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제1405호, 제1406호 : 2022.03.28~04.04 - 21 WRITERS ②, 합본호
한겨레21 편집부 지음 / 한겨레신문사(잡지) / 2022년 3월
평점 :
품절


21명의 논픽션 작가들을 바라보는 글쓰기/다가가는 글쓰기/다른 글쓰기/전문가의 글쓰기로 구분하여 인터뷰했다. 논픽션 작가들인 만큼 자기 분야에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발전, 슬럼프, 전환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쓰기'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 태도, 노하우 등을 가감없이 솔직하고 심도있게 공유한다. 논픽션 글쓰기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여느 작법서보다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양질의 인터뷰가 잘 정제되어 있어 강력 추천한다. 


신형철은 글짓기를 집짓기에 비유한다. 이 공정의 준칙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흡사 '인식의 대목장 같은 그의 장인적 태도가 드러난다. 첫째, "취향이나 입장이 아닌" 인식을 생산해낼 것. 둘째,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셋째,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해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1부 시선-바라보는 글쓰기


"취향이나 입장이 아닌" 인식을 생산해낼 것. 이 부분을 곱씹어 보게 된다. 나는 이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흔히 사적인 글들을 읽으며 감동이나 공감을 느끼는 대목이 그것이 거창하거나 공적이어서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인식의 지점을 보여주며 읽는 이들을 소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에서 이라영은 '자기방어나 증오심에서 나온 글, 남에게 명령하거나 반박하기 위한 글, 남을 공격하거나 남에게 사과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글을 써야 한다'는 미국 소설가 유도라 웰티의 말을 늘 떠올리며 글을 쓴다고 했다.

-1부 시선-바라보는 글쓰기

역시 쉽지 않은 대목이다. 그러나 확장적 글쓰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본 전제인 것 같다. 읽기와 쓰기가 편협함에 빠지면 대단히 위험한 독단적 견해에 빠질 수 있다. 글쓰기는 단단한 구획 안에 고이는 것이 아니라 넘실대는 물처럼 격벽을 부수고 대양으로 넘어가야 한다. 


삶의 도약은 '이질성'을 경험할 때 생기는 거니까요.

-3부 변신-다른 글쓰기

'이질성'을 경험할 때 멈칫하게 된다. 불편하다. 그러나 도약은 그 지점에서 일어난다. 정체되고 안주하고 그저 지나가는 시간 속에 침잠하기란 쉽다. 쉬운 게 답은 아니다. 어렵고 불편한 게 때로 나를 성장시킨다. 


이 밖에도 이슬아 작가의 장인적 글쓰기(그의 젊음과 의욕과 현명함이 참 부러웠다), 잘 몰랐던 채사장 작가의 내밀한 고백들(오늘의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었다, 놀랍다), 김하나 작가의 글 잘 쓰는 노하우 방출(나도 마인드맵을 그리고 싶다) 등 어느 하나 사소하거나 진부한 내용이 없다. 글쓰기에 관심이 없어도 각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논픽션 작가들의 저마다의 인생사가 압축되어 있으니 그 자체로 즐거운 읽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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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격리를 마치고 나오니 벌써 벚꽃이 피어 있었다. 요 근래부터 봄꽃을 보면 마음이 좀 이상해진다. 싱숭생숭한 것과는 다른데 뭔가 마냥 이뻐할 수는 없고 좀 서글퍼진다.  그 기저에는 내가 저 꽃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는 실감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유한성을 머리로만 알았지 실감하지 못했었다. 이젠 주변의 죽음들을 목격하고 나도 이제 생의 반을 넘어가고 있다는 자각과 더불어 너무 아름답거나 예쁜 것을 보면 마음 한 곳이 허전해 온다. 

이 마음을 남편에게 얘기하고 싶은데 잘 표현이 안 됐다. 벌써 벚꽃이 폈는데 슬펐다고 할 수도 없고, 너무 예쁜데 그게 다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데 역시 시인은 달랐다. 나의 이런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듯 절묘하게 표현한 시.


벚꽃


올해도 살아서

벚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한평생

몇 번이나 벚꽃을 볼까요

철들 무렵이 열 살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많아도 칠십 번은 볼까

서른 번 마흔 번 보는 사람도 많겠지

너무 적네

-중략-

이바라기 노리코 <처음 가는 마을> 

















그래, 이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거다. 일본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집에는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은 시들이 이외에도 많다. 그녀는 그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일본의 서정 시인이 아니다. 자신의 조국인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고 남편과 사별 후에는 몸소 한글을 배워서 윤동주의 시를  번역하여 일본의 교과서에 싣는데 일조한다. 시인의 삶과 시가 일치하기를 바라는 것은 때로 순진한 생각으로 폄하되지만 이처럼 자신의 염결성을 삶으로 체현한 시인의 시는 더 진솔하게 다가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전설


청춘이 아름답다는 것은

전설이다

<중략>

-이바라기 노리코


"청춘이 아름답다는 것은 전설이다" 우리 모두는 그 전설을 계승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또 그 환상을 덧댄다. 뒤돌아 보면 허구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그 전설을 계승한다. 이 시로 시작한 시인의 시들은 어느 하나 절창이 아닌 것이 없다. 한 생애를 구술한 것 같은 느낌. 사랑했던 남편과의 사별로 끝맺는 시는 하나의 일대기 같다. 청춘으로부터 시작하여 반려자와의 이별로 끝을 맺는 시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이다. 그러나 시인의 삶은 그 이후로 더 이어졌다. 자신의 나라가 침략했던 나라의 글을 배우고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러나 자신보다 한참이나 먼저 자신의 나라가 가둔 곳에서 생을 마친 "순결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의 시를 번역한다. 


윤동주의 시다.  윤동주는 자신의 시가 자신을 죽인 그 나라의 시인의 언어로 재탄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의 그 삶 자체가 하나의 감동의 텍스트로 다가온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벚꽃을 보고 내가 왜 마냥 기뻐할 수 없었는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았다. 그것이 이 시인의 언어여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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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3-23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흉내낼 수 없는 blanca님의 글..이 느낌^^좋다고밖에 저는 언어가 짧아서^^;;


마음을 콕 집어 표현해낸 글을 발견하거나 기억해냈을 때, 보호받는 느낌 받을 것 같아요.

blanca 2022-03-24 09:46   좋아요 1 | URL
시집으로 참 오랜만에 감명 받았어요.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을 때 바로, 이거다! 라는 느낌 참 좋죠.

stella.K 2022-03-24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숫자를 세게 만드는 게 있죠. 저는 언제부턴가 울엄마가 하는 김장과 만두와 김밥과 호박죽을 몇번이나 더 먹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안하냐고 묻기도 했는데 지금은 눈치만 보거나 아예 힘드니까 사 먹자고 해도 씽긋도 안 해요. 앞으로 몇번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lanca 2022-03-24 13:24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댓글에 ˝울엄마˝라는 표현이 너무 좋네요. 저도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내가 지금 보고 듣고 만지는 것들도 유한하다고 생각하면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와요.

잉크냄새 2022-03-24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도 떠났구나‘ 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을 기억해주시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장례.영결식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시인 사후 지인들에게 직접 배달된 미리 써둔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왠지 시랑 묘하게 이어지는 느낌이라 적어봅니다.

blanca 2022-03-24 20:51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자기 최후를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숙연해집니다.

2022-03-24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4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봄은 깊어 시와서 산문선
나쓰메 소세키.다자이 오사무 외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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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아이들이 연상되는 구절.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맑은 것도 흐린 것도 미처 다 못 보고 죽음을 맞게 되는 아이들을 생각한다. 다자이 오사무가 ‘바다’를 소재로 쓴 글의 도입부에 코끝이 찡해진다.

도쿄의 미타카 집에 살던 무렵에는 매일같이 근처에 폭탄이 떨어졌는데, 나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이 아이의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진다면, 이 아이는 결국 바다라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구나, 하고 생각하니마음이 괴로웠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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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책을 나는 이십대에 처음으로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다시 읽는 내용은 마치 처음으로 읽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분명 올드하거나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설정들이 있다. 그럼에도 그 시대로부터 지금 얼마나 진보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을 정도로 여전히 시의성을 가진 작품임에 분명하다. 무책임한 알콜 중독자 아버지, 실질적인 가장으로서의 억척스러운 어머니, 그 어머니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쌍둥이 이모. 이십대 중반의 여주인공 안진진은 자신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할 것으로 보이는 남자와 자신의 아버지와 닮은 면을 지녔기에 또 다른 고달픈 삶을 예고하는 듯한 남자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는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양귀자 <모순>  작가노트


모든 인간은 모순적이다. 그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필연적 모순성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안진진의 선택이 가지는 양면성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와 이모가 쌍둥이로 삶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설정 또한 이 모순의 형상화의 일환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전부를 그 이면의 삶을 판단하거나 심판할 수 없다. 그 복잡미묘하고 모순적인 내면은 타인들의 일면적인 해석으로 함부로 요약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는 선택과 나의 언행과 나의 삶은 일치하기를 바라지만 그 또한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생명의 모순이니까.
















<모순>이 너무 좋아서 양귀자의 작품들을 찾아 읽게 됐다. 세월이 한참 지났음에도 여전히 어떤 파격을 지닌 작품이다. 역시 이십대의 여성이 주인공이고 그녀가 유명 남자 배우를 납치하고 세상에 선포하는 자기 선언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극단주의적이고 노골적으로 보인다. 다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의 여성의 소외에 대한 발언은 여전히 울림을 가진다. 다른 단점들이나 한계를 뚫고 이 작품이 가지는 무게는 거기에서 나온다. 언제나 소극적이었던 여성 인물들, 삶과 사회와 남자에 순종적이거나 타협했던 캐릭터를 정면에서 부수어 버리는 그 시원하고 극적인 주인공의 모습은 분명 어떤 쾌감을 준다. 주인공이 남성적 폭력에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대응한 점과 경제적 약자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착취의 당사자가 된 것은 이야기의 모순으로 지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대를 뛰어넘는 두드러지는 장점이 빛나는 이야기다. 
















제목만으로도 예견이 되는 이야기다. 여기 이곳에서도 두 늙은 여자가 가질 인상과 무게는 어떤 한계와 편견 안에 갇힌다. 하물며 극한의 알래스카에서 부족들이 두 늙은 여자를 버린 것은 그리고 그 두 여자가 생존해 나가는 것은 어떠한가. 살라고 버린 것이 아니고 존중해서 헤어진 것이 아닌 것임을 알고 시작하는 살아내기는 고통의 여정 그 자체다. 인간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들이 과연 살아남을 가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은 처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존하고 부족들은 그들에게 돌아간다. 이 아이러니한 결말은 우리가 이 시대에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뒤집는다. 반드시 쓸모 있어야 하고 젊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그 당연한 불편한 명제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전제로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그 틈바구니에서 소외되는 자들의 존귀함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시대에서 읽혀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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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3-17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닿는 내용 가득해서 이 글도 너무 좋고 양귀자의 모순도 관심있던 책인데 꼭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blanca 2022-03-17 14:11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또 다른 차원에서 해석되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일단 아주 재미있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답니다.

페크pek0501 2022-03-17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순>을 오래전 읽었어요. 흡인력 있던 책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소망한다~>도 읽었어요. 양귀자 님은 그 시절엔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것 같아요.
남자 영화배우를 납치해서 가두고 연극을 하게 하는 게 둘 중 어떤 소설인가요? 이게 기억에 남아요.
그때 소설 속 영화배우가 안성기, 를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죠.
그 소문을 들어서인지 읽는 내내 안성기로 생각하고 소설을 읽었었죠. ^^
옛 소설을 다시 찾아 읽어 보고 싶네요. ^^

blanca 2022-03-17 19:00   좋아요 1 | URL
아, 페크님 말씀하신 건 <나는 소망한다 내가 금지된 것을> 이에요. 아, 안성기였어요? ^^;; 누군가 모델이 있을 것 같다는 심증은 갔지만 안성기인지는 몰랐어요.

페크pek0501 2022-03-18 09:33   좋아요 1 | URL
그 책이 나올 당시 남자 영화배우 톱스타는 안성기 님이 1위였거든요.ㅋㅋ

라로 2022-03-18 15:0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이 인용하신 글은 페크님의 칼럼 내용과 비슷하군요!!^^
 

위대한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정말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이방인>의 뫼르소, <레베카>의 레베카, <혼불>의 강수. 작가들은 그런 인물들을 무에서 그저 만들어내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작가에게 숙명적으로 오는 걸까. 어느 쪽이든 언어로 인물에 혼을 불어넣고 질감, 양감, 색감을 부여하여 독자 마음에 파고드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와 몰입을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천하의 미시마 유키오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소설가이다. 책상에 앉아 있다. 공기 중의 질소와 산소를 합성해 어떤 약품을 만드는 사람처럼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엇인가 원소를 추출해서 그것을 문장으로 고정한다. 이런 일을 벌써 십수 년 계속하는데도 아직 기술에 기복이 있어서, 쉽게 써질 때도 있고 쓰지 못할 때도 있다. 

-미시마 유키오 <문장독본>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의 밀도와 강도, 아름다움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문장독본>에는 일본 문학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문학작품들의 문장의 특색과 장단점을 미시마 유키오의 예리한 시선으로 분석, 비교, 종합하여 문학 장르별로 이상적인 문장의 전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 특유의 감각적이고 섬세한 미문들만으로 충분히 읽는 재미가 있다. 흔히 떠올리는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편견은 그가 의외로 수많은 문학작품을 제대로 읽고 최대한 거리를 두고 중립적으로 판단, 평가, 취합하려는 기본 자세에서 깨진다. 끊임없이 스스로의 쓰기를 의심하고 교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발견도 놀랍다. 과거의 작품들을 부끄럽다고 자평하는 대목도 그렇다. 그를 정치적인 관점에서 떼어 놓고 글쓰기 장인으로만 평가한다면 배울 점이 많은 작가다. 


















실비 제르맹의 소설 속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페르소나주>는 도저히 창조하지 않고는, 쓰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는 필연적으로 오고야 마는 그 소설 속 인물들 '페르소나주'의 숙명에 대한 명문이다. 그 인물들은 이미 작가의 내면 속에 잠들어 있다 용암처럼 분출되고 만다. 이 지경에 이르면 작가는 무조건 써야 한다. 대단히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책이다.


우리 의식으로부터 생겨난 각 등장인물은 이제 새롭게, 아니 전혀 다르게 태어나길 소망한다. 언어로 태어나기를, 언어로 펼쳐지기를, 언어로 호흡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스스로 표현되기.

그렇다. 텍스트의 생을 원하는 것이다.

-실비 제르맹 <페르소나주>


미시마 유키오가 <문장독본>에서 그런 인물들의 표현을 위한 문장 자체에 집중했다면 실비 제르맹은 이 인물들의 필연적인 탄생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에게 작가의 운명은 다분히 숙명적이다. 우리 안에 가라앉아 있는 페르소나주들은 결국 자기 표현의 경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작가는 그들의 소망을 충족시켜 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간다. 그것은 특권이기도 하고 때로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이 '탄원자'들을 내칠 방도가 그들에게는 없다. '텍스트의 생'을 요구하는 '이방인'들에게 작가는 복종하고 복속한다. 우리는 그 흔적을 따라가며 읽는다. 읽는 일은 종이 위에 누운 그 생을 줍는 일이다. 그렇게 사는 일은 입체적으로 확장된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단 하나의 생이 아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여기와 저기를 아우르는 삶 속에서 우리를 통과하는 시간들. 그 안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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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3-16 2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다니자키 준이치로/나츠메 소세키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 작가들 작품 생활 중에 <문장 독본> 같은 책을 출간 할 정도로 단순히 글쟁이를 넘어서 한 세대의 작품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고 글쓰기 내공이 탄탄하다는 사실에 감탄을!!

실비 제르맹 프라하 거리~ 밤의 책 만 읽었는데 이 책 페르소나주! 찜 ! 👆^^

blanca 2022-03-17 08:07   좋아요 1 | URL
미시마 유키오는 제가 상상한 바로는 오만하고 편협한 군국주의자의 모습이었거든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고 이 책에 나타난 바로만 본다면 겸손하고 자기 성찰적이고 유연하더라고요. 좋은 작품들에 대한 분석도 정말 좋았어요. 곧 소설 쓰기에 관련한 책도 나온다니 기대됩니다.

페크pek0501 2022-03-17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은 소설로, 레베카는 영화로 봤어요.
미시마 유키오는 다른 책을 읽었어요. 에세이였어요. 금각사, 라는 소설도 읽었는데 이 작가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님의 페이퍼에서 제가 읽은 작가가 거론되니깐 반가워 댓글을 씁니당~~ㅋㅋ
요즘 나오는 책은 별로 읽은 게 없어서 모르는데 예전에 나온 책이 등장하니 제가 할 말이 생기네욤.^^

blanca 2022-03-17 19:50   좋아요 1 | URL
레베카 영화 보셨군요! 금각사 맞아요. 저는 아직 못 읽어 봤어요. 요새는 자꾸 예전에 읽었던 걸 다시 읽게 되네요.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 같아 저의 빈곤한 기억력에 놀란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