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 학벌주의와 부동산 신화가 만나는 곳
조장훈 지음 / 사계절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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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소도시에서 태어나 토박이로 살아온 나. 지방에서 살아도 미디어를 통해 '대치동'이라는 곳은 잘 안다.

한국의 교육열을 상징하는 곳으로써 '대치동'은 사교육을 통해 선행학습을 하고, 좋은 학벌을 얻어 좋은 지위와 그만큼의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곳이라는 것도.

하지만 여기서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은 그 곳의 열기나 진짜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것도 일부일 뿐, 그 속에서 있었던 사람이 구체적으로 그 곳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발전하여 지금까지 이르렀는지 제대로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책에는 대치동이 형성되기 시작한 떄부터 그곳에서 논술학원을 시작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치동이라는 곳에 사람들이 어떻게 모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부동산과 학벌이 어떻게 얽히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그에 더불어 강남 개발과 함께 사립학교 이전과 진학 방법의 변화, 그로 인한 학부모들의 이사 등 교육이 부동산과 얽혀 만들어낸 욕망의 장소에 대한 설명이 잘 드러나있다.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복잡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대치동의 사교육 발전에 일조한 사람들이 민주화 운동 후 일자리를 얻기 힘들어 사교육 시장으로 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처음엔 학생들을 교육하고, 도와주며 자신의 생계도 이끌어가겠다는 그 생각이 의도치 않게(?) 우리나라 사교육 판을 키운 이들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의 사고력을 키워 올바른 지식인으로 성장하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도였다면 이런 결과가 만들어지게 하면 안되었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물론 그들이 교육과정을 만들거나, 입시체제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돈있고, 학벌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게 한 것은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치동의 역사와 대치동이 발달하게 된 계기를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와 교육열을 타파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앎'의 기쁨을 알게 하고, 개인의 영달만을 위한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방에서 교사를 하며 아이들을 만나고, 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엄마로서 내가 생각하는 교육은 대치동의 학벌위주의 교육보다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울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결국 좋은 학벌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니 아이들을 그 학벌을 가지기 위해 대치동이며 사교육으로 밀어넣는게 아닐까? 그리고 물질을 중시하는 사회다 보니 그 풍요로운 물질을 얻기 위해 좋은 학벌을 얻어야 한다는 사회다 보니 더욱 그런 것 같다. 


나는 이 책이 우리나라가 학벌위주의 사회가 끝나간다는 것을 뜻하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구수가 감소하면서 이젠 대학들도 학생들을 유치하기 어려워졌고, 사교육 현장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 적은 인구에서도 우열을 가리기 위해 경쟁하고 등급을 메겨 좋은 학교에 넣으려고 노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부모보다 가난하게 살게 될 우리 아이들은 기성세대의 그릇된 생각을 다르게 바라보고 자라길 바란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우월감으로 으시대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하루하루가 즐거워서 삶이 충만해지길. 그리고 그런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가르쳐줘야 하지 않을까? 책을 통해 별자리를 공부하지 않고, 당장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볼 수 있는 아이들로 자라기를. 그저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란다.


* 이 글은 출판사로 부터 책을 지원받아 쓰여졌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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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직업 - 고통에 대한 숙고
알렉상드르 졸리앵 지음, 임희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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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통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삶을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저 남들처럼 무난하게 살다가 조금 아프고 그렇게 살거라 생각했었지. 그런데 우울즐을 앓고,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고 난 후 고통과 질병을 내 몸에 안고 그걸 감내하며 살아야 하는 삶이 된 이후엔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졌다. 하루하루가 꿈꾸는 것 같은 날들. 자고 일어나면 깨어나 아프지 않고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나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 그런 생각으로 버텨나가는 하루하루.

 

인간이라는 직업. 모두들 벗어날 수 없는 이 직업에서 뇌성마비를 앓고 그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는 저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 뒤에 숨어있는 삶의 진실한 모습을 보라고 한다.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고 나면 고통이 일상화되고 그 뒤에 숨은 삶의 진실을 보게 될까?

 

직업의 특성상 서 있는 시간도 앉아 있는 시간도 긴데 허리에 많은 무리가 갈까봐 두렵다. 항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 모른다. 한동안 괜찮았던 우울증마저 다시 도질 정도이니...

 

인간이라는 직업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맞딱드리는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느끼며 살라고 한다. 그의 말에 조금 힘을 얻긴 해도 아직까지 아픈 내 몸과 마음에 적응하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 시간 동안 곰곰이 다시 읽어보며 힘을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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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의 아들러 심리학 입문
기시미 이치로 지음, 박재현 옮김 / 살림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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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대부분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리려고 할 때 사용된다. 분노를 표출하면 상대가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해 분노라는 감정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슬픔이라는 감정은 상대로부터 동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p89

사실, 문제는 사랑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지 않다. 보통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금방 아이와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 있기에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있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태어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원활한 대인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p97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온화하고 단호하게 아이를 대하라고 권한다. 온화하다는 것은 힘으로 누르지 않고 끈기 있게 대화를 나눈다는 걸 의미한다. 단호하다는 것은 아이와 부모의 과제를 분리한 뒤,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과제에 맞설 수 있다면 불필요한 개입은 하지 않는 다는 뜻이다. 아이는 온화하고 단호하게 키워야 한다. -p132

아들러는 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대인관계를 `수직관계`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위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벌을 주거나 칭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칭찬한다는 것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상대를 내려다보며 `잘한다`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간관계를 종적인 `수직관계`로 보는 것이 정신 건강을 해치는 가장 큰 요인이라 간주한다. 그 대신 대인관게를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생각할 것을 권한다. 칭찬하는 것과는 반대로 용기를 주는 것은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바라볼 때 가능하다. 서로의 관계가 수평적이라고 생각할 때 비로소 상대방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p142

모든 장면에서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지금 자신이 한 말이 상대에게 용기를 주었는지 아닌지를 늘 반성하고, 개개의 장면에서 어떤 말이 용기를 주는지 심사숙고하는 수밖에 없다. 대로는 얼핏 용기를 줄 것 같지 않은 말이 뜻밖에 용기를 안겨주기도 한다. 용기를 준다는 것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구성한 현실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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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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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 책과 연관해서 감자캐듯이 줄줄이 이어져 읽게 되는 책들이 있다. 그리스 신화가 그랬고, 자본론이 그랬다. 이번에 페미니즘 관련한 책들도 그러하다.

 

처음에 '정희진 처럼 읽기'를 통해 정희진이라는 작가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후에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페미니즘과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언어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밑줄 그으며 한 번 읽고, 두 번쩨는 밑줄 그은 부분을 옮겨 적으며 읽었다. 서평을 쓰고 싶지만 좀 더 읽고 깊이 공부해야 할 책 같아서 서평 쓸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을 읽고,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고 한다'를 읽고, 이번에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를 읽게 되었다. 공저자 중에 정희진이라는 이름의 영향이 크다.

 

이 책에은 '여성 혐오'라는 제목이지만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혐오'의 문제에 대해 다룬다. 가장 큰 맥락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혐오이고, 그외 여성들 또한 트렌스젠더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 전반에 걸친 '혐오'가 어떻게 형성되고 나타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언던 두 저자는 '임옥희'와 '정희진'이다. 임옥희는 '주제화. 호러, 재마법화'라는 글에서 다양한 제재들을 언급하며 여성에 대한 혐오의 근원을 탐색한다.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이야기에서 '메데이아'를 통한 외부인, 외국인, 여성에 대한 혐오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혐오가 좌절된 쾌락의 폭력적 드러남이라는 언급또한. 쾌락이 좌절됨으로써 혐오가 된다는 것. 사랑이 좌절되면 결국 혐오의 감정이 된다(-p81)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참 슬펐다.

 

그리고 정희진의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에서는 기존의 '페미니증의 도전'에서 보았던 '여성에게는 여성을 표현할 언어가 있는가?'라는 문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회적 약속이라고 믿는 언어는 서구, 백인, 중산층. 남성, 이성애자, 젊은 사람, 비장애인의 언어(-p106)'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위의 계층에 속한다 생각하고 서술하면서도 그것을 꺠닫지 못한다는 것. 언어를 전공하고 가르치면서도 언어의 의미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깊이 사유하지 않은 점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외에도 남성들의 역차별에 대한 연세대학교 논지당 사건을 바탕으로 한 '른 목소리로, 여성 외의 성소수자들, 트렌스젠더, LGBT 등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가 사회전반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작용하고 있는가를 서술한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 '누군가의 삶에 반대한다?' 등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일반 학교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그저 추상적이고 포괄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고, 사랑하며 존중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의 언어로서 기득권의 가치관을 서술하고 있는 교과서로는 지금의 '혐오'를 그대로 재생산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언론과 미디어들과 학교에서 부터 이러한 것들을 이슈화하고, 끊임없이 논의하고 토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유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We are one, but we are not same'이 뜻하는 바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쁜 여자와` 착한 여자`라는 판본을 만들어내고 각 사회 주체들을 배치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첨예한 젠더 정치가 된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비난은 나쁜 여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여성을 참조해 사회적 필요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다. -p5

혐오 발언 안에는 주목을 통해 자신이 행위 주체임을 인정 받으려는 `주체화의 열정`이 들어 있다. 무기력하고 무의미한 삶에서 주목받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혐오는 격렬한 열정 중 하나다. -p56

이처럼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는 것들을 여성성과 결부시킴으로써 남성 주체의 불멸성, 초월성,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안의 타자성을 억압하는 것, 그것이 가부장적 사회를 유지하는 젠더의 정치경제다. -p70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는 데 가장 위험한 두 가지 도덕 감정이 혐오와 수치심이다. -p73

니체와 프로이트는 평등한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보는 발상의 이면에는 시샘(선망)의 감정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이으며 그것을 즐기는 타자의 쾌락에 대한 시샘이다. 모두가 즐길 수 없다면 즐기는 사람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서로 평등하게`라는 것에는 나보다 더 많은 쾌락을 차지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경쟁의식과 시샘과 질투가 깔려 있다. -p80

가부장적인 국가는 오랜 세월에 걸쳐 여성적 은유에 바탕을 둔 `혐오의 합창`을 생산해왔다. 여성의 자리를 모성으로 간주해 숭배하다가도 여차하면 혐오감을 부추기는 국가를 길들여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p87

깊은 혐오는 깊은 공포와 매혹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p87

민주주의는 타자 없는 사회를 말한다.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없는 사회. - 자신의 형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다. 우리는 타자the others와 타인different person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p96

문제는 이분법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정하는 권력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차이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p100

성별이 당연하기 때문에 차이나 차별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성sex를 기준으로 구별gender해야만 가부장제 사회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p101

"인간에게는 명명define하고 명명당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인식은 기본적으로 투사다. 아는 과정에는 자기 의견, 희망, 욕구가 반영된다. 아전인수는 `아전인수식 해석`의 문제라기보다 언어의 본질이다. 모든 사물에 관한 정의에는 그 대상에 대한 이해관계와 원망이 포함되어 있다. 말을 만드는 사람의 경험이 곧 말을 구성한다. -p101

언어는 곧 철학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그 생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가은 무엇으로 생각을 하는가? 생각이라는 노동은 언어라는 경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언어(개념) 없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 자신과 자신이 속해 있는 구조와의 관계를 사고하지 않는 언어는 폭력과 폭력적인 체제를 재생산하게 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며, 폭력이란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동시에 언어를 생산하며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 -p102

표현의 자유는 모든 이에게 동등한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인것은 가장 중요한 정치학이다. 인종, 젠더, 계급 간의 위계에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혐오 범죄일 뿐이다. -p104

민주주의는 완성이 아니라 추구의 과정이다. -p105

언어는 자기 탐구에서 시작된 행위다. 앎/삶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 탐구다. 그것이 시작이자 끝, 전부다. -p113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최근에 나온 헤릴린 루소의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마라]에는 "무지한 사람들과의 달갑지 않은 조우"라는 장이 있다. 나도 매일 듣는 레퍼토리다. 무지clueless는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영어의 `클루`는 단서, 실마리이므로 클루가 없는 인간은 `게념이 없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들은 대화는커녕 접촉에서부터 폭력을 발산하는 사람들이다. 즉 본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분들 말이다. 권력이 부여한 무지는 국가도 구할 수 없다. 그들을 밟아줄 (상상속의) 코끼리가 필요할 뿐이다. -p114

감정은 여전히 이성적이지 못한 비합리적 행동, 본질적 반응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감정이 사회적 삶에 관한 것, 사회문화적 구성이라는 논의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상당히 축적되었다. - 감정은 개별 주체에게서 기원하거나 그것으로 수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흐메드는 감정의 사회성을 제안하며 감정이 대상 및 타자의 접촉을 통해 어떻게 몸의 표면과 경계를 형상하는지를 질문한다. 이 작업을 위해 아흐메드는 감정을 논의하는 질무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데. "감정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감정은 무엇을 하는가"라고 질문한다. 감정이 몸과 사회에 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감정의 작용을 통해 형상되는 모습을 살피고자 하는 것이 아흐메드의 문제의식이다. -p 176

감정은 단순히 사회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내`가 세상 혹은 타인과 접촉하는 방식이자 `내`가 세상과 조우할 때 받는 인상이자 형상이다. -p176

혐오라는 괴물이 노리는 것은 단지 성소수자, 이주민, 여성, 또 다른 소수 집단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 미워하길 바라는 자들은 누구인가. 혐오가 파괴하는 누군가의 존엄은 나의 존엄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런 질문에 함꼐 답해야 할 때다.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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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로드클래식, 길 위에서 길 찾기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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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할 때 주로 작가 위주로 선택하기도 하지만 신문이나 주간지에 소개된 책소개나 리뷰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고미숙의 이번 책은 한겨레 신문에 연재된 글 덕분이기도 하고, 고미숙이라는 저자 덕분이기도 했다. 이번 책도 참 재미있게 읽었지만 무엇보다 큰 소득은 책을 통해 읽어야 할 책들을 다시 소개 받았기 때문이다.


장정일, 정여울, 고미숙, 강신주 등 몇몇의 저자들은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맛깔나게 소개한 책들을 펴낸다. 그 책들이 때로는 내게 지도처럼 작용해서 재미난 책들을 찾아가게 해준다. 이번 책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에서는 박지원의 '열하일기', 오승은의 '서유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니코스 카잔차기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아주 재미나게 소개되어 있다. 한 책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면 그 책을 읽지 않고서는 못배길 정도였다. 덕분에 집에 묵혀 두었던 ''열하일기'를 꺼내 들어 읽었고, 다른 책들도 어디 출판사 책이 좋나 하고 살펴보게 되었다. 


참 재미난 것이 위의 책들 모두 '여행'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재미와 교훈을 준다는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북벌'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북학'을 해야 한다고 깨우치게 된 연암의 인식의 변화가,오승은의 '서유기'에서는 여행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건 사고가 결국에서는 구원과 구법을 위한 과정이라는 것,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돈키호테와 산초를 통해 풍자하는 현실과,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교육과 윤리, 제도, 법 등에서 자유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는 과정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조르바라는 인물을 통한 만남의 충격과 깨달음의 과정이,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다양한 시점을 통한 인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풍자를 맛볼 수 있었다. 


원작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설서(?)를 읽은 것이기에 원작을 읽을 때 보이지 않던 것,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며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좋았다. 스포일러가 담겼다고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덕분에 도서 구입 목록에 몇 권의 책이 더 추가 되었다. 


그리고 책 속의 길 위의 재미를 맛보았으니, 책 밖의 길 위에 서는 재미도 맛보고 싶다. 이 책 읽는 중에 신혼여행을 제외한 첫 해외여행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정말 가보고 싶었던 일본이었는데 짧은 시간에 패키지 여행으로 친정 엄마와 아들을 데리고 간 여행이라 마음껏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매일 보던 것과 다른 것, 다른 곳을 경험하니 생각이 조금 더 확장되는 느낌이다. 앞으로 다시 직장생활 하느라 해외여행이 쉽지 않겠지만 그리고 굳이 해외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곳을 다니며 보고, 듣고, 말하고, 경험하고, 느끼고 싶다. 


길 위에 서는 재미를 맛보고 싶은 자, 이 책을 읽으라. 

근대적 이분법이 해체되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지혜는 다름 아닌 자연과의 소통이다. -p19

상이한 방향의 힘들이 각축하고 서로 다른 윤리들이 좌충우돌하는 것, 무엇이든 실험할 수 있고 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것, 그것이 곧 유목이다. 유목은 유랑이나 편력이 아니다. 관광이나 레저는 더더욱 아니다. 어디에 있건 그 시공간을 전혀 다르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유목민에겐 돌아갈 고향도, 도달해야 할 종착지도 없다. 오직 자신이 서 있는 그 시공간이 삶의 전부다. 하여 온전히 누리고 즐기되 시절이 바뀌면 훌훌 털고 떠나간다. 비움과 채움, 머묾과 떠남의 이중주! -p25

홀로 갈 수 있는 자만이 함꼐 갈 수 있다는 것, 고독이야말로 친교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p44

연암의 시선에서 보자면, 인생이란 `길 없는 대지 위를 걸어가는 여행이다.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그런 여행! -p51

중요한 건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과 맺는 관계에 있다. -p66

결핍의 재생산이 윤회의 수레바퀴다. 그 수레바퀴를 박차고 나올 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 -p87

법이 감시와 처벌을 통해 작동하고, 도덕이 인정욕망의 발로라면 윤리는 철저히 `자기배려`에 기초한다. 즉, 자신의 내적 명령이 핵심인 것. -p111

사람들은 사랑과 소유를 혼동한다. 하지만 소유는 사랑을 멈추게 한다. 그래서 사랑과 소유는 공존하기 어렵다. 사랑하되 소유하지 않기. 그게 가능해? 그렇다면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사랑과 소유를 혼동한 채 미쳐버리는 것, 아니면 사랑과 소유를 동시에 포기하는 것. - 미치거나 자유롭거나! -p148

`보면 알게 된다`가 아니라 `아는 대로 본다`는 경지에 도달한 것. 가히 전도망상의 진수다. - 비상과 추락은 한 쌍이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잇다고 했다. 뒤집으면 비상을 꿈꾸는 자만이 추락하게 된다. 높이 날아오르거나 아니면 깊이 침몰하거나, 그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는 것이 광기다. 그래서 한 번도 현실에 발을 딛지 못한다. 삶은 비상도 추락도 아니고, 걷는 것이다. 한 걸음씩 앞을 향해 걷는 것, 그것이 삶이요 길이다. -p161

돈키호테가 광인이 되고, 산초가 바보가 된 건 화법 자체가 아니라 그 화법이 놓인 배치에서 비롯한다. 광인과 바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 어떤 관계를 만나느냐에 따라 광인이 되고, 바보가 되는 법이다. -p184

언어는 권력이자 용법이고, 배치의 산물이다. -p189

규칙과 예법, 기도와 회게, 친절과 배려 등등에 짓눌려 헉으로선 "어찌나 서러운지 딱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정도엿다. 이것이 바로 미셸 푸코가 말한 근대 `규율권력`의 실상이다. 욕망과 신체이 곳곳을 세밀하게 터치하고 조작하는 `생체권력`말이다. 가족과 학교, 교회야말로 그런 권력이 작동하는 핵심 거쳐다. -p202

쾌락은 `생산이 멈춘 욕망`이다. 욕망이 창조와 생산의 라인을 벗어나는 순간 삶은 쾌락에 종속당한다. 조르바의 위대함은 욕망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되 결코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p243

여자란 누군가가 자신을 욕망하기를 욕망하는 존재다. -p244

순간에 충실하라! 인류의 모든 멘코들이 전하는 메시지다. 삶에는 어제도 내일도 없다. 오직 `지금, 여기`가 있을 뿐! 이것은 쾌락주의나 향락주의가 아니다. 쾌락과 향락, 고통과 괴로움의 경계가 사라져야 비로소 가능한 경지다. -p250

핵심은 결국 자유다! 자유란 타인을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도, 타인에게 사랑과 보호를 받는 것도 아니다. 그 둘ㅇ르 모두 벗어나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수평적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왜? 그것만이 인간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므로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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