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사람의 버킷 리스트에 에베레스트 등반 같은 것은 없다. 저질체력에 겁쟁이이니까. 무엇보다 새로운 상황이나 위기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지 못하는 편이니 더욱 그러하다. 그래도 이따금 내가 아는 이 세계 안에서 이렇게 맴돌다 죽는다는 것은 어쩐지 좀 억울하게 느껴진다. 겁나는 주저되는 무언가를 확 밀어젖히면 나의 지평은 더욱 넓어질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나 늙어가는 것과 죽음에 겁내는 게 좀 덜해질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세계는 우물 안에서 올려다보는 그 좁은 하늘이니 내가 우물에서 나온다면 탁 트인 하늘 아래 내가 두려워하던 그 모든 것들이 좀 하찮게 느껴졌음 좋겠다.

 

 

 

 

 

 

 

 

 

 

 

 

 

 

이럴 일은 없다. 내가 마흔 아홉에 몽블랑 둘레길을 걸을 일은 없다,고 지금 생각한다. 하지만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혹은 알함브라 궁전을 밤에 가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하고 싶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고 대리만족을 한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일을, 내가 두려워하는 그 나이에 해치워 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남자고 아동심리치료사로 외동딸의 아버지다. 이런 류의 많은 책들이 있지만 이 책에서의 이 남자는 좀 괜찮다. 부러운 점은 외동딸이 그가 원하는 대학에 무사히 진학해서 여장을 꾸릴 수 있었고 그 여행을 응원하는 아내가 있었고, 무엇보다 여행길을함께 할 직장 동료가 있었다. 나이 든 남자 둘의 우정이 부럽다. 고생스러운 길을 함께 하고 의견이 다르면 충분히 대화하며 조율하고 미래에 또 다른 여정을 함께 꿈꿀 수 있는 이러한 근사한 관계는 노력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정의 중간 중간, 마흔아홉이라는 나이에 경험한 삶과 남은 삶에 대한 조망은 쉰이 노년의 젊음이라 칭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이야기와 부합한다. 이제 죽음은 현실로 다가온다. 노화 과정의 필연적인 징후도 그러하다. 그러나 사십대보다 그는 더 느긋해졌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가 도보로 경험했던 몽블랑처럼 의외로 근사하다고 한다. 그가 걸어가는 바로 그 종착점에 대한 느낌도 그러하다고. 부정보다는 수용의 느낌이 더 강하다는 이야기가 다가온다. 그런게 진정한 의미의 성숙한 나이듦이 아닐까 싶다.

 

2주에 걸쳐 170킬로미터를 묵묵히 걸어 낸 두 중년 남자의 이야기가 담담하지만 감동적이었다.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도 길 위의 로맨스도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얌전한 여정인데도 다시 톺아보게 된다. 별다르지 않아서 그러한가 보다. 누구나 마흔아홉이 되고 누구나 그 즈음 유한한 삶 안에서 혼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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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6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반은 아니더라도 blanca님에게 어울리는 멋진 버킷 리스트가 있을 겁니다. ^^

blanca 2016-08-17 10:09   좋아요 0 | URL
저희 버킷리스트에는 제가 지금은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아마 cyrus님은 다 하실 수 있는 것일 거예요.
수영과 자전거. 죽기 전에 해얄 텐데 무섭네요.

cyrus 2016-08-17 12:33   좋아요 0 | URL
저도 물과 자전거를 안 좋아해요. 부끄럽지만 두발자전거를 못 탑니다.. ㅎㅎㅎ 세발자전거까지 타다가 두발자전거 타는 연습을 하지 못했어요.

2016-08-18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9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며칠 전 처음으로 내가 이렇게 영어 공부를 한들 얼마나 늘 것이며 이 나이에 이렇게 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은 회의감에 빠졌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원서를 설사 내가 영어 단어 오백 개 , 육백 개를 찾아가며 읽은들 그것을 읽기 전과 읽기 후로 내가 과연 '영어'에 더욱 다가갈 수 있는지,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쓴 그 아름답고 광대한 어휘를 나는 그저 짐작하고 이해하는 수준이지 죽었다 깨나도 기억해서 구사하거나 활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절망감.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 영어에 대한 열의가 팍 식어 버렸다. 스무 살에 눈을 반짝이며 다니던 영어 학원과 마흔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영어 단어장을 마치 처음 보듯 훑는 간극은 심연 같다.

 

 

 

 

 

 

 

 

 

 

 

 

 

 

 

 

그. 런. 데. 프리모 레비가 이러한 심경에 내 손을 들어주었다. 프리모 레비는 환갑이 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 위해 젊은이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경험을 묘사한다.

 

첫 수업부터 나는 스무살, 마흔살, 예순살에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히 서로 다른지 이미 깨닫고 있었다. 

- 프리모 레비 <고통에 반대하며>

 

정말 다. 르. 다. 효율도 열의도 무엇보다 그것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 스무살에 그 언어는 내가 정복 가능하고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마흔살 정도 되면 평생에 걸쳐도 그것이 내 본래의 언어 감각에 견줄 만한 수준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물러서게 된다. 무엇보다 그 언어를 원래의 언어처럼 살갗에 새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체감하게 된다.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꼭 효율이 전부는 아니다. 한계가 끝은 아니다. 프리모 레비는 좀더 자유로워지고 좀더 그 언어에 애정을 가지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예순살을 이야기한다. 잔소리하는 꼰대로서가 아니라 함께 배우는 학생으로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 시간의 소중함도 고백한다. 이것은 그 모든 한계를 인정하고 난 다음의 이야기라 무게가 있다.

 

서른다섯에 배운 운전은 분명 스물다섯에 운전을 시작한 사람과 달랐다. 지금도 나는 운전대 앞에서 겁쟁이가 된다. 경사진 곳에 평행 주차는 언감생심이다. 결정적인 시기는 분명 있다. 더 쉽게 더 빨리가 가능한 시기. 그러나 그 시간은 언제나 많은 것들로 붐벼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들은 후순위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후회, 회한은 훌쩍 시간이 흘러가버리고 그 부드럽고 생생하던 것들이 단단해진 후에라야 온다. 물론 또다른 여유와 참조점이 생기기는 한다. 하고 싶은 것들이 줄어드니 해야만 하는 것들 앞에서 담담해지기도 한다.

 

쉰이 훌쩍 넘은 분이 자전거를 시작하고 금세 타고 나간다. 나는 아직 젊으니 빨리 지금 자전거를 시작하라 한다. 과연 될까? 벌써 조로한 것일까.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체득하고 내 몸에 새겨 나가는 일이 이제는 조금씩 두렵고 피곤해진다. 환갑의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젊은 아이들과 배우려고 강의실에 앉아 있던 프리모 레비가 지금 이런 모습을 보면 가소롭다고 느끼거나 그럴 만하다고 느끼거나 이십 년 뒤를 상상해 보라고 독려하거나 할까?

 

덥고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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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8-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저도 겁이 좀 많은 스타일이거든요.
이대로 나이 먹고 늙으면 겁이 더 많아지겠지 할 것 같지만
막상 그 나이에 도달해 있으면 엇, 아니네. 괜찮네.
뭐 그런 것도 있더라구요.
그러면 반대급부로 용기가 생기기도 해요.
그러니까 나이들면 더 못할 거란 생각 버리고,
그 나잇대가 되면 그 나잇대 맞게 할 수 있는 일이 생겨요.
나이 걱정 마시고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 보고 싶은 일하며 사세요.
의지의 문제지 용기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인생 별 것 아니더라구요.ㅎ

blanca 2016-08-10 19:38   좋아요 0 | URL
아, 스텔라님의 댓글을 읽으니 안심이 돼요. 먼저 그 길을 가본 선배님의 고견이 확 와닿네요.
 

불륜은 분명 나쁜데 마흔이 훌쩍 넘은 중년의 스토너가 젊은 여자 강사 캐서린과 함께 한 시간은 그러한 기준을 빗겨간다. 스토너도 분명 아내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녀 앞에서 욕망으로 몸이 달았던 시간이 있었지만 이미 그의 결혼 생활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있는 한 그가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자와 직장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일은 분명 누군가에게 이해받거나 용인되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이별을 결심한다. 캐서린과 헤어지고 스토너는 훌쩍 늙어버린다. 그의 가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죽어버린다. 중년의 사내는 급격히 노인이 되어간다.

 

 

 

 

 

 

 

 

 

 

 

 

 

 

 

 

 

드문 드문 다시 <스토너>를 읽는다. 캐서린과 헤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스토너는 그녀가 완성한 책의 헌사의 이니셜을 통해 다시 그녀를 사랑했던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 대목은 언제나 가슴이 시리다.

 

'To W.S.'

 

둘은 많은 것을 공유했고 그 중에 학문적 성과를 함께 했다. 스토너는 캐서린의 논문에 이정표가 되어준다. 열정보다는 담담한 재발견의 시간이 그들의 사랑의 영토를 채워준다. 작별하고 늙는다. 늙다 죽는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처의 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입지전적인 일로 평가될지도 모르지만 그의 삶의 궤적의 촘촘한 결을 따라가지 않으면 그의 삶은 평범하고 때로 실망스러운 것으로 폄하된다. 한 사내의 삶을 작가 존 윌리엄스는 놀라울 정도로 사려깊게 따라간다. 그 자신의 자전적인 요소들이 곧곧에 편재하다 보니 이것은 한 사람의 삶의 연대기를 그저 엮어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때로 오해되고 이해된다. 그 누군가의 삶도 결국 따라가다 보면 한없이 아련하고 서글프고 아름답다. 그가 살며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들 밑에 가라앉는 것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고귀하고 소중하다.  그러니 소설은 언제나 죽지 않는다. 보여지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설득할 수 있는 장치는 이럴 수밖에 없다.

 

그냥 다시 읽다 보니 <스토너>를 누가 연기하면 가장 설득력이 있을까 혼자 이런 저런 캐스팅 작업을 하다 콜린 퍼스로 낙찰을 봤다. ^^:; 제시 홀에 입성하던 신입생의 풋풋한 연기까지 가능할 지는 콜린 퍼스의 지금 나이로 상상하기 힘들지만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로지르는 스토너의 삶은 콜린 퍼스가 충분히 잘 소화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캐서린 역이 잘 안 떠오르고 점점 건조해지고 냉담해지는 아내 이디스는 왠지 도도하고 귀족적인 기네스 펠트로가 떠올랐다.

 

이제 스토너가 퇴임을 저울질하며 암선고를 받는 말미에 이르렀다. 이제 스토너는 곧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 존 윌리엄스는 철저히 스토너의 시선으로 스스로의 죽어가는 과정을 그려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침표는 나에게 주어질 것이기도 하다. 이 남자의 삶은 갸륵했지만 무의미하지는 않다.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실패했고 학문적으로 성실하고 진지하게 열정을 쏟아부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끝까지 가르치고 싶었지만 병마 앞에서 좌절당했다. 그러다 마침내 홀로 죽게 된다. 모든 세부의 사항들을 개인적인 것들로 치환하면 커다란 도식은 우리 모두의 것과 닮았다. 끊임없이 시도하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사랑하고 헤어지다 마침내 작아져 죽을 것. 당연한 듯도 한데 이렇게 한 사람의 삶으로 형상화하면 자꾸 서럽다. <스토너>는 서러운 이야기다. 결국 서러워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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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6-08-0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이란 게 참 안타까울 때가 있는 것이, 이 여자다 (혹은 남자다)라고 생각해 결혼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이 여자가 아니라 저 여자인 겁니다. 이럴 때가 참 안타깝지요. 하지만 십년 넘게 잘 살아놓고 젊은 여자를 찾아가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관둬야지, 누릴 건 다 누리고 늙었다고 박대하는 거 아니겠어요.... 블랑카님 리뷰는 늘 재미와 깊이를 모두 느끼게 해줍니다.

blanca 2016-08-06 21:43   좋아요 0 | URL
다른 남자들의 불륜에는 다 부르르 떨면서 스토너는 아내가 아니라 이 남자한테 감정 이입이 되는 모순이 ㅡㅡ;; 작가의 저력인 것 같아요.

다락방 2016-08-07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헌사는 정말 뭉클하죠. 감사함과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게 아닌가 싶어요. 스토너가 좋은만큼 이 글도 좋으네요, 블랑카님.

blanca 2016-08-08 10:38   좋아요 0 | URL
언제 봐도 뭉클해요. 다락방님의 여행기 기다립니다. 여기는 정말 가마솥이에요. 흑

앤의다락방 2016-08-17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엔 엉엉 울면서 마지막페이지를 덮었던 기억이 나네요ㅜ 또 다시 읽고픈 책이었는데..
다시 읽어야지 하곤 실천하진 못했어요.
꼭 한번 다시 읽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답니다.
오랜만에 북플와서 이런 리뷰보니 정말 반가워요.
그리고 요즘 책읽기를 게을리 했었는데 다시금 불끈! 하게 하네요^.^

blanca 2016-08-18 15:13   좋아요 0 | URL
앤의 다락방님, 저는 이 책이 너무 좋아서 (서머싯 몸의 `면도날`이 베스트였는데 밀어내는 중) 원서로 천천히 둘을 같이 놓고 다시 읽었어요. 역시나 좋았어요. 그리고 작가가 어쩌면 소설을 가장한 자신의 내밀한 얘기를 완전히 고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심증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 완전히 만들어 낸 이야기라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싶은.

앤의다락방 2016-08-1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작가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읽다가 나중엔 작가의 이야기라고 믿게 되어버렸어요. 저만 그런생각을 했던게 아니었군요! 지금 blanca님의 댓글을 읽고선 제가 이때까지도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걸 알았네요. ^.^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당장!ㅋ

blanca 2016-08-19 13:25   좋아요 0 | URL
<아우구스투스>가 나왔다니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죽음을 가기 싫은 여행이지만 또 가고 싶어지는 그런 초조감으로 그린 대목에서 무릎을 쳤어요. 정말 그럴 것 같아요. 사랑도, 헤어짐도 죽음도 이 작가는 픽션이라는 장치를 뛰어넘은 것 같아요. 이미 넘어가 버리면 다시는 넘어올 수 없는..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 죽음을 앞두고 그가 그린 죽음을 다시 한번 읽고 싶어요.
 

몇달 전 가수 요조가 서점을 열기로 했다는 소식과 함께 동네 서점을 후원하는 프로젝트에 소액을 후원했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다. 약속했던 동네서점 지도 링크가 왔지만 챙기지 않았다. 대학가인 여기에도 동네 서점은 전무하다. 동네 서점은 이미 동네 서점이 아닐 거라는 체념. 지도를 나는 쓸 수 없을 테니까.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상용화되기 전의 유년기, 청소년기 친정 동네에는 버스 종점 근처 나란히 두 개의 동네 서점이 있었다. 그래서 언제든 책을 구경하러 갈 수 있었다. 사지 않고 나오는 마음은 어린 나도 불편했다. 머리가 벗겨진 주인 아저씨는 괜찮다고 의자까지 내어주었다. 그 괜찮다는 마음도 왠지 책을 사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미안했다. 그래서 어쩌다 아버지가 교보문고에 데려가 주면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마음껏 책을 둘러보고 한참을 머물러도 부책감이 없는 그 자유가 너무 좋았다.

 

아직 지은서점은 친정 동네에 남아 있다. 오롯이 지키고 있는 그 모습이 반갑지만 왠지 힘들어 보여 짠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 마음껏 책을 들춰보고 할인,적립금 혜택에 하루만에 배송받을 수 있는 온라인 서점, 대형 서점의 틈바구니와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 다수의 사람들을 잠재고객층으로 가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동네 서점을 열고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라딘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서평가 금정연과 책 얘기를 마치 사람처럼 머뭇거리며 친근하게 해서 자신의 소설보다 더 사람들을(나 포함) 사로잡는 소설가 김중혁이 듣고 옮겼다.

 

 

 

 

 

 

 

 

 

 

 

 

 

 

 

 

 

 

정말 <유어마인드> www.your-mind.com

 

독립출판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이 서점에 가려면 무려 오층을 올라가야 한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기대를 너무 안 하고 문을 열어 기대보다 잘 되고 있다니 다행이란다. 이 서점에 가면 책만 보다 사지 않아도 (물론 권장되는 상황은 아니다) 큰 부담은 없을 듯하다. 주인장이 쿨하다. 과잉 친절로 고객을 얽매지 않는다. 적어도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어설픈 커뮤니티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더위에 오층 계단을 밟아 이 서점을 탐방해 보고 싶게 한다. 너무 많은 관계과 형식적인 친절이 권장되는 과잉의 시대에 더위를 식혀 줄 듯하다. 주인장이 서점을 닫는 그 살풍경을 아직 상상하지 않음으로 이 서점은 건재한다.

 

 

 

정말 문학만 취급한다고? 고요한 서사가 있는 <고요서사> blog.naver.com/goyo_bookshop

 

해방촌 언덕에서 문을 연지 일 년이 되지 않았다. 편집자 출신의 주인장은 고즈넉하다. 한강 작가의 팬이었는데 강연회에 가서 인사를 나눈 후 우연히 정말 한강 작가가 이 언덕의 서점을 방문해 주었다. 재정적으로 유연하게 서점이 가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점을 연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한다.

 

 

 

만일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이러한 책들을 읽어준다면 <만일>

 

'기본적으로 인간답게 먹고사는 방식'을 테마로 한 인문 서적 전문 서점의 주인장은 단아한 인상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이 '만일'에 와서 많이 나갔다.

 

 

 

나를 위해 먼저 멈춘다, <일단멈춤> stopfornow.blog.me

 

여행 전문 서점은 내일도 문을 열리라는 보장이 없다. 주인장은 역시 여행을 좋아하고 자신을 잘 추스른다. 여행에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돌아오니 떠나고 머물다 그 다음을 섣불리 장담하지는 않는다. 자신을 잘 지키는 모습에 소설가 김중혁은 칭찬을 보낸다. 당연히 누구나 자기를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사는 일은 그러한 장력을 때로 허물어뜨린다.

 

 

아직도 건재한다, <한강문고>

 

한강문고는 망원동에 위치한 우리가 어린 시절 가던 바로 그런 중형 서점이다. 주인 할아버지는 깐깐하기도 하고 인자하기도 하다. 주로 문제집을 사고 시험이 끝나면 어린이 문고 코너를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최낙범 대표는 연륜 만큼 현 출판계와 시장에 대한 해석이 날카롭고 무게가 있다. 서점 뿐 아니라 자영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조언이 많다.

 

 

고마워요 <땡스북스>www.thanksbooks.com

 

홍대 앞에 있다는 소규모 서점의 성공적인 케이스로 회자된다는 <땡스북스>도 녹록한 사정은 아니다. 책판매만으로는 서점을 유지할 수 없다. 주인장들은 글을 쓰거나 북디자인을 하거나 각종 가외의 일들로 서점을 유지한다. 이것은 슬프지만 오늘날 자영업의 수익 구조를 여실히 보여주고 내일을 전망케 한다. 어떤 것을 표방한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는 복합적인 시대를 통과하는 나날들. '망설여진다면 하자'는 주인장의 신념이 서점의 성격을 보여준다. 부럽다. 진짜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는 것인지 변명거리가 많은 것인지 엉덩이가 무거운 많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을 무색하게 한다.

 

 

 

작은 서점들은 처절하게 분투하고 있었다. 마진율은 형편 없고 그마저 잘 팔리지 않는다. 조언을 하고 충고하고 간섭하려는 사람은 넘쳐난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자신을 알아가고 성장하고 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며 자본주의 이 시대를 통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조금 세속적이고 디테일한 얘기들도 부끄럼 없이 나눌 수 있는 건강한 모습이 눈부셨다. 김중혁 작가의 '천천히 잘 소멸하자는 건데, 우리는 비겁하고 품위 없고 비루하게 소멸해 가고 싶지 않으니까요'라는 말은 우리 모두의 가슴 밑바닥의 그것을 건드린다. 당연한 건데 당연하게 취급되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일본 서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들과의 이야기, 부록처럼 덧붙인 서점 용어 코너도 모두 이색적으로 좋았다. 서점 뿐 아니라 그 어떤 것을 시작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찰떡처럼 붙을 이야기들이 웅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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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6-07-3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좋아서하는 일은 처절함도 달큰한 향이 돌지 않을까. 글 잘 보았습니다-.

blanca 2016-07-31 10:03   좋아요 0 | URL
분명 어떤 포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얻는 힘이나 보람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요.

수이 2016-07-3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갱지님의 댓글에도 절대공감이고_ 잘 소멸하자는 김중혁 작가의 저 말도 좋네요. 그 어디에서건 좋아하는 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에게 든든한 응원을.

blanca 2016-07-31 10:03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으며 <야나문>도 떠올렸습니다. 야나문이 더욱 더 번창하기를 바라 봅니다.

마녀고양이 2016-07-3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사가 아닌 맘으로 서점을 운영해야 하는 시대네요. ㅠㅠ
저희 동네 서점도 하나 있는데, 교과서 중심으로, 참고서가 아니었다면 그 조차도 망했을 것 같아요.

슬픈 일이지요.

blanca 2016-08-01 09:55   좋아요 0 | URL
동네 소형 서점은 특히나 참고서 의존도가 높다고 하는데 이게 마진율이 너무 낮아서 전체 수익성에 정말 안 좋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저희 동네는 아예 서점이 없어요. 대학교 안에 영풍문고가 있었는데 그마저도 철수하고 다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거리에 있어서 너무 아쉬워요.

transient-guest 2016-08-04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고민이 아닐까요? 책나뭄도 그렇지만, 자영업이 전반적으로 어려운 시대인데, 서점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래도 유명한 곳들이라도 이렇게 남아 명맥을 이어주고, 언젠가 다시 서점의 시대가 돌아올 때까지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책읽는 문화도, 작은 서점들이 개성있게 존재하는 문화도.

blanca 2016-08-04 15:09   좋아요 0 | URL
여기에 나온 작은 동네 서점들도 공통적으로 경영상의 어려움을 얘기해서 안타까웠어요.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면 섣불리 서점에 다가가긴 힘들 정도로요. 그럼에도 동네 서점의 명맥을 유지하고 때로는 이러한 어려운 와중에도 새로운 서점을 열고 운영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한편 부러운 점은 힘들긴 하지만 어떤 경지의 희열이 있어 보였어요.

2016-09-02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03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의 가치 판단 기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필립 로스는 이러한 사회적 금지, 금제의 틀을 흔들고 넘어서는 고독한 투쟁을 종종 그린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모두가 머무는 지점이 아니라 대부분이 떠나가고 홀로 그 변방을 기웃거리거나 경계를 넘어가야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1998년 여름, '부적절한 관계'라는 그 모호한 표현에 상상 가능한 모든 불순하고 불온한 것들을 우겨 넣었던 전대미문의  대통령 스캔들로 미전역이 달아 있었던 그 여름에 '나' 전업작가인 네이선의 이웃인 콜먼 실크의 이야기가 시작된 지점도 그러하다. 콜먼은  지역 대학의 고전학과 교수로 학장직을 맡아 정체된 대학에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고 학장직에서 물러나서도 강의를 하다 무심코 강의 시간에 던진 말 한마디로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이며 추방당한 일흔한 살의 남자다.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작가인 화자에게 토로하며 어느덧 지나온 자신의 삶을 복기하게 된다. 콜먼은 분명 자신의 출신의 한계를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지만 남은 생이 이제 거의 헤아려지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자기'를 찾는 여정을 걷게 된다. 거대한 체계와 고정 관념, 인습,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자기를 확인하고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대면하는 과정은 평탄하지 않다. 그것은 추방에서 시작해서 영원한 추방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다.

 

필립 로스의 인물은 그 어떤 인물도 설득력을 잃지 않는다. 심지어 대학 사회에서 콜먼에게 극렬한 반감을 드러내고 콜먼이 막상 떠나오고도 그가 대학에서 청소를 하는 젊은 여자와 만나는 것에 강한 분노를 드러내는 젊은 여교수의 시점을 따라간 이야기도 그렇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상류층 출신의 아름다운 여자다. 그녀는 콜먼과의 첫만남에서부터 묘한 긴장감과 부담을 느낀다. 그것은 어쩌면 이 나이든 정력적인 교수에 대한 끌림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결국 둘은 적이 되고 콜먼이 떠나고 나서도 그 대학의 젊은 여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된 후 그녀는 강한 반감과 혐오를 느끼게 되어 콜먼에게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품고 다니게 된다. 그녀가 그 편지를 부치지 않은 것은 후에 자신이 걷게 될 길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지극히 보신주의적인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녀가 마침내 분별 없이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게 되는 계기가 흥미롭다.

 

그녀는 남자를 그리워하고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여자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듯 보이는 젊은 교수는 로맨스를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여자이기도 했다. 필립 로스는 이러한 복합적인 어쩌면 당연한데 언뜻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그 양면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그려낸다. 누군가를 설명하거나 이해하거나 느낄 때 우리는 수많은 모순과 충돌, 불합리가 섞여 있는 그 우물을 헤치고 마치 표면의 그 잔잔한 모습을 전부인 것처럼 오해한다. 그녀는 뉴욕시립도서관에 책을 보러 갔고 마침내 근사한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는 약속이나 한듯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의 저자의 남편이 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상대로 로맨스를 상상한다. 하지만 이러한 막간의 공상은 갑자기 그녀보다 한참 어린 그 남자의 연인이 등장함으로써 깨지고 그녀는 항상 품고 다녔지만 결코 부칠 거라 여기진 않았던 그 콜먼의 사생활을 협박하는 그 비겁하고 치졸한 편지를 우체통에 던져 버린다. 그것은 그렇게 일어난 일이었다. 이 작은 사소한 로맨스에의 기대의 결렬로 그녀는 다시 작아진다. 이러한 일들. 어떤 일들은 너무나 어이없이 사소하게 일어난다. 어떤 말은 그 어떤 맥락 없이 성찰 없이 그대로 행해지고 망각된다. 필립 로스, 그는 징그럽게 이러한 면면을 놓치지 않는다.

 

나에게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일은...

바보처럼 <휴먼 스테인>1권을 중고로 두 권 주문한 것이다. 그래서 이후에 그녀와 콜먼이 어떤 대치극을 벌이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소한 일들로 이루어지는 게 삶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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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6-07-24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소설을 읽거나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솔직한 내면의 나를 들여다보면, 정나미 떨어질만큼 내가 징그러울 때가 있어요.ㅠ
마지막 어처구니 없는 일에 공감의 미소를~~^^

blanca 2016-07-25 09:1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일단 두 권이 된 1권 중 하나는 처분하고 2권은 근처 도서관에서 빌리던지 하려고요. 서울은 아주 거대한 찜질방 수준의 더위라 힘드네요...

비연 2016-07-2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는... 참 잘 쓰는 작가인데, 그 표현이 가끔 힘들 때가 있어서 잘 읽혀지지 않는 것 같아요.
<휴먼 스테인>은 사놓고 안 읽은 책 중의 하나인데, blanca님 글 보니 한번 읽어볼까 싶네요^^

blanca 2016-07-25 09:15   좋아요 0 | URL
비연님, 또 유독 이 책이 필립 로스의 그 거대한 만연체 문장 덕택인지 쉽게 읽히진 않더라고요. 그래도 다 읽고 나면 반드시 무언가 의미 있는 앎이 남을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