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서점에서 아이가 신간을 펼쳐보고 있자 아르바이트생이 카운터에서 목을 빼고 자국 안 남게 보라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가 화들짝 놀라 책을 덮고 바로 꽂아둔다. 내심 들어가 책을 잠시라도 보면 단 한 권이라도 꼭 사주려고 했던 마음(실제로 그래왔다)이 절로 식었다. 상대적으로 초등학교 시절 버스 종점에 있었던 서점 생각이 났다. 나는 서점에서 두 시간 정도 머물다 그냥 나온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주인 아저씨는 내가 이 책을 살까, 저 책을 살까 고민하다 몇 장을 넘겨 보고 있자 "다리 아프니 앉아서 봐요."라고 의자를 밀어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책을 너무 오래 봐서 야단칠 줄 알았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아저씨의 배려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이런게 친절이라는 거구나, 싶었고 그 기억은 오래 남았다. 


서점도 우리가 기대하는 문화공간이기 이전에 영업이익을 내야 하는 가게다.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다른 가게와는 다른 어떤 기대치가 사라지지 않는 건 책이라는 매개체가 가진 의미 때문일 것이다. 책을 사고 파는 공간에 대한 기대감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좋다. 삭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적어도 손님이 조금 길게 머물러도 참아줄 수 있는 공간으로 남았으면 하는 기대감은 너무 큰 것일까? 어쩌다 작은 동네 서점에 신간을 조금 오래 구경만 해도 마음이 절로 불편해진다. 그러다 보면 동네서점 장사를 시켜주고 싶어도 결국 대형 서점으로 온라인 서점으로 가게 된다. 


속초의 동네 서점지기인 저자의 경험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어느날 서점에 들어와 계속 돌아다니며 계속 혼잣말을 하며 다른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는 아이를 보다 저자는 참지 못하고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아이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한다. 어머니의 대답은 의외였다. 


"서점이 뭔데요."

"서점이 뭔데요. 아이가 편하게 있도록 내버려 두세요."

-<우리는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김영건
















내가 속상했던 대목,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서점이 뭔데요."에 집약되어 있는 듯했다. 이 아이에게는 경미한 장애가 있었던 것 같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돌아다니던 아이를 데리고 어머니는 나가버리고 저자는 어머니의 이 말에 감전된 듯 서 있었다고 한다. 그 어머니는 아마도 이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편안한 장소로 책을 파는 동네서점이라는 공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데리고 간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인 시선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서운함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다른 가게는 다 그래도 서점만큼은 그러지 말았으면 최후의 어떤 공간으로 남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서점이 뭔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가장 영세한 자영업자의 공간으로 분투하고 있을 그곳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어떤 기대를 공유하고 그게 순진한 낭만에 기댄 것이라 할지라도 쉽게 포기하기 싫은 것 같다. 저자의 그런 마음들이 잔잔히 그가 읽은 책들과 어우러져 전해온다. 특히 저자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한다는 유디트 헤르만의 책을 사고 또 사는 마음 같은 거. 설득당하고 만다. 대체 얼마나 좋길래.
















효율과 물질적 가치가 추앙 받는 사회에서 여전히 옛것에 기댄 가치를 공유하는 일은 서러운 공감이다. 기회가 되면 '서점이 뭔데요'라는 사람의 말에 귀기울일 수 있었던 저자의 속초 동아서점에 꼭 방문하여 책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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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7-02 2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백희나 쌤 인스타 팔로우 하는데, 속초의 동아 서점 최고의 서점이라고 하셨어요!! 백희나 쌤이 인스타에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거 첨 본 듯요!! 예전에 동네 서점 앞에 서점에 들어오시면 책 한권은 꼭 사셔야 합니다라는 팻말을 건 동네 서점이 있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요(숲속키즈도 책 한권 꼭 사야한다고 하는데, 제가 듣기론 숲속키즈 말고 다른 동네 서점이었어요)!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요. 주변에 책 읽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서점장의 마음도 이해가 가긴 해요!! 전 독립 서점 가면 꼭 사오긴 하는데… 좋아서 한 일인데 임대료나 관리비 걱정이 자본주의의 한 단면이겠죠!!!

blanca 2022-07-03 10:43   좋아요 1 | URL
오, 그렇군요. 이게 참 사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동네서점들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게 이해가 가면서도 또 각박하게 굴면 속상하더라고요. 문구점도 그렇더라고요. 이 두 공간만큼은 오래도록 살아남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은빛 2022-07-03 14: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서점에서 두 시간 정도 서서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오곤 했던 시간들이 기억나네요. 책값이 비싸서, 대여점에는 없는 책이라서 서점에서 서서 읽고 나왔던 책들이 있었죠.

어릴때 제 꿈은 서점 주인이었는데, 지금은 돈이 남아돌아도 절대 하면 안 되는 직업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기형적인 출판 유통구조를 생각하면 그만큼 바보같은 짓이 없죠.

blanca 2022-07-03 20:57   좋아요 2 | URL
어렸을 때 꿨던 꿈들이 하나씩 부서질 때마다 마음이 참 헛헛합니다.

얄라알라 2022-08-14 19:41   좋아요 0 | URL
도서관이 없는 지역에 거주하셨던 분이 서점에서 서서 책 보며 눈치 보일 시점이면 나가서, 다음 서점에서 이어서 읽기를 계속하는 청소년기를 보내며 꿈을 도서관키우기로 잡으셔서
결국 어른이 되어 도서관전문가가 되셨다는 글을 읽었는데

감은빛님의 추억도 진정 책 덕후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네요. 두시간을 서계실 정도로 애정이.

동네 작은 서점은 여러 문화지원사업을 활용하며
동네 문화사랑받으로 거듭나시는 듯 하는데
내부 사정을 모르는 저로서는 멋지다멋지다만 했네요

바람돌이 2022-07-03 17: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들어서 작은 서점들이나 특별한 컨셉의 서점들이 생기면서 서점의 고전적인 가치를 지키려고 하는 곳들이 생겨나는 거 같아요. 전 예전에도 시내의 큰 서점 말고 동네서점에서는 오래 책을 못봤어요. 눈치 보여서..... ㅎㅎ
요즘 작은 서점에 가면 아예 책상이랑 의자가 있어서 편안하게 볼 수 있던데, 제가 돈이 많아져서 그런가? 서점에서 보는 것보다는 사서 집에서 보는게 더 좋네요. ㅎㅎ
속초는 여기서 너무 먼곳이라 동아서점에 언제쯤 가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억해둬야겟네요.

blanca 2022-07-03 20:58   좋아요 3 | URL
이게 그런게 있어요. 괜히 아무도 뭐라 안 해도 눈치가 보여서 책을 오래 골라도 마음이 괴로워요. 사실 동네서점이라는 공간이 가진 특별한 매력은 잘 큐레이션된 책들을 여유를 가지고 보고 구입하는 건데요. 현실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속초는...언제 갈 수 있을까요.

mini74 2022-07-04 1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어릴적 용돈 받음 동네서점에 제일 먼저 가곤했어요. 단골이라고 아저씨가 한권 사면 한 두어권은 조심스레 읽는건 허락해주셨는데 ㅠㅠ 지금은 큰 빵집이 들어섰더리고요

blanca 2022-07-05 13:35   좋아요 2 | URL
제가 가던 서점도 어느 순간 두 개나 없어졌어요. 개인적으로 참 씁쓸하더라고요.

페크pek0501 2022-07-13 11: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여름을 책의 파도에 몸을 맡겨 보려고 알라딘 들어오기 전에 책을 읽었죠. ㅋ
유디트 헤르만의 책을 읽고 싶네요. 저도 설득당하고 싶나 봐요.^^

blanca 2022-07-13 13:37   좋아요 3 | URL
유디트 헤르만 이름이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오늘 비가 아주 많이 오네요. 덥고 변덕스러운 여름 날씨가 오히려 책 읽기에 참 좋은 계절인 듯해요.

scott 2022-08-10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계신곳 비 피해 없으신지요
서울 이틀 동안 엄청난 폭우로 ㅠ,ㅠ

blanca 2022-08-10 16:59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비가 무진장 와서 엄청 걱정이었어요.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마음이 무겁네요.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mini74 2022-08-10 16: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 읽으며 추억에 잠시 잠겼었지요 ㅎㅎ 축하드립니다 *^^*

blanca 2022-08-10 16: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8-10 16: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축하드려요.
이제야 읽어봅니다.

blanca 2022-08-10 16:59   좋아요 1 | URL
감사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2-08-10 17: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달의당선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08-11 10:1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8-10 17: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08-11 10:19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8-10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2-08-11 10:2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꼬마요정 2022-08-11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08-11 10:20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8-11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2-08-11 17: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2-08-14 1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덕분에 서점의 추억에 잠겨봅니다. 축하드립니다

blanca 2022-08-15 08:33   좋아요 0 | URL
서점...생각만으로도 언제나 행복해지는 장소죠. 감사드립니다.
 

한 동네에서 초등, 중등, 고등, 대학을 다 다녔다. 아직도 그곳에 친정이 있다. 그곳에 가면 내 안의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이 낡고 늙고 변했다. 사람도 장소도 사물도. 그 안을 걷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툭툭 내려앉는다. 왜 그럴까. 그 세월의 무게가 누적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월은 쌓고 모으고 쟁이는 것이 아니라 소진하고 나누고 결국 사라지는 일이다. 그 허무를 견뎌내기 힘들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나에게 익숙한 풍경들도 결국은 모두 사라지고 끝난다. 시간과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없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것을 문학적으로 구현했다. 1880년 봄부터 1930년 여름날까지 파지터 일가를 중심으로 한 연대기식 세월의 이야기는 장려하고 아름답지만 역시 허무하다. 그 허무를 껴안는 일이 버지니아 울프는 힘들었던 듯하다. 그녀의 최후가 세월에 대한 그녀 나름의 반응이었을까. 결국 모든 것을 파기하고 말 시간의 힘 앞에서 그녀는 갈 곳을 잃었다. 


인생이란 우리가 다루거나 만들 수 있는 것이라야 하지 않나?-칠십여 년의 인생이지. 하지만 여기 내게는 오직 현재의 순간만 있을 뿐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 <세월>


빅토리아 시대 후기, 퇴역 군인 아벨 파지터는 투병중이었던 아내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그의 자녀들인 엘리너, 에드워드, 마틴, 로즈, 밀리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삶을 살아나가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사실 특별할 것이 없다. 계절의 경과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는 전쟁터에 나가고 누군가는 독신으로 늙어간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들의 이러한 행보를 그저 한 발짝 떨어져 담담히 묘사한다. 그 사이로 그녀의 눈부신 문장력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주와 시대의 파고로 인한 역사적 격랑이다. 시간이 들고 나며 변전하는 모습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역동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쩐지 현재의 모습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다. 여전히 돈,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 사회와 외부에서 주어지는 휘장 속에 숨어 진짜 자기와 자기 인생을 잃어버리는 우리들. 지금, 현재, 여기에서 나를 중심으로 엮어 나가야 하는 인생에 대한 가치를 울프는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는 비가 부드럽게 뿌리듯 내려 보도가 미끄러웠다. 우산을 펴는 것이 좋을까, 마차를 불러야 할까. 극장에서 나서던 이들은 별빛이 흐릿해진 포근하고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고민했다. 땅에, 들판이나 정원에 비가 내린 곳에서는 흙냄새가 피어올랐다. 빗방울이 풀잎에 매달려 있기도 했고 야생화 봉오리 안에 가득 담겨 있다가 산들바람이 일어 흩어지기도 했다. 

-1880년 버지니아 울프 <세월>


어쩐지 1880년의 비가 내리던 풍경이 낯설지 않다. 거대한 패턴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나 보다. 우리가 처음으로 알고 사는 삶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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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06-23 1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우리가 처음으로 알고 사는 삶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 막연하게 느끼기만 하던 생각을 잘 짚어 표현해주셨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도 오늘 저녁 비예보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blanca 2022-06-24 09:04   좋아요 1 | URL
아, 어제 비 정말 무섭게 오더라고요. 반면 오늘 활짝 개어 너무 상쾌하게 시작하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2-06-23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씨에 너무 어울리는 글입니다.
허무, 그렇지만 생에의 의지도 강했다는 생각!
그러기에 오히려 반복되는 나락이 두려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blanca 2022-06-24 09:05   좋아요 1 | URL
벌써 어제가 되어버렸네요!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2022-07-01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01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되도록 매일 있었던 일들을 다이어리에 기록하려고 한다. 이것은 오 년 뒤, 십 년 뒤의 나를 위한 일이다. 미래의 나를 염두에 둔 과거 속에 현재를 밀어 넣는 행위다. 되도록 자기검열을 하지 않으려 하고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느낀 감정이나 감상보다는 실제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차원으로 만들려고 한다. 별것도 아닌 일에 전전긍긍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학습된 마음도 있다. 그보다는 현실들로 채우고 싶다. 기록하지 않으면 과거는 희미해지고 흩어진다. 


아버지 생신. 살아계셨으면 96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오늘로 96세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96세가 될 수 있었지만, 고맙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랬더라면 그의 인생이 내 인생을 완전히 끝장내 버렸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글도 쓰지 못했을 것이고, 책도 없었을 터,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서른세 살부터 자살하기 나흘 전까지 27년간이나 일기를 적었다고 한다. <울프 일기>는 이 방대한 일기 중 주로 울프가 작품을 쓰고 고치고 송고하고 그 반응을 기다리는 일에 관련한 것들 위주로 남편 레너드가 출간한 [A Writer's Diary]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울프 자신이 자기검열을 최소화하겠다고 표방한 일기는 어떤 글이나 이보다는 잘 쓸 수 있다고 위트 있게 말한 그녀의 사전 경고가 아니어도 진솔하면서도 문학적으로 아름다워 시종일관 읽는 이를 설득시키고 끌어당기는 강력한 매력을 발산한다. 누군가의 일기에 이토록 흠뻑 빠져 마치 그녀와 함께 호흡하는 듯한 착각마저 느끼게 한 경우는 처음이다. 무엇보다 이 위대한 작가가 끊임없는 자기 의심과 자기 비하로 고생했었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다. 천하의 버지니아 울프가 스스로를 머리가 나쁘고 글도 못 쓰고 늙었다고 표현하다니. 


이처럼 세월은 흘러간다. 가끔 나는 자문해보다. 어린애가 은빛 공에 홀리듯, 나는 인생에 의해 최면에 걸린 것은 아닐까, 라고. 그리고 이것이 산다는것이냐,고. 이것은 매우 빠르고, 반짝거리고, 자극적이다. 그러나 어쩌면 천박할지도 모른다. 나는 인생이라는 공을 두 손에 들고, 그 둥글고, 매끄럽고, 무거운 감촉을 조용히 느끼면서, 그렇게 며칠이고 가지고 있고 싶다.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인생이라는 공에 홀린 우리. 그것을 손안에 들고 있고 그 반짝거림에 때로 아연해지는 나. 이렇게 세월은 흘러간다고 울프는 이야기한다. 그녀가 <댈러웨이 부인>, <올랜도>, <파도>,<세월> 등을 얼마나 처절한 자기 의심과 싸워가며 아이를 낳듯 산고를 겪으며 세상에 내어놓고 그것의 반응을 전전긍긍하며 기다렸는지를 읽는 일은 그녀가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를 이미 알아버린 입장에서 묘한 감흥을 준다. 그녀는 자신이 이토록 위대한 작가로 남게 될 것이라 전혀 예감하지 못했다. 때로는 독자가 없을 거라 반응이 없을 거라 미리 걱정하고 절망하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는 자기 의심, 삶에 대한 절망을 그녀도 고스란히 똑같이 통과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을 읽는 일은 산다는 일은 이런 거구나, 같은 묘한 동질감을 자아낸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울프의 묘사력으로 소설의 장면처럼 생생하게 살아나는 건 덤이다. 캐서린 맨드필드가 울프의 집에 와서 비웃으면서 읽기 시작한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다 갑자기 놀라서 "영문학사에 남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광경이" 연출되는 장면. 버지니아 울프집에 와서 조이스의 원고를 읽고 놀라는 캐서린 맨드필드.


버지니아 울프가 죽음을 선택하게 될 징조는 일기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인생 전반에 걸쳐 그녀가 갑자기 어떤 절망감을 표현하는 대목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그녀는 삶과 생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느낀 사람으로 보인다. "나는 깃발을 휘날리면서 쓰러지고 싶다."는 표현이 그것에 대한 암시일까. 죽은 뒤에 영국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반문했던 그녀는 역사가 되었다. 일기장 속의 울프에게 들어가 더 이상 괴로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라고 당신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누군가 지금 나의 삶이 이대로 충분히 괜찮다고 잘살고 있다고 얘기해주면 좋을 텐데, 같은 개인적 소망과 함께.


나도 일기를 계속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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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6-08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의 죽음 가지고 뭐라고하면 안되겠지만, 울프는 왜
노년에 자살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오랜 우울증으로 그렇게 됐겠지만…

울프의 일기는 잘 읽히지 모르겠어요. 카프카의 일기는 난해했는데 말이죠.
일기를 쓰시는군요.
저는 매번 써야지 하곤 드문드문 쓰고 있습니다.ㅠ

blanca 2022-06-08 16:06   좋아요 2 | URL
저도 지루할 것 같아서 기대도 안 했는데 예상 외로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천하의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또 놀랐고요. 사후 이런 존재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더라고요. 자살은, 결국 조울증 발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걸로 추정하다고 합니다.

persona 2022-06-08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울프에게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를 추천하고 싶어지네요. 근데 저도 3개월 지나니 모닝페이지 아예 안 쓴다는 ;;

blanca 2022-06-08 16:07   좋아요 2 | URL
삼 일 전까지 행복을 이야기한 사람이 갑자기 죽음을 택하는 게 참 아이러니하죠. 저는 요새 글씨를 쓰는 게 너무 귀찮아졌어요. 그래도 일기만큼은 손글씨를 고집하는데 게을러져 큰일입니다.

기억의집 2022-06-09 1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맙게도 아버지가돌아가셨다는 글에 충격이…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았군요. 저는 울프의 작품을 지루하게 읽었는데… 문득 아주 문득 그녀의 짧은 문장이 생각나곤 해요. 제가 이해했던 그 범위안에서…. 예전에 자살하고 싶었다던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아주 한순간에 자살 충동이 일어난다고.. 그래서 아파트 베란다 창밖 아래를 보면 시멘트로 안 보이고 푹신한 풀밭으로 보여 뛰어내릴까하는 충동이 일어난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요….

blanca 2022-06-09 21:48   좋아요 1 | URL
아버지가 보수적이고 강압적이었던 모양이에요. 당시 딸이 글을 쓴다는 걸 응원하거나 지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죽음에 대한 충동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북깨비 2022-06-10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종영된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넷플릭스로 시청하고 큰 위로를 받아서 아 나도 일기나 다시 한번 써볼까 하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는데 blanca님 리뷰 읽고 나니 막 의욕이 샘솟습니다. ˝미래의 나를 염두에 둔 과거 속에 현재를 밀어 넣는 행위˝라고 하신 표현이 인상 깊었어요. 솔출판사에서 나온 버지니아 울프 전집이 예뻐서 저도 천천히 한권씩 사모으고 있는데 다음은 이 일기를 사야겠어요.

blanca 2022-06-10 20:22   좋아요 1 | URL
저는 ‘나의 해방일지‘는 아직 못봤지만 많은 사람들이 칭찬한 드라마라 관심 있었어요. 일기는...정말이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뒤돌아 보면 나의 과거가 아니라 타인의 기록처럼 느껴질 정도로 낯설게 보이더라고요. 그만큼 쓰지 않은 시간은 그냥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북깨비님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전집 참 예쁘고 맘에 들어요.
 

나이가 들며 과거의 삶과 추억이 이따금 객관화되는 지점을 발견한다.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마치 타인이 지켜보듯 연상해 내게 되는 경험은 뜻밖으로 나쁘지 않다. 그때는 그렇게나 이해할 수 없었던 주변의 어른들의 시간을 통과하며 내 속의 어린 나는 다시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재해석하게 된다. 그 해석은 특별하거나 나 중심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편에 가깝게 다른 사람들과 닮아간다. 나는 특별하지 않았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고 특별하지 않은 종결을 맺게 되기를 바란다. 지구는 절대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한 사실과 화해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나를 잃는 그 최종적 과정에 덜 두려워하며 다가갈 수 있다. 어쩌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나'와 점진적으로 잘 헤어질 수 있는 순간이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를 읽으며 그녀의 그 적나라했던 사적 고백들이 가지는 공적 의미를 깨닫게 됐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과감하게 솔직했다. 소녀 시절의 불법낙태 경험, 유부남과의 밀회, 노동자 계급 부모에 대한 양가 감정. 그러나 그녀 자신도 자신의 이야기들이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 데에서 자신이 점유했거나 점유한 장소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공적 공간에 내어 놓았다. 우리의 고백들이 의미 있는 글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 에르노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경험을 과장하지 않기, 과하게 미화하거나 변명하거나 각색하지 않기, 그것을 통과하고 남은 현재의 자신을 긍정하기.


이 책은 아니 에르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인 이브토와 루앙 그리고 인터뷰 당시 거주지 세르지아에서 다큐멘터리 감독 미셀 포르트와 '장소'를 중심으로 그녀의 인생과 글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다. 


저는 제가 겪었던 일을 다른 사람들 역시 겪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독서를 통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문학에서 저를 위한 무언가를 찾아냈으니까요. 프루스트에게서. 조르주 페렉에게서. 우리 스스로에게 무의식이 <<나도 그래>>라고 말하게 하는 것들이요. 그러면 자신 안에 빛이 생기죠. 그것이 프루스트가 말하는 <<빛을 얻은 삶>>이고요.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나도 그래"를 통해 빛을 얻는 삶이 바로 문학을 통한 준구원의 과정인 읽기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누군가의 특수한 경험에서 보편적 공감의 지대를 찾아내는 일은 채굴 같은 환희를 느끼게 한다. 그것은 그녀가 말미에 인용한 프루스트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단념할 때만 그것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말을 통한 "나도 그래"의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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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5-27 14:4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는 이제 그만 읽어도 될 것 같다고 나름 생각했었는데 인터뷰라니, 이건 또 읽어야할 것 같아요.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 블랑카 님의 글도 참 좋네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저는 사실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이긴 합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가 합니다. 게다가 아니 에르노가 말했듯이, 제가 겪었던 일들을 다른 이들도 겪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이 겪었던 것들을 제가 겪었을 거라는 것도 지금은 알고 있어요. 저는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의 사람이니까요.

blanca 2022-05-27 20:04   좋아요 2 | URL
아니 에르노 저도 솔직히 읽은 글과 안 읽은 글이 헷갈릴 정도고 좀 겹치는 부분들이 있어서 이 책도 이미 읽은 게 아닌가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다른 결이더라고요. 좋았어요. 그리고 그 적나라한 고백들이 가지는 의미를 비로소 찾을 수 있어서 의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날이 갈수록 자꾸 나에 대한 내 자신의 생각이 바뀌어요. 그런데 그게 참 재미있어요. 똑같은 과거인데 자꾸 다른 측면이 보이고...이게 나이듦의 미학인지 단점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persona 2022-05-27 14: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직 가진 추억 닳고 닳도록 꺼내보고 거기에 색칠놀이 덧칠놀이 하는 거 좋아하긴 하지만 이 리뷰를 보니까 읽고 싶어졌어요. ㅎㅎㅎ

blanca 2022-05-27 20:04   좋아요 2 | URL
오, Persona님 댓글이 마치 시 같네요. 색칠놀이, 덧칠놀이...

han22598 2022-05-31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의 특수한 경험에서 보편적 공감의 지대를 찾아내는 일은 채굴 같은 환희를 느끼게 한다.˝ 아...이 말 너무 좋네요. 그 경계선으로 넘어 온것 같아요...나의 삶에서 일어난 경험들은 오로지 나의 것으로만 존재할 거라고 여기며 살아왔던 것 같은데....다시 생각해보니, 아니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아지고 있는 시점으로요...

blanca 2022-06-01 09: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요새 제가 부쩍 드는 생각이라서요. 예전에는 타인들과 교감하는 영역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좀 생각이 달라졌어요. 다른 사람들과의 무수한 교집합에서 어긋나는 일부의 조각들로 나를 정의할 것도 아니다 싶기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피아노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바흐 때문이다. 체르니 50번에 들어가며 바하 인벤션을 치게 됐고 내가 대충 뭉개버리던 왼손이 오른손과 동등한 선율을 구사해야 하는 그 엄격함의 요구 앞에서 나의 빈한한 실력은 들통나고 말았다. 아무리 연습해도 왼손 성부가 제대로 안 됐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억지로 허덕이며 거기까지 끌고 가려던 엄마가 드디어 져줬다. 나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었다. 드디어 인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 


그러나 굴드처럼 바흐를 연주하려면 언제나 모든 음을 완벽하게 쳐야 했다. 케빈 버재너가 말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자비하게 드러나는" 음악인 것이다. "바흐에서는 어떤 것도 피하거나 꾸며낼 수 없다."

-케이티 해프너 <굴드의 피아노>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나는 바흐 앞에서 도저히 더는 꾸며낼 수 없었다. 그 앞에서는 백주 대낮에 숨기려던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꾸미거나 눙치던 것들을 어쩔 수 없이 고백해야 했다. 모든 음을 완벽하게 치지 않으면 반드시 그 불협화음이 드러났다. 무자비하게. 
















굴드의 바흐를 들으면 그래서 전율한다. 그의 왼손은 오른손과 동등하거나 더 현란하고 정확하게 바흐의 명령을 수행한다. 오른손잡이들은 왼손이 오른손의 부수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왼손의 선율은 오른손의 보조 역할을 하도록 하는 대부분의 악보에 충실히 복무한다. 이것을 전복시킨 바흐의 음악 앞에서 약한 왼손은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한다. 대부분이 그렇다. 왼손이 오른손을 지시하고 따르라 할 때 그건 그 행위를 위장하거나 덮어버리려는 욕망과 싸우게 된다.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피아노를 결국 그만두게 된 지점에서의 악몽이 이 책을 읽으며 되살아났지만 동시에 그건 깨끗한 포기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밀고 나갔다면...나는 충분히 불행했을 것이다. 평범한 내가 그 지점을 돌파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 케이티 해프너의 굴드에 대한 이야기는 여느 평전과는 다른 독특한 차별점을 내세운다. 그것은 굴드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굴드가 마치 연인처럼 사랑하고 데리고 다녔던 스타인웨이 CD 318을 통과하는 서사들이다. 그것을 발견하기까지 그리고 그것과 사랑에 빠질 때까지 마침내 파괴된 그것을 단념하기까지의 여정은 굴드의 피아니스트로서의 과업과 삶의 조수간만의 리듬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자신의 바흐를 온전히 호흡하고 받아내 주었던 이 물건의 일대기와 그 자신의 그것을 거의 동일시했다. 한창 전성기 때 스타인웨이 318로 작업했던 레코딩을 오십을 목전에 두고 다시 시도했다는 건 그 자신의 삶의 코다를 향한 흐름과 정확히 일치하는 어떤 전조를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실제 그것을 유언처럼 남기고 뒤따른다. 


물론 비단 318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것을 조율하며 굴드와 연주회, 레코딩에 동행했던 충직한 조율사들, 테그니션들, 심지어 그의 숨겨진 연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 기이한 강박증을 가진 기인 피아니스트의 바흐 절창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저자의 충실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눈앞에서 보이는 듯 복원된다. 어딘가에 떨어져 망가져 버린 318을 복원하기 위하여 여름 더위에 외투를 입고 뒷자석에는 피아노의 거대한 부품을 싣고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을 넘는 굴드의 여정의 묘사는 그가 얼마나 이 음악에 이 피아노에 진심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풍경이다. 어떤 절망 앞에서 지지 않는 희망과 이상을 가지고 순간순간에 모든 것을 던졌던 이 예술가의 처절한 삶은 그의 완벽하리만치 엄격한 바흐의 연주 앞에서 일종의 신기를 보여준다. 그의 바흐를 듣는 일은 이미 죽어 이 세상에 없는 그의 영을 불러내는 일처럼 신비롭고 감동적인 시간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앨범이 발매되고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굴드는 죽었다. 318은 비로소 제대로 복원되었고 많은 그의 후배들이 그것을 연주한다. 생전에는 망가진 상태로 이별했던 그것이 그의 사후 부활했다는 대목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죽음으로써 그의 연주를 불멸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여전히 굴드의 바흐를 듣고 그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연주회에서 직접 듣는 것 못지 않게 생생하게 그의 영혼과 예술적인 완성도를 향해 가는 노력과 열정을 느끼며 감동한다. 어쩌면 우리의 생과 필멸을 뛰어넘는 그 이상의 것이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그의 연주를 들으며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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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6-20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바흐 때문에 피아노를 포기 하셨군요
제 친구들은 쇼팽에서 넘어졌고
러시아 작품으로 넘어가면서
울면서 그만둔 ㅎㅎㅎ

전 피아노 의자 앞에서 몇시간 씩 두드리는 걸 참지 못하지만
바흐 만큼은 좋아해서
한 번 꽂힌 작품 일년 내내 반복 연주 할 수 있습니다(주변인들은 싫어함 ㅎㅎㅎ)

굴드가 연주하는 베토벤도 참 좋아요 ^ㅅ^

blanca 2022-06-22 13:58   좋아요 2 | URL
왼손을 오른손처럼 쓸 수 없어서 포기요. 하지만 여전히 애증의 음악가이고 제일 좋아하는 작곡가입니다. 오, 스캇님 여전히 피아노 치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