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게도 청주 신항서원에서 5회에 걸쳐서 강연하게 되었다. 청주 미사도서관에서 8회에 걸친 줌 강연을 악전고투 끝에 마쳤고 이젠 코로나 사태도 진정이 되어서 내심 대면 강연을 기대했지만, 아직 대면 수업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대면 강연을 하기로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겠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르치는 일을 25년간 해온 나는 여전히 비대면 강연이 낯설고 힘든데 청중들은 이제 줌 강연의 편리함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된다고 해도 줌 강연은 살아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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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오브제 - 사물의 이면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궁리가 있다
이재경 지음 / 갈매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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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를 마치고 신용카드를 빼려는데 주유소 직원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다행히 내가 목표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내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달렸을까. 문득 후방거울을 보니 아뿔싸 주유 뚜껑이 혀를 내민 것처럼 열려있었다. 급하게 차를 세우고 닫으려는 순간 주유구 마개가 자리를 비운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주유를 마치고 놀란 가슴을 진정하느라 미처 주유구 마개에까지 내 빈약한 주의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리라.

다시 유턴해서 주유소로 돌아가는 몇 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뚜껑을 찾지 못하면 내가 방금 피 같은 돈으로 넣은 금싸라기 같은 기름이 공중으로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또 주유구 마개를 잃어버렸다고 머리를 긁적이며 비싸도 좋으니 살 수 없느냐고 자동차 공업사를 찾아갈 생각을 하니 그 자체로 머리가 아득해졌다.

되돌아간 주유소 구석에서 나뒹굴고 있는 마개를 발견한 순간 나는 집 나간 자식을 다시 찾은 것처럼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사소한 물건은 하찮은 물건이 아니다. 사소한 물건이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마땅히 추앙받아야 할 존재다.


이재경 작가가 쓴 <설레는 오브제>는 평소 우리가 우리의 가장 사소한 용도와 필요에 종사하는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물건들에 대한 흥미로운 역사와 깊은 통찰로 가득한 책이다.

사소한 물건이지만 거대한 역사를 가졌고,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하지만, 모두가 공감하게 되는 통찰로 귀결되며, 무명(無名)의 존재로 시작한 물건이 유명(有名)의 존재로 부상하는 경험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얻게 된다.

가령 오직 꿀을 뜨기 위해 탄생했고 존재하는 '꿀뜨개'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통찰을 발견한다.
 

다용도를 내세운 물건의 합체는 불가피하게 물건의 변형을 부른다. 그 변형은 장식적 변주에 그치지 않고 원형을 깬다. 더는 그 물건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그건 물건이 애초에 생긴 목적을 무시하는 처사고, 그건 결국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다. 물건의 변형만큼 시대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도 없다. 때로는 꿀뜨개 같은 것들을 일상에 추가한다. 시간에 휩쓸리면서 가끔 붙잡고 쉬어가는 말뚝을 박듯이.

 
집주변을 할 일 없이 산책하는 행위에 대한 이런 통찰은 또 어떻고.
 

알다시피 주거지의 면적을 늘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도 동물처럼 산책으로 영토를 넓힐 수 있다. 공적인 장소에 사적인 의미를 심는 일은 나를 확장한다. 거기서 먹이처럼 시적 단상을 모을 수 있다. 매일 경로가 다져지고 샛길이 번지면서 내 서식지가 늘어난다. 그곳은 나만의 감상과 집착과 미련이 묻어 있어서 다른 누구도 복제할 수 없다.


아내가 실론티를 사 왔는데 차 통이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 예쁘다. 나는 평소 출근을 하면 봉지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며 차는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도 물을 마시는 척하면서 슬쩍 아내가 사 온 차 통을 보고 브랜드를 기억한다.

그리고 잽싸게 서재에 들어와 아내가 사 온 차를 주문한다. 사무실 내 책상 위에 올려두면 뭔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설레는 오브제>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사람은 어쩌면 '웰빙'보다 웰빙의 느낌'에 돈을 쓰고 그 기억을 산다. 그게 내용물이 없어진 후에도 용기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 같다.
 

 
그리고 차에 얽힌 중국과 영국의 애증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이재경이라는 작가는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사람이고 사람에 대한 통찰도 매우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다. <설레는 오브제>가 한 사람이 쓴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이 한 권의 책은 사소한 물건에서 시작해서 인류의 역사와 인류에 대한 통찰이 끝없이 이어진다.

귀퉁이마다 기둥이 있고, 그 위에 천장처럼 덮개가 있는 침대를 그냥 부잣집 여자의 플렉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설레는 오브제>를 읽다가 이 물건의 이름이 사주 침대라는 것을 알게 된 것만 해도 고마울 따름인데 사주 침대에 얽힌 흥미로운 사연과 역사를 읽게 되는 호사도 누리게 되었다(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이재경 작가는 책 모서리를 접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책에 표시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마땅히 <설레는 오브제>에 그 어떠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감동하고 공감을 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열심히 핸드폰 사진에 담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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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째 대학 기숙사에서 사는 딸아이가 이번 학기에 최악의 배정을 받았다고 한다. 우선 방이 원래는 장애인을 위한 구조라서 일반 학생들이 사용하기엔 불편한 점이 많으며 룸메이트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룸메이트가 누구냐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좌우되는데 이번엔 아주 최악이란다.


룸메이트는 미얀마에서 유학 온 학생인데 입사 첫날부터 딸아이가 정성껏 청소한 방에 여행용 가방 바퀴를 닦지도 않고 끌고 온 순간부터 선을 넘기 시작했다고.

 

딸아이가 힘들어하는 부분은 이 룸메이트가 종일 방안에서 끊임없이 전화 통화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과제나 공부를 하면서도 전화 통화를 한다고. 살을 에는 듯한 한겨울에도 전화 통화를 할 때는 반드시 복도로 나가는 딸아이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고 힘든 일이기도 할 것이다. 딸아이는 룸메이트 때문에 방안에서도 이어폰을 끼고 생활한다고 한다. 이 상황 때문에 딸아이는 몹시 힘들어하는데 부모라고 다르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딸아이의 불운에 안타까워했다. 아내는 혼자서 분노를 삭이다가 도대체 도윤이가 기숙사에서 몇 년째 살고 있냐는 말이야라고 말했다. 아내의 포효를 들은 나는 불똥이 나에게 떨어진 것은 아닌지 파르르 떨었다. 사실 아내와 딸은 가끔 기숙사에서 나가 오피스텔에서 생활하고 싶어 했지만 내가 절대 불가를 외쳤기 때문에 이 사단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다음 절차로 이어질 당신 때문에 ~”라는 원망이 눈에 그려졌다. 그러나 아내의 다음 말은 이랬다. “대체 그 대학은 기숙사 단골을 이렇게 푸대접해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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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8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참 힘들거라고요. 친구 딸아이는 결국 여성전용 원룸 구해서 나갔어요 ㅠㅠ 불안하시죠

박균호 2022-04-18 18:47   좋아요 1 | URL
네 글쵸...하루 종일 얼굴 맞대고 생활해야 하니까...ㅎㅎ 여성원룸은 그나마 좀 안심이 되겠는데요.

다섯 2022-04-19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처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시는군요.ㅎㅎ 재미있습니다^^

박균호 2022-04-19 09:5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경처가 맞습니다.
 
사소한 기쁨 - 산책과 커피와 책 한 권의 행복
최현미 지음 / 현암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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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간 지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비대면 강연은 나에게 넘기 어려운 험난한 산이다. (ZOOM)으로 하는 강연이 시작되기 30분이 되면서부터 딸아이의 대학합격발표를 기다리는 만큼의 긴장을 하게 된다. 화장실을 연신 들락거리고 물을 금붕어처럼 들이킨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최현미 기자가 쓴 독서 에세이 <사소한 기쁨>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초긴장 상태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지내기보다는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300분처럼 느끼지는 30분을 평온하게 보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포의 30분이 마치 3초처럼 빨리 지나가 버렸다. <사소한 기쁨>은 독자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독서에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흡입장치가 들어 있다. 기자 특유의 간결하고 울림이 있는 문체, 사소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일상의 즐거움, 지성미가 넘치는 세상사에 관한 통찰, 책과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시선, 책과 영화의 등장인물이 마치 내 친구나 식구처럼 느껴지는 친밀감, 그리고 과학적인 지식까지.

 

<사소한 기쁨>은 기자로서 생활인으로서 자신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과 책을 소재로 삼는다. 그리고 최현미 기자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모범적인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일상과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사안에 따라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때로는 밝게 볼 수 있는 통찰을 갖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벽달>이라는 꼭지를 살펴보자. 기자로서 새벽에 출근하는 일상으로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주인공 덴고가 하늘에 뜬 달을 보면서 한 생각으로 넘어간다. “일류가 불이며 도구며 언어를 손에 넣기 전부터 달은 변함없이 사람들 편이었다.” 그리고 최현미 기자 자신의 달에 대한 소고로 이어진다.

 

1Q84의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을 지켜낸 달이 나의 출근길을 밝힌다. 달은 내가 태어났던 날 저녁부터 변함없이 나를 지켜 보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도 달은 저 먼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달은 나도 기억 못 하는 나를 알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상상대로라면 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을 테다.

 

언젠가 시골에 사는 내 친구가 웬 큰 나무 사진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려놓았다. 유명하지도 특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동네 나무를 왜 올렸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멋있잖아나무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의아해하면서도 더 묻지 않았다. <사소한 기쁨>을 읽고 나서야 그 친구가 어떤 느낌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았는지 알 것 같다.

 

길을 걸으며 내가 이 벚나무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간 숱한 시간을 꼽아본다. 수십 년 동안 수천 번 이 나무 옆을 걸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설레는 마음으로 걸었고, 동료와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걸었다. 가벼운 산책에, 글이 막힐 땐 머릿속으로 글 앞뒤를 정리하며 걸었다. -중략-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숱한 시간 속에 걸었다.

 

그 친구도 자신의 집 앞에 있는 그 나무와 수많은 추억을 남겼고 그 나무는 마치 달처럼 그 친구의 모든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나무와 추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무에 대한 애정을 이토록 진솔하고 공감을 주는 글이라니.

 

또 이런 글은 어떤가?

 

그렇다면 이 쓸데없는 수다야말로 인간을 지구상의 다른 생명과 따로 구분 짓는 가장 인간다운 일일지 모른다. 실제로 수다에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일단 맘이 맞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관심과 취향이 비슷하고 주고받는 말의 리듬이 맞아야 한다. 주거니 받거니 쿵하면 짝하는 파트너십을 발휘해야 한다. 유머 코드가 같아서 별것 아닌 농담에도 같이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수다에 관한 이토록 재미나고 놀라운 통찰이라니.

 

최현미 기자는 동화는 어린이가 독자라는 이유로 그 시대가 믿는 윤리와 도덕 가치를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성인 소설보다 훨씬 더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래서 어린이를 위한다는 동화가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많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사소한 기쁨>이라는 동화를 쓰면 어쩌냔 말이다. 그것도 그저 아름답고 따뜻하기만 한 동화를.

 

<사소한 기쁨>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안나 카레니나>의 또 다른 주인공 레빈이 귀족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농민들과 어울려 낫질을 하면서 느낀 행복감을 경험하는 일이다.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레빈은 오랫동안 베어나감에 더욱더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낫 자체가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고 있기라도 하듯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 갔다. 그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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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2022-04-1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는 다다익선입니다. 감사합니다^^

박균호 2022-04-20 16:26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림의 방 - 나를 기다리는 미술
이은화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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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람이 살거나 일을 하기 위해 벽 따위로 막아 만든 칸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방은 단순히 주거공간이 아니다. 노래방, 피시방, 스크린골프방을 넘어서 이젠 사이버 공간에도 진출했다. 여러 명이 모여 SNS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버 공간도 단톡방이라고 부르는 지경이다. 한국인에게 방은 서양처럼 침실, 거실로 구분된 것이 아니고 먹고, 자고, 놀고, 일하는 복합공간이었다. 그래서 유독 방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이다.

 

<그림의 방(아트북스)>을 낸 이은화 선생은 한국 최초의 뮤지엄 스토리텔러라는 기념비적인 영역을 개척했지만 그림을 갤러리가 아닌 방으로 들여온 최초의 미술 저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미술 이야기는 마치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는 동화처럼 따뜻하고 정감이 넘친다.

 

행복한 아트홀릭을 자처하는 지은이가 미술 애호가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그림의 방을 마련했다. ‘발상의 방’ ‘행복의 방’ ‘관계의 방’ ‘욕망의 방’ ‘성찰의 방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방에는 각각 열두 점의 미술작품이 걸려 있다. 이 다섯 개의 방에서 독자들은 최초의 추상화, 최초의 자화상, 여성이 그린 최초의 남성 누드화, 유명 초상화가의 마지막 여성 초상화 등 미술사의 굵직한 명화들을 만날 수 있으며, 세기의 명작을 탄생시킨 우연, 행복을 그린 그림으로 알려진 화가들의 남모를 고통, 예술을 위해 안정을 멀리했던 미술가의 고독과 절망 등 그림 뒤에 가려진 복잡한 인생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

 

<그림의 방(아트북스)>에 등장하는 총 60점의 그림에 관한 이야기는 각각 3쪽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난해한 미술이론, 관념적인 설명이 일체 배제되어 미술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일반인이 읽기에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넘친다. 그림 속에 숨겨진 에피소드와 배경 설명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60점의 그림을 하나의 잘 짜인 추리소설을 읽어나가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다.

 

누군가 너무 예쁜 그림만 그리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왜 예술이 예쁘면 안 되지?” 세상에 불쾌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되받아쳤던 르누아르였다. (95)

 

특히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이야기는 감동을 넘어서 큰 가르침을 준다. 르누아르는 예쁘고 행복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인생은 불행으로 가득하였다. 돈이 없어서 열세 살에 학교도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림에 매진해서 화가로서 성공했지만, 말년에는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을 붓으로 묶어 작업해야만 했다. 불운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그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긍정적으로 살았으며 행복을 그림에 담았다. 예술이 꼭 어둡고 진지하며 어려워야 다른 사람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면서 즐거운 기운을 만끽한다. 마찬가지로 평생을 가난과 외로움으로 몸부림쳤고 지병으로 고통받았던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강아지똥>으로 세상의 어린이들에게 감동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선물한다.

물질적으로 성공을 한 사람만이 세상을 행복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꽃이 더러운 물에서 자라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서 보는 이들에게 행복을 선물하는 것처럼.

 

내가 <그림의 방(아트북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면서 가장 이은화 작가다운 이야기는 <커다란 호의에 위트 한 방울>. 프랑스 인상주의의 아버지 에두아르 마네는 부유한 유대인 미술품 수집가 샤를 에프뤼시에게 정물화 한점을 주문받았다. 인상파 그림에 각별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에프뤼시에게 마네는 특별히 하얀 아스파라거스 한 묶음이 채소 위에 놓인 심플한 정물화를 그렸다. 협의가 끝난 그림 값은 800프랑이었지만 그림에 너무 만족한 아프뤼시는 호의로 200프랑을 더 얹어 1,000프랑을 그림값으로 지급했다.

 

호의에 감동한 마네는 금방 붓과 팔레트를 집어 들고 작은 캔버스 위에 하얀 아스파라거스 하나를 큼직하게 그렸다. 그리고 ”(보내드린) 아스파라거스 다발에서 하나가 빠졌네요.”라는 메모와 함께 또 하나의 그림을 에프뤼시에게 보냈다.

 

<그림의 방>에 수록된 60편의 이야기는 짧지만, 감동적이고 재미나기 때문에 자꾸만 되새겨 읽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본 그림은 진짜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국인의 작은 방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배여 있는 것처럼 이은화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그림과 화가의 따뜻하고 감동적인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 재미난 부분을 따로 접어 두었는데 이 책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구겨진 셔츠를 펴기 위해서 다림질을 하는 것처럼 일삼아 하나씩 곱게 다시 폈다. 다시 곱게 펴야 할 구김들이 너무나 많아서 고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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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4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15 0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