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교보문고에 갔다. 교보문고의 입구 한 켠에는 고전문학들로 채워져 있는데 그 서가에서 한적하게 책 읽기가 좋은데 보면 언제나 놀랄 만큼 어린 사람들이 아예 <죄와 벌> 같은 것을 들고 앉아서 읽고 있다. 놀라운 풍경이다. 아무리 영상이 종이책을 잠식하고 있는 시대라지만 좋은 종이책은 여전히 수요가 있다는 방증 같은 풍경이다. 다만 그래서 나는 마음껏 책을 구경하고 싶은데 항상 그러지 못한다. 잠깐 책을 들춰보는 사람들은 신간 코너에 몰려 있지 이런 곳에 있지 않다.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다 읽고 갈 태세로 팔을 책장 위에 얹고 있거나 앉아 있다. 
















간신히 확보한 공간이 버지니아 울프 책들이 꽂힌 곳. 죽기 사흘 전까지의 일기라는데 죽음이나 삶에 대한 절망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치열하게 쓰고 읽은 흔적들...묘한 울렁임이 느껴졌다. 삶이란 그런 것일까? 오늘까지 나에게 절절하고 치열하게 다가오다 내일은 뚝 끊기기도 하는...일기를 들춰보다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반, 분량에 대한 부담 반으로 일단 나중을 기약하고 평대에서 눈에 띈 책.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보르헤스가 천착한 주제는 언제나 죽음, 운명, 그것의 변주, 자아, 존재의 미소함이다. 짧은 글들과 시들이 어쩌면 하나 같이 웅장한 바로크 음악 같은지 문장 하나에 멈추고 문장 두 개에 플래그를 붙이고...내가 지금 여기서 괴로워하는 문제들이 다 사소하게 보인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우연은. 어젯밤 둥근 달이 갑자기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놀라서 내다 보는데 내가 하필 펼친 대목은. 보르헤스의 시 <달>이었다. 보르헤스는 알았을까? 60년 뒤에 누군가가 지구의 반대 끝에서 자신의 시를 읽으며 달을 바라볼 미래를? 이 "우발적이고 덧없는 존재들" 사이에 살아남을 말들을...


한 사람이 세계를 그릴 작정을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방, 왕국, 산, 만, 배, 섬, 물고기, 방, 도구, 천체, 말, 사람의 이미지들로 빈 공간을 채운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발견한다. 인내심으로 그린 그 선들의 미로가 자신의 얼굴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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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보르스카의 <박물관>이라는 시는 유물이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와 무게를 노래한다. 박물관의 유물 앞에서 쉼보르스카가 얘기하고자 했던 바를 절감한다. 이건 역설이었다. 우리를 앞서고 우리를 떠나 남고야 말 그 유물들의 힘 안에는 존재의 유한성을 뛰어넘고 세대를 아우르는 영혼의 승계가 있었다. 삶의 종결이 우리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멸자인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의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언.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쉼보르스카 <박물관> 중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어렸을 때에는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유물들 앞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휘몰아쳐 놀랐다. 심지어 구석기의 돌도끼들, 신라의 봉분에서 출토된 각종 금관들마저 그것을 썼던 이미 사라져간 그들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듯한 착각 속에 서성거리게 됐다. 머나먼 과거와 연결된 현재에서 그 유물을 매개로 조우하는 듯한 각별한 공감지대에서 나는 그저 나이든 게 아니라 성장했다는 실감이 왔다.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이 파괴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정명희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들은 두고두고 남는다. 비단 유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삶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 심화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탁월하다. 두고두고 인상적인 유물을 보고 온 마음처럼 그녀의 문장들을 곱씹게 된다. 박물관에서 흔히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유물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봐야 할지 친절하고 세심한 가이드 역할은 덤이다. 700년 전의 고려 여인의 서원이 깨달음으로 인한 윤회의 종결과 더불어 그래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중국의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멈춰서게 된다. 부귀영화가 아닌 삶의 독립을 위한 남자로서의 재탄생을 꿈꿨던 그녀의 고단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상상해 본다. 거기에서 오늘은 얼마나 많이 온 것인지 아니 앞으로 나아가긴 한 것인지 가만히 되짚어 보게 된다. 발원문에 두 살 아이의 장수의 꿈을 곱게 적은 부모의 마음도 상상해 본다. 그저 아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만을 바랐던 소망이 큰 꿈이었던 시대와 자본주의의 승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교육열로 포장되는 현시대의 간극을 가늠해본다. 내가 사는 지금으로부터 700년이 지나고 나서 후세인들이 우리의 소망을 어떻게 바라볼지 차마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그들이 보기에 천박하거나 사소하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다. 


현재에 발을 담그고 그렇게 과거의 것들을 바라보며 미래를 떠올려 본다. 



현재에 머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있어야 할 곳, 해야 할 것에 맞추다 일과 삶을 혼동했다. 익숙한 것을 소흘히 대하고 사라진 후에야 그리워했다. 내가 없는 것은 잡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정명희 <멈춰서서 가만히>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가  삶의 은유로 읽힌다. 사라진 후에야 그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현재에 머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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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떠올릴 때 내가 수정 보완할 거리들을 찾아 헤맬 때가 있다. 정말 땜질하고 잘라내고 덧붙여서 완벽한 그림을 만들 수 있을까. 그 그림 속의 나는 좀더 온전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는 걸까? 나는 정말 그러고 싶은 걸까.

















만약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과거에 이미 겪었던 일을 다시 겪으며 살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처음보다 실수도, 오점도, 공백도 없이 훨씬 더 잘살 수 있다면......그건 마치 정정한 곳투성이의 육필원고를 깨끗하게 다시 베껴 쓰는 것 같을 거야......

-파트릭 모디아노 <잠자는 추억들>


파트릭 모디아노가 나의 그런 마음을 언어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이 이야기는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 파리의 공간을 배경으로 십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 만난 여인들에 대한 기억을 적어 내려간 일종의 오토픽션이다. 전적으로 자전적이라 보기도 그렇다고 완전히 만들어낸 이야기라 보기도 힘든 그 어느 중간 지점의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청춘의 만남에 대한 공감지대에 놓인 그런 매력적인 이야기다. 나보다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여인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는 그러나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추억거리가 아니다. 신비주의에 빠진 여인, 남자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여자와의 의도치 않은 도피 등은 흐릿하고 신비롭다. 파리의 거리를 거니는 젊은 시절의 파트릭 모디아노는 다시 돌아가도 그 시절의 실수,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지금의 위대한 작가의 모습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청년은 때로 무책임하게 귀환을 기약하며 도망쳐 버린다. 그 탈주는 비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시 그 자리에 정말 약속한 대로 돌아갔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할 것이다. 청춘의 무책임은 때로 이미 예비된 미래의 현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존 버거의 '한때'에 관련한 단상들은 어떠한가. 수많은 한때를 소환하며 그 덧없음을 환기시키지만 그렇다 해도 그 덧없음이 무의미와 동의어는 아님을 방증하는 이야기들은 무겁고 저릿하다. 존 버거가 이야기하는 과거는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현재적이다. 우리 존재의 기저에 깔려 끊임없이 떠오르는 그 추억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우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어느 한순간을 깊이 경험할수록 경험은 더 많이 축적된다. 그런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경우 낭비로서의 시간의 흐름은 저지된다. 살아 있는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와 밀도의 문제다.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덧없지만 덧없게 될 것을 알지만 영원할 것처럼 깊이와 밀도를 부여하는 현재에서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시간을 이길 수 없지만 그렇기에 시간 안에서 부유하는 우리의 추억들은 어떤 의미를 부여받는다. 수정할 수도 덧붙일 수도 삭제할 수도 없는 우리가 만나서 그 공간과 시간을 채웠던 만남들에 대한 기억의 복원은 우리 내면을 채우는 존재의 밀도의 기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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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4-2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거를 돌아보면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안 할 거야, 하는 것도 있지만... 이럴 땐 반성을 하죠.
똑같은 상황에 또 처해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을 거야, 하는 것도 있더라고요. 사람은 참 안 변한다는 생각이 들죠.

blanca 2022-04-29 12: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시 돌아가도 다른 선택을 한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아요. 이젠 받아들이기가 숙제인 것 같아요.
 

시대의 역사는 승자 독식이 되기 쉽다. 승자의 언어와 승자의 시선과 승자의 해석이 사실을 직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일제 시대의 역사는 우리가 주체로 제대로 된 진상 조사, 사료 고증이 아직 많이 부족한 형편이다. 있었던 사실이 지워지고 폄하되고 없었던 허구가 비집고 들어간다. 아직도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이미 한일합병 이후 30년이 훌쩍 지난 시대의 청년들을 상상해 본다. 독립된 주권 국가가 아닌, 일본의 지배하에 태어나고 일본어 이름으로 개명을 강요당했던 세대가 일본의 군속인 포로감시원으로 차출되어 그들에게 협조했다고 하면 과연 그들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설사 자원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은 자유의지였을까, 아니면 시대적 상황에 따른 강요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결백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층적이고 비극적이며 도발적이다. 


이 책은 1942년 8월 부산항을 떠나 남방에서 오년 동안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최영우의 이야기를 외손자인 저자가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해제하고 보충 재구성했다. 최영우는 실제로 일본의 항복 이후 싱가포르 및 자카르타 인근 형무소에서 용의자로 조사를 받고 구금된다. 일본은 패전국으로 전범이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지만 피식민지인으로서 식민지 국가의 전범 행위에 협조한 셈이 되는 이 아이러니하고 혼란스러운 지위에 많은 사람들이 놓였다. 왜 기꺼이 용감하게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은 너무 가혹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윤리적인 질문과 생존은 충돌한다. 생존이 급한 일이 되지 않는 영역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저돌적으로 윤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상충되는 지점에 놓일 때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존을 택했다. 그리고 손자는 그의 선택 아닌 선택과 그것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담담하게 복원한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지워지지 않는 비애가 있다. 그 비애는 사는 일이 그런 참혹한 선택의 기로와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나의 자유 의지보다 시대 상황과 주변의 여건이 엄청난 위력을 행사할 때 내가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다. 


최영우는 친척이 못 알아볼 정도의 몰골로 돌아온다. 이후의 그의 삶에서 이전의 그가 가졌던 희망, 활기. 꿈들은 돌아올 곳을 찾지 못한다. 그의 기록은 이후 없다. 어쩌면 가졌을 내일에 대한 희망, 과거에 대한 회한조차 손자는 알 길이 없다. 손자는 그러나 할아버지가 보냈던 그 고통의 시간을 세상 바깥으로 마침내 들고 나온다. 자랑스럽고 빛나는 이야기만이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숨기고 싶을 수 있고 잊고 싶기도 한 이야기들도 이 세상에 자리가 있다. 역사는 잊혀진 자들의 이야기로 균형을 이룬다. 그들에게 걸맞는 언어와 이야기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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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겁이 많다. 원체도 모험심이 부족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시도, 새로운 길,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점점 더 두려움이 늘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기분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냥 가만히 앉아 세월을 맞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결국 연약하고 유한한 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체현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는 품이 들고 상실이 들이친다. 그러니 나라는 사람은 나날이 더 겁쟁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 헌 마음에 부대낀다. 
















요즘 젊은 작가 중 이슬아는 가장 전면에 부각된 인물일 것이다. 이렇게 안 읽는 시대에 글을 써서 유명해지고 생계도 가능하다는 걸 청년들에게 보여주는 드물지만 희망적인 사례의 대표 주자일 것이다. 그녀가 나이 든 육체 노동자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응급실 청소 노동자, 인쇄소 기장과 경리, 수선집 사장의 인터뷰는 나를 흔들었다. 이런 유형의 인터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심지어 르포 형식의 이야기들도 있어 왔다. 그러나 이슬아 작가가 그들과 나눈 대화는 그러한 전형적인 틀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우리가 기대하게 되는 노동 현장에서의 애환, 소외감, 한탄이 아니라 그들이 그 화려하지 않은 자리에서 살아낸 각자의 삶으로 직조한 서사의 결정체가 이슬아 작가의 목소리로 빛난다. 


응급실에서 환자들이 흘린 피, 남들이 기피하는 각종 쓰레기를 종일 치우면서도 "세례를 받아서 이제 더 으른이 되어야죠."라고 말하며 웃는 육십대의 청소 노동자 순덕 할머니는 그 피곤한 육체 노동의 와중의 유일한 휴일날 집에서 쉬는 대신 또 자신의 몸을 움직여 봉사할 일을 찾는다. 


표고버섯을 키우는 농업인 윤인숙 할머니는 "스트레스를 안고 꿍해있으면 나 자신이 너무 상해버리잖아. 새 마음을 먹는 거지. 자꾸자꾸 새 마음으로 하는 거야."라고 스트레스를 받는 딸에게 말한다. 여느 철학자보다 더 심오한 인생 조언이다. 


팔십대의 수선집 '미래로' 사장님에게는 슬아 작가에게 고백하는 늘그막에 찾아온 찬무 할아버님과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있다. 연인의 수선집에 '미래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예뻐해줬던 할아버지와의 마지막을 마감하며 사장님은 그럼에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없단다. 왜냐면 "지금이 제일 좋아," 이 얼마나 도발적이고 기대치 않았던 명답인가. 


저마다의 분야에서 하는 청소, 옷 수선, 농사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완벽하다고 자부하는 그리고 지금이 정말 너무 좋다,는 이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는 일은 그렇게 엄중하고도 존귀한 일임을 잊었다. "새 마음"을 먹어야겠다. 오늘도 내일도 또 흘려보낸 어제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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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3-31 0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블랑카님 글 읽으니 너무 좋네요. 이슬아는 항상 응원하는 작가인데 이런 근사한 책이 있었군요. 어른들의 사연, 말씀이 하나 하나 마음에 꽂히네요. 새 마음이 필요한 저에게 너무 딱이네요. 감사해요, 블랑카님!!

blanca 2022-03-31 09:03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요새 좀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이 책 읽고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어르신들의 삶에 대한 자세를 들으니 저는 아직도 더 ˝으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슬아 작가 인터뷰집 다 읽어보려 합니다.

파이버 2022-04-02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이 제일 좋다‘라니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쌓아와야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의 나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려면 얼마나 어른이 되어야 할까요. 어르신들 말씀이 정말 멋있어요.

blanca 2022-04-03 10:33   좋아요 1 | URL
파이버님, 저는 이제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밝은 표정을 보면 그 어떤 유명인사나 화려해 보이는 사람보다 더 대단해 보여요. 나이 드는 게 그냥 시간만 간다고 절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늙고 견디고 죽음까지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평범한 삶이 가장 특별하고 빛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