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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넓고 깊으며 세밀한 지식을 가진 분이 쓴 문학동네 판 <닥터 지바고> 소개 글을 읽었다. 문예 영화(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와 원작 소설을 비교할 때 대개는 원작 소설을 더 좋아하는데 <닥터 지바고>는 영화와 소설의 우열을 가리지 못하겠단다. <닥터 지바고> 영화를 볼 때는 꼭 70mm 대형 화면으로 봐야 닥터 지바고의 참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70mm 대형 화면이라야 러시아의 광활한 설경과 주인공의 방황이 맞물려서 우러나오는 감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번역가 박형규가 1990년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낸 <닥터 지바고>가 우리나라 최초의 러시아어 직역 본이라고 한다. 서지 정보를 찾아보니 박형규는 2001년, 2006년, 2009년 연이어 역시 열린책들에서 개정판을 출간하다가 2018년에는 문학동네에서 <닥터 지바고>를 출간했다.


번역에 대한 신뢰와 대형화면으로 멋지게 구현되는 <닥터 지바고>를 다시 읽고 싶어서 얼른 주문을 넣었다. 어찌나 사고 싶었는지 너무 서두른 탓에 작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어제 배송받은 책 서너 권이 내 책상에 놓여있고, 오늘도 배송 중인 책이 있는데 말이다. 어쨌든 내가 저지른 실수라는 것이 별것 아니긴 하다. 나는 책을 배송 받을 주소를 3개 사용한다. 직장, 본가(주로 주말에 머문다), 혼자 지내는 숙소(직장 때문에 평일에 혼자 지내는 곳).


 주문한 책의 수량과 부피 그리고 택배가 도착할 것으로 예정되는 요일을 고려해서 주소지를 달리한다. 그러니까 <닥터 지바고>를 주문할 때 내가 지키는 몇 가지 조건과 배송지가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존재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꼰대로 치부되기 쉬운 50대 남자라서 그런지 내 돈 주고 책을 사면서도 이것저것 눈치를 보게 된다. 


하루를 멀다하고 직장으로 책이 배송되어 오고 사무실 책상에 업무용 책보다 취미 삼아 보는 책이 더 많이 쌓이면 월급도둑으로 낙인 찍힐까 두렵고, 아내와 함께 사는 본가는 본가대로 서재는 먼지가 쌓이고 책으로 터져 나갈 판인데 무슨 책을 또 사느냐는 아내의 꾸중이 무섭고 그렇다고 혼자 사는 숙소가 마냥 편하기만 하지는 않은 것이 엘리베이트가 없는 3층이라 무거운 책을 굳이 3층 문 앞에 두고 가는 택배 사원에게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책을 주문할 때 그날의 주문량과 도착 시기를 예측하여 위에 열거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주소지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배송지를 잘못 입력한 <닥터 지바고> 주문 정보를 수정하려는데 오류가 나는지 되지 않는다. 같은 과정을 5번 했는데도 잘못 선택한 주소는 요지부동이다. 


6번째 수정 시도를 하면서 아련하게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를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사무실 캐비넷을 열었는데 역시 내가 그토록 주문하려고 하는 문학동네 판 <닥터 지바고>가 뻔뻔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가 바보가 확실하다는 자백을 할 수밖에 없다. 분명 이전에 이 책을 주문할 때도 매혹적인 소개 글을 읽고 나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토록 까마득하게 기억을 하지 못할 수가 있는지 나의 뇌가 신비로울 따름이다. 물론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에 유재덕 셰프의 <독서 주방>을 읽다가 발견한 <음식과 전쟁>을 대뜸 주문했더랬다. 유재덕 셰프가 이 책을 배송 받고 펼치자마자 호그와트 마법학교가 떠올랐다는데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삽화와 흥미진진한 음식 이야기가 어우러진 <음식과 전쟁>을 배송받자마자 읽었다. 다 읽고 책장을 덮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이토록 유니크한 디자인과 내용이 담긴 책을 모르고 또 샀을 리는 없다고 수십 번을 중얼거렸다. 마치 죽음을 부정하는 말기 암 환자처럼 말이다 .다행히 직장에 있는 여러 곳의 내 아지트에는 <음식과 전쟁>이 없었다. 


주말에 본가를 가자마자 서재 문을 열었는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음식과 전쟁>이 놓여 있었다. 반성하건대 나는 혹시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고 택배를 받는 즐거움 때문에 주문하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 같은 책을 2번 주문했더라도 분명 어딘가에서 유혹하는 책 소개를 2번 읽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같은 책을 2번 주문하면서도 각자 다른 유혹과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책 소개를 하는 글쓴이가 그 책에 얽힌 각자 다른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니까 말이다. 머리가 나빠서 좋다는 것이 같은 책을 2번째 주문하면서도 1번째 주문하는 때와 마찬가지로 설레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좋은 책이란 이런 장점이 있는 것 같다. 독자에 따라서 너무나 천양지차의 매력과 경험을 느끼게 한다는 것. 어쩌면 내가 머리가 너무 나쁘기보다는 너무 좋은 책이라서 같은 책을 두고 개인에 따라서 극히 독특한 책 소개를 하게 만들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 같은 책을 2번 주문하긴 했지만 2번 모두 주문으로 이르게 하는 즐거움과 설레는 책 소개를 읽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그리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혹시 의학용어로 ‘치매’라고 부르는 것은 아닌지 슬며시 걱정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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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0-17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전하신가 봅니다.
언젠가 <독서만담> 저에게 두 권 보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한 권은 다른 분께 보내셔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그 책 한 권은 지금도 제가 가지고 있고, 또 한 권은 주민센터에서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 기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근데 책 정말 많이 사시네요.^^

박균호 2019-10-17 20:26   좋아요 1 | URL
아.그러고 보니...ㅎㅎㅎㅎㅎ
기증 잘 하셨고요. 혹시 <음식과 전쟁> 관심 있으시면 보내드릴께요. ^^
제법 비싼 책인데 상태는 새책이나 다름 없답니다.

2019-10-17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7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행운과 불운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지독히 운이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밝은 눈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에 붙어 산 지가 20년이 훨씬 넘었고, 주변에 읽고 있는 책이 없었던 경우가 거의 없이 30년 이상을 보냈는데도 지난주 안과에서 측정한 내 시력은 양쪽 모두 1.0이다.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을 때 초점이 흐려져서 활자를 읽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꼈지만 설마 내 눈에 이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히 독서용 안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안경원에 가보기로 했다. 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은 아니고 뭔가 책을 읽는 데 도움을 주는 아이템 인줄로만 알았다. 마치 책갈피라든가 독서대처럼 사용자의 건강과는 상관없는 독서가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물건인 것으로 생각했다. 


평생 안경을 써본 적이 없는 사람은 묘하게 안경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심하게 말하면 저렴한 패션 아이템(인터넷 쇼핑몰을 보니 독서용 안경은 2만 원이 채 되지 않더라)이나 하나 추가하자고 재미 삼아 난생 처음  고객으로 안경원에 들렀다. 동네 안경원이라고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내 눈의 건강함을 자랑할 기회 따위는 주지 않았다. 대뜸 멋지게 생긴 기계에 나를 앉히고 들여다 보란다.


 자신만만하게 안경사가 시키는 대로 보이는 대로 대답을 했다. 안경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서 나는 내 장래를 읽을 수 있었다. 그 표정은 신규 고객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근엄하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안경사는 피고석에 앉아서 처분을 기다리는 나에게 판결을 내렸다.


“네, 노안이 오셨군요. 정도를 보아하니 대략 1년 정도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쩐지 현미경처럼 생긴 물건이 심상치 않더니 정확하게 내가 책을 읽을 때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현대 기술은 정말 놀랍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쪽 눈을 가리고 검사하는 시력과 노안은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마치 죽을병이라도 선고받은 것처럼 안경사에게 ‘치료할 방법이 없느냐’고 몇 번이나 캐물었는데도 안경사는 특별한 치료법은 없고 갈수록 악화할 뿐이고 2년 뒤에 도수가 더 높은 렌즈로 교체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동안 홀수 해에 휴대폰을 교체해왔으니 내 돋보기 렌즈 교체 주기는 헛갈리지 않겠다)안경원의 진짜 고객이 된 나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안경테를 고르기 시작했다. 범죄자가 자기가 찰 수갑을 고를 수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다. 


뜻밖에 고객을 확보한 안경사는 승리자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위로의 덕담을 던져주었다. “그래도 먼 곳을 보는 시력은 정말 좋으시네요” 물론 그 와중에 나한테 잘 어울리는 테를 고르고 또 고르긴 했다어쨌든 들어갈 때는 한가한 쇼핑객이었는데 나올 때는 노안을 앓는 환자가 되었다. 다음날 가족들과 외출을 하는 길에 내 안경이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심 지금껏 겪지 못한 신문물의 성능이 궁금했다. 마침 이웃 동네 구미의 핫 플레이스로 소문난 삼일 문고를 가볼 셈이었는데 좋은 우연이었다.


 다만 딸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보채는 바람에 신문물의 성능 확인은 약간 뒤로 미뤄져야 했다. 식사하고 무려 3km의 산책 그리고 커피와 디저트를 먹고 나서야 구미 삼일문고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내 안경을 닦고 또 닦았다. 안경 인생의 첫걸음 아닌가? 그 첫 경험을 내가 가고 싶었던 서점에서 하게 된다니 설렌 일이다.

 


들어가자마자 빨리 안경을 끼고 책이 어떻게 보이나 허기에 찬 사자처럼 서점 안에 있는 아무 책이나 집어 들려고 덤비는데 내 눈에 금방 띈 것이 내 책 <독서 만담>이라니. 마법과도 같은 일이다. 자세히 보니 ‘시민의 서가’라고 해서 구미 시민 독자가 추천한 책을 전시하는 모양이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재미난 일이다.



삼일문고는 아늑하고 따뜻한 서점이다. 사실 개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와 보긴 했다. 그때는 그냥 서점이었는데 지금은 문화공간이 되어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참고서를 팔지 않는 단행본 서점은 그 자체로 존재가치가 대단하다. 더구나 삼일문고는 작은 동네 서점이 아니고 강연 공간까지 겸비한 중형 서점이다. 공단과 유흥으로 유명한 구미에 이런 서점이 생겼다는 자체로 놀랍고 뿌듯한 일인데 그간 삼일문고에서 진행한 행사와 초청 강연 저자의 면면을 보면 교보문고 광화문 지점의 것이라고 해도 믿기는 정도다.



개인적으로 더욱 감탄한 것은 최근 내가 아껴가면서 읽은 <귀족의 시대 탐미의 발견>의 저자 이지은 선생의 강연이 삼일 문고에서 진행되었다는 것. 내가 알기로 이지은 선생은 현재 파리에서 일하고 있는 분이다. 누구의 안목인지 모르겠다. 저절로 리스펙트하게 된다. 단지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대형 출판사의 저자를 무작정 초청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는 인터넷 서점과 오프라인 서점은 단지 책을 파는 장소만 다른 것으로 생각했는데 삼일문고를 보자니 새삼 오프라인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복합문화공간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지하층의 강연장은 아예 책을 전시하지 않고 오로지 강연을 위한 공간으로 양보하고 있었고, 출판사의 요란한 광고 대신에 서점 자체에서 따로 책 소개를 하는 띄지를 선보인다. 고민을 적어내면 약(책)을 처방해준다. 



책과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방이자 놀이터가 바로 구미 삼일문고라는 생각을 한다. 내부 공간도 절묘하고 재미나게 배치하여 책장이 마치 숲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두막집 같은 느낌을 준다. 꼭 돋보기를 끼고 보지 않아도 삼일문고 책들은 또렷하게 보인다. 재미나고 따뜻한 곳이다. 구미 삼일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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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9-10-0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만담 좋은 책이죠. 맨 앞에 전시한 건 서점 측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요. 안경 쓰기 전에 한번 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안경 쓰고 만나요. 저는 참고로 눈은 작아도 시력은 좋습니다

박균호 2019-10-06 21:40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과찬이십니다. 저는 퇴근하면 늘 한가합니다 ^^ 저도 눈은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돋보기를 쓰니까 너무 쾌적해서 우울해질려고 합니다.ㅎㅎㅎ
 
독서 주방 - 불과 칼 사이에서 따뜻한 책읽기
유재덕 지음 / 나무발전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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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무척 좋아하는 제자가 있다. 이 학생은 시험기간이 되면 읽던 책을 친구에게 맡겨두고선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려받지 않기로 맹세한단다. 그러니까 이 학생에게는 이런 식의 강제적인 자기 구속을 하지 않으면 너무 재미나서 읽기가 참기가 어려운 책이 있다는 것이다. 합법적인 칼잡이 즉 셰프인 유재덕 선생의 <독서 주방>이 내게는 그런 책이다. 지난 몇 년 전부터 신문 칼럼으로 연재된 유재덕 선생의 글을 일부러 읽지 않았더랬다. 


요리사는 어떻게 글을 쓰는지, 음식을 어떻게 글로 녹여 내리는지 궁금했지만 참았다. 이게 나만의 특기인지는 모르겠는데 지면이든 모니터이든 내가 인식하고 싶지 않은 정보는 눈에 보이지만 뇌로는 인식되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다. 항상 칼럼제목과 필자 사진만 보고 지나쳤었다. 언젠가는 책으로 나올 것이니 책으로 한꺼번에 읽고 싶었다. 


과연 몇 년을 칼럼의 한 줄도 읽지 않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첫 쪽부터 긴장감과 절제미가 넘치는 글이 이어지는데 숨을 죽여가면서 읽게 된다. 음식 재료를 맛을 보고 알아내는 과정일 뿐인데 마치 거대한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스릴이 넘친다. 요리로 일가를 이룬 분인데 글 솜씨마저 이렇게 좋으니 자괴감이 생긴다. <독서 주방>을 읽다보면 역시 글쓰기는 재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색이 책을 7권을 낸 바 있어서 강제적인 글쓰기 훈련을 오랫동안 한 나보다 글이 훨씬 좋다. 


읽어갈수록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유재덕 선생의 글 솜씨의 원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솟구친다.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요리사답게 식습관을 기준으로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시장 통 유세를 다니는 영상을 찾아서 음식을 보는 시선, 그것을 집어드는 손 모양, 입에 넣어 씹고 삼킬 때의 표정 등을 평가 재료로 삼은 모양이다. 


먹는 방법으로 품성을 환히 볼 수 있었다는데 ‘거친 음식을 드시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품위 있던 바로 그분’에게 한 표를 행사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유재덕 선생의 통찰력과 글쓰기에 대한 천재성을 발견하게 된다. 최대한 두리뭉실하게 표현하지만 그 정답은 누가 봐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자신의 생각을 글로 품위 있게 풀어내는 솜씨라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요리사는 미슐렝의 별이 주렁주렁 달린 최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장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그리고 생명의 철학을 위해 자신의 부엌에서 날마다 음식을 만드는 주부들이다!’


<독서 주방>에서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구절이다. <독서 주방> 북콘서트에서 유재덕 세프의 딸아이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해서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유재덕 셰프는 성공한 전문가라기보다는 존경받는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 그리고 그 존경은 사회적인 성공에 기인한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가족을 아끼는 지극한 정성과 사랑덕분이라는 것을 그의 글 몇 줄만 읽어도 알겠다.


술을 마시지 않는 아내, 너무 어려서 술을 마실 수 없는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술에 취하면 안 되니까 집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다는 구절을 읽고 내가 얼마나 내 가족에게 미개했는지 실감했다. 세상에 이토록 따뜻하고 자상한 가장이라니.


 유재덕 셰프의 직업적 성공은 위대한 재능 덕분이 아니고(심지어 그는 조리가 아닌 식품공학을 전공한 이방인 이었다) 겸손하고 노력하는 마음 덕분인 것도 알겠다. <독서 주방>을 읽다보니 유재덕 셰프야말로 독서를 가장 실용적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겠다.


주방에서 일이 꼬이거나 심지어 치매로 고생하는 어머니 때문에 슬플 때도 그가 해답을 구하고 위안을 구하는 것은 요리에 관한 책이었고 책은 그에게 해답과 위안을 주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재덕 셰프가 나보다 훨씬 글을 잘 쓰는 이유를 알겠다. 요리를 하는 과정은 글쓰기의 그것과 닮았다. 좋은 음식 재료(글쓰기 재료)를 준비한 다음 차례를 잘 지켜서 진행을 하며 음식이 다 되면 맛을 보고(퇴고) 간을 맞추지 않는가 말이다. 요리사로서 경력이 20년이 넘었으니 겨우 10년 경력이 채 되지 않은 나보다 윗길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유재덕 셰프가 말하길 음식은 생의 이미지 그 자체이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 좋아하던 음식을 해놓으면 잠시나마 그 분이 본인 곁에 온다고 한다. 내 어머니는 종부로서 평생 떡을 만드셨는데 그래도 떡을 가장 좋아하셨다.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땐 이젠 떡을 내 곁에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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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개좋음
서민 지음 / 골든타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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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 내 어머니는 새벽녘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항상 그러하듯이 내 어머니를 따라다니던 개는 맹렬이 어머니 주변을 맴돌 면서 짖었고 마침내 이웃 주민들이 어머니를 발견했다.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비록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못하셨지만 17년을 더 사시다가 올해 별세하셨다. 그 당시 내 어머니가 몸 쓸 병으로 쓰러지신 것도 가슴 아프고 원통할 일이었지만 늘 어머니와 함께 했으며 어머니의 목숨을 구한 그 강아지가 더 이상 주인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된 사실도 적잖이 괴로운 일이었다.


그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까지 얼마나 주인이 보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반대로 어머니가 올해 돌아가셨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지만 어머니가 다른 세상에서 17년 전에 헤어졌던 반려 견을 다시 만나 정답게 지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 어찌 보면 헛된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나마 어머니에게 반려견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상을 하고 잠시나마 미소를 짓게 되는 기회라도 주어진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 새벽의 일을 계기로 각성을 해서 개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것은 아니다. 오직 주인만 바라보며 주인의 사랑만을 먹고 자라는 개가 자랑스럽지 않기는 힘들지 않은가. 


<서민의 개좋음>은 잘 지은 제목이다. 어떤 의도로 지은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좋음’이란 말은 내게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요새 아이들이 ‘개맛있다(참 맛있어)’라든가 ‘개싫어(매우 싫어)’라는 말을 하고 적잖이 거부감이 있었었다. 개라는 사랑스러운 동물을 조금 부정적인 접두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이었다. 그런데 ‘개’를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로 사용가능한 표준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개싫어’라는 말이 아주 비속어는 아닌 셈이다. 어쨌든 <서민의 개좋음>은 개가 좋다는 의미로 쓴 것 같은데 ‘개가 무척 좋다’라는 의미가 연상되기도 한다. 일전에 내 장서표를 만들 때 판화가가 나를 상징하는 동물과 식물하나를 알려달라고 했을 때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개와 백일홍(할아버지 산소에 피어나는 꽃이다)을 선택했었다. 


그런데도 나는 개를 키우지 않는다. 아무래도 제대로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미용실을 예약하고 시간을 내서 들리는 것도 귀찮아하는 내가 어떻게 반려견을 제대로 관리하겠는가. 더구나 나는 지난 17년 동안 어머니 병구완을 하면서 걱정을 하고 마음을 졸이면서 살다가 결국엔 어머니를 다른 세상으로 보냈지 않는가. 나에게 반려견이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하겠지만 아프고 병들고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 마주할 슬픔이 두렵다. 


<서민의 개좋음>은 반려견을 입양할지를 두고 고민하거나 이미 반려견을 가지고 있는 모두가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2017년을 기준으로 매년 버려지는 유기견이 8만 마리라고 한다. 개를 학대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견주들이다. 반려견을 버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개를 단순히 비용이 저렴한 경보장치로 생각하고 무거운 쇠사슬로 평생 동안 묶어두는 사람도 개를 학대하는 사람들이다.


<서민의 개좋음>을 개를 키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꼭 읽어서 개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자격, 조건, 마음가짐을 알았으면 좋겠다. <서민의 개좋음>을 이미 개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꼭 읽어서 개을 위해서 해주어야할 주인으로서의 도리와 의미를 알았으면 좋겠다.

서민 선생이 말하는 개를 키울 자격은 이렇다. 첫 째 식구 모두가 개를 좋아해야 한다. 나처럼 개에 대해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아내가 있는 집은 개를 키워서는 안 된다. 반려견은 주인에게 사랑 받고 싶어서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데 주인이 무서워하며 뒷걸음하면 개가 느끼는 혼란은 상상을 초월 할 테니까 말이다. 


둘 째 무슨 일이 있어도 개를 책임져야 한다. 개를 그냥 살아 숨 쉬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입양했다가 그 귀여운 동물이 침대나 아끼는 옷에 똥을 싸기도 하며, 아프면 큰돈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반려견을 버리는 사람이 많다. 반려견의 생로병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함께 해야 견주가 될 자격이 있다.


셋째 개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단순히 외롭다고 개를 입양해서는 안 된다. 개가 당신이 출근을 하고 나면 하루 종일 문 앞에서 당신을 기다린다고 생각해보라.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하는 싱글족들이 개를 키워서는 안 되는 이유다. 


넷째 개를 기울만큼 충분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최소 오만 원 내외의 미용비를 시작으로 개 한 마리를 키우는 데는 많은 돈이 든다. 개 치료비로 50만원을 기꺼이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개를 키울 자격이 있다.


반려견과 함께 하면서 해주어야 하고, 해주면 좋은 것들은 <서민의 개좋음>에 하도 많아서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서민 선생은 과연 대한민국 1% 개빠라는 것이 실감된다. 서민 선생은 <서민의 개좋음>의 차별성을 개를 키우는 사람이나 키우려는 계획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라는데 있다고 밝혔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물론 다른 매체나 책에서 전혀 보고 듣지 못한 ‘슬기로운 견주 생활’에 대한 노하우가 많기도 하지만 서민 선생 특유의 유머스러운 문체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책의 중간 중간에 유머가 마치 지뢰처럼 숨겨져 있어서 방심을 하고 읽다가 갑자기 폭소를 터트리는 바람에 입안에 있던 과자 부스러기가 분출되는 불상사를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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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9-09-2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선생님 흑흑흑. 기사도 쓰셨던데 리뷰까지 이렇게 써주시다니, 이 은혜를 뭘로 갚아야 할지, 오늘 하루종일 감사드린다는 말만 반복하네요. 이 책 때문에 선생님이 양치기소년으로 몰리는 게 아닐지 걱정됩니다 ㅠㅠ 흑흑. 복받으실 거예요. 제가 드릴 거니깐요

박균호 2019-09-25 21:55   좋아요 0 | URL
선생님, 지나치게 감동을 잘 하시는 것 아닙니까? ㅎ 재미있는 책을 읽고 느낌을 간단히 쓴 것 뿐인데 은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 개에 관한 유용한 정보도 좋았고, 선생님의 유머도 즐거웠는데 무엇보다 사모님과 같은 취미를 공유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참 좋아보였어요. 부럽기도 했고요. 저희 부부는 늦게서야 여행이라는 취미로 주말 내내 같이 붙어 지냅니다. 좀 늦게서야, 다른 어떤 자리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즐기며 살아갑니다. 제 아내도 개를 좋아해서 함께 반려견을 키우면서 살아간다면 또 어떤 즐거움이 있었을까라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시덥잖은 서평에 친히 댓글을 달아주셔서 저야말로 영광이에요 ^^
 
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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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소설이 나왔다는 광고를 보았을 때 ‘이건 빨리 사야 해’를 외치며 순식간에 주문했다. <새의 선물>의 여운과 감동은 이토록 진했다. 읽어야 할 책과 써야 할 글은 산더미였지만 은희경의 신작 소설 앞에서는 뒷전이었다.


 이 소설은 화자가 대학의 기숙사 시절 경험한 추억과 친구들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게 다였다. 은희경 작가가 연배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줌마들이 오랜만에 대학 친구를 만나서 떡볶이를 먹으면서 옛날이야기를 한다면 딱 이 소설의 내용이 되겠다. 


그 시절의 무시무시했던 군사정권의 압제도 소설 속의 여자들에게는 그냥 사귀는 남자와 관련된 일부분에 불과하더라. 해맑은 여대생의 천진난만 하고 케케묵고 재미도 감동도 공감도 없는 추억담 모음집을 왜 내가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짜증을 혼자서 내다가 읽다 말은 이 소설을 재활용 통에 버려버렸다. 다 떠나서 아무 재미가 없더라. 이제 은희경이라는 이름만으로 그의 책을 사는 읽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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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9-09-07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선생님, 안녕하셨어요. 글고보니 저도 언젠가부터 은희경 책을 안사고 있네요. 그렇게 손절한 작가들이 여럿입니다. 알랭 드 보통, 아멜리 노통브, 베르베르 등등... 끌림도 갑자기 찾아오지만, 이별은 서서히 이루어지더군요. 아마 박선생님도 이 책 한권으로 손절하시진 않으셨을 겁니다. 이상한데?---> 이번에도 이상한데?---> 아 이제 헤어질 때가 됐구나, 뭐 이런 단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좋은 작가가 많고 또 박선생님도 그 중 하나이니, 너무 슬퍼마십시오

박균호 2019-09-07 17:03   좋아요 1 | URL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근황은 서재 글을 통해서 잘 보고 있었어요.^^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 김훈도 이젠 안 읽게 되더라구요. 김훈의 최근 책을 보니 ‘내가 젊었을 때는 이랬다’는 글이 많더라구요. 그냥 작가로서의 창의력과 신선함이 사라진 신호로 느껴졌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은희경의 이번 책이 그랬고요. 그나저나 선생님은 항상 새롭고 신선한 책을 내셔서 존경스러워요...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주 글 올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저를 좋은 작가로 칭찬해주신거 캡쳐해서 가보로 남기고 싶지만 과찬이시고 격려의 말씀으로 여기겠습니다. 이 또한 고맙습니다....

레삭매냐 2019-09-07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서평단에 똑 떨어지는 바람에
좀 그랬었는데...

나중에 도서관에서라도 빌려다 읽어야
하는 싶었는데 패스해야겠군요.

항상 책 읽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니
말이죠. 재미가 없다가 결정적이었습니다.

박균호 2019-09-07 21:05   좋아요 0 | URL
네 읽는 시간이 아까운 그런 책이었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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