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숭례문 화재의 책임을 지고 문화재청장 직에서 사임한 이후 나는 참회하는 마음에서 일체의 사회적 활동을 자제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 왔다. 그런 지 1년이 지난 지금, 아무래도 나의 본업은 문화유산에 대한 글쓰기에 있다는 생각에서 이제 국보 순례 길에 나서게 됐고,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당연히 숭례문이 되었다."

2009년 4월 1일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유홍준의 국보순례", 지난 2년 동안 연재한 100회분을 모아 같은 이름의 책으로 정리했다. 본문을 보강하고, 특히 이미지를 시원하게 한 면에 배치해 일종의 도록 역할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올해 <답사기> 시즌 2로 돌아온 유홍준의 연이은 책이 무척 반갑다. 이 책의 서문과 본문 한 꼭지를 먼저 소개한다. 올 여름 문화유산에 흠뻑 빠져보시길 바란다. 현재 예약판매 중, 8월 2일 출간 예정.

 

‘나라의 보물’을 순례하는 마음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문화재로 지정된 국보, 보물만이 아니라 ‘나라의 보물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우리 마음속에 간직할 기념비적인 유물들을 하나씩 찾아가는 명작 해설이며, 우리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명품들의 뒷이야기를 소개한 책이다.
전체를 놓고 보면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의 낱낱 장면을 유물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은 통사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고 미술사적 사항 이외의 이야기들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이에 반해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순례자의 느긋한 여유가 허용된다. 객관적 사실을 명확히 제공한다는 데는 차이가 없지만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면서 때로는 에세이 풍으로, 때로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전개할 수도 있다.
  명작 해설이란 결국 간결한 대중적 글쓰기에 다름 아닌데 이게 보통 힘겨운 것이 아니다. 본래 짧고 쉽고 간단하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 대중적인 해설이란 전문적 지식을 대중의 눈높이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문 지식을 대중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내어 눈높이를 높이는 것이다. 피겨스케이팅에 비유하자면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은 선수권대회의 지정 종목이고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갈라쇼 같은 것이다.
  이 책은 2009년 4월부터 조선일보에 매주 목요일마다 기고한 ‘유홍준의 국보순례’의 2년치, 100회분을 묶은 것이다. 신문에 연재할 땐 반드시 200자 원고지 5.2매에 맞추어야만 했다. 그러나 책으로 엮으면서 각 해설을 책의 판형에 맞춰 약간 늘려 쓰고 유물에 따라서는 세 쪽 또는 네 쪽을 할애하기도 했다.
  해설 맞은편에는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유물사진을 실었다. 본래 미술사 책은 글 못지않게 사진이 중요하다. 사진만으로도 저자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미술사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들도 즐길 수 있도록 유물사진에 영문을 병기하였다. 특히 이번 책에서는 해외문화재를 많이 다루었다. 일본의 경우는 아직도 찾아갈 곳이 많지만 미국과 유럽에 있는 중요한 유물들은 미술관별로 대략 일별해본 셈이다.
  책이 나오게 되니 누구보다도 조선일보 문화부 식구들과 변용식 발행인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이 일어난다. 가끔 내게 왜 ‘유홍준의 국보순례’를 조선일보에 연재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것은 조선일보가 내게 원고청탁을 했기 때문이다. 이 지면은 상당한 연륜과 권위를 갖고 있다. 나 이전에는 유명한 ‘이규태 칼럼’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문일평 선생의 ‘화하만필(花下漫筆)’도 있었다. 나로선 영광된 지면을 제공받은 것이다.
  글, 사진, 편집 모두에서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내 책을 기꺼이 맡아준 눌와의 김효형 대표, 변함없이 나를 도와주는 명지대 문화유산자료실의 김자우ㆍ김혜정 연구원, 신문에 글이 나가면 미세한 잘못을 지적해주었던 독자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뜻을 보낸다.
  나의 ‘국보순례’가 언제까지 이어질 지에 대해서는 생각한 바가 없다. 나라에서 국보로 지정한 유물만도 400점이 넘으니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남았다. 또 어느 정도 순례를 마치면 두 번째 책으로 엮어 독자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 2011년 7월 유홍준

 


연담 김명국의 죽음의 자화상


화가에게 있어서 술은 간혹 창작의 촉매제였다. 취옹(醉翁)이라는 호를 즐겨 사용한 17세기 인조 연간의 연담(蓮潭) 김명국(金命國)은 정말로 취필(醉筆)을 많이 남겼다. 사람들은 그를 주광(酒狂)이라고 불렀고, 실제로 그는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영남의 한 스님이 지옥도를 그려달라고 할 때 그는 술부터 사오라고 했다.
  그리고 번번이 술에 취하지 않아 그릴 수 없다며 술을 요구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하여 스님이 찾아가 보니 염라대왕 아래서 벌 받는 사람들을 모두 중으로 그려놓은 것이었다. 스님이 화를 내며 비단 폭을 물어내라고 하자 연담은 껄껄 웃으며 술을 더 받아오면 고쳐주겠노라고 했다. 스님이 술을 사오자 연담은 술을 들이키고는 중 머리에는 머리카락을 그려 넣고 옷에는 채색을 입혀 순식간에 일반 백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남태응의 증언에 의하면 연담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술에 취하면 또 취해서 그릴 수 없어 다만 욕취미취지간(慾醉未醉之間), 즉 취하고는 싶으나 아직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만 명작이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연담의 명작으로는 취필이 분명한 <달마도>가 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연담다운 작품으로 생각하는 것은 〈죽음의 자화상〉이다. 상복(喪服)을 입은 채 지팡이를 비껴 잡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을 그린 것인데 그림 위쪽에 마구 흘려 쓴 화제(畫題)를 보면 저승으로 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데 將無能作有
그림으로 그렸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을 덧붙이랴 畵貌己傳言
세상엔 시인이 많고도 많다지만 世上多騷A客
그 누가 흩어진 나의 영혼을 불러주리오. 誰招已散魂

동서고금에 자화상은 많고도 많다. 그러나 죽음의 자화상, 그것도 저승으로 표표히 떠나는 그림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 연담에게 술은 창작의 촉매제이자 삶과 죽음을 초탈한 경지로 들어가게 한 묘약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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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금요기획'은 25일 밤 11시5분 '미 법학계에 떠오르는 젊은 리더 석지영'편을 방송한다. 지난해 11월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하버드 법대 종신교수가 된 석지영(38)씨는 여섯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뒤 발레리나를 꿈꾸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발레 교습을 중단한 뒤 미 예일대와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법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법대 재학 시절부터 뛰어난 성적과 활발한 교.내외 활동으로 교수진에게 인정받은 석 교수는 2006년 하버드 법대 조교수로 발탁되며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페미니즘을 통한 가정폭력법 개혁' '패션법' 등 창의적인 연구 주제로 교수 임용 4년만에 종신교수가 되며 미 법학계의 '스타'가 됐다.
  발레는 물론,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석 교수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살려 '공연 예술 법학' 강의를 개발했는데, 할리우드 스타부터 세계 정상급 작가ㆍ발레리나가 초청 강사로 강단에 서는 이 수업은 하버드 법대 최고의 인기 강의로 자리잡았다.
  석 교수는 "하고 싶은 것, 꿈을 향한 도전이 오늘을 있게 했고 하버드 법대 종신교수 임용 역시 또 다른 꿈을 향한 시작일 뿐이다"고 말한다. 제작진은 이런 석 교수의 열정적인 삶, 가족과의 단란한 일상을 소개한다.(연합뉴스, 이연정 기자, 2011년 2월 24일)

 
   

젊은 리더들에게 큰 관심이 없는지라 석지영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성공 스토리를 담은 자기계발서나 에세이인 줄 알았습니다. 관련 기사를 찾아보고 짤막한 책소개를 보고 나서야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법에 대해 쉽게 풀어주는 교양서는 아니지만, 법과 집의 관계 변화를 추적하는 가운데 법과 집 모두를 재발견하는 기획이 신선하다 생각했습니다. 보통 집은 법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거나 법이 없어도 유지될 수 있는 공동체라 생각하는데, 이 책은 법이 어떻게 집 안으로 들어와 사생활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특히 이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와 여성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색다른 방법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성공 스토리에 앞서 성공의 근거가 된 학문적 업적이 먼저 소개되어 반갑습니다(표지는 빼고요). 오늘(7월 5일)까지 예약판매 중인 이 책의 머리말을 소개합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볼 만합니다. 본문이 만만찮겠지만 읽어볼 의욕을 주네요.

 

| 머리말 |

자선과 구타는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 프랜시스 보몬트(Francis Beaumont) & 존 플래처(John Fletcher), <돈 없는 재치(Wit without Money)(1639)>

9.11 테러가 발생한 지 열흘이 채 되지 않은 2001년 9월 20일쯤, 미국인들은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의 결연한 "국토(homeland)" 수호의지를 확인했다. 미국 본토 안에서 공격을 당함으로써 미국인들이 세계 속에서 가지는 안전과 안도감은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 국토 안전하게 만들기(securing our homeland)"라는 공식적 표현이 생길 정도였다. "국토"란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개념이었지만, 주석자들은 그 단어가 쓰이기 시작하자마자 미국 사전에 등장한 그 용어의 특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단어는 생소하고 "약간은 게르만적인 어감(vaguely Teutonic ring)"을 지닌다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섬뜩하다(creepy)"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국토(homeland)라는 신조어의 탄생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받게 되었을까? 레이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언어학적인 날카로움으로 유명했던 페기 누난(Peggy Noonan)은 "경찰을 본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이런 집이나 가정과 같은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불쾌감을 묘사했다. "집(home)"이란 사사로운 내부 공간의 개인적 자유가 재현되는 곳이다. 하지만 요즘은 국가가 긴급 명령의 최대 공개화를 합법화하는데 마치 집이란 개념이 징집된 것처럼 되었다. 집이 가지고 있는 특별하고 정서적인 낭랑함은 정부 권력의 전력을 위해 공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보통 인간 경험에 있어서 집과 같이 편재되어(ubiquitous) 있는 개념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집은 발달 형성에 중요한 문화적, 감성적 그리고 정신적 중대성을 지닌다. "가정/집(home)"이란 세대(household) 또는 집의 물리적 구조(physical structure of the house)와 구분되어, 19세기부터 가족을 위한 정서적인 개인의 삶과 친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가정생활 및 사생활의 이상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집이란 지금도 여전히 발달되고 있는 개념으로서,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안전과 소속되어 있음에 관해 우리가 느끼는 것들에 대하여 깊게 알려준다.  

영미(英美)에서는 전통적으로 가정(home)과 역사적 상관성을 지니고 있는 집(house)이란 개념을 오랜 세월 폭력적인 침입에 대항한 보안과 연결시켜 왔다. 집(house)을 성(城)으로 여겼던 고대의 생각을 고려해보면 집이란 한때 전체 영국 섬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으나, 역사적으로 사용된 법률적 의미는 바로 개개인의 거주지(dwelling)에 대한 안전을 뜻한다. 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가 표현하기를 "개개인의 집(house)은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성(城)이자 요새일 뿐만 아니라 상해 및 폭력에 대항하는 자신의 방위 수단이다."라고 했다.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은 "영국 법은 아주 특이하게도 남성의 집(house)에 대한 면책권을 고려해 왔다. 그의 성(城)을 보호해주고 형벌을 면해줌으로써 영국 법이 위반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넘쳐나는 공포(abundant terror)"를 만들어내는 주거침입죄(절도 혹은 강도, burglary)란" 강제적인 침입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연 상태에서 획득하게 되는 주거권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식 아래, 집(house)은 유일한 안전보장과 안심의 장소임과 동시에 테러 및 공격을 당하기 쉬운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특이한 양면성을 통해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정신세계의 집에 관해 이야기한 유명한 토론을 상기해볼 수 있다. 독일어 하임리히(heimlich)라는 단어를 분석하면서 프로이트는 "한편으로 이 단어는 친밀한 상태와 편안함을 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눈에 띄지 않고 숨겨진 상태를 뜻"한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특이하게도 그는 그 단어의 뜻. 즉 소박한(제 집 같은, homelike), 친밀한(intimate), 친숙한(friendly), 편안한(comfortable), 안전한(secure)에 상반되는 이중적 감정의 방향을 개발해 그 뜻이 완전히 반대인 운하임리히(unheimlich)에 도달하게 되는데, "반대어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언홈리(unhomely, 비가정적인)이지만 표준 영어 번역은 언캐니(uncanny, 기괴한 또는 괴기한)이다. 오랫동안 알고 익숙해진 것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몹시 두려운 것들을 모아 놓은 "조용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불안함은 바로 가정적인 것이 반대의 상태로 되어버리는 것에 대한 섬뜩한 느낌을 가리킨다. 이러한 평행선은 집에 관한 깊은 양면성을 특징짓는다. 집이 침입을 받는 것을 상상할 때마다 엄청난 공포가 엄습한다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남성의 집(home)이 그의 성(城)으로서 최종적으로 절대 불가침한 장소라는 것을 떠올려야만 한다.  

기괴한 기분은 집이 변화되고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미국 내의 안전한 집(house)을 위해 뜻했던 바가 "안전하지 못한" 상태로 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면서 집에 관한 논의는 특별한 염려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 맞서 집이 나쁜 범죄에 연루되었음을 시사하는 법적 논의의 범위는 더욱 두드러진다.  

현대적 집(home)이란 공(公)과 사(私)의 공간을 구분하는 문자 그대로의 경계선을 표시한다. 또한 집(home)은 공(公)과 사(私)의 영역 사이에 놓여 있는 비유적 경계선(metaphorical boundary)을 대표하기도 한다. 문자 그대로 공간과 비유적 영역에 있어서 집(home)이란 개개인과 정부 권력 사이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들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미국 법에서는 집(home)에 관한 생각을 통해 범죄, 폭력, 섹스, 가족, 사생활, 자유 그리고 재산이라는 법적 개념들이 중요하게 형성되었다. 집이란 전통적으로 주거침입관련죄, 정당방위 및 가정폭력 관련 형법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비합리적인 수색과 압수(unreasonable search and seizure)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정당한 법적 절차(due process)를 보장받을 권리 및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최근)를 포함한 헌법 권리들을 표현하는 중심에 집(home)이 위치한다.  

정부 및 개개인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역인 집(home)은 종종 집 자체가 아주 명확하고 법적 결과들이 생성될 수 있는 확립된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집에 관한 법적 의미는 양면적이고 논쟁거리의 중심에 위치한다. 집이란 계속 발전하고 있는 우리의 법적 우주를 건설하고 틀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을 놓고 분투하는 장소이다.  

 

이전 시대에 존재했던 미국에서의 삶 안에서 집과 관련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줄곧 받아들여져 왔던 19세기 부르주아 집에 관한 이상향. 즉 여성과 가정 공간을 연관하는 것에 대한 절정에 대응한 페미니스트들의 도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생활에서 자란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란 작가는 1903년에 자신들의 능력을 개발하는 자유가 없이 집 안에 갇혀 지내는 여성들을 관찰했다. 길먼은 "벽, 마루, 의자, 테이블에 놓여 있는 괴상한 장신구 집합체와 특별히 조각된 가구, [여성] 자신의 몸 및 그녀의 자녀들의 미약한 몸에서부터 혐오스러운 공포감을 느꼈는데, 이는 집(house) 안에서 지나치게 먹기만 하고 충분한 일을 하지 않는 레이디에 관한 건강치 못한 반란의 표현을 뜻한다." 이러한 상상 속에서 대중적인 삶으로부터 여성의 사적 공간을 보호하는 것이 여성을 종속화시키는 기술로 둔갑하여 여성들을 미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성의 집(home)이 그의 성(城)인 것만큼 집은 또한 여성의 감옥이기도 했다. 따라서 집 안에 종속되어 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법적 유사물을 만들어냈는데, 그 유사물이란 바로 유부녀 법(law of coverture)이다. 코먼로(common law) 아래, 결혼한 여성의 법적인 정체성이란 그녀의 남편에 의해 "가려"졌던 결혼 후의 지위를 말한다. 결혼 후의 지위에 관한 법이 19세기 때 천천히 개혁되었지만, 아내와 집을 연관시키는 그 흔적은 지워질 수 없다.  

20세기 말에 시작된 집과 관련된 획기적인 개혁 운동은 폭력 문제에 그 초점을 맞추었다. 이 법적 개혁의 표적은 바로 집 안에서 종속화된 것들 - 단순히 개인적인 영역 속에서 여성을 가부장적으로 규제하는 형태가 아니라 집 안에서 일어나는 구타, 성폭행 및 위협의 형태로 종속되어 있는 것 - 이다. 길먼을 포함한 페미니스트들이 집을 보호하는 벽에 대하여 사악한 것으로 평가한 것처럼, 20세기 말의 페미니스트들 역시 어떻게 법이 보장하는 가정 사생활 자체가 가정폭력을 공공의 중재/개입(public intervention)으로부터 숨겨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했는지에 대하여 보여주었다. 그 벽은 여성들이 피해를 입는 동안 경찰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역할을 했다. 페미니스트 고전의 제목을 인용하자면, 집이란 바로 "무서운 사랑(terrifying love)"이 일어나는 장소인 것이다.  

집을 여성들이 성(城) 주인인 남성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장소로 이해하기보다는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으로 이해하는 것은 집에 관한 법적 문화의 비전 안에서 게슈탈트적 방향 전환(gestalt shift)을 필요로 한다. 이미 블랙스톤이 이야기한 주제 - 소위 말해서 집(house)의 기반, 안전보장, 테러 및 폭력 - 를 통해 이러한 변화는 이루어진다. 안전하고 친숙함을 담고 있는 집의 의미만큼이나 폭력적이고, 공포스럽고 궁극적으로는 범죄적인 것들이 두드러지는 것으로서 그 의미를 전환하는 것보다 더 비가정적인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난 40여 년간 페미니스트들은 집(home)이 법적 기관으로서 특별히 형법 정의 체제를 통해 인식되고 다루어지도록 변화를 추구했다. 이러한 운동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러한 개혁을 이루도록 만든 생각들은 법 관련자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새롭거나 급진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법적 독트린, 법 이론 및 법 관습 안에서 법 제정과 판결, 집행 및 법적 문화와 관련하여 지적이고 관념적인 파워로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그 생각들은 법 속에 들어가 있는 집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집 안에 있다는 것은 완벽하게 편안한 상태로 지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일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우리가 집과 법은 이러이러할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정도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생활을 위한 침범할 수 없는 공간으로서의 집에 관한 생각들은 기본 바탕을 제공하긴 하지만 전혀 이 생각을 방어하고 지켜내지는 못했다. 집에 관한 개념을 사용해온 법 관련자들(판사, 변호사 및 정치 관련 학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지난 40여 년간 일구어온 변화를 반영하기도 하고, 반대하기도 한다. 미국 내의 가장 낮은 하위 법원 - 지방 경범죄 법정들(local misdemeanor courts) - 에서 일상적으로 실시하는 기소사실인부절차(起訴事實認否節次, arraignment)에서부터 미국 대법원에서 진행되는 헌법 판결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집은 끊임없이 등장한다. 양면적 의미들이 법 체계 안에서 많은 시간을 들이며 변화하는 것처럼 아직까지는 집의 개념에 대한 사용은 불안정하고 불안하다.  

이 책은 집에 관한 탐험(exploration of home)이다. 책의 각 장에서는 형법과 연결된 현대 문제들의 범위 내에 집이 가지고 있는 법적인 의미가 변화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바로 집에 관한 생각들이 법적 문화(legal culture) 속으로 이동되고 새겨지는 과정과 그 결과물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각 장은 집과 경찰 사이의 관계 발전에 대한 판례 연구를 평행적으로 포함한다. 이와 관련된 최소 두 가지 관점(vision)은 집에 관한 법적 구조물이 그 바탕으로 삼고 있는 근본적인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즉, 타인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최종적 장소로서의 집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은 "집은 성(城)이다"라는 개념에 담겨 있다. 남성의 집이 그의 성(城)이라면, 오늘날 경찰은 집이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고 불가침한 곳으로 남도록 힘쓰고"집이 부여받은 형벌 면책권(impunity)이 위반되지 않도록" 지켜나가기 위해 위임된 군대와 같다. 또 다른 면을 살펴보자면, 성(城)의 비유는 정부 침입과 통제로부터 개인적 자유를 누리는 모범적 장소인 집을 일컫는다. 정부의 권한은 집의 입구에서 멈춘다. 지금 시대를 대표하는 헌법 사건인 로렌스(Lawrencev. Texas) 판례에서 대법원은 "전통적으로 정부는 집 안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두 관점은 모두 침입에 관한 염려를 표명하지만 각 침입과 정부의 관계 면에서는 각기 다른 장신구를 달고 있다. "경찰이 집을 보호한다."라는 첫 번째 관점은 침입자들로부터 보호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경찰은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집과는 거리를 유지한다)."라는 두 번째 관점에서는 정부가 바로 침입자가 된다. 첫 번째 관점은 주로 안전보장을 중요시하고, 두 번째 관점은 자유를 중요시한다. 겉으로 볼 때에는 상황에 따라 안전보장과 자유의 원칙이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경찰은 폭력으로부터 집을 보호해야 하지만, 서로의 동의 하에 행하는 성행위와 같은 사생활 면에 있어서는 집에 상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법의 전체적인 풍경 속에서 집에 관한 논의들이 진행된 과정을 살펴보면 첫째 패러다임이 둘째 패러다임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압과 학대를 대표하는 집의 이미지는 문화적인 우월성을 점점 확보해나가고 있다. 따라서 집이 벽 안쪽에 위치하는 종속되어 있는 것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된다는 생각은 법의 기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에 수반되는 기본적인 염려는 정부의 침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집에서 정부가 중재하기(개입하기)를 실패하는 것에 관한 염려이다. 마찬가지로 경찰이 집을 보호한다는 의무는 침입자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다른 가족 구성원을 보호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적어도 가난한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불균형적으로 경찰들의 존재가 더욱 잦아진 사실을 감안한다면, 집 안에서 경찰의 존재를 기대하는 것은 점점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목적은 닫힌 문 뒤에서 남편, 남자 친구 및 아버지로부터 남 몰래 행해지고 일어나는 피해를 방지함으로써 집을 최종적인 안전보장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인해 정부는 가정 공간을 통제(혹은 지배)하는 관행을 만들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오히려 정부는 보호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자율성과 사생활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하게 되었다. 집의 사생활이 폭력과 같은 연장선에 놓여 있다는 것에 관한 페미니스트의 비판은 법 체제라는 직물에 조각조각 함께 짜여 있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이 비판을 흡수한 후에도, 헌법 틀과 집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직관적인 관점 속에서 사생활이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로 남아 있다.  

집의 변화와 함께 범죄가 무엇인지에 관한 개념 안에서도 그 변화에 따른 전환이 일어난다. 범죄란 경계선 - 문자 그대로인 선이든 비유적인 선이든 혹은 물리적인 선이든 아니면 법적인 선이든 간에 - 을 넘어버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상상해 왔다면 현재는 범죄를 사적인 공간 안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한 사람이 종속화되는 것으로 점차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집의 상징을 바탕으로 하는 개인적인 권리가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둘러싸고 있는 법적인 경계선은 서서히 파괴되어 갔다. 

 

오늘날 가장 강력하게 법을 형성시키는 집의 개념은 무엇인가?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 "마음이 가는 곳이 집이다", 또는 "집이란 당신이 그곳에 갔을 때 당신을 무조건 받아들여 주어야 하는 장소이다"와 같은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집에 관하여 서서히 고개 드는 법적인 비전은 바로 실질적이거나 잠재적인 폭력에 관한 비전이다. 즉 집이란 범죄가 있는 곳이다.  

집이란 학대를 예고하는 종속화 장소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법적 독트린과 관행 및 논의는 점점 융합되고 있다. 이러한 법 관련자들의 생각의 발달로 말미암아 법은 정부와 개인 공간 사이의 관계 및 친밀성에 유념을 두어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법적 논의는 몇몇 예상치 못했던 결과와 함께 "집은 폭력(home-as-violence)"이라는 생각을 일반화하고 강화시키는 과정을 점차 반영한다. 집에 관한 논의가 풍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적 관행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공(公)과 사(私)가 법적으로 더더욱 비슷한 공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하여 나는 법이 집의 개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치와 이상(理想)에 관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법에 관한 페미니스트의 비판이 엄청나게 실용적인(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진보를 이룬 것을 보여주고, 그 비판이 현실 세계에 미친 영향들을 일일이 확인시키는 것에 대하여 피하지 않겠다. 이렇게 확인하는 것들 중에는 어떤 여성들을 보호하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정부와 비교할 때 여성과 남성의 자율성이 엄청나게 감소한 사실 - 특히 정부의 불균형적인 통제 대상이 이미 되어버린 인종 및 경제에 따른 민족 공동체 내에서 자율성이 감소한 사실 - 을 포함한다. 이러한 발달사항들이 과연 여성의 이익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인지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폭력에 대항해 형사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집의 입구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개혁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찬성하겠지만, 아마도 면밀히 살펴본다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그 개혁을 자극하는 생각들이 지속적이며 논리적으로(불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장한다는 사실은 이미 자율성과 사생활, 그리고 안전보장과 같은 귀중한 가치들과 어떤 면에서는 충돌하고 공존할 수 없다는 법적 현실을 생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설명하는 발전사항들은 다른 법적 개혁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권력의 분배에 영향을 미친다. "집(home)"이 무엇으로 변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효과와 집들이 과연 무엇이 되었는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또한 우리를 시민으로서 보호해주는 법적 구조물을 계속 만들어 가는데 바탕이 되는 가치와 이상향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집과 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선은 정말 이론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파괴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이 현상이 지금 나아가는 방향대로 일어나는 것에 대해 만족하는가? 이 책은 우리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이러한 현상에 대해 초점을 맞추려는 노력으로 만들어졌다.  

제1장은 코먼로(common law)에서 다루고 있는 주거침입관련죄(crime of burglary)와 집 범죄의 원형에 초점을 맞추고, 어떻게 법정들이 가정폭력을 집 침입에 관한 전형적인 범죄로 변형시켜 왔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제2장에서는 내가 소위 "정부 주도의 실질적 이혼(state-imposedde facto divorce)"이라고 이름을 붙인 현상, 즉 형법이 집 안에서 일어나는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새로 명령하고 통제하도록 만들어준 일상 가정폭력 경범죄를 다루는 관행을 살펴보도록 한다. 제3장은 "성(城)"에 관한 전통적 생각 자체를 폭력적 종속성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것과 국토 안전보장에 관한 비유에 융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운동, 즉 이 운동은 전미(全美) 총포 협회(National Rifle Association)가 강력하게 시작하고 발전시켜 추진한 정당방위법을 확장토록 했는데, 바로 이 과정에 대하여 전개해나갈 것이다. 제4장에서는 재산으로서의 집에서 시작하여 정부의 재산 획득 및 정당한 법적 절차에 관한 대법원의 최근 몇 가지 판례들을 정부가 집을 몰수하는 렌즈를 통해 살펴본다. 제5장은 집의 사생활에 관한 법적 상상 속에 존재하는 여성 인물들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남성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방패막이에 관한 생각과 연결해 사생활을 더욱 명확하게 정의하는 사법부를 해석하도록 한다.  

이 5개 장의 목적은 (각 장 따로따로든지 혹은 함께 묶어서든지) 집에 관한 가능한 모든 의미를 나열하고 주의사항을 덧붙이면서 철저하게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자료 - 코먼로 사건들에서부터 형사법원의 일상적 관행과 개혁적 입법 및 미국 대법원 판례 의견에까지 - 를 자세히 읽어봄으로써, 법적 문화(legal culture)가 발달된 여러 기간 동안 형성된 집중적이고 그 질감이 살아있는 집에 관한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다. 판례들을 통해 법적 변화를 분명히 밝혀낼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고, 각 판례들 역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흥미롭기 때문에 이러한 판례 연구가 진행되었다. 또한 우리의 법적 문화로부터 생겨난 뜻의 보화들을 우리의 양심에 머물고 있는 것들을 통해 수용해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판례 연구를 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법적 연구와 인류가 서로 교차되는 지점을 연구한 책이다. 책의 연구 대상은 법에 관한 문화적 담론(논의)이고, 이는 법의 합리적인 것과 정당화를 설명하고 실행하기 위해 법적 관계자들이 사용하는 계발적인 방법이다. 법적 본문 표현 중에 나타나는 생각들은 어떤 특정한 법적 결과의 원인이 되거나 그 결과가 피할 수 없는 결과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예측 가능한 정치 의제와 일관되도록 일치시키는 것도 아니다. 법적 본문에는 해석이 필요한 인식 가능한 수사학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법적 표현과 법적 관행 속에는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상징적인 개념들이 가득 차 있다. 법이 우리 삶을 규율하도록 만들어주는 이러한 생각들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 생각들에 다가가는 길은 바로 법이 담고 있는 다양하고 변하기 쉬운 표현 방식들을 면밀하게 해석하는 데에 있다. 문화생산물로서의 법이 우리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구별된 생각들에 대하여, 법적 독트린의 퍼즐 또는 이데올로기적 목표의 행진을 넘어서 (물론 완전히 이와 동떨어지게는 아니지만) 우리들에게 들려줄 이야기에 대한 매력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당당하게 보여주도록 하겠다. 집이란 법의 경계선을 넘어 아주 격렬하고 상상적인 인간적 투자가 된 장소이기 때문에, 집은 법적 연구를 위한 풍부한 광맥과 같은 장소이다. 동시에 법은 집을 만든다. 집은 우리를 만든다. 물론 우리가 그 법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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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를 읽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살았냐고 묻곤 한다. 난 내 삶을 살았던 것뿐이다. 누구에게든 삶이 있듯 내 삶은 그랬던 것뿐이다. 내가 지닌 이력 중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채 쉰둘. 살아 내려간다면 단 한 가지만큼은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꿈꾸며 85호 크레인, 169일을 맞는다.(2011년 6월 23일, 김진숙)

 
   

지금 알라딘에는 두 권의 <소금꽃나무>가 있습니다. 오른쪽은 여러분께서 익히 알고 계시는 책이고 왼쪽은 200여 일 가까이 계속되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과 더 오래 계속되는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한 한 출판사의 생각입니다. 희망버스와 희망기차가 남녘으로 내려가는 가운데, 많은 분들께서 <소금꽃나무>를 다시 읽고 권하는 방법으로 연대와 지지의 뜻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출판사에서는 더 많은 분들께 이 책을 전하기 위해 여러 분들의 응원메시지를 담은 한정특별판을 만들었습니다. 정가는 5700원으로 일반판의 반값에 가깝습니다. 저 역시 후마니타스 출판사의 생각에 동의하며 아래 김진숙 선생님의 메시지, 출판사 출간의 변, 여러 분께서 보내주신 지지 글을 모아 전합니다.

 

JINSUK_85 꼭 걸어서 내려가겠습니다!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주익 씨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주익 씨가 살아생전 나지막이 봤던 세상의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익 씨가 못해 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끓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소금꽃나무 독자들이 보내는 응원과 연대의 선물
그간 세상이 크레인 위의 그녀를 주목할 때마다 <소금꽃나무>를 찾는 사람들도 하나둘씩 늘어났다. 크레인 위에서 167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소금꽃나무>는 1,700여 명의 새로운 독자들을 만났다. 출간 이후 4년여가 지난 책이 다시금 이런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소금꽃나무>에 대한 독자들의 새로운 열망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독자들은 ‘김진숙’을 통해 <소금꽃나무>를 찾았지만, 이제 그것은 김진숙을 알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김진숙을 응원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출판사 게시판에도 독자들의 글이 이어졌다. “ <소금꽃나무>를 널리 알려 주세요. 김진숙 지도위원이 무사히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잠시 인터넷을 끄고 소금꽃 김진숙을 읽자”고 제안하는 기사를 비롯해 트위터를 통해 <소금꽃나무> 선물하기 운동을 펼치는 독자들도 있었다.

출판사는 독자들이 종이가 아닌 그녀의 살을 맞대고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출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소금꽃나무>에게 더 많은 독자를 찾아 주는 일이었다. 때문에 <소금꽃나무_한정특별판>은 바로 이런 독자들이 만들어낸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이전과 같지만, 뒷표지에 독자들이 김진숙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담았다. 또 저자가 169일째 출판사에 보내 준 짧은 글을 면지에 실었다.


우리, 지금 만나러 갑니다!
pmtsjc___김지도님 내려오시면 꼭 안아주신다는 약속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부르면 아픈 이름 다시  한번 불러 보면 희망이 되는 이름. 김.진.숙. 사랑합니다. 투쟁!
whaleandme___당신들 덕분에 앞만 보던 사람들이 옆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합니다.
leeyd6047___사람이 그렇게 길지도 않은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김진숙 지도위원님 우리 질긴 인연 천 년 만 년 이어갈라면 둘 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야 되겠지요. 김지도 내는 김지도 소속 대의원이야 명심하세요.
ahb174489___수문장입니다. 살아서 내려오신다는 '약속' 꼭 지켜 주세요.
younok707___당신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누나였고 지금도 누나입니다. 회사 동료가 아닌 당신은 언제까지나 가족입니다. 영원히 사랑합니다
assa76___당신이 이 땅을 밟으시는 날 따뜻한 당신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그 날을 위해 끝까지 지지합니다!! 당신을 그리고 노동자를..!!
jilyeong___감사합니다. 님들의 작지만 큰 외침..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한걸음 한걸음에 감사합니다. 함께이지 못해 늘 미안하고 안타깝습니다.. 마음만은 언제나 님들을 응원하고.. 언제나 함께이겠습니다.
ddol35___투쟁이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작은 희망들이 모여 꼭 결실을 맺으면 좋겠어요. 아자아자!!!
YILULI___김진숙 지도위원, 한진 중공업 노동자, 그리고 이 땅 모든 노동자의 소금꽃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열릴 때까지 손잡고 함께 가요.
imbarricade___나에게 한진은 무엇일까. 진숙쌤은 무엇일까. 양심이라기엔 너무 쑥스럽고, 실천의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건 너무 거창하다. 한진이라는 존재가 있어서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편하다. 한진이 있어서, 한진에 갈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ibchwm___저는 김진숙 지도위원님이 걱정되서 오늘밤은 여기 있어야 될 듯 내 새벽이나 마산 넘어가야겠네요 월차 또 쓸지 고민 중
kingwj___이길 때까지 함께 응원하고 지지하며 싸우겠습니다! 우리는 지지 않습니다!
CestLaVie218___하얗게 핀 당신들의 어제를 마음에 새깁니다. 우리들의 말갛게 피어날, 오늘의 웃음을 함께 만들어 가요.
changupdoctor___고생들 하셨습니다. 이젠 고생한 것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그날까지 건강하시고 화이팅하십시요.
shine0404___노동자의 새로운 희망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한진, 화이팅!^^ 사랑합니다
kissywonny___당신들은 혁명입니다. 당장의 생활고보다 앞으로의 노동자의 권리와 시민들이 알 권리를 먼저 몸소 희생으로 지켜 주시는 당신들의 뜨거운 가슴을 응원합니다
breadandrose___연대가 무기요 희망이 승리입니다. 많은 이들이 함께하고 희망을 굳건히 간직하고 있으니 힘내세요 ^^
미경___그가 완강히 버티고 선 그 위에 함께 서있지는 못하나 보석 같은 이 사람을 마음 다해 지지한다. 세상 모든 소금꽃나무들과 더불어.
Paranmom___당신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크레인보다 당신이 더 장엄해 보입니다
eunok0912___부끄럽고 죄송하지만 당신이 있어 다행입니다.
seunghyun_777___날개 없는 천사 김지도님, 천국에서 내려오시면 네팔 다시 한번 같이 가시죠^^ 짐은 제가 지겠습니다.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 꼭 같이 가요!
Gomttong___󰡔소금꽃나무󰡕를 읽는 내내 부모님 생각에 괴로웠다. 평생을 노동자로 사신 분들. 보여 드리고 싶은데, 망설여졌다. 편하지 않은 책이라. 망설이다 안방에 놔뒀더니 며칠째 그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시는 아버지. 나는 이제야 그분들을 아주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다.
청주시민 소종민 ___“가장 높이 나는 새는 가장 낮게 날 줄 안다.” 지금 우리의 새는 김진숙 지도위원입니다!
김현우___똘끼 충만한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바꾸는 시대입니다. 함께 달립시다.
윤영광___삶은 패배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홍진___캄캄한 어둠, 당신은 더 깊이 들어가 빛이 됩니다. 나는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웃으며 우리를 비춥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크레인 위, 서로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상희___긴장, 공포, 좌절 위에 있는 당신의 단호함과 신념을 봅니다. 당신을 통해 희망을 봅니다.
돌규___소금꽃은 염부 혼자 염전을 일군다고 피어나지 않습니다. 먹구름 몰아내는 햇빛, 잔물 일으키는 바람, 그리고 맑은 바닷물이 한데 어우러질 때 비로소 피어납니다. 햇빛, 바람, 바닷물이 되어야겠습니다. 김진숙과 한진 노동자들에게 결실을 맺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솔규___당신은 바보같이 투명하던 사내들의 거울입니다. 85호 크레인을 비추는 붉은 해는 우리를 깨우는 채찍입니다. 우리는 눈과 귀와 입을 통해 같이 있을 것입니다.
수환___미래를 오늘로 바꾸시는 선생님 덕분에, 정말 미래가 있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레알로망 만화가 이동슈___동갑내기 내 친구 김진숙~ 내려오면 예쁜 캐리커처 그려 줄게~ 즐겁게~ 우리 뜨겁게 만나자~
젤리___우리의 삶이 항상 투쟁과 분리될 수 없도록 내몰리고 있을지라도, 그래도, 기꺼이 싸우는 사람은 처절하지만 또 아름답습니다. 김진숙을 응원합니다.
국가공인 마상___하얀 종이에 희망이라 크게 써서 종이비행기를 접어 하늘로 날려 보냅니다. 김진숙님 당신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연서___가서 김진숙 아줌마를 보았을 때는 안쓰러웠고 걱정 됐어요. 그런데 아줌마 말을 들었을 때 멋지고 용감하다고 느꼈어요. 아줌마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힘이 났어요. 그리고 제일 좋았던 건 무섭지 않고 평화로웠던 거예요. 아저씨들도 친절히 대해 주시고, 밥도 해 주시고, 잠잘 곳도 마련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희망버스를 타서 배우고 온 것도 많고 사람들이랑 처음 보는데도 서로 친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저는 7월 9일에도 꼭 갈 거예요. 사람들이 많이 가서 김진숙 아줌마에게 힘을 줬으면 좋겠어요..아줌마, 꼭 이겨서 내려오세요. 내려오시면 만나러 갈게요.
세은___김진숙 아줌마가 85호 크레인에 있는 걸 봤을 때 떨어질까 봐 걱정됐어요. 김진숙 아줌마가 얘기할 때 정말 슬펐어요. 그때 정말 비정규직이 없어야 이렇게 집회를 안 하는데 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우리가 돌아오기 전이 가장 속상하고 걱정됐어요. 그래서 오줌을 30분마다 쌌어요. 왜냐하면 용역 깡패들이 들어와서 잡아가고 때릴까 봐 그랬어요. …… 김진숙 아줌마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김진숙 아줌마, 꼭 이기세요. 그리고 힘내세요. 아저씨들 꼭 이기세요. 그리고 힘내시고, 잘 지내세요. 다음에도 꼭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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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강간·강도 등 중범죄는 사형집행, 형량상승, 거세 등으로 근절될 수 있는가, 체벌은 학생들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성매매는 금지되어야 하는가, 혼인의 충실은 형벌권을 사용하여 지켜져야 하는가, 문학과 예술의 표현에 형벌권을 통해 개입하고 통제하는 것은 정당한가, 테러범에게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첨예한 사회적 논쟁사안이다. 검사 출신 변호사인 저자는 국내외의 사례와 문학작품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난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문학청년’의 기질과 소양을 가진 저자가 쓴 책이기에 술술 읽히고 흥미만점이다.(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이란 칼럼으로 세상에 알려진 금태섭. 벌써 5년 전 일이다. 검사를 그만두고 더 바빠진 그는, <디케의 눈>이란 책으로 권위에 가려진 법의 속살을 대중에게 알려줬고, 여러 방송에서 진행자로 활동하며 법 영역을 넘어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따뜻한 시선과 깊이 있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3년 만에 <확신의 함정>이란 책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최후의 결정권을 가지고 사회 문제 해결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는 '법'이 어떤 딜레마에 빠져 혼란스러워 하는지를 검사, 변호사 생활에서 겪은 생생한 사례를 바탕으로 펼쳐보인다. 과연 법과 정의는 '확신의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 딜레마의 자장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시선으로 법을 바라보고 평가해야 할까? '누구나 틀릴 수 있다'며 시작하는 이 책의 머리말을 소개한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스스로 항상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찰나의 순간이라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초임 검사 시절 특이한 피의자를 조사한 일이 있다. 범죄 내용은 간단했다. 길에 주차되어 있던 그랜저를 훔친 것이다. 단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애초에 차 주인이 주차한 곳과 피의자가 차를 훔친 곳이 달랐다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닌데, 예를 들자면 차 주인은 문을 잠근 채 용산에 차를 세워두었는데 피의자는 서울역 앞에서 문이 잠기지 않은 차가 주차되어있던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탐이 나서 훔쳐갔다는 식이다.
  범행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고, 착각이거나 단순한 착오가 아닐까 싶었다. 중간에 다른 사람이 훔쳤을 수도 있고, 혹은 차 문이 잠기지 않았었다고 하면 가벼운 처벌을 받지 않을까 해서 피의자가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피의자 주장대로 하더라도 엄연히 절도죄는 성립하니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특이한 점은 범죄 내용이 아니라 피의자 본인의 사정이었다. 30대 초반이었던 그는 10대 후반에 교도소에 들어가서 12년을 꼬박 복역하고 30대가 되어서야 출소한 사람이었다. 나온 지 몇 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길에 고급차가 서 있는 것을 보고 훔친 것이다.
  피의자가 흉악한 죄를 저질러서 12년이나 수감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10대 중반부터 이런저런 죄를 저질러서 교도소를 드나들다가 보호감호를 받아서 12년을 산 것이다. 그 시절에는 3회 이상 죄를 저질러서 실형을 받게 되면 7년의 보호감호에 처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보호감호는, 이름은 징역과 다르지만, 실제로는 징역보다 더 심한 처벌이다. 삼엄하기로 이름난 청송감호소에서 꼬박 7년을 살아야 한다.
  그 피의자는 19세에 징역 5년을 선고받았는데(징역 5년이 가벼운 형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지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다 보호감호 7년을 더해서 12년을 살고 31세에 출옥한 것이다. 내 앞에 온 피의자는 아무 말 없이 그야말로 하염없이 울었다. 나도 참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피의자는 당시 나보다 두세 살 많았는데 30여 년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초범이 아니니 최소한 3년은 구형을 해야 했다. 그리고 보호감호 청구를 해야 했다. 법률상 반드시 보호감호 청구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그 이전에는 반드시 해야 하게 되어 있던 시절도 있었다), 보호감호 요건에 해당하는데 청구를 안 하면 감사에서 지적받을 수도 있었다. 이 사건의 경우 검사가 보호감호 청구를 하면 판사가 기각하기 어려웠다. 재범의 위험성이 있으면 보호감호를 선고해야 하는데, 12년을 갇혀 있다가 출소 몇 달 만에 다시 차를 훔치는 사람에 대해서 재범의 위험성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징역 3년을 구형하면 법원에서는 아마도 1년 6월쯤 선고할 것이다. 보호감호 청구를 한 피고인을 집행유예로 풀어줄 수는 없다. 그러면 그 피의자는 징역 1년 6월 더하기 보호감호 7년, 도합 8년 6개월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10대에 감옥에 들어가서 30대에 나왔다가, 몇 달 후 다시 들어가서 마흔 살이 다 되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무슨 살인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하염없이 우는 심정이 이해가 갔다.
  변호인이 찾아왔다. “금 검사, 풀어달라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나. 보호감호 청구를 하면 꼼짝없이 또 10년 가까이 살아야 하는데.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잖아.”
  과거 전과를 찾아봤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다. 전산으로 죄명을 확인해봤는데 폭력, 절도 등 흔한 것이었다. 살인, 강간 등 엄청난 죄명은 없었다.
  나는 보호감호 청구를 안 하기로 했다. 원래부터 보호감호 제도에 대해서 위헌이거나 최소한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지만(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특히 이 경우는 너무한다 싶었다. 무슨 장발장도 아니고, 12년을 살고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주차된 차 한 대 훔쳤다고 또 10년 가까이 살아야 하다니.
  부장님이나 차장님의 결재도 통과했는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신 것인지, 혹은 보호감호 요건에 해당한다는 것을 놓치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피의자의 변호인이 연세 많으시고 사람 좋으신 분이었는데 찾아와서 무척 고마워하던 기억이 난다. 나까지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 인간적인 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후, 신문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차에서 데이트를 하는 남녀를 상대로 여러 차례 납치강도를 저지른 일당의 신원이 드러나서 그 중 몇 명은 경찰에 잡히고 남은 한 놈이 쫓기고 있다는 뉴스였는데, 도망 다니는 놈의 이름이 바로 그 피의자의 이름과 같았던 것이다. 특이한 이름이어서 틀림없었다.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보호감호를 받고 나오자마자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같이 범행을 저지른 공범들도 모두 보호감호소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다시 그 사건을 확인해봤다. 내가 보호감호를 청구하지 않자 판사도 그 친구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집행유예를 선고해줬다. 그는 그 길로 나가서 계속 납치 강도 행각을 벌인 것이다. 좀 더 자세히 확인해보니 그랜저를 훔친 것도 강도 행각을 위한 것이었다. 출소 직후부터 길에 주차된 차를 훔쳐서 데이트하는 남녀를 상대로 납치강도를 해오다가, 다시 똑같은 짓을 하려고 그랜저를 훔쳤는데 우연히 걸린 것이다. 그가(혹은 공범이) 훔친 차는 그 한 대가 아니었다. 과거의 수사 기록을 뒤져봤다. 폭행, 절도로만 생각했던 사건 내용을 자세히 보니 차를 훔쳐서 데이트하는 남녀를 상대로 폭행을 하고 돈을 빼앗은 것이었다. 범행 수법도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내 앞에서 말도 못 하고 하염없이 울던 피의자는 그런 놈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후회와 죄책감을 느꼈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매뉴얼대로 보호감호를 청구했더라면 변호인은 꽉 막힌 놈이라고 욕을 했겠지만 더 이상의 피해자는 없었을 것 아닌가. 얼마 후 그 피의자가 결국 검거된 후에 기자한테 전화가 왔다. 범인이 구속이 되었는데 왜 풀어줬느냐는 것이었다. 풀어주다니 무슨 말이냐, 나는 구속기소했는데 판사가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다, 라고 했다.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 후 나는 가끔 만일 당시 부장님이나 차장님이 결재 과정에서 보호감호 청구를 하라고 지시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을 하곤 했다. 검사가 된 지 채 2년이 안된 내가 지시에 따르지 않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보호감호 청구를 하지 않으면 감사에 지적을 받는데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다. 그러면 그 친구는 9년 가까이 수감되어 있었을 것이고, 나는 영원히 그 친구가 그런 놈이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물론 그 후 몇 년 동안 “○○○ 부장 참 지독한 사람이야. 이러저러한 사건에서 끝까지 보호감호 청구를 하라고 하더라구”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인간적인(!)’ 후회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추가적인 피해자는 없었을 것이다.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그 사건 생각을 한다. 과연 내가 진짜 잘못한 것이 무엇일까. 무조건 매뉴얼대로 보호감호 청구를 해야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생각 자체가 진짜 내 잘못을 짐짓 외면하기 위한 위선적인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진짜 잘못한 것은,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성실하게 팩트를 확인하는 일을 게을리 했다는 것이다. 나는 좀 더 끈질기게 사실을 확인했어야 한다. 분명히 피해자는 차 문을 잠근 채 용산에 주차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피의자는 서울역 앞에서 문이 열린 채 서 있는 차를 타고 갔다고 했을까. 피의자가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모순을 파고들었다면 피의자의 행적을 밝힐 수 있었거나 공범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
  또한 만일 보호감호를 받고 12년을 살고 나온 피의자의 처지를 동정해서 풀어주고 싶었다면, 과연 청송감호소에서 나온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왜 갑자기 길에 서있는 차를 타고 갔는지 좀 더 치밀하게 생각해 보았어야 한다. 사실 길에 서 있는 차를 보고 순간적으로 훔친다는 것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게 오래 수감생활을 했다면,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 교도소 근처는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은데 단순히 호기심이나 부러움으로 차를 훔쳤다고 한다면 한 번 더 생각해보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뻔한 사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거에 피의자가 저질렀던 사건도 좀 더 확인해 봤어야 한다. 조금만 더 시간을 갖고 찾아봤다면, 피의자가 예전에도 차를 이용해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을 알아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피의자가 그 그랜저를 훔친 진정한 동기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불쌍한 놈이 좋은 차를 타고 싶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이 사건을 겪고 나서, 나는 판단을 그르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선입견, 오만, 그리고 불성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7년간 보호감호를 받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물론 나쁜 것이다. 하지만 보호감호가 잘못된 제도라고 해서 그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팩트에 대한 판단을 게을리 하는데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척 보면 사건의 전말을 안다는 오만, 그리고 당연히 확인해야 할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게으름이 판단착오를 불러온 것이다.
  만일 내가 성실하게 수사를 해서 피의자가 당시 납치강도 행각을 벌이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보호감호 청구를 하지 않으면서도 피의자의 범행을 밝혀서 실형을 받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소신을 지키면서도, 사건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잘못을 했고 그 이후에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 했다. 나로 인한 피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가 잘 했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사건을 수사하거나 변론하다보면, 분명히 내 판단이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질 때가 있다. 의뢰인이 물론 가장 억울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도 너무 분해서 잠이 안 올 때가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신의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저 사건을 처리할 때 나는 내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틀렸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이 책은 누구나 틀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다양한 문제를 여러 가지 방향에서 바라보고 쓴 글이다. 앞서 본 사건에서 나는 사실관계를 실제와 다르게 파악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사실관계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에 판단해야 할 때도 똑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다. 역시 잘못된 선입견이 개입하면 누구라도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어떤 문제의 답을 찾으려 할 때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결론이라도 일단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더욱이 해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형존폐론,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 교육현장에서의 체벌, 종교와 문화의 충돌, 과학의 영역에 대한 법과 윤리의 관여 등은 한 마디로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어떤 의견이 옳은지 쉽게 말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나면 답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모든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고 모든 사람이 그 정답을 따라야 한다는 시각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다.
  상호 충돌하는 주장을 다양한 방향에서 분석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얄팍한 불가지론을 대안으로 내세우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답은 있다. 그러나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려들거나 서두른다고 해서 답을 빨리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답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법률가로서 무엇이 옳은가, 어떤 것이 정의인가를 고민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이론적인 해설이나 훈계조의 가르침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였다. 소설이나 영화 혹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면 아무리 간단해 보이는 일도 나름의 모순을 가지고 있고 그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눈이 깊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한 것을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서 늘어놓아 본 것도 그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양면성이 있고 나름의 딜레마가 있다. 해결하기 어렵고 복잡한 모순 속에서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나눌 수 있다면 글쓴이로서는 더 이상의 기쁨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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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da 2011-06-28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케의 눈> 잘 읽었는데, 이번 책도 머리말만 읽고 기대되네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8 17:48   좋아요 0 | URL
네, 본문은 단숨에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학교는 ‘물론’이 난무하는 곳이다. 수많은 금지의 규범과 그보다 더 많은 강제의 규범들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규범들의 공통점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규범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불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자꾸 이유를 물어보기 시작하면 대답은 점점 궁색해지고 규범은 힘을 잃기 때문이다.
  왜 학생들은 화장을 하면 안 되고 항상 머리는 단정해야 할까? 왜 학생들은 꼭 교복을 입고 학교에 와야 할까? 나는 학교에 대해, 세상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과 의심들을 동화로 풀어보고 싶었다. ‘세계 명작 동화’의 메시지와 학교의 메시지는 아주 비슷하다. 우리 사회가 미래 세대에게 바라는 것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거짓말을 하면 대가를 치르게 되니 항상 정직하라, 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고 샛길로 빠지면 곤경에 처하니 항상 정해진 길을 가라, 쓸데없는 허영을 키우는 것은 몰락으로 가는 지름길이니 언제나 삼가는 마음으로 생활하라…….
  이 책을 펼쳐 든 그대도 어쩌면 나처럼 불쑥불쑥 솟아나는 의문과 의심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쉬운 길을 늘 돌아가면서 남몰래 한숨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대에게 이 책의 이야기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대를 동화 속 멍청이들의 마을로 초대한다.(머리말 가운데)

 
   


동화를 텍스트 삼아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등 다양한 관점으로 살펴보는 작업, 이미 단상을 넘어 연구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분석이기에 특별히 놀랍거나 신선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동화가 선과 악을 나누고 고정된 역할을 부여해서 아이들의 자유로운 상상에 해가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그 동화가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든 읽히기 때문이다.  

'동화로 만나는 사회학'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는 21세기 한국에서 사회과 교사로 일하는 저자가 규범으로 가득 찬 학교, 그럼에도 이 학교에 꼬박꼬박 나와 자리를 지키는 학생들 사이의 갈등과 조정의 장면들을 여우와 두루미, 피노키오, 신데렐라 등의 서양 명작 동화와 한데 엮어 풀어낸다. 텍스트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주어진 상황 속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동화 속 멍청이들을 반면교사 삼아 학교와 규범이라는 텍스트 바깥을 상상해보자는 저자의 제안을 반갑게 맞이하며, 개미와 베짱이를 다룬 한 꼭지를 전해드린다.

 

한철 노래하며 사는 인생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미와 베짱이

 

죽거나 뉘우치거나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담장에는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라는 구호가 커다란 페인트 글씨로 써 있었다. 1970년대였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하는 것이 시대 정신이던 시절이었다. 게으름과 태만은 우리의 적이었으며, 근면과 성실은 최고의 선이었다. 그 시절  모든 학생들이 암송해야 했던 국민 교육 헌장도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며 근면, 노력을 강조하며 끝을 맺지 않았던가.
  그 시절 상상을 초월한 장시간 노동이 사회 전체적으로 가능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군사 정권의 막강 파워 덕분이었지만, 그 체제가 무조건 힘으로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사회 구성원 다수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설득 논리 또한 필요했을 것이다. 그 설득 논리의 연장선상에 <개미와 베짱이>가 있다.
  개미는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무더운 여름에도 예외는 없었다. 그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베짱이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덕분에 추운 겨울이 되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베짱이는 여름 내 노느라 겨울에 대비하지 못했다. 겨울이 되자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초라한 모습으로 개미네 집 문을 두드린다. 도와 달라고.
  개미는 어떻게 했더라? 베짱이는 어떻게 되었지? 어떤 책에서는 개미가 문을 열고 베짱이를 따뜻하게 맞아주되 앞으로 ‘열심히 살라’는 충고를 했다고도 하고, 이에 대해 베짱이가 참회를 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책에서는 개미가 문을 열어주지 않아 베짱이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떤 식의 엔딩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개미는 좋은 편이고 베짱이는 나쁜 편이라는 것. 좋은 편 개미는 승리하고 나쁜 편 베짱이는 패배한다. 죽거나 뉘우치거나.
 


지금은 베짱이의 세상인가? 


이제 세상에는 베짱이를 찬양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우리에게는 밥도 필요하지만 노래도 필요하다. 베짱이는 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술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짱이의 연주 덕분에 개미들은 일을 하며 시름을 잊지 않았던가. 베짱이의 연주로부터 즐거움을 얻었으니 개미들은 마땅히 베짱이에게 겨울을 날 보금자리와 양식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지를 얻게 되었다. 세상이 변한 듯하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쉽게 변하겠는가. 우리는 여전히 개미의 세상에 산다. 무언가를 증명한답시고 문제부터 들이대는 지나치게 선생스럽지만, 안심하시라. 이 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게다가 찍기도 가능한 객관식이니 논술 시험에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은 당신도 수월하게 답할 수 있다. 다음 물음에 답해보자.

만약 당신이 일을 안 해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돈을 얻는다면 그래도 계속 일을 하고 싶은가?
① 예. 생활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해
② 예. 일이 돈 이상의 의미가 있으므로
③ 아니오, 여가를 즐길 것.

강수돌의 <일중독 벗어나기>(메이데이, 2007)에 따르면 2003년~2005년에 이루어진 설문 조사에서 설문에 응답한 한국 노동자의 24.7퍼센트만이 일을 그만두고 여가를 즐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머지는 생활수준 향상과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일을 계속하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보여주었다. 이 질문을 미국, 일본, 독일 등 4개국 노동자를 대상으로 이 같은 질문을 했더니 일을 그만두고 여가를 즐기겠다고 답한 사람은  미국 59퍼센트, 일본 10.4퍼센트, 독일 43.1퍼센트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생활이 보장되어도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열에 일곱이 넘는 세상에서 생활도 보장되어 있지 않은데 깽깽이나 연주하고 있는 베짱이를 정말 진심으로 옹호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개미의 세상이다. 
 


베짱이의 삶을 지지하지만……
 

개미의 세상에서 베짱이 지지자들의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베짱이처럼 사는 삶도 가능하겠지만, 손가락질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몇 가지의 전제가 있다. 첫째,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렇다. 베짱이가 추운 겨울 도움을 구하기 위해 두드릴 문이 내 집 현관문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겨울을 위해 양식과 땔감을 모아 놓았지만, 그건 나와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다. 내가 베짱이를 위한답시고 내 가족을 위한 양식을 탕진한다면 그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둘째, 그 베짱이는 나와 무관해야 한다. 내 가족 중에 베짱이가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내 자식이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젊은 놈이 대책도 없이 취직할 생각도 안하고 깽깽이나 껴안고 살고 있다면 그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셋째, 베짱이도 베짱이 나름의 기여를 해야 한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감과 위안을 주는 예술 활동으로 기여를 해야 한다. 그런 기여를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아봐 줄 것이고, 문화 산업이 하나의 산업 분야로 정착해 있는 요즘 세상에서 그는 오히려 돈과 명예 모두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겨울날 개미네 집 문 앞에서 서성거릴 이유가 없다. 만약 그가 배고픈 예술가라면? 그건 그가 재능도 없는데 헛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빨리 정신 차리고 개미의 대열로 복귀해야 한다. 한마디로, 베짱이도 아닌 것이 베짱이인 줄 착각하지 말고 꿈 깨란 말이다. 
  다시 말해, 요즘의 세련된 개미 세상에서는 베짱이의 삶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개미에게 피해를 주지 않거나, 개미와 무관하거나, 개미에게 기여하는 선에서만 그렇다.
  그런데 이게 나쁜가? 개미의 삶이 뭐가 어떻다고? 열심히 일하고,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살겠다는데 왜 시비를 거는가? 
 


개미의 삶을 찬양하는 것에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   

개미의 삶은 나쁘다. 첫째, 그의 삶이 불순한 목적으로 찬양되고 있기 때문에 나쁘다. 왜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우리 사회에 그토록 널리 퍼졌겠는가? 노동을 찬양하고 게으름을 죄악시하는 것은 산업화를 겪는 모든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모습이다.
  1834년 영국에서는 구빈법(救貧法)을 만들었다. 이름을 보면 빈민 구제를 위한 법 같지만 사실을 게으름 추방법이었다. 이 법은 떠돌아다니는 민요 가수 등 연예인들을 범죄자로 취급했다. 한군데 진득하게 정착해서 매일매일 정해진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은 이제 살 곳을 잃게 된 것이다. 이렇게 까지 한 이유가 뭘까? 당연히 사람들이 일하기보다 놀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모두가 열심히 일을 해야 했을까? 사회에는 진정 일 안하고 놀고  먹으면서도 당당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유한계급이라 한다. 유한계급들이 더 풍족하게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잉여가 생산되어야 하는데, 기껏 생산된 잉여가 노래나 부르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니는 건달들을 먹이고 재우는 데 쓰인다면 분통터질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건달들이 마을에 오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일할 생각은 안하고 놀자판이 벌어지니 그 또한 답답한 노릇이고. 그러니 게으름을 범죄로 취급하고 죽어라 일하는 것을 천국에 가까이 가는 미덕이라 설파할 밖에.
  우리도 산업화 과정에서 유사한 일들이 있지 않았던가? 선량한 사회 풍속을 정착시키기 위해 성인들의 머리 길이며 치마 길이를 단속하기도 하고, 집에서 술 담가 먹지 못하게 하고, 농한기에 푼돈 놓고 벌이는 화투판을 도박으로 처벌하기도 하면서, 반듯한 노동 생활을 찬양하지 않았던가. 개미의 삶에 대한 찬양은 이 시절에 유포된 것이다. 그러니, 개미들이여, 내 원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개미의 선량한 노동이 오직 개미의 선량함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 노동의 의미가 더 많은 이들을 노동에 참여시키고 이들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재해석되고 배치되었다면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개미의 부지런함은 욕심 때문이다  

개미의 삶은 나쁜 이유는 두 번째로, 개미의 근면이 욕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원래 개미 우화에는 개미가 한때 이웃을 시샘한 나머지 그의 곡식을 훔친 농부였다는 이야기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 화가 난 제우스 신은 그 농부를 개미로 둔갑시켜 버렸다. 이솝은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그의 형체는 변했지만, 특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들판을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밀과 보리를 모아 자신을 위해 비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수렵 채취사회에 살고 있는데, 미래에 대비한답시고 당장 먹을 것도 아니면서 눈에 보이는 나무 열매란 열매는 죄다 따 모아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굶어죽는 누군가가 생겨날 것이고, 따 모아 놓은 나무 열매도 다 먹지 못해 썩어 버릴 것이다. 미래에 대비하여 열심히 일한 누군가는 사실은 이웃이 먹을 과일을 모아 자신을 위해(사실은 자신도 쓰지 못하면서) 비축한 것일 뿐이다.
  지금은 수렵 채취 사회가 아니니 해당되지 않는 얘기일까? 우리는 미래를 위해 무엇을 비축할 수 있을까? 쌀? 김치? 우리가 비축할 수 있는 것은 돈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돈을 비축해야 안심이 될까? 1억? 10억? 100억? 오늘의 소비를 위해 필요한 돈은 한계가 있지만, 내일을 위한 돈에는 한계가 없다. 얼마를 모아 두어도 미래는 늘 불안하고, 그러니 모을 수 있는 한 계속 모아야 하는 것이다. 더욱 안 좋은 것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충분히 모을 수 없는 현실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굶주림을 해결하기도 바쁜 이들이 더 많다.


 

 

개미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버렸다 

개미의 삶이 나쁜 이유 세 번째는, 개미가 미래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삶은 오늘의 행복을 갉아먹는다. 미래를 위해 사는 모습을 어떻기에 그러냐고?
  2학년 학생들에게 「경제」를 가르치다가 학급에서 한두 명 정도는 1학년 겨울 방학에 미리 고등학교 경제를 끝내고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어와 수학 공부에 온 나라가 매진하고 있는 현 시국에서 경제처럼 보잘것없는 과목에도 그처럼 과분한 관심을 보여 주니 정말 황송하기 그지없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미리 경제 공부를 챙겼다는 것은 이미 미리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놓았다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그러니 놀랄 밖에.
요즘 아이들은 뭐든지 미리 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초등학교 공부를 시작하고, 초등 고학년이 되면 중학 대비를,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교 대비를 한다. 준비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다음 학기에 배울 것을 이번 방학에 미리 공부하는 것은 선행학습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이 선행 학습 열풍을 선도하는 것은 단연 영어이다. 뱃속에서부터 영어 태교를 시작하여 걸음마와 함께 영어공부를 시작하는 아이들 얘기처럼 영어 공부와 관련해서는 괴담도 정말 많다. 가장 최근에 접한 영어 괴담은 C학원 괴담이다.
‘쉬운 영어’ 학원에 아이를 보내고 있던 한 엄마에게 다른 엄마가 충고해 주었다. 그런 학원 계속 보내면 애 영어 완전 망친다고. 그러면서 추천해 준 C학원. 일주일에 두 번 하는 C학원의 수업에 맞추어 숙제를 하려면 하루 네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제 아이는 초등 4학년, 고학년이니 마냥 어린애처럼 놀 수는 없지 않느냐고. 직장을 다니는 ‘쉬운 영어’ 엄마가 “저는 하루에 네 시간씩 아이 숙제를 봐 줄 시간이 없어요.” 라고 걱정하자, 곧바로 되돌아오는 처방. “원래 집에 있는 엄마도 그런 거 못해. 애랑 사이만 나빠지거든. 숙제 봐 주는 새끼 선생님을 둬야지.” 헉! 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돈을 내고 레벨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단다.
  왜 다들 미리 공부를 할까? 하나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야 아이가 상급 학교에 진학해서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내가 보기에 상급 학교인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은 조금도 편해 보이지 않는다. 상급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고생을 덜하기 위해서 미리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상급 학교에서도 고생스러울 과정을 더 어린 나이에 당겨서 공부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한창 자라는 나이에는 한 해 한 해가 다르다. 공연히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라서 하면 수월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미리 하느라고 몇 배의 고생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자꾸 앞당겨 살기를 권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바빠진다. 과정을 앞당겨 공부하려다 보니 아이들 앞에는 늘 가야 할 길이 멀다. 하루 네 시간씩 투자해야 따라갈 수 있는 학원의 교육과정을 따라가야 하는 아이들은 엄청나게 바쁜 일과를 보내야 한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공부를 잘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충분한 독서로 다져진 탄탄한 언어 능력(한국어 능력!)은 모든 공부의 기본이다. 빈곤한 언어 능력은 상급 학교에 진학할수록 아이의 발목을 잡게 된다. 영어 공부를 제 아무리 많이 해도 외국어로 영어를 학습하는 아이들의 영어 능력이 모국어인 한국어 능력을 앞서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독서를 즐기기에는 너무 바쁘다.  

 
개미는 안전만을 추구한다 
 

개미의 삶이 나쁜 네 번째 이유는 개미는 안전한 삶만을 바라기 때문이다.
  세상 어떤 선택을 하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안전한 삶의 대가는 도전 없는 삶이다. 베짱이가 도전으로 가득한 위험도 높은 일을 선택했다. 당연히 그의 미래는 불안하다. 하지만 베짱이는 삶의 한 시기를 온전히 자기가 원하는 일에 바쳐 충만함을 얻었다. 인류는 모두 이렇게 자기 삶의 한 시기를 온전히 자기가 원하는 일에 바친 사람들,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
모차르트가 노년의 안정된 삶을 보장받기 위해 충실한 궁정 악사로 살았다면? 체 게바라가 다가올 겨울의 굶주림이 두려워 병원을 개업하고 소화불량이나 감기 환자에게 처방전이나 발급하면서 살았다면? 그 어떤 상상도 이보다 더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비극적이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그 베짱이가 모차르트도 아니고 체 게바라도 아니라면? 그저 철모르는 게으름뱅이에 불과하고 개미들에게 아무것도 기여한 것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재능도 없으면서 설치고 있을 수도 있고, 대열을 승리로 이끌 능력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들이 어떤 일을 할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폐를 끼치고 누군가에게는 은혜를 베풀며 살아간다 


가난한 화가가 있었다. 어찌 어찌 그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이웃의 농부가 약간의 돈을 융통해 주어 그는 끼니와 그림 재료를 장만할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그림 몇 점을 가지고 농부를 찾아가 지금은 별 볼 일 없지만 앞으로는 비싸게 팔릴 수도 있는 작품이니 받아달라고 했다. 자비심 많은 농부는 거절했다. 그냥 선의로 한 일이니 그림은 도로 가져가라고. 내게는 그 그림이 필요 없다고. 
  공짜로 주겠다는 그림마저도 거절당했던 이 ‘가난한 화가’는 누구일까? 빈센트 반 고흐이다. 그는 한 번도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공장에서 일하지도 않았다. 동생에게 빌붙어서 겨우 겨우 살면서 오직 그림만 그렸다. 그 시절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어떤 개미가 고흐 베짱이를 손가락질할 것인가.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폐를 끼치고, 누군가에게는 은혜를 베풀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개미와 베짱이도 서로에게 폐도 끼치고 은혜도 입히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 사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되려면 한철 노래하며 사는 인생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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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saurso 2011-06-2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 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자식 인성교육은 집에서만 시키는 것. 학교에서 괜히 인성교육 한다고 꼴깞 떨다가 사고 치는 거'라는 어떤 학부모의 글을 읽고 한숨이 나왔는데. 그러니까요. 원래 우리는 서로 폐를 끼치고 은혜를 입으면서 사는 거니까요.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4 12:02   좋아요 0 | URL
아, 오묘한 댓글에 장단을 맞추기에는 제 베짱이스러움이 부족하군요. 맞습니다, 서로 폐츷 끼치고 은혜를 입으면서 사는 거니까요, 정도로 맞장구를 치겠습니다. ^^

시시포쑤 2011-06-24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 같은 베짱이들은 어떻게 살라고 하는 세상인지...ㅎ
'개미'만 옳은 세상이 아님을 재밌게 이야기해주는 거 같습니다...
'죽지 머'에 완젼 공감하고 갑니다~~ㅎㅎ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4 12:02   좋아요 0 | URL
아, 역시 글보다 그림... ㅋㅋ

뚝님 2011-06-2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적 동화속에서 보던 개미와 베짱이는 원래 이런 모습이었군요.. 사회학적인 관점이라고 하지만 이미 알고있었던 동화들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보는 것 같아 재밌습니다. 강추!하고 갑니다.

인문MD 바갈라딘 2011-06-24 16:42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추천 옆에 '강추' 버튼을 따로 만들어야겠습니다. ^^

러브러브 2011-06-2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베짱이스러움이 모자란 것 같아요.
얼마전 학교 다닐때는 친하지 않았던 동창을 만났습니다.
베짱이의 선두 그룹에 있던 그 친구가 외국물 먹고 돌아와 잘 나가는 모습 보니깐
뭔가 맘속에서 옳지않은 기운이 스멀 스멀 ㅋㅋ
공부 밖에는 몰랐던 (하하! --;)제가 참 짜증스럽더군요!
뒤집어 보는 동화책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조금은 베짱 튕기며 살았을텐데요!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세상이어야 2011-06-2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긴,
만약에 우리 선조들께서 집안이나 자기 안위만을 생각해서 의병활동이나 독립운동등을 전혀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나란 어떻게 돼있을까요?
역사는 의미있는(?) 일들만 기록하고, 인류사회는 그런 자들을 인정해줍니다.

역시, 모~든 걸 잘하는.. 착하고 일 잘하며 똑똑하고 효자인 사람은 나기 어렵단 현실! 인정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