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하는 나날들 - 조현병에 맞서 마음의 현을 맞추는 어느 소설가의 기록
에즈메이 웨이준 왕 지음, 이유진 옮김 / 북트리거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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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안전하다는 인식은 환상이다. 이 환상은 곧 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대부분은 다시 그 환상으로 귀환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지금 이 상태가 공고한 것처럼 믿는다. 믿어야 견딜 수 있는 게 일상이므로.


그런데 이 환상에서 매일 반복적으로 깨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조현병도 그 중 하나다. 이 책의 저자 에즈메이 웨이준 왕은 대만계 미국인으로 예일대 학생이었다. 조현정동장애 양극형이라는 복잡한 진단명은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설명하는 서사를 해체한다. 즉 그녀는 스스로의 서사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조직해야 하는 평생의 과업을 부여 받는다. 이민자의 자녀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이비리그 대학생이 되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병 때문에 교정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 사람들은 다른 정신질환보다 조현병에 걸린 사람을 더욱 위협적으로 인식한다. 더 이질적으로 느낀다. 그녀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생긴 위계의 가장 최하위층을 점했던 환자들이 조현병 환자들이었다는 얘기는 정신 질환자들의 공간 속에서도 '한 존재의 파멸적 중단'을 암시하는 조현병에 대한 공포를 암시한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조현병을 진단 받은 저자가 매일 사투를 벌이며 삶 속에서 '조율하는 나날들'에 관한 이야기다. 중단된 학업을 다시 이어가고 다시 사랑을 찾고 우정을 회복하고 길을 떠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이야기는 묘하게도 무겁거나 비극적이지 않다. 그 안에서 찾아나가는 균형점, 자신의 정신병을 삶에 정체성에 통합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그 안에 있지 않다 할지라도 생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일들에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간접적 참조점을 제시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롭다. 막연한 희망, 위선, 위장의 장막이 벗겨지고 드러난 생의 속살은 차갑고 날카롭지만 우리가 그 안에서 숨쉬는 일에 대한 가치를 일깨워 준다. 슬프고 괴로워도 뚫고 나가는 그 어떤 지점에서 우리 모두는 만난다. 


저자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믿는 '코타르 증후군'을 경험하게 된다. 살아있기에 아플 수 있고 이별로 인한 상실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아예 해체되는 경험이다. 이 안에서 나는 이미 죽었으므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도 없고 따라서 헤어질 수도 없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고통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묘한 경험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지옥의 형벌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희망조차 없으며 지독한 고통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사실, 상처, 비탄은 그 나름대로 끔찍한 것들이지만, 지옥의 형벌을 받는 죽은 여자에게는 무척이나 인간다우며 살아 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pp.236


에즈메이 웨이준 왕은 섣부른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감히 그 지옥에서 걸어나와 다른 형태의 '조율하는 나날들'을 맞이하기를 기원해 본다. 그녀가 통과한 그녀만의 '조율하는 나날들'이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되든 나는 살아가게 되어 있고, 내 삶이 어떻게 풀리든 나는 것을 견뎌내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그녀의 말이 주는 희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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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모든 것에 과도하게 힘을 줬고 최선을 다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게 될 거라고 맹신했다. 심지어 관계까지.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했던 이야기.
















직장, 사랑,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각종 위계, 계층, 계급, 그래도 진심이고 순수하고 싶은 마음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나날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 공감이 갔다.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이야기지만 그 여성의 마음과 시점에 최대한 근접해 가려 애쓴 흔적과 상대에 대한 마음이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아도 그것 또한 사랑임을 간파한 예리한 시선이 놀라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말할 때 우리는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다. 그 사람의 외모, 그 사람이 가진 것들을 모두 포함한 얘기다. 어떤 사랑을 포기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비겁함도 그렇다. 하상수가 찌질하지도 비겁하지도 않다고 느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직장에서의 직군 간의 긴장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소위 금수저인 박미경 대리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인데 그녀가 무심코 안수영 주임에게 하는 배려들, 이를테면 명품 가방을 선물하거나 안 주임이 예쁘다고 한 목걸이를 선뜻 풀어 준다거나 하는 행동이 가지는 어떤 뉘앙스에 대한 이야기다.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 악의로 인한 행동보다 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실수가 된다. 서로에게 하는 배려가 그 조직의 기저에 깔린 차별을 공고히 하는데 저도 모르게 기여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그러한 것들이 보인다. 그러면서 그때는 읽지 못했던 것들의 의미와 내가 저지른 실수들과 내가 받은 상처를 다시 복기하게 됐다.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 지점 남자 동기와는 달리 내가 배우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 각종 자질구레한 서무 업무들이 주가 되었던 일, 나와 동갑이었던 남자 아르바이트생,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그 어려웠던 마음. 하루하루 안 힘든 적이 없었다는 안 주임의 눈물나는 고백의 무게들이 가로지르고 간다.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먹고 사는 일의 비장함에 갇혀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서로 주고 받는 정과 사랑, 배려에 갑각류처럼 몸을 움츠렸던 것도 같다. 내 상처에 골몰해 타인들의 상처에 정작 무감각했던 것도 같다. 고마웠던 사람들도 많고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는 추했던 언행의 사람들도 있다. 


사랑의 이해는 내가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이득과 손해를 저울질하는 행위와 겹친다. 중의적인 의미에서 그 이해는 의미를 가진다. 전적으로 순수한 감정도 오직 속물적인 계산도 아니다. 조건을 찾아 떠난 사람도 사랑에 모든 걸 맡긴 사람도 다 그 시간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아는 게 핵심일지도 모른다. 생활의 무게, 사랑의 진정성 어느 한 쪽도 소흘히 할 수 없는 인생의 화두니까.


















처음에는 순간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었다. 글은 모든 순간에 있었다.

-배수아 <작별의 순간들>


음악 같은 산문.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게 되는 배수아의 글. 독일에서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투야 울타리 너머의 정원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하루하루 그들의 별일 일어나지 않고 오직 문학 안의 텍스트와 교유하는 그 은은한 삶에 가만히 동행하는 듯한 환각을 주는 환상적인 이야기였다. 한 장, 한 장 책장이 줄어들 때마다 '작별의 순간'들로 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마치 삶처럼. 이 모든 지금과 이 모든 열심이 결국 무로 화할 것이라는 끊임없는 자각을 일깨우는 조종 같은 그녀의 문장들이 탐스럽다. 언제나 끝내지 못한 책처럼 물러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다 그러모아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 싶다. 사는 일은 완성하는 것이 아니고 잘 사라지는 일이라고. '작별의 순간들'을 음미하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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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23-02-15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이야기! 그 어려운 걸 해냈단 말인가요? 무척 궁금해지네요^^

blanca 2023-02-15 21:48   좋아요 0 | URL
여성 독자로서 개인적으로 여성 묘사에 대한 아쉬운 대목들이 있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몰입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원작이 좋아서 드라마도 잔잔한 서정성을 갖추게 된 것 같고요.
 
가족의 무게 - 가족에 의한 죽음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사탐(사회 탐사) 7
이시이 고타 지음, 김현욱 옮김, 조기현 해제 / 후마니타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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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히면 안전할까, 위험할까. 바깥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시로 받는 평가, 비판, 책임의 무게를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이 가정일 수도 있지만 그 구성원들도 각기 다른 개성, 욕망, 꿈을 가진 개인이기에 때로 다툼과 해결 못할 불화 속에 고통을 당하다 뉴스에 나오는 극단적인 비극이 일어나기도 한다. 가족 살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그곳에서 벌어진 결과론적인 사건을 접할 때 언론은 그것을 선정적으로 보도하기에 바쁘다. 그 이면에 깔린 가족의 전사, 사회의 책임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그 사건 당사자들을 철저히 타자화하면서 우리의 안전을 자족하기에 더 쉬운 일이니까. 우리도 언제든 그 비극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는 자각은 위험하니까. 그렇게 쉬운 길을 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만당한 것이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가족 구성원의 붕괴는 특별한 사람들만 경험하는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영원히 건강하고 젊고 언제나 사회 구성원으로 적절히 제대로 기능할 수는 없다. 누구나 늙고 약해지고 병든다. 어쩌면 가족의 의미는 그때부터 다시 재구성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위험하고 불편하게 읽힐 수도 있다. 저자 이시이 고타는 일본의 유명한 논픽션 작가다. 이 책은 저자가 2015년부터 6년간 일본내에서 벌어진 일곱 건의 가족 살인 사건을 직접 취재한 건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사랑스러웠던 아들이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엄마를 공격하고 행복하게 사는 여동생에게 살의를 느꼈을 때 선량하고 성실한 사회 구성원이었던 아빠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나를 학대했던 엄마가 정작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그걸 못 들은 척 하고 죽음까지 방조, 방관했던 자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아무리 전방위적으로 도와주려고 노력해도 끊임없이 가족의 안정을 위협하는 자매의 정신병은 과연 누가 잠재울 수 있을까?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고 학대 당하고 유기 당했던 유년을 간직한 여성은 과연 자신의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은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결말들을 담고 있다. 


처음 가족을 꾸릴 때 사람들이 했던 생각과 의도는 비극의 서막처럼 들리고 지극히 평범하다. 누구나 좋은 아내, 남편, 엄마, 아빠, 아들, 딸이 되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자녀의 혹은 부모의 문제는 경제적인 부담과 함께 맞물려 그 책임감을 통해 개인을 짓누른다. 이 책에서의 가족 살인의 가해자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나누고 개입할 수 있는 부담을 철저히 개인이 소화해내려 애썼다. 개인이 극도의 피로감과 책임감에 짓눌리다 보면 이성적 판단이 어려워진다. 사회적 지원 시스템이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찾아가는 서비스가 아니라 개인이 찾아내야 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구조다 보니 끝까지 가족들이 가족 구성원의 장애, 질환을 간호, 간병해야 하는 부담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돌봄의 무게는 시시포스의 돌처럼 회귀한다.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고 현상만을 보여주는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처음에는 이 책이 그런 사건들을 드라마틱하게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회의했다. 그러나 그 가정 내에 들어가 그 가족의 서사를 다시 재구축할 때 비극의 단초를 탐색하고 어떤 타이밍에서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나를 조망할 수 있는 읽기는 많은 시사점을 품고 있었다. 아무도 이야기하고 설명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개인이 모든 걸 안고 갈 수 없다는 깨달음은 우리 사회와 복지 시스템이 기능해야 하는 지점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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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02-04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산 책이에요. 읽기도 전에 마음이 무거워요ㅠㅠ;

blanca 2023-02-04 14:30   좋아요 1 | URL
마음이 정말 아프더라고요. 평범했던 가정이 일순간 뉴스에 대서특필되는 가정이 되는 게 사실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고,병,노쇠에서 촉발되는 이야기들이어서 읽고 나서도 두렵기도 하고 그랬어요. 저자 어조가 내용과는 달리 참 담담해요. 그래서 더 와닿는 것도 같아요.

바람돌이 2023-02-04 1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르포성 책들은 많이 나와줘야 할거 같아요. 그래야 사회적 반향도 일으키고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 끔찍한 문제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를 포착하고 사회적 대책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blanca 2023-02-04 14:31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저도 그 생각 했어요. 사회가 개입하고 나눠야 하는 짐을 온전히 가정 안에서 감당하려다 벌어진 사고들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stella.K 2023-02-04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면 마음이 무겁겠어요.
우리나라는 찾아가는 서비스란 점이 그나마 일본 보다는
좀 낮지 않나 싶네요. 기능하는 사회란 그런 것이어야 하겠죠.

blanca 2023-02-04 17:34   좋아요 1 | URL
이 책,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좀 그래요. 태어나 살고 늙고 병들고 다치고 죽는다는 게 참 삶의 숙제 같고 주변에 폐를 안 끼치겠다는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게 비극적이고. 시간만 가면 더 편해지고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어렵고 힘들고 배워야 하는 것 투성이인 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3-03-13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3-03-14 18: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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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는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아니,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실제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나가는 사람의 고통, 회한, 보람, 슬픔은 영영 그 깊이와 무게를 실감할 수 없다. 


여기 마산의 한 청년 용접 노동자가 있다. 또래가 교실에서 수능 공부를 할 때 실습실에서 기판을 납땜하는 연기 때문에 두통을 앓고 이미 졸업 이후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아이는 대학교 교정이 아닌 공장에서 방진복을 입은 첫사랑을 만난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그를 다시 대학으로 돌려보낸 이도  누나 같은 이 친구다. 


우리가 상정하는 대다수의 스물 언저리의 청년이 보내는 대학 교정에서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청년 노동자들의 삶을 관찰자의 공허한 언어가 아닌 당사자의 목소리로 듣는 일은 놀랍고 순간순간 미안해지는 일이다. 정말 이 정도였어? 산재를 당하고도 산재 신고도 하지 못하고 폭염에 정규직 노동자들이 쐬는 에어콘 바람도 사치였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무지가 때로는 죄악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한다.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의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려야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러나 어둡고 처절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짬마다 나타나는 인생의 멘토 같은 아저씨들,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건강한 사랑, 기대하지 않았던 타인들의 따뜻한 배려. 천현우 저자가 그려내는 이 신산한 삶의 풍경이 역설적으로 가지는 온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하는 의미들은 곳곳에 뿌려져 있고 저자의 입담은 그 의미를 한층 더 심오하고 빛나게 만든다.


한 달 정도 지나 마침내 완공한 징검다리를 보게 되었다. 떡갈나무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우리의 창조물에 올라섰다. 행여 볼트 하나 빠졌을까, 용접에 균열이라도 있을까 세심하게 살폈다. 아직 물이 차오르지 않은 널찍한 호숫가를 가로지르는 동안, 보람으로 가득찬 심장에서부터 사방으로 짜릿한 느낌이 퍼져나갔다. 

-천현우 <쇳밥일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의 안전망 사각 지대에서 떨었던 청년이 만든 다리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우리는 단지 그 다리를 건너면 그뿐이었다. 익명의 노동자들이 그 다리를 만들며 용접을 해서 철 사이를 메꾸며 어떤 것을 두려워했고 어떤 것을 꿈꿨는지 그들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꿈조차 사회가 강요한 계층 사다리 안에서 꿀 수밖에 없었던 그 현실에 대한 이야기. 단지 화내고 푸념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커피를 마시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소설을 쓰고 운동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며 하루하루 더 나아갔던 이야기. 


저자는 이 청춘의 노동 일지가 사적인 경험 토로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답해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사소한 것도 아니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내 임금이 내가 열심히 오래 일할수록 차곡차곡 오르고 어제의 불운이 결정된 미래를 몰고 오지 않는다는 믿음만 있다면 한번 해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죽이지 않는 사회. 저자의 마흔 살에는 그런 내일이 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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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03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책 같습니다. 꿈조차 사회가 강요한 계층 사다리 안에서 꿀 수밖에 없다니...비극이네요..

blanca 2023-02-03 19:13   좋아요 0 | URL
작가 필력이 대단해요. 소설을 쓴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스토리텔링이 탁월해서 작가의 이야기가 정말 눈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읽혔어요. 재미와 깊이가 다 있는 책입니다.
 
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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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 훌륭한 연기자이기에 앞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처절한 이해와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다. 작가가 되는 건 언어의 표피적 이해 이전에 결국 삶을 제대로 살아야 가능하구나. 유명인의 책에 대한 편견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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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1-18 0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유명인의 책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유퀴즈의 김혜자 님 편을 보고 ‘오 이 책 읽어봐도 좋을것 같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블랑카 님 벌써 읽으셨고 이런 평을 써주셨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23-01-18 08:29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저도 유퀴즈 보고 읽은 건데요. 사실 아무래도 워낙 김혜자 배우가 유명한 연기자다 보니 책은 그냥 형식에 불과하겠지, 하고 큰 기대 없이 펼쳤다가 한 분야에서 어떤 일가를 이룬 사람은 인생에 대한 자세 자체가 남다르구나, 싶었어요. 요즘 고민하는 것들에 대한 조언들을 받은 느낌이었어요. 드라마 하나하나에 대한 마음가짐이 정말 감동적이더라고요. 많이 배우고 저 자신도 돌아보게 됐어요.

자목련 2023-01-18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유명인의 에세이는 기피하지만 김혜자 배우의 책은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blanca 2023-01-18 18:52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나이 드는 것의 헛헛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일단 김혜자 배우가 출연한 작품들의 스토리텔링이 기가 막혀요. <안나 카레니나> 제가 좋아했던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하는 데 와, 김혜자 배우가 책을 참 좋아하고 수시로 다시 읽고 그러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감동 받았습니다.

라로 2023-01-18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예전에 이 책 나왔을 때 읽고 싶다는 글을 썼어요. 그땐 종이책이라 마음만 있었는데 블랑카님의 200자평이 그날 제가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생각이라 넘 똑같아서 저 지금 손이 떨릴 지경이에요!!!

blanca 2023-01-18 18:53   좋아요 0 | URL
보통 기대보다 못하잖아요. 이 책은 정확히 기대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연기에 대한 마음가짐이 정말 신성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자신을 포장하고 변호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은 노년의 명연기자에게 참 배울 것이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