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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어린 맘을 주었다고 해서
작은 정을 주었다고 해서
그의 거짓없는 맘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깊은 정을 받았다고 해서
내 모든것을 걸어버리는
깊은 사랑의 수렁에 빠지지 않기를

한동안 이유없이 연락이 없다고 해서
내가 그를 아끼는 만큼
내가 그를 그리워 하는 만큼
그가 내게 사랑의 관심을 안준다고 해서
쉽게 잊어버리는
쉽게 포기하는
그런 가볍게 여기는 인연이 아니기를

이 세상을 살아가다 힘든 일 있어
위안을 받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살아가다 기쁜 일 있어
자랑하고 싶은 그 누군가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
내게 가장 미더운 친구
내게 가장 따뜻한 친구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가
당신이기를
그리고 나이기를

지금의 당신과
나의 인연이
그런 인연이기를 
 

- 어떤 이의 깊은 울림을 따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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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08년 2월 22일
대구 달서구.
 
구청의 대대적인 노점상 단속. 
우리사회 수준의 현주소.

안타까움만이 더해가는 우리 한국사회.
 

우리들,
부디, 제발,
타인의 아픔과 눈물에 공감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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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깜찍, 반짝, 예쁜 아동 모델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띄는 요즘의 미디어 세상. 특히나 각종 CF의 카메라 앵글은 이 ‘꼬마’들을 분주히도 쫓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이 ‘꼬마’들의 매력에 폭 빠져든다. 나는 언제 이 꼬마들에 들떴을까, 한번 떠올려보자. 베스킨라빈스, 트롬 세탁기 등 여러 CF들이 머릿속을 스쳐갈 것이다. 베스킨라빈스 꼬마 광고의 등장 이후 하나하나 세어보면 꼬마들이 메인인 광고의 수는 족히 20여 편은 되는 것 같다. 또한 트롬 세탁기의 꼬마는 모델료로 단발 2천만 원 이상을 받으며 5~6편의 CF, 뮤직비디오 등에 출현하였고 베스킨라빈스의 꼬마도 지금까지 6편의 CF, 4편의 영화 등에 출현하였다. 그리고 미디어의 수용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급 꼬마는 앞선 둘을 포함해 5명 이상을 꼽아볼 수 있는 등 종으로 보나 횡으로 보나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은 확연하다.  


<아동 모델 정다빈과 정채은>

    그렇다면 이러한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면, 우리는 왜 이 꼬마들에게 열광하는가? CF 속에서 이 꼬마들이 나타내는 이미지들을 종합해 나열해보면 귀여움, 예쁨, 순수, 평온, 화목, 풍요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아동 모델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의 이미지들은 포화상태의 광고시장에서 소비자들의 감성을 떨리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전략이다. 그리고 광고의 수용자들은 실제로 떨려한다. 나 역시 이 꼬마들의 미소에 살살 녹아버렸다! 당신은? 당신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철저히 광고주의 시각, 어른의 시각을 거쳐 인위적으로 생산된 이미지란 비판적 시각은 여기선 잠시 가볍게 접어두자. 어느 광고에선가는 꼬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무도 인위적인 어른의 언어와 한껏 꾸며진 표정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런 기억들은 잠시 잊자. 아주 잠시만.) 

  그럼 이쯤에서 아동 모델들의 확 뜨임현상에 편승하여 나 또한 한 명의 아주 어여쁜 꼬마 아이를 소개하려 한다. 여느 아동 모델 뺨치게 예쁘고 귀여운, 허나 여느 아동 모델들처럼 결코 풍요롭지도 평온하지만도 못한, 다시 허나 여느 아동 모델들보다도 하얗고 해맑은 웃음을 간직한, 그럼으로써 여느 아동 모델들보다도 내 마음을 살살 녹여버린 꼬마아이, 김예슬을. 


<스타급 아동 모델 정다빈(좌상), 정채은(좌하)과 인간극장 ‘반짝반짝 작은별’의 김예슬. 나는 예슬이가 다빈, 채은 못지않게 객관적으로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5년, 10년이 지난 후에 이들을 비교해본다면... 어떠할까. 앞으로 이들이 각기 나아갈 길의 풍광은 너무도 상이하다. >

  나는 예슬이를 인간극장 ‘반짝반짝 작은별’에서 만났다. 예슬이는 광주 서구의 한 외곽에서 65살의 할머니, 14살의 오빠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엄마는 예슬이가 3살 때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 사고의 충격으로 술과 담배에 쩔어 든 아빠도 몇 달 후 사고를 당해 팔다리가 마비되어 병원에 머물러있다. 자연스레 집안은 기울어졌고 생계유지란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만 하는 예슬이의 할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여기저기 고장난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섰다. 아침부터 밤까지 할머니의 리어카를 하나하나 채워가는 것은 각종 폐지와 고물들. 예슬이와 예슬이의 오빠는 학교가 끝나면 할머니와 함께 리어카를 이끌고 밤거리를 나선다. 예슬이는 추위 속에서 호호 녹여가며 그 연하고 조그마한 손으로 폐박스를 뜯어 옮기고, 그 작은 몸으로 리어카를 뒤에서 밀고 때론 앞에서 끌어간다. 리어카를 가득 채워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와 오빠가 폐지와 고물들을 정리하는 동안 예슬이는 조촐한, 참으로 조촐한 저녁상을 차린다. 그 조그마한 녀석이 일에 임하는 자세가 아주 열심이고, 제법 능숙하다. 

  카메라는 이러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가고 헤쳐가고 있는 예슬이의 가족을 차분히 그리고 담담히 응시한다. 할머니가 아파서 못 일어나시는 어느 밤에는 오빠와 예슬이 단 둘이 할머니 몰래 리어카를 끌고 나가기도 하고, 지금은 비어있는 옛 집에 찾아가 찾아낸 엄마의 사진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100원 200원 모아온 용돈으로, 한 시간이나 걸어 시내에 나가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오기도 한다. 어린 것 단 둘이 리어카를 끌고 밤거리를 헤매는 모습이 한켠 대견하면서도 왠지 불안하고, 엄마 사진을 찾아 밝게 웃는 얼굴의 내면엔 얼마나 뭉클한 그리움이 담겨있을까 안타깝고, 큰마음 먹고 준비한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너무도 소박하여 마냥 슬프다. 



<오빠와 함께 리어카를 끌고 있는 예슬이>

  그러나 이러한 나의 동정적 감상이 무색하게, 예슬이의 얼굴은 결코 찌들어있거나 어둡지 않다. 왜 그런 상황에서도 찡그리지 않고 웃고 있니, 어째서 투정부리지 않고 묵묵히 집안의 일에 동참하고 있니, 어떻게 구석에 쭈그려 앉아 우울해하지 않고 할머니와 오빠와 함께 오순도순 맑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니? 아, 이러한 예슬이의 꿋꿋한 모습을 보며 이 꼬마의 미래에 대해, 감히 희망을 걸어봐도 되려나. 그런데 검고 짙은 스모그 속에서 생각이 뒤엉켜가는 건 왜일까. 

  예슬이네 할머니의 한숨은 왜인지 깊어만 간다. 과거 연골 수술을 받았던 무릎의 통증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고 백내장으로 눈까지 점점 어두워져 간다. 또한 석 달 후면 지금 살고 있는, 초라하지만 아늑했던 집을 비워줘야만 한다. 폐지와 고물을 한 가득 모아 끙끙 힘겹게 고물상까지 옮겨가 팔아도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 100kg에 7500원 미만. 과연 새 보금자리는 어떻게 구할 수 있으려나. 손주, 손녀가 ‘고등핵교’ 졸업할 때까지는 죽지 않고 살아서, 아무리 아프고 고단해도 계속 일해서 ‘애기들’ 대학 보내는 게 소원이라는 할머니의 말이 내 가슴을 불안한 먹먹함으로 때린다.

     

<우리 아이들 때문에 못 갖고 와도 웃어요. 아이들이 웃겨 븐께....>

  “기분 좋죠. 어떤 때는 (폐지와 고물을 팔아) 4만원도 할 때가 있어요. ... 그때 최고 좋죠. 그때 우리 애기들 천원씩 탁탁 주면 돈 갖고 춤춘디요. 얼마나 좋다고 춤 춘다고요.”

  한 쪽에서는 매일밤 고단하게 고사리 손까지 품들여 올린 4만원의 수입에 더덩실 춤을 추고, 한 쪽에서는 4천만원이란 금액도 1~2초 사이에 가볍고 우습게 나뒹군다. 누군가에겐 4억원도 우습다. 이러한 직접 비교, 이러한 극한 차이. 그냥 통밥만 굴려 생각해봐도, 직관에만 귀를 기울여봐도 어라,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무언가 찝찝한 느낌이 끈적히 달라붙지 않는가? 극한 차이, 명백한 불합리함. 혹여 능력주의 사회에선 당연한 현상이라고 차갑게 말하는 당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당신일지라도 예슬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주 조금이나마 느꼈을 안타까움까지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바로, 본인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극한 차이의 현상이 무언가 문제가 있는 현실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는 징표가 아닐까. 나는 우리 개개인이 예슬이를 보고 들으며 가슴에서 솟았던 느낌들을 좀 더 열심히 되돌아보고, 대면해주길 바란다. 그저 단순한 안타까움, 일차원적인 찝찝함에 머물지 않길 바란다. 그러한 안타까움, 찝찝함을 덜어낼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은 없을지 고민해주길 바란다. 

  세상을 뒤집어엎어 만민평등의 세상을 만들자 외치진 않겠다. 다만 OECD 가입국, 첨단기술 강국, 세계 10대 경제규모 등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이 나라에서 좀 더 튼실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지 않고 있음이 (‘못함’이 아닌 ‘안함’이다.) 그저 기이할 뿐이다. 이 땅에서는 과연 조금 더 튼실한 사회안전망 구축이 그저 요원한 이상일까. 많이도 아니다, 그저 조금, 그저 조금만, 조금만 더도 안되는 것인가. 왜 우리는 끙끙 앓는 노파와 9살 먹은 어린 꼬마를 춥고 깜깜한 밤에 폐지를 주워오도록 거리로 내몰고 있으며, 다 스러져가는 초라한 집에서조차 내쫓으려 하는가. 이 노파와 꼬마가 적어도 초라한 집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제때에 최소한의 병원 진료라도 받을 수 있고, 학교 교육으로부터 이탈됨을 걱정하지 않고, 일주일에 2~3번만 폐지를 주워와도 생계를 근근이 유지해갈 수 있는 사회시스템은 정말 그리도 요원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냉혹함이 현재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우리들의 인격적 수준이다. 이는 우리 사회와 우리 사회 구성원 각자의 가치관과 지향의 문제이다. 주체조차 사물화되는 고도자본주의 사회에 그저 푹 절어버린 가치관과 지향들. 

 

<누가 이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는가.>

  예슬이의 이야기에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꼈다면 당신은 혹 ‘사회복지’란 ‘상품’을 ‘소비’해줄 마음은 안드는가? 아서라, 천박하게 뿌리내린 우리 고도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의 소비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임을(‘나’가 ‘진정 나’인지의 문제는 미루어두자). ‘사회복지’란 공공을 위한 ‘상품’은 아무리 예쁘게 포장을 해도 이미 사회주류의 룰을 어긴 상품, 그 태생부터 도태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을 어찌할까. 선진국, 7대 경제대국, 국민소득 4만 달러, 이건희의 삼성, 이명박에 대한 선망과 지지. 10억 모으기, 50평 아파트, 로또, 프로토, 의대, 고시, 대기업 입사로 빽빽이 가득 찬 인생지도. 이러한 생각과 지향에 줄서기한 우리 대다수가 동시에 예슬이를 보며 안타까워함은 심각한 자가당착, 양의 탈을 쓴 자위, 독한 가식이다. 물론 본인은 깨닫지 못하겠지만. 우리, 단순 일차원적인 안타까움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면 감히 안타까워하지도 말자. 내가 지향하는 세상, 이루려는 삶과 예슬이를 보며 흘린 눈물 사이의 엄청난 거리차를 직시하지 못할거라면 어서 추한 눈물을 뚝 그쳐라. 우리의 자위가 때론 너무도 역겹다. (오바했나? 나 또한 가식의 글을 끝맺는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 황석영의 '바리데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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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Arm > <예수전>을 출간한 ‘B급 좌파’ 김규항과의 만남!

  

 

 

 

 

 

 

 

예수의 삶에서 진보의 희망을 찾다 


예수로 읽는 한국사회, ‘B급 좌파’ 김규항의 <예수전>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글이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는 ‘불온한’ ‘B급 좌파’ 김규항. 그가 또다시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위해 책 <예수전>을 내놓았다. 그는 주로 칼럼을 통해 이야기를 해왔었는데, 이 책은 그가 본격적인 단행본으로 집필한 최초의 책이다.
2005년부터 진행된 ‘예수전’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책에는 ‘예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의 진정한 목소리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김규항의 고민과 답이 담겨있다. 그는 이 책에서 마르코복음을 인용하여 예수의 삶을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독자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는 교리 속에 화석화된 예수를 되살려 내고, 그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전> 출간을 맞아 지난 5월19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벼레별씨 카페에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까페는 5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고, 저녁 7시30분부터 2시간가량 계획됐던 만남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긴 10시 반경까지 계속됐다.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독자의 질문에 작가가 답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긴 만남의 모든 내용을 전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일부나마 중계한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소란스럽고 사나울 수 있다   

Q.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은 예수의 과격한 행동에 관련하여 선생님의 비폭력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A. 예수의 행적 중에선 상당히 과격한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상 좀 엎은 게 그렇게 큰 일 입니까? 우리는 보통 평화란 뭔가 조용하고 온순하고 차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은 사회적 불의와 모순을 덮는 나쁜 의도로 많이 사용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란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람과 세상 사이에 깨진 조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때론 가장 소란스럽고 사나울 수 있습니다.
세상엔 사실 폭력주의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폭력을 사용하는 주요한 사람들도 공식적으로는 다 비폭력주의자이지요. 폭력을 미화하고 폭력이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이렇게 폭력으로 돌아가고 불의할까요. 그래서 ‘폭력은 나쁘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비폭력주의라는 것은 오로지 폭력의 현장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의 미사일 공격에 자식이 찢겨 죽은 어미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뚫고 ‘우리는 똑같은 폭력의 보복을 해선 안된다’고 말할 때 누구도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지요.
그러나 1년 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는 사람, 1년 내내 파출소 한번 갈 일 없는 사람이 ‘저항으로서의 폭력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폭력의 피해자들에겐 가해자의 폭력보다 끔찍한 폭력이 됩니다. 이건 폭력, 비폭력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염치의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비폭력이란 것은 항상 이론, 논평, 구경으로서의 얘기였습니다. 비폭력주의를 얘기하려면 자신을 폭력의 현장에 위치시키고 자신을 폭력에 충분히 노출시킨 후에 그런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기억하고 존경하는 비폭력주의자들은 언제나 폭력의 현장에 있었고 바로 그 폭력에 의해 죽어갔습니다.

Q. 한국 기독교의 부패, 비리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A. 교회를 다니는 청년들이 제게 고통스런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뭔가 외람된 것 같고 꺼려진다는.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것이 교회인가 교회가 아닌가를 먼저 물으라고 물어봅니다. 십자가를 달고 교회란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하지요. 교회는 진정한 교회이든지 아니면 더 나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목사의 재정비리, 교회 세습 등 워낙 타락해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없애면 건강한 교회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준이 낮아져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 그건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게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최소한의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을 갖추는 일이지 진정한 교회를 만드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가 살던 당시의 성전이란 현대의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성전은 하느님이 살고 있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는 그런 성전을 바라보며 벽돌 하나 남김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극단적인 폭언을 합니다. 저는 예수가 성전 앞에서 보인 이런 당당한 태도를 교회, 기독교 문제로 고뇌하는 사람들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실현 가능 진보’는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세력  


Q. 책에서 바리사이인 얘기를 하시면서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실현 가능 진보 등이 진정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세력이라고 하셨는데요, 이에 대한 설명을 더 듣고 싶습니다.
A.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사회운동 주류가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운동으로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기존의 민중운동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민중운동을 배제한 것이기도 하지요. 노동자, 농민 기반 운동은 이제 옛날의 운동이 되어버렸습니다. 90년대 이후 진행된 개혁운동, 개혁정치들에 의해 배제된 것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보를 가로막는 것은 일상에서 가장 나쁜 세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가장 나쁜 세력은 그 나쁨이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어 우리가 특별히 영향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얻는,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위험하지요. 그래서 예수는 바리사이인들과 그렇게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NGO, 개혁운동’ 등의 표현을 빼야하나 상당히 고심했습니다. 본의 아니게, 순수하고 정의로운 활동가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고 해야 할 말이 더 많습니다.  

 

예수로부터 구하는 진보의 희망   

Q. 어떻게 예수의 삶으로부터 진보의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A.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 새로운 혁명론이 필요하다, 새로운 상상력과 틀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 사람들의 노력의 방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건 이미 새로운 세상의 씨앗이나 현상이 이미 우리 안에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말을 우리는 새롭고 어려운 것을 이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꼴을 갖추고 사람과 사람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러한 것이 중요한 혁명의 씨앗입니다.
결국은 우리 내면의 문제입니다. 이 사회의 반영, 거울인 이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이지요. 하지만 사람의 내면은 계량할 수 없고 측정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보수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지요. 신자유주의, 이명박을 비판하면서 내 안에 있는 것들도 계속 들여다봐야 합니다. 내면에서 얼마든지 은폐할 수 있는 것들을 자기 자신은 들여다 볼 수 있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좀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혁명이라는 것은 결국 종교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가장 급진적으로 싸우면서도 늘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 진정한 혁명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마음의 결과가 반영되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형태가 될 때 세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제주도의 해녀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평생 해녀 물질로만 살아 온 여든 된 해녀할머니에게 물었지요.
"스킨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이 할머니가 제주도 해녀 좌파 연합의 회장은 아닙니다.(웃음) 그런 정서가 수천년 동안 정직하게 일하면서 먹고 사는 보통 사람들의 지배적인 정서였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요. 지금은 그 사람들의 정서가 오히려 특별하고 신기하게 여겨집니다. 이러한 게 바뀌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보다 많이 갖는 것이 인간의 욕망일 수 있지만 더 가진 게 뭔가 불편하고 더디 가더라도 같이 가는 것, 결국은 자기 안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회가 변해야 한다, 내면이 변해야 한다’ 이분법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예수에게는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였지요. 예수한테는 기도하는 것과 싸우는 것이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미 잉태하고 있는 혁명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표현대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초대했고 우리는 그 초대에 응하면 됩니다. 물론 떵떵거리고 배불리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 받고 눈물짓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초대받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로부터 현재 공황 상태에 이른 혁명, 다음 세상, 진보에 대한 상상력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의 삶으로부터 구하는 진보의 희망 이야기를 끝으로 작가와 독자의 만남은 마무리 되었다. 이 외에도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야기, 작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 많은 말들이 오갔다.
김규항은 그가 기존에 가진 모든 종교적 지식과 선입견을 걷어내고 진지하고 순정한 묵상을 통해 예수의 삶을 해석하려 했으며, 그러한 예수의 삶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가 묵상한 예수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다. 그는 이 책이 수많은 ‘나의 예수전’으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수많은 ‘나의 예수전’은 결국 나와 세계를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동력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삶으로부터 얻는 진보의 희망, 김규항은 우리 안에 숨겨진 새로운 세상의 씨앗을 건드리고 있다.

 

*초대해주신 알라딘 관계자 및 돌베게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특히 김희진 편집자님 멋지세요!!!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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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Arm > 법학자 김두식... 그가 말하는 한국 교회!

 

"외형적으로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나날이 영향력을 잃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반성하고, 교회와 세상의 올바른 관계를 모색해본 책입니다"

지난 1월, 한국 교회를 "애통한 마음"으로 꼬집은 책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선보인 법학자 김두식 교수. 그는 출간 후 굉장히 바빠졌다고 한다. 독자들로부터 이메일과 전화가 폭주한다는 것. 독자들의 열띤 부름을 받은 김 교수가 지난 22일 밤 서울 명동 '청아람 아카데미'에서 독자들과 만났다.

가장 먼저 그는 이 책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만 그치는 건 아닐까란 고민을 털어놨다. 책이 호응과 공감을 얻고 있지만 "우리끼리, 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조그만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이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이 책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란 의문도 떠오른다고. "예수님도 시작은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었나"란 생각을 하면서도 힘이 쭉 빠진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찻잔 속의 태풍"을 넘어서서 "어떻게 이 범위를 넓힐 수 있을까란 생각을 같이 해주길" 부탁했다. 
 


목사님께 선물하고 싶은, 하지만 못하는 책
그가 독자들로부터 숱하게 들은 말은 바로 "이 책을 목사님께 선물하고 싶다"라고 한다. 하지만 "선물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어봤다고. "선물하고 싶기는 하지만 선물하지는 않는 책"이 된 것이다. 목사님께 책을 드리게 되면 "교회 내에서 전혀 좋을 게 없는" 현실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의 덫은 독자만이 아닌 저자에게도 해당되는 듯하다. 그 역시 목사님들께 책을 드리기가 조심스럽고 목사님들의 눈빛에 흠칫 놀라기도 한다고 한다. 독자들과 만남에서 눈치를 보게 되고, 악성댓글에 무서움을 느끼기도 한다고 한다. "제가 쓰고 싶어서 쓴 책이 아닙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책입니다"란 저자의 말이 겹쳐진다.

"이것이 이 책을 쓰면서 제 마음에 있는 공포, 자기검열입니다. 참 이상한 일 아닌가요? 이 정도 책을 가지고도,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해코지를 당하면 어떡할까란 두려움. 이런 공포는 어디서 왔을까요? 함께 나누고 싶은 고민입니다."

그는 이 책이 "아주 초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일 뿐이라고 한다. "대단히 특별한 내용을 전혀 담고 있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이 똑같이 고민하는 내용, 평소 생각했던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책의 독자나 저자나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 교회에 '감히'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현실. 그는 여기서 "공포에 의해 유지되는 한국 기독교"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 기독교는 미국의 아주 보수적인 교단보다도 보수적인 면이 있다.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고, 공포에 떨게 만들고, 말을 못하게 만듭니다. 아주 상식적인, 기본적인 이야기도 자신 있게 못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억압적인 사고 구조 안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입니다."

같은 이유로, 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목회자들도 한국에 오면 배워온 내용들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신학자가 아닌 김 교수가 '감히' 이런 책을 쓰게 것이다.

"오죽하면 저 같은 사람이 나서서 이랬겠습니까. 이런 무식한 사람이 나서서 떠들도록 그냥 놔둔, 이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방치한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해야 하지요."

이렇듯 지금과 같은 한국 기독교 현실에선 반드시 '써야만 하는' 책이었기에, 거꾸로 말하면 결코 "내가 쓰고 싶어서 쓴 책"은 아니었기에 저자는 "이 책의 인세는 높은뜻푸른교회, 열매나눔재단을 통해 전액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일 것"이라고 밝혔다. 
 



 


꿈꾸는 교회...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회  

그렇다면 김 교수가 꿈꾸고 있는 한국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무엇보다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회", "돌봄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강조했다.

"한 장로님이 사정이 어려운 어떤 학생한테 다달이 돈을 대주는 얘기를 들으면 어떠세요?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가 2100억 원짜리 건물을 짓는다, 가슴이 따뜻해지는가? 안 따뜻해져요, 이상하게. 아까는 100만 원, 200만 원짜리 얘기고 이건 2100억 원짜리 얘긴데 왜 가슴이 따뜻해지질 않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그는 교회가 할 일을 보험회사와 국가에 내어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예를 들어 아내와 어린아이들이 딸린 한 교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 경우, 교회가 단순히 교인의 장례를 집전하는 것에서만 그칠 게 아니라 남겨진 가족의 생계문제도 책임져야 한다는 것. 이렇게 서로 돌보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교회가 "돌봄의 공동체"이다.

"교회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주면 많이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몰려오는 거고. 실제 초대교회를 보면 전도보다 훨씬 중요한 게 갑자기 몰려오는 밥만 먹으러 오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거였어요. 그런 모습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회"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권력, 정치, 돈과 거리를 두는 교회"가 되지 못했기 때문.

그는 먼저 어린 시절 소망교회에서 목격했던 한 장면을 회상했다. 바늘 하나가 떨어져도 소리가 울려 퍼질 듯한 아주 고요한 예배당, 그 안에서 엄숙히 깔리는 목사님의 설교. 그때 갑자기 예배당 한 구석에서 한 아기가 울기 시작한다. 순간 목사님의 일그러지는 표정. 울음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며 설교를 멈춘다. 아기 엄마는 얼굴이 새빨개져 아이를 안고 예배당을 급히 빠져나간다. 김 교수는 이를 "고상한 폭력"이라고 부른다.

"아주 품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폭력적인, 제가 목격했던 소망교회의 고상한 폭력. 그 특성이 이명박 정부로 그대로 옮겨왔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품위 있게 진행되지만 사람이 죽어나가고, 검찰이 조용히 사람을 잡아가 불구속 상태에서 아주 편안하게 수사를 하고, 사회적 생명을 끊고. 굉장히 위험한 식으로 운영되고 있지요. 상당히 위험한 기초 위에 쌓인 기독교 정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대통령이 배출됐지만 이는 굉장히 위험한, 교회와 권력·정치가 결합한 결정적 악례일 뿐이란 말이다. 이외에도 돈과 거리를 두는 문제도 남아 있다. 그는 "국가보다 위험할 수 있는 세력"인 '삼성'을 언급하며 교회와 돈의 문제를 지적했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입을 닫아버린 언론에 대해 그는 "도둑이 들면 개가 짖어야 되는데 짖지 않는 상황"이라며 교회는 과연 이와 얼마나 다른지 되물었다.

"신문사는 먹고살기 위해 그랬다, 이해할 수 있겠죠. 그런데 혹시 교회에서 삼성에 대해 설교하는 걸 들어본 적 있나요? 삼성이 교회에 광고 안 내거나 할 일도 없지요. 아무 제약이 없는데도 교회에서는 돈에 대해서, 돈의 위협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습니다. 섹스의 위협에 대해서만 줄기차게 얘기해댑니다. 뭐도 안 되고 뭐도 안 되고.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얘기하신 게 훨씬 많은데 아무도 그런 얘기를 안 한다는 거죠."

이렇듯 지금과 같이 권력, 정치, 돈과 결합한 교회라면, 그 위험함에 깨어 있지 못한 교회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회", "돌봄의 공동체"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안은 '제시되는 것'이 아닌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안은 무엇인가. 김 교수는 "책의 대안 제시가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질문·지적을 많이 받지만, 부족한 대안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탁탁탁 하면 탁 되는 해결책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대안이 별로 없다는 걸 인정하고 나서 그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은 같이 고민해야지요."

"설교 끝난 후 질문 받기, 지정헌금제도 등 새로운 실험이 필요합니다. 작은 교회공동체부터 실험을 해보는 거죠. 되든 안 되든, 우리 교회가 정말 살아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한 아이디어를 논의해보는 것만으로도 교회의 생명력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은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는 "오늘 당장 교회에서 무엇을 새로 시작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줄 것을 부탁했다. "교회의 현실에 절망"하고 절망하더라도 "재도전의 용기"를 품어줄 것을, '감히' 부탁했다.

"물론 치밀한 기획 없이 시작하면 실수도 많고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그래도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대부분의 좋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실험도 우선은 누군가 용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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