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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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첫 문장이다. 한때는 내 삶에 굴곡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삶이 그다지 유별나게 굴곡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나 다 그렇더라. 크고 작은 파문 가운데에 놓여 있다. 많은 서사를 품고 있는 삶은 이제 읽고 듣는 것으로 족하다는 조금은 안일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변화가 삶의 본질인데 나는 그 변화에 적응이 느리고 겁이 많다.

 

유한함,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떄가 있다.

-p.223

 

저자 리베카 솔닛은 알츠하이머에 걸려 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녀 관계는 어머니가 딸에 가지는 묘한 경쟁심으로 인해 따뜻하거나 교감을 나눈 기억이 없다. 그녀는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일까?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러한 범위로 한정되지 않는다. 생로병사, 사회적 가치, 연대, 공감, 사랑으로 확장해 나간다. 겁이 많은 나에게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는 그녀의 결심과 가족과 지인들의 투병, 죽음 앞에서 자꾸만 닥치지도 않은 온갖 상황들에 매몰되는 나에게 삶에 닥치는 그러한 고통들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그녀의 통찰은 너무 시의적절했다. 마치 리베카 솔닛은 나를 지금의 나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격려하고 세심하게 조언한다.

 

에세이의 한계는 자기 경험의 범위다. 그것을 넘어서기가 어려워지면 신변잡기로 오그라든다.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에는 분명 이 경계를 지워버리고 확장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이 돋보인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체 게바라의 혁명 전후의 삶, 프시케의 신화,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등의 이야기와 그녀의 목소리는 한데 어우러져 우리 모두가 삶에서 만나는 암초와 그 암초를 넘어서 꿈꾸는 것들과 시간 앞에서 소멸로 가는 길들에 대해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을 벼린다. 강요도 단정도 과장도 미화도 생략도 없다. 어머니와의 관계, 수술, 친구의 죽음 같은 그녀 삶의 이야기는 도드라지지 않으며 묘하게 어우러져 그녀를 설명한다. 그리고 읽는 이들도 그 이야기로 연결되는 패턴을 따라 함께 섞이고 확장되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야기를 읽고 뛰던 가슴이 좀 가라앉았다. 다들 그렇듯이 삶의 풍경은 다르지만 생로병사와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 소멸의 노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이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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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4-12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 글도 참 좋네요...
저는 레베카를 저만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했어요. 다시 한 번 읽고 싶어 원서도 구입했구요.
그녀의 이야기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슬픔을 담고 있죠. 그래서 위로가 되요^^

blanca 2016-04-13 13:38   좋아요 0 | URL
제가 지금까지 읽은 여느 에세이와 참 다르더라고요. 그 깊이와 넓이가 참 경이롭기도 하고...원서는 어떤 다른 감상이 느껴질 지 기대가 되네요.

짜라투스트라 2016-04-1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이죠. 그리고 이 글도 너무 좋네요. ^^

blanca 2016-04-13 13:38   좋아요 0 | URL
아, 벌써 다들 읽으셨군요!

무해한모리군 2016-04-1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지는 리뷰네요.

blanca 2016-04-13 13:39   좋아요 0 | URL
그저좋은모리군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가볍지 않은데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고, 한 편의 긴 서사시처럼 아름답기도 하고요.

안한샘 2016-04-1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일리지 어떻게 받나요
 

한때 취미 발레를 잠깐 배운 적이 있다. 거의 나와 비슷한 또래의 발레를 전공한 사람들이 가지는 그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취미 발레 교습임에도 열정을 가지고 가르쳤던 그녀들이 기억에 남는다. 목이 길고 선이 가녀리고 움직임 하나 하나에서 특별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 지친 나는 어울리지 않게 발레를 배우는 여자가 되어 피로와 스트레스로 뭉친 근육은 덤으로 풀고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세계의 그 매혹적인 경계에 잠깐이나마 발을 딛게 되었었다. 석달 천하로 끝나버린 그 기억이 떠올랐다.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통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주인공이 발레리나는 아니고 학창 시절 발레를 배운 경험으로 무용원에서 성인과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하는 발레 교습을 잠깐 맡게 되면서 떠오른 유년과 청소년기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특히나 주인공 예정이 무용원에 단체로 온 유치원생들이 발레복을 갈아입고 용변을 보는 일 등을 도와주며 그 아이들과 비슷했던 나이에 낯선 남자로부터 당했던 성추행의 아픈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읽기가 힘겨웠다. 아이들은 지극히 무력하다. 쉽게 자기보다 힘도 세고 상황을 악용하기 쉬운 성인들로부터 학대나 성추행을 당할 상황에 놓인다. 문제는 그러한 비극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조차도 주변의 어른들의 조력은 지극히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나 그것이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일어난 경우의 일일 때 그것을 은폐하고 축소하고 부정하려는 움직임에 아이들은 재차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기는 상처를 받게 된다. 많은 평범한 겉으로는 지극히 상식적인 어른들이 정작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외면하고 싶어했다. 비겁해진다. 그러면 아이는 그러한 기억을 가진 자기 자신조차 부정하고 믿지 못하게 된다.

 

진실은 대부분 편하지도 편리하지도 조용하지도 않다. 뼈아프고 시끄럽고 불편한 경우가 많다. 어떤 관성으로 밀고 나가고 싶어질 때 마치 과속방지턱처럼 '타닥' 걸리는 소리에 주춤하게 되기도 한다. 그냥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자란 예정은 치유받는 감동적인 대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발레 교습을 받았지만 연결된 발레 동작을 구사하지 못하는 예정이 그랑주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이 그녀 안에는 부정되고 억압되고 은폐된 채로 있다.

 

미완인 것처럼 느껴지는 결말이지만 진지한 질문을 어렵지 않게 하는 이야기가 혹시 나도 그러한 방관자적 어른이 되어 가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 보게 했다. 상처 받은 아이는 상처 주는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아이를 구해 주는 지켜 주는 어른이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장일 것이다. 그 성장의 길목에서 방황하는 예정의 이야기의 여운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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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박완서의 자전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그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읽다 말다 결국 못 읽고 말았다. 우연히 다시 그 책을 읽게 되었다. 어릴 때는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전쟁의 참상 아래 가족들의 생존기가 이제 한 문장, 한 문장 다 절절하게 와닿았다. 차마 읽는 즐거움을 논하기도 미안할 만한 그 버석거리는 이념 밑에 놓인 사는 문제들의 묘사가 형형하다. 우리 말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노련한 손맛이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버리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도 맞춤한 시간의 골이 있는 듯하다. 너무 이르면 안 만나느니 못하다.

 

 

 

 

 

 

 

 

 

 

 

 

 

 

 

 

거꾸로 다시 작가의 유년 시절을 그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는 중이다.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자연과 어우러진 찬란한 작가의 유년시절이 샘이 날 정도로 부럽다. 이게 과연 어떤 느낌인지 나는 영 알 길이 없다.

 

 

어른들은 한창 바쁠 때였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윗도리를 안 입거나 아예 고추까지 내놓고 사는 아이들의 맹꽁이처럼 부른 배 위로 참외 국물이 줄줄 흘러 그 위로 파리가 성가시게 엉겨 붙으면, 개울로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었다. 우리집 뒷간 가는 길에 건너야 하는 실개천은 뛰어들 만큼 깊지는 않았지만 개울가에 당개나리가 한창이었다. 뒤란 안팎의 살구나무, 앵두나무, 돌배나무가 다 꽃이 진 뒤여서 주황색 꽃잎에 자주색 점이 박힌 당개나리의 만개 상태가 유난히 화려해 보였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중

 

뒷 이야기를 미리 알고 읽는 과거의 아름다운 찰나들이 곧 사라질 것임을 알기에 더욱 아련하다. 엄마의 자랑이었던 우등생에 의젓한 박완서의 오빠는 후에 전쟁 중 부상을 겪고 힘겹게 투병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 놓은 채 무력하게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늦게서야 태어난 첫 사촌 여동생 명서의 구슬 같은 모습에 어른들이 흥겨워하는 모습도 후에 명서의 죽음으로 갑절은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가 그 당시로서도 남다른 학구열로 자식 교육에 열성을 다했던 엄마를 따라 서울로 왔다 방학 때면 안식처로 자리했던 그 따뜻하고 아름다운 고향 박적골은 분단으로 인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곳이 될 것이다.

 

가끔 예전의 사진들 속 모습을 보면 미래를 알지 못하고 그 시간의 구획에 갖혀 지냈던 모습들에 아연해지기도 하고 안타까워지기도 한다. 생로병사를 떠안고 흐르는 시간의 무게 아래 묻히지 않을 것이 없다. 이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살아서 자신의 유년과 청년기를 회고했던 작가 또한 이미 고인이 된 터이다. 화자는 떠났다.

 

너무 예쁜 벚꽃이 이제는 자주 슬프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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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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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감옥 실험으로 명성을 얻은 심리학자 필립 짐바도르는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는 것은 나쁜 사과가 아니라 나쁜 통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삶에 도덕적 준거를 들이대어도 비교적 떳떳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운이 좋게도 바로 나쁜 사과 옆에서 그것의 부패를 목격하거나 나쁜 통에 함께 짓이겨 들어가 고통스러운 윤리적 결단의 순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의 고결함은 또한 그 순간부터 발휘되기를 기다린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숭고한 시간의 시험 앞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의 마치 오류 같은 띄어쓰기에 멈추게 된다. 문법적 규칙을 넘어서는 붙여쓰기에 따라 읽다 보면 어떤 흐름과 시간성이 밀려온다. 이것은 비범한 시간이다. "그가 나에게 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로 그 시간성은 펼쳐진다. '그'는 '나'와 '경주'라는 여선배와 함께 했던 직장 동료다. 그리고 이미 그는 고인이다. 죽은 자와의 재회는 그 수많은 이해타산과 오해와 가식의 비늘을 벗겨내고 어떤 실재로 나아가는 데에 유리한 장치다. 그들이 근무했던 직장은 여성이 결혼과 동시에 퇴사해야 하는 불문율이 있었고 그 앞에서 이례적인 투쟁을 한 여직원이 밀려 나가고 빈 자리에 '나의 자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불평등 앞의 예외적인 남자였고 동기였던 여직원 경주는 그러한 그의 자리와 침묵을 상기시킨다. 셋은 함께 어울렸고 저마다의 그 불편한 윤리적 결단의 시점에서 '나'만을 남기고 그 결단에 몸을 던진다. 평범했던 그들이 해야 했던 그 처절한 선택은 공교롭게도 죽음과도 만난다. '나'는 그들의 고통의 바깥에서 '눈 한송이가 녹는동안'만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하려 하고 그것을 애도한다.

 

김애란의 <애도>는 그것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당사자들의 소외감을 구체화한다. 아득바득 모아 마련한 조그마한 아파트 안에서 해피엔딩은 없다. 대신 젊은 부부는 그들이 포기하고 감수했던 그 모든 것들의 무게를 감당했던  아이를 사고로 잃게 된다.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잘못 보내온 복분자원액이 사정없이 튀어 버린 벽을 새로 도배하며 하필 아내가 그 도배지의 꽃을 머리에 이는 형상으로 자신들의 자식 잃은 슬픔에 대한 타인들의 그 조롱과 무관심이 극화되는 장면은 낯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는 말은 상실이 내가 아닌 타인의 것이 될 때 그것이 결코 소통되거나 제대로 위무되지 못하고 썩고 이지러지는 것임을 자조한다.

 

손보미의 <임시교사>도 하나의 맥락이다. 그림 같은 중산층 집안의 베이비시터로 그 가족과 소통하고 그 가족의 상실과 불행까지 함께 공유한다고 착각하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내 주었던 중년의 '임시교사'의 결말은 결국 그 격의 없음의 거리에 아연해진 부부에 의하여 내쳐지는 것이었다. 위로와 소통의 통로는 때로 어떤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고 그 경계는 자기 내면의 철책이 되어 방어선으로 구축되는 것이다. 그것이 양방향이 되지 못할 때 감수해야 하는  것들을 여자는 그러나 자기 나름의 치유법의 방편으로 외면하게 된다. 쌉싸래한 이야기였다. "사는 건 다 그런 거지"는 많은 것들을 싸안을 수도 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기호의 <권순천과 착한 사람들>에서의 '나'와 황정은의 <웃는 남자>에서의 '나'는 묘하게 겹친다. 어떻든 여기에서 '나'는 작고 힘이 없는 사람들을 어쩌면 도와줄 수도 있었을 지점에 서 있게 된다. 같은 아파트의 사채업자의 집앞에서 힘들게 모아 어머니 대신 갚아준 돈을 돌려달라고 연일 시위를 벌이는 권순찬 앞의 소위 작가이자 교수인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의 옆에 서 있다 기절하는 노인에게 어깨를 빌려줄 수도 있었던 '나'는 분명 어떤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슬쩍 외면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남는 그 께름쩍한 기분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나름의 방법으로 찾기 시작한다. 아주 나쁜 통은 아니지만 이 통에는 소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이가 하필 내 옆에 있고 '나'는 그러한 시선이 일견 불편한 것이다. 한강의 <눈 한송이가녹는동안> 이미 다 벌어져 버린 일들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보다 잃어가는 중인 사람들의 옆에서 자신을 챙겨야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더욱 현실적이지만 그것이 향하는 비겁한 결말과 나름의 합리화가 가지는 한계에 답답하다. 이야기는 이미 끝나고 난 지점에서 짚어가는 게 더욱 쉬운 일이고 듣기에도 더 낫고 그 간극은 결국 요즘 세상에서 사람들이 도리어 이야기를 피하게 되는 불편한 지점이 되기도 한다.

 

조해진의 <사물과의 작별>은 그 한계를 응시한다. "사라졌으므로 부재하지만 기억하기에 현전하는 그 투명한 테두리"에 서서 어슬렁거리며 그 안으로 들어갈 것인지 거기에 머물 것인지 아예 바깥으로 물러나버릴 것인지는 언제나 우리들의 몫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관통하는 것 같은 수상작들이 놓치지 않은 그 경계의 무게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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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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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인공 계나보다 몇 살은 어렸을 때였다. 서울 집에서 신도시로 출퇴근하는 길은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출퇴근 경로와 반대여서 곧잘 자리가 나곤 했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씻고 지하철 빈 자리에 앉으면 젖은 솜뭉치럼 졸다 목적지 방송에 용케 뛰어 나가곤 했다. 매일이 똑같이 고단하고 때로 고통스러웠다. '생각'이란 걸 할 때는 자학하게 되었고 일요일 오후만 되면 마음에 먹구름이 밀려왔다. 행복하지 않은 생각들은 그것의 원인보다 그것으로 향하는 출퇴근 길에 더 또렷해졌다. 지하철이 들어오기 전에 때로 '사는 것은 지옥 같구나.' 라고 느끼고 그러한 생각에 멈칫 안전선 뒤로 물러난 일도 있었다.

 

오랜만에 그러한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였다. 이십 대 후반의 계나는 가난한 집의 장녀다. 그러한 배경 속 그녀가 흔히 연상되듯 가족 모두를 부양하거나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전적인 유형은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명한 금융 회사에 취업도 했으니 흔히 말하는 '삼포 세대'도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전형적인 청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녀에게는 직장이 있고 예의바르고 건실한 중산층 출신의 남자 친구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출퇴근 지옥철에 시달리며 느끼는 단상들과 직장 회식에서 부딪히는 일들에 대한 감상은 이미 다 나눠 먹어버려 더 이상 나눌 부분도 없는 사라져 버린 파이에 오늘의 젊은 아이들의 가지는 전반적인 비애감을 뿌리부터 공유하고 있다. 계나가 다른 것은 어떤 명쾌함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주하는 이곳에서 그녀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끝난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p.10

 

그녀의 결행은 대단한 명분이나 체제 저항적인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그 지점을 포착하지 못하면 이야기는 오히려 지나치게 가볍게 어그러진다. 호주로 떠나 그녀가 겪는 일련의 실패, 오해들도 거시적인 차원에서 비판하거나 그녀의 결단 자체를 방해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이야기다. 작가는 이 개인주의에 천착한다. 집단주의나 체제에 대한 거창한 해석이나 비판 지점에 대한 집착은 그것 자체가 폭력으로 다가올 만큼 작가 장강명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그것의 허위에 염증을 느끼는 듯하다. 젊음이라는 대물 렌즈 밑에 들어오는 것들은 어쩌면 가장 진솔한 속살들이다. 결국 누구나 그럴듯한 명분 아래에 각자가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 데에는 어렵지는 않지만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견디는 것들이 정당화된다. 때로 한국이 싫은 것은 국가라는 울타리가 든든한 방책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그 소소한 행복들마저 자본주의의 견고한 서열 아래 가능한 것으로 전락시킬 때다. 이 서열은 내가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들마저 구속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나뉘는 지점에는 분명 돈으로 추구 가능한 쾌락과 안정이 있다. 계나도 이러한 것들 앞에서 경쟁력 없는 자신을 조소한다. 그러니까 그녀가 다수가 추구하는 것들 자체를 상큼하게 외면할 수 있었다거나 사회가 주입한 그 지리멸렬한 가치들에 무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떠난 것은 일종의 도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처럼 계속 주저앉아 불평하고 불행해하지만은 않는다. 계나는 외부의 시선을 거두어 내면으로 향한다. 자신을 읽.는.다.

 

 

잘 읽힌다,는 것은 분명 문자 텍스트가 외면 받는 이 시대의 작가로서 무시못할 장점이다. 잘 읽히는 것이 어떤 심오함과 상충되는 지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깊이가 밀려나갔다고 해서 산만하지는 않다. 시종일관 경쾌한 리듬으로 우리가 순응하고 불평하며 견디는 사회 체제 바깥으로 뛰어 나가 시원한 서사를 구축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는 왠지 여기에서 언젠가는 꼭 들었어야 할 이야기인듯 반갑다. 그 날 그렇게 지옥철 아닌 지옥철을 기다리며 무서운 상상을 했던 내가 걸어나간 자리에서 불혹을 맞았다고 해서 내가 그 체제에서 탈출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다른 형태의 또다른 불평 거리를 주워섬기며 여기를 배회한다. 그러한 관성에 이러한 이야기는 날카롭게 아프다. 더 나아갔어야 한다고 생산적이고 체제적인 대안을 모색했어야 한다는 그 꼰대스러운 조언을 남발하기에 이 이야기는 너무 현실적이다. 사는 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당연히 들었어야 하고 당연히 결행했어야 할 일들이 신선하게 들리는 이 사회의 그 이미 결정되어 버리는 모든 것들에 일침을 가하는 가장 자기다운 방법을 작가는 잘 실행했다. 이 이야기는 왠지 자랄 것 같다. 조금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유연해지길 바라 본다. 그것은 나 또한 그래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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