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슬그림(김예슬) 지음 / 부크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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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는 하루의 틈새 속에서 가져보는 특별한 상상!"



빽빽하게 채워진 글자 속에서 유영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마음 포근해지는 그림책으로 여유를 만끽해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나는 가급적이면 다양한 책을 섭렵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 편식을 통해서는 절대 이런 즐거움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상 속에서 꿈꿔 온 날들을 그림과 글로 엮어 만든 책으로, 읽다 보면 저자가 안내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서 '쉼'은 물론 특별하고 재미있는 이벤트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통칭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라고 말하는 행운의 편지를 펼쳐든 느낌이었는데, 재미있고 즐거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과 내용들 때문이었다.


바쁘고 힘든 날들을 이어가다 보면, 보통 이런 상상들은 가뭄처럼 바짝 말라 좀처럼 떠오르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이 책은 그런 가뭄에 '단비'를 내려주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별것 아닌 아주 작고 소소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슬며시 다가온 기분 좋은 상상 하나는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하고, 그날의 컨디션을 끌어올려 준다.


또 '뭐든 잘 될 것만 같은 기분' 내지는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을 갖게 해준다. 이 때문인지 그런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고, 어떤 일이든 술술 풀린다.


이처럼 작은 환상의 여운은 완전히 망쳐버릴 수도 있었던 하루를 전혀 다른 하루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모든 것이 지치고 버겁게 느껴지는 하루가 지속된다면, 잠시 숨을 고르고 짧은 여행 같은 시간을 가져보자. 현실에서 절대 벌어지지 않을 허무맹랑한 상상이어도 좋고, 내가 바라는 상황을 유쾌하게 그려봐도 좋다. 그러다 보면 다시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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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게 다듬어진 순간만이

좋은 사진은 아니더라.


조금은 평범해 보여도

우리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긴 장면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사진일지도 몰라.

3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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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좋게 다듬어진 순간에 찍은 사진들은 당시에는 큰 만족감을 준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일상이 고스란히 담긴 자연스러운 모습들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삶이 가장 완벽한 순간은 아주 평범하게 보낸 '오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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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여름도

그저 덥고 지치기만 한 시간이 아니라,


신기루처럼 아름다운 순간들을

하나씩 마주하며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는 계절이 되길 바라.

74페이지 中

=====


그저 덥다며 짜증 내고 툴툴거리는 그날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이는 순간들로 남으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의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모두가 되길 바라며.



=====

번잡한 여름을 피해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보내.


조용하고 시원한 시간 속에서 읽는 책은

평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너도 이 고요한 순간의 한 모퉁이에

잠시 기대어 보길 바라.

80페이지 中

=====


일상에 상상을 더하면 뭐든 특별하고 새로운 일상이 될 수 있다.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곳이 내가 평소 가고 싶었던 휴양지라고 상상해 보면 어떨까?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여유를 즐기며 시원한 맥주 한잔해보는 것도 나름의 묘미이지 않을까?



=====

잠시 쉬어 가도 괜찮아.

열심히 달리기 위해선

숨 고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니까.

92페이지 中

=====


나에게 '쉼'을 주는 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열심히 달려온 날들이 있다면, 숨 고르는 시간도 꼭 챙겨주자. 그래야 다른 날 또 열심히 달릴 수 있다.



****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 공간과 일상에 대해 더 애정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또 마음먹기에 따라 따분하고 버거운 일상이 환상적인 무엇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너무 힘든 날들로 인해 지쳐있다면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하기 보다, 일상 속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아보자. 평소 하지 않던 작은 이벤트를 열어 혼자만의 행복한 시간을 가져도 좋고, 멍 때리며 '되고 싶은 나', '하고 싶은 것들', '떠나고 싶은 곳'을 한껏 머릿속으로 그려봐도 좋겠다.


그런 상상들에 젖어들다 보면 어느새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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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엄마 파란만장 인생 분투기 - 반드시 지켜주겠다는 약속
차이경 지음 / 이야기장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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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파란만장 인생 이야기!"



처음에 제목을 보고는 '파란만장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어?'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페이지를 펼쳐 들고 보니,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인생이 이 책 한 권에 담겨있었다. 흔히 말하는 '인생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주인공이 바로 여기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고딩엄마'라는 단어가 썩 좋게 들려오지는 않았다. 책임지지도 못할 짓을 저질러 놓고 '고딩엄빠'라는 이름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프로그램을 포함해서 내세울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거의 1세대(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1980년대 '고딩엄마'로 살아온 저자의 인생을 담았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얼마나 힘겨운 날들을 보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안쓰러운 마음도 일었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고 있는 에세이로, 준비도, 정보도 없이 덜컥 아이를 출산하게 된 '고딩엄마'의 성장담과 인생사를 담고 있다.


특히 저자의 삶을 통해 시대상의 변화와 관계, 상황, 그리고 성장까지 한눈에 볼 수 있어 어떤 면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사가 아니라 한국사를 한눈에 펼쳐놓고 본 기분마저 들었다.


이 책에는 '이런 일까지 겪었다고?'라고 말할 정도로 삶 전반을 다 담아냈는데, 그럼에도 지루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스토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시대적 배경 때문일까? 저자가 학업도 포기하고 고딩엄마로 살아가면서 겪은 힘든 상황들을 살펴보면, 현시대와는 다르게 '우울감'이나 개인적으로 힘든 감정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되지 않는다.


어쩌면 배고픔과 굶주림, 쫓겨날 위기, 시댁 어른들의 폭언과 폭력, 아이를 뺏길 뻔한 상황들과 같이 현실적인 부분에서 워낙 큰 사건들을 겪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저자는 '고딩엄마'가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 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것은 물론, 큰 병을 겪고도 몇 번이나 다시 일어서고, 남편의 뒷바라지와 시부모와 친정엄마의 케어, 그리고 둘째 아이까지 무사히 돌보며 함께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무엇도 소홀히 하지 않은 삶을 산 것이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의 사망을 끝으로 이야기는 끝이 나는데, 어쩌면 이것을 기점으로 진정한 3막이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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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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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고등학생의 나이로 저자는 덜컥 임신을 하게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시간은 흐르고 그러다 고3의 화창한 어느 봄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된다.


그때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동사무소에 제출할 서류를 받아놓고 나서였는데, 이 일로 주민등록증 발급은커녕 8일을 반 혼수상태에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마침 동생과 자신을 보러 온 엄마가 이를 발견하고 집에서 얼떨결에 아이를 받아내게 되면서 첫째 아이는 그렇게 집에서 출산하게 된다.


이때 임신중독증으로 몸이 붓는 등 꽤 고생을 많이 했는데, 먹고 살 일이 막막했던 터라 병원은 못 가고 집안에서 그냥 누워 지내는 것으로 별다른 조치 없이 보내게 된다.


그 집은 단칸방으로 엄마가 재혼하면서 동생과 둘이 살 수 있도록 구해 준 집이었는데, 임신과 출산 그리고 갑자기 생긴 아이의 아빠로 인해 넷이 함께 생활하게 된다.


이 일을 알게 된 시댁 어른들은 다짜고짜 찾아와 아기를 입양 보내자는 말부터 꺼냈고, 이를 거절하자 이후에도 여러 차례 찾아와 모진 말을 내뱉으며 상처를 준다. (참고로 시댁은 매우 부유한 집이었음)


당시 저자는 시집 식구도 친정 식구도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데, 핏덩이 하나만 처리하면 모두가 정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믿는 어른들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후에도 저자는 시댁 어른들로부터 수많은 수모와 폭행, 욕설 등을 당하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막내아들이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은 모두 저자의 탓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상은 이미 남편은 폭력 사건으로 학교를 그만둔 지 오래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간간이 친정엄마가 새아버지 몰래 도와주고는 있었지만,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않은 두 젊은 엄마 아빠가 자력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쫓기듯 이사한 것이 수십 차례였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일상이었다. 다행히 아기가 순하고 착해서 별달리 보채는 것은 없었지만, 종종 분유가 떨어지거나 한겨울 냉방에서 보내는 일도 허다했다.


이 와중에 백일 때는 시댁의 술수에 휘말려 아기를 뺏길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결국 끝까지 아기를 지켜낸다. 그러다 남편이 정신을 차리게 되면서 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먹게 되고, 이로써 시댁 어른들의 도움으로 공부해서 대학에 합격하게 된다.


대학을 다니는 한동안 남편의 외도로 마음이 들끓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남편이 대학을 졸업한 이후 바로 취업하게 되면서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결혼식도 올리게 된다.


덕분에 아이의 출생신고와 저자의 주민등록 신고까지 모두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조금씩 안정세를 찾는 모양새를 띄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도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게 흘러간다.


새아버지는 바람이 나서 재산을 가지고 도망쳤고, 이 일로 친정엄마는 도망간 남편을 잡겠다고 차를 사고 주변에 돈을 빌렸지만, 그 빚을 다 딸에게 전가하게 되면서 저자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또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시어머니가 풍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먼 거리를 걸어 병원까지 식사를 챙겨주게 되는데, 이것이 어느새 온 가족 식사를 챙겨주는 일이 된다. 하지만 이 일로 잠시 인정받게 되면서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가까워지기도 한다.


남편은 어느 날 입영통지서를 받게 되는데, 면제를 받기 위한 저자는 온갖 노력을 하지만 모두 무산되고 둘째 출산까지 한 달간의 유예만 받아들여진다.


저자는 둘째를 낳은 후 심한 빈혈로 인해 한동안 병원에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는데, 이때 남편은 뇌 쪽에 종양이 발견되면서 그토록 바라던 병역면제를 판정받게 된다.


이 외에도 좀 살만해질 즈음 저자는 희귀 난치성 질환이라 불리는 '크론병' 진단을 받게 되고, 큰 아이는 귀가 중에 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시어머니는 앞서 진단받은 치매와 중풍에 이어 폐암에 걸리게 되면서 결국 사망하게 된다.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와중에 우연히 참여한 주부백일장 대회에서 장원에 당선되면서 문학소녀의 길을 가게 됐고, 덕분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합격하는 기쁨도 맛보게 된다.


남편도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면서 한때는 가족 모두가 공부하는 학생이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또다시 현실적인 문제들에 부딪히며 저자는 결국 대학을 자퇴하게 된다.


하지만 운전면허증을 따고, 글을 쓰는 등 끊임없는 활동을 통해 자기 계발을 하게 되면서 어느새 떳떳한 엄마이자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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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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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비싼 건 아니다. 어릴 땐 천하게 키우라고 했어. 젊을 때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있다. 괜찮다. 넌 꼭 잘 살 거다. 네가 지금 고생한 거 나중에 다 돌려받을 거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아라. 넌 꼭 잘될 거다."

15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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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저자를 다독여 주며 '잘 될 거라고' 이야기해 준 사람은 큰 고모가 유일하다. 없는 살림에도 아이 생일 선물을 사 와 인사를 건네고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말하는 큰 고모님 덕분에 저자는 그나마 시댁 식구들에 대한 미움을 덜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작은 아기를 끌어안고 마당 한가운데서 시부모님한테 폭행과 폭언을 듣는데도 그냥 보고만 있던 동네 주민들과 남편의 형제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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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뭐 하느라 여태 그 모양인 거니? 어떻게 하면 이렇게 나락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거야?"

(...)

언제나 가장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차라리 남들은 성실하지만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남편을 안타까워하고 마음으로라도 도와주려고 했다.

33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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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집안에서 6남매 중 막내로, 유달리 더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처럼 상처 주는 말들을 듣고, 제때 부모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보다 못한 가족'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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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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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파란만장한 인생 분투기'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다 보면, 영화 저리 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인생 산 넘어 산이라더니 어쩜 이리도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지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청춘 시절에 한 번쯤 우스갯소리로 '인생=고난'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저자는 이 책에 끊임없이 밀려오는 인생의 파도를 그저 덤덤하게 풀어냈는데, 개인적으로는 당시 속마음은 어땠는지 묻고 싶다.


'그때 이혼하고 싶지 않았는지', '왜 끝까지 남편과 함께 하게 됐는지', '시댁 식구들이 많이 밉진 않았는지', '어떤 힘으로 버텼는지', '대학을 자퇴했을 땐 아쉽지 않았는지' 등등.


묻고 싶은 질문들이 너무 많다. 80년대의 삶을 돌아보면 경제적으로 결코 넉넉하지 않은 시대다. 또 고등학생의 임신이나 출산이 호락호락 넘어가던 시절도 아니다.


끝에 다다라 부부가 중졸이라고 해도 납득할 법한데, 이들은 그렇게 인생의 종지부를 찍지 않았다. 필요성을 느껴 열심히 공부했고, 그렇게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게 된다. 그리고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도 하게 된다.


희귀병에 걸려 좌절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다시 일어섰고, 그 와중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전을 이어가며 열심히 인생을 살아간다.


분명 그냥 내려놓고 싶은 날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모든 날들을 견디고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맺게 되지만 아마 이후부터는 또 새로운 인생 챕터가 시작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그 인생 이야기에는 가족이나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더 많이 자리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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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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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잡을 수 없는 먼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느낌!"



<영혼 없는 작가>라는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인데, 같은 말이지만 다른 의미로 영혼 없이 두둥실 어딘가를 떠돌다 온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장소, 관념, 언어, 시대, 단어, 개념 등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저 떠오르는 어떤 소재에 대해 그냥 써 내려간 느낌이 드는 책!


형식과 장르 구분에서 벗어나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의 글을 계속 읽다보니, 이것이 어떤 느낌에 대한 글인지, 아니면 사유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좀 낯설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읽다 보니 어느새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지고 그 자체로 글자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종내에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뭔가 애매하고 알쏭달쏭한 느낌이 들어 어떻게 서평을 써야 할까 내심 고민이 되기도 했던 책이다.


그런 생각이 이어질 때쯤 반짝 눈에 들어오는 글귀를 가끔 만나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아주 오랜만에 쉴 수 있는 그루터기를 만난 기분이 들어 내심 안도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총 3개의 파트로 구성된 이 책은, 어떤 형식과 소재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들며 상상, 느낌, 경험, 사유 등에 대해 나열한 에세이다.


그래서인지 적응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는데, 그럼에도 끝까지 완벽하게 작가의 세계관을 이해하지는 못한듯 하다.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니, 이해를 못하면 못하는 대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이 책에 대해 소개하고 기록하려 한다.


무엇보다 글감의 소재와 대상들에 대한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 그것을 모두 작가의 세계관에 맞춰 받아들일려고 하면 가랑이 찢어질 것 같아 언어의 세계에서 말 그대로 떠돌다가 돌아왔다.


만약 언어의 세계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매력과 통념을 뒤흔드는 이색적인 경험을 맛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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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다와다 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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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와 일본어로 글을 쓰는 작가.


<영혼 없는 작가>는 몸과 언어의 이동을 경험하며 낯설게 감각한 세계의 정경을 펼쳐 보인다. 작가는 말에서 소리를 채집하고, 소리를 몸으로 통과시키고, 몸을 다시 말로 변신시키는, 이 섞임과 깨짐의 사유로 언어와 문화의 '사이'를 예민하게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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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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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문장들은 나를 그루터기에 앉혀 잠시 쉴 수 있게 해준 문장들 중 일부다. 첫 번째는 공감 가는 문장이었고, 두 번째는 언어유희가 돋보이는 글이었다.


책 읽는 사람 오른쪽에 앉은 여자는 책 읽는 사람을 보지 않는다. 여자는 내내 오른쪽만 보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리라는 듯이 말이다. 옆 사람의 책을 몰래 같이 읽는 것은 전철 승객으로서는 가장 파렴치한 행위로 간주된다. 여자가 그 책을 도서관에서 보았다면 그 내용에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사람들은 보통 때라면 결코 읽지 않았을 책에 관심을 갖게 된다.


전철에 터질듯이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거기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좁지 않다. 책의 페이지들은 책 읽는 사람의 몸에 무한히 큰 공간을 만들어준다.

10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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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이용해 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경험해볼 만한 내용이라 읽으면서 내내 웃음이 새어나왔다.


멍 때리고 앉아 있다 보면 옆 좌석에 앉아 무언가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 자꾸만 시선이 가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억지스럽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했는데, 그런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희한하게 그럴때는 평소 전혀 관심이 없던 것들조차 호기심으로 다가오곤 하는데, 그런 디테일을 잘 잡아낸 문장 덕분에 더 집중해서 읽게 되었던 것 같다.


반대로 미어터질 것 같은 지하철 속에서도 책에 빠져들면 시공간을 초월하게 된다. 사면에 둘러싸여 있는 공간도, 맞닿아 있는 사람들도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페이지 속에 존재하는 것들에 집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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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있어요. 다른 언어에서는 디스크가 허리 디스크와 상관이 없을 수도요. 하지만 영어에서는 척추 안에 디스크가 들어 있어요. 사람들이 살면서 취하는 모든 몸의 자세가 그 안에 다 저장된답니다. 그리고 디스크가 허리에서 튀어나와 신경 줄을 마찰하면 매번 고통스러운 음악이 연주되지요.

26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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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동음이의어를 적절하게 활용해 언어유희적으로 표현한 문장으로, 청각과 시각적 요소가 쉽게 그려지는 단락이다.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몸의 자세가 삐뚤어지면 디스크가 허리에서 튀어나와 신경 줄을 '팅팅' 튕기고, 그 때문에 고통에 찬 신음이 음악처럼 연주되는 모습이 그려져 디스크(Disk)라는 단어가 더 머리에 콕 박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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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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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쓴 책 전체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앞서 나에게 그루터기처럼 찾아왔던 기발한 문장들과 같은 느낌들 때문에 아마 독자들이 '재출간을 열렬히 요청한 책'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 책에 대한 이미지는 나에게 있어 '마르크 샤갈'의 그림처럼 다가왔는데, 꿈 속에서 두둥실 떠다니며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는 느낌과 같았다.


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자유로운 느낌, 그 자체였다. 어떤 것은 따라잡지 못해 불안했고, 또 어떤 것은 기발함과 창의성에 무릎을 탁 치며 한껏 즐기기도 했다.


이 작가는 일본어와 독일어 이중 언어로 글을 쓴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사고하고 언어를 글로 풀어내는 데 있어 조금 더 경계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작가 본연의 사고나 체계가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때문에 모든 벽을 허문 상태로 자리한 다양한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사고를 접할 수 있었다.


가끔 '꼭 이렇게 써야만 해!'라는 사고에 사로잡혀 한 글자도 전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나체 상태로 펼쳐진 <영혼 없는 작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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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서점 북두당
우쓰기 겐타로 지음, 이유라 옮김 / 나무의마음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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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점 북두당과 고양이들의 사연을 통해 '이야기'가 지닌 매력과 힘을 흥미롭게 그려낸 소설!"



일본의 여느 소설처럼 잔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읽었는데, 의외로 이 소설은 보통의 일본 소설에서 잘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면모와 글쓰기에 대한 의미와 통찰에 대해 담고 있어 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적인 느낌이 아예 배제된 것은 아니었는데, 일단 화자로 '고양이'를 앞세우고 있었고, '고서점'을 배경으로 두고 있어 일본스러운 느낌은 그대로 느껴졌다.


또 일본적인 '신화'나 '미신'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흔히 접하는 일본 소설의 감성적인 면모와 예스러움, 그리고 기묘함은 그대로 유지한 듯했다.


하지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방향성이나 풀어가는 방식이 여타 일본 소설과는 달라 확실히 차별성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총 9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아홉 번째 생을 살고 있는 검은 고양이 쿠로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가 아홉 번의 생을 살며 겪었던 이야기를 비롯해, 마지막 생에서 북두당을 만나게 된 사연, 그리고 북두당의 주인 기타호시 에리카와 그 외 그곳에서 머물고 있는 네 마리의 고양이에 대한 사연까지 다루며 '작가'와 '글쓰기', 그리고 '이야기'에 대한 내용을 흥미롭게 담아냈다.


어쩌면 단순히 인간을 불신하고 경멸하는 쿠로가 북두당을 만나 행복한 묘생으로 아홉 번째 생을 마무리했다는 전개로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맺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안에 여러 작가의 삶과 창작의 고통, 고양이들이 진명을 가진다는 의미 등에 대한 에피소드를 더 추가하여 '글쓰기'에 대한 어려움과 이야기가 주는 힘과 의미를 한층 더 부각시켰다.


그리고 어쩌면 저자 자신의 경험담일 수도 있는 내용을 담아 독자들이 '이야기'에 대해 더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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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및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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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당

-기타호시 에리카가 주인으로 있는 고서점

-작가와 함께 생을 살았던 네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머물고 있음

-북두당에는 저주의 주술이 걸려있음


■쿠로

-세 번째 생에서 만난 주인을 특별하게 여기고 있음

-그 외 나머지 생에서는 비참한 묘생을 보냄

-인간에 대한 불신이 큼

-평생 진명(진정한 이름)을 얻지 못함

-스스로 세 번째 생에서 만난 주인의 이름을 빌려 '긴노스케'라 부름

-현재 '아홉 번째' 마지막 생을 살고 있음

-기대 없이 독립적이고, 본능적으로 사는 것이 목표


■기타호시 에리카

-고서점 북두당의 주인으로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

-고양이들에게 '마녀'로 불림

-고양이와 의사소통이 가능함

-자신보다 고양이가 우선인 사람

-여태껏 스물일곱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지냈음

-평생 북두당에서 책에 둘러싸여 책에 홀린 채 살아가야 하는 저주에 걸림

-특별한 정체를 숨기고 30년마다 모습을 바꿔가며 150년 동안 북두당에서 살고 있음


■루루

-암컷 고양이

-담갈색과 흰색이 섞인 무늬

-인간처럼 두발로 걸으며, 서점 재고 관리를 맡고 있음

-여섯 번째 생을 살고 있는 중


■키누

-암컷 고양이

-흰색과 검은색, 갈색이 어우러진 삼색 무늬

-일곱 번째 생을 살고 있는 중


■카아

-수컷 고양이

-오렌지빛 털에 갈색 줄무늬가 선명

-기무라에 의해 사망함


■치비

-수컷 고양이

-검은색과 흰색 무늬가 대칭을 이루고 있음


■지이노

-하얀 털을 가지고 있음

-카아 사망 후 북두당에 들어온 고양이


■간자키 마도카

-북두당에 자주 오는 단골손님 중 하나

-일곱 살에 쿠로와 처음 알게 됨

-아주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즐겨함

-작가를 꿈꾸지만 어떤 이유로 포기하게 됨


■기무라

-30대 중반으로 북두당의 단골 중 한 명

-기타호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 주말마다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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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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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는 "고양이는 아홉 생을 산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처럼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들도 모두 아홉 번의 생을 산다.


이 중 전생에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긴노스케(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살았던 검은 고양이 쿠로는 여덟 번의 비참한 묘생을 끝내고 마침내 아홉 번 생을 살게 된다.


앞선 생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쿠로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뿌리 깊이 박혀 있어,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살아가기를 택한다.


하지만 태어난 시골을 떠나 도시로 오자마자 어떤 강력한 이끌림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북두당 앞에 당도하게 되고, 이로써 인간과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신념은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쿠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고 까칠한 면모를 보이며 기존 고양이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데, 이 덕분에 어쩌면 멈춰 있던 운명의 수레바퀴가 이 이야기 이후에는 변화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쿠로가 도시에 당도하자마자 강력하게 이끌린 이곳은 고서점 '북두당'으로, 고양이들의 언어를 알아 듣고, 고양이들에게 '마녀'라 불리며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기타호시 에리카가 주인으로 있는 곳이다.


또 이곳에는 네 마리의 고양이가 함께 살고 있는데, 이들은 루루, 키누, 카아, 치비로 모두 전생에 작가와 함께 산 인연이 있는 고양이들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의 진명과 작가들과 살았던 삶에 대해 에리카에게 이야기하며 마음을 활짝 열었지만, 쿠로만큼은 이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고 죽는 날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신비한 고서점 북두당과 서점을 운영하는 주인 에리카는 특별한 비밀을 품고 있는데, 이것은 후반부에서 쿠로가 죽음에 다다랐을 때 밝혀지게 된다.


한편 북두당에 머물렀던 고양이들은 죽음을 앞두고 아마테라스(일본 황실의 황조신이자 신들의 군주)를 꼭 한번 마주하게 되는데, 이때도 쿠로의 까칠한 성격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덕분에 이전까지와는 다른 미약한 변화의 조짐이 포착됨과 동시에 이 다음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북두당에는 많지 않은 단골손님들이 몇몇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네에 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서점을 이용했던 '간자키 마도카'와 에리카에게 호감을 가지고 주 1회 방문했던 '기무라'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의 전혀 다른 행보도 눈여겨볼 만한데, 특히 마도카와의 에피소드 속에 등장하는 쿠로의 색다른 모습은 웃음을 자아냄과 동시에 절박함이 느껴진다. 여타 대상과는 다른 유일무이한 모습을 보여줬던 쿠로의 복잡한 심정과 마도카의 성장담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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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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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생에 이르러서야 겨우 깨달았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허무한 일이라는 것을.

인간이라는 종족은 산다는 것을 괜히 복잡하게 생각한다. 배불리 먹고 실컷 자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동물은 충분히 만족스러워한다.

(...)

그런데도 인간은 대개 돈이 필요하다느니, 살아가는 보람이 어쩌니 하며 쓸데없이 키를 재고, 자꾸만 뭔가를 더 바란다. 진심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간이 그들 중 얼마나 될지 솔직히 의심스럽다.

1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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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의 생을 반복한 쿠로는 이제 시니컬한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이 허무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복잡하게 사는 인간들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양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 세상에 대한 견해지만, 또 한편으로는 틀린 말도 아닌지라 우리가 고통이라 말하는 것들이 사실 진짜 고통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게 됐다.


너무 재고, 따지느라 우리 스스로를 고통에 빠뜨린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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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책에 몰두해 있던 그 모습. 문학인지 뭔지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그 외의 모든 걸 내던져도 좋다는 듯한 그 태도. 정신없이 글자를 좇으며 누군가가 만들어낸 상상의 세계 속에서 꿈을 꾸고 동경을 품는 그 뜨거운 눈빛.


그 모습은 어쩔 수 없이 나를 집으로 들였던 그 신경질적인 사내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7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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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카가 독서하는 모습을 보고 유일하게 자신이 주인으로 섬기고 싶었던 그를 떠올린 쿠로. 어쩌면 그래서 작가이기를 포기한 그녀를 돕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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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이라는 세계를 이해하면 할수록 인간이란 존재는 지독히 어리석게 느껴진다. 그저 먹고 자며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할 텐데, 굳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고, 몸부림치며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기까지 한다.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생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통을 견디며 창작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들의 얼굴은 어쩐지 눈부시다. 그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13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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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이라는 세계에 대해 느끼는 양가감정을 표현한 문장으로, 이 때문에 어쩌면 쿠로는 자신이 지켜 온 삶의 태도를 잠시 내려놨는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자신을 만지도록 두지 않던 쿠로가 먼저 다가서고, 아양을 떨고,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나서는 일은 모두 창작이라는 세계를 이처럼 깊이 이해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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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북두당이야. 다른 데랑 달라. 내가 어떤 과거를 살았든, 다른 누가 어떤 삶을 살았든, 전혀 상관없어. 중요한 건 단 하나, 지금뿐이야."

19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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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당의 다른 고양이들과 끝까지 다른 삶을 살았던 쿠로지만 유일하게 그가 북두당에 북며들은 순간을 꼽자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한다.


계속 나는 '아홉 번째 생이야'를 남발하던 쿠로.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과거 누구와 어떤 삶을 살았든 현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의 입으로 위와 같이 이야기한다. "중요한 건 단 하나, 지금뿐이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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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곧 치유다. 마음의 상처를 글이라는 형태로 바꾸어 바깥으로 끌어내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마주하며 천천히 받아들이는 과정. 그렇게 먼저 자신을 치유하고, 언젠가는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도 가닿게 된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마음의 안녕과 평온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된다.

279~28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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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단순히 아홉 번의 생을 사는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아니다.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돌려 돌려 하고 있는데, 북두당의 주인 에리카, 북두당의 단골손님 마도카, 그리고 북두당이 머무는 고양이들이 과거 함께 살았던 작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리카의 손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쓰게 만든 쿠로가 그렇다.


이들은 내면에 다들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인물들로,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은 물론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까지 치유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책에는 글쓰기와 아주 밀접한 장소에서 오랜 시간 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글은 쓰지 못하는 형벌을 받는 이와 그리고 집안 사정으로 자신의 꿈을 접은 소녀, 그 외 형편없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위해 끝까지 글을 썼던 여러 작가들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이야기란 무엇이고, 글쓰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색다른 방법으로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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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충동을 타인의 마음에 정면으로 부딪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깊고 선명한 흔적으로 남기는 일. 그런 공격성마저 내포한 표현 방식에 매료되어 기꺼이 그 가시밭길을 선택하는 바보 중의 바보들. 글을 쓴다는 건 어쩌면 그런 일인지도 모른다.

37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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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중의 바보'와 같은 다소 격한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깊은 애정을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문장이다.


후반부에 들어서면 글 쓰는 것에 대해 망설임과 두려움을 갖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정면으로 부딪히는 모습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를 보다 보면 이들이 살아온 흔적과 내면에서 뚫고 나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써 내려가는 모습들이 절로 그려진다.


그래서 그것을 지켜본 쿠로는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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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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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등장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살펴보면, 이 책이 단순히 고서점 혹은 고양이들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두당에는 전생에 위대한 작가들과 함께 살았던 고양이들만 모이도록 인과 되어 있다는 것

▶그런 고양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책방 주인

▶괴성=책의 신

▶유명한 작가들이 대거 등장

▶어린 시절부터 단골손님이었던 마도카가 작가를 꿈꾸다는 점


이런 내용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읽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쓰는 행위'로까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두당에 머무는 고양이들의 전생 이야기를 통해 그들과 함께 했던 작가들이 창작활동을 하는 데 있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풀어내면서 그들은 왜 글을 쓰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나는, 우리는 왜 고통을 인내하면서까지 글을 쓰는가?


개인적으로는 끝까지 시니컬했던 쿠로가 아마테라스를 만난 이후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쿠로로 인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수레바퀴가 과연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기대를 품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토피아이자 주술적 감옥이었던 '북두당'의 봄과 그곳을 150년 동안 지키고 있던 에리카의 성장이 어떤 식으로 꽃피울지 짐작이 되지 않아 더 기대감을 품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대를 이어 '작가'들에 대한 삶의 기록을 남겨왔던 북두당. 이후에는 과연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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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맨을 위하여 -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신보라 지음 / &(앤드)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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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되고 싶어 하는 울트라맨! 그 절박한 외침이 의미하는 바는?"



호기심을 자아내게 했던 책 제목과 만화 캐릭터 표지 디자인 때문에 만화적 요소가 결합된 소설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막상 마주한 스토리는 생각보다 무겁고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특히 약간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던 '울트라맨이 되고 싶어'라는 말속에 담긴 의미가 너무 절박한 외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더 먹먹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초인적인 힘을 가진 울트라맨이 되고 싶었던 한 소녀!


망상인지 현실인지 혹은 착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전반부를 지나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현실 속에 아주 참혹한 모습으로 소녀는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세상 속에서 억울함을 홀로 견디며 살아야 했던 소녀, 그리고 그런 그녀의 이야기는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너와 나의 이야기를 대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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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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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15세 소녀

-전학 첫날 메리를 만남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엄마 사이에서 홀로 생존 중


■우주의 엄마

-남편이 사망한 이후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가고 있음


■성태

-우주의 아빠

-화물트럭 운전사였던 아버지는 외제차와 충돌해 사망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살인자로 낙인찍힘


■메리

-15세 소녀

-본명: 문형은

-엄마로부터 학대 당하고 있음

-학교에서는 왕따

-엄마의 학대를 외부에 숨기고 유일한 버팀목인 엄마의 그늘에서 여전히 생존 중


■곽태주

-메리의 엄마

-기분이 나쁘면 누구든 머리를 쥐어뜯음

-풍채가 좋음(170cm가 넘는 키에 몸무게는 약 90kg 정도)

-낭만 상가에서 비디오 감상실을 운영 중


■정심 아저씨

-노래방 '환락송'의 주인

-중국인으로 추정

-노래방에 갈 때마다 늘 우주와 메리에게 단팥빵 하나를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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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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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전학 간 첫날 메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둘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우주는 앞선 학교에서 폭력 사건으로 인해 강제 전학을 당하게 되는데, 사실과 다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아이들을 참지 못해 벌어진 일이다.


한편 메리는 학교에서 왕따로, 그래서인지 함께 지내는 우주 또한 덩달아 친구들과 거리감이 생긴다. 그래서 둘은 더 함께 보내는 날이 많아졌는데, 이 덕분에 우주는 메리가 하나뿐인 엄마로부터 학대당하고 있다는 비밀까지 알게 된다.


둘은 노래방과 비디오 감상실, 메리의 집을 전전하며 망상과 착각, 현실 사이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는데 그러다가 우주는 곳곳에서 검은 구멍을 발견하게 된다.


엄마 침대가 있는 곳, 노래방의 구석진 장소에서 그것들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이내 그 구멍 안에서 검은 어둠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기에 이른다.


텅 비어 있는 건지, 꽉 차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구멍에서 우주는 양가감정을 느낀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파괴된 가정 속에서 자란 우주가 마주해야 했던 현실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메리와도 관계가 소원해진 어느 날 사망한 엄마와 그 옆에 있던 우주가 사람들에게 발각된다. 이 일로 우주는 조사를 받게 되고, 조사가 끝난 뒤 마주한 현실 속에는 단팥빵을 들고 서 있는 정심 아저씨가 있었다.


이후 우주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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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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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고통스럽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아.

(...)

너도 아프니?

하고 내가 묻자

조금.

하고 메리가 제 코끝을 손등으로 비비며 대답했다.

1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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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 등장하는 소녀 둘은 모두 지독한 아픔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보통의 15살 아이라면 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서로 건네며 공감과 이해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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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천히 도천동을 향해 걸었다.

도천동에는 아파트 단지가 하나 있었다. 그곳은 또 두 집단으로 분리되었는데 1동과 2동은 매매 단지였고 3동은 임대 아파트 단지였다.

나는 1동에 살았다. 학교 친구들은 대게 1동과 2동에 살았다.

메리는 임대 아파트에 살았지만, 매번 나와 함께 1동의 입구로 들어섰다.

22~2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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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돈으로 나뉘는 이분법적 세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는 대목이다. 메리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3동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이로, 왕따를 당하고 있다.


아빠의 사고 보상비로 우주는 1동에 살고 있지만, 실상 속을 들여다보면, 메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래서 둘은 친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3동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고 싶어 늘상 1동의 입구로 들어서는 메리의 심정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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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이 어둠이구나.

나는 중얼거렸다.

아무런 빛도 나오지도, 들어서지도 않을 어둠.

어둠이란 구멍과 비슷했다. 텅 비어 있는 건지, 꽉 차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

4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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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공허, 혹은 외로움, 어쩌면 현실을 반영한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는 어둠과 구멍.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 우주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사랑도, 보살핌도. 그래서 어쩌면 어둠과 구멍이 그토록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현재를 나타내는 상태이자 또 내가 채우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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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 보이는 문고리가 약했다. 문을 두세 번만 흔든다면 곧장 열려버릴 것 같았다.

왜 내부여야만 할까. 그럼에도 다를 게 없는데.

(...)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오줌을 마저 눴다.

밖에서 들리는 조그만 소음에도 문고리를 휙 낚아챘다. 언제까지고 이 문고리를 쥐고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서.

4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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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리는 현재 우주가 겨우 붙잡고 있는 내면의 아주 약한 고리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곧장 누군가 부숴버리면 언제고 열릴 수 있는 문고리지만 그럼에도 불안할 때마다 꼭 붙잡고 있는 문고리. 그것은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그래서일까? "언제까지고 이 문고리를 쥐고 살아야 하나"라는 마지막 문장은 스스로를 언제까지 지켜내며 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의 소리를 내뱉는 것 같아 더 안타깝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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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누구의 잘못도 없는 반복 속에서 자랐다. 그것은 굉장히 순도 낮은 자람이었다.

5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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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어처구니없는 죽음과 돈과 권력에 의해 뒤바뀐 현실. 이로 인해 우주의 가족은 파괴되고, 이 때문에 우주는 결핍 속에 자라게 된다.


그 속에 우주 가족의 하나도 잘못은 없다. 하지만 우주는 아빠에 이어 엄마까지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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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하루에 여섯 가지의 약을 먹어야 했다. 그것은 분홍색과 노란색, 흰색이 섞여 있어 어마는 마치 봄을 먹는 것 같았다.

5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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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잃어버린 우주가 유일하게 봄을 맞이할 수 있는 순간은 어쩌면 엄마가 여섯 가지의 약을 먹을 때가 유일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때문에 더 슬프게 다가왔던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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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고는 '포르쉐 충돌사고'라는 내용으로 헤드라인에 떴다.

(...)

어디에도 상대편 운전자의 음주 사실은 적혀 있지 않았다.


포르쉐 운전자의 과실에 대한 기사가 떴을 때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사라지는 글처럼 포르쉐는 빠르게 잊혀졌다.

(...)

아버지의 유물처럼 아버지의 기사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

5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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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를 모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상대편 운전자의 음주로 인해 아버지는 불에 타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모든 내용은 사실과 다르게 알려지게 된다.


잠시 잠깐 포르쉐 운전자의 과실에 대한 기사가 뜨기도 했지만, 그 내용은 금방 세상에서 사라졌고 오로지 아버지의 사고 내용만 유물처럼 남아 우주와 그녀의 가족들을 괴롭히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억울한 사람은 말이 없고, 넘치듯 많이 가진 사람은 과오가 사라지는 세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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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울트라맨이 되고 싶다.

진짜 울트라맨이 되고 싶어.

어디서든 어깨를 움츠리지 않을 수 있게 단단한 갑옷을 가진 울트라맨이 되고 싶다.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다.

무언가를 쓰다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깊숙이 파버릴 수 있는 단단한 손가락을 가지고 싶다. 열 개, 스무 개, 아니, 셀 수조차 없는 수많은 손가락을.

6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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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에서 우리는 우주가 절실하게 바라는 모든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왜 울트라맨이 되고 싶은지, 그것이 가진 메리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이다.


가족을 잃고 홀로 세상과 맞서야 했던 우주는 늘상 움츠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자신을 든든하게 보호해 줄 단단한 갑옷이 필요했을 것이고, 또 자신을 두고 사라진 부모님을 대신해 사라지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향해 삿대질하고 상처 준 사람들을 단단한 손가락으로 깊게 파 버리고 싶지 않았을까?


자신을 지킬 힘도 없었던 우주가 유일하게 혼자 망상하며 할 수 있었던 일은 어쩌면 이렇듯 울트라맨이 되고 싶다는 외침이 다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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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평화로웠다. 아버지와 등가교환 한 집. 아버지의 죽음을 놓고, 포르쉐와 엄마의 타협으로 가질 수 있었던 집. 그러므로 아버지처럼 평화로운 집.

6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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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와 반어법을 활용해 이야기하고 있는 '평화로운 집'은 죽음과 고요함을 상징한다. 죽은 자로 인해 지어진 집, 그리고 죽어가는 이가 머무는 집. 그래서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밖에 없는 집.


이 집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아. 아버지처럼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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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각의 공간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꾸역꾸역 미워했다.

무엇을 미워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언제까지고 사방이 꽉 막힌 이곳에서 눈을 뜰 것 같은 막막함. 언젠가는 이 집이 흔들려 천장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주저앉아 내리면, 2층과 3층, 16층까지 모든 사람들이 내 위로 차곡차곡 쌓이겠지. 할멈이 파는 과일 바구니 속의 과일처럼. 가장 썩은 것은 가장 아래로.

나는 열여섯 가구의 사람들을 모두 등에 업은 채 사는 기분이 들었다.

6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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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심정을 아주 잘 드러낸 문장이 아닐까 싶다. 사각의 공간 속에 빠져 허우적대며 막막함과 책임감, 두려움, 불안함 속에 매일을 사는 기분.


이것이야말로 우주가 가족을 잃고 매일을 사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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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구멍인 거지.

나의 말에 메리는 정답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구멍에는 모든 것이 있지. 그러니까 구멍인 거야.

메리가 말했다.

8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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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다른 관점과 시각을 우주와 메리의 입장을 통해 극과 극으로 보여주고 있는 문장이 아닐까 한다. 우주는 구멍을 통해 공허함과 결핍을 느낀다. 반면 메리는 구멍 안에 모든 것이 있다 느낀다.


이 극명한 차이의 원인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 어쩌면 메리는 구멍을 탈출의 도구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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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 앞으로 다가가 두 팔을 벌렸다.

나를 안아주세요.

나를 살려주세요.

나를 그저 사랑만 해주세요.

그들이 동시에 다가왔다.

19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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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 혹은 착각 속에서 헤매며 우주는 사랑을 간절히 바란다. 꿈인지 현실이지 구분되지 않는 알 수 없는 곳에서 안아달라, 살려달라 강렬하게 외치자 그들은 마침내 여기에 응답해 준다.


우주의 내적 심리가 얼마나 불안하고 결핍이 심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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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살아남는 방식이라면, 나는 이제 어디든 끼어들고 달라붙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단팥처럼, 이가 시릴 만큼 달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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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사망이 사람들에게 발각된 이후 우주는 조사를 받게 된다. 조사를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온 우주는 앞선 삶과는 다른 삶을 살리라 굳게 결심한다.


메리의 방식과는 다른,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살아갈 결심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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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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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의 노래 '울트라맨이야'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게 되었다는 이 소설은 가진 것 없고 애정이 결핍된 소녀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녀는 불우한 환경에서 홀로 구석진 곳만 바라보며 산다. 사람들은 긍정과 희망을 강요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을 찾기란 어렵다.


그렇게 늘상 버겁고 답답한 삶을 이어가던 우주는 어느 날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엄마와 함께 발견되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 이유에는 스스로 울트라맨이 되었다고 믿게 되어서는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원소 중에 최고는 바로 사랑이라고 믿었던 소녀 우주, 그녀는 엄마의 죽음 이후 진짜 혼자가 되면서 격렬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망상(혹은 착각)을 믿게 되면서 다른 방식으로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아이는 혼자 클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진짜 혼자가 된 아이는 망상과 착각을 통해 새로운 무엇을 불러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 우주는 깨달을 것이다. 세상에 울트라맨은 없다는 사실을. 그때쯤이면 그녀는 아마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훌쩍 자라 어른이 된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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