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혁명과 생명윤리
힐러리 퍼트넘 외 지음, 생물학사상연구회 옮김 / 아침이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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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명과학은 다른 어느 분야의 과학보다도 훨씬 인권, 철학, 도덕, 정의, 사회, 정치의 문제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것은 이 과학이 생소한 분야여서 그런게 아니라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고 그리하여 세계최대의 민간 인권운동단체인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는 유전자 혁명의 본질에 좀 더 다가서기 위해 유명한 옥스퍼드 강연을 열었고 이를 생물학사상연구회에서 번역하였다.

  생명 윤리 문제에 있어 유전공학의 활발한 연구와 이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인류가 자신의 고통과 유전적 열등함을 개선할 수 있는 자유주의와 인권에 기대어 "유전자 치료와 변형"에 대한 발전을 중심으로 논지를 펼치고 있으며, 이와 반대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 복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간배아의 낭비로 인한 희생, 조직 배양에 따르는 비윤리적 측면과 우생학 정서의 확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권리를 제한하는 타당한 이유중 하나를 원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역시 나도 모든 권리를 제한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유주의자들의 행진은 멈춰서야 할 거점이 있다. 일부분에 대해서 이런 예를 들고자 한다.
  더 좋고 건강한 것에 대한 선택이 자유로워야 한다? ; 취향이 차별받지 않아야한다고 하지만 취향에 대한 선호도가 편향되어 있는 이런 와중에 형성되는 계급의식은 눈앞의 현실로써, 이를 고려할 때, 그 선택권은 소유하지 말아야함이 마땅하다. 선택하기 쉽고 기회도 많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대상에 대해서는 "다양성"이 발생하나, 그 반대인 경우 "다양성"은 자취를 감춘다.  사람들이 볼펜이나 셔츠를 선택하는 경우와 집이나 차를 선택하는 경우를 떠올려 보라.  유전자에 관해서는 빨간색이 좋으냐, 파란색이 좋으냐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큰 케익이 좋으냐 작은 케익이 좋으냐, 맛없는 케익이 좋으냐 맛있는 케익이 좋으냐처럼 이익과 관련된 것으로 이것은 "차별"을 유발할 뿐 "차이"의 다양화를 유도하는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어떤 강연자가 지적한 것처럼 이런 자유의 극대화는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가 고려되지 않은 (무자비한)자유이다.
  인간 복제에 대해 찬성하는 이들은 아주 중요한 점을 하나 놓치고 있는데 이에 관해 6장에서 이런 주장을 한다.
  "뭔가가 자연적 대상물이 된다는 것은 인위적 대상물과는 구별되는 도덕적 지위를 수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

  이제 자유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쪽을 비판해볼 때, 아주 신중하고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유전자 치료나 변형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먼 미래는 염두에 두지만, 당장에 인류가 처한 고통에 대해서는 그 관심도가 엷다는 점이다. 치유 불가능한 유전병인 EB질환을 앓던 아이를 잃은 부모가 다음 아이의 출산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외에도 다른 고통이 심한 유전적 질환을 야기할 DNA를 인공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깊고 넓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치료와 조작은 물론 인류를 포함한 생태계의 "미래"에 대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접근해야 하는가. 

  각각의 분야에서 그리고 각각의 입장에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들과 대중들은 점점 복잡해져가는 사회문제의 해결에 대한 접근을 시도함에 있어, 이제는 한 가지 이론이나 주장만으로 해결법을 정리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새로운 이념이나 유연한 사고로 대처해야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의견을 분석하고 취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또한 그만큼이나 그것들을 소화하려는 열린 마음과 자세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바, 현대의 가장 중요한 논란거리인 생명과학에 대하여 여러 방면에서 고찰해 본 이 책은 누구나 한번씩은 정독해봄직한 양서이다. 두께가 얇은 편에 속하는 이 책은 겉보기와 달리 매우 가치있는 주장과 논쟁을 담고 있어 그 내용의 무게는 몇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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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람 팍스의 평화를 위한 블로그
살람 팍스 지음, 김성균 옮김 / 한숲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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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명 - 인간의 손끝에서 나온 무수한 유형.무형의 창조물들은,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어떤 위험이나 문제점을 그 본질속에 반드시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래도 회의적인 입장이다.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어느 정도 밀려난 정보화 사회의 문제점 - 사생활 침해에 대한 우려와 아이러니하게도 익명성으로 인한 폐해가 함께 거론되었었고 정보의 조작과 정보 공유의 불평등, 현실과 가상공간 사이의 혼동등 당시에는 정말 낯설고 대처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지적되었었다.

이런 와중에서 인터넷이라는 문명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 위험과 문제들이 예상했던 정도보다는 낮은 수준에 머물면서 긍정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진단해본다. 그 한 가지 예로 살람 팍스라는 네티즌이 일으킨 자그마한 화제를 들 수 있겠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20대의 성실하고 감수성 풍부한 필명이 살람 팍스라는 한 청년 블로거 덕분에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서방세계에 의해 조작된 정보가 아닌 현지인의 심정과 시각을 조금이나마 실시간으로 전해들을 수 있었다.
비록 그가 사는 지역에서의 생활로 한정 되어 있었지만 서방 언론보다 빠르거나 또는 다른 내용의 이라크를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람 팍스는 실존 여부를 의심받는 메일을 많이 받았다. 나라면 그런 것을 묻는 메일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기록한 내용들에서 크기를 확대하거나 감추거나 모략을 위한 목적인 듯한 분위기는 느끼지 못했으며 그의 생각들은 충분히 표현되고 발언될 수 있을만한 시대에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대내외의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세력들에 대해 사람들은 정말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과 “상한 우유”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해야하는 입장에 놓여있었고 심한 빈부격차 때문에 빈자에 속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정의와 미래,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으며 언론은 말도 안되게 날조되었다. 천연 자원에 대한 탐욕으로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강대국과 사태파악을 못하는 허울좋은 명분뿐인 국제 자원봉사자들은 머리도 마음도 비었으며 국제기구의 잔인한 제재조치들은 선한 국민들을 죽음과 질병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선진국 국민인 일부 블로거들은 이런 상황에 놓인 이라크에 사는 살람 팍스에게 “우리가 시키는대로 하라.”라는 황당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현실의 가장 중요한 barometer와 해결방법은 현재 바로 그 곳에 있는 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측정하고 찾아내야 하는 것이지 멀리서 잘 알지도 못하는 외부사람들이 주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단지 물질적 도움이나 정신적 응원이면 충분할터, 저러한 거만한 태도의 메시지는 평화를 방해할 뿐이리라.

“파견”이나 “지원”이 아닌 “파병”문제가 아직도 심각하게 논쟁이 되고 있는 이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 결정을 위한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맞춤법이나 오자, 탈자가 많은 것이 출판사의 성실성에 대한 신뢰도를 낮춘 아쉬운 점을 좋은 책 내용이 약간 벌충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존재를 통해 아직도 개인이라는 요소는 유효하고 의미있는 존재라는 것과 현실에서든 가상에서든 진실 소통의 가능성을 그가 증명했다는 것에 특히 나는 주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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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런스 딥 - [할인행사]
이재한 감독, 알렉스 매닝 외 출연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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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런스 딮 the cut runs deep 의 재구성

푸른 심장이 붉게 물들어 발화점이 낮아지면
세포 분열로 성장통을 겪기 시작하는 것은 몸에서 마음으로 옮겨가고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다.
시검석試劍石을 조각낸 명검으로도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실絲인 강한 인력引力은
원래 천상의 것이 아니라서 그 끝이 예정되어 있건만
이끄는 쪽도 이끌리는 쪽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덫에
어리석은 그러나 너무도 달콤한 희망을 건 채 발을 내딛는다.
소년은 어른인 남자와 어른인 여자에 압도된다. 그리고 남자도 또 여자도 소년을 원한다.
남자는 길을 잘못 들기 전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소년을 통해 향수를 느끼고 싶어하고
여자는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순수한 열정과 사랑을 소년에게서 갈구한다.
쓰레기더미에서 탈출을 꿈꾸는 소년은 기꺼이 욕망과 유혹에 몸을 내맡긴다.
화려한 불길에 휩싸여 있는 소년은
남자의 조용하고 매력적인 미소에 깃든 슬픔의 정체를 이해할 수 없고
여자의 신비하고 설레이는 사랑에 깃든 절망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불구인듯한 하이브리드로서의 삐걱거림도 이렇게 취한 상태에선 대충 견뎌낼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곧 그 불꽃이 꺼질 것을 안다.
속도는 통제 범위를 벗어나고
분출되는 아드레날린 효과와 교감신경 흥분의 지속시간은 갈수록 짧아져
밝음과 어둠은 자아의 정체성을 교란시키고 결국 파멸하고야 만다.
소년의 목에 매여있는 투명하고 단단한 사슬은 갱단의 보스가 쥐고 있다.
남자는 보스를 쏜다. 쏘는 것뿐이 소년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역한 화장실 청소에서 벗어날 때의 소년의 기쁨이 들어 있던 남자로부터의 선물은
다시 한번 포장되지 못한채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부서지고 만다.
태어난걸 후회할 만큼 아픈 상처를 내는 칼이 아닌
한 방에 평안해 질수 있는 총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이미 없었던 시작이었다.
세 사람의 눈물은 메말라 그들의 눈에서 흐르지 못하는 대신
무당인 남자의 모친이 타는 작두날을 붉고 끈적하게 물들이며 비릿하게 뒤섞인다.
베어진 상처는 깊게 흐른다, 남자에게서도 여자에게서도 그리고 소년에게서도...

손바닥만하게 작은 티비화면에서 간신히 비춰지던 영화속의 데이빗 맥기니스를 보는 순간, 감독이 "널 위해 영화를 만들겠어."하고 마음을 빼앗겨버린 것에 200퍼센트 공감했고, 얼마전 전파를 타던 CF는 그를 얼마나 별볼일 없는 범부로 전락시켰는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봐온 영화들의 어떤 캐릭터에서도 이만한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본 적은 없다. 아니, 그 이전엔 카리스마가 무슨 뜻인지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재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재로 두말할 것도 없이 감상적이다. 그러나 감독은 그 경계를 정확히 짚어내어 선을 넘지 않았다. 제목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이레이저 헤드]를 떠올리게 하는 이재한감독의 차기작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궁금하다.
어찌해볼 수도 없이 허망한 엔딩씬에 흐르는 울먹이는 듯한 보컬의 Tanita Tikaram의 삽입곡 I might be crying은 내 데스크탑의 winamp에서 끊임없이 repetition되어 언제까지나 잊혀지지 않을 여운을 안개처럼 피워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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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백인들
마이클 무어 지음, 김현후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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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함을 풍기는 제목과 밝은 표정의 작가자신을 표지에 찍은 이 물건을 봤을때 “너무나 대중적"인 내용이 아닐까 짐작했지만 매우 다행히도 편견이었다.
책을 덮고 나면 작가가 왜 표지에 나와 있을 수뿐이 없는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어는 그런 제목을 붙인게 백인인 자기자신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멍청한 백인을 실컷 욕한게 자기가 아닌척 다른 그림으로 대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등등등...
작가이자 다큐멘터리영화 감독인 무어는 미국 사회 문제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어도, 시민으로서 관심을 갖고 직접 발로 뛰어서 알아낸 것을 증거로 당당하게 비판하는데 이런 행동성은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이다.(좀전에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 리뷰를 쓰고 났더니...) 게다가 그의 유머는 허를 찌르고 촌철살인의 감동을 주면서도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몇가지 예를 보자.

**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에서,
취임직후부터 불과 몇 달 만에 자네가 거둔 성과를 보면 감탄이 절로 터질 지경이라네. 자네는 (경악할만한 수많은 정책을 나열한후) ...... 이거 타이프만 치는 데도 난 벌써 피곤하네. 그런데 어디서 이런 기운이 나오나? 낮잠을 자서 그런게로군.

** [형무소 천국]에서 last name하고 피부색만 같은 두 흑인중 범죄자가 아닌 무고한 시민을 감옥에 보낸 행정 과정에대해 ; .... 물론 캘리포니아에 사는 케리 샌더스하고 뉴욕에 사는 로버트 샌더스는 다른 인물이다. 하지만 “케리”하고 “로버트”하고 비슷하다고 느꼈고, 캘리포니아하고 뉴욕은 같은.... 어..., 음..., 둘 다 큰 주니까....

** [주인 없는 지구] ; 휘발유 적게 쓰는 법, 흑인이면서 유쾌하게 웃는 방법, 남부에서 나온 좋은 생각들, 내가 권장하는 수돗물 첨가물

** 유고가 폭력 중독에서 회복되는 데 필요한 12단계 ; 솔직히 말해서 당신들한테는 12단계가지 모두 할 시간이 없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판에 웬 12단계씩이나! 그러니 약식으로 세 가지만 하자. 신속하게!

그가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그저 자기 일만 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것을 실천하는 것을 보면 그에겐 멍청한 백인을 질타할 자격이 충분하다.
랠프 네이더를 지지하고 선거활동을 했으며 고등학생 시절엔 자력으로 출마까지 했다. 사소한 것으로는, 티비에서 한 잡지 칼럼니스트가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도 읽지 않는 고등학생들을 나무라자 그 칼럼니스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 고전의 내용을 묻기도 한다(칼럼니스트는 어물어물하다가 자기도 안읽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또 무어 자신의 회사에 흑인들을 고용했다.
즉 나는 이 책에선, 미국 사회의 비리를 폭로한 내용 자체보다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무어가 갖고 있는 열정과 실천하는 태도, 유머와 그 유머에 기본적으로 흐르는 윤리, 그리고 그 윤리에 배어있는 따뜻함에 더 매료되었다.

신자유주의로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주의를 꿈꾸는 미국의 사회상이 한국보다 별로 나은 것은 없으나 그들의 기록문화는 훨씬 발달해있다는 것을 느꼈다. 각종 확률과 통계 그리고 그 방법, 사건과 인물에 대한 기록등이 허술하다면 이 책의 분량이 많이 줄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룬다티 로이의 말대로 ‘“민주주의”가 자유세계 의 창녀로 전락한’ 이 시대에 타산지석이라고 한국 자신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한국이 부끄러운줄 모르고 흉내내고 있는 다른 국가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된다. 그 돌들 중에 나같은 일반 시민의 수준과 “정서”(위에서 말한대로 좀전에 [폭력과 상스러움]의 리뷰를 쓰고 났더니...)에 좋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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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6-2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보고 나면 우리는 '그지없이 멍청한 대한국민'이란 생각이 든단 말이지요..
(에효, rg에 코멘트를 달려고 했더니 등록 누르는 순간 페이지 어쩌고 멘트가 너뎃번이나 나오더만요. 끌)
 
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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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한국사회가 품고 있는 미개함을 훌륭하게 야유한다.
그래서 나는 야유하는 내용자체엔 무척 만족스러우며 찝찝한거 한점 남김없이 망설이지 않고 냄비바닥에서 닥닥 긁어낸 것에 박수를 보낸다.
그 문제들에 저자가 분노하고 야유하는 것은 무척 당연하다.
소수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오른쪽으로 쐐기박혀버린 정치,
폭력을 피하려고 폭력의 심리에 기대어 자위自衛하는 대중들,
모든 물리적 경제적인 것을 “자유”롭게 약탈하려는 신자유주의,
뇌와 양심이 나침반을 잃어버려 정처없이 헤매는 지식인과 언론,
21세기를 몇 년이나 지난 지금도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제점들이 새삼스러운게 아니라서 참신성은 별로인 내용이지만 이를 속 시원히 지적하거나 충고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싶다. 그래서 이 책의 질은 등급이 충분히 높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자꾸 그 부분이 얘기하고 싶어지는건 나 역시 저자의 스타일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자연스레 사그라들지 않기 때문이다.

“변태”, “어린이”, “동물의 왕국”, “지능장애 수화기”, “뿌지직”, “몸뚱이”라는 단어들 그 자체에 나는 거부감같은건 전혀 없다. (진중권의 말대로) 그것이 어떤 문장속에 어떻게 놓이느냐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지는 것인데, 무지몽매한 내가 이 상태로 논리적으로 설파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정도 말하면 언어구조주의 이론인가를 전공한 그는 내 거부감의 이유를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 단어들과 달리 “야바위”, “원시적 짓거리”, “누렁이”들은 적당하게 쓰였다.

그가 불의에 분노하는 것은 옳다. 그 분노가 고상하건 천박하건 점잖건 속되건 상관없이 옳다. 썩어빠진 세상을 부정하는 것도 옳다. 그 비판 대상을 끌어올릴 수 없는 바닥으로 내팽개쳐도 옳다. 문제는 그 모양새가 전투적이거나 통쾌하기보다는 비열함을 풍긴다는 것이다. 그 비열함은 당사자에도 제3자에도 씻어내기 어려운 불쾌감과 일종의 상처를 준다. 사람말고 죄만 미워해도 충분하다.
책의 뒤에 진중권론을 쓴 노혜경씨는 그가 유머러스하고 윤리적인 매력남이라고 하지만 난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간파해내는 감수성이 없어서일수도 있지만 진중권의 그 비열한 스타일을 “유머”로 느끼는 감수성따위 갖고 싶지도 않다.
아마도 이런 면이 그의 명석함과 윤리를 대패질하는 요인일것인데 책에서의 이 유일한 아쉬움을 빼면 토달만한 것없이 한국 초상에 대한 필요하고 완벽한 비판서이다. 덧붙여, 형이상학적인 논리비판 말고 정말로 “엑스 리브리스”에 어울리게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사태에 대한 실례를 증거로 비판되는 형태의 책도 나와주었으면 좋겠다.(좀전에 마이클 무어의 책을 읽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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