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으로 피아노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바흐 때문이다. 체르니 50번에 들어가며 바하 인벤션을 치게 됐고 내가 대충 뭉개버리던 왼손이 오른손과 동등한 선율을 구사해야 하는 그 엄격함의 요구 앞에서 나의 빈한한 실력은 들통나고 말았다. 아무리 연습해도 왼손 성부가 제대로 안 됐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억지로 허덕이며 거기까지 끌고 가려던 엄마가 드디어 져줬다.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었다. 드디어 인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 


그러나 굴드처럼 바흐를 연주하려면 언제나 모든 음을 완벽하게 쳐야 했다. 케빈 버재너가 말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자비하게 드러나는" 음악인 것이다. "바흐에서는 어떤 것도 피하거나 꾸며낼 수 없다."

-케이티 해프너 <굴드의 피아노>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나는 바흐 앞에서 도저히 더는 꾸며낼 수 없었다. 그 앞에서는 백주 대낮에 숨기려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꾸미거나 눙치던 것들을 어쩔 수 없이 고백해야 했다. 모든 음을 완벽하게 치지 않으면 반드시 그 불협화음이 드러났다. 무자비하게. 
















굴드의 바흐를 들으면 그래서 전율한다. 그의 왼손은 오른손과 동등하거나 더 현란하고 정확하게 바흐의 명령을 수행한다. 오른손잡이들은 왼손이 오른손의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왼손의 선율은 오른손의 보조 역할을 하도록 하는 대부분의 악보에 충실히 복무한다. 이것을 전복시킨 바흐의 음악 앞에서 약한 왼손은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한다. 대부분이 그렇다. 왼손이 오른손을 지시하고 따르라 할 때 그건 그 행위를 위장하거나 덮어버리려는 욕망과 싸우게 된다.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피아노를 결국 그만두게 된 지점에서의 악몽이 이 책을 읽으며 되살아났지만 동시에 그건 깨끗한 포기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밀고 나갔다면...나는 충분히 불행했을 것이다. 평범한 내가 그 지점을 돌파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 케이티 해프너의 굴드에 대한 이야기는 여느 평전과는 다른 독특한 차별점을 내세운다. 그것은 굴드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굴드가 마치 연인처럼 사랑하고 데리고 다녔던 스타인웨이 CD 318을 통과하는 서사들이다.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그리고 그것과 사랑에 빠질 때까지 마침내 파괴된 그것을 단념하기까지의 여정은 굴드의 피아니스트로서의 과업과 삶의 조수간만의 리듬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자신의 바흐를 온전히 호흡하고 받아내 주었던 이 물건의 일대기와 그 자신의 그것을 거의 동일시했다. 한창 전성기 때 스타인웨이 318로 작업했던 레코딩을 오십을 목전에 두고 다시 시도했다는 건 그 자신의 삶의 코다를 향한 흐름과 정확히 일치하는 어떤 전조를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실제 그것을 유언처럼 남기고 뒤따른다. 


물론 비단 318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것을 조율하며 굴드와 연주회, 레코딩에 동행했던 충직한 조율사들, 테그니션들, 심지어 그의 숨겨진 연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 기이한 강박증을 가진 기인 피아니스트의 바흐 절창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저자의 충실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눈앞에서 보이는 듯 복원된다. 어딘가에 떨어져 망가져 버린 318을 복원하기 위하여 여름 더위에 외투를 입고 뒷자석에는 피아노의 거대한 부품을 싣고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넘는 굴드의 여정의 묘사는 그가 얼마나 이 음악에 이 피아노에 진심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풍경이다. 어떤 절망 앞에서 지지 않는 희망과 이상을 가지고 순간순간에 모든 것을 던졌던 이 예술가의 처절한 삶은 그의 완벽하리만치 엄격한 바흐의 연주 앞에서 일종의 신기를 보여준다. 그의 바흐를 듣는 일은 이미 죽어 이 세상에 없는 그의 영을 불러내는 일처럼 신비롭고 감동적인 시간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앨범이 발매되고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굴드는 죽었다. 318은 비로소 제대로 복원되었고 많은 그의 후배들이 그것을 연주한다. 생전에는 망가진 상태로 이별했던 그것이 그의 사후 부활했다는 대목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죽음으로써 그의 연주를 불멸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여전히 굴드의 바흐를 듣고 그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연주회에서 직접 듣는 것 못지 않게 생생하게 그의 영혼과 예술적인 완성도를 향해 가는 노력과 열정을 느끼며 감동한다. 어쩌면 우리의 생과 필멸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이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그의 연주를 들으며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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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6-20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바흐 때문에 피아노를 포기 하셨군요
제 친구들은 쇼팽에서 넘어졌고
러시아 작품으로 넘어가면서
울면서 그만둔 ㅎㅎㅎ

전 피아노 의자 앞에서 몇시간 씩 두드리는 걸 참지 못하지만
바흐 만큼은 좋아해서
한 번 꽂힌 작품 일년 내내 반복 연주 할 수 있습니다(주변인들은 싫어함 ㅎㅎㅎ)

굴드가 연주하는 베토벤도 참 좋아요 ^ㅅ^

blanca 2022-06-22 13:58   좋아요 2 | URL
왼손을 오른손처럼 쓸 수 없어서 포기요. 하지만 여전히 애증의 음악가이고 제일 좋아하는 작곡가입니다. 오, 스캇님 여전히 피아노 치시는군요!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갔다. 교보문고의 입구 한 켠에는 고전문학들로 채워져 있는데 그 서가에서 한적하게 책 읽기가 좋은데 보면 언제나 놀랄 만큼 어린 사람들이 아예 <죄와 벌> 같은 것을 들고 앉아서 읽고 있다. 놀라운 풍경이다. 아무리 영상이 종이책을 잠식하고 있는 시대라지만 좋은 종이책은 여전히 수요가 있다는 방증 같은 풍경이다. 다만 그래서 나는 마음껏 책을 구경하고 싶은데 항상 그러지 못한다. 잠깐 책을 들춰보는 사람들은 신간 코너에 몰려 있지 이런 곳에 있지 않다.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다 읽고 갈 태세로 팔을 책장 위에 얹고 있거나 앉아 있다. 
















간신히 확보한 공간이 버지니아 울프 책들이 꽂힌 곳. 죽기 사흘 전까지의 일기라는데 죽음이나 삶에 대한 절망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치열하게 쓰고 읽은 흔적들...묘한 울렁임이 느껴졌다. 삶이란 그런 것일까? 오늘까지 나에게 절절하고 치열하게 다가오다 내일은 뚝 끊기기도 하는...일기를 들춰보다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반, 분량에 대한 부담 반으로 일단 나중을 기약하고 평대에서 눈에 띈 책.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보르헤스가 천착한 주제는 언제나 죽음, 운명, 그것의 변주, 자아, 존재의 미소함이다. 짧은 글들과 시들이 어쩌면 하나 같이 웅장한 바로크 음악 같은지 문장 하나에 멈추고 문장 두 개에 플래그를 붙이고...내가 지금 여기서 괴로워하는 문제들이 다 사소하게 보인다. 그리고 정말 신기한 우연은. 어젯밤 둥근 달이 갑자기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놀라서 내다 보는데 내가 하필 펼친 대목은. 보르헤스의 시 <달>이었다. 보르헤스는 알았을까? 60년 뒤에 누군가가 지구의 반대 끝에서 자신의 시를 읽으며 달을 바라볼 미래를? 이 "우발적이고 덧없는 존재들" 사이에 살아남을 말들을...


한 사람이 세계를 그릴 작정을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방, 왕국, 산, 만, 배, 섬, 물고기, 방, 도구, 천체, 말, 사람의 이미지들로 빈 공간을 채운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발견한다. 인내심으로 그린 그 선들의 미로가 자신의 얼굴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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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보르스카의 <박물관>이라는 시는 유물이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와 무게를 노래한다. 박물관의 유물 앞에서 쉼보르스카가 얘기하고자 했던 바를 절감한다. 이건 역설이었다. 우리를 앞서고 우리를 떠나 남고야 말 그 유물들의 힘 안에는 존재의 유한성을 뛰어넘고 세대를 아우르는 영혼의 승계가 있었다. 삶의 종결이 우리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멸자인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의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언.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쉼보르스카 <박물관> 중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녀왔다. 어렸을 때에는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만 했던 유물들 앞에서 전혀 다른 감정이 휘몰아쳐 놀랐다. 심지어 구석기의 돌도끼들, 신라의 봉분에서 출토된 각종 금관들마저 그것을 썼던 이미 사라져간 그들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듯한 착각 속에 서성거리게 됐다. 머나먼 과거와 연결된 현재에서 그 유물을 매개로 조우하는 듯한 각별한 공감지대에서 나는 그저 나이든 게 아니라 성장했다는 실감이 왔다.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이 파괴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정명희의 유물에 대한 이야기들은 두고두고 남는다. 비단 유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삶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 심화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탁월하다. 두고두고 인상적인 유물을 보고 온 마음처럼 그녀의 문장들을 곱씹게 된다. 박물관에서 흔히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유물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봐야 할지 친절하고 세심한 가이드 역할은 덤이다. 700년 전의 고려 여인의 서원이 깨달음으로 인한 윤회의 종결과 더불어 그래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중국의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멈춰서게 된다. 부귀영화가 아닌 삶의 독립을 위한 남자로서의 재탄생을 꿈꿨던 그녀의 고단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상상해 본다. 거기에서 오늘은 얼마나 많이 온 것인지 아니 앞으로 나아가긴 한 것인지 가만히 되짚어 보게 된다. 발원문에 두 살 아이의 장수의 꿈을 곱게 적은 부모의 마음도 상상해 본다. 그저 아이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만을 바랐던 소망이 큰 꿈이었던 시대와 자본주의의 승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교육열로 포장되는 현시대의 간극을 가늠해본다. 내가 사는 지금으로부터 700년이 지나고 나서 후세인들이 우리의 소망을 어떻게 바라볼지 차마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그들이 보기에 천박하거나 사소하지 않기를 기원할 뿐이다. 


현재에 발을 담그고 그렇게 과거의 것들을 바라보며 미래를 떠올려 본다. 



현재에 머문다는 게 쉽지 않았다. 있어야 할 곳, 해야 할 것에 맞추다 일과 삶을 혼동했다. 익숙한 것을 소흘히 대하고 사라진 후에야 그리워했다. 내가 없는 것은 잡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정명희 <멈춰서서 가만히>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가  삶의 은유로 읽힌다. 사라진 후에야 그리워하지 않기를 바라며 현재에 머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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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떠올릴 때 내가 수정 보완할 거리들을 찾아 헤맬 때가 있다. 정말 땜질하고 잘라내고 덧붙여서 완벽한 그림을 만들 수 있을까. 그 그림 속의 나는 좀더 온전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는 걸까? 나는 정말 그러고 싶은 걸까.

















만약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과거에 이미 겪었던 일을 다시 겪으며 살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처음보다 실수도, 오점도, 공백도 없이 훨씬 더 잘살 수 있다면......그건 마치 정정한 곳투성이의 육필원고를 깨끗하게 다시 베껴 쓰는 것 같을 거야......

-파트릭 모디아노 <잠자는 추억들>


파트릭 모디아노가 나의 그런 마음을 언어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이 이야기는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 파리의 공간을 배경으로 십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 만난 여인들에 대한 기억을 적어 내려간 일종의 오토픽션이다. 전적으로 자전적이라 보기도 그렇다고 완전히 만들어낸 이야기라 보기도 힘든 그 어느 중간 지점의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청춘의 만남에 대한 공감지대에 놓인 그런 매력적인 이야기다. 나보다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여인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는 그러나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추억거리가 아니다. 신비주의에 빠진 여인, 남자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여자와의 의도치 않은 도피 등은 흐릿하고 신비롭다. 파리의 거리를 거니는 젊은 시절의 파트릭 모디아노는 다시 돌아가도 그 시절의 실수,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지금의 위대한 작가의 모습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청년은 때로 무책임하게 귀환을 기약하며 도망쳐 버린다. 그 탈주는 비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시 그 자리에 정말 약속한 대로 돌아갔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할 것이다. 청춘의 무책임은 때로 이미 예비된 미래의 현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존 버거의 '한때'에 관련한 단상들은 어떠한가. 수많은 한때를 소환하며 그 덧없음을 환기시키지만 그렇다 해도 그 덧없음이 무의미와 동의어는 아님을 방증하는 이야기들은 무겁고 저릿하다. 존 버거가 이야기하는 과거는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현재적이다. 우리 존재의 기저에 깔려 끊임없이 떠오르는 그 추억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우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어느 한순간을 깊이 경험할수록 경험은 더 많이 축적된다. 그런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경우 낭비로서의 시간의 흐름은 저지된다. 살아 있는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와 밀도의 문제다.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덧없지만 덧없게 될 것을 알지만 영원할 것처럼 깊이와 밀도를 부여하는 현재에서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시간을 이길 수 없지만 그렇기에 시간 안에서 부유하는 우리의 추억들은 어떤 의미를 부여받는다. 수정할 수도 덧붙일 수도 삭제할 수도 없는 우리가 만나서 그 공간과 시간을 채웠던 만남들에 대한 기억의 복원은 우리 내면을 채우는 존재의 밀도의 기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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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4-2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거를 돌아보면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안 할 거야, 하는 것도 있지만... 이럴 땐 반성을 하죠.
똑같은 상황에 또 처해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을 거야, 하는 것도 있더라고요. 사람은 참 안 변한다는 생각이 들죠.

blanca 2022-04-29 12: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시 돌아가도 다른 선택을 한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아요. 이젠 받아들이기가 숙제인 것 같아요.
 

시대의 역사는 승자 독식이 되기 쉽다. 승자의 언어와 승자의 시선과 승자의 해석이 사실을 직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일제 시대의 역사는 우리가 주체로 제대로 된 진상 조사, 사료 고증이 아직 많이 부족한 형편이다. 있었던 사실이 지워지고 폄하되고 없었던 허구가 비집고 들어간다. 아직도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이미 한일합병 이후 30년이 훌쩍 지난 시대의 청년들을 상상해 본다. 독립된 주권 국가가 아닌, 일본의 지배하에 태어나고 일본어 이름으로 개명을 강요당했던 세대가 일본의 군속인 포로감시원으로 차출되어 그들에게 협조했다고 하면 과연 그들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설사 자원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은 자유의지였을까, 아니면 시대적 상황에 따른 강요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결백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층적이고 비극적이며 도발적이다. 


이 책은 1942년 8월 부산항을 떠나 남방에서 오년 동안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최영우의 이야기를 외손자인 저자가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해제하고 보충 재구성했다. 최영우는 실제로 일본의 항복 이후 싱가포르 및 자카르타 인근 형무소에서 용의자로 조사를 받고 구금된다. 일본은 패전국으로 전범이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지만 피식민지인으로서 식민지 국가의 전범 행위에 협조한 셈이 되는 이 아이러니하고 혼란스러운 지위에 많은 사람들이 놓였다. 왜 기꺼이 용감하게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은 너무 가혹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윤리적인 질문과 생존은 충돌한다. 생존이 급한 일이 되지 않는 영역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저돌적으로 윤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상충되는 지점에 놓일 때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존을 택했다. 그리고 손자는 그의 선택 아닌 선택과 그것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담담하게 복원한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지워지지 않는 비애가 있다. 그 비애는 사는 일이 그런 참혹한 선택의 기로와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나의 자유 의지보다 시대 상황과 주변의 여건이 엄청난 위력을 행사할 때 내가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다. 


최영우는 친척이 못 알아볼 정도의 몰골로 돌아온다. 이후의 그의 삶에서 이전의 그가 가졌던 희망, 활기. 꿈들은 돌아올 곳을 찾지 못한다. 그의 기록은 이후 없다. 어쩌면 가졌을 내일에 대한 희망, 과거에 대한 회한조차 손자는 알 길이 없다. 손자는 그러나 할아버지가 보냈던 그 고통의 시간을 세상 바깥으로 마침내 들고 나온다. 자랑스럽고 빛나는 이야기만이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숨기고 싶을 수 있고 잊고 싶기도 한 이야기들도 이 세상에 자리가 있다. 역사는 잊혀진 자들의 이야기로 균형을 이룬다. 그들에게 걸맞는 언어와 이야기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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