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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이것은 책의 제호가 아니다. 93세 노투사의 육성이다. 혁명과 코뮌 그리고 레지스탕스의 역사가 만들어낸 프랑스 지성의 절정이다. 그리고 청년들과 미래를 향한 절절한 애정이다. 앵디녜부! 레지스탕스! 앙가주망! 분노와 저항과 참여를 통하여 거대한 역사의 일부가 되기를 호소한다. 프랑스보다 분노할 것이 훨씬 더 많은 우리들에게 그의 외침은 정수리에 올려놓은 얼음조각처럼 가슴 서늘한 깨달음이 된다. 분노의 표적을 잃은 채 부당한 증오에 함몰해 있는 자신을 깨닫고 진정 분노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격렬한 희망’, ‘평화적 봉기’에 이어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쾌하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이 곧 창조이다.(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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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프랑스를 뒤흔든 13쪽짜리 책이 있습니다. 출간 직후 수십 만부가 나가 한국 언론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분노하라>. 사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분노하고 있습니다. 다만 매일 분노하다 보니 습관이 되어 바꿔볼 생각이나 행동을 상상하지 못하고 그러려니, 하며 체념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스테판 에셀은 94세의 나이에도 체념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진보를 믿으며 현실의 가능성을 키워가자고 제안합니다. 이제 프랑스발 분노의 바람이 한국에도 들이닥칠 참입니다. 뜨거운 분노의 바람에 앞서 <분노하라>의 한국어판 번역자(임희근)와 저자가 나눈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참고로 이 책은 다음 주에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옵니다.
* 저작권 문제로 해당 인터뷰 전문을 내리고 일부 질문과 내용만 남겨둡니다. 전문은 책으로 만나보시길.
[스테판 에셀 인터뷰]
책에 소개된 프로필 외에, 그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시겠습니까?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우리 집안은 관습과는 거리가 먼 분위기였습니다. (중략) 그래서 일찍부터 저는 세간의 도덕이나 윤리 같은 것과는 일정 거리를 두게 된 것 같습니다. 결국 도덕이란 타인들이, 사회가 만들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규범(code)에 순응하는 것일 터입니다. 또 윤리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가야 할 것, 즉 발명이며 창조, 즉 결국 각자 자기만의 자유를 얻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올해 94세의 고령인데도 정말 정정하게, 열정적인 삶을 살고 계신 듯합니다. 백 세에 가까운 노령에도 그러한 강건함과 용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 비결이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비결, 그것은 물론 ‘분개할 일에 분개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비결은 ‘기쁨’입니다.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 중 하나가 ‘분개’입니다. 분개할 일에 분개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중략) 남에게 베풀고 싶은 마음과 베푸는 기쁨을. 남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감수하는 것.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베풀고 싶다는 마음, 이 마음을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을 책임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감성을 키워주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자꾸만 교육을 통해 계발해야 하며, 마음 교육을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프랑스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매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집필 당시 이런 반응을 예상하셨나요?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이 작은 책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 때가 이 세계의 아주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또한 어떻게 보면, 정치적 윤리를 설파한 것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행동을 취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윤리적 기본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체험에서 (요즘 사람들에게 들려줄) 메아리를 찾습니다. 그러면 젊은 세대는 그 메아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렇습니다. 겨우 20페이지밖에 안 되는 제 책이 이렇게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것은 전세계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절감하고 있는 문제 제기에 이 책이 화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레지스탕스 정신과 전통이 오늘날 어떻게 계승되고 반영된다고 생각하십니까?
1944년 5월 채택된 ‘프랑스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의 프로그램은 치열한 현실성을 띤 내용이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텍스트였습니다. 우선 길이가 짧았고, 또한 내용이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짚어냈습니다. (중략) 잘 되어가는 사회란 무엇입니까? 모든 시민에게 존재의 방도가(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대항하여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입니다. 세 단어로 짧게 줄이면 여전히 이것입니다. «자유, 평등, 박애!»
만약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또 오늘날의 레지스탕스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나름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광고 메시지나 언론이 전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만 자유롭게, 양심에 입각해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젊은이들은 옛날 레지스탕스 당시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네트워크를 이용해야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인터넷상의 여러 네트워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아랍 세계의 젊은이들은 이런 일을 훌륭히 해냈고, 그리하여 독재자를 축출하는 쾌거를 이룬 것입니다.
현재 아랍과 이슬람권-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에서 민주화 요구가 한창입니다. 이 흐름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튀니지의 젊은이들, 이집트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압박을 받으면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이슬람 문명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문명이라면 그 문명 속에 갇힌 채 무력하게만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도처에 독재와 압박에 순응하지 않는 깨어 있는 국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미얀마나 그밖의 나라들... 이런 나라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주 소중한 시기입니다. 특히 이렇게 떨치고 일어난 이들이 다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 도처에, 때는 왔습니다.
책에서 강조하신 ‘창조적인 저항의식’으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방법이 있을까요?
제도들이 민주적으로 기능하기까지 시민들의 참여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사람들이 항상 잘 깨닫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교육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교육도 부족하지만 정치적 창의성도 부족합니다. 시민과 통치자 사이의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참여(적) 민주주의’라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도 여전히 막연합니다. 사실은 보통선거 방식으로 ‘넘버 원’을 선출하는 것–지방선거든, 전국적 선거든–만이 여러 제도를 제대로 기능케 하는 민주적 형태는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왜? 일단 선출된 대표자는 시민들이 원하는 바, 생각하는 바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한 단계 높은 정치적 창의성은 우리 제도에 무엇을 요구할까요? 새로운 형태의 기능을 요구합니다.
부자들에 의한 미디어 독점과 언론 독립 정신의 훼손을 매우 우려하고 계십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인 듯한데, 시민들 개개인 혹은 미디어 종사자들이 이런 상황에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오늘날 모든 문제들은 상호의존적입니다. 인류가 이 땅에서 사는 방식을 전반적으로 재고하지 않으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극도의 빈곤 문제가 생태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이 두 문제는 테러리즘 문제와 연관됩니다. 즉 우리 각자 안에 내재한, 그리고 우리가 다른 것으로 바꾸려 노력해야 할 ‘폭력의 필요성(폭력을 자행하고 싶은 경향)’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문제 말입니다. 이런 문제들에 관해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함께 행동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비폭력 원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폭력은 폭력의 악순환을 더욱 심화시킵니다. 미래로, 희망으로 향한 문을 닫아버리게 합니다. 그래서 책에서도 썼듯이 제가 보기엔, 격렬할(폭력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희망뿐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하지만 꼭 알아두십시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이나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 다음에 타인들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어려운 구축(構築) 작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