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법정스님이 개고기 반대 소신을 펼치셨었다는 글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가에서 굳이 '개고기'를 특정하여 언급하신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것이라는 점과 '개고기 반대'파들의 주장 전개에 법정스님의 그 말씀이 비중있게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 나의 호기심을 발동한 것이다.

법정스님의 원문을 보고 나서는 어지간히 의문은 풀렸으나 감히 이의를 달고 싶은 부분이 있어 이 글을 쓴다. (공정하기 위해서는 법정스님이 그 글을 쓰시게 만든 문제의 원문(한겨레21에 실렸던 주강현의 '개고기 옹호'글)부터 확실히 이해하고 시작해야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링크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생략했다.)

먼저 이야기 하자면, 다른 고기도 많은데 왜 하필 '개고기'에 대해 언급하셨는지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렸다. 주강현씨의 '개고기 옹호' 글에 대한 반론차원이었기 때문이 첫번째 이유이고 불교의 교리에 따라 모든 동물에 대해 논의로 대상 범위를 확장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말씀하실 이유도, 설득력도, 현실성도 없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이며, 법정스님 본인이'개'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감이 여타 가축들과는 다르다고 인식하셨기 때문이 세번째 이유이다.

글을 쓴 계기도 그렇고 원문의 내용도 그렇고 법정스님은 자신의 신분을 의식하고 글을 쓰셨다기 보다는 철저하게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대중을 설득하고자 하는 글을 쓰시고자 했던것 같다. 굳이 불교사상에 대한 인식을 떠올릴 필요없이 '인간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점이 이 글의 장점이면서 단점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싶다. 특정종교에 갖힌 사고방식이라는 비난을 피할수 있었던 반면 그냥 일반인의 주장과 상당부분 동어반복이 되어버렸다는게 내 생각이다. 개는 인간과의 특별한 유대감을 갖는 동물로써 개를 먹는다는 것은 식인풍습과 비유될만큼 비문명적이라는 주장말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조금 심심하다는 인상이 들었다. (물론 글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에 대해서이다.)  

이와 다르게 '문화다원주의에 입각한 개고기옹호론'을 비판하신 부분은 좀 충격이 있었다. 그것도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뭐가 다르냐고 질타를 받았으니 충격이 더 컸다.   과연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것은 일종의 사기이자 거짓말이지 문화다원주의를 적용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아직 우리나라에 적용하기는 이르다'라는 말을 거짓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나 그냥 독재 할래.'라고 읽어야 한다. 그걸 문화다원주의가 무능과 나태를 가린 한 예라고  하신 말씀을 읽으니 서운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역설적으로 법정스님은 박정희가 어쨌거나 민주주의를 실천했다고 주장하신걸로 읽힐수도 있는 주장이다. 더불어 결국 최고의 진리 하나 만이 사람들에게 선택되어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스님을 잘몰라서 이런 생각이드는지 모르겠으나)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문화상대(다원)주의를 애초에 인정하시지 않았던게 아닌가 싶고, 만약 그렇다면 더이상의 언급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생명존중사상에 입각한 논리전개 속에서 새로이 배운 바도 적지 않다. 동물애호정신이 불교의 정신적 영향력이 컷던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에 비춰볼때 서구만의 사상, 사대주의로 발로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흘러내려오는 정서라고 봐야한다고 지적한 점이나 중국의 식인풍습이 상당히 보편적이었다는 사실등등 말이다.

사실 법정스님의 논지중 중요한 부분은 바로 생명존중 사상, 그리고 인간과 견공이 꾸준히 맺어온 상호 보완 및 타 동물들과 구분되는 유대관계에 대한 것이다.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동물이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할 수록 마치 인류문명이 식인문화를 야만으로 취급하고 점차 퇴출시켜왔던 것처럼 개고기식문화도 퇴출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개고기를 먹어봤던 사람으로서, 딱히 개고기만 먹지말자고 하기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법정스님의 '문명의 (자연스러운) 개고기 퇴출론'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편이다. 사실 개만이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각별히 유대감을 갖는 존재를 인간처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이기에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리고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사회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회로 이동중이라고 생각한다. 

 나만해도 개고기를 태어나서 딱 3번 먹어보았는데 한번은 대학생때 아르바이트로 속칭 공사판 노가다 하면서 어울렸던 아저씨들과 한 번, 군대가기 전날 아버지와 단 둘이 한 번 그리고 군대 고참들 따라가서 한 번, 이렇게 3번인데 상황을 짐작해보면 알겠지만 굳이 거부하기 쉽지 않은 그런 자리에서 개고기를 경험한 것이 전부다.(가장 최근일도 10년이 훨씬 지났다) 내 또래중에 먼저 개고기를 먹자고 제안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즉 세대가 뒤로 갈수록 (우리 사회가 점점 먹고 살만해질수록) 법정스님의 예언(?)에 들어맞고 있는 중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문화는 여건상 진즉에 그렇게 되어야 했겠으나 문화지체현상으로 인해 개고기문화도 남아있는 것은 아닐런지.

개고기 찬반논란도 이러한 문화지체현상속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일시적(한 100년쯤?^^) 마찰음이 아닌가 싶다. 다만 개를 식육으로 사용하는 계층과 반려(애완)동물로 활용하는 계층과는 (개고기문제와 상관관계가 1은 아니지만) 사회적인 갈등요소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팻샵에서 벌어지는 돈잔치를 보노라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도 마음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감정이 생기는 건 어쩔수 없다.) 난 아직 개고기반대를 외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돈벌이가 된다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도 불구덩이에 밀어 넣어버리는 이런 야만사회에서 문명이 가져올 순수한 '동물애호정신'을 외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동물애호가(그들 또한 적지 않은 수가 동물을 길거리에 내다버리곤 한다. 먹지는 않았으니 잘한건가?)들의 등을 두드려주고 시장통에서 싸구려 보양탕으로 내일의 힘든 노동을 견뎌보려는 서민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은 아닌지...


원문이 짧지 않은 데다가 내 글이 점점 길어지다보니 초점도 흐려지고 일관성도 유지하기가 힘들것 같아 더 늘어놓기는 어렵겠다. 법정스님 글에 대한 촌평은 이쯤하고, 기회가 되었으니 개고기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조금 더 적어본다.  

나는 자질구레한 문제(도륙과정 ,유통,위생 등등)을 제외하면 개고기를 후진문명으로 재단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식인풍습조차도 문화에 따라 (죽은이의 사체를 먹음으로써 그의 영혼을 승계한다던가 하는 제의적인 모습등) 인정할 수 있을터인데 자신이 갖고 있는 개와의 유대감이라는 정성적인 기준을 복잡 다양한 문화에 일률적으로 적용할수 있다는 생각자체가 반문명적인 태도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구세대와 신세대의 이질적인 문화가 혼재하는 모습이 더 도드라지기에 더 조심스러워야한다고 본다.  어쨌거나 점점 한국의 개에 관한 문화는 똥개에서 애완견으로, 다시 반려동물로 인간관계에 가깝게 점진하고 있는만큼 자연스럽게 개고기 식문화는 사라질것이라고 예상한다.

사실 개고기 옹호론자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계속 개고기가 먹고 싶다"가 아니다. 개고기가 좋아서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을것이라고 생각한다.(적어도 나는 다시 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단지 "당신의 문화적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특히 문화재 약탈자 프랑스 너희들 말이다.)  

 

ps.1 가끔 했던 상상인데 조선시대 선비를 모셔다가 지금의 서양의 생활상을 보여주면 "천하에 잡것들! 짐승같이 사는구나. 인간이 아니로고!"하며 불호령을 내리실것 같다. 일단 짧은 머리의 나부터 된통 혼나겠지만..)

ps2. 개를 잔인하게 도살하거나 식육과정에서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행위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며 법정스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리고 그게 '개'였는지와 상관없이 사라져야 할 요소들이다. 설마 주강현씨가 그런것도 옹호했을라고.... 법정스님의 글중 상당부분은 개고기를 반대하든 옹호하든 무관하게 공유하고 지켜야할 내용이 상당부분이다. 그게 '개'든 '소'든 '닭'이든 '양'이든 말이다. 

ps3.법정스님이 예로 드신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장면들.. 그건 우리가 먹는 달걀과 치킨, 소고기 생산과정에도 있다. 오히려 공장식 생산으로 전문가들에 의해 엄청난 양으로 자행되고 있기에 더 잘 가려져 있을뿐.  차라리 똥개들이 잠시나마 살아있는 동안 호강하는 편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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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세상 2010-03-1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새벽 6시 20분 저희집 강아지 녀석이 집나간지 16일만에 컴백했습니다. 거의 패닉상태로 찾아다니기를 수십일. 고관절이 아프고, 목이 쉴만큼 다녀도 흔적조차 보이질 않길래 교통사고가 났나, 개장수에게 잡혀갔나 아님 굶어 죽었나 (네.. 한번도 대문밖을 혼자 나가본 적 없었으니깐요..)별별 생각이 다 하면서 1132일(뭔 남친도 아닌데 같이 지낸 날짜 막 계산도 해보고..) 동안 못해준 일만 생각나더군요. 밥먹을 때마다 잠들기 전마다 녀석이 생각나 미칠 것 같았는데 아무렇치도 않게 멀쩡하게 돌아왔습니다. 옆집 아줌마가 대문 앞에 강아지왔다고 전화 안해줬음 몰랐을 그 시간. 새벽부터 엄마랑 부여잡고, 감동의 대하드라마를 찍었답니다. 삼십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것 같은 시원함.
개고기 먹는 것 반대하지는 않지만 제가 먹을 생각 없습니다. 비단 우리집 녀석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원문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냥 우리집 똥강아지가 돌아와서 기쁜 날이라 몇자 적어봅니다. ^^

귀를기울이면 2010-03-16 18:27   좋아요 0 | URL
말씀을 읽다보니 약간은 생뚱맞은 어릴적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께서 살림에 보태실양으로 강아지 두마리를 데려다 키우셨드랬죠. 저만 보면 좋아서 날고 뛰고 반가워 하던 녀석들... 어느날 학교다녀와보니 사라져 있더라는.. 어려서 그랬는지 소심해서 그랬는지 그냥 먼산만 바라보다 말았던 그때 그 심정이 김서린 거울 뒤편 내모습처럼 떠오르는듯 합니다. 16일만이면 정말 드라마가 따로 없군요
 

어렸을적 외국에서 활약하던 어떤 선수가(아마도 차범근?) 골을 넣고 골 세리머니로 무릎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명을 받았던 적이 있다. '아! 저 훌륭한 선수도 나와 같은 교인이구나. 저런 순간에도 신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두 가지, 즉 동일한 종교를 갖고 있다는 동질감과 흥분되는 순간에서도 해야할 일을 잊지 않는 저 성실함에 존경심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지금 더 자주보게되는 세리머니는 수상소감 세리머니(?)다. 무슨무슨 영화제나 OO선발대회나 XX대상 같은 TV로 중계되는 시상식을 보면 "우선 하나(느)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공인(公人X 共人O)이어서 더 쉬울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어려울 수도 있는데 아무튼 대중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더군다나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불리며 비판이 드높은 시대에) 구태여 드러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은 세리머니가 그저 아름답게만 비춰지지 않고 비판에 맞닥뜨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러한 세리머니가 벌어지는 시공간이 대부분 제로섬게임의 성격을 가진 행사라는데 그 본질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상을 먹으면 상대는 반드시 물을 먹고 내가 골을 넣으면 반드시 상대는 골을 먹게되어 있다. 이건 신도 바꾸지 못하는 불변의 법칙이다. 즉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내가 신의 축복으로 골을 넣거나 상을 받은 것이라면 상대방은 신의 저주 또는 좋게봐줘도 신의 무관심에 빠지게 된 셈인 것이다. 그나마 상대방이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무신론자라면 궤변이 될지언정 변명이라도 가능한데 만약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조차 불가하다.  신은 불공평하거나 편협하거나 또는 축구나 영화에는 무관심하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감사의 세리머니가 뻘짓이 되버리는 패러독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다른 종교를 믿거나 무신론자라면 문제가 없을까? 이건 '엄마아빠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공식적으로 엄마아빠는 승부에 영향을 줄수 없으니까. 굳이 신에 대한 감사를 언급하는 것은 인간이 혼자서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신이 도와 주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은데 신이 운을 가장하여 승부조작이나 하는 파렴치한 존재냐는 말장난은 둘째치고라도 공공장소에서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종교가 있든 없든 같은 종교이든 다른 종교이든 무관하게 패배자로써의 쓴 맛을 보고 있는 시점에 신에 대한 감사라니 오해(?)하기 딱 좋지 않은가. 자신의 종교에 대한 대중의 오해까지 키우면서 말이다.  사실 화려하고 큰 돈이 좌우되는 일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관심있어 하실만큼 중요한 일은 아닌것 같은데 좀 오버 아닌가?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 비슷한 이유로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 같은 것은 아주아주 못마땅하다. 이건 합격후의 감사기도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의도가 불순하다. 이건 기쁨에 저절로 우러나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불합격은 나의 합격, 나의 불합격은 남의 합격인게 빤히 보이는데도 자기 자식은 무조건 합격시켜 달라는 떼쓰기는 정말... 절대자로 믿던 신을 그냥 흔한 굿판의 귀신 하나로 전락(?)시키는 쓴웃음나는 자학개그다.)
 
물론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또다른 이유도 있기는 하다. 축구의 득점이나 1등 수상은 큰 기쁨이고 인간이라면 누군가와 기쁨을 나누고 자랑하고 감사하고 싶은 생각,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때문에 수상한게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이런 기쁜 감동을 느끼게 해 준 것에 대해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감사할수도 있는 것이다. 다 나 잘나서 이렇게 된거라고 목 뻗뻗이 세우는 인간을 오히려 우리는 모자란 인간, 아직 덜 자란 인간으로 보지 않는가! 하지만 그건 일종의 습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순수한 기쁨에 대한 표현이라면 인간의 다른 욕구가 충족될때에도 그러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들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식욕과 성욕과 배설의 욕구가 충족될때마다 감사 기도를 하시는지...  유독 밥이 앞에 있을 때랑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될때만 그러는 것 같다. 뭐, 상먹는 일은 드물게 발생하는 일이라서 기쁨이 더 크기는 하겠지만...) 
   


한때 열심히 살았을때 음악이나 영화나 책을 읽으며, 연애를 하며 기쁨을 느끼는 것이 혹 의의로운 삶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기도가 중요하고 신앙에 절대가치가 있다면 음악 들을 시간에 기도하고 봉사활동이라도 해야 옳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한동안 그런 고민을 하다가 나대로 살기위해 나를 위한 변명같은 결론을 찾았는데 그 결론은 이렇다.
음악이란 소리의 높낮이 변화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고 그러한 인간의 감성은 인간이 만든게 아니라 신이 허락해준 선물이다. 연애감정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음악을 듣던 연애를 하던 그것대로 열심히 하고 순수하게 기쁨에 빠지는 것 그 차체로 하나님의 선물을 만끽하는 것이며 그로인한 기회비용에 대해 의무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음악들으면서 음악에 빠지면 되지 '아 이걸 제공한 존재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하며 몰입하지 못하는 건 신의 선물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거라고 말이다. 
   


내 결론은 이거다.
즐겨라. 이기면 그냥 기뻐하고 지면 그냥 짜증내고.  100년도 제대로 못사는 인간들이 잠깐 재밌자고 만든 장난인데 뭣하러 지들 놀이판에 신까지 끌어들이나.  그냥 즐겨라. 기도할 제목은 당신의 건강이지 골득점이 아니며 예술이 주는 감동이지 수상소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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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3-1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며 많이 배우고 느꼈습니다. 결론, 저도 공감합니다.^^
 

사실 제목은 이렇게 쓰고 싶었다. 

"아이씨, 띠지..  쫌!!!" 

 

사실 띠지가 무슨 죄가 있겠나 싶다. 예전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존재고 오히려 띠지 두른 책은 무언가 좀더 고귀한(?)듯한 인상을 풍기며, 게다다 짧고도 인상깊은 문구로 치장하며 나를 유혹했던(그리고 대부분 만족했던) 님들 아니신가.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추장스러워지더니 이젠 짜증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 이유인즉은 첫째, 온오프라인으로 이리저리 재보고 주문하여 손에 들어온 책이므로 정보제공의 기능이나 홍보의 기능은 제로다.  둘째, 출퇴근시간 짬짬히 글을 읽는 나에게 띠지는 책갈피 역할을 하는 책날개에 기생하며 취미(?)를 방해하는 존재다. 셋째, 이렇게 페이퍼를 쓰면서 3(셋째)이라는 숫자를 어거지로 채우게 만들며 시간낭비를 하게 만든 주범이다..... 

 나는 책에 흔적 남기는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띠지조차도 건드리지 않았었는데 언젠가 아내가 남편이 책을 받아보기전(퇴근전)에 집에 배송된 책의 띠지를 싸그리 저세상으로 처리하신 다음부터는 나도 띠지는 일단 띠(떼)고 보는 습관을 들였다. 그런데 요즘 책만 그런건지 내가 그런 책만 사보는건지 두 권중 한 권은 띠지가 있더라... 

띠지가 있음 그렇게 장사가 잘돼서 그런건지, 뭔지 솔직히 좀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내 취향으로는 '영... 아니올시다'다.  정말 아름다운 글귀라면 책표지에 박아 넣으면 될것이고 책표지에 넣지 못하는, 그러니까 일회성 멘트라면 띠지형식일지라도 필요없지 않나 싶다. (어떤 장르의 책이냐도 물론 영향이 있을거라고 본다. 단발성으로 팔려야 하는 그런 책들.. 그걸 감안했는데도 많다...) 

 

덧글 : 글쓰고 나서 띠지 두르고 책장에 대기중인 책들을 쭈욱 봤는데... 띠지라도 없으면 사람 눈길 끌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자신을 팔아야 하는 존재는 직장인이든 책이든 다 비슷한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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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이 화제다.  사실 밍밍한 제목에다가 삼성의 보이지 않는 관리 때문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줄 알았다.  '몇 주 지나면 존재한 줄도 모르게 잊혀지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하긴 나도 아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리라고 생각했던게 안이한 생각이었다.
아직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아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처음 나의 예상보다는 괜찮은 성적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슬슬 책에 대한 반응이 블로그에 올라오기 시작하는데 나로써는 꽤 당혹스러운 평이 올라왔다.
 

그 글의 요지는 이렇다.(실제 글이 길어 나만의 언어로 옮기니 사용한 단어나 뉘앙스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체 요지는 원래의 글쓴이관점에서 크게 왜곡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성의 조직원으로 한 배를 탔던 사람이 배신하고 뛰쳐나왔다. 한국(기업)은 다들 마찬가지의 추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데
 유독 삼성 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 우려된다. 여기에 동참하는 것은 속물이 겉으로는 당당한척 하려는 심리로 그러는 것은 아닐까?
 예수의 창녀에 대한 비유가 생각난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변호사의 고객 비밀유지 준수관점에서 미국도 이렇게 배신하지는 않는다."

 
사실 변호사의 고객비밀 보호 문제는 내가 법률에 문외한이므로 꾸벅이다.
고객비밀보호가 (범죄를 은폐해도 되는)상위의 법률이라면 그야말로 법대로 하면 된다.
김용철 변호사도 결국 법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적하는 책을 쓴 것이므로 앞으로는 달라보여도 뒤로는 같은 편 아닌가..

 

사실 내가 좀 당황스럽게 받아들인 것은 창녀의 비유 때문이다. 완전히 오적용된 비유라고 생각한다.
로마 치하의 유대나 지금 우리나라나 창녀가 불법적인 존재인 것은 동일하다.
물론 처분방법이 다를 뿐 처벌이 존재하는 것도 동일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지금으로 치자면 성인(聖人)이 아니라 불법을 조장하는 성인(性人)의 모습을 보인 셈이 되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의 말씀이 현대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수보다는 소수자, 강자보다는 약자, 법률보다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정신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창녀는 남편 없이 혼자 생계를 꾸려야 하는 여성의 불가피한 선택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아! 이 지식의 짧음이여. ‘~것이다’라고 못쓰고 ‘~알고 있다’라고 밖에는 못쓰니….)
즉, 결과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과정까지 감안한 돌봄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 여자가 풍요롭고(또는 부족하지 않고) 절박한 사정이 없었음에도
단지 남자와 즐기기 위하여 그런 생활을 했다면 예수가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Definitely, No!다
 

삼성을 창녀로 비유하고 있는 글쓴이의 인식으로부터 삼성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삼성이 과연 소수자인지, 약자인지 따져봐야 할 차례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야말로 두 말하면 잔소리다. 오히려 한국은 반쯤은 삼성제국에 점령 되어버렸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그들이 곧 법이요 진리요 길인 세상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삼성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매장되어가는 사례를 다수 확인 할 수 있다. 이젠 그런 반기조차 거의 없을 지경이다.

 
나라면 차라리 이런 비유를 들겠다.

 '일제시대 3.1운동하면서 나는 곧장 경찰서로 달려갔다. 그 앞에는 총칼로 무장한 경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들이 말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돌로 치든 말든 니들은 다 주거써!" '
 

합법/불법의 법률적 관점이나 강자/약자의 상황, 그리고 그들 양측의 미래에 관한 것 모든 점에서 이 비유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불법적인 병합과는 별개로 당시로써는 합법적인 통치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통치에 기대어 밥벌이 하던 사람들도 있을 테다. 경찰에 대드는 것은 불법이었을 거고..
(비유이긴 하지만 '삼성==일제' 는 좀 심한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일부 보수 입장에서는 일제가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어줬다는 평가도 있는걸 보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닐 것이다.)
 

창녀의 비유는 규범에 얽매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을 경고하는 비유다.
그런데 삼성을 창녀로 비유한 저 블로그의 글은 역설적이게도 변호사가 지켜야 하는 규범을 들어 김용철 변호사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그 비판이야 말로 창녀에게 던져졌던 그 돌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통받는 약자보다, 진짜 정의보다는 율법의 문구 하나 지키기를 더 소중히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던졌던 돌 말이다. 그래서 자신 논리의 발등을 찍는 창녀의 비유는 완전히 잘못 적용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행히 저 글을 쓰신 분, 의견의 차이에 기분나빠하지 않으신다 했다. 차이를 인정하는거, 그게 민주주의 아니겠냐고.

사실 차이를 인정하는거, 그거는 참으로 훌륭한 자세다. 그게 민주주의 중요한 덕목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다는건 민주주의랑은 아무 상관없는 문제다. 그르거나 곡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주장들에 대해서는 사실 화가 날수도 있어야 맞다. 물론 그걸 표현할때는 좀 정중하게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민주주의를 존중한다면 김용철 같은 조무래기보다는 이젠 아예 노골적으로 사법권력을 돈으로 매수하고 돈으로 언론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삼성에 대해 두려움과 공포와 분노를 느껴야 한다. 민주주의가 뭔지 코딱지만큼이라도 안다면 말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고발과 서적 출간에 대해서는 더 많은 이견과 논리가 있겠지만 내 여건과 능력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떠들기는 무리인 것 같고 일단은 단순한 부분에 관에서 잠시 생각을 끄적여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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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올라오는 떠나가는 사람들의 고별사(?)를 보며 씁쓸함을 느낀다.  좋지 않은 이유로 이별하는 것에 대한 씁쓸함이다. 그러면서 이러저러한 잡생각이 떠오른다.  

 

솔로몬의 재판은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아기의 진짜 어머니를 가려준 명재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매운동의 여러 모습들을 보면서 뜬금없게도 솔로몬은 진짜 어머니를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매운동을 지지하는 분들의 의도는 매우 순수하고 진정성이 넘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같은 부류의 사람들에다 대놓고 가짜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대해 반박하고 싶으나 참고 있었다. 오해였든 생각의 차이든 뭐든간에 아무튼 존경할점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결국 서재에서 떠 나가는 모습들을 보니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처음엔 실망스럽다고 썼다가 아쉽다고 고쳤다. 불매운동 관련해서 가장 많은 다툼은 바로 이런 단어선택 때문이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말하다보면, 짧은 글쓰다보면 큰 의미 없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쓸수 있는데 활자는 오래 남아 시비꺼리가 된다. 본질이 아닌데도 말이다)

내가 이해하는 저분 들의 생각을 비약하고 줄여서 정리하면 이렇다. 

"천사가 아니면 악마다."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하는 진보란 없다...  멋있는 말이지만 그 말한마디로 자신을 뺀 모든 진보(또는 진보의 싹)를 無로 만들어버리는 전형적인 선동 문구다. 누가 외면했는가? 보수주의자 조차도 외면한적은 없다 할 것이다. 다만 우선순위의 문제일뿐.  정말 하루배송과, 아니 하루배송이 아니더라도 -배송업체의 고질적인 문제는 자살사건까지 나왔을 만큼-  택배업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는데 문제 삼은 적이 있던가? 무료배송에 대해 고민한 적은 있었는가? 대형 서적유통업체(알라딘 포함)가 출판업자에게 휘두르는 권력과 할인판매와 사은품들, 그 사이에 끼어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구조에 대해서는?  그뿐 아니라 먹고 입고 마시고 잠자는 그 모든 것들에 관하여 과연 자신의 원칙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 짐싸고 떠나거나 버릴 수 있는 그런 분들이었던가?  ('나는 다른 건 몰랐다'고 할 수 있는 분이라면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 불매운동에서도 모른척 빠져주시는게 나았다. 오해 없기를. 하나만 안다고 그분들의 의견이 불필요하다는게 아니라 좀 더 큰 그림을 보자는 주장이 논란이 된것이라 그렇다는 말이다. 비정규직 싫어요 좋아요 물어보면 100% '싫어요' 나온다. 그런 말만 반복할꺼면 토론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 점에 대해서 로쟈님도 '갑자기 알라딘에 정색하고 지적(?)하기 어렵다'고 잘 지적한 바 있다.

아주~아주 세상일에 무지하지 않았다면 그분들도 '천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악마'인가? 

답이야 뻔한 이야기고...  다시 솔로몬의 재판으로 돌아와서 생각한다.  

정의에 불타는 어머니, 옳지 않은 일에 분노한 어머니가 말한다. "저 아기는 내 아이가 맞습니다. 절대 저 가짜에게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증거가 없다구요? 아이를 반으로 나눠야 한다구요? 그렇게 하십시오. 전 절대로 이 아기를 아기나 훔쳐다가 노예로 팔아먹는 저 가짜에게 그대로 내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이해하는 떠나는 분들의 모습이 바로 저 어머니의 모습같다. 재판의 결과는 모르겠다. 관점에 따라서 옳을 수도 있고 비판받을 일을 한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죽을지 모르니 포기했어야 한다는 말에  비정의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니 하는 건 한참을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나비효과가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는 99%의 정보를 알고 있어도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기에 옳고 그름을 확언할 수는 없다)

알라딘이 천사표 기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알라딘이 아니라 공정무역 조차도 이러저러한 역효과때문에 비판받는 상황에서 천사표 기업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수 있다. 다만 노력하는 기업은 찾을 수 있고 아름다운 가게나 여러 지역생협조합들이 대중적으로 성공한 예라고 할 수 있다.  

1과 2 사이에는 무한대의 '정수가 아닌 수'가 존재한다.  1.1111, 1.1112, 1.111111 ....  천사와 악마 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층위의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누구도 1.5 이상은 반올림해서 천사로 규정하고 그 미만은 버림해서 악마라고 정의 할 수 없다.  알라딘은 천사는 아니지만 최소한 노력하는 '척'이라도 하는 회사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그나마라도 그 활동을 격려하는 것이 다른 기업들이 같은 길을 갈 수 있도록 물꼬를 트는 일이라고 믿는다. (물은 의지없이 다만 물길이 난대로 흐를뿐이다.) 

 

천사도 악마도 없다. 우린 소수점 이하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ps. 어느분이 '...중략... 소비자들이 이해해줘야 한다는 식의 진보야말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진보입니다'라고 쓰시고 알라딘을 사용할수 없다며 서재를 접으셨다.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알라딘을 이해해 줄수 없기에.(그 분은 '사용' 대신 '남용'이라는 단어를 쓰셨으나 그러지 않겠다는 사장의 약속을 근거없이 무시하셨으므로 무효.)

심심풀이로 지금 글을 쓰는 나의 생활과 연관된 그런식의 이해해줄수 없는 정의문제가 어디까지 걸쳐 있을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소비중단을 선언하시고 공언하실정도라면 아래의 내용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 토론 좋다. 하지만 남들을 괜히 생각없는 사람 만드는 일은 하지 말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아, 참지 못하고 영화 제목으로 한 번 비꼰다....)

1. 전기- 인터넷을 하려면 컴퓨터를 켜야 하고 전기가 있어야 켤수 있다.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회사는 노동자의 단합을 저해하기 아주 쉽도록(실은 민영화하기 쉽도록-결국 비정규직을 사용하기 쉽도록??) 여러 지역 발전회사로 분할된 것으로 안다.  

2.석유 - 전기발전은 석탄,석유,원자력이 주력이 되어 생산된다. 원자력의 환경파괴적 속성은 말할 것도 없고 석유나 석탄은 자원이 존재하는 주변환경은 물론이고 지역주민의 비인간적인 처우(말이 처우지 죽음과 교환되고 있다)를 바탕으로 생산되고 있다. 정유회사들의 야만적 행위는 뭐 교과서적인 내용이고..

3. 인터넷 - SK, KT, LG 3사가 인터넷망을 과점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 유통,마케팅상의 불법이나 과잉홍보등은 아예 그 자체가 정상인것같은 상황이다. 혹시... 3개월 무료로 인터넷 안써보신분 손 좀.. (끊는다고 하면 할인도 마구 해준단다)

4. 검색엔진 네이버 - 네이버의 점유율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안다. 많은 사람들이 뉴스정보도 네이버의 중계를 통해 얻게 되는데 이 뉴스는 결코 사안의 중요성순으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몰릴수록 여론의 환기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5. 대형마트 - 거의 만악의 근본인듯 싶다.  지역에 기반한 삶을 불가능하게 하고 부의 서울 집중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밤늦게 퇴근하는 나는 마트라도 열려있어서 장보기가 가능한데... 

6. 택배 - 책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택배가 우리집과 직장을 방문한다.  내가 할수 있는건 팁으로 웃돈이라도 쥐어 주는거지만 실제로 하는 건 가급적 친절하게 인사하는 정도뿐이다. 시간이 생계인 분들이니 전화오면 바로바로 받고.

7. 신용카드 - 소득공제혜택과 각종 포인트들 때문에 사용하기는 한다만 작은 식당같은데서 사용하기는 좀 꺼려진다. 영세하다는 이유로 높은 비율의 수수료를 카드사들이 챙겨가기 때문이다.  현금영수증도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세원노출이 적은것을 고율의 세금으로 노출된 세원에게 벌충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편해지지만은 않는다.  법인세는 못깍아줘서 안달이면서...

8. 아... 집안에 널부러진 저 수많은 중국산 제품들...  생각하기 포기..  옷가지며, 전자제품, 생활용품... 플라스틱껍데기를 쓴것이라면 모두 중국산인듯..  중국 인민의 저임금과 비참한 삶에 기대어 우리는 상대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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