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내면을 채워주는 어휘 수업 - 품격 있는 대화를 위한 말 공부
박재용 지음 / 북루덴스 / 2025년 11월
평점 :
"단어들의 어원과 의미를 짚어주는 어휘 책!"
<나의 내면을 채워주는 어휘 수업>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내면을 채우기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던 어휘들의 뿌리와 의미를 되짚어간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특정 언어들이 어떤 단어에서 시작돼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또 그 단어에서 파생된 어휘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피다 보니, 마치 언어의 변천사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통해 내면을 채우기보다는 단어의 깊이를 더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생성과정과 변형의 과정은 새삼 신비로우면서도 놀랍게 다가왔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어휘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의 어원과 의미를 깊이 탐구하는 책이다.
특정 단어들이 최초로 생성되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 그 단어가 생성된 배경과 파생돼 온 과정을 심도 있게 다루다 보니, 어떤 의미로는 어휘의 역사책을 들여다보는 느낌도 든다.
만약 평소 사용하던 특정 어휘들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거나 알쏭달쏭한 부분이 있었다면 이 책이 그런 궁금증을 푸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
본문 자세히 보기
=====
-----
지구 외의 우주를 뜻하는 천구, 스페라 셀레스티스, 카엘룸, 스파에라, 구와 같은 용어들은 현재 거의 쓰이지 않지요.
(...)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는 '지구 대 우주'라는 대립 구조의 우주가 아니라 지구를 포함한 이 세상 전체를 뜻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로는 친숙한 것만 해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유니버스, 스페이스, 코스모스가 그것이지요, 이 세 단어는 직접적으로는 고대 로마의 라틴어에서, 그리고 직 간접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하죠. 셋 다 '우주'로 번역하긴 하지만 뉘앙스에서, 또 의미에서 다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우주'를 지칭할 때 가장 자주 사용했던 단어는 코스모스입니다. 지금은 사실 잘 쓰지 않는 단어지만 칼세이건의 대표적인 책 <코스모스>로 기억하시는 분은 많을 겁니다. 코스모스는 원래 '질서, 조화' 등을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우주의 질서정연한 체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면서 '우주'라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우주는 조화로운 선율이 울려 퍼지는 질서로 가득한 곳이었죠. 이후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우주를 대게 코스모스로 지칭합니다.
코스모스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대칭어로 카오스를 떠올립니다.
(...)
원래의 뜻이 '혼돈'인 카오스에서 대지가 생기고 하늘과 저승, 낮과 밤 등이 구분되면서 점차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안착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코스모스, 즉 '질서가 잡힌 세계'를 보게 됩니다.
카오스는 원래 '벌어지다', '열리다'라는 카이노에서 유래하며, 원래 '틈, 간극, 깊은 열린 공간'을 의미하고, 여기서 '심연, 무저갱, 텅 빈 공간, 공허' 등의 공간적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만, 해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 우주 생성 이전의 원초적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이고 점차 '무질서', '혼돈' 등의 의미로 확장되었죠.
(...)
이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대립항을 이야기합니다.
55~56페이지 中
-----
이 책이 어휘의 변화와 역사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지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부분이 바로 위의 부분인 것 같아 일부를 발췌해왔다.
우주라고 하면 일상에서는 보통 '스페이스'를 많이 쓰고, 게임이나 영화에서는 '유니버스'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반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우주를 뜻한다는 걸 알았다.
찾아보니 질서 있는 세계를 인문학이나 철학 쪽에서는 '코스모스'라고 표현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코스모스와 대칭되는 단어로 '카오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벌어지다', '열리다'라는 카이노에서 유래한 카오스가 어느새 의미가 확장되어 현재는 '무질서', '혼돈' 등의 의미로 사용됨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특정 단어들이 생겨난 어원부터 시작해 변화와 확장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계속 나열하는 형태로 서술하다 보니 어느 시점에는 조금 혼란이 오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 혹은 반대되는 단어까지 모두 담다 보니 어휘의 늪에 빠진듯한 착각 속에서 이 책을 읽게 된다.
-----
사실 크레네, 페게는 이미 그리스어로 복수 형태입니다.
(...)
그런데 라틴어로 넘어오면서 라틴어 복수형 어미를 또 붙인 거죠. '크레네들', '페게들'이 된 겁니다.
이들은 모두 님프입니다. 원래 '결혼하다'라는 뜻의 인도유럽어 어근 'sneubh-'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일에 가려진 사람'이란 의미도 갖는다지요. 결혼식에 베일을 쓴 신부를 가리키고요. 또 '베일에 가려진 사람'이란 의미는 인간의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어로는 님페, 라틴어로는 님파인데, 아주 오래 살지만 불멸자는 아니었지요.
140페이지 中
-----
위에 언급하고 있는 패턴이 바로 이 책에서 자주 서술되는 방식인데, 한번 읽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낯선 단어와 어원, 의미 확장, 문화적 맥락을 반복해서 접하면서 조금씩 체득하는 구조이기에 더 그렇다.
'님프'라는 어휘에 대해 정리해 보면 이렇다. 님프의 기본 의미는 신화나 자연 속에 사는 요정이나 신비로운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라틴어로는 님파, 그리스어로는 님페라고 불린다. 불멸자는 아니지만 인간보다는 오래 살고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진다.
어원적 의미로는 인도유럽어 어근 'sneubh-'에서 유래했으며 '결혼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파생된 의미로 '베일에 가려진 사람', 즉 결혼식에서 베일을 쓴 신부를 가리킨다.
문화적, 상징적 확장으로 보면, '베일에 가려진 사람'은 인간의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라는 의미로도 쓰이며, 요정이라는 신화적 의미를 넘어서 숨겨진 존재, 신비함, 은밀함까지 포함한다.
라틴어 변형의 형태로 살펴보면 복수형 어미를 붙여서 ‘크레네들’, ‘페게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들이 모두 님프를 지칭하지만, 어원과 의미를 통해 신비로운 성격과 결혼식의 상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님프를 단순히 요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 어휘에 대해 풀어주는 의미를 깊게 살펴보다 보니, 그것이 단순히 신비로운 존재라는 의미를 넘어 결혼식을 상징하는 베일을 쓴 신부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아마도 앞으로 결혼식을 떠올릴 때면 이 '님프'라는 단어도 함께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싶다.
=====
마무리
=====
이 책은 한번 읽어서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현재 사용되는 수많은 단어가 최초로 생성된 시점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가 거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반복적으로 곱씹고 의미를 되새겨야만 비로소 조금씩 파악이 되기 시작한다. 단어가 파생되고 확장되면서 달라지는 구조를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사회적 통념, 추구했던 가치 등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것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면, 아마도 이 책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책 전체를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 나에게 꽂히는 특정 단어들을 중심으로 깊게 파보는 것을 추천한다.
앞서 언급한 '님프'와 같이 말이다. 어휘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히스토리를 살펴보다 보면, 당시의 서양 문명과 사고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에 사용하는 어휘도 미래에 살펴보면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문득 지금 나는 어떤 어휘들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작게 보면 내가 사용하는 어휘들은 나의 가치와 내가 중요시하는 의미,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을 반영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자주 사용하는 언어들은 어떻게 보면 나를 이루는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파고들다 보니, 앞으로는 말을 하거나 어휘를 사용하는 데 있어 조금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나만의 표현방식이나 어휘들이 나를 나타내는 개성이 되어주기도 한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질문을 독자들에게 건네보고 싶다. 당신을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표현(단어)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