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를 거진 다 보내고 나며 달라진 것은 책에 대한 마음가짐도 해당된다. 이제 다 소유하고 다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번 읽었다, 해서 '읽었다'고 단정짓지 말고 정말 단촐하게 소유하고 제대로 읽어서 내가 늙어 남은 사람들이 나의 책 처분으로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해서(물론 아닐 때도 있다) 읽는 것도 가지는 것도 처분하는 것도 조금 더 신중해지기로 했다.

 

얼마 전 고전에 대한 재미를 처음 일깨워 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처음 세 권을 다 읽고 덮었을 때에는 톨스토이의 필력에 압도당해 할 말을 잃을 정도의 감동이 있었는데 그 정도의 감동이 또 다시 오지는 않았고 대신 처음 읽을 때에는 놓쳤던 좀더 디테일한 면들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안나보다는 안나를 떠나보낸 그녀의 남편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의 정점보다는 그들의 사랑이 일상으로 가라앉으며 각자 겪게 되는 그 지루한 일상과 지리멸렬한 다툼들이, 레빈의 신중함과 검소함보다는 융통성 없는 면과 모순된 면면들이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톨스토이 그 자신이 평생 가진 것들과 가져야만 한다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했던 것 만큼 수많은 상충하는 인간들의 수많은 그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언행들이 대단히 핍진성 있게 다가왔다. 이것은 정말 죽은 이야기가 아니라 톨스토이 주변에서 살아갔던 인간들의 모습을 그대로 적어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생생해서 이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마다 그들 모두가 다시 일어나 그 비극적인 삶을 다시 살아내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톨스토이의 인간들은 우리 현실에서 쉽사리 만나는, 하지만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가당착, 위선, 위악, 자기기만, 고결함을 한데 모아 보여준다. 어제는 불우이웃 돕기를 이야기했던 사람이 오늘은 슬척 새치기를 하는 모습, 분명 물질적인 것을 포기하고 고결한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는데 눈 앞에 아른거리는 예쁜 옷이나 가방 앞에서 괴로운 마음이 나의 것이거나 그의 것이라고는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법이다. 언제나 옳은 사람은 언제나 고결하고 야비한 인간은 내도록 그러기를 저도 모르게 예상하고 바라기도 하는 게 조금 더 쉬운 길이니까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미묘한 지점을 톨스토이는 얄미울 만큼 잘 포착하고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대부분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거나 미워하기에도 적절한 인간형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이기도 하고 '그'와 '그녀'의 이야기다.

 

불륜에 빠져 아이와 남편을 떠나고 마침내 자신의 삶에서마저 떠나 버린 안나는 그래서 미워하거나 비난하거나 전적으로 이해하거나 사랑하기 힘든 인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애써 담담하게 가장하는 다소 냉혈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남편 알렉세이의 마음 속에서는 한없이 많은 번민과 고통이 오고 간다. 사랑의 열정에 호응했던 젊은 귀족 브론스키는 그것이 서서히 스러져 가는 자리에서 점차 자신의 것들을 기억해 내고 찾아 나가며 결과론적으로 안나를 고문하게 되지만 그러한 모습 또한 사실적이다. 사랑을 택했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추구하고 받들여지는 가치를 전적으로 등지고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의 모습에서 톨스토이는 단선적이거나 단편적인 삶의 경로는 실제적이지 않다는 점을 간파하여 보여준다.

 

이러한 것들이 두번째에서야 겨우 보였으니 나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이 책들 어느 하난들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듯하다. 다시 읽으면 또다른 것들이 보이고 놓쳤던 그 수많은 것들이 하나씩 돌아올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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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0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세번은 읽으라 하나봐요 .^^
읽을 적마다 뭔가 캐내어지는 기쁨 ㅡ

blanca 2015-12-10 14:07   좋아요 1 | URL
아, 한번 더 읽어야겠군요.^^ 사실 저는 기억력 자체가 별로 안 좋아서 두번째 읽어도 영 처음 읽는 느낌 받는 책도 종종 있더라고요...

[그장소] 2015-12-10 19:48   좋아요 0 | URL
그런 책이 좋은것 같아요..전혀 새롭다고나 할까요.
분명 읽었는데 ..억울하긴해도..또 새로운!

물고기자리 2015-12-09 1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는 걸 참 좋아해요. 새로운 이야기도 물론 좋지만, 같은 이야기 속의 재발견에서 독서의 진정한 기쁨이 느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해엔 오직 재독만 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아직 읽지 않은 책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완전한 실천을 할 순 없었어요ㅎ 소장하고 있는 책의 양도 되도록 일정량을 넘기지 말자며 해마다 한 번씩 정리하고는 있는데 좀 더 나이가 지긋해지면 세 번이상 읽었던 책들만 간직하겠단 생각도 해보고 있어요. 그때 제게 남은 책들을 보면 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ㅎ

blanca 2015-12-10 14:12   좋아요 2 | URL
아, 물고기자리님은 이미 이런 생각 하셨군요! 그런데 또 책 욕심은 덜어지지 않는 게 나이들어 자그마한 서재라도 확보해 다 잘 꽂아두고 톺아보고 싶은 소망이 있어서요...

[그장소] 2015-12-10 19:52   좋아요 1 | URL
아 ㅡ세번이상 읽은 책만 ...그런데 책은 있으면 늘 꺼내보게되요.어떤 확인이든 ㅡ뭐 그런 걸 필요로해서든 ..작은 계기로든 ..늘 손닿는 곳에 두는게 관건인것 같아요..

후에 ㅡ자신의 모습을 책으로 돌아본다는 생각은
참 근사해요~^^

물고기자리 2015-12-10 21: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설은 부분만 재독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완독하진 않더라도 부분부분 늘 확인하는 책들이 있어요. 그마저도 아닌 책들은 미련 없이 정리하는 편이고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눈도 침침해지고(상상해보니 슬프네요ㅜㅜ) 더 이상 독서랄만한 행위를 못 하게 될 때가오면 읽고 또 읽어서 마치 나의 이야기 같아진 책들만을 제 곁에 두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이런 생각을 왜 하게 됐냐면요, 책을 좋아하시던 제 아버지께서 어느 날부턴가 가져다 드리는 책들을 더 이상 읽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젠 읽는 게 힘들어지신 거였어요. 그리고 책장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책들을 보니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의 일기 같은 그 책들은 언젠가 제가 가져오려고 해요..)

그래서 전 어떤 시기가 오면 읽지 않은 책엔 미련을 거두고 재독을 하며 마지막까지 곁에 두고 싶은 책들만을 간직하겠단 생각을 해봤어요. 언젠가 더 이상 읽는 것이 힘들어지면 만져보고 넘겨보기만 해도 좋을, 정말 내 것 같은 책들로만 제 책장을 채우고 싶어서요. 그래서 지금도 채우고, 비우고를 계속해서 하는 것 같아요. 잘 비워야 잘 남길 것도 같거든요.. 제 머릿속도 그래야 할 텐데 말입니다ㅎㅎ / 근데 블랑카님의 글에서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blanca 2015-12-11 13:09   좋아요 1 | URL
ㅋㅋ 좋죠. 왠지 집에 초대한 기분이 드네요.

cyrus 2015-12-10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 까레니나》를 두 번 완독하시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예전에도 블랑카님의 서재에서 이 소설에 관한 글을 본 것 같아요. ^^

blanca 2015-12-11 13:08   좋아요 1 | URL
톨스토이가 이야기하고 싶은것들을 인물로 표현하려 할 때 좀 지루하거나 거친 대목들이 있긴 한데 또 그게 톨스토이의 매력인 듯도 해요. 러시아 작가들 특유의 색깔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십 대 때에는 그냥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기에 바빠서 읽거나 곱씹을 여유를 못 낸 게 너무 아쉬워요. 그런 점에서 cyrus님이 참 부럽습니다...

[그장소] 2015-12-10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ㅡ아버지의 일기와도 같은 책들 ㅡ이라니..
참 좋네요..제가 살던 곳은 어릴때 수해가 잘 나는 곳여서 그랬는지 아버지는 책을 모아두지 않으셨는데..어디서오는지 몰라도 많은 책들이 보이다 자취를 감추곤 했어요.
그걸 안계실때 ㅡ몰래 훔쳐보는게 제 낙이었고요.
아마 나중엔 신변 정리를 늘 해오신 거란 생각을 하게되었지만 그게 참 서운했어요.아무것도 남긴게 없어서요.

제가 일찍부터 모아온 책들은 이제 아껴도 책등이 바랬어요.
이십년 넘는시간..가까이 같이 다녀서..^^
해가 더할수록 단상들이 빼곡해..함부로 버릴수도 없죠.
누굴 빌려주지도못하고요.
나중엔 제 딸이 보면 싶어요.저는..


희선 2015-12-11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옛날에는 책이 별로 없어서 읽은 책 여러 번 보고 외우기도 했겠습니다 톨스토이 책도 그러지 않았을지... 지금도 자신이 좋아하는 책 여러 번 보는 사람 있겠네요 저는 아직 이 책 못 봤습니다 언제 볼 수 있을지... 세권이나 되니 마음먹고 봐야 하겠네요 첫번째, 두번째 볼 때 다르겠죠 그런 것을 느끼고 살아야 할지도 모를 텐데, 지금 세상은 책이 많네요 곁에 두고 보고 싶은 책을 찾은 사람은 기쁘겠습니다(블랑카 님은 그런 책 있을 것 같네요) 저는 아직 모르겠어요


희선

blanca 2015-12-11 13:11   좋아요 1 | URL
이러다 또 갑자기 막 다 새로 읽고 사모으고 싶어질 지도 모르겠어요. ^^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에릭 포토리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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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1일 날이 저물 무렵, 라 로셸 북쪽 어느 구역에서 아버지는 엽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p.7

 

이 책의 첫문장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저자 에릭 포토리노의 체험이다.  평생 남을 돕는 일에서 보람을 찾던 물리치료사 일마저 뇌경색 휴유증에 의하여 그만둬야 했던, 그리고 마침내 개인파산까지 했던 늙은 아버지는 아들 셋에게 나란히 유서를 남긴다. 그 유서를 전해주는 책임은 자신의 성을 주었던 큰 아들 에릭에게 남긴다.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왜 '은밀하게'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러한 표현은 부모와 자식 간에 상용되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세상에 가장 드러내 놓고 천명할 수 있는 애정이 아니었던가. 비교적 성공한 언론인이자 작가의 아버지였음에도 끝내 스스로 잔인한 방법으로 죽음을 택한 사내에 대한 복기는 왜 작가가 그러한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었는 지를 고백한다. 그의 아버지는 생부가 아니었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에릭은 아홉 살이 넘어서야 수줍게 들어서는 새아버지를 맞이하게 된다. 여기에 끊임없이 언론에서 회자되는 가혹하거나 파렴치한 계부와 계모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대척점에 오연하게 서서 생명을 준 아버지보다 더 아들의 인생을 세심하게 관리하고 보호하다 때 맞추어 망설이지 않고 독립시켜 보낸 훌륭한 아버지가, 심지어 배 안으로 열 달을 품어 낳은 나의 아이들 앞에서 스스로를 부끄럽게 작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모가 서 있다. 자전거로 인생을 가르쳐 준 아버지. 운동을 마친 아들의 근육을 손수 다 마사지하며 부드럽게 풀어주는 아버지. 생부를 찾아 만나겠다는 아들을 운전해서 데려다 주는 아버지.

 

당신은 마음속으로 나를 사랑했다. 마치 사물들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낮게 속삭이는 것처럼, 애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 사랑은 너무 강해서-명명백백한 사실의 힘-당신은 그걸 동네방네 떠들어대지 않았을 것이다.

-p.123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아들의 뒤에 든든하게 지켜서서 그를 응원하는 자리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서서히 홀로 죽음을 준비했던 것같다. 아들은 점점 약해져 가는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것들을 끝내 실행하지 못하고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아버지는 죽는다. 그와 쌓았던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들, 애정, 신뢰는 시간에 허물어져 간다. 견딜 수 없는 망각에서 작가의 언어로 구원 받은 젊고 정력적이고 가장 아버지다웠던 모습들은 주춤 주춤 눈물겹게 아련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때로 짓이기고 묻어버린다. 거기에 대항하려는 글쓰는 이들의 언어들이 뭉클하면서도 때로 무력하게 느껴지며 가슴에 스민다. 대체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빛나게 생동하던 젊은 아빠의 눈망울은 움푹 패이고 아들의 자전거를 밀던 든든한 뒷배는 정작 자신이 도움이 필요할 때 목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스러져 버렸다. 어쩌면 작가가 미처 하지 못한 그 수많은 눈물 스민 감정의 편린들은 아버지를 둔 그래서 언제나 불효를 했고 불효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식들 모두에게 이미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도저히 눈물 없이는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다.

 

아버지를 '그'라 칭하며 객관화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다. 이미 '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려고 들어선 순간부터 우리 둘의 삶은 혼재되고 우리 둘의 이야기는 섞인다. 아무리 자식이 성인이 되어 독립하여 우뚝 선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그들과의 연결은 숨을 다하는 날까지 우리의 삶 속에 스민다. 그러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시간, 노화, 병마, 죽음, 앞에서 점점 종말로 다가가는 그 삶의 경로에 동행하며 내 자신의 이야기를 미리 각오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언제 들어도 자꾸 가슴이 먹먹해진다. 삶에서 사랑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덧대어질 때 비장해진다. 끝이 있는 이야기에 영원을 꿈꾸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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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2-0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버렸어요.ㅠㅠ 블랑카님의 명품리뷰ㅠㅠ;; 어제 책을(다이어리를-_-;) 주문하면서 넣었다 뺏거든요. 다시 주문해야겠어요. 눈물없이는 열수도 닫을 수도 없다니. 두렵습니다ㅠㅠ;

blanca 2015-12-05 13:01   좋아요 0 | URL
달밤님, 저 공교롭게 요새 읽는 책마다 그렇게 눈물 쏙 빼는 내용이라 자꾸 가라앉아 고민입니다. 다이어리. 이미 새 다이어리 증정 받은 거 사용중인데 알라딘 거 보고 흑심이 들어 그것 또한 고민이에요.

2015-12-06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7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영하의 <읽다>를 읽다 보니 자꾸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특히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 그의 팟캐스트처럼 그대로 책 대목을 군데 군데 인용해 주는데 마치 담담한 그의 어조로 다시 책을 읽는 느낌. 무심코 지나쳤던 문장들이 돋을새김처럼 확 눈에 들어온다. <읽다>를 읽다보면 정말 읽고 싶어진다. 분명 자꾸 듣다 잠이 드는데도 그의 팟캐스트 업데이트를 기다리게 되는 것처럼.

 

 

 

 

 

 

 

 

 

 

 

 

 

 

 

전혀 상관 없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는다. 서른 초반에 다시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된 초입에 있던 그 책에서 제목에서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부각됐던 안나 카레니나보다 그녀와 큰 관련성도 없지만 이야기 내내 커다란 중량감을 가지는 레빈이라는 사내와 아내에게 배신 당한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에게 초점이 옮겨 갔다. 특히 레빈에게는 톨스토이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자기 외모에 대한 열등감, 내부에서 싸우는 여러 가지 대의, 이상,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고뇌, 첫사랑, 농민, 육체 노동에 대한 이상화,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천착. 유독 레빈을 묘사할 때 톨스토이는 어떤 거리감 조절에 실패하고 그 실패가 오히려 이 남자에 대한 애정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여러 가지 사회적 이상, 대의, 죽음의 허무감에서 허우적대다 연정을 품고 있던 어린 아가씨 키티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아내고 방방 뛰는 그의 모습이 참 귀엽게 그려져 있다. 갑자기 적대적이었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경험. 바로 여기까지 읽었다.

 

앞으로 레빈은 키티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만 다시 그가 고민했던 주제들로 돌아올 것이다. 열정이 훑고 간 자리에는 다시 살면서 겪는 자잘한 고민들과 고뇌들이 제자리를 찾아 비집고 들어온다. 안나는 끝내 브론스키와 지리멸렬한 관계를 유지하다 죽음을 택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모든 결론, 즉 스포일러를 알고 되짚는 읽기는 근경과 원경을 적절한 거리감으로 가늠하며 더 찬찬히 그들을 스쳐간 감정들, 풍경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재독이 가지는 의미는 또 남다르다. 결론을 궁금하게 하는 초조감이나 재미는 덜하지만 이미 완성된 풍경 안에서 그려 가는 저마다의 삶의 경로를 관찰하며 느끼는 아기자기한 즐거움이 크다. 그래서 인물들을 더 친근감 있게 마치 살아 있는 주변 인물들처럼 느끼게 되고 그들에게 이입하게 된다. 너무 빨리 헤어지기 싫어 붙들고 있고 싶어질 정도로.

 

 

 

동쪽과 서쪽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는지 일몰을 볼 줄 알았던 곳에서 뜬금없이 일출광경을 보게 됐다. 기다렸던 것도 아니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을 갑자기 보게 되어 얼떨떨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언어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 묘사했던 일출 광경의 문구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묘사된 일출 대목을 필사하기도 했었는데. 정말 그 광경에 맞닥뜨렸을 때에 떠오른 것은 필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 광경을 그대로 마음에 눈에 담기로 했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대체로 이러한 것 같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결론이 지어질지 모르고 걸어가는 길은 때로 두렵고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는 것같다. 다 알고 듣는 이야기 같은 인생을 직접 살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 말이다. 또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2016년 새로운 해가 뜨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렇게 이 풍경으로 갈음하려 한다.

 

다시 책을 읽고 또 쓰고. 그리고 라디오를 듣고 그렇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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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5-12-0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담 보봐리는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그 누가 뭐래도..플로베르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blanca 2015-12-09 14:34   좋아요 0 | URL
저는 고등학교 때 읽고 최근에 다시 민음사 번역으로 읽었어요. 그런데 역시 독서에도 어떤 적절한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한 문장, 한 문장 정말 적확하게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그게 전혀 지루하게 안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더라고요. 영화로도 개봉한다고 하니 더욱 기다려지지만 볼 수 있을지... 다시 제대로 읽을까 고민중이랍니다.
 

오늘 아침 그의 죽음에 대한 기사는 이러했다. 세계 최장기간 투병 메르스 환자 사망. 아래에는 추모 게시판. 혹여 그의 것일까 싶어 확인해 보지만 이것은 공과가 분명한 비교적 장수한 전직 대통령의 자리였다. 그의 죽음 앞에 망연하고 원통할 가족들의 심정이 상상되어 마음이 괴로웠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이 자명한 명제가 구체화될 때 그리고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어떤 회한이나 억울함이 게재되면 남은 사람들은 그를 제대로 떠나보낼 수가 없다.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수만번 복기되어 할 수 있었거나 했어야만 하는 일들은 끊임없이 들고 일어나 왕왕댄다.

 

네 살 아이의 아버지, 늦깎이로 새로운 분야 공부를 하고 직장에 출근했던 가장은 메르스 80번 환자가 됐다.메르스 초기 대응에서 많은 질타와 비난을 받았던 학습된 공포감은 암투병 중인 젊은 아버지 앞에서 과도하게 관료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이해할 수 없는 메르스 양성 반응과 음성 반응 사이의 자리는 제대로 된 검사, 치료에 소극적이게 했다. 간병인과 가족의 집중 케어를 받으며 이겨나가야 할 암투병은 격리병동에서 힘겹게 이어져 나갔다.

 

누구나 불확실성 앞에서 두렵다. 게다가 학습된 것이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여러 전문가들, 심지어 WHO에서도 이 환자의 메르스 전염력은 거의 없다,는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초기에 그렇게 했어야 할 행동이 하필 암투병 중인 이 젊은 아버지에게 가혹하게 발휘되었다. 가족들은 격리 병동에서 제대로 된 항암도 검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오늘 네 살 아이에게 돌아왔어야 할 아버지는 떠나고 말았다. 그는 이름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80번 환자로 마지막 환자로 언론에서 요약되었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시간들, 꿈꾸었던 것들은 저만치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잿빛 하늘 아래서 먹먹했다. 그 가족의 자리, 그의 자리, 질병관리본부,정부의 자리를 상상해 본다. 나의 대응은 어땠을까. 나의 자유의 권한, 나의 결정의 범위, 나의 재량을 넘어서는 자리에 정말 해야 하는 일, 진실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밀고 나갈 수 있었을까.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들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나는 그냥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밀려나가는 것일까. 이 모든 불확실성 앞에서 두려움과 비겁함을 때로 밀고 나가야 할 때가 있다. 그때를 놓쳐 버리면 이렇게 된다. 신중함은 이런 곳에서 발휘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메르스는 종식된 게 아니다. 그냥 단순히 한 줄로 80번 환자의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을 게 아니다. 그 뒤에서 놓친 숱한 것들이 정말 중시해야 할 국민의 생명과 안전, 존엄에 있었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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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애 2015-11-25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자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는 듯합니다. 기억하는 방법은 다시 이야기하는 거라는 것도 잊지 않으렵니다.

blanca 2015-11-25 23:14   좋아요 0 | URL
네, 아애님 말씀처럼 더욱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싶었어요. 유가족들한테 누가 안 되고 그 분을 추모하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는 게 되었으면 합니다...

헤르미온느 2015-11-25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jtbc에서 미망인의 울먹이는 음성을 들었어요. 아픈 사람들의 더 아픈 이야기를 어찌해야 할까요.

blanca 2015-11-25 23:16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저는 차마 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가족분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그분이 어떻게 힘들게 가셨는 지를 기억하고 들어주는 것만으로 미약한 의미나마 있기를 바라 봅니다.

웽스북스 2015-11-26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환자 사망, 메르스 종식. 이라는 워딩은 진짜 끔찍했어요 ㅠㅠ

blanca 2015-11-26 14:47   좋아요 0 | URL
.... 때로는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게 굉장히 두렵게 느껴져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7 어려운 대화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8 용기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목차를 본다. 마지막에 이르러 내용을 읽기도 전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그것은 힘들게 묻어버린 기억들을 들추어 낸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없는 세상을 논한다는 건 머리로는 상상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감내하기 힘들다. 늙어가고 기력이 떨어지고 더 이상 독립된 생활을 하기 힘들어질 노부모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우리는 쉽게 꺼내지 않는다. 진심으로 달갑지 않은 주제다. 저자 아툴 가완디도 이것이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주제일 수도 있다,고 시작한다. 더 많은 희망과 낙관을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생은 때로 과대평가되어 왔다. 그 자명한 유한성은 예술이나 우리가 소비하는 각종 영상들의 마디마다 활용되어야 할 일이지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시인 필립 라킨의 "결국 그들의 방문을 받지 않은 거리는 없다."<앰뷸런스>, 이 단 하나의 문장이 인용되어 있는 초입에서 머뭇거렸다. 대단히 불편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쉽지 않은 나날들에 이러한 이야기까지 사실 듣고 의식하며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은 망설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사실 중간 중간 계속 대면하고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들어야 하는 데에서 더한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때로 후회가 들기도 했다. 정말 이런거야? 사는 게 이런 거야? 그럴 거면 왜 태어나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거야...결국 이런 거면서...

 

미국인 의사 아툴 가완디는 그 이국적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도 출신의 이민 2세대다. 아버지, 어머니, 그 자신이 다 의사다. 이러한 가족적 배경은 현대 서구 의학이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결론적으로 어떠한 실수와 실패를 저지르고 있는지와 난립하는 요양 병원, 요양원이 노인들의 어떠한 핵심적인 바람을 놓치고 있는지 비판적인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늙고 병약해져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가족적 지지 안에서 경험하는 전통적인 동양 사회의 모습은 그의 할아버지대에서 직접 경험한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 또한 나머지 가족들의 희생과 다툼 등을 들어 그게 최선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현대의 죽음이 어떻게 최신의료기술이라는 미명 아래 과도하게 관리, 제어 당하며 그것을 겪는 인간의 존엄을 앗아가는지에 대한 자신의 환자, 심지어 아툴 가완디의 아버지와의 그 힘들었던 마지막 시간들을 절절하게 그려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는 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불편하고 너무 두려워서 마냥 다 맡겨놓았던 그것들을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다시 찾아오는 과정을 이 이야기를 통해 대리경험할 수밖에 없다. 딸과 떨어져 낯선 사람들과 자신의 의사와는 관련 없는 그 일과들을 강제로 수행해야 하는 요양원에 들어가기 두려워했던 아흔네 살의 루 할아버지의 이야기, 만삭에 폐암 말기임을 알고 아이를 조기 출산하고 아무 성과 없었던 암치료로 마지막까지 고통 당해야 했던 새라, 그 자신이 유능한 의사였지만 생의 말기에 아들을 붙잡고 울먹이며 내가 고통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렸던 아툴 가완디 자신의 아버지.  그가 여러번 강조했듯이 생의 말기에 이르러 죽음을 앞둔 이들은 비록 고통스럽고 슬펐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써내려갔다. '한계'와 '끝'을 직시하는 것은 뼈아프다. 하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는 믿음은 소중하다. 단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숱하게 그들에게서 그 자신을 빼앗아 왔다. 이제 그들은 치료받고 관리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철저한 객체가 되어버린다. 많은 자녀들이 부모들이 원하고 편안해하는 곳보다 내 마음이 편할 곳으로 요양원을 생각한다는 요양원의 대안적인 기관인 어시스티드 리빙 설립자의 이야기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아툴 가완디가 힘들게 시작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의 이야기들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가치 있는 이야기였다. 이제 환자의 사례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 죽음 앞에서의 어렵고 때로는 잔인하고 숭고한 대화들은 사실 우리를 예습 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과연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데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 가장 우려되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묻고 어떻게 당신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라는지를 되물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나고 남는 것들은 사실 그러한 것들일지 모른다. 현대의료행위가 그 수많은 인공장치로 그 시간을 계속 지연시키며 끝내 제대로 된 작별 인사나 갈무리도 하지 못한채 아직도 우리는 그 수많은 석별들을 당하고 만다.

 

그의 아버지가 존재하기를 멈추는 대목은 차마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용기가 부족하니까. 아흔네 살의 루 할아버지가 저자를 앞에 놓고 "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라고 했던 이야기가 겹친다. 아툴 가완디는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 내내 밤새 곁에서 책을 읽으며 그 처절한 소진 과정을 지킨다. 그리고 아버지의 당부대로 아버지 유골의 일부를 수천 년 간 그들의 조상이 그래왔던 것처럼 갠지스 강에 뿌린다. 아들은 갠지스 강에서 아버지의 삶의 이야기의 마침표를 성의 있게 찍는다. 당신이 원했던 일이다.

 

노력을 멈추고 '한계'를 인정해고 수용해야 하는 시기는 고통스럽게 온다. 태어나는 힘보다 더 끈질기게 엉겨붙어 그것은 죽음을 학습시킨다. 모두가 기피하는 바로 그 힘겨운 이야기를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분명 나도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나라고 특별할 리 없으니 말이다. 덜 늙고 더 오래 살아도 의미 있는 차이는 아니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마침내 나까지 저마다의 삶의 충실한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제대로 완결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도 역시 그것을 의식하는 일은 힘들다. 버티는 게 때로 포기하는 것보다 더 쉽다. 무언가를 하는 게 하지 않는 것보다 덜 가책이 되는 순간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돌아보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관성에 저항하는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래야 나아가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나이가 들어 배워야 하는 것들은 어쩌면 다 이렇게 절절하고 엄혹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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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1-2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툴 가완디의<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도 나오자마자 사놨는데 아직도 못 읽었어요. 왠지 두렵ㅜㅜ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열심히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겠지요.

blanca 2015-11-20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개인적으로 이 저자 책들이 참 좋더라고요. 이과적 지식과 문과적 글쓰기 소양을 고루 갖춘 작가인 듯해요. 사실 읽고 나면 자꾸 생각나고 우울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2015-11-21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2 15: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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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7 2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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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8 2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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