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사서 읽어요? 책을?" 

옆자리의 일잘하고 키가 크던 대리는 나를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몇 번이나 되물었었다. 알라딘의 택배 사원이 부지런하게 왔다 간 자리는 일순간 어색했던 기억이. 그는 책은 사서 읽기에 너무 아까운 것이라도 되는 마냥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봤었지. 

"그만 좀 사라. 그만 좀." 

아부지는 이제 책을 둘 곳도 없다며 내가 시집가고 얼마 뒤 나의 책을 상당량 처분했다는 소식을 동생편에 알려왔었다. 

"다 팔고 기부하고 그렇게 갈거야. 걱정마." 

서울로 이사 올 때 결혼하고 2년 동안 사모은 책이 또 두 개의 책장을 차지하자 괜히 미안해서 이사오기 전 거의 다 기부하고는 근처 도서관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무섭게 빌리고 읽고. 그러다 보니 책값이 굳었다. 빌려 읽다 보니 또 그것도 재미없으면 안읽어도 부책감도 안들고 나름대로 책을 왜 사서 읽냐고 반문했던 그 대리의 심정에 공감이 일부 갔으나.... 그러나.... 

결론은 남는 것이 없었다. 갑자기 읽었던 책이 너무 보고파서 찾으면 빌려 읽었다는 사실에 절망했고, 빌려 읽다 보니 괜히 리뷰도 쓰기 귀찮고, 목록마저 메모해 두기 귀찮으니 박완서 샘의 책을 거의 다 읽은 것 같은데 무엇을 읽었는지, 아니 내가 과연 읽긴 읽은 것인지 도통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책은 그래서...한달에 오만원 내외의 예산을 정해두고 보관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로만 책장을 채우고, 소설은 되도록 중고샵을 이용하는 것으로 원칙을 정했으나....매달 십만원이 또 넘어가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또 채근하기 시작한다. 엄청나다, 엄청나. 둘곳이 없다. 빌려가서 가져오지 않기 시작한다. 마치 그것이 애물단지라 치워주고 싶은가 보다. 택배 사원은 아예 인사를 한다. 빈 코너에 책은 탑으로 승화되고 있다. 

그래도 나는 꿋꿋히 책을 사는 것이 당당해지는 그 날을 꿈꾸면서. 그네들에게 안락하고 폼나는 집을 지어주는 날을 고대하며 오늘도 책을 산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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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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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많은 현상들에 때로는 내가 관찰자로서 때로는 내가 당사자로서 반응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 같은 단순한 사람들은 나에게 그 현상이 무관할 때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당사자가 되었거나 흥미를 일으키는 요소가 있을 때에는 그저 그 현상이 나의 개인에게 미치는 소소향 영향에 질식하여 질질 끌려다니다 생을 마감하기 일쑤이다. 

그래서 더 현명한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조우할 수는 없다지만 그것을 책으로라도 해야 그나마 생의 마감 시점에 적어도 인생에 속았다는 열패자로서의 늦은 자각이 오는 것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를 만난 것은 늦었지만 행운이었다.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이 마치 액세서리를 하듯, 수전 손택을 자신의 글들에 때로는 어설프고 조악하게 덧붙이는 것은 그녀가 그녀 자체로서 브랜드화된 고급 문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그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격이 조금은 높아진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비약일까? 그녀가 그렇게나 거부했던 이미지화와 왜곡된 은유의 중심에 때로는 그녀가 놓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그녀 자신이 실제 암을 두번이나 극복하면서 암에 비대하게 덧붙여진 사회의 잔인한 은유에 저항하고자 한 데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에 출판된 것은 후에 새로운 판본을 준비하면서 후기 형식으로 덧붙이려고 하다 거의 동등한 수준의 저작이 되어 버린 <에이즈와 그 은유>와의 합본이다. 사실 그녀는 이 둘이 겹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하나 상당부분 겹치는 내용과 관류하는 공통의 흐름이 있는 것 또한 한계라면 한계이겠다. 또한 그녀는 이 둘이 문학적 성과물로 평가 받기를 바랬다고 하나 이 저작이 과학적 분석물로 평가 받은 부분에 대하여 무척이나 기분나빠했다고 한다.

일단 이 책이 그녀 자신의 암극복기에 대한 얘기가 될 거라 기대했다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그 부분에 묘한 상실감을 느낄 수도 있다. 누구나 적당히 관음증이 있어 그녀가 암을 극복하면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 지에 대한 내밀한 스토리가 조금은 노출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녀 자신 이런 자신의 스토리 개진을 지양한다고까지 고백하고 있고 지극히 객관적으로 수많은 사례들과 문학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개인의 감정의 배설로 귀결되지 않으려 노력한 점 등은 이 책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그러니까 꼭 사서 줄 그으며 읽고, 더불어 수많은 도서 목록까지 옆에 두고 메모해 두어야 할 만큼 진지하지만, 문체의 세련됨과 지적 편력의 고귀함이 책 전체에 흩뿌리는 고상함은 아름답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재미도 있다는 얘기. 그녀가 아름다운 까만 눈을 깜빡이며 조목조목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한 이미지가 환영처럼 주위를 에워싼다. 

요는 질병은 은유가 아니라는 점과 그런 사고방식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주장이다. 또한 이런 속박의 대상질병으로 19세기까지 결핵이, 그 이후로는 이, 더 이후로는 에이즈가 지목되었다. 결핵은 시간과 관련된 질병으로 삶이 빠른 속도로 진행하게 하여 그것을 돋보이게 하고 정화시키는 낭만성을 가지고 있다고 은유화되었다면, 암은 공간의 질병으로 지형학적으로 은유화되었으며, 육체의 질병이다. 암은 별다른 이해력이 없는 세포들이 증식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아닌 존재로 대체된다는 해석은 상당히 흥미롭다. 면역학자들까지도 신체의 암세포를 비자아로 표현한다고 한다. 과대망상이라도 걸린 듯한 이 세계를 단순화해서 인식하는 데에 암의 은유는 기여하고 있는 셈이라는 얘기. 결핵은 20세기에 이르러 그것을 따라다녔던 한다발의 은유가 산산이 쪼개진 채 광기와 암의 두 가지 은유로 들러붙었다고 한다.  

그녀는 치명적인 질병일수록 무수한 의미들에 시달리고 그것은 공포의 대상들과 동일시되가 마침내 이 공포들이 다른 것들에 부과되어 형용사적 어구가 된다고 설명한다. 특히나 암을 묘사하는 지배적인 은유는 전쟁의 언어로서 그녀가 가장 끔찍해 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실지로 그녀는 반전운동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상당 부분의 헤게모니가 사실은 군수 산업과 전쟁을 통한 민중의 압박 및 공포 정치에서 나왔다는 것은 소름끼치지만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수만 인지하고 다수의 대중은 그것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유린당해도 스스로는 주체적으로들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에이즈와 그 은유>의 서두에서 그녀가 내리는 은유의 정의가 날카롭다. 그것이-아닌-다른 것으로, 또는 그것이-아닌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부르느 것은 철학이나 시만큼 오래된 정신작용이며<중략> 

   
 

내 책의 목적 또한 이런 상상력을 부추기기보다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문학이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이루려 노력했던 일종의 의미 부여가 아니라 뭔가에서 의미를 빼앗는 것, 극히 논쟁적인 전략을 활용해 돈키호테 마냥 지금의 이 세계, 이 신체에 가해진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내 책의 목적이었던 셈이다.  

 
   

이 대목은 그녀의 질병으서의 은유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생각을 보여준다. 그녀는 의미를 빼고 해석에 저항하기 위하여 그 은유를 과감하게 공격한다.  

에이즈는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누군가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동성애자, 혹은 난잡한 성교자로서의 낙인이다.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만으로 때로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운나쁘게 감염되었을지라도 그는 아주 불쾌한 징조가 되고 만다.  

그녀는 또한 국가와 언론이 종말론적 사고와 그것의 전파에 탐닉하는 현상을 두고 최악의 각본을 애호한다는 사실은 통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공포를 지배하려는 욕구를 반영해 준다고 지적했다. 이는 작금의 신종플루 유행에 대처하는 한국 언론들의 자세와도 무관하지 않다.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그 공포에 대한 허구의 통제력에 대한 희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질병들로 인한 세계의 종말론까지 확장된다. 백지 상태의 출발, 이것은 강대국 (그녀는 자신의 조국을 지칭하는 과감성을 보이지만)의 대중을 압도하는 장악력에 대한 탐욕의 음모와 다름 아니다. 즉 사실 질병으로서의 은유 그 자체가 과학적 설명의 부재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하지만, 대중을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고도의 정치적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장치로 이용되었다는 얘기이다.

번역자 이재원의 번역도 유려하고 그가 말미에 덧붙인 도서 목록도 아주 유용하다. 그녀를 시작하기에 가장 그녀다운 문체와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 아닌가 한다. 적어도 입구에서 질식하여 그녀를 탐험하는 것을 저어하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음은 대중의 치졸한 관음증을 조망한 책 <타인의 고통>을 보고자 한다. 유한한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에 수동적으로 치여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그녀는 아픈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좋은 질료가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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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일송세계명작선집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김순진 옮김 / 일송북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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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의 단편선은 사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해설에서 인용된 <대학생>의 한 대목이 너무 훌륭했고, 현대의 잘 나가는 단편작가들이 사실은 다 그의 아류들이 되고자 한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얘기들에 혹해서 읽게 되었다. 

기대이상이었다. 재미없을 줄 알았다. 일단 번역의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 지점은 흥미유무의 판단의 경계가 되버리는 문제가 생기므로. 즉 허술한 번역은 반드시 흥미를 감하게 되어 있다. 어느 리뷰어가 번역자 김순진이 역시 체호프가 다닌 모스끄바 의대 출신의 소아과 의사로서 그 번역이 정말 탁월하다는 평을 해주셨는데 그 리뷰어의 의견은 전적으로 옳았다. <티푸스>에서 티푸스에 걸린 젊은 중위를 치료하러 온 의사의 말투에 대한 그녀의 표현은 비극적인 소설의 희화화가 어떻게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예증이다.  

"거럼! 거럼! 거럼!", "거렇지,거렇지......좋아요,총각. 기운을 놓으면 안돼!" <<중략>> "화내면 안 되죠...... 거럼! 거럼! 거럼!" 

19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농부들>과 <골짜기>와 <약혼녀>는 분량과 스케일이 중편이다. 특히나 <농부들>과 <골짜기>는 근 현대의 러시아의 농촌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리얼리티와 서사의 다이나믹함이 대단한다. 

전반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주인공들의 심리 묘사나 배경 묘사에 치중하는 정적인 어휘 놀음이라기 보다는, 문장 하나 하나가 주인공을 여러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삶을 앞으로 흐르게 하는 서사 중심이어서 지루할 새가 없다. 단 <굽은 거울>이나 <자고싶다> 같은 작품은 이런 서사에의 치중이 개연성없는 결론과 합쳐져 작위성이 조금 도드라진 무리수는 있다. 그는 감정의 표현을 섬세하고 자세한 설명으로 하는 대신에 주인공을 한 번 더 움직이게 하거나 배경을 변화시켜 부지런하게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그만의 방법을 쓴다.  

기억하고 싶은 작품은 삼류 작가 이반이 가족들에게 위세 떠는 글쓰기에 대한 유머러스한 묘사가 돋보였던 <쉿>과 열세 살 어린 유모가 주인집 아기를 돌보면서 졸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 비극적인 일을 저지르게 되는 <자고싶다>, 대학생들의 집을 떠돌며 그들을 수발하며 존재감 없이 슬프게 살아가는 가련한 여인의 얘기인 <아뉴타>, 한 사내가 모스크바에서 병을 얻어 귀향해 가난한 대가족 농가의 삶에 합류하여 적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부들>이다.  

뇌수 속에 콕콕 박아 넣고 싶은 대목들은. 

슬픔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이오나의 가슴을 찢고 그 슬픔을 밖으로 쏟아 낸다면 아마 온 세상이 잠길 테지만, 그의 시린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밝은 대낮에도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껍질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슬픔> 

그는 네 시까지 더 쓴다. 쓸 이야기가 더 있었다면 여섯시까지라도 썼을 것이다. 혹독하고 비판적인 눈으루보터 벗어나 혼자서,생명이 없는 사물들 앞에서 부리는 아양과 거드름이, 자신의 힘에 운명이 달린 작은 개밋둑 앞에서 부리는 전횡과 교만이 그의 존재에 소금과 꿀이 된다.<쉿> 

그는 생각했다. 과거는 현재와, 잇따라 발생하는 사건들의 끊임없는 사슬들로 연결돼 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이 사슬의 양끝을 본 것처럼 느껴졌다. 한쪽 끝을 건드렸더니 다른 한쪽 끝이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대학생>  

이 표현이 바로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해설에 인용된 표현이다.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파르르 떨리는 사슬의 끝이 보이는 듯한 이 표현. 추상적인 개념이 이렇게나 아름답게 시각화될 수 있다니. 

졸다가 깜빡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누군가 갑자기 어깨를 건드리거나 볼에 대고 숨을 내쉬기라도 하면 금세 잠이 달아났다. 몸이 마비라도 된 듯이 늘어지자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기어들어온다. 반대쪽으로 돌아누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면, 이번에는 가난과 사료와 값이 오른 곡물에 대한 떨쳐버릴 수 없는 우울하고 지겨운 생각이 맴돌았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인생은 이미 지나갔고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농부들>  

아, 잠들려고 전전반측하면서 이리 돌아눕고 저리 돌아 누울 때 사람들은 거대한 인생의 숙명을 생각했다 손에 집히는 자잘한 문제들로 고민했다 하며 세상 제일가는 철학자에서 좀스러운 생활인으로 진자처럼 왕복한다. 이런 통찰력이라니! 

다시 집 안은 조용해졌다.그러나 가족들 모두 언제나 잠을 잘 못 잤다. 성가신 일이 집요하게 모두의 잠을 방해했던 것이다. 노인은 등이 아파서, 할미는 근심과 악의 때문에, 마리아는 무서워서, 아이들은 가렵고 배가 고파서 제대로 잠을  못 잤다. <농부들>  

나도 잠을 잘 못잔다. 그래서 이 상황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노파는 하느님을 믿었지만, 그 믿음은 어쩐지 어렴풋했다. 머릿속 모든 생각들이 뒤죽박죽이어서, 죄악과 죽음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다가도 일상의 근심거리들과 가난에 마음을 빼앗겨 방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금방 잊어버리고는 했다. 

죽음은 부농들만 걱정했다. 그들은 부유해질수록 하느님과 영혼의 구원을 믿지 않았고, 지상에서의 마지막이라는 공포심이 들 때에만 초에 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다. 가난한 농부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농부들>

이 여인과 2층 방에서 함께 살게 되자 온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새 유리를 끼워 넣은 듯이 환하게 밝아졌다. <골짜기>  

아, 이런 표현은 체호프만 할 수 있겠지. 

태양은 어느덧 빨간 금란으로 침구에 싸인 채 깊고 평화스러운 잠에 빠져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빨강과 보랏빛으로 물든 가늘고 긴 구름이 그 고요하고 편안한 안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골짜기>  

한 편의 시 같은 대목.  지금까지 노을을 묘사한 표현중 가장 탁월한 것이 아닐런지.  

고전은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한 번에 깨버린 이 책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진부한 근거를 머리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그 질긴 생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그저 넘기는 책장의 속도로 대답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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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보면 좋은데 내가 쓴 글을 읽다 보면 더없이 우울해진다.  

수많은 비문들, 잘못된 맞춤법, 논리의 비약(우격다짐), 어디서 생으로 들고 온 멋내기용 문장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대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무엇인지.  

점점 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는 이 답답한 느낌들. 

체호프의 단편들을 읽다 보니 내가 끄적인 모든 글들이 역겹기까지 하다.  

전공을 한 번 바꾸고 또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직종에서 5년을 헤매고, 이제는 그것마저 때려치고 

앞으로 적어도 50년을 대체 무엇으로 일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갈지.  그저 벽이 턱하니 걸어 들어온 이 느낌. 

독서만 해도 그렇다. 활자를 읽고 있는 것이지, 잡식성으로 읽어댄 수많은 책들이 대체 내 몸 속 어디에서 흐르고 있는지 

알길이 없다.  눈만 피로해져 가고 지갑만 가벼워져 가는 것이 아닌지. 

한 숨 푹 자고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아기 말고 중학교 1학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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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하릴없이 인터넷을 쏘다니다, 사실은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평론에 인용된 체호프의 단편집을 어느 출판사 것으로 구입하냐 열심히 고민하다, 생각보다 재미없다는 평을 읽다가 정말 재미있는 얘기와 마주쳤다. 

바로 유명한 책들에 등장한 또다른 책들과, 잘나가는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을 동원해 추천한 책은 대체로 재미없다는. 

솔직히 여기에 아주 극렬하게 동의한다. 또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이 재미있는게 하루키의 책에 나온 '위대한 개츠비'가 참으로 지겨웠다는 데에 동의하는 글들. 나는 '위대한 개츠비'에 아픔이 있는 사람이라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책을 읽지 않을 것같다. 

때는 바야흐로 대학교 시절 내부 인트라넷 게시판 죽순이였던, 그러나 글을 올리지는 못하고 소심하게 리플만 달아대던 내가 영문학과 학생들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하여 올린 글을 읽고 리플에 '생각보다 지루하다던데요'라고 올린 글에 내 기준으로는 악플이 턱하니 붙어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쳇, '위대한 개츠비'가 지루하면 세상 지루하지 않은 책이 없겠네." 이런 내용이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늬앙스로 나의 리플을 비난하는 글이었는데 솔직히 그 어느 리플보다 기분 나빠짐을 느껴, 다시는 그 게시판에 리플도 달지 않았다는 소심한 기억이다. 

아무리 훌륭한 책도 그것이 소설인 바에야 재미 없어 책장 넘기는게 고역이라면, 그 책은 나에게 별로인 것이다. 그게 나의 지적 소양이 부족해 흩어진 지적 단편들을 체계적을 모아 체화하는 기술이 부족해서라거나, 인내심이 부족해 진정한 문학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재미없는 책은 싫다. 그런 면에서 나는 페터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 너무 힘들게 읽은 책이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고, '마농레스꼬' 같은 책은 겉표지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지금도 내가 왜 그 어린 시절 지루함의 결정체인 '마농레스꼬'를 그리도 고통스럽게 읽느라 방바닥을 굴러다녔을까 후회할 따름.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철저히 개인적 취향이라는게 또 재미있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세상에 이런 훌륭한 작품이 책장 넘어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재미있다는 데에 전율해서 주위에 강추하고 다녔다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으니, 나에게 재미있는 책과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책은 영원히 몇 개를 제외하고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소위 잘나가는 엣지 있는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는 데에서 오는 지적 교만에만 기대어 재미없는 책 추천하는 자들 나는 그들을 멀리하련다. 왜냐, 나는 단순하고 흥미를 추구하는 말초신경이 발달한 인간형이라 짧은 인생 재미있는 책들만 읽기에도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까.

요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가들. 읽지도 않고 검색만 줄창 해대다 언젠가 읽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나 재미없다는 평에 거북 목처럼 갑자기 목을 쑥 넣어버리고 마는. 체호프와 폴오스터와 레이먼드 카버. 잘난척하려고 읽어야 하는지 심히 고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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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09-2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호프는 정말 재미있구요. 재미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실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 민음사 정도가 무난하지 싶어요.

폴 오스터는 번역이 어려워요. 신경 집중해서 읽어야 하죠. 영어만 된다면, 원서는 정말 쉬이 읽히거든요. 재밌어요.

레이먼드 카버는 개인적으로 별로에요. 원서를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각각의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인 행위이죠. 어릴적 읽었던 책과 지금 읽는 책이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고요.

blanca 2009-09-20 21:36   좋아요 0 | URL
아이구^^ 하이드님 댓글이라니 넘 영광입니다.^^ 체호프 이미 질렀답니다.잘한 거 맞죠? 아,레이먼드 카버는 별로군요. 근데 폴 오스터는 꼭 읽어보려고 생각중이었답니다. '달의 궁전'부터냐, '빵굽는 타자기'부터냐가 좀 고민인데.번역 문제가 외서 읽을 때 제일 걸리는 문제인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경우 훌륭한 번역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었던 터라 더. 그래도 참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하고 상대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같은 경우 괜히 좋기는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