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애거서 크리스티 전작을 읽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소설도 요즘 번역본이 나오고 있어 두 편 (<장미와 주목>, <딸은 딸이다>) 읽었는데, 딱히 내 취향도 아니고 이 책들까지 읽을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장편"에 한정하기로 하고 리스트를 만들어 지워나가고 있다. 


어렸을 때 팬이었기 때문에 그때 워낙 많이 읽었다. 그런데 그때 읽은 책인지 안 읽은 책인지 지금 기억이 안 난다는 게 문제... 지난 주에 읽은 <에지웨어 경의 죽음>은 다 읽고 나서야 <13인의 만찬>이라는 제목으로 어릴 때 읽은 책이라는 게 기억이 났다. 그래도 유명우 번역이 아닌 책으로 다시 읽었다는 데 의의를 둔다. 


아마 이 목록에서도 읽었는데 잊어버린 것도 있고 안 읽어 놓고 지운 것도 있을지 모르겠다. 손에 들어오는 대로 한글로도 읽고 영어로도 읽으면서 하나씩 확인 중이다. 


The Mysterious Affair at Styles

The Secret Adversary

The Murder on the Links

The Man in the Brown Suit

The Secret of Chimneys

The Murder of Roger Ackroyd

The Big Four

The Mystery of the Blue Train

The Seven Dials Mystery

The Murder at the Vicarage

The Sittaford Mystery

Peril at End House

Lord Edgware Dies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Why Didn't They Ask Evans?

Three Act Tragedy

Death in the Clouds

The A.B.C. Murders

Murder in Mesopotamia

Cards on the Table

Dumb Witness

Death on the Nile

Appointment with Death

Hercule Poirot's Christmas

Murder is Easy

And Then There Were None/Ten Little Indians

Sad Cypress

One, Two, Buckle My Shoe

Evil Under the Sun

N or M?

The Body in the Library

Five Little Pigs

The Moving Finger

Towards Zero

Death Comes as the End

The Hollow

Taken at the Flood

Crooked House

A Murder is Announced

They Came to Baghdad

Mrs McGinty's Dead

They Do It with Mirrors

After the Funeral

A Pocket Full of Rye

Destination Unknown

Hickory Dickory Dock

Dead Man's Folly

4.50 from Paddington

Ordeal by Innocence

Cat Among the Pigeons

The Pale Horse

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

The Clocks

A Caribbean Mystery

At Bertram's Hotel

Third Girl

Endless Night

By the Pricking of My Thumbs

Hallowe'en Party

Passenger to Frankfurt

Nemesis

Elephants Can Remember

Postern of Fate

Curtain

Sleeping Murder








<잠자는 살인>은 틀림없이 읽었다고 생각한 책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여자주인공(그웬다)가 꽃무늬 벽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 장면만은 생생하게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읽은 적이 없고, 그 장면은 텔레비전에서 본 거라는 게 기억이 났다.. 내가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조운 힉슨이 나오는 미스 마플 시리즈를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때 본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꽃무늬 패턴에 대한 사랑은 그때 그 장면이 각인되어 시작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아무튼 그래도 범인이 누구인지는 생각이 안 나니까 다시 읽었다. 그런데 요즘에 크리스티 책을 읽으면 처음 보는 책이어도 범인이 누구인지 너무 빤히 보인다. 어릴 때는 이런 능력이 없었는데... 그래서 좀 시시하게 느껴져서 슬프다. 아니 어쩌면 사실은 어릴 때 읽었던 책이라 범인이 누구인지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슬프다.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왜 이렇게 장황하게 하냐 하면, (일부 스포일러지만) <잠자는 살인>에서 호주에 살던 그웬다가 영국에 처음 와서 살 집을 고르는데, 어떤 집이 마음에 쏙 들어서 당장 그 집을 산다. 그러고 그 집을 돌아보면서 여기에는 이런 장식이 있었으면 좋겠고.. 여기는 이렇게 바꿨으면 좋겠고.. 여기는 꽃무늬 벽지가 있었으면 좋겠고.. 인테리어에 대한 이런 저런 소망을 펼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실 그 집은 그웬다가 어릴 적에 잠깐 살았던 집이었고 (그 시간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웬다가 떠올린 것은 소망이 아니라 사실은 기억이었다는 거다. 


바로 그거다. 우리가 소망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기억일 때가 많다. 자식에 대해서도, '좀 밖에 나가서 놀지 그러니' '만화 같은 거 그리면서 놀면 재밌을 텐데' 이런 소망을 품지만 사실은 다 내가 어릴 때 놀았던 기억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소망이다. '세상이 너무 물질주의적이야. 불평등이 너무 심해. 달라져야 하는데.' 이런 생각들도 마찬가지다. 진취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복고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존재인 걸까.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품는 소망도 새로운 것을 상상하지 못하고 과거에 비추어 떠올릴 수밖에 없다면, (나이 든) 사람은 결국 보수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나. 


아니 그러니까 우리 모두 보수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ㅜㅜ 물론 사상에 방향성이라는 건 분명히 있고 경험이나 시간의 순서와 상관 없이 어느 쪽이 진보고 보수냐는 상당히 명백하다. 다만 개인의 차원에서 꿈꿀 수 있는 건 경험과 기억이 극복과 부정의 대상이 아닌 한은, 아주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닌 한은, 경험과 기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좀 슬퍼졌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난 우리 아이들은 어떤 기억의 프레임을 기준으로 소망을 품을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입때 2015-03-25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맙소사 저 많은 걸 다 읽었다니...
근데 진짜로 나도 책으로 읽은 건지 영화로 본 건지 좀체 생각 안나는 작품들이 있더라. 심지어는 잠깐 얘기 들은 걸로도 읽은 걸로 착각했나 싶어. 새삼 어찌 그리 낯선지... 몇년 전엔 목록도 적고 독서노트도 마련했는데 그 책들도 완전 깜깜하니 이 썩어가는 뇌를 어쩌면 좋냐

고비 2015-03-27 15:3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나는 이제 그냥 그러려니 해. 읽었거나 봤어도 생각이 안 나니 새로 즐길 수 있고 좋은 건지도 ㅜㅜ

회화나무 2015-03-2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맙소사... 정말 제가 내뱉고 싶은 탄식이었습니다. 맙소사...
크리스티... 나도 몇권 읽어볼랍니다. 벽지 나온 이야기요. 근데 원서로 읽는건가요?
내 평생에 한 권을 다 읽을랑가 모르겄소. ㅠㅠ
잠자는 살인 17000원이 넘는 책이요. ㅠㅠ

고비 2015-03-27 15:3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대부분 중학교 때 읽었어요.. 그때 팬이었나 봐요. 버스 타고 광화문 교보문고 가서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빨간색 책 한 권씩 사 모으는 게 낙이었는데 제가 어느 시점엔가 과거를 부인하고 그 책들을 다 버렸나 봐요. 한 권도 안 남아 있네요. 크리스티 소설은 얇아서 그렇게 비싸지 않을 텐데요?

NorthShore 2015-03-28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는 포와로 TV 시리즈를 넷플릭스로 보기 시작했는데 영 진도가... 너무 진부하고 느리게 진행된다는 느낌에... 물론 더 큰 이유는 영어가 잘 안 들려서 자막 읽기 바쁘다 보니...ㅠㅠ

고비 2015-03-31 20:1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맞아요. 요즘 미스터리 읽다가 크리스티 읽으면 고스톱하다가 패띠기하는 기분이랄까.. 속도도 느릿느릿하고 마음 편안하고 범인도 눈에 잘 보인다는 ㅋㅋ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미세레레>를 읽기 시작했다. 저자보다도 역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 고른 책이다. 

책 제목이 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성가 <미세레레>를 검색해 보다가 위키피디아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읽었다. 


미세레레(Miserere mei, Deus, 주여 나를 가여이 여기소서)는 1630년대에 시스티나 성당에서 아침기도 때 쓰기 위해 작곡된 곡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티칸에서는 이 곡의 악보를 옮겨 적거나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고 위반했을 때에는 파문이라는 극딜로 대응했다. 그래서 신비에 싸인 곡으로 명성이 드높았는데, 1770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열네 살 소년이 아버지랑 로마에 놀러갔다가 두번 듣고는 홀라당 외워서 악보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지금 유튜브에서 듣는데 참 아름답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는 <로지코믹스>의 저자로 먼저 알았던 사람이다. <로지코믹스>는 버트란드 러셀의 삶을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러셀이라면 1+1=2를 푸는 데 책 한 권을 들여서 친근한 이미지를 확보한 수학자가 아닌가! 이 책 <골드바흐의 추측>은 "골드바흐의 추측"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평생을 바친 한 수학자의 삶을 담은 소설이다. 골드바흐의 추측이란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표현가능하다."라는 것이다(4=2+2, 6=3+3, 8=3+5, 10=3+7, 12=7+5...). 이것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되어 있어! 완전 친근해! (책을 넘기다 보니 출판사에서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사람에게 현상금 백만 달러을 걸었다는 말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돈을 좋아하는 1호에게 문제를 던져 주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쉬워 보이는 문제가 안 풀릴 때 그 미칠 것 같은 심정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중편소설 하나를 충분히 끌고 가기에 충분.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입때 2015-03-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왜 블로그는 계속 방치하느냐고 그러잖아 물어보려고(몇달 동안 생각만) 했었다 ^^;
나도 이사하고 싶었으나 귀차니즘에 발목이 묶여 그냥... (현실에서도 온라인에서도 이사는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닷)
니 글의 팬으로서 몹시 기쁘다!

bluegoby 2015-03-18 17:18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 언니 완전 빨라.

입때 2015-03-18 17:2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휴대폰에 티스토리앱을 깔았더니 댓글이 달리면 딩동~ 알림이 오거든 ^^;
예전에 읽은 글인데도 또 보니 다 새로워서 아직도 못 나가고 신나게 허우적거리고 있다 ㅎㅎㅎ

고비 2015-03-19 09:3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니 티스토리에 그런 좋은 기능이 있는 줄은. 괜히 옮겼나.. 여기 블로그는 뭐가 되는 건지 모르겠음.

회화나무 2015-03-1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뭔지 몰라도 훠얼씬 더 도회지스럽습니다. 시골 면단위에 살다가 도시로 나들이간듯해요. 자주 올께요.

bluegoby 2015-03-19 14:5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의도와는 상관없이 쫌 세련되어졌나봐요.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ㅜㅜ

D 2015-03-1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저 대문사진은 홍콩에서 찍은 거다!!

bluegoby 2015-03-19 14:55   좋아요 0 | URL
응응응 이케아 앞에서. 빨리 찍고 언니랑 주연이 따라가느라고 흔들렸당 ㅋ

사과벌레 2015-03-22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앙. 이사를 하니 뭔가 아쉬워요. 교실 뒤에서 히히덕거리다가 수업종이 친 것 같은 느낌이에요. ㅎㅎ 1, 2호 얘기는 이제 어디서 듣나요.ㅠ

고비 2015-03-23 09:5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1, 2호는 이미 커서 내 품을 떠나 버렸음.. 이제 대신 마루를 키우면서 즐거움을 느끼면 되겠다!!!!!
 
















(스포일러 많음)


물론 이 계열 탐정의 원형은 셜록 홈즈다. 치밀한 관찰력, 사회성 부족, 순수한 논리력 등의 특징을 보이는 셜록 홈즈가 현대에 살았다면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았으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아이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작품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크 해던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이다. 이 책의 제목 자체가 셜록 홈즈 단편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한밤중>에서 주인공 크리스토퍼(15세)는 이웃집 개가 죽은 사건 수사에 착수하는데, 치밀한 관찰력과 논리력을 가졌을지는 모르지만 형편없는 탐정이다. 일단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과 주변사회에 대한 공포심이다. 또 단서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맥락에서 읽어낼 수 없기 때문에 실제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크리스토퍼는 개 사건도 해결하고, 혼자 힘으로 런던에 가는 모험을 감행하고, 가족 내의 문제도 어느덧 해결한다. 크리스토퍼 덕분에 (크리스토퍼가 의도한 바라기보다는 나비 효과에 가깝지만) 주변 세계에 평정이 찾아오긴 하지만 크리스토퍼에게는 그런 것보다도 수학 시험이 더 중요하다. '현실세계'에서는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대응을 이루지 않고(컨텍스트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크리스토퍼의 머리로는 인간들의 비논리적이고 자의적이고 복잡미묘한 행태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기호와 논리의 세계로 돌아와 크리스토퍼는 안정감을 되찾는다. 크리스토퍼에게 중대한 성장과 발견의 계기가 된 모험이기는 하였으나 크리스토퍼 입장에서는 정상에서 벗어난 일탈에 가까웠다. 


프란시스 X. 스토크의 <현실세계의 마르셀로>(2009)에서 마르셀로(17세)는 좀 더 적극적인 탐정이다. 처음으로 특수학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기 아버지 로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안면에 큰 상처를 입은 아이의 사진을 보게 되고 그것에 관한 비밀을 밝히는 데 착수한다. 마르셀로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타고난 의식이 있기 때문에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행동에 나선다. 문제 해결과정에서 마르셀로의 추리력도 도움이 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세상 밖으로 뚫고 나와 부당함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였다. 아스퍼거 증후군과 연관되는 '질서감'이 '정의감'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애쉴리 에드워드 밀러, 잭 스텐츠의 <콜린 피셔>(2012)의 콜린 피셔(14세)는 가장 성공적인 탐정이고 시리즈 탐정물의 주인공이 될 예정이다. 

콜린도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에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읽지 못하고 사회적 관계나 관습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비꼬는 말이나 비유적인 표현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런데 콜린에게는 강한 탐구심이 있다.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콜린에게 의문과 탐구의 대상이 된다. 콜린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녹색노트를 늘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행동과 옷차림 등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에는 "조사할 것."이라는 문구를 남겨 놓는다. 마치 화성에 온 인류학자처럼, 아이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조사 탐구 대상으로 삼고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무심코 지나칠 만한 행동까지도 빼놓지 않고 모두 노트에 적어 놓고, 그래서 학교에서 총기가 격발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조각들을 짜맞추어 퍼즐을 해결할 수 있었다. 콜린의 동기는 순수한 지식욕에 가깝다. 콜린을 평소에 괴롭히던 웨인이라는 아이가 총기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았을 때 콜린은 바로 수사에 착수하는데, (웨인을 도와주면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히지 않을 거라는) 자기보존욕구 때문도, 도덕적 정의감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웨인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진상을 밝혀 사실을 바로잡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현실적으로 아스퍼거 증후군 탐정이 성공할 수 있을까? 

세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는 TMI(too much information) 경보가 아닐까 싶다. ASD(Autism Spectrum Disorder)에 속하는 사람들의 공통적 증상 가운데 하나가 감각 과민 증상이다. 너무 많은 정보량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감각에 과부하가 걸릴 때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한다. 탐정이라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 처리해야 할 텐데?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문제는? 텍스트를 컨텍스트 안에 놓고 파악하지 못하는 문제는? 그런데 콜린에게는 제한적인 정보만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듯하다.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읽지 못하는 것도 자폐증의 증상 가운데 하나인데, 콜린은 그래서 사람들의 무수히 많은 얼굴 표정을 그려 놓고 그게 무슨 감정을 나타내는지(슬픔, 기분 좋음, 화남, 잔인함, 당황함...)를 매치시켜 놓은 종이쪽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흘긋흘긋 컨닝을 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대체 이게 가능이나 한 일이야?) 그런데 콜린은 러시아 영화감독 쿨레쇼프의 몽타주 효과를 들어, 자기 방식이 다른 사람(neurotypical)보다 우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에 필름이 부족하자 쿨레쇼프는 필름 조각을 가지고 이리저리 짜맞추어 감정적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실험해 보여주었다. 닭고기 장면 뒤에 무표정한 얼굴의 클로즈업을 보여주면 관객들은 "배고파 보이네."라고 생각한다. 관을 보여주고 똑같은 얼굴을 보여주면 '슬퍼 보인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다음에 보여주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결국 보통 사람들은 컨텍스트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텍스트를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다. 숲만 보고 나무는 보지 못한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총기가 발견되자 당연히 문제아인 웨인에게 의심의 눈길이 쏠리지만, 그런 컨텍스트/편견과 무관하게 사물을 직시할 수 있는 콜린만은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벨로 2015-03-3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재미있게 읽었는데, 아스퍼거 증후군인 사람들이 논리적이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니까 유능한 탐정이 될 수도 있겠네요. <이미테이션 게임> 보면서 앨런 튜링도 아스퍼거 증후군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고비 2015-03-31 20:1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튜링도 유명인 가운데 아스퍼거증후군인 사람으로 잘 꼽히더라고. 아인슈타인이나.. 글렌 굴드도 그렇다고 하고. 아무튼 천재는 대부분..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1994)을 -대략- 읽었다. 잘 모르는 분야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길래 생각나는 것만 적어 놓는다. 

스티븐 핑커는 물론 "화성인이 보기에는 지구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똑같게 보일 것"이라는 촘스키의 보편 문법론을 지지한다. 

이 책은 사피어-워프의 언어결정론/언어상대주의를 논박하면서 시작한다. 사피어와 워프는 1930년대에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제한한다, 언어에 따라 사고의 패턴이 달라진다고 하는 가설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으나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탓에 지금은 설득력을 거의 잃은 상태다. 

(그러고 보니 탈식민주의 담론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응구기-아체베 논쟁도 언어결정론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아체베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영어 같은 언어로 문학작품을 써서 식민지인들의 경험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했지만 응구기는 그것 자체가 식민화된 사고라면서 아프리카인의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아프리카어로 글을 써야 한다고 했다. 상층 계급만 사용할 수 있는 지배자의 언어를 사용하면 토착어를 쓰는 하층민들이 이중으로 소외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어가 생각을 담는 틀이라는 이론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 같다. 그런데 <언어본능>을 보면 언어상대주의를 뒷받침한답시고 나온 연구들이 (에스키모 언어에는 눈雪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백 종 있다든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실은 exoticism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하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언어결정론은 직관적 설득력은 있는 듯하나 입증하기가 불가능한 이론인가 보다.



그런데 작년에 읽은 기 도이처의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Through the Language Glass, 2010)은 내 기억에, 두 가지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던 것 같다. 언어결정론/언어상대주의를 논박하는 한편 언어가 본능이라는 관점에서도 거리를 두어, 언어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적 진화의 산물이라고 했다. 

이 책 앞부분에서는 호머가 바다를 "와인색"이라고 한 것(한국어 제목이 여기에서 나왔다)을 비롯해 색깔을 가리키는 어휘의 가짓수가 시공간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점을 치밀하게 파헤친다. 호머의 표현 때문에 

1. 호머가 색맹이다.

2. 옛날 사람들은 지금만큼 시신경이 발달하지 않아서 몇 가지 색상밖에 구분하지 못했다. 

이런 설명들이 나왔지만, 기 도이처는 문화에 따라 색상을 나타내는 어휘의 개수는 다를 수 있으나 해당하는 어휘가 없다고 해서 그 색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진화에 따라 어휘가 다양해지는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왜 이야기를 하냐 하면, 고등학교 때인가 김소월의 "금잔디"를 배우면서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라는 구절을 들어 김소월이 적녹색맹이라고 주장한 학자가 있다고 들은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문학 연구를 하나 싶다. 


언어와 문화가 서로 주고니 받거니 함께 진화한다고 하는 게, 쉽고 빤한 설명이면서도 진리가 아닐까 싶다. 




사실 번역일을 하다보면 두 가지 언어 사이의 치환 작업을 계속 하면서 재미있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디에다 적어 놨다가 생각해 봐야지 하다가 진도가 급해 늘 잊어 버린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생각으로 옮겨 가니까 언어가 보편적이라는 말에 수긍이 간다. 그런데 어휘나 구문, 표현의 차이가 옮기는 과정에서 중화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을 때가 많다. 

오늘은 내가 번역해 놓은 문장에서 "깨진 요람"이라는 문구를 보고 놀랐다. 원문은 "broken cradle"이지만 요람이 깨지다니 어색하지 않나? 부서지거나 망가졌다고 해야 할 텐데 break의 1차적 의미가 "깨지다"로 떠오르기 때문에 이렇게 해놓은 거다.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았으면 그냥 무심코 넘어갔을 거라 자신감이 또 조금 떨어졌다. 원고를 아무리 봐도 번역투를 말끔히 제거할 수가 없다. 

한편 이런 딜레마도 있다. 번역투를 피하려고 영어스러운 표현을 거르다 보면 문장이 단순하고 표현이 유치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런다고 해서 거기에 내 문장, 내 표현을 넣어 좀 멋을 내려 하면 그 부분이 너무 튀는 것 같다. 의미를 투명하게 전달하는 데 목표를 둘 것이냐, 아니면 글맛도 살려야 하느냐, 아무래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