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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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통일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중반 한 몰락하는 귀족 가문의 이야기가 <표범>이라고 한다면, 이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의 일부만 드러낸 것이다. 사십 대 중반의 시칠리아 영주가 아들처럼 사랑했던 신세대 조카의 혁명 참가와 실리적인 판단에 따른 결혼을 지지하며 삶과 죽음에 대하여 탐구하는 이야기이고 이 주인공이 작가 자신의 가문 증조 할아버지를 모델로 한 일생 유일한 장편소설로 생전에는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 사후에야 출판되어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고 국민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뒷얘기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다. 한 작가가 평생에 걸쳐 단 한 권 남긴 가문의 이야기는 고전이 됐고, 알랑들롱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다시 넷플릭스 시리즈 제작 중이다. 직업적 소설가도 아니고 전문적인 작가 수업을 받지도 않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은 이야기 자체로 그만큼 매력적인 스토리의 재미와 인간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돋보이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시칠리아 귀족 돈 파브리초 살리나 영주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마음껏 향유하는 한편 천문학에 심취하고 장엄한 미사를 드려 자신의 방종을 회개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호화로운 별장을 순례하고 사냥터를 누비고 거리의 여자를 안는 그가 죽은 누나 대신 돌본 조카가 영주의 딸 대신 혁명의 세례를 받은 신흥 부자인 시장의 딸과 결혼하게 되자 화통하게 그 결혼을 응원해 주는 배포를 보여주기도 한다. 구체제에서 누린 계급적 특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급변하는 정세의 변화에도 흔쾌히 열린 마음으로 그 변화를 맞이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돈 파브리초는 정작 중요한 것이 그런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가 정작 천착하는 주제는 인간에게 닥치는 필연적 죽음이었고 <표범>의 비상한 흡인력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살리나 가문의 문장인 표범은 지배계급의 그 간악한 공격성과 지배 욕구, 탐욕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을 결국 기습적으로 먹어버리는 죽음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그는 화려한 무도회에서 춤추는 사람들에게서도 결국 닥칠 죽음을 보게 되고,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그 누구보다 삶 자체를 만끽하며 누리는 그가 역설적으로 죽음의 안식을 동경하고 거기에 기꺼이 승복하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이 남자의 일대기의 압축이 향하는 그 종착점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성찰이 뒷받침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려한 이야기 이면에는 이토록 어둡고 깊은 생의 유한함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


우리는 영원을 제외하고는 무엇도 증오할 수 없다.


사람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다. 이 세상에 영원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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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12-0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참 대단하고 아름답죠......원작이 번역되었군요!

blanca 2024-12-02 18:58   좋아요 0 | URL
알랑들롱 영화 아직 못 봤어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작품은 좋지만 작가 개인으로는 도저히 호감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작품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작가를 만나보고 싶은 경우도 있고. 작품도 좋고 작가 개인으로도 매력적인 경우가 내겐 체호프다.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인 걸 알지만 중간중간 틈입하여 교조주의적 연설을 시작할 때는 좀 숨 막힌다. 반면 체호프는 유연하고 너그러운 위트가 있으면서도 심오하다. 내 말이 맞다고 애써 강변하지 않는다. 내 이야기가 최고라 도취되지도 않는다. 어떤 머뭇거림의 왈츠 속에 그 특유의 예리한 직관이 빛난다. 재미있게도 톨스토이와 체호프는 서로 합이 맞았다. 이 사랑이 세간의 일부에서 떠드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관계였다고나 할까?(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교감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 숨어 있다. 톨스토이는 체호프의 <귀염둥이>를 정말 좋아해서 방문객들에게 그 이야기를 읽었는지 재차 확인하고 몸소 여러 번 낭독해주기도 했다. (박현섭 해설 참고) 체호프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 아들의 작품처럼 자랑스러워했다.


















한편 체호프의 <약혼녀>에는 흥미롭게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르겠구나, 얘야.. 나는 밤에 잠이 안 오면 눈을 이렇게 꼭 감고서, 안나 카레니나가 걸어다니며 말하는 모습이라든지, 아니면 역사적인 장면 같은 걸 떠올린단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굳이 언급해 주는 센스는 톨스토이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걸까.


<상자 속의 사나이>에 실린 체호프의 모든 작품이 골고루 좋았지만, 특히나 <로트실트의 바이올린>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감동이 있었다. "죽는 사람이 좀처럼 없어서 짜증이 날 정도"의 시골마을서 관 짜는 일을 하는 괴팍한 야코프의 개과천선은 죽음 직전에 온다. 그는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잇속을 차리는 탐욕스럽고 괴팍한 노인이다. 그런 남편에게 평생을 헌신한 아내가 결국 죽어가며 한참 전의 과거의 아픈 상실을 떠올리는 장면은 그를 회심하게 한다. 부업으로 했던 바이올린 연주 악단에서 야코프가 구박하고 무시하던 유대인 청년에게 그가 아끼던 바이올린을 물려주는 장면은 우리가 삶을 사느라 놓쳐버린 정작 소중한 것들의 회한에 대해 경고하는 듯하다. 가뭇없이 빠져나간 세월들 사이로 산다고 주장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시선을 줘야 할 것들을 놓치다 보면 어느새 죽음은 눈앞에 와 있을 것이다.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급작스런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장면이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뭔가 환기하는 바가 큰 종결어미처럼 보인다. 괴로워하거나 후회하거나 허무해하거나 하는 감정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아직은, 깨달을 시간이 있다는 일종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구스베리>에서 늙은 이반이 연못에서 비를 맞으며 수영을 하는 장면의 묘사 같은 것. 심지어 젊은 동행인이 말릴 정도로 만끽하는 생의 막간의 휴식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도 지극히 체호프적인 것이다. 체호프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어느 한쪽의 극단이 없다. 그리고 그게 참 좋다.


구스베리는 딱딱하고 시었지만, 푸시킨이 이런 말을 했죠. '우리를 북돋워주는 기만은 진실의 어둠보다 소중하다'라고요. 

-체호프 <구스베리>


모든 화려한 것, 세속적인 세상사에서 물러나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전원의 드넓은 영지를 소유하게 된 이반의 동생은 그 이후로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이반에게 그 행복의 뒤안길에서 놓친 타인들의 희생과 비참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기만의 행복에 순간 취할 수 있지만 삶은 그러도록 우리를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파한 그는 그러나 그 자신이 알몸으로 연못에서 생이 주는 그 환희를 즐길 줄도 아는 사람이다. 톨스토이라면 이 지점에서 이반의 연설로 마침표를 맺었을 것이지만. 체호프는 그러는 대신 그 자신이 모순의 결정체인 인간적인 약점을 노출한다. 


톨스토이는 이런 체호프의 글을 좋아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톨스토이의 죽음을 두려워했던 체호프는 톨스토이보다 먼저 떠난다. 마치 그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반전처럼. 그 죽음조차도 그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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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 님. 저도 이 책 읽어볼래요. 소중한 소개입니다.

blanca 2024-11-20 13:49   좋아요 1 | URL
체호프가 좋아요. 평전도 읽어보고 싶은데 번역이 안되어 있더라고요. 개인적 삶도 너무 드라마틱하더라고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여배우를 사십대에 만나 결혼까지 하고 얼마 안돼 죽어버리는...제일 웃긴 대목은 톨스토이 아내가 그렇게 체호프와 톨스토이 사이를 질투했다고 ㅋㅋ
 
무지의 즐거움 - 지적 흥분을 부르는 천진한 어른의 공부 이야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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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 우치다 다쓰루 앞에서 ‘정체성 정치‘, ‘진정한 나‘, ‘민주주의‘, ‘구원‘, ‘지혜‘에 대한 틀에 갇힌 해석은 해체되고 재조립된다. 끊임없는 자기 쇄신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 칠십 대 노장의 사고의 유연함에 거듭 놀라고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모든 고정 관념의 뿌리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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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07 1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 님의 별 다섯!!!!!

blanca 2024-11-07 19:44   좋아요 0 | URL
강력 추천입니다. 저는 소장하려고요.
 

어느 영상에서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다는 젊은 시인의 얘기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네가 죽음을 알 나이가 아니니까."


그 시인의 다감한 인상에 나는 어떤 냉소를 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고명재 시인을 잘 몰랐다. 지금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인이 얘기하는 죽음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짙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할 수 있다. 자신을 키웠다는 비구니의 이야기에 무심결 집어 든 그의 책은 나를 많이 울렸다. 



나이듦은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되는 일과 가깝다. 어떤 선의에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지혜도 경험지도 아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옅어지는 일은 서글프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받은 무한사랑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고명재 시인이 이 책을 헌사한 비구니가 그에게 베풀어 준 사랑의 시어들을 읽으며 나는 잊었던 그 사랑들을 기억해 냈고 그 기억의 복원에 압도됐다. 지금의 나에게도 어린 시절 그런 사랑을 퍼부어 준 사람이 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 나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 사랑으로 견딜 것이다.


반드시 요동치고 심장 뛰고 들썩여야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마음과 존재를 아래에서부터 떠받친 채로 기둥처럼 지속되는 사랑도 있다. 사시사철 최선을 다해 존재하는 것. 은은한 지속. 그 기쁨, 놀라운 세계. 창호 너머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만물이 견고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바로 거기 있구나. 

-<너무 보고플 때 눈이 온다> 고명재


너무너무 가난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동생과 할머니에게 맡겨진 시인이 또 어느 한 시기 절의 비구니와 함께 한 유년은 눈물겹도록 애잔하고 아름답다. 작디작은 비구니는 시인에게 무한정의 사랑과 무소유의 고결한 삶과 그것의 존엄한 마지막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시인이 시인이 되게 한다. 그러니 이 시인이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구나. 숨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런 사랑이 있구나. 한 어린 아이를, 부모와도 헤어져 자라야 했던 그 가난하고 작은 아이에게 무한의 사랑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구나. 세상에 대한 냉소로 온마음을 꽉꽉 채울 수도 있었을 아이가 자라 사랑을 노래하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게 하는 그런 빛나는 사랑이 있었구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슬픈 최후를 우리는 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그의 마지막 이야기들은 그러니 절망과 체념과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 오히려 반대다. 그는 여전히 사랑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연민을 노래한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믿음들이 빛난다. 어떤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은 그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지거나 이룩해서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그 지점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그 불굴의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그 여린 구석이야말로 가장 짓밟기 힘든 인간의 고결한 실재가 아닐까 한다. 


<걱정 없이 사는 기술>에서 돈이 없이 그저 자신이 가진 기술과 도움을 타인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살아가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 최악의 인플레에서도 여전히 일상을 영위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는 <나에게 돈이란>, 혁명이 지척에서 일어나는데도 무감하게 낚시를 하는 방관자의 역사가 사실은 우리들의 지금의 모습 그 자체라는 통찰이 인상적인 <센강의 낚시꾼>, 젊은 시절 우연히 방문하게 된 로댕의 작업실에서 배운 무아지경의 몰입의 순간에 대한 교훈을 얻은 <영원한 교훈> 등 짤막한 이야기 하나하나하가 가지는 심오한 메시지에 절로 공명하게 됐다. 짧아서 아쉽고 또 그만큼 농밀하게 압축된 이야기들이 주는 감동의 여운이 길다. 


그러니까 우리의 두려움에 이기는 건 여전히 진부한 사랑이다. 그런 걸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쉽고 내 존재 자체가 그 사랑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건 어려운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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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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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살 아이를 두고 이혼한 이십대 아일랜드 여자가 8월에 휴가를 떠난 이야기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전복시키는 이야기. 감각적이고 도발적인데 헛헛한 아름다움의 마침표를 찍는 이야기. 에드나 오브라이언이라는 작가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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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10-26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군요…왠지 책 내용을 엄청 기대하게 하는 리뷰네요.

blanca 2024-10-26 08:52   좋아요 1 | URL
분량도 많지 않은데 깊이와 재미를 다 잡은 작품 같아요. 일단 아주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