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헤겔이라는 거목이 독일 출신이어서 그런지, 철학 하면 독일, 독일 하면 철학을 떠올리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도 그런가 하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독일 철학사를 다룬 책을 찾아보면 대략 이 정도인데, 앞서 말한 명성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던 차에 잘 알려진 독일 현대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부터 현대의 요나스와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독일어로 수행한 독일 철학의 역사 전체'를 정리한 <독일 철학사>를 썼고, 곧 한국어판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도착해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입수했다. 옮긴이의 말 일부로 비토리오 회슬레가 누구이면, 이번 책이 어떤 내용인지 간략히 소개하고, 본문 1장 '도대체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그리고‘독일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를 미리 공개한다.

 

 

 

 

 

 

 

 

 

 

 

 

 

 

[옮긴이의 말]

비토리오 회슬레는 누구인가?

저자 비토리오 회슬레는 1960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나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진리와 역사—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까지의 발전에 대한 범례적인 분석에 비추어본 철학사의 구조에 관한 연구〉(1984)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이〈진리와 역사〉로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로부터 “2500년 서양 철학사에서 드물게 나오는 천재”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후 뉴욕 신사회연구소의 교수, 에센 대학의 교수 및 하노버 철학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했으며 1999년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노터데임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13년에는 프란체스코 교황으로부터 교황 아카데미에 초빙을 받기도 했다.
  회슬레는〈진리와 역사〉이후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인〈헤겔의 체계—주관성의 관념론과 상호 주관성 문제〉(1988)를 비롯해《생태학적 위기의 철학—모스크바 강연》(1990),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책임》(1990), 《근대 세계에서의 실천철학》(1995), 《철학사와 객관적 관념론》(1996), 《도덕과 정치—21세기를 위한 철학적 윤리학의 기초》(1997), 《객관적 관념론, 윤리학, 정치학》(1998), 《철학과 과학》(1999), 《플라톤 해석》(2004), 《철학적 대화—시학과 해석학》(2006), 《이성으로서의 신》(2013) 등의 수많은 저서와 편저서 그리고 논문과 강연을 통해 이론철학과 실천철학, 철학의 역사, 철학적 신학, 과학과 예술을 비롯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펼치고 있다. 회슬레의 저작은 대부분 출간하자마자 유럽과 미국의 철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여러 언어로 옮겨졌으며, 몇몇 경우에는 회슬레의 주장을 주제로 연구 논문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회슬레의 저서와 논문으로는《죽은 철학자들의 카페》(김선희 옮김), 《헤겔과 스피노자》(이신철 옮김), 《환경위기의 철학》(신승환 옮김), 《객관적 관념론과 그 근거짓기》(이신철 옮김), 《헤겔의 체계 I》(권대중 옮김), 《비토리오 회슬레. 21세기의 객관적 관념론》(나종석 옮김),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책임》(이신철 옮김)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회슬레의 철학 사상에 대한 여러 연구 논문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옮긴이는 지금《철학적 대화》를 번역하고 있는데, 방대하고 난해한 저작이긴 하지만 하루빨리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독일 철학사》개괄
회슬레는 이《독일 철학사》에서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독일 철학의 역사에 대한 개관을 제공한다. 요컨대 독일 철학사의 진행을 유럽에서 이뤄진 그 밖의 철학사와 분리하는 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정당한지에 대한 물음을 해명하는 데서 시작해 몇 세기에 걸친 철학의 도정을 추적한다. 이 책은 원전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독일 철학 전체에 대한 해석인데, 옮긴이가 알기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부터 현대의 요나스와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독일어로 수행한 독일 철학의 역사 전체에 대한 서술은 우리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철학사 구상의 전개다.
  회슬레의 이러한 새로운 독일 철학사 구상에 따르면, 독일 철학의 특수한 도정은 중세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서 종교 개혁을 통해 새로운 강조점을 제시하는데, 종교 개혁은 바로 그것이 지닌 반-철학적 논점으로 인해 사유의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며 독일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철학과 문헌학의 결합을 산출한다. 라이프니츠와 칸트 그리고 18세기 후기 정신 과학의 정초는 피히테와 셸링, 헤겔의 독일 관념론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의 전제이다. 독일 관념론에 이어 쇼펜하우어,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및 지금까지의 이성 형이상학의 급속한 해소가 뒤따르며, 프레게와 논리실증주의, 신칸트학파와 후설 현상학에서의 철학의 새로운 근거짓기는 20세기 초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도로 서술된다. 그에 이어 20세기 전반부의 국가사회주의 철학(마르틴 하이데거, 아르놀트 겔렌, 카를 슈미트)과 마지막으로 20세기 후반 독일연방공화국의 철학(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카를-오토 아펠, 위르겐 하버마스 그리고 한스 요나스)이 따라 나오는데,‘독일 정신’의 역사 전체에 대한 회고로 이해할 수 있는 이《독일 철학사》는 흥미진진한 서술과 핵심을 찌르는 판단을 결합하는 가운데 마침내 21세기에 독일 철학의 생존과 관련한 조심스러운 회의로 끝을 맺는다.

 

 

 

[1장. 도대체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그리고‘독일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아이는 독일인이 작가와 사상가의 민족이라는 것을, 최소한 그랬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 철학은 전 세계에 독일의 음악과 문학작품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물음에‘예’라고 대답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독일어로 말하는 수많은 철학자가 존재했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들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름이 P로 시작되는 수많은 철학자가 존재하지만, ‘이름이 P로 시작되는 철학자들의 역사’는 특별히 의미있는 기획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거기에는 정신적 유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개별적 대상, 가령 한 사람의 삶에서 지속적인 것과 논리 정연한 발전을 인식함으로써만 그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으며, 다수의 사람이 공동 주제로 연계되어 있어야만 그들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 플라톤(Platon, BC 428/7∼BC 348/7)에서 프로클로스에 이르는 고대 플라톤주의의 역사는 플라톤에 대한 특수한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 및 제도와 구별되는 사람과 제도의 역사다. 그러나 모든 독일 철학자에게 그리고 오로지 그들에게만 공통된 어떤 것, 예를 들어 하나의 방법과 하나의 주제가 존재하는가? 최소한 독일 철학의 발전은 고유한 법칙을 지닌 자기 내부에서 완결된 생기 사건이었는가?
  마지막 물음에서 시작하자면, 대답은 명백히 부정적이다. 철학사에서 의미와 연관을 추구하는 사람, 철학사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유럽 철학사를 하나의 통일로서 고찰해야만 한다. 〈근세철학의 역사에 대하여(Zur Geschichte der neueren Philosophie)〉라는 자신의 1827년 뮌헨 강의를‘철학에서 국민적 대립에 관하여 ’라는 장으로 끝을 맺은 프리드리히 셸링(Friedrich Schelling, 1775∼1854)은 분명히 종교적 진지함과 선험주의(Apriorismus)를 독일 철학이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이웃 철학, 그러니까 프랑스 철학 및 영국 철학과 구별되는 점으로 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참으로 보편적인 철학은 하나의 개별 국민의 소유물일 수 없다. 어떤 하나의 철학이 여전히 참된 철학이 아니라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다.”게오르크 헤겔(Georg Hegel, 1770∼1831)과 셸링을 프랑스에 알린 프랑스 철학자 빅토르 쿠쟁은 애국주의적 촌뜨기들로부터 적을 조국에 끌어들인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정당하게도 철학에는 진리 이외에 다른 조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사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는 카탈루냐 사람 라이문두스 룰루스 없이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 1646∼1716)는 프랑스 사람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와 네덜란드 사람 바뤼흐 드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 없이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스코틀랜드 사람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과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사람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또 이 세 사람 모두는 서로 다른 형식으로긴 하지만 고대 철학의 고유한 사유와도 관련이 있었다. 아니, 그리스도교 중세 철학과 관련해서는 이슬람과 유대 사유의 영향도 중요했다. 이를테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28)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와 똑같이 자주 마이모니데스 및 아베로에스와 대결하지만 또한 페르시아 사람 아비켄나와도 대결하며, 지구화한 우리 세계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보다 더 자주 다른 문화권의 사상가들에 대해 논의한다. 요컨대 독일 철학의 고유한 역사를 박제화하는 것은 사유의 세계 공화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시 연관들을 보지 못하게끔 하거니와, 그렇게 만들어진 독일 철학의 역사는 분명히오직 세계 수학의 비자립적 부분으로서만 존재하는 독일 수학의 역사와 비슷하게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독일 철학자들에게만, 또는 최소한 그들 모두에게만 공통된 특징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확실히 18세기의 독일 철학 거의 전부는 계몽(Aufklärung)의 결정적 이념을 수용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의식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계몽은 그 분야 최고의 새로운 역사학자인 조너선 이즈라엘이 보여주었듯 철저히 유럽적인 현상이었다. 그러한 이념은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향작용사적인 연관과 실재적인 이념사적 상호 관계는 여러 국민을 포괄했다. 역으로 개별적인 독일 철학자들은 서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가령 무엇이 칸트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를 결합하는가? 두 사람 각각을 흄과 결합하는 것이 둘을 서로 결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러므로 ‘독일 철학(deutsche Philosophie)’이란 다름 아닌 정신적으로 수준 높은 동일성을 창출하고자 하는 독일 국민과 독일 국민국가의 욕구에 힘입은 인위적인 구성물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떠오른다. 《독일 정신과 기지(Deutscher Sinn und Witz)》(1828)나 《독일 고전 사상가들의 정신(Geist deutscher Klassiker)》(1850)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책들이 19세기 전반부에는 여전히 드문 반면, 그 세기 후반부에는 독일 통일과 관련해 늘어나고〔《독일 정신과 독일 검(Deutscher Geist und deutsches Schwert)》(1866), 《엘자스의 독일 정신과 독일 특성(Deutscher Geist und deutsche Art im Elsass)》(1872), 《독일심정과독일정신(Deutsches Herz und deutscher Geist)》(1884)〕20세기 전반부에는 그야말로 홍수를 이룬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독일 정신을 추구한 것은 우리가 오늘날 기껏해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만 다루는 책들, 이를테면 히틀러를 후원하고 그에게서 경탄을 받은, 유대인 출신의 잘 알려진 반유대주의자 아르투르 트레비취의 《독일 정신 또는 유대교: 해방의 길(Deutscher Geist—oder Judentum: der Wegder Befreiung)》(1919) 같은 책들뿐만이 아니다. 아울러 에른스트 트뢸취와 한스 바론 그리고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티우스 같은 뛰어난 학자들도 독일 정신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그사이 독일 정신을 다룬 저술이 뜸해진 것은 단지 국가사회주의의 재앙하고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재앙 이후 독일 정신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철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기록은 토마스 만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Doktor Faustus, das Leben des deutschen Tonsetzers Adrian Leverkühn, erzählt von einem Freunde)》(1947)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 유럽연합 같은 초국가적 통일체가 형성되고 그 본질이 지구화인 시대의 자기 이해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획기적인 전환은 다만 오늘날의 독일 철학에 대해 일군의 외면적으로 결합된 대상들 그 이상인 독자적 형성물로서 언급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점이 또한 과거에 대해서도 타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독일 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다면 바로 그게 과거의 것인 까닭에, 이제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좀더 먼 거리와 객관성을 가지고 추적할 수 있다. 사실 중세 말 이래의 다양한 서유럽 문화를 연구하는 정신사학자는 몇몇 유럽 문화에서 세계에 대한 일정한 문제 제기와 접근 방식이 다른 문화에서보다 더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쉽지 않다. 분명 모든 문화에는 항상 다른 문화의 주된 흐름에 자신의 것에 대해서보다 더 가까이 놓여 있는 예외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의 문화에 종종 다른 문화의 그것과는 다른 세계관적 주된 흐름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다. 이런 점은 바로 곁의 이웃보다는 다른 대륙의 사람들과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자주 의사소통하는 인터넷 시대에는 급속히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구술 문화에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존재하는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결실 있는 모든 직접적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며, 이런 점은 다수의 그러한 상호 작용에 대해 또한 문자성(文字性)의 발생 이후에도 여전히, 아니 20세기에 들어서까지도 타당하다. 확실히 다른 문화에서 온 책과 다른 나라 학자와의 편지 교환은 중세와 근세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는 자기 문화에 속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 비해 양적으로 열등하다. 아니, 근세 역사가 결코 정신적 지구화의 연속적 증대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중세와 비교해 근세의 특징을 이루는 의사소통과 운송 수단의 진보에는 다른 한편으로 중세와 근세 초기의 공동 학문어(Wissenschaftssprache)인 라틴어의 상실이 맞서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학문어인 영어의 발생 덕분에 현대는 많은 측면에서 19세기보다 중세에 더 가깝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흄은 독일어를 못했고, 칸트는 영어를 못했다. 1820년대에도 오로지 아주 소수의 영국 지식인만이 독일어를 읽을 수 있었다. 확실히 근대 언어 중에서 프랑스어는—물론 중세의 라틴어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지배적이지는 않았지만—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교양인들의 공용어였다. 어쨌든 에드워드 기번도 자신의 첫 번째 책을 프랑스어로 썼다. 흄이 비로소 자기의 주요 저서를 영어로 집필해야겠다고 확신한 것은 7년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후 영어의 중요한 미래를 예언한 셈이다. 국민이 일차적 동일성 요소로 떠오름에 따라 의도적으로 강화된 언어 장벽이 국민국가의 시기에 철학적인 국민 문화를 산출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개연적이다. 이런 점은 철학이 복잡한 방식으로 전체로서 문화와 결합되어 있는 만큼 더욱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개별 인간의 최종 목표의 해명은 물론 집단의 그것도 철학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의 계몽철학이 분명히 유럽의 계몽철학과 공동의 특징을 지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독일어 사용을 넘어서 그것을 이웃 나라의 그것과 구별해주는 특수한 형태화를 획득했다는 작업가설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함축한다. 이런 점은 헤게모니를 장악한 독일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인구가 가장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종교적 신앙 고백, 즉 독일 정신을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게 주조해낸 루터교 출신인 만큼 더욱더 개연적이다. 그들의 성장 배경인 루터교는 또한 칸트와 니체에게 공통된 특징 가운데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앞의 사상가로부터 뒤의 사상가로의 이행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필요했던 유일한 징검다리 인물인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독일인이었다.〔독일 정신을 형성한 루터교의 엄청난 중요성 때문에 나는 한참 동안 종종 베를린에서 지냈고, 가령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를 독일어로 인용한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를 편입할 것을 고려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키르케고르는 독일어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특수하게 덴마크적인 환경에 대한 지식 없이 오로지 칸트와 헤겔만을 다시 수용해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이 책의 관심사를 설명했다. 목표는 독일 철학에 대한 간결한 개관, 이를테면 항공사진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면서 이 철학을 다른 유럽 국민의 철학과 구별 짓는 특유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 정신에는 결정적으로 정신 개념(Geistbegriff)에 대한 추사유(Nachdenken)가 속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일 철학의 모든 전환에서는 그것 없이는 역사를 현실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럼직한 발전 노선이 명백해야 한다. 이 책이 지향하고 있는 독자는 일차적으로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일반적인 교양 시민이다. 이 책은 예를 들어 수학자와 법학자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까닭에, 그때그때마다 그런 분과에 속하는 어떤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해를 포기했으며, 비록 내가 이차 문헌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인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끔은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대부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인용문의 정서법을 현대화했다. 사후에 출간한 텍스트의 경우 비록 잘 알려져 있는 제목이 나중의 사람들로부터 유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잘 알려진 제목에 따라 인용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박식한 세부 사항이 아니라 커다란 노선이다. 독자는 이차 문헌의 또 다른 책에 많은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독일 철학의 고전적 사상가들 자체에 대해 읽도록 고무되어야 한다. 내게 본보기가 된 것은 하인츠 슐라퍼의《독일 문학 소사(Die kurze Geschichte der deutschen Literatur)》(2002)였다. 물론 나는 항상 하인리히 하이네의 따라잡기 어려운 천재적 저작《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1834)를 염두에 뒀다. 하겐 슐체21의 뛰어난 역사학적 논고《도대체 독일 역사는 존재하는가?(Gibt es überhaupt eine deutsche Geschichte?)》(1998)가 지금 이 1장에 미친 영향은 명백하다. 내 책은 철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전제하지 않으며, 복잡한 기술적 논증에 대한 서술을 의식적으로 포기한다. 철학에서는 그러한 논증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러한 논증도 문제되는 까닭에, 이 책은 철학사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념사학적이다.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철학이 불러일으키거나 개념화한 의식사적 변화이다. 만약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독문학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여기서 독문학(Germanistik)은 단순히 독일 문학만이 아닌 독일 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학문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또한 언제나 거듭거듭 독일 문화의 다른 성취, 특히 다른 문화의 그것과 다르고 독일 철학과 어렵지 않게 연관시킬 수 있는 문학과 정신과학의 다른 성취도 참조한다. 그에 못지않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독일 철학사와 정치적 역사의 연결이다. 독일 정신의 종교적 전제는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데, 나는 독일 신비주의로부터 종교개혁으로의 도정과 루터교의 고전 독일 철학으로의 변형 및 19세기에 이루어진 독일의 탈그리스도교화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 책은 또한 서유럽 근세의 틀 안에서 독일 문화의 특수한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이것으로 짧은 이 개관을 규정하는 두 가지 선택 기준 가운데 하나를 언급했다. 그러나 무엇이 독일 철학의 특수한 도정을 해명할 수 있는 저작들을 선택하는 출발 자료인가? 도대체 무엇을 독일 철학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이 단순한 물음의 어려움마저도 독일이 뒤늦게야 정치적으로 통일되었다는 점, 아니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일연방공화국 외부에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 독일어를 말하는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앞에서 결합 지절로서 언어에 관해 말한 것에 근거해 내게는 언어가 가장 중요한 정의 기준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물론 첫째, 오스트리아 철학자들도, 심지어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 1885∼1971)처럼 독일어로 저술하는 헝가리 철학자까지도 독일 철학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둘째, 오늘날에는 독일에 속하지만 그들의 시대에는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 일부인 영토에 살았던, 오로지 라틴어로만 저술한 철학자를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독일 출신 중세 철학자 중 압도적 다수가 여기서 의미하는 독일 철학에 속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고유한 하위 그룹을 형성하기에는 다른 중세 철학자들과 충분히 구별되지 않으며, 또한 고전 독일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도 못했다. 독일의 철학적 언어를 최초로 창조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중요한 예외다. 따라서 여기서 의미하는 독일 철학은 주로 1720년부터 2000년까지의 시대를 아우른다. 나는 1770년부터 1930년까지의 특별히 혁신적인 시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물론 나는 분명 일차적으로는 독일어로 저술했지만 그와 더불어 때때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특히 격식을 차린 학문적 기회에 여전히 사용한 오랜 학문어인 라틴어와 유럽의 문화어인 프랑스어 또는 새로운 학문어인 영어로 쓰기도 한 사상가들의 비독일어 저작도 언급했다. 칸트의 라틴어 저술이나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의《철학의 빈곤(Misère de la philosophie)》(1847) 그리고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의《생명의 현상(The Phenomenon of Life)》(1966)은 모두 독일 철학사에서 분리할 수 없다. 라틴어로 쓴 자격 논문은 독일 대학의 본질적 구성 요소였다. 프랑스, 벨기에, 영국으로의 망명과 프로이센 국적 포기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계속해서 독일 문화에 뿌리박고 있었다. 아울러 독일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지막으로 요나스는 앞서 언급한 자신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 협력했으며,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 위대한 저작을 모국어로 저술했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나는 단지 이따금씩만 독일어로 글을 쓴 두 철학자를 여기서 다뤘다. 한 사람은 자신의 저작 대부분을 (학문적인 대중이나 학자는 아니지만 교양을 갖춘 대중을 위해)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저술한 라이프니츠다. 왜냐하면 그의 사유는 칸트 철학의 출발점을 형성하며, 아니 누구보다도 라이프니츠에 의해 고무된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가 독일의 철학적 전문어를 형성하지 못했다면 여기서 정의한 언어적 의미에서 독일 철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를 도저히 건너뛸수 없었다.
  사람들은 만약 우리가 언어적 기준 대신 영토적이거나 민족적 기준을 근저에 놓는다면 문제가 사라질 거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쿠자누스와 라이프니츠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독일어가 그들의 모국어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가 본래의 프로이센이 속하지 않았던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를 결코 밟아본 적이 없었다는 점을 전적으로 도외시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기준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위적 경계를 긋고 있다는 반론을 반복할 수 있다. 국가를 포괄하는 공통된 학문어가 존재하는 한 정치적 형성물에 따른 경계 긋기는 대단히 자의적이다. 독일 철학자들을 결합해주고 또 사람들이 독일 정신의 개념을 추구할 때 염두에 두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추정은 어떤 인과적 메커니즘이 이 정신의 주창자들을 결합할 때에만 처음부터 잘못이 아니거니와, 그러한 것은 언어에 의해, 그것도 철학에서는 모국어가 아니라 학문어에 의해 가능해지는 특별히 집중적인 수용이며 아울러 계속해서 그러하다.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인 것은 민족이 아니라 개인과 그들의 (사실상 종종 사회적으로 공유한) 속성이다. 오로지 공동의 언어적, 종교적, 정치적 지배 같은 사회적으로 공유한 속성의 증대에 근거해서만 민족 같은 어떤 것을 형성할 수 있으며, 또는 그것들이 쇠퇴할 경우 다시 해소될 수 있다.
  우리는 독일의 역사를 1871년의 독일 통일에서 시작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800년 이래로 강력한 독일 국민의식이 형성됨으로써 많은 이들이 공동의 국가를 열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한편으론 이웃 나라들의 발전에 의해 환기되었고, 다른 한편으론 가령 1760년 이래로 독일어권 문화가 그것을 다른 유럽 문화와 구별해주는 길을 발견했다고 하는 느낌을 표현했다. 이 새로운 길은 독일 역사의 이전 시기를 다시 수용함으로써 생겨난 게 아니었다. 독일 중세나 심지어 초기 게르만에 대한 포괄적 관심은 19세기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중고지 독일어(mittelhochdeutsche) 문학보다 그리스, 라틴,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문학에 대해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잘 알았다. 아니, 그는 엄청나고도 천부적인 언어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중고지 독일어 읽기를 배우는 수고를 무시했다. 독일 정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도발적으로 그것이 1750년 이후에야 비로소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그 이전 것 위에서, 특히 루터교 위에서 구축되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비록 루터교가 종교적인 것을 중세에는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국민적인 것과 결합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종교적 운동이며 단지 이차적으로만 국민적 운동이었다. 독일 정신과 관련해 여기서 주장하는 연대는 또한 외부적 관점에서도 타당하다. 19세기 초 이후에야 비로소(1813년 독일에 관한 스탈 부인의 유명한 책이 출간되었다) 유럽은 단지 중세의 숭고한 유물인 신성로마제국의 전통적 담지자로서 독일 민족에 대해서가 아니라, 특수하게 독일적인 문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독일이 프랑스, 에스파냐 또는 영국의 양식에 따른 근대 국민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그토록 어렵게 만든 것은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담지자라는 그러한 영예로운 특수 역할이었다. 독일은 제국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다른 커다란 국가들과 전적으로 동일하게 정치적이었다. 유럽연합의 시민인 우리가 오늘날 국민국가의 시대보다 더 많은 존경의 눈길을 지니고 바라보는 제국의 그리스도교-보편주의적 기획은 독일이 가령 프랑스나 영국보다 더 강력하게 과거에 사로잡히는 동시에 유토피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뒷받침했다.
  만약 우리가 세계 발전의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중심이 2500년이 지난 후 유럽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21세기 초에 지난 천년을 되돌아본다면,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유럽의 커다란 국민들 가운데 독일이 일정한 정신적 헤게모니를 행사한 마지막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전성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유럽의 주도적 문화였다. 16세기에는 에스파냐가 지도적인 힘이었다. 17세기에는 우위가 프랑스로 넘어갔으며, 프랑스는 물론 18세기에 영국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중요한 조역을 담당했다.) 각각의 국민 문학에서 정점으로 여겨지는 다른 유럽 국민의 저술가들은 단테처럼 중세에서나 카몽이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처럼 근세 초기에서 유래한다. 그에 반해 독일은 16세기에 극문학에서는 한스 작스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1800년경에야 비로소 문학적 걸작들을 산출했다. (오직 러시아만이 그보다 더 늦게 따라왔다.) 독일 문화의 역사는 최소한 문학과 철학에서는 가장 뒤늦은 서유럽 문화의 역사다—조형예술에서는 틸만 리멘슈나이더와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0년경 최상의 것을 성취했으며, 하인리히 쉬츠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7세기와 18세기 초 독일 음악에 세계적 가치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빛나는 문학적 성취와 철학적 성취의 동시성에 고전 독일 철학의 특수한 매력을 위한 근거 가운데 하나가 놓여 있다. 이 철학은 그 시기의 다른 유럽 철학들과 마찬가지로 근대 과학과 계몽의 문제 지평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방의 이웃 나라들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본원적 위대함을 지닌 문학의 형성과 동일한 시점에 전개된다. 처음에 인용한, 작가와 사상가의 민족으로서 독일인이라는 널리 회자되는 말은 물론 독일인의 높은 교양 수준을 일반적으로 특징짓기 위해 19세기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 말이 철학적 발전과 문학적 발전의 밀접한 결합을, 즉 이러한 형식으로는 이전에 오직 그리스에서만 존재했고 헤겔과 셸링 그리고 횔덜린32의 청년기 우정이 본보기로 보여주는 그러한 결합을 지시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더 이상 유럽의 것이 아닐 천년의 첫머리에서도 어째서 독일 철학사의 새로운 이야기가 의미 있는지에 대한 본래적 근거는 오로지 그리스인들의 그것만이 능가할 수 있는 이 철학적 전통의 비상한 질이다. 물론 이는 강력하지만 거친 가치 판단이므로 독자는 주의해야 할 것이다. 즉 독자는 이 책에서 독일 철학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발견하겠지만, 반은 에세이고 반은 역사학인 이 책은 독일 철학을 의식적으로 그 정점으로서 독일 관념론에 비추어 해석하며, 불가피하게 지금 이 저자의 철학에 의해 각인되어 있다. 모든 역사학자는 선택해야만 하거니와, 내 두 번째 선택 기준은 사실상 철학의 질이다. 여기서 완전성은 결코 추구하지 않았다. 나는 위대한 것들에 집중하고자 하며, 그저 자신의 시대에서만 영향력이 컸던 학교 철학자들을 무시하고자 한다. 호라티우스가 시인들에 관해 말하는 것, 즉 사람들도 신들도 그들에게 평범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좀더 높은 수준으로 철학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게다가 오로지 고전적 사상가들만이 세대를 포괄하는 독일 문화를 형성했다. 여기서는 오로지 중요한 통찰을 획득했거나 최소한 독일 문화의 특성에 빛을 비추어 그들이 없다면 독일 문화의 발전 과정이 그럼직할 수 없는 사상가들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 한 철학자의 중요성을 이루는가? 철학은 진리와 관계하며,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우리는 한 철학자가 처음으로 일정한 진리를 인식했을 때 그에게 높은 지위를 돌린다. 그러나 동시에 철학은 아주 복잡한 시도이고 그 속의 진리는 무언가 아주 다층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한 철학자가 물론 나중에 잘못된 것으로서 밝혀졌지만 오직 바로 그것에 관여하고자 한 그의 용기 덕분에 그렇게 밝혀진 사상을 끝까지 사유했을 때에도 그를 중요한 철학자로 인정해야 한다. 현상의 발굴, 자기 시대를 개념화하는 능력, 철학적 타당성 요구에 대한 반성, 개념 형성의 섬세함, 논증 분석의 정확함, 학문의 성과에서 본질적인 것에 대한 간취, 현실의 다양한 영역 간의 다리 놓기, 짜임새 있고 많은 경우 문학적으로도 빛나는 텍스트의 저술은 그 모두가 오로지 드물게만 통합되어 나타나는 철학적 덕목이다. 정의(Gerechtigkeit)는 위대함을 많은 경우 방법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서로 정반대인 두 사상가에 대해서도 인정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가치 판단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확신은 그 자체가 나중에야 비로소 형성된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다. 최소한 독자는 이 책의 끝에서 어떻게 그러한 확신에 도달했으며, 왜 그것이 자명하지 않은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저자의 주도적인 인식과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그런 독자에 대해서는 그것이 철저히 개인적인 것임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독일어를 외국어로 배웠으며 독일의 언어, 문학, 철학 그리고 정신과학에 대한 열광적인 습득은 내가 루터교 종교 교육을 향유한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채웠다. 10여 년 전 이래로 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인과 결혼해 살며 미국의 유수한 가톨릭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독일에 대한 나의 눈길은 더 이상 내부적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 즉 어떤 요인이 독일 철학을 인류사에서 두 개의 가장 매혹적인 철학 중 하나로 떠오를 수 있도록 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33∼1945년의 도덕적-정치적 대재앙이 생겨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외국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은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회슬레와 내 친구들인 칼 아메릭스, 롤런드 갈레 그리고 특히 노터데임 고등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지내는 동안 비판적으로 읽어준 케어스텐 더트에게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그것에 대해 여기서도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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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다산과 연암이라는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로 18세기 지성사를 새롭게 그려낸다. 두 사람의 사상적 지형뿐 아니라 최근 저자가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의역학의 관점에서 다산과 연암의 기질적 특성까지 한데 아우르며 이야기를 펼쳐내는 터라, 기존의 사상사와는 다른 새로운 그림이 펼쳐질 거라 기대해본다. 고미숙이 왜 이 둘을 함께 묶었는지, 어떤 의문을 품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려 했는지를 저자 서문을 통해 살짝 엿보기로 하자. 참고로 이 책은 6월 14일 금요일에 출간되고, 예약판매 기간에 구매한 독자에게는 다산과 연암 머그컵 세트를 드린다.

 

 

예약판매 이벤트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detail_book.aspx?pn=130523_two

 

 

 

 

입구 : 그들을 둘러싼 세 개의 ‘미스터리’

 

하나,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몇 번을 생각해도 이상한 노릇이다. 그들은 왜 한번도 만나지 않았을까?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 사대문 안에서 살았는데 말이다. 당파 혹은 학맥이 달랐기 때문일까? “형적이 드러남을 꺼려서 서로 소문은 들으면서도 알고 지내지 못하며, 신분상의 위엄에 구애되어 서로 교류를 하면서도 감히 벗으로 사귀지는 못”하는 그런 관계였던 걸까? 하지만 둘은 그런 장벽 따위를 훌쩍 뛰어넘은 대문호 아닌가. 게다가 박제가・정석치・이서구 등 둘의 절친한 벗들이 겹친다. 그럼 이 사람들이 양다리 혹은 들러리에 불과했단 말인가? 무엇보다 둘의 ‘사이’엔 정조대왕이 있었다. 정조가 누구던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고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부를 정도로 지적 자신감이 충만했던 ‘호학군주’ 아닌가. 사대부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했고, 사대부들보다 더 많은 글을 썼던 제왕. 그래서 ‘문체반정’이라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필화사건’을 주도한, 다시 말해 문체와 권력의 긴밀한 맥락을 간파했던 인물이다. 그때 연암은 문풍을 타락시킨 배후조종자로 찍혔고, 다산은 정조의 이념적 나팔수였다. 이 정도면 서로가 서로의 존재감을 충분히 느꼈을 텐데…… 몰랐을 리는 없다. 절대로! 그럼에도 그들은 왜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까? 사대문 안 종로통을 수없이 오갔을 그들의 발걸음은 왜 번번히 엇갈렸을까? 대체 왜?

 

 

 

 

 

 

둘, ‘노 코멘트’에 담긴 뜻은?
무척 궁금하긴 하나, 저 질문은 그다지 심오한 편은 아니다. 일단 전제에 문제가 있다. 두 사람이 서로 친밀할 거라는, 그래서 깊은 교류를 주고 받았을 거라는, 아니 그랬으면 참 좋겠다는 우리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동시대의 톱스타들은 서로 친할 거라고 간주하는 것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일종의 ‘정서적 거품’이 개재된 것이다.
  거품을 빼고 둘의 동선을 체크해 보자. 연암과 다산의 나이차는 25세.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연암이 한창 청년기의 방황을 겪고 있을 때, 다산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였다. 연암이 거리에서 벗들과 어울려 중년을 통과하고 있을 때, 다산은 과거의 문턱을 넘기 위해 분투하는 수험생에 불과했다. 연암의 명성과 의론이 장안을 뒤흔들고 있을 때, 다산은 성균관 태학생으로 정조대왕이 제출하는 과제들을 수행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니 당연히 엇갈렸을 수밖에. 하지만 이 또한 성급한 판단이다.
  이 시대는 세대간 장벽이 그닥 높지 않았을뿐더러 학술과 문장을 통한 상호교류가 왕성했던 시절이다. 박제가는 서얼 출신에다 한참 어린 나이에도 연암을 찾아가 ‘사우관계’를 맺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다산은 왜 연암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꼭 제자가 되진 않더라도 당대 최고의 문호인데 한 번쯤 찾아가 내공을 가늠해 보고 싶지 않았을까……, 당파와 학맥이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 법한데 말이다(원래 반대편 진영에 있는 대가에게 더 호기심을 느끼는 법 아닌가).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서로 엇갈리던 둘의 동선이 마침내 교차하는 시점이 온다. 연암이 쉰이 다 되어 늦깎이로 ‘생계형 관직’에 나섰을 때, 그때 다산은 ‘왕의 남자’로 승승장구하던 중이었다. 이때 둘의 궤적은 사뭇 중첩된다. 문체반정과 수원 화성 축조, 천주교 사태 등 정조의 치세를 장식하는 주요 사건들에 둘은 직・간접으로 연루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더 놀랍게도 서로에 대해 ‘노 코멘트’ 했다. 연암의 글 속에 다산의 흔적은 없다. 다산의 글 속엔? 아주 없지는 않다.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지어 20여 가지의 환술을 기록하여 놓았다. 이 이치를 안다면 지사의 말이 망령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참 까칠하다. 연암을 마치 동시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느낌이랄까.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에도 더러 『열하일기』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지만 그건 연암 사후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데다, 인용한 부분도 하나같이 수레와 벽돌 등 기술지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다산의 ‘박람강기(博覽强記)’라면 『열하일기』는 물론이고 『연암집』 전체를 통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생략되었다. 특히 연암의 기발한 상상력과 호방한 문체에 대해서는 완전 노 코멘트!
  연암은 다산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다산은 연암에 대해 ‘차갑게’ 언급했다. 이 침묵과 냉대의 저변에 흐르는 기류는 대체 무엇일까?

 

 

 

 

셋, 이렇게 ‘다를’ 수가!
여기서 잠깐 되짚어 보자. 이 냉랭한 기류가 미스터리가 되려면 어떤 전제, 아주 강력한 전제가 필요하다. 즉, 앞에서 말한 대로 둘은 만나야 하고, 서로 지적 교감을 해야 한다는, 혹은 그랬을 거라는! 왜? 연암과 다산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문장가요 경세가니까. 유사 이래 연암보다 더 탁월한 문장은 없었다. “그의 문장은 천마가 하늘을 나는 듯”(김윤식)하다. 한편, 다산은 방대하다.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정인보)다. 한 사람은 질적으로, 다른 한 사람은 양적으로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 이런 대단한 인물들을 동시에 배출했다니, 18세기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눈부시다. 그러니 둘을 연결하고 싶은 욕망이야 지극히 당연하다.
  알다시피, 18세기에는 연암과 다산 이외에도 수많은 별들이 각축했다. 홍대용과 박제가, 이덕무와 이가환, 이옥과 김려 등등. 그런데 연암과 다산은 물론이고 이들까지도 몽땅 동질화하는 개념이 하나 있다. ‘실학파’라는 범주가 그것이다. 실학이란 조선후기에 일어난 지성사의 새로운 조류를 지칭하는 담론이다. 이 개념의 등장과 더불어 연암과 다산은 그 자장 안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그 담론적 배치는 대략 이렇다.
  조선후기 실학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으로부터 비롯한다. 성호는 중농학파, 그 뒤를 잇는 연암그룹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설파한 중상학파, 그리고 다산은 이 양대 흐름을 집결한 경세치용(經世致用)학파라는 게 기존의 통설이다. 연대기적으로야, 성호-연암-다산으로 이어지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시간적 선후가 논리적 선후를 결정짓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담론의 배치에 담긴 건 두 가지 욕망이다. 하나는 역사를 연속적 선분으로 잇고자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역사는 더 나은(혹은 더 많은) 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 연속성과 진화론!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한 표상이기도 하다. 다산학의 방대한 스케일은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기에 딱! 알맞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겐 늘 연암과 다산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있다. 욕망이 표상을 낳고 표상은 다시 욕망을 키워 가는 과정을 충실히 반복한 셈이다.
  하지만 보라! 둘의 초상화를. 둘은 참 다르다. 한 사람은 거구에 비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작고 단단하다. 내뿜는 아우라와 카리스마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신체적 차이만큼이나 둘의 인생궤적 또한 판이하다. 당파나 이념의 차이는 차라리 부수적이다. 문체와 세계관, 사상과 윤리 등의 차이는 마치 평행선처럼 팽팽하다.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 이 질문은 ‘그들은 왜 만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보다 훨씬 심오하다. 후자는 그들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전제하지만, 전자는 그들의 차이와 이질성에 주목한다. 이 질문은 두 가지 효과를 불러온다. 하나는 경이로움이다. 동일한 연대기 안에 이렇게 상이한 기질과 벡터를 지닌 천재가 공존했다니, 진정 놀랍지 않은가. 조선왕조는 물론이고 전 세계 지성사 그 어디에서도 이런 팽팽한 맞수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권위로부터의 해방이다. 연암과 다산이 하나의 이미지로 오버랩되면 무지하게 엄숙해진다. 엄숙주의는 권위를 낳고 권위는 차이를 봉합한다. 거기에서 우상이 탄생한다. 그런 식의 우상화는 연암과 다산, 모두를 박제화시켜 버린다. 고로, 가차없이! 타파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연암과 다산의 생애를 하나의 평면에서 동시적으로 조망해야 하는 이유다. 신기하게도 그동안 연암과 다산은 따로 논의되었다. 그렇게 연결하려 애쓰면서도 왜 늘 따로(!) 이야기한 것일까. 혹시 둘이 지닌 불연속성과 이질성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아가 그걸 감당, 아니 직면하기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 모든 질문들이 그렇듯이, 연암과 다산이라는 화두는 결국 우리 자신의 발밑을 겨눈다. 즉, 이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꼼짝없이 가두고 있는 인식의 봉인 — 특히 차이의 봉합과 전통의 우상화에 대한 — 을 해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솔직히 좀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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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맛우유 2013-07-17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구입했는데 기대되네요... ^^

푸른희망 2013-07-1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고미숙님 책은 다 사서 보고 싶어요.. 제대로 읽지도 못하면서 사 놓으면 너무 뿌듯해서...^^
 

 

 

결혼을 앞둔 청춘남녀를 위한 <스님의 주례사>, 자녀를 키우는 부모를 위한 <엄마 수업> 등 국민 멘토로 활약하는 법륜 스님의 신작 <쟁점을 파하라>.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번에는 한국 사회를 둘러싼 다양한 갈등을 2012 대선이라는 국민 축제의 장을 통해 어떻게 풀어내고 조화롭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논한다. 남북평화를 바탕으로 한 동북아공동체, 경제민주화와 복지 문제 등 커다란 구조의 문제부터 청년과 비정규직, 여성과 육아 문제 같이 많은 국민이 체감하는 삶 영역의 문제까지. 즉문즉설로 잘 알려진 선명한 논리와 문제의 핵심을 돌파하는 직설로 오늘 한국사회의 현실을 돌아보고 내일 우리가 마주할 미래를 제안한다.

 

한겨레출판사의 도움으로 이번 책의 큰 맥락을 살펴볼 수 있는 서문을 사전 공개합니다. 왼쪽 표지를 누르시면 예약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들어가며

1987년 민주화 이후 지난 25년 동안 우리 사회가 많이 변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현재의 국가운영 시스템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고 앞으로 25년을 내다봤을 때 현재의 국가운영 시스템이 부족한 점이 많다. 과거 25년 동안 경험한 것에서 필요한 부분을 반영하고, 앞으로 25년간 변화할 것을 예측해서 새로운 국가운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필요하면 헌법 개정이라도 해서 새로운 국가혁신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국가로서의 대한민국-Korea가 있고, 국민으로서의 대한민국-Korean이 있는데, 국가는 좀더 발전해야 하고, 국민은 좀더 행복해야 한다.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통일을 해야 하고, 국민이 행복하려면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이것이 시대적 과제이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우선 국가의 기반이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남북 간 대결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지금의 분단 상태로는 국가가 더 발전하기 어렵다. 통일한국이 아닌 분단한국으로는 미·중의 경쟁이 치열해져 가는 국제정세 속에서 비전을 찾기 어렵다. 분단이 유지된다면 남과 북은 미·중의 하위변수가 되어 대립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통일이 국가발전의 핵심 키워드이다. 평화와 통일이 국가발전의 기본 방향이다.
  국민이 더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도 살펴보자. 첫째, 국민의 정치적 자유가 더 확대되어야 한다. 지도자를 뽑는 시민의 권리는 확보했지만 선거 때만 잠시일 뿐이다. 일상적인 시민의 권리가 좀더 확보되려면 적어도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더 많이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방분권이 강화되어서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자기 지역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국민의 다양한 요구가 국정에 제대로 반영되려면 다양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도록 다당제적인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 일상적으로 지역이나 계급·계층의 요구가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다양한 정당이 국회에서 일상적으로 정치행위를 해야 한다.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통합해내는 정치행위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국민의 요구가 좀더 충분하게 정치에 반영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국민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성장이 더 되어야 한다. 성장이 정체 국면으로 가고 있는데, 통일이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다. 북한 개발에 드는 비용을 투자의 개념으로 바라본다면 마치 미국의 서부개척처럼 더 큰 한국을 만드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중국이 아직 더 성장할 테니 이를 활용하면 우리가 여기서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다.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는 서구 문명을 모방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모방으로는 이제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다. 이것을 뚫고 나갈 창의력이 중요한데, 창의력이 결국 우리의 경제력을 한 번 더 성장시킬 동력이 될 것이다. 여기에는 창의적인 인재를 기르기 위한 교육이 굉장히 중요하다.
  또 하나, 예전에는 성장의 떡고물이 일반 국민에게도 좀 떨어졌는데 지금은 안 떨어진다. 그래서 분배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선택하고 있는 한, 개인이 경쟁을 통해 자기 기량을 최대로 발전시켜나가는 방식이 기본 골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국가가 이 경쟁의 룰을 공정하게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국가가 이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룰의 운용이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되는 것은 큰 문제이다. 정부가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공정하기만 하면 되느냐, 그렇지 않다. 아예 경쟁에 참여하지 못하는 약자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나 장애인, 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층에 대한 안전망이 충분히 구축되어야 한다. 이 문제가 복지이다. 그래서 새로운 사회는 공정과 복지가 함께 가야 한다.
  결국 세금을 거두는 조세정책과 세금을 쓰는 재정정책을 통해서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운영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나를 따르라’는 방식의 성장시대 리더십도, 단결투쟁을 외치는 민주화시대의 리더십도 이 문제를 풀기 어렵다. 이제는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합리적으로 통합해내는 ‘통합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이 통합의 리더십만이 국내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를 통합해내고 남북 간의 갈등과 대립도 통합하고 미·중의 이익균형점 역시 적절히 통합해낼 수 있다. 이를 통해 통일과 양극화 해소도 이룰 수 있다.
  이런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 모두 함께 진지하게, 어느 편인가의 문제,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 국가가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 국민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우리 국민은 안정을 요구하는 국민도 많고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도 많다. 꼭 변화만이 옳은 것도 아니고 안정만이 옳은 것도 아니다. 이걸 함께 이끌어가는 게 필요하다. 정치권에서부터 경쟁할 때는 경쟁하더라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서로 대화를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간다면 우리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오래전부터 사회적 쟁점들, 서로 싸우고 풀지 못하는 문제들, 서로 상처받고 손해를 보면서도 풀지 못하는 현안들에 대해 그 해법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이야기를 엮어보고자 했다. 내 주장이 모두 옳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토론의 장을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펴낸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핵심 동력인 국민 대통합의 리더십을 열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바란다. 

 

- 2012년 11월, 법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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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입자 힉스로 추정되는 입자가 발견되어 화제인데요. 여기저기서 우주의 비밀을 풀 인류 최고의 발견이라고 하는데, 도무지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푸념도 들리고, 과학 분야 담당자로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테지만, 저 역시 이 발견이 제 삶을 어떻게 바꿀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형편이라, 마친 나온 <물리학을 낳은 위대한 질문들>에 있는 '신의 입자란 무엇인가' 한 꼭지를 전해드리는 걸로 대신할까 합니다. 복잡하지도, 길지도 않고 핵심만 딱 간추린 내용이니 어디 가서 빠지지 않고 이야기를 알아들을 정도로는 충분할 겁니다. 이 책은 물리학의 주요 개념 스무 가지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데, 입문서로 맞춤하니 이번 기회에 살펴보셔도 좋겠습니다. 자, 이제 '신의 입자'가 무엇인지 알아보지요. 

 

 

 

신의 입자란 무엇인가?
힉스 보존과 대형 강입자 충돌기(LHC), 그리고 질량의 근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레온 레더만(Leon Lederman)이 말했다. "그것이 신(神)과 무관하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정작 놀라운 것은 그 입자가 아직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주의 모든 비밀이 소립자에 숨겨져 있다고 믿는 물리학자들에게는 레더만의 말이 짓궂은 농담처럼 들릴 것이고, 과학이 삶의 의미까지 밝혀줄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독설처럼 들릴 것이다.


안타깝게도 신의 입자(God particle)는 우주의 모든 것을 말해 주지 않았으며, 삶의 의미를 밝혀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힉스 보존(Higgs boson)을 찾아야 할 이유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입자가 발견되면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은 마지막 퍼즐 조각이 끼워지면서 완전한 체계를 갖추게 된다. 힉스 입자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우주의 근본적 성질 중 상당 부분을 밝힌 것이 되고, 모든 물질들이 지금과 같은 질량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런 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입자물리학은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드라마는 스위스를 무대로 펼쳐지고 있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 공동 원자핵 연구소(European Organization for Nuclear Research, 이하 CERN이라 한다.)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입자 가속기가 운영되고 있는데, 물리학자들은 이 거대한 장치가 표준 모형 이론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대형 강입자 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 이하 LHC라 한다.)로 불리는 이 입자 가속기 속에서 양성자들끼리 거의 빛의 속도로 충돌하면 힉스 보존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전 세계의 물리학자들은 피터 힉스(Peter W. Higgs)가 1964년에 제안했던 가설에 어떤 판정이 내려질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힉스 보존의 탄생

피터 힉스의 제안은 매우 간단하다. 그는 모든 입자들이 갖고 있는 질량의 근원을 추적하다가, 어떤 장(場, field)이 존재하여 입자들에게 질량을 부여한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이것은 기존의 중력장이나 전기장이 아닌 새로운 장으로서, 빅뱅 후 우주가 식으면서 형성되어 특정한 입자들의 운동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그런데 질량이 큰 물체일수록 움직이기가 어려우므로 힉스는 이 장이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힉스는 이 논문을 <피직스 레터(Physics Letters)>라는 학술지에 제출했으나, 심사위원이 "현실적인 물리학과 다소 거리가 있다."는 이유로 게재를 거절했다. 그래서 힉스는 논문의 일부를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예견을 내놓았다. "핵자들을 서로 단단하게 결합시키는 힘 속에서 이 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 발견된 사례는 없다." 그 무렵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와 압더스 살람(Abdus Salaam)은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연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은 신기하게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전자기력을 양자 역학 버전으로 서술한 이론은 양자 전기 역학이고, 방사능의 형태와 태양의 핵융합 등은 약력 이론(weak force theory)으로 설명되는데, 이들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비슷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었다(19장 자연에서 가장 강한 힘은 무엇인가? 참조). 와인버그와 살람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두 힘이 정말로 하나의 근원에서 탄생했음을 증명했고, 여기에는 '약전자기이론(electroweak theory)'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이 이론은 하나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약전자기 이론이 맞으려면 W 보존과 Z 보존이라는 매개 입자가 존재해야 하는데(보존은 힘을 만들어내는 입자의 총칭이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입자물리학의 동물원에는 생전 본적도 없는 생소한 명단이 추가되었다.
  더욱 곤란한 것은 W 보존과 Z 보존이 질량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자기력의 경우에는 빛의 입자인 광자가 힘을 매개하는데, 보존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광자는 질량을 갖고 있지 않다. 만일 광자와 W, Z 보존이 통일된 이론에서 같은 역할을 한다면 이들 사이에는 어떤 대칭성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광자는 질량이 없고 W 보존과 Z 보존은 질량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무언가가 이들 사이의 대칭성을 붕괴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것은 양팔저울의 균형을 세심하게 맞춰 놓은 후 한쪽 접시에 작은 조각을 얹으면 균형이 붕괴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접시에 올라간 조각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 이들 사이의 대칭을 붕괴시켰는가? 피터 힉스가 그 대답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힉스 장(Higgs field)이었다.
  1967년에 와인버그와 살람은 약전자기 이론에 힉스 장을 도입했다. 그리고 1983년에 CERN에서 실험을 하던 중 약전자기 이론에서 예견되었던 W 보존과 Z 보존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그야말로 입자물리학의 여정에 마지막 후렴구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단 한 가지 문제점은 힉스 장의 존재 여부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힉스 장을 찾아서

힉스 장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직관적으로 이해하려면 주름이 잡힌 골판지를 떠올리는 것이 가장 쉽다. 손가락을 골판지 위에 대고 주름이 난 직선 방향을 따라 이동하면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는다(골판지와의 마찰은 무시하자.). 그러나 방향을 90도 돌려서 주름의 수직 방향으로 이동하면 어떤 저항이 느껴질 것이다. 즉, 이전보다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골판지를 힉스 장에 비유했을 때 W 보존과 Z 보존은 바로 이런 방향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광자는 힉스 장에 난 홈을 따라 움직이는 반면, W 보존과 Z 보존은 움직일 때마다 홈과 부딪치기 때문에 어떤 저항을 느끼게 되고, 그 결과가 질량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한 아이디어이다. 하지만 학계에 수용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한다. 방향성을 가진 힉스 장이 전 우주에 깔려있는데 광자는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W 보존과 Z 보존만이 힉스 장을 느끼기 때문에 질량을 갖는다.- 이 가설을 증명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힉스 장에 대응되는 입자가 실험실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물리학에 등장하는 모든 장은 그에 대응하는 입자를 갖고 있다. 전기장의 입자는 광자이고 중력장의 입자는 중력자이며(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강한 핵력에 대응되는 입자는 글루온이다. 따라서 힉스 장이 정말로 존재하여 W, Z 보존에 질량을 부여하고 있다면 그에 대응하는 입자, 즉 힉스 보존이 존재할 것이다. 이런 식의 유추가 과연 먹혀 들어갈 것인가?
  사실 물리학자들은 입자물리학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입자물리학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입자물리학은 수많은 입자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예견했으며(힉스 입자는 예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입자를 발견할 수 있는 환경까지 거의 정확하게 예견해 왔다. 물리학자들은 입자의 에너지를 언급할 때 '전자볼트(electronvolt, eV)'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전자 하나가 9볼트짜리 배터리를 통과하면서 얻는 운동에너지는 9전자볼트(eV)이다. 와인버그와 살람은 CERN의 연구원들에게 "90기가전자볼트(GeV)의 에너지로 입자들을 충돌시키면 W와 Z 보존을 발견할 수 있다."고 예견했다.
  표준 모형은 모든 것을 예견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물리학자들은 이론 물리학에 등장하는 26개의 기본 상수들이 왜 하필 지금과 같은 값을 가져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입자는 어떤 에너지에서 관측될지 알 수가 없어서 무작정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했다. 예를 들어 쿼크의 일종인 꼭대기 쿼크는 그 존재가 이론적으로 예견되고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발견되었다. 그 주된 이유는 꼭대기 쿼크가 어느 정도의 에너지 수준에서 발견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관측된 결과는 170기가전자볼트였다.). 안타깝게도 힉스 보존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 입자가 분명히 존재하긴 하는 것 같은데, 어디서 찾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를 바라면서 입자 가속기의 덩치를 점점 키워가고 있다.


충돌과 포획

입자 가속기를 이용한 충돌 실험은 언뜻 볼 때 필사적인 마구잡이 사냥 같지만 사실은 매우 계획적이고 정교한 작업이다. 사실 입자물리학의 역사는 충돌 실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도 충돌 실험을 통해 원자핵을 최초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톰슨이 제안했던 '건포도가 박힌 푸딩' 모형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1909년에 그 유명한 산란 실험을 실행했다. 러더퍼드는 얇은 금 박막에 알파 복사선(헬륨 원자의 핵)을 빠른 속도로 발사했는데, 실험 결과 대부분의 알파 입자들은 박막을 그냥 통과했고 일부는 왔던 방향으로 크게 되튀어나왔다. 이로부터 그는 원자의 중심부에 양전하가 밀집되어 있으며, 이것이 원자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핵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물리학자들은 핵의 내부 구조를 탐사하기 위해 더욱 큰 입자 가속기를 꾸준히 만들어 왔고, 그 결정체가 바로 CERN에 있는 LHC이다. 이 가속기는 '힉스 보존을 발견해 줄 강력한 후보'로 언론에 자주 언급되었지만, 이런 목적으로 건설된 가속기는 LHC가 처음이 아니다. 물리학자들은 힉스 보존이 어느 에너지 수준에서 발견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표준 모형 이론은 약 96기가전자볼트를 권장했다.) 여러 해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가속기의 규모가 커지면서 희망도 점점 부풀었으나, 힉스 보존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힉스 보존을 발견할 목적으로 처음 건설된 입자 가속기는 CERN에 있는 대형 전자-양전자 충돌기(Large Electron Positron collider, 이하 LEP라 한다.)이다, 둘레 27킬로미터짜리 원형 터널로 이루어진 LEP는 전자와 양전자를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킬 수 있다. 터널 안에는 4,600개의 자석이 설치되어 있어서 입자의 길을 유도하는데, 전체 구조가 스위스 쥐라(Jura) 산맥의 기슭을 지나 프랑스까지 걸쳐있을 만큼 방대하다. 그 속에서 전자와 양전자는 원형 궤도를 따라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자석이 유도하는 길을 따라 거의 빛의 속도로 달리던 전자와 양전자가 정면으로 부딪치면 충돌의 여파로 수많은 입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주변에는 4개의 초대형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어서(하나의 크기가 웬만한 집과 맞먹는다.). 쏟아져 나온 입자의 궤적을 기록하고 있다. LEP가 한 번 가동되면 실험이 몇 시간 동안 계속되는데, 그 사이에 매 초마다 2,200만 번의 충돌이 일어난다. 가동이 끝나면 과학자들은 감지기에 기록된 데이터를 수집하여 전자-양전자의 충돌 효과를 분석한다.


힉스 입자를 흘끗 보다

1989년에 가동을 시작한 LEP는 45기가전자볼트의 출력으로 입자를 가속시킬 수 있었다. 이 정도면 Z 보존을 발견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후에 가속기의 출력을 보완하여 W 보존까지 생성시키는데 성공했고, 가동을 멈추던 무렵에는 출력이 209기가전자볼트까지 향상되었다. 그런데 가동이 중단되기 직전인 2000년 9월에 힉스 보존과 비슷한 입자가 발견되어 전 세계 물리학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이 발견은 115기가전자볼트 근처에서 이뤄졌는데, 이 정도면 표준모형의 예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값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데이터의 양이 너무 적어서 통계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때 내려진 결론은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 즉 E=mc2에 입각한 힉스 보존의 에너지가 114기가전자볼트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힉스 보존의 질량은 꼭대기 쿼크 및 W 보존의 질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과학자들은 힉스 보존의 질량이 가질 수 있는 상한값과 하한값을 꾸준히 추적하여 탐색 영역을 좁혀 왔다. 최근에 W 보존의 질량으로부터 추정된 힉스 보존의 질량은 대략 153기가전자볼트 근처이며, 이 입자를 찾으려는 경쟁은 지금도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2009년에 페르미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2010년 말까지 힉스 보존이 발견될 확률은 50퍼센트 정도'라고 했다. 이 경쟁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에 있는 사람은 LHC를 운용하는 연구원들이다. LHC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모든 기계들 중 출력이 가장 큰 초대형 장비로서, LEP가 놓여있던 지하 터널에 설치되어 있다(LEP는 2000년에 철거되었다.). 이곳을 지나는 양성자와 반양성자는 광속의 99.9999991퍼센트까지 가속된 후 14테라전자볼트(14TeV=14,000GeV)의 에너지로 충돌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엄청난 에너지인 것 같지만, 입자 빔의 굵기가 수천 분의 1밀리미터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 그다지 큰 양은 아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이 가속기가 예기치 못한 대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며 가동을 반대하고 있다.


힉스 입자의 흔적

초대칭(supersymmetry, susy) 힉스 입자들은 LHC의 감지기 안에서 다양한 흔적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 흔적들은 특정 에너지에서 존재하는 입자를 나타내며 이들은 다시 여러 개의 입자로 붕괴된다. 감지기에 힉스 입자만 나타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온갖 입자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난리통 속에서 특정 입자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힉스 입자를 놓치는 것도 문제지만 엉뚱한 입자를 힉스 입자로 오인해도 큰 혼란이 빚어진다.
  미국에서 가장 큰 입자 가속기인 페르미 연구소의 테바트론(Tevatron)도 힉스 입자를 발견해 줄 후보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LEP가 얻은 데이터 속에 이미 힉스 입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과학자들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입자 가속기에서 초대칭의 흔적이 발견된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CERN의 연구원들도 LHC가 초대칭의 증거를 발견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것이 발견된다면 입자물리학은 또 한 번의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사실 힉스 입자가 발견된다고 해도 질량의 근원은 여전히 미지로 남을 것이다. 입자들이 왜 하필 지금과 같은 질량을 갖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꼭대기 쿼크의 질량은 전자의 정지 질량의 100만 배가 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이론은 아직 발표된 적이 없다. 힉스 보존은 약력과 질량의 상호 관계를 밝혀 주겠지만, 쿼크의 질량이 그토록 큰 이유까지 설명해 주진 않는다. 더욱 신기한 것은 양성자 안에 있는 쿼크의 질량과 쿼크들을 결합시켜 주는 에너지를 모두 더한 값이 양성자의 질량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입자물리학자들은 전자의 질량을 아직도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입자 가속기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간에 '신의 입자'는 그 이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할 것 같다. 그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물론 짜릿한 경험이겠지만, 그와 함께 신의 입자의 이론적 토대가 처음 기대했던 것만큼 단단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위 글은 <물리학을 낳은 위대한 질문들>의 '8장. 신의 입자란 무엇인가?' 전문입니다. 도움 주신 휴먼 사이언스 출판사에 감사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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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 young 2012-07-14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
 

<일반의지2.0>의 한국어판 출간을 앞두고 <일반의지2.0>의 역자 안천이 저자 아즈마 히로키를 만났다. 이 인터뷰는 2012년 6월 11일 오후에 아즈마 히로키가 대표를 맡고 있는 겐론사에서 진행되었다.

  언뜻 봤을 때 아즈마 히로키는 각기 전혀 다른 분야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서들을 써왔다. 하지만 그가 펼쳐온 사유의 궤적에는 뚜렷한 일관성이 확인된다. 아즈마 히로키는  ‘근대와 탈근대’ ‘의식과 의식 외부’라는 큰 틀 속에서 여러 현상을 논해왔다. 이는 <일반의지2.0>의 대전제이기도 하다. 그가 왜 이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는지를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이후 역자 안천은 ‘안’으로, 저자 아즈마 히로키는 ‘아즈마’로 표기한다).

 

 

서브컬처 비평에서 ‘일반의지2.0’까지 - 아즈마 히로키 사상의 안과 밖

 

 

1. 아즈마 히로키 사상의 전체상

 

안 : 아즈마 씨는 지금까지 현대사회를 근대(모던)와 탈근대(포스트모던)가 공존하는 사회, 즉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두 가지 원리가 각자 고유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공존하는 사회로 파악해왔습니다. 근대와 탈근대의 차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즈마 : 일본은 서양의 근대사회 모델을 적용하기 힘든 사회이기 때문에 일본 사회를 사유할 때 근대를 기준으로 삼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점을 전근대적 특성이 잔존하고 있다고 볼 것인지, 아니면 서양식 근대 모델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일본이 순조롭게 탈근대사회로 이행했다고 볼 것인지는 저마다 입장이 다르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근대’와 ‘근대가 아닌 것’ 사이의 상극 혹은 충돌이라는 관점 없이 일본 사회를 논하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근대와 탈근대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예를 들어 문학의 경우, 근대문학이라는 틀로는 일본 문학의 극히 일부만 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읽히고 있는 문학 전체라는 틀에서 생각했을 때, 사소설로 대표되는 순문학 혹은 근대문학은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일본에서 문학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근대문학 외의 관점을 도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라이트노벨은 전근대적인 전통과 근대 이후의 미디어믹스 문화, 달리 말해 전근대와 탈근대가 결합한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근대를 우회해서 탄생한 문학의 형태가 라이트노벨일 것입니다. 일본에 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안 : 아즈마 씨는 현대사상, 서브컬처, 정보환경의 변화 등 포스트모던적인 현상이 두드러진 영역에 주의를 기울여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상들을 언어화하고 가시화하는 이론적인 얼개를 구축하는 데에도 힘을 쏟아왔습니다. ‘존재론적 탈구축과 우편적 탈구축’의 구분(<존재론적, 우편적>), 서브컬처 분야에서 일어난 ‘상상력의 환경’의 변화를 이론화한 작업(<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근대의 ‘규율 훈련형 권력’과 전혀 다른 작동 원리를 지닌 ‘환경 관리형 권력’의 개념화(<정보자유론>) 등을 그 성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근대는 인간 의식의 재귀적인 자기 구성과 자기 수정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즈마 씨는 포스트모던을 형상화하면서 ‘의식의 외부’에서 구동하는 여러 환경에 의해 의식이 강하게 제약받고 있는 현실에 초점을 맞춰, 이들 제반 환경의 작동 원리를 밝혀내려고 했습니다. 아즈마 씨의 의식을 ‘의식의 자기 성찰’보다 ‘의식 외부의 환경’으로 향하게 하는 동인은 무엇입니까?

아즈마 : 제게는 세상이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실제로 근대적인 주체성 혹은 재귀적인 자의식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제 생각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사람들이 의식 외부를 주목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소위 현대사상, 즉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사상가들은 근대문학의 극한이나 근대적 주체의 극한이라는 주제를 선호해서 “근대적 주체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주체의 외부’가 현현(顯現)한다”는 유형의 논의를 펼쳐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아니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주체 외부’가 먼저 존재합니다. ‘공 모양의 자의식’(‘自意識の球体’를 ‘공 모양의 자의식’이라고 번역했다. 일본 문예비평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의 말로 ‘자의식이 자의식을 대상화하는 운동은 결코 자의식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문제를 지적할 때 쓰인다. 자의식의 운동 자체는 끝없이 계속되지만, 그 운동의 궤적은 닫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이다.)을 문제시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자의식 자체가 공 모양이 아닐뿐더러 ‘공 모양의 자의식’에 갇혀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철학이나 문학 분야의 문제 설정 자체가 전도되어 있다고 느껴왔습니다. 의식에서 출발해서 ‘의식 외부’로 향하는 논리 구성 자체가 전도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식 외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동물성, (일종의) 기계적 제어, 물질로서의 신체 등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이데거는 근대 철학을 비판하기 위해서 ‘기분’을 언급합니다. 하이데거는 ‘기분’이라는 개념을 상당히 추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또한 즉물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기분은 ‘건강하다 / 아프다’와 같은 신체적인 차원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신체의 문제이지 ‘존재의 목소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대체로 ‘의식의 외부’를 유난히 신비화했지만 이를 즉물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로 경제와 산업 분야에서 일어난 패러다임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경험은 멀티플렉스의 넓은 좌석에 앉아 코카콜라를 마시는 신체적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현재 문화 산업은 신체를 포함한 종합적인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신체를 비롯한 ‘의식 외부’를 즉물적으로 조절하고 관리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철학 분야의 ‘의식의 외부’ 문제와 산업 경제 분야의 ‘의식의 외부’ 문제가 교차하는 곳에 제가 가진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저의 친척 가운데 지식인층이 없다는 것이 큰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공 모양의 자의식’ 같은 이야기는 부모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은 이것이 일반 대중의 감각입니다. ‘공 모양의 자의식’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소수의 지식인층으로, 평범한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 같은 보다 동물적인 욕구와 관련된 문제 때문에 고민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층이 아닌 일반 대중을 향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안 : 다방면에 걸친 아즈마 씨의 저서 가운데 서브컬처 비평서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그리고 소설<퀀텀 패밀리즈>가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번역서가 나오기까지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정황으로 유추해보건대 아즈마 씨는 한국에서 서브컬처 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브컬처에 관해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아즈마씨는 10여년 전에 가라타니 고진을 중심으로 한 <비평공간>과 결별하고 서브컬처 비평가의 길을 걷는 대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2010년대에 들어와, 특히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이제 서브컬처 비평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는지 서브컬처 분야 자체의 변화 그리고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에서 서브컬처의 위상 변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즈마 : 지진 후에 ‘서브컬처 비평은 하지 않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지진 이전부터 서브컬처 비평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평론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2000년대 전반에 느꼈던 가장 큰 문제는 쉽게 말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1950~1960년대 출생의 논객들이 오랫동안 젊은 층을 대표하는 세대로 눌러앉아 있었고, 제 또래의 세대는 거의 활동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때 서브컬처 비평이 가치 전도의 수단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런데 지진 이전인 2000년대 후반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또래 세대 혹은 그 아랫세대가 등장하면서 2010년을 전후해 일본 평론계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저는 오히려 윗세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전까지는 계속 신인으로 취급되었는데 지금은 중견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가치 전도를 목적으로 한 서브컬처론, 그러니까 젊은 문화론은 이제 제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브컬처론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제 역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일본 서브컬처 자체에 대한 저의 입장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그리고 지금도 역시 ‘이 나라에서 이론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대상은 서양에서 유입된 고급문화가 아니라 야생의 서브컬처에서 탄생한다’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런 참신한 서브컬처의 발견은 새로운 세대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에 연령면에서도 저는 그런 작업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은 가치 전도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 게임, 인터넷 등이 만연한 일본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하기 때문에 서브컬처와 관련된 활동은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 <일반의지2.0>에 이르기까지

 

안 : 한국에서 아즈마 씨는 현대사상을 논하는 철학자, 서브컬처 비평가 그리고 소설가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정치사상’을 주제로 한 <일반의지2.0>의 간행은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사상을 직접 논하게 된 경위를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즈마 : 원래 저는 철학을 해왔기 때문에 제 곁에는 항상 정치사상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본에서 정치를 논하는 것은 매우 따분한 일입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정치는 지적인 고찰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정치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고, 일본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세의 분석이나 정치인 개인의 가십 등에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반의지2.0>을 통해 정치로 전환했다는 의식은 사실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정치적인 제안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브컬처 비평으로 수용되었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담긴 문제의식, 그러니까 ‘인간과 사회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문제들을 서브컬처적인 문맥에서 분리시켜 더 추상적인 형태로 논한 측면도 상당히 강합니다. 어쩌면 이 책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속편으로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제 또래의 세대는 제일 먼저 인터넷을 접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홈페이지, 블로그, 트위터 등을 운영하고 또 이용하면서 엔지니어나 IT기업 경영자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보환경이 가져오고 있는 현실의 변화에 발맞춰 ‘사회사상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엔지니어나 경영자들도 자신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언어로 설명해주고 비전을 만들어주는 사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책은 그러한 상황에서 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기도 합니다.

 

안 : 아즈마 씨가 해석한 루소, 설명을 덧붙이자면 “의사소통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한 의견을 몇 가지 대립축으로 환원해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다양성을 억압하고 만다. 소통 없는 의견의 집약이 가능해지면 원래의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인민의 일반의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는 ‘집단지성’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의사소통을 경유해서 단순화를 거친 판단에 비해 보다 정확한 판단을 이끌어낼 것이다”라고 ‘일반의지’를 재해석한 부분이 특히 신선합니다. 이 해석은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을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상가와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일반의지2.0>을 이 책의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아즈마 씨가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개념에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루소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참고로 한국어판 <일반의지2.0>은 루소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서 루소가 태어난 6월 28일에 출간될 예정입니다.

아즈마 : 루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전부터 루소를 읽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루소를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 아마도 2006~2007년쯤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루소를 선택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책에서 인용한 “의사소통 없는……”이라는 구절을 발견했을 때, 제 안에서 별개로 존재하고 있던 여러 가지 것들이 한순간에 전부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후 일본어 전집을 구입해 읽어가면서, 단순히 ‘사상가’로서의 루소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루소의 전체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소의 정치사상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전기적 사실도 포함해 ‘루소라는 인간’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의 그 구절을 읽은 것이 루소를 논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제가 왜 <사회계약론>을 읽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안 : 일본어판 서문에서는 이 책을 구상하게 된 ‘일본 사회 고유의 맥락’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의지2.0』의 내용 자체는 자본주의가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라면 어느 사회나 공유하고 있을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일정한 보편성을 가집니다. 모처럼 한국어판이 간행되므로 이런 과격한 제안을 하게 된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공통된 맥락’을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즈마 : 우선 현대사회가 매우 복잡해졌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습니다. 헤겔이 생각했던 절대정신으로서의 국가는 더 이상 사회 전체를 아우르기 힘듭니다. 달리 말해 복잡성이 증대해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일정 수준의 인권 의식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자리 잡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냐, 물건으로 취급할 것이냐’라는 어려운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체로 받아들여 최선을 다해 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물건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통계의 숫자로, 노동력으로 취급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근대적인 인권 의식이 충분히 침투하지 않은 사회에서 인간은 대부분 물건 취급을 받아야 했고, 지금도 그런 지역이 존재합니다. 그와 같은 사회에서는 인간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인권 의식이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격으로 존중받는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사물적인 측면을 통계적으로 취급하는 시점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의지2.0>의 제안은 ‘지금까지 우리는 유권자를 오로지 고유의 주체로 다루어왔지만, 오히려 유권자의 의지를 사물처럼 다루고 수학적으로 취급하는 방식도 추가로 고려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대적인 인권 의식이 사회에 스며든 정도에 따라, 이 제안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저는 충분히 민주화된 사회, 그러니까 충분히 인권 의식이 침투했고 충분히 다양성이 확보된 사회에서만 일반의지2.0이 기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반의지2.0은 단순히 전체주의를 긍정하는 이론이 되고 맙니다.

 

 

3. <일반의지2.0>의 내용

 

안 :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니클라스 루만이 말한 ‘복잡성의 감축’도 불가피하게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정치의 영역에서는 토론과 다수결의 원칙에 따른 대의제 민주주의가 이 감축의 역할을 해왔습니다만, 복잡화에 가속도가 붙은 현대사회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감축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물과 정보가 증가해 상호작용의 그물망이 촘촘해지고 있는 현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서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위기의식이 이 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 사회에서 일정 정도 공유되고 있는 위기의식입니까?

아즈마 : 일본에서 표면적으로나마 양당제가 자리 잡은 이후, 2009년에 민주당이 자민당을 이기고 54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2009년 가을에만 해도 사람들은 정치제도를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 정치도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의 상황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본에서는 ‘자민당은 이렇지만 민주당은 저렇다’라는 차원이 아닌, 현재의 정치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감이 극도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의회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선거라는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겨날 정도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불신감이 높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안 : 그런 위기의식 속에서 출간된 이 책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즈마 : 3만부 이상이 읽혔고 호의적인 서평도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의지’라는 말의 인지도도 높아졌고, 저의 책을 읽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이 책에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책이 나온 지 6개월이 막 지났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형태로 읽히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민주당은 ‘숙의’를 주요 모토로 내걸었습니다. 이 책은 “숙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데이터베이스로 보완해야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의 강령에 직접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러한 점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구체적인 정치적 문맥과도 얽혀 있습니다. ‘숙의’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은 민주당 집권 이후로, 이전에는 전문가만 쓰던 전문용어였습니다. 지금도 민주당은 숙의를 내걸고 있지만 사실상 숙의는 실패한 상태입니다.

 

안 : 한국에서는 ‘숙의’라는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숙의에 대한 설명을 한국어판에 따로 덧붙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아즈마 : 숙의라는 말이 쓰이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민주당에는 스즈키 간(鈴木寛)이라는 관료 출신 참의원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강의도 맡고 있어서 숙의 민주주의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민주당 정권이 탄생한 후, 간 나오토(菅直人) 전 총리가 스즈키 의원의 연구 내용을 접했고 그 후 이 말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 스즈키 의원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저기 밑줄을 치면서 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와는 별도로 자리를 마련해서 의견을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식의 반응도 있습니다.

 

안 : 이 책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 이력을 집약한 데이터베이스를 적절하게 분석하여 ‘사회의 집합적 무의식’을 가시화하는 과정이 지니는 의의를 논하기 위해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집합적 무의식을 언급할 때는 일반적으로 프로이트보다 융이 논거로 쓰이는 경향이 있는데, 아즈마 씨는 <존재론적, 우편적>을 발표했을 때부터 이미 프로이트를 높게 평가해왔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즈마 : 제 학문적 원점이기도 한 현대사상 분야에서 융은 오컬트나 뉴에이지에 가까우며, ‘프로이트의 학문을 왜곡시킨 인간’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입니다. 저 역시 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위화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융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지금 말한 것처럼 일본에서 융이라고 하면 뉴에이지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만약 이 책에서 프로이트가 아닌 융을 언급했다면 훨씬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 되었겠지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융을 논거로 삼으면, 인터넷을 경유해서 모든 사람의 마음과 뇌가 직접 연결되는 이미지가 되기 십상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융을 참조하지 않은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로이트는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진 객체이지만, 흩어진 개개인들이 뱉어낸 데이터를 끌어 모으면 데이터 차원에서만 집합적 무의식이 출현 한다’는 이 책이 제시한 이미지와 부합합니다.

 

 

4.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서

 

안 : 한국의 독자에게 익숙한 가라타니 고진과 아즈마 씨의 공통점 혹은 차이점을 명확히 해두면 한국 독자들이 아즈마 씨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라타니에 관한 질문을 두 가지 준비했습니다.
  가라타니는 1990년대 후반에 대의제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제비뽑기’를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일본 정신 분석의 기원>). 여기에는 불투명성과 우연성을 제도 안에 도입해 예정 조화적인 사고 형태의 부정적인 측면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일반의지2.0>은 ‘무의식의 가시화, 의사 결정의 투명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가라타니의 제안과 대비됩니다. 한편 ‘이성(혹은 의식)의 외부’를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도입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도 있습니다. <일반의지2.0>의 관점에서 봤을 때 가라타니의 ‘제비뽑기’는 어떻게 비칩니까?

아즈마 : 가라타니의 주장을 요약하면 “숙의의 원리에 따라 토론을 거친 후에 ‘이것이 모두의 통일된 견해이다’라고 말해봤자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며 얼마든지 뒤집히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바깥에 있는 존재를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라”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서로 대화를 거듭해서 어떤 합의에 이른다”는 믿음은 일종의 허구로, 실제로는 그 외부가 없다면 대화는 한없이 계속됩니다. 제비뽑기의 우연성이 본질이라기보다는 ‘숙의의 외부’를 제안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깥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라는 지점에서 입장이 갈립니다. 저는 가라타니가 너무 낭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비뽑기는 아주 알기 쉬운 외부인데 반해, 제가 제안하는 데이터베이스는 ‘외부인 척한다’고 해야 할까요? 달리 말해 가라타니의 제비뽑기는 일종의 부정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외부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라고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안 : ‘외부’의 문제는 마침 두 번째 질문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아즈마 씨는 전부터 가라타니가 논해온 ‘타자’나 다카하시 데쓰야(高橋哲哉)가 옹호해온 ‘타자’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해왔습니다. 그리고 <일반의지2.0>에서는 리처드 로티의 아이러니컬 리버럴리즘ironical liberalism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아즈마‐로티의 타자관과, 가라타니‐다카하시의 타자관은 어떻게 다릅니까?

아즈마 : 가라타니나 다카하시의 타자는 궁극적으로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로티의 타자는 동물이라고 할까, 가까이에 있는 애완동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애완견은 타자인가?”라고 물었을 때, 가라타니나 다카하시는 애완견을 타자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로티는 애완견이야말로 타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봤을 때 이는 사람을 동물로 취급하는 철학이기도 합니다. 로티는 “눈앞에 있는 인간이 고통스러워하거나 아파하면 사람은 손을 내밀고 만다. 모든 것은 여기에서 시작된다”라고 주장하지만, 가라타니나 다카하시는 이러한 감각을 ‘타자와의 직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타자는 이런 공감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따라서 종교적인 개념에 가깝습니다. 종교적인 개념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적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타자를 강조한 나머지 눈앞에 있는 인간에 대한 공감이나 동정을 파괴할 가능성마저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로티 쪽을 지지합니다.

 

안 : 그런 의미에서 가라타니가 말하는 외부는 낭만적이라는 것입니까?

아즈마 : 그렇습니다. 타자란 애써 따로 발견하려고 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에 있는 존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비평공간>도 처음에는 철학의 신학화에 저항하고, 이와 같은 ‘작은 타자’에 대한 감성을 중시하는 그룹이었습니다. 하지만 <비평공간>이라는 좁은 범주 안에서 논의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신학적인 논의에 가까워졌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5. ‘대의제 민주주의’와 ‘집합적 무의식’의 상호 보완

 

안 : <일반의지2.0>에 따르면 다양성이 충분히 확보되었을 때 일반의지2.0의 정확성은 신뢰할 만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집합적 무의식이 다양성을 배제하는 쪽으로 향할 위험성, 주류적 사고의 우위성을 증폭시키는 회로로 기능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결과적으로 일반의지2.0의 신뢰성을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양성의 보장’과 ‘집합적 무의식’은 양립 가능한 것입니까?

아즈마 : 다양성은 개별성의 원리에 속하고, 집합은 통계의 원리에 속합니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집합으로 파악하는 순간, 개별적으로 보고 있었을 때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다양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예컨대 신장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정규분포에 따라 존재할 뿐이며, 여기에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에도 정규분포는 동일한 선을 그립니다. 전혀 다양하지 않지요.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면 다양한 키 차이가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같은 현실에 대해 다른 시점을 도입해보자’는 시도이며, 데이터베이스와 숙의는 서로 배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일반의지2.0을 도입하면 다양성이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통계 데이터를 뽑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통계 데이터가 이렇다’는 것과 ‘정책 결정을 할 때 어느 것이 옳은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통계 데이터를 보면 전체적으로 이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정보를 보면서 전문가들이 숙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숙의가 결정합니다.
  이 또한 한국 등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는 이해가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사람들이 과도하게 숙의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숙의나 대화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담합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좁은 밀실 안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숙의와 담합은 닮아 있습니다. 일본에는 이런 유형의 ‘숙의’가 넘쳐납니다. 폐쇄적인 ‘숙의’를 에워싸고 있는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대중의 목소리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으며, 대중의 목소리를 추출해내려면 기계적인 처리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기계적인 처리를 거치면 대중의 목소리는 평면적인 것이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는 사라지지만 그나마 이런 회로가 전혀 없는 상태로 좁은 숙의가 계속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이것이 저의 취지입니다. 결코 ‘대중의 무의식에 따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이 책이 일본에서 이야기될 때 몇 번이나 문제가 된 부분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미리 설명하고 싶습니다. <일반의지2.0>은 ‘대중의 무의식에 따르라’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시화된 대중의 무의식에 숙의는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논한 책입니다. 이제까지와 다름없이 마치 대중의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세하고, 전문가의 숙의에만 정치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정치인이나 전문가만 밀실에 모여서 정치적인 문제를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선거철에만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는 시대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가 보급되어 사람들의 반응이 항상 인터넷을 떠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상황을 감안해서 정치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지, ‘대중의 의지에 따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브로고스BLOGOS’라는 언론 사이트에 게재된 인터뷰에서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은 오사카시의 하시모토 시장입니다. 그는 포퓰리즘적인 언사를 동원해서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시모토가 내건 정책 중에는 부분적으로 제가 지지하는 내용도 있지만, 반대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일반의지2.0은 이러한 포퓰리스트의 전제적 성향을 억제하는 장치로도 기능합니다. 포퓰리스트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까닭은 결국 선거의 기회가 적기 때문입니다. 4년에 한 번 선거가 이루어지고 그때만 반짝 지지를 얻으면, 그 후 4년 동안은 거의 독재와 다름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의지2.0이 기능하게 된다면 항상 대중의 욕망이 가시화됨으로써 포퓰리즘이라는 현상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의 구상은 ‘대중주의 대 선량주의’라는 단순한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안 : 많은 희생을 치른 후 민주주의를 쟁취한 경험이 있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독특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민주화와 사회의 대전환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다’라는 식의 과도한 기대를 품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의사 결정 제도이기 때문에 모든 기대에 답할 수는 없으며, 한국 사회는 정치에 대한 기대와 환멸 사이를 왕복하는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한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최장집은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좌절,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법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에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누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자체가 미완성이라는 관점도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했을 때 ‘소통 없는 의사 결정 회로’를 민주주의 제도 안에 도입한다는 이 책의 제안에 위화감을 느끼는 한국의 독자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즈마 : 일본에서도 민주주의는 고귀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통 없는……”이라는 주장에 즉각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결정에 참여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시간, 경제, 능력 등의 이유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어서 정치적인 결정 과정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의 한계를 타파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평범한 시민이 블로그를 개설해서 한국의 대선 혹은 일본의 미군기지 문제 등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상당한 배경지식을 쌓아야 할 것이며,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정해서 설득력 있는 논리를 짜야 합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하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치적 참여라고 해봤자 단순히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정당의 정책을 모두 지지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지하는 정책이 있는가 하면 반대하는 정책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반 시민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의견의 분포 양상과 실제 정치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1960년대에 학생운동이 고조되어 정치의 시대를 맞기도 했습니다만, 1970년대 이후 정치의 존재감은 급격하게 약화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같은 시기에 경제 발전이 계속되어 1990년대까지 경제 성장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다양화를 이룬 덕에 그리고 한국의 국가보안법처럼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도 없었기 때문에,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든 말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 시대를 경험했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은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한때 일본은 정치가 전혀 필요 없는, 경제적 풍요와 이를 배경으로 한 문화적 다양성만 추구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행복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으로 인한 부정적인 유산 또한 남아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지금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방법조차 잊고 말았습니다. 인터넷이라는 정보환경이 주어져도 어떤 식으로 의견을 표명하면 되는지 모릅니다. 일반 시민들은 정치에 참여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참여할 수 있는지 그 방법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자민당 등 기존의 당  조직은 각각 특정 산업이나 조직과 연계된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 일반 시민의 의견은 정당에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반대편인 시민운동 측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서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사회 안에서 특수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반 시민이 자연스러운 형태로 정치적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회로가 사라지다시피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를 들어 트위터 같은 매체를 이용하면 140자 정도로 매우 손쉽게 ‘이 정책이 좋다’ 혹은 ‘저 정책이 좋다’는 식으로 의견을 표명할 수 있습니다.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의 소셜 미디어는 이전에 비해 급격히 정치화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오오이(大飯) 원전 재가동 문제(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일본에서는 가동 중이던 모든 원전을 순차적으로 정지시켜 현재 모든 원전이 가동을 정지한 상태이다. 하지만 여름의 전력 소비량이 발전 가능량을 웃돌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원전을 재가동할 것인지의 여부를 두고 일본 사회 내에서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제일 먼저 재가동 여부를 결정하게 될 원전이 오오이 원전이다.)를 둘러싸고 매일 반대/찬성 트윗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원전 문제 전문가인가 하면 사실은 대부분이 아마추어, 즉 평범한 시민들이며, 트위터에 쏟아지는 내용들 또한 아마추어의 재잘거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마추어의 재잘거림이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야말로 건전한 정치적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당면하고 있는 정치적 과제는 전문가가 논의를 거듭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정치적인 의견을 자유롭게 표명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들은 이미 달성되었습니다. 정치의식이 그다지 없는 사람들,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 부담 없이 정치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회로를 다시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입니다. 이 책의 구상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일본어판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이 문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어쩌면 일본 특유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일본은 민주주의를 달성한 후 정치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정치가 기능하지 않아도 경제와 문화는 풍요로운 상태를 2~30년간 경험하고 말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정치 공간을 어떻게 다시 재건할 것인가? 일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과제는 이것입니다. 쉽게 말해 <일반의지2.0>은, 일본 사회에는 정치적인 숙의를 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적기 때문에 숙의를 에워싼 재잘거림의 공간을 만들어 공공 공간을 재건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도 이러한 제안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할지 아니면 도래하지 않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서양적인 주체성에 입각한 정치 모델,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숙한 주체의 입장에서 사회 전체를 조망하고 서로 토론을 거치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 모델은 서양 고유의 전통 위에 세워진 것으로, 적어도 일본 사회는 그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 : <일반의지2.0>은 ‘일반 시민이 부담 없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자’는 문제의식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정치의 모든 부분을 맡겨도 되는 것일까’라는 위기의식이 포개진 지점에서 쓰인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아즈마 : 정리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이 결정한다’는 인민주권의 이념입니다.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선거로 일정 기간 민의를 대표하는 사람을 뽑아 그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는 대의제 민주주의입니다. 근대 민주주의는 이 수단을 채택했지만, 원리상 인민주권의 실현 방법을 꼭 대의제 민주주의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거라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인민이 원하는 것을 가시화해서 ‘인민이 정하는 회로’를 만들고 이를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반영한다면 인민주권은 강화될 것입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또 하나의 회로로 보완하는 것입니다.

 

 

6. 마치며

 

아즈마 : 언뜻 보면 제가 매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사유해온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은 1971년에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이 생각할 법한 내용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양면성이 제 사유의 알기 쉬운 부분임과 동시에 알기 어려운 부분일 것입니다. 아마도 제 사회사상의 근간에는 일본이 버블을 경험했던 시대의 ‘정치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아도 문제없어’라는 감각이 있으며, 이 감각을 존중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감각은 2010년까지도 일본 사회 전체에 남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일본인들은 ‘정치도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고 확실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정치나 정치인은 제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정치인이 되면 1년 중 100일은 운동회, 경로회 등 지역구의 자잘한 모임에 얼굴을 비쳐야만 합니다. 주민들의 자질구레한 불만이나 요구에 귀를 기울여,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이쪽저쪽 눈치를 보며 조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이 꼭 필요하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따분한 직업이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저만의 느낌이 아니라는 점은 유능한 젊은 인재들이 정치 분야에 모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제도적으로 흠이 있다 하더라도 좋은 인재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면 정치는 기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 전제 자체가 붕괴되었고, 정치는 그 고귀한 위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안 : 지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일본에서 정치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한국에서 정치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이미지와 다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정치라는 말을 들으면 사회를 양분하는 갈등이나 대립이 분출하는 공간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아즈마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일본의 정치는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갈등이나 대립이 부재한 상태에서 꼼꼼하게 자질구레한 의견 조정을 해가는 활동처럼 느껴집니다.

아즈마 : 그렇습니다. 일본에서는 최근 몇 십 년 동안 ‘조정’이 정치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 책의 주장이 나왔습니다. 과거에는 일본에도 사회를 양분하는 갈등이나 대립이 있었지만 어느 시기부터 모든 것이 조정되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사회적인 갈등이나 대립은 모두 경제적인 자원 배분의 문제로 환원되었고, 정치는 이를 조정하는 역할만 맡게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정치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배후에는 이러한 일본 정치의 현실이 있습니다.

 

안 : 긴 시간 동안 여러 질문에 성실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인터뷰가 <일반의지2.0>을 이해하기 위한 입구로 그리고 아즈마 씨의 철학적 바탕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즈마 : 일본 사람들이 거의 묻지 않는 질문들이 많아서 이번 인터뷰는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일본어로도 남겼으면 합니다. 한국 독자들이 이 책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무척 궁금하군요.


 

 

인터뷰를 마치고

아즈마 히로키의 사상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근대와 탈근대의 구분을 의식과 ‘의식 외부’의 구분과 연계지어 사유한다는 것에 있다. 각기 차원은 다르지만 인간과 동물, 의식과 신체, 개체와 통계, 고유명과 익명, 작가와 데이터베이스, 메타적 성찰과 즉물적 반응 등 여러 저서에서 아즈마가 사용하는 짝개념들도 이런 구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인간을 이와 같은 양면성이 결합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역자가 보기에 <일반의지2.0>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의 주장을 요약하면, 근대적 모델인 대의제 민주주의를 탈근대적 모델일 수 있는 ‘일반의지2.0’으로 보완하여 인민주권을 더욱 강화하자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의식과 ‘의식 외부’의 상호 보완을 이루자는 말이다. 인터뷰를 통해 아즈마의 작업들을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철학적 밑바탕이 조금이나마 드러났기를 바란다.
  이 책의 내용 자체는 매우 평이하다. 어려운 내용은 거의 없다. 인문 사회학적인 배경지식 역시 대부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발상은 상당히 독특하다. 서로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영역들을 연결해서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려고 한다. 그 길이 실제로 만들어질지 아직은 미지수이다. 하지만 이 책이 그 길을 만들려는 실천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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