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평전을 읽고 있는데 이제 반이나마 왔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빡빡한 자간이 부담스러웠는데 평생 육체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했던 아들과 이름이 같았던 레이먼드 카버 아버지 이야기, 본인들도 채 다 크지 못한 채 부모가 되어 어깨에 지게 된 짐과 자신의 욕구, 욕망, 꿈과의 간극에서 헤매는 카버 부부의 분투, 아버지뻘의 존 치버와 대작을 하며 어울리는 모습, 이제 곧 성공의 진입로에 섰는데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무질서와 상처 속에서 허둥대는 모습, 그리고 너무 빨리 늙어버려 정작 카버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삶의 시계에서 중노년의 시점에 섰음을 알아차리며 남은 그의 짧은 아까운 생을 헤아려 보고 아쉬워하게 된다. 그는 쉰이 되어 죽고 결혼 생활 대부분에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며 레이먼드 카버가 작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에 거의 중추적인 역할 이상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조강지처 메리엔과는 헤어지게 될 것임을 그는 지금 알지 못한다. 부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때로 불화하고 폭력적이고 기이하게 비쳤지만 분명 외면적으로 다 풀어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결속된 관계 속에 있었다. 십대에 만나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을 부양하고 못다한 학업을 끊임없이 재개하려 애쓰고 남편의 글을 쓰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든 실현시키기 위해 이동, 또 이동, 포기, 선택했던 동반자적 역할은 부부 관계 안에서만 담을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나도 내가 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처럼 될 턱이 없기에 전체적인 조망 아래 삶을 진지하게 관찰할 수 없기에 지금 여기에서 내 삶에 얼마만큼 어떻게 와 있는지 알 수 없이 매일 매일의 일상과 과제에서 허우적댄다. 누군가가 조금 떨어져 나의 삶을 지켜본다면 수많은 나의 어리석음과 치기와 실수와 근시안을 찾아내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삶을 다 살고 나서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그러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때 왜 그랬었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할 것을, 조금만 더 참을걸, 조금 더 나아갈걸, 하는 회한과 아쉬움은 지금 당장을 사는 사람의 것은 아니다.

 

가족이 아프고 만성 위염이 도지고 아이 둘을 돌보다 지쳐 벼르고 벼르던 내시경을 했다. 전날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온갖 것들이 걱정됐다. 혹시 내가 여기서 끝이면 어떡하지? 그러면 아직 어린 아기는 어떡하지? 다음 날 아침 일찍 한산한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급하게 혈압을 재고 수면 내시경을 시작하려 약을 투여했다. 마취가 잘 되지 않아 눈을 계속 뜨고 있으니 간호사가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조금 더 약을 투입하는 듯한 움직임을 마지막으로, 간호사가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웠다. 위염이었고 의사는 아직 내가 젊다고 했다. 그 말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내가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위염이었다. 신입사원이 되어 제일 힘들었던 것도 위염이었다. 되지 않는 술을 억지로 먹다 보니 위염은 더욱 심해졌고 위벽이 다 헌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내가 과연 이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반문했다. 힘들면 마음이 아프면 영락 없이 나의 위도 시끄러웠다. 침대에서 일어나 어떻게 집에 왔는지 그 집으로 오던 길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약국에는 처방전이 아니라 병원 영수증을 내미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전날 밤 하도 오만가지 최악의 상황 속에서 헤메어서 그런지 어지러워도 좋았다. 그냥 그 안심되는 느낌이 좋았다. 나는 때로 너무 힘들지만 그래도 사는 게 좋다. 할머니가 되어 죽고 싶다. 할머니가 되면 그래도 죽음과 어느 정도 타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겠지만 어쩔 수 없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체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래서 사는 동안 이 모든 어리석음, 조급함, 치기가 다 소중하다. 무의미하고 실패할지라도 그게 어쩌지 못하는 삶인 것 같다. <대성당>을 쓴 카버의 삶도 그러지 않았는가? 정말 무언가,를 남을 것을 이룬 사람의 삶도 일상 속에서는 어리석고 슬프고 구태의연하고 구차한 면이 있다. 그는 점점 위대해져 전설이 될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술독에 빠져 있다. 이제 막 술독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그 어떤 성취보다 바로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순간을 맞게 될 시점으로 가고 있다. 그렇게나 사랑하고 지독하게 싸웠던 아내와는 헤어지고 다른 여자의 곁에서 임종을 맞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그가 몰랐다고 해서 그의 지금이 무의미하다고 어리석다고 폄하될 수 있을까? 모르는 것들 투성이, 어떻게 결론에 치닫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게 바로 삶의 묘미이기도 한 것같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된다. 이미 결론을 아는 이야기도 그곳으로 닿는 길은 미답인 경우가 많다. 처음과 끝이 아니라 그것을 연결하는 길에 진짜가 실재가 있는 지도 모른다는 느낌. 가을 하늘이 너무 예뻐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게 사는 것이라면 산다는 건 어쩌면 더 처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되면 꼭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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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9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10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0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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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 속의 노인은 원피스 차림의 아름다운 실루엣의 젊은 여인의 한쪽 팔짱을 끼고 다른 한쪽 손은 지팡이를 짚고 있다. 한쪽 눈은 흡사 감겨 있는 듯하고 성해 보이는 눈의 시선도 불안정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당당함이 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여인은 아마도 그의 마지막 연인이자 그가 그렇게나 소원하던 망각과 소멸로 가기 전에 결혼한 서른여덟 연하의 비서 마리아 코다마인 듯하다. "여름날의 더딘 땅거미처럼" 시력을 잃어버린 보르헤스는 그녀의 얼굴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경탄에 아연해하고 수많은 공적 자아, 대중, 성공을 하찮게 여길 줄 아는 여든의 보르헤스의 '말'이 있다. 그의 삶과 글쓰기에 관련된 공개 대화, 대담에서 그는 자신이 보르헤스인 게 싫다고까지 고백하기도 하고 언제 죽을 지 모르니 빨리 질문하라고 너스레를 떨며 재촉하기도 하고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하며 언어로 한 인간을 형상화할 수 있다면(물론 당사자는 반문할 것이다.), 가장 실제적이고 평이한 형태로 그 자신을 드러낸다. 거울, 미로, 글의 환상에 천착했던 보르헤스는 이제 땅에 내려와 자신을 해명하고 상찬하기보다는 깎아내리고 대신 그 자신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단테, 스티븐슨, 에밀리 디킨슨을 친절하게 이야기한다. 이미 위대해져 신화로 걸어들어가는 눈먼 작가는 소멸 앞에서 당당하고 겸손하고 성실하고 도덕적이고 회의한다. 바리톤의 그의 실제 목소리를 상상하며 때로 그를 도발하는 인터뷰어들의 여정에 동참하는 일은 그 자체로 보르헤스와 함께 사적인 만남을 갖는 듯한  환상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대중은 환상이고 각각의 개인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진실일 것이다.

 

나는 울적할 때-간혹 울적한 기분에 빠져든답니다-죽음을 커다란 구원으로 생각하지요. 어쨌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일어나는 일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는 죽음을 희망으로,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는 희망으로 생각하는데, 그 점이 의지가 되는 거예요. 내세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두려워할 이유도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지요. 우리는 그저 사라질 뿐이고, 그래야 하는 거예요. 나는 불멸을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그건 허망한 생각이에요. 아무튼 나는 개인적으로 불멸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해요. 그리고 죽음은 행복일 거라고 여긴답니다. 망각보다, 잊히는 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이게 바로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이에요.

-p.160

 

1975년 크리스마스, 인터뷰어 윌리스 반스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의 시위 속에서 보르헤스와 만찬을 함께 하고 마리아 코다마를 먼저 보내고 난 후 노시인과 바람 부는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그들은 밤새 걸어 새벽에야 보르헤스의 아파트에 도착했다고 한다. 보르헤스와의 구체적인 기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윌리스에게 노작가는 망각의 축복을 이야기한다.

 

2013년 윌리스는 이야기한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거나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은 평생 그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이는 보르헤스의 소망에 전적으로 역행하는 일이다. 그는 철저하게 잊히기를,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기를 희망했는데 끊임 없이 부활하고 있다. 그를 읽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를 인용하고 그를 계승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에게 그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과거가 되었고 현재에 미끄러져 들어온다. 죽음에 대한 담담한 그의 이야기는 얼마간 위안이자 희망이 되지만 그의 미래에 대한 반어적인 예시가 되고 말았다.

 

모든 불가능과 한계에 대한 이야기. 모든 확신에 반문하고 회의하는 이야기. 해답은 없음을 전제하는 이야기. 구원은 없음을 수긍하는 이야기. 보르헤스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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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9-0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늘 새겨 읽게되는 리뷰
반가워요. 보르헤스의 말, 담아갑니다. 가을이 와요. 이미 왔나요^^

blanca 2015-09-03 23:18   좋아요 0 | URL
덥다가도 문득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껴요. 유난히 힘든 일들이 많이 지나간 시간들이 이제는 그 만큼의 좋은 일들을 몰고 왔으면, 바라 봅니다.

AgalmA 2015-09-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대부분의 작가는 ˝소멸˝을 원하는데, 그건 인생 때문일까, 글을 쓰면서 도달하게 되는 종국의 필연일까 늘 가늠하게 돼요.
작가는 언제나 글이 구원이길 바랐으나 매번 실패라고 생각해서 일까 싶고요. 타인의 열광과는 상관없이.
불가능과 한계....좋은 작품들에선 언제나 그게 문신처럼 보이더라는.
카프카는 사라지길 원했으면서 왜 브로트에게 유작의 처리를 맡겼는가 의견이 분분하죠. 저는 작가가 작품으로 자살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댓글이 심란한 점 죄송합니다;


blanca 2015-09-04 06:54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는 유명세가 자신의 실재와 많이 떨어져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던 것 같아요. 아니면 그의 개인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인간인 이상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각이 불멸의 욕구와 절대적으로 어긋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글은 영원히 남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썼다는 것은 남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해요.^^

yamoo 2015-09-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당~~ㅎ


blanca 2015-09-12 15:02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아직 허룩하죠. ^^;;

희선 2015-09-20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잊히지 않기를 바라기도, 보르헤스는 사람들이 잊기를 바랐군요 라디오 방송에서 보르헤스가 책을 많이 읽어서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그 말 듣고 무슨 병이 있었던 건 아닐까 했습니다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게 돼서 힘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것을 느꼈다고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잘 들어뒀다면 좋았을 텐데...


희선

blanca 2015-09-20 22:36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의 실명이 유전적이었다는 건 아는데 정확히 어떤 질환에 의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듣기로 갈음한다 해도 한계가 엄연히 있으니까, 늙어 죽을 때까지 좋은 시력을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행운인 듯해요.
 

그 시점까지 나는 내 삶에서 모든 게, 비록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할지라도, 내가 희망하는 대로 또는 원하는 대로 어떻게든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 순간 빨래방에서, 그건 전혀 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내 삶의 대부분이 어지럽고 시시한 일로 이루어졌으며, 희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먼드 카버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중 

 

 

 

 

 

 

 

 

 

 

 

 

 

 

 

 

 

 

 

 

 

 

카버가 빨래방에서 가족들의 빨래를 안고 초조해하며 건조기 순번을 기다리는 순간 새치기를 당하고 느낀 단상이다. 카버는 언제나 가난했고 스무 살이 되기 이전에 이미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고 아버지 카버처럼 반생을 술로 고생했다. 이러한 게 단순히 카버적인 개별적인 그만의 신산한 삶의 풍경이었을까? 아니면 삶의 전반적인 풍경이 그저 카버 앞에서 순수하게 더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카버의 언어로 형상화된 것 뿐일까? 대체로 누구에게나 결국 삶은 시시하고 힘들고 예기치 않은 불운에 때로 얼굴을 가격 당하며 그렇게 버티며 나아가는 것일까? 그러다 늙음에 병마에 먹혀 자기가 미처 마침표도 찍기 전에 그냥 '끝'으로 사라지고 마는 걸까...

 

카버의 단행본에 실리지 않은 단편들의 끝은 여느 평범한 단편처럼 마무리되는 맛도 없고 오 헨리의 그것처럼 반전도 없고 다만 삶의 진실, "명쾌한 해답이나 엔딩은 주어지지 않는다"에 충실하다. 언제나 비극에 무방비이지만 쉽게 무릎꿇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에게 다가온 일들을 좌지우지하겠다고 섣불리 덤비지도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현실'이다. 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어제 생각했던, 혹은 몇 년 전에 들었던, 보았던 것들, 미래에 겪고 느끼게 될 감정들이다.

 

아껴 읽고 싶다. 노동자였던 그래서 일을 하며 술을 마시며 외동 아들을 사랑했던 아버지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이야기, 이제 '쓴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정열, 좌절, 자신의 삶, 아이들, 그리고 또 카버가 만든 많이 다듬지는 않은 날것의 이야기들. 병원 복도의 창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부모의 심정을 돌이켜 보게 될 줄 몰랐듯이 그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냥 산다는 것의 편린들이라 무심코 흘려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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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8-28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망하는대로,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불안해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강박이 되지요. 문득
요즘 제가 만나는 중3 아이가 떠올랐어요. 삶이란 것이, 원하는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도 포기하기 어려워요. ^^

아껴 읽고 싶다 라고 쓰긴 문구, 너무 좋아요.

blanca 2015-08-28 23:32   좋아요 0 | URL
지금도 아끼고 괜히 두고 그러는데 자꾸 진도가 나가네요. ㅋㅋ 중3... 코알라도 벌써 중3이라 하셨죠. 내가 열여섯이었던 시간들이 어제 같은데 정말 시간은 휙휙 지나가네요.

희선 2015-09-07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는 바라는 대로 될지도 모른다 한 적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때는 그리 길지 않은 듯해요 꽤 오래전부터 저는 사는 게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언제부턴지도 모르겠군요 시시한 일만 있고... 남한테는 시시해 보여도 자신한테는 그렇게 시시하지 않은 일도 있겠군요


희선

blanca 2015-09-07 11:21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 인간의 자유의지란 환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어릴 때는 구체적이고 자잘한 고충들을 매일 매일 해결해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이렇게 하는 데에 확신이 들지 않아 혼라스러웠다. 고작 마흔으로 가는 시점에서 그런 모든 것들에 익숙해졌다고 얘기하면 자만이 될 터이고 다만 적어도 그런 것들은 조금 실수해도 다시 해도 괜찮다, 정도의 심정이다. 다만 이제 내가 어쩌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덮쳐 올 때 내가 그것들을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하나의 헛된 바람이자 오만이 될 수 있다는 또다른 두려움을 배워가는 중이다. 삶은 가혹한 학교다. 냉정하고 가차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이미 어쩌지 못하고 세상에 나와버렸다. 그 힘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를 소멸로 데려가는 힘도 내 안에 내재되어 있겠지만 그것 또한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나도 늙고 주변 사람들도 늙고 때로 절망하고 넘어지고 병들고 그렇게 큰 흐름 속에서 그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한계, 그 종점을 항상 의식하면 어느 정도 슬프지 않고는 현재를 딛고 설 수가 없다. 마냥 즐겁고 마냥 꿈꿀 수 있던 시간들은 이미 내 뒤에서 삭아버리고 있다. 난 이미 중년이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현악 4중주단.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선율이 서로를 타고 넘는 그 흐름, 때로는 합쳐지고 어긋나고 멀어지고 다시 만나는 그 순간들의 명멸이 베토벤에 의해 만날 때 인생은 반드시 다 살고 나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온다. 베토벤은 이미 다 알아버린 것같다. 인생의 근저에 깔린 그 허무함, 헛헛함, 슬픔, 그런데도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연약한 시도들. 사람들, 만남, 사랑, 소통, 다툼, 이별.

 

25년 간 멤버들의 아버지뻘 나이의 첼리스트 피터가 이끈 4중주단은 그의 파킨슨병 진단으로 위기를 맞는다. 피터는 파킨슨병이 가져오는 그 모든 미세한 떨림, 퇴행이 연주자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약의 힘으로 병이 완화된다면 시즌 첫 콘서트를 베토벤의 현악 4중주곡 중 14번을 연주하는 고별 연주회로 하고 떠나겠다고 한다. 생의 종반부에 맞은 피터의 고난은 제2바이올린을 맞아 항상 제1 바이올린을 맡았던 다니엘에게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했던 로버트의 억압된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가 되고 홍일점 첼리스트인 아내 줄리엣과의 불화 등 나머지 멤버들의 내면에 침잠했던 갈등들이 불거져 나오는 증폭제가 된다. 잔잔했던 팀내의 분위기는 악화일로를 치닫게 된다.

 

영화의 한계는 인물들의 내면을 오고가는 생각, 느낌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추정해 낼 수 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면 그러한 한계가 이 영화에서는 교단에 선 피터의 학생들과의 교감, 이야기로 충분히 해소된다고 볼 수 있다. 노년의 거장은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14번을 단순히 연주를 위한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게 아니라 그 연주에 접근해 가며 당시 그것을 작곡했던 베토벤의 심상, 연주 당사자들이 그 어떤 휴식 없이 7악장을 연결해 나가야 하는 도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 들에 함께 다가가려 한다. 특히 T.S. 엘리엇의 평의 인용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베토벤의 그것과 만나 뭉근하게 녹는다. 모든 시간의 현재성. 시작과 끝의 그 경계, 그 간극 안에 있는 현재성. 과거도 미래도 결국 현재 안에 녹아 있다는 그 시간 안에 우리의 삶과 베토벤의 음악이 있다.

 

마침내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연주는 성황리에 마쳤을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삶과는 다른 할리우드식 서사에 그쳤을 것이다. 엔딩이 압도하는 대목은 나이 든 연주자들의 공연 안에 삶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엔딩. 피터는 어쨌든 성공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완수해 낸다. 모두가 아는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외가 예측할 수 없음이 삶의 본질임을 이 영화는 직시한다. 소멸과 퇴장, 늙음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것이 될 것임을 알기에 가장 잘 이야기해져도 우리를 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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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07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사람이 더 일찍 많은 것을 알아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그때는 그렇게 오래 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일지도... 모두 그렇게 짧게 산 것은 아니기도 하겠지만... 마지막은 눈물 흘리게 하는군요 끝난다 해도 그때까지 살았다는 것도 잊지 않으면 좋을 텐데, 편하게 끝을 맞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군요


희선

blanca 2015-09-07 11:23   좋아요 0 | URL
희선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면이 있네요. 아무래도 평균 수명이 짧았으니 깨달음이나 성숙도 어쩌면 더 빨랐을 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애들이 빠르다,는 면은 사실 성숙 차원의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1992년, 연년생 동생은 선물로 책을 사 주었다.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영화의 영상이 곳곳에 실려 있었고 작가의 원작과 그 영화의 대사가 혼재되어 있는 책. 에로티시즘이 잔뜩 깔려 있는 이야기였지만 왠지 헛헛하고 어딘 가에 진지한 무게 중심이 실려 있는 이야기였다. 여주인공의 양갈래로 땋은 머리와 아무렇게나 걸친 듯한 무채색의 원피스가 근사해 보였다. 그녀의 자유와 도발,아름다움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영화를 직접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더 선정적으로 느껴졌고 조금 더 지루했다. 그때도 역시 그 연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며칠 전 영화를 다시 제대로 보게 되었다. 출발은 성적 이끌림이나 호기심이었을지라도 결국 그것이 사랑으로 변질되었음을 깨달은 가망 없는 연인들이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고 각자 흐느끼는 모습이 서러웠다. 채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 같은 소녀는 남자를 떠나는 뱃전에서 그 남자가 멀리서 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그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배웅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불현듯 선상에 울려 퍼지는 쇼팽의 왈츠 속에서 그녀는 오열한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앳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허스키한 목소리의 노년의 작가가 된 그녀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남자의 전화를 받는다. 절망 어린 정사로 가득했던 그 어둑 어둑하고 길거리에 나앉은 것 같았던 숙소에서의 날들은 그녀 내부에 차곡 차곡 쌓여 발효하고 있었다.

 

 

 

 

 

 

 

 

 

 

 

 

 

 

 

 

 

 

소녀의 가족은 프랑스령 식민지 베트남에서 눈에 띄는 백인 가족이었다. 아편에 중독된 망나니 큰 오빠와 유약한 작은 오빠, 미망인으로 홀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절망과 우울을 오고가는 어머니가 주는 아픔은 그녀가 언제나 얼마쯤 슬픔에 잠겨 있게 했다. 어릴 때는 보이지 않던 나이 든 어머니의 항상 눈물에 젖어 있는 눈가의 주름들. 아들을 배웅하며 부둣가에 홀로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원작 소설에는 이러한 가망 없는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에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 "죽을 때까지 큰오빠는 어머니를 독차지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갉아 먹고 산다. 어머니가 가진 모든 희망, 기대, 물질들들 무참히 빼앗고 짓밟는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중국인 남자의 퇴폐적 애정, 돈, 절망에 기대어 사춘기 소녀가 마음 붙일 곳 없었던 가족에 대한 애증을 하나 하나 펼쳐 보이게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다. '자전적'이라는 말은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전부 다 모두 언어의 숨골에 가 닿아 한 인간의 내밀한 성장기를 폭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장들.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시제가 경계 없이 섞이고 '나'과 '그녀'와 '그'의 시선이 무람 없이 교차하는 데도 그리 불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그 모든 것이 질서 없이 혼재되고 교차할 수 있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언어로 걸러낼 수 있었던 작가의 저력에 기댄 바가 크다.

 

나는 낮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햇빛이 모든 색깔을 퇴색시키며 짓누른다. 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한다. 밤의 푸른빛은 하늘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늘은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에, 그 너머에 있었다. 나에게 하늘은 밤의 푸른빛을 가로지르는 순수한 광채와 모든 색깔을 초월한, 차갑게 녹아 드는 빛을 떠오르게 한다.

-p.98

"세상의 본질을 덮고 있는 모든 불투명함의 저편 "에서의 이야기는 언뜻 순수한 사랑이 아닌 욕망을 위장한 것처럼 보이고 삶에 대한 이야기가 스러져 버릴 덧없는 찰나에 대한 살풀이 같지만 그것은 순간 순간 늙어가고 죽어가고 멀어져 가는 존재의 몸짓의 그 생래적 무상함에 대한 섬세한 시선이다. 메콩 강을 건너가 버린 사랑은 그 사랑이 왔을 때보다 한층 더 깊어져 있고 삶 그 자체를 웅변하는 듯하다. 초반부터 시작된 노작가의 나레이션은 이미 늙어버리고 변해 버릴 소녀의 그 모든 것들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 소녀가 거기에서 만들어 나간 서사가 절대 무의미하지 않고 오롯이 버티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Y.A. 당신은 무엇에 몰두하죠?

M.D. 글 쓰는 일에. 비극적인. 다시 말해 삶의 흐름에 관련된 일이지.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그 속에 있어.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예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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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4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4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4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9-0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는데 거의 생각나지 않고, 그때 제대로 못 봤던 것 같네요 그런 책이 이것만은 아니기도 하네요 그렇다고 그런 걸 다시 다 볼 수도 없고... 게을러서 그렇죠 누군가는 여기 나오는 여자아이와 같은 나이 때 봐도 알지도 모를 테지만, 저는 몰랐네요 지금은 어떨지... 그렇게 된 배경이 있었군요


희선

blanca 2015-09-07 13:48   좋아요 0 | URL
저도 언뜻 스친 책을 나이들어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책도 아니 가독력도 나이를 먹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