불행을 혼자 안고 가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엄마를 불행으로 몰고 간 아버지를 향해 복수를 할 것이다. 이보다 슬픈 가정사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주(註)
1) 엔트로피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의도에 맞게 사용한 사람은 일의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 ∼ 1888)인데, 그의 논문 <열의 역학적 이론(On the Mechanical Theory of Heat>에서 에너지에 고대 그리스어인 tropy(변형)이라는 단어를 따서 엔트로피라 명명함으로써 에너지와 유비 관계에 있는 개념으로 확정지었다. 그에 앞서 라부아지에(Antoine L.Lavoisier, 1743 ∼ 1794)는 열은 칼로릭(caloric)이라는 무게 없는(impon derable) 입자라고 보았다. 즉 칼로릭을 많이 함유한 물체는 뜨겁고, 물체의 온도 변화는 칼로릭의 방출 또는 흡수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르노(N.L.S.Carnot)는 열 기관과 수력 기관의 원리로부터 '기계적 일을 하기 위해서 회로를 이루어 가동하는 열 기관을 만들려면, 온도가 다른 두 물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여, 서로 다른 위치의 함수, 서로 다른 온도의 함수를 통해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물질'이 아니기에 '생성'할 수 없고, '변환'만 가능하며, 한 번 떨어진 물이 다시 솟아 올라갈 수 없고, 한 번 늙어버린 육체가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듯이 한 번 사용된 에너지는 다시 사용할 수 없거나 활용량이 급격히 감소한다. 즉 에너지가 어느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변환될 때에는 반드시 모종의 불리한 상황이 부과된다는 것을 이 법칙은 천명한다. 그 벌이란 미래에 어떤 일을 하는데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양이 손실됨을 뜻한다. 이것에 대한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그러나 엔트로피는 존재론적으로 에너지와 동등한 것도 아니었고, 측정의 결과로 추론된 개념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를 수 없다는 일상적 경험으로부터 관념적으로 추론된 임의적 개념이었다.


2) '양적 도달 이론'은 엔트로피 이론의 응용으로 우리들이 현재 향유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채워졌을 때를 기준으로 기준 전후의 차이를 문제삼은 이론이다. 예컨대 로크 이론에 따른 '3억 만들기' 같은 유행어가 그대로 실현되었을 때 발생되는 현상을 어느 경제학자가 짚은 적이 있다. 우리가 현재 보유한 재화를 가지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3억이 아니라 1억씩 줄 수도 없을 뿐더러, 그들이 모두 3억을 가졌을 때 우리가 지금 생각한 3억의 가치와 그 때의 3억의 가치가 같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것은 경제적 효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맹목적 이론임이 밝혀진다. 아울러 어떤 책에 대한 글을 쓸 때 평론에 의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원작에 의존해야 하는지 자신의 판단을 밀고 나가야 하는지의 고민은 '양적 도달 이론'으로 말끔히 풀린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평론가의 글도 원작의 글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경우다. 만약 평론가의 글을 어느 정도 보았으면 자신의 입장이 정리되었을 테고, 원작을 충실히 살펴보았다면 자신의 입장뿐만 아니라 작가의 세계와의 타협을 이루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양적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은 채 스스로를 선택의 입장으로 내몰면서 자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적 게으름을 만천하에 알린 결과가 될 뿐이다.


3) 저엔트로피와 고엔트로피
에너지는 일반적으로 분산되어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집중하고 짜내어 에너지를 소비한다. 고효율의 엔트로피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사용하기 가장 수월한 에너지가 제일 처음에 사용되게 되어 있다. 다음 단계로 올라갈수록 처음보다 더 사용하기 어려운 에너지원으로 넘어간다. 석탄을 채굴하고, 만들고 하는 것은 땅위의 나무를 베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러나 유정을 뚫고 원유를 채굴하는 것은 석탄의 경우보다 더 어렵고, 원자력 에너지를 얻기 위하여 원자를 쪼개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적은 힘을 들여 많은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었으나, 점점 뽑는 에너지가 산출된 에너지를 압박하게 되어 결국 적자 상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카지노에서는 결국 많은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안 쓸수록 나에게는 그만큼 이익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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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머리 거인 2006-08-2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승주나무 2006-08-20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흰머리 거인 님// 안녕하세요. 뭘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jeheee 2009-06-1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 사보려고 했는데, 나무님의 서평을 먼저 읽어보고 웜업을 좀 한 뒤 사야겠군요..
가끔 들러, 좋은 글들 읽으며 무지로 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을 얻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히 읽겠습니다.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혁명의 구조
- 어떻게 세상이 바뀌는가



사람이 무엇을 보게 되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개념상의 경험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패러다임의 스펙트럼


인문학이 고전할 때에도 기술과 과학은 항상 진보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첨단 기술력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가지는 '축적성(蓄積性)'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쿤에 의하면 과학적 패러다임은 오히려 비축적성을 가진다고 한다. 비록 수천 년 동안 쌓아왔던 자연에 대한 해석도 새로운 해석으로 대체되고 나면 폐기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면으로 보았을 때, 자연과 인간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들은 시대마다 정신적 혼란기를 겪으며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쓴다. 수천 년 동안 고민해왔음에도 우리들의 주변에는 인간성의 부재와 불균형, 불평등, 불만 등의 인류를 내부에서 위협하는 문제에 항상 위태롭게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과학만 거기서 자유롭단 말인가. 우리가 축적하였다고 하는 기술력은 단지 어느 시점까지만 효용성을 가질 뿐이다. 각국에서는 지금도 가공할 만한 자연재해와 알 수 없는 질병들이 산재해 있으며 우리들의 과학기술력을 비웃는 각종 바이러스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과학에서는 우리가 흔히 사조(思潮)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정신의 흐름이 있는데 그것을 패러다임(paradigm)1)이라 부른다. 패러다임은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교체되는 특성을 가진다. 돌턴이 있기 전까지 화학계에서는 용액 안에 화합물(化合物)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어서 정량적인 파악이 불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돌턴은 섞이지 않는 고유한 성질의 원자가 일정한 성분으로 결정을 이룬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변화하지 않고 단순히 섞여 있으면서, 고유의 특성을 발하는 혼합물(混合物)이 그것이다. 화학은 그에 의해서 드디어 규칙성과 일관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패러다임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데, 그것을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그것을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전 패러다임과 양립할 수 없는 새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순에 의해 발전적인 방향으로 진화된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아이디어로 전환된 것이다. 자연을 이해하기란 좀처럼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과학자와 철학가들은 '모험가'의 성격을 띤다. 그들이 이해한 것은 아주 자연의 아주 미세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의 발견에 의해 대체될 여지는 언제나 상존해 있는 것이고, 그런 혁명을 거듭함으로써 우리는 좀더 근사한 자연관을 가질 수 있다.
패러다임을 스펙트럼이라 부르는 이유는 패러다임이 가지는 특성에 연유한다. 패러다임은 규정짓기 힘든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체계적인 것도 아니다.



정상과학은 고도로 결정적인 성격의 활동이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규칙에 의해서 결정될 필요는 없다.
……
 나는, 규칙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되지만 그러나 패러다임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도 연구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한다.


패러다임은 체계라기보다는 '사고의 다발'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 일례로 산소의 발견자가 누구이며 최초로 발견된 때는 언제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물음에 답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산소의 발견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산소라는 최초의 착상을 얻은 이후에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명료한 개념에 도달하였다. 그 와중에 착오도 적지 않았으니, 이쯤 되면 최초의 발견자나 발견일 같은 것은 의미를 잃게 된다. 우리들이 '최초'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항상 정답만을 나열해온 교과서의 영향이 적지 않다. 패러다임은 과학에 있어서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뉴턴이 시간과 공간을 '절대성'의 개념으로 파악한 데 대해 라이프니츠는 '상대성'의 입장에서 보고자 하였으나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가 나오기 전까지 라이프니츠의 '이견(異見)'은 방치되었다. 그러나 항상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사실에 대한 예견을 심어준 것도 패러다임의 요소이다.
과학자들이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치는 활동을 '정상과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최초의 발견에서부터 새로운 사실의 발견 사이에 격론이 지나가고 나서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수습된 형태의 과학이 정상과학이라 할 수 있는데, 정상과학에서 '이상현상'이 발견되고 그것이 점차 증폭되어 심각한 균열을 일으켰을 때 '비상과학'에 의해 대체되고, 그것이 이제 정상과학이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정하고, 알려지지 않은 가설을 던져주는 것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이므로, 쉽게 깨지지 않는다. 이상의 징후를 받아들여야 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들을 납득시켰을 때에야 일각에서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새 이론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진다. 시대가 경직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성의 시기는 훨씬 늦춰질 수 있다.
이와 같이 패러다임은 몇몇의 학설로 대체되기 힘들다. '패러다임으로 패러다임을 밀어내'야 하는데 그런 일련의 흐름들이 긴 꼬리를 밝히며 스펙트럼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는 과정




정치적 혁명이란, 기존 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된다. 이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 조건이다.
         141 ∼ 143


과학혁명은 기존의 패러다임[정상과학(Normal Science)]이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해내지 못하거나 설명하는 데 심각한 문제를 드러낼 때, 그러한 전조들 즉 이상(anomaly) 현상을 만족시키는 비상 과학(extraordinary science)이 출현하는데, 이 두 패러다임의 대립기간을 지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이 때 과학의 진화에서 새로운 지식은 다른 모순되는 종류의 지식을 대치하기보다는 무지(無知)를 대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과학이라는 동일한 토양 위에 진리로 가기 위한 길만 새로 닦이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놓인 시멘트나 기초자재들은 고스란히 활용되기도 한다. 거기에 몇몇 부족했던 기초 자재들과 인물들이나 지식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목적과 방향을 위해 쓰여진다. 그것은 똑같은 자료 더미를 이전처럼 다루되 그것들에게 종전과는 다른 테두리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서로 새로운 관련 체계 속에 놓이도록 함이 포함되는 과정이며, 이전의 건설계획서를 폐기하고 다시 쓴 새로운 계획서 안에 모든 소재들이 개편되어 공사가 진행된다.
정상과학은 대부분의 과학자가 일생을 통해 연구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정상과학이 도전을 받는다면 그들은 저항할 것이다.
그들의 저항은 몇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과학자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여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좀더 먼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둘째는 첫째와 유사한데, 이전 패러다임이 대체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패러다임은 유보된다. 이 때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농후한 예견들과 이상현상의 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한다.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탈쿠스(Aristarchus)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식의 태양중심 체계가 이미 제안되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geocentric system)는 지구인들에게 오랫동안 세계를 설명하는 정교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관측도구의 발달로 구체적 확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대체 이론은 18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라이프니츠도 절대 위치와 절대 운동이라는 뉴턴 체계에 대해서 공간과 운동에 대한 상대적 개념을 암시하였으나,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과학자 사회가 나타나기 전까지 예견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본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연구자들을 위해 진리의 비석에 비밀을 새겨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밤하늘에서 우리를 비추는 별빛이 수만 년 전의 기억이듯이.
셋째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그것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유보 상태이다. 일단 하나의 과학 이론이 패러다임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이론은 그 위치를 차지할 만한 다른 후보 이론이 나타날 경우에 한해서 쓸모 없는 것이 된다. 곧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는 결단이 되어야한다. 이 때의 저항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검증 작업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며, 검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패러다임의 지위에 올라섰을 때 이전 패러다임은 비로소 대체된다.



이상 현상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해결된다. 새로운 이론들에 대한 제안은 대부분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 만일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매번 이상 현상에 대해 위기의 원천으로서 반응을 나타낸다거나 또는 어느 동료가 진전시킨 새로운 이론마다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과학은 중단되고야 말 것이다.

         262


검증된 패러다임은 다시 정상과학이 되어, 한동안 세계를 읽는 척도로 받아들여진다. 자연의 역동성과 하나씩 벗겨지는 무지의 자각이 서로 호응하여 과학의 계절을 이룬다.



명예의 전당 - 교과서


교과서는 '명예의 전당'과 같이 역사의 화려한 주인공들을 나열한다. 뉴턴 다음에는 아인슈타인이 당연히 기다리고 있으며 하이젠베르크도 아인슈타인의 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사유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그에 따른 부수적 요청들과 인내의 시간들, 격론의 굴곡들이 저자들에게는 주요한 소재로 선택된다. 교과서에서 우리가 쉽게 싫증을 느끼는 이유는 역사의 극적 파노라마를 완벽히 제거했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가지고는 발견자가 자연의 해석에 매달렸을 때 느꼈을 괴로움이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분야에 대한 예견을 느낄 수 없다. 그것들은 '언급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오로지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그것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교과서에는 가려져 있는데, 역사에 대해서는 편린만을 다룰 뿐이다.
그 자신의 생애에서 직접 과학혁명을 겪었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나 교과서 문헌을 읽는 일반인 어느 쪽이든 간에 그 역사적 감각은 그 분야의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까지로만 한정되므로, 우리의 눈에 과학은 결실이 차곡차곡 쌓인 풍요로운 곳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숙한 연구자의 눈에 그것은 자연의 역동성을 억측으로 묶어둔 엉성한 '지식의 다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다른 분야의 교과서에 비해서 과학교과서가 유독 경직된 자세로 탐구자들을 묶어놓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음악, 회화, 문학 등에서는 다른 예술가들, 특히 앞서 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함으로써 배움을 얻게 된다. 독창적인 창작에 대한 요약(compendia) 또는 편람(handbooks)을 제외하고는, 교과서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역사,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는 교재 문헌이 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들에서도 대학의 기초 과정에서는 원전 자료를 병행하여 강독하게 되는데, 일부는 그 분야의 '고전(classics)'들이고 나머지는 학자들이 서로를 향해 집필한 당대의 연구 보고서들이다. 그 결과 이들 분야의 학생은 그의 미래 그룹의 구성원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해결을 시도하게 될 지극히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경쟁적이고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풀이들, 즉 궁극적으로 그 스스로 평가를 내려야만 하는 풀이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상황을 적어도 현대 자연과학에서의 상황과 대조해 보라. 이들 자연계 분야의 학생은 대학원 과정 3,4년에서 독자적 연구를 시작하게 되기까지는 주로 교과서에 의존한다. 다수의 과학 교과과정은 대학원 학생들에게까지도 학생용으로 쓰여지지 않은 저작들을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연구 논문과 전공 논문을 보충 독서자료로 부과하는 경우에서도 그러한 과제는 최상급반에 국한되며, 사용하는 교과서에 없는 부분을 다소 보완하는 자료에 제한된다. 과학자 교육의 최종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교과서는 교과서를 가능케 했던 독창적인 과학 문헌으로 체계적으로 대치된다. 이러한 교육 기법을 가능하게 하는 그들의 패러다임에 확신이 얻어진 상황에서, 그것을 바꾸고 싶어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연구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모두 보다 간결하고 정확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최근의 교과서에 요약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뉴턴, 패러데이(Faraday), 아인슈타인, 슈뢰딩거(Schrodinger)의 연구 보고서를 읽어야 하겠는가?
이것은 폭이 좁고 경직된 교육으로서, 아마도 정통 신학을 제외한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더 그러할 것이다.


인문·철학서적을 보면서 우리는 저자들과 직접 대면한다. 그들이 시대적 상식에 사로잡힌 성향이나 글쓰기의 습성, 개인적 취향 등이 고스란히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온다. 특히 문학 연구에 있어서 작가의 생애 연구는 필수적이다. 만약 도스또옙스끼의 생애를 모른 채 그의 문학에 뛰어든다면 우리는 진리의 반을 잃게 된다. 이에 반해 과학 탐구자들은 저자를 직접 만나는 경우가 드물다. 잘 정리된 교과서를 통해서 이들이 가지는 시대적 무게감을 실컷 맛보게 된다. 과학 교과서는 대부분 발견과 영광·의미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연구자들은 아류가 되기 십상이다. 누구도 그 이론이 생성되기까지 전혀 엉뚱한 과정과 맹점을 알지 못하며 나아가 탐구자들에게 교과서의 인물들은 신의 지시를 받고 그런 발견을 이룬 사람으로까지 보인다.



과학 교과서들(그리고 너무나 많은 구식 과학사(科學史)들)은, 명백하게 동시에 고도로 기능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교과서의 패러다임 문제들의 서술과 해결에 기여했다고 쉽사리 평가될 수 있는 과거 과학자들의 연구 중 그런 부분만을 인용한다. 더러는 선택에 의해, 더러는 왜곡에 의해 이전시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과 방법의 가장 최근의 혁명에 의해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던 바로 그 일련의 고정된 규범들에 부합되도록, 고정된 문제들의 한 벌에 대해 연구를 수행해 왔던 것으로 암묵적으로 표현된다.


화이트헤드는 과학 교과서를 가리켜 그 분야의 창시자들을 잊기를 주저하는 과학은 패배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학의 역사를 축적적으로 채색하려는 교과서의 횡포는 자칫 과학을 박제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가 있다. 자연과 함께 인간의 정신과정도 생동하는 것인데, 정수를 뽑는다고 요약을 해버리면 독자가 그것에 대해 정당한 판단을 내릴 기회를 박탈하는 셈이다. 
진정한 과학은 패러다임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이며 비축적적인 정신의 총화이다.



위대한 착각


패러다임이 일단 출현하면 그를 중심으로 명료화, 검증화 작업이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패러다임은 대폭 수정되며 전혀 새로운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 발견자들의 착상인데 소위 '위대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을 전체적으로 알기에 자연은 너무나 광대하고 신비롭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착오는 필연적이다. 착오율을 좀더 줄이고 논의를 세련화시키는 것이 연구자들의 역할인데, 그들이 결정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바로 앞의 연구자가 했던 판단, 즉 '위대한 착각'이다. 맥스웰은 뉴턴주의자로서 빛과 전자기(electromagnetism)는 일반적으로 기계적 에테르(mechanical ether)의 입자가 일정하지 않은 변위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었는데, 그러한 착상을 명료화시키는 과정에서 '에테르의 끌림'이란 것은 허구가 되어버렸고 그는 본의 아니게 뉴턴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고 말았다. 이런 전복과정에서 아인슈타인까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이러한 착각은 두 가지 종류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제까지 믿고 있었던 '신앙'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신의 지위를 찾아 완전히 일어서게 되기까지의 시행착오들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위대한 착각'도 바로 후자이다.
이런 착각들의 발견은 많은 이상 현상과 비상적 탐구를 자극시키는 원료가 된다.
우리는 모두 과학을 자연에 의해 미리 설정된 어떤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다가가는 하나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다윈의 진화론은 받아들이기 힘든 패러다임이었다. 다윈 이전에 진화는 목표-지향적 과정(goal-directed process)으로 간주되었으나, 다윈에게 있어 설정된 목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고 자료가 주어진 실제 유기체들에서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이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며 훨씬 더 분화된 유기체들(organism)의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출현의 원인으로 설정되었다.
때문에 저자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향한 진화(evolution-towarde-what-we-wish-to-know) 대신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진화(evolution-from-what-we-do-know)로 대치할 수 있게 되면, 다수의 혼돈스런 문제들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정상과학의 위치에서 탐구를 수행하지만 언젠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예측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면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새로움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때문에 과학자들이 발견한 착오의 표시들은 우리들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인도자가 된다.
이미 결과를 아는 입장에서 우리들은 발견이 이루어지기 전 단계를 우습게 보거나 무시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니, 우리 후손들은 우리들의 탐구자세를 우습게 보아 넘기지 않고, 우리들이 착오를 일으킨 부분을 더욱 신경 써서 관찰할 것이다. 그 때는 정상과학의 교과서와 '착오의 교과서'가 서로 호응하여 현재보다 유연한 패러다임의 생산체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 중의 하나는 '축적과 결실'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이때까지 쌓아온 정신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믿음이 어째서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진리처럼 자리잡을 수 있는지 의아하다. 인간은 '축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소비'한다. 세계와 시대는 그에게 좀더 다른 요구를 하고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정력을 소비하여 시대를 견딘다. '축적과 결실' 속에서는 불가피하게 허위와 기만이 틈입한다. 인간이 보다 솔직하다면 우리의 학문의 위기를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무기를 갖고 무기가 자신을 언제나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편승해 있을 뿐이다. 특히 학문에 있어서는 너그러운 것은 경직된 정상과학의 주범이 되며 답보상태를 만든다. 솔직하고 진솔한 탐구는 자신과 세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유일한 열쇠다. 조금은 자신에게 냉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예전에 이 배를 탔던 사람들의 방향과 계획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방향키를 정반대로 돌릴 용기가 없다. 이 배는 잘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이 전의 선원들이나 그들의 할아버지들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선배 선원들이 가던 방향을 따라 계속 흘러왔을 뿐이다.


정상과학은 닻이다. 세상의 대해(大海)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표시하는 부표이며, 나의 오늘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비망록(備忘錄)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새로운 것들을 전제로 쓰여지므로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패러다임은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다린다. 자연을 하나의 패러다임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며, 자연에는 우리가 평생 만나기 힘들 정도의 광대한 표본이 숨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수수께끼들이 왜 그렇게 도전적인가를 말해주는 이유이다.



- 주(註) -


1) 패러다임은 언어학습에서 사용되는 '표준예(exemplar)'란 뜻의 단어에서 차용해온 단어인데, 학생들이 주어진 기초 지식을 통해 예제(例題)를 푸는 방식에서 여러 가지 변형이 유도될 수 있다. 일정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난 연구자가 사례를 접했을 때 각자 다른 방식의 문제풀이가 생길 수 있고, 서로의 대결을 통해서 보다 올바른 형태의 방식이 채택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problem field)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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