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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방 - 나를 기다리는 미술
이은화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평점 :
방(房)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이 살거나 일을 하기 위해 벽 따위로 막아 만든 칸’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방은 단순히 주거공간이 아니다. 노래방, 피시방, 스크린골프방을 넘어서 이젠 사이버 공간에도 진출했다. 여러 명이 모여 SNS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버 공간도 단톡방이라고 부르는 지경이다. 한국인에게 방은 서양처럼 침실, 거실로 구분된 것이 아니고 먹고, 자고, 놀고, 일하는 복합공간이었다. 그래서 유독 방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이다.
<그림의 방(아트북스)>을 낸 이은화 선생은 한국 최초의 뮤지엄 스토리텔러라는 기념비적인 영역을 개척했지만 그림을 갤러리가 아닌 방으로 들여온 최초의 미술 저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미술 이야기는 마치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처럼 따뜻하고 정감이 넘친다.
‘행복한 아트홀릭’을 자처하는 지은이가 미술 애호가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그림의 방’을 마련했다. ‘발상의 방’ ‘행복의 방’ ‘관계의 방’ ‘욕망의 방’ ‘성찰의 방’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방에는 각각 열두 점의 미술작품이 걸려 있다. 이 다섯 개의 방에서 독자들은 최초의 추상화, 최초의 자화상, 여성이 그린 최초의 남성 누드화, 유명 초상화가의 마지막 여성 초상화 등 미술사의 굵직한 명화들을 만날 수 있으며, 세기의 명작을 탄생시킨 우연, 행복을 그린 그림으로 알려진 화가들의 남모를 고통, 예술을 위해 안정을 멀리했던 미술가의 고독과 절망 등 그림 뒤에 가려진 복잡한 인생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
<그림의 방(아트북스)>에 등장하는 총 60점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는 각각 3쪽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난해한 미술이론, 관념적인 설명이 일체 배제되어 미술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일반인이 읽기에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넘친다. 그림 속에 숨겨진 에피소드와 배경 설명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60점의 그림을 하나의 잘 짜인 추리소설을 읽어나가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다.
누군가 너무 예쁜 그림만 그리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왜 예술이 예쁘면 안 되지?” 세상에 불쾌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되받아쳤던 르누아르였다. (95쪽)
특히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이야기는 감동을 넘어서 큰 가르침을 준다. 르누아르는 예쁘고 행복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인생은 불행으로 가득하였다. 돈이 없어서 열세 살에 학교도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림에 매진해서 화가로서 성공했지만, 말년에는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을 붓으로 묶어 작업해야만 했다. 불운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긍정적으로 살았으며 행복을 그림에 담았다. 예술이 꼭 어둡고 진지하며 어려워야 다른 사람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면서 즐거운 기운을 만끽한다. 마찬가지로 평생을 가난과 외로움으로 몸부림쳤고 지병으로 고통받았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강아지똥>으로 세상의 어린이들에게 감동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선물한다.
물질적으로 성공을 한 사람만이 세상을 행복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꽃이 더러운 물에서 자라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서 보는 이들에게 행복을 선물하는 것처럼.
내가 <그림의 방(아트북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면서 가장 이은화 작가다운 이야기는 <커다란 호의에 위트 한 방울>다. 프랑스 인상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는 부유한 유대인 미술품 수집가 샤를 에프뤼시에게 정물화 한점을 주문받았다. 인상파 그림에 각별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에프뤼시에게 마네는 특별히 하얀 아스파라거스 한 묶음이 채소 위에 놓인 심플한 정물화를 그렸다. 협의가 끝난 그림 값은 800프랑이었지만 그림에 너무 만족한 아프뤼시는 호의로 200프랑을 더 얹어 1,000프랑을 그림값으로 지급했다.
호의에 감동한 마네는 금방 붓과 팔레트를 집어 들고 작은 캔버스 위에 하얀 아스파라거스 하나를 큼직하게 그렸다. 그리고 ”(보내드린) 아스파라거스 다발에서 하나가 빠졌네요.”라는 메모와 함께 또 하나의 그림을 에프뤼시에게 보냈다.
<그림의 방>에 수록된 60편의 이야기는 짧지만, 감동적이고 재미나기 때문에 자꾸만 되새겨 읽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본 그림은 진짜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국인의 작은 방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배여 있는 것처럼 이은화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그림과 화가의 따뜻하고 감동적인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 재미난 부분을 따로 접어 두었는데 이 책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구겨진 셔츠를 펴기 위해서 다림질을 하는 것처럼 일삼아 하나씩 곱게 다시 폈다. 다시 곱게 펴야 할 구김들이 너무나 많아서 고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