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메일로 내가 원하지도 않은 미국 신용 카드 갱신 소식을 받았다. 역시 어떤 확인 절차도 없이 미국의 옛주소지로 이미 발송했다는 소식.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미국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타국에 있으니 자기 확인 절차도 번거롭고 잘 되지도 않았다. 해지 부서 연결만 거의 몇 번을 실패하고 가까스로 연결되어 내 이름을 묻는 직원들 목소리에는 인사부터 피곤이 가득했다. 거기다 내 이름을 듣는 순간 거의 모두가 잘 안 들린다, 다른 번호로 걸으라며 바로 끊어버리는 것이다. 외국에서 걸려온 어려운 발음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퇴근 시간 가까워서 그것도 안 좋은 발음, 서툰 영어로 카드 해지를 요구하니 그들 입장에서 반가운 전화일 리 없다. 그래도...난 요새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이고 그런 그들의 대처에 충분히 상처 받는다. 


밤 늦게까지 깨어 있다 다시 시도하니 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내가 너무 여러 번 전화해서 이상 움직임이 느껴져 일처리를 해줄 수 없단다....24시간 지나 시도하란다. 이건 또 무슨.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마침 <콜센터의 말>을 읽고 있던 터라 그냥 조용히 따르기로 했다. 그들도 매뉴얼에 따른 것일 테니. 그걸 두고 내가 뭐라 한다고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미국의 서비스는 대체로 느리고 차갑다. 여기엔 장단이 있다. 고객 입장이 되면 괴롭고 힘들지만, 노동자 입장이 되면 누리는 지위가 있고 이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단순히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는 입장이라 해서 직원을 상대로 고객이 쉽게 갑질을 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은 왕이다,는 어쩌면 폭력적인 슬로건일 수 있다. 이 표어는 우리를 고객의 위치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지만 많은 경우 누구나 그런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노동자의 입장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일본 여행사의 콜센터에서 일한 한국인 저자의 경험담이다. 일본 콜센터라지만 결국 동양적인 정서를 공유하는 만큼 우리나라 콜센터에서 일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우리나라 콜센터 직원들은 과도하게 친절하다. 아마 미국의 콜센터처럼 응대했으면 고객들의 민원이 빗발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과연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도한 요구, 때로는 감정의 배설구로 콜센터를 이용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은 무방비다. 콜센터의 직원도 감정과 인격을 가진 노동자다. 그러나 현실은 조직의 부속품으로 고객의 버퍼존으로 치부되며 끊임없이 붕괴된다. 


이런 이유들로, 무례함을 견디는 일은 상담원의 숙명이다. 다행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경험이 쌓이면 어떤 말을 들어도 침착히 업무를 완수할 내공이 길러진다. 상처에 무디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괜찮다고 착각하는 순간에도 몸과 마음은 착실히 병든다. 작은 물방울이 축적되면 거대한 바위도 뚫듯, 매일 시퍼렇게 날 선 말을 들으면서 멀쩡하기는 힘들다.

-<콜센터의 말> 이예은


우리는 익명의 이들과 하루에도 여러 번 만난다. 무심코 그들에게 하는 행동들, 말들이 작은 물방울들이 되어 서로에게 떨어진다. 이건 사소한 것 같지만 그건 피부를 뚫고 마음을 뚫고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상처는 아물지만 다른 힘든 일이 겹치면 그 상처는 다시 열린다. 그러면 멀쩡하기는 힘들다. 서로가 감정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의식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럼에도 여러 겹의 층위가 있는 미국의 콜센터를 상대하는 일은 부담스럽고 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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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29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미쿡 콜센타 직원들 대부분 인도 출신들인데,,,

블랑카님 클 날 뻔했습니다
그쪽 서비스가 울 나라 같이 빠르거나 소비자를 위한게 없거든요

요즘 콜센타 음성은 AI가 ^^

blanca 2022-09-29 15:38   좋아요 1 | URL
진짜 불친절하더라고요. 대부분 인도 출신인지 몰랐어요. 우리나라 서비스가 세계 최고죠. 그런데 그러기 위해 또 서비스노동자들의 감정 노동이 당연시되니 이것 또한 문제고요. 여튼 해결 못했어요. 미국에 와서 해결하라는 식이던데요? --;;
 

이따금 이런 글을 읽어줘야 한다. 그래야 내가 허투루 쓰는 혹은 쓰게 될 시간들을 아낄 수 있다. 쓸데없는 슬픔들, 쓸데없는 회한들, 쓸데없는 열패감, 소모적인 우울. 그리고 무엇보다 스마트폰.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보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삶에서 빼앗겼는지, 쓸모없는 슬픔과 어리석은 기쁨, 탐욕스러운 욕망, 사회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것을 소진했는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제니 오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이것은 제니 오델의 말이 아닌 세네카의 말이다. 그러나 오직 온라인의 연결만을 강조하며 저도 모르게 소비 마케팅의 표적이 되면서 끊임없이 인터넷 세계를 유랑하며 보내는 시간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으로 오인하는 우리들에게 저자가 하고 싶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 자신의 계절 속에서 삶을 흠뻑 향유하기 위하여 여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세네카와 만난다. 


지하철에 타서 고요히 승객들을 관찰한 적이 있다. 정말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동승자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필 그날, 그 칸은 그랬다. 순간 으스스했다. 서로의 시선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거나 종이책을 넘기거나 종이 신문을 접어서 보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는 공간에서 나도 그전까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집단으로 우리는 이 가상의 세계에서 한 발짝 떨어지는 훈련을 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단 10분만이라도 그 강요된 연결에서 해제되어 진짜 물리적인 현실에 다시 발을 딛는 연습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독립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며 스마트폰을 다루는지 모르지만 그 세계에 오래 머무를수록 우리는 자본주의의 소비자 마케팅에 가장 효율적인 개인 정보들을 저도 모르게 노출하여 생산자들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공교롭게 뭔가를 하는 대신, 하지 않는 법, 최소한으로 하는 법에 관련한 고대,중세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연이어 읽게 됐다. 이번에는 스피노자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저자 스티븐 내들러는 스피노자의 권위자로 꼽힌다. 이 책은 한 자리에서 주르륵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분량이 많지 않은데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게 된다. 어렵거나 지나치게 사변적이지 않으면서도 형식적이거나 표면적이지 않은 스피노자 철학은 지극히 현재적이다. 메멘토 모리도 아니고 죽음을 최소한으로 생각하라니,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통념에 반하는 이야기는 그러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나의 유한함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현재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자유인은 죽음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이성적 기쁨을 누린다.

-스티븐 내들러 <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여기에서 자유인은 스피노자가 상정한 이상적 인간상이다. 현실의 격랑, 정념에 얽매이지 않고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이성적인 준거틀에 의해 모두에게 유덕한 판단을 내리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 우리는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 완벽하게 그렇게 되지 못할지라도 현실의 쾌락과 충동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진정한 의미에서 아름답고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자유인은 쓸데없는 감정, 회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속박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성적 삶을 누리며 자신의 관념이 더 큰 전체의 일부로 영원히 편입될 것임을 확신한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명확하지만 존재의 소멸로 삶을 일회성으로 폄하하는 차원이 아니라 더 큰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사물과 삶의 필연성을 이해하며 모든 이행을 관조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어떻게 해보려 덤비는 대신 그는 평온하고 평화롭게 그것을 지켜본다. 마치 자식을 키우는 것과 같다. 내 삶은 나에게서 결국 떨어져 나가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양질의 것으로 충실하게 키워낸다. 


어떤 일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게 더 좋다. 많이 넘치게 생각하는 것보다 최소한도로 그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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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8-30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이 넘치게 생각하는 것보다 최소한도로 그치는 것]
삶의 미니멀리즘이 필요한 시기 인 것 같습니다.
몇 일 후면 가을, 9월
추석 앞 두고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올 여름 물, 비가 넘치게 와서 걱정 ^^

blanca 2022-08-31 09:02   좋아요 2 | URL
이제 비만 오면 무섭네요. 세계 정세들 둘러싼 온갖 우울한 소식들 일색이지만 그 와중에 즐거운 일상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mini74 2022-09-0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blanca 2022-09-09 21:2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떤 책을 읽으며 다음 읽을 책을 바로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책이 기대 이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 독서도 만남처럼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저자와 비슷한 연배로 대학교 시절 들은 강의를 기반으로 한 공부의 의미와 위로에 천착한 책은 수많은 그 시절들의 추억을 소환했다. 쓰는 일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교양국어>,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친구를 꼬셔 함께 들은 <여성 심리학>, 새로운 언어는 세계의 확장이라는 깨달음을 준 <교양 스페인어>...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 책은 주인공이 고고학자인 강석경의 <내 안의 깊은 계단>으로 나를 이끈 책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저자 곽아람은 여러 번 이 소설을 인용한다. 그 인용 대목이 인상적이고 주인공의 직업에 관심이 가서 구입하게 된 책은 마치 과거에서 온 책 그대로인 것처럼 99년의 색깔, 판형, 활자, 가격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 책이 아직도 남아 이렇게 오롯이 독자의 품에 안긴 걸까. 


층층이 쌓인 삶의 각질과 죽음,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물 속에 인류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오늘도 주검을 거두며 시간의 강은 살쪄가는 것이다.

-pp.10


고고학자인 강주는 학생들을 이끌고 경주의 유적 발굴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연인 바이올리니스트 이진, 사촌으로 연극을 하는 강희, 사서 소정이 서로 교차하며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는 작가의 치밀한 자료 조사와 탐사, 인간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깨달음이 한데 어우러져 깊이가 있고 탄탄하여 감동과 여운이 길다. 특히 고고학에 대한 이야기는 현장에서 직접 함께 오랜 시간을 가로질러 유물을 발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다. 


시대적 배경의 한계로 인한 남성, 여성의 묘사는 때로 거칠고 아쉬운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소정이 자신을 억압하는 가정을 박차고 나가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찾는 구도는 작가가 그 시대 안에서 고민한 여성주의의 흔적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주, 강희, 이진이 아닌 소정이 아닌가 싶다. 


업의 비늘이 떨어져나가 우주의 바람에 묻어가는 듯했고 소정은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을 눈앞에 펼쳐 있는 구름 이불 위에 던지고 싶었다.

-pp.308


천년의 고도 경주를 배경으로 한 네 남녀의 얽히고 설킨 사랑, 이별의 교차로에서 삶의 비의를 건져올린 작가의 저력과 아름다운 문장들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다. 이 삶의 "고통의 낭비"과 되지 않도록 "내 안의 깊은 계단"을 딛고 내려가 본질을 찾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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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01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릴레이 독서. ^^ 그래서 읽어야 될 책탑은 산처럼 쌓인다죠. 그럼에도 저렇게 내 맘에 꼭 드는 책을 새롭게 발견했을 때는 역시 감동입니다. ^^

blanca 2022-08-01 09:49   좋아요 1 | URL
맞아요. 가장 우울할 때는 읽을 책도 읽고 싶은 책도 없는 상태인 것 같아요.

scott 2022-08-04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읽고 놀라웠던건
대학 시절의 모든 교재와 과제 리포트까지 전부 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거!ㅎㅎㅎ


blanca 2022-08-05 09:06   좋아요 1 | URL
저도요! 저자가 저랑 비슷한 학번인 것 같은데 저는 1도 기억 안 나더라고요. 한편 참 부럽더라고요. 그렇게 자기의 대학 생활을 아카이브로 구축해 놓았다는 것이...
 



김연수가 맞았다. 사십대는 골짜기 같은 나이라고 했던 말. 젊던 부모님은 늙어 약해지고 책임은 넘친다.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너무 많지는 않은 그가 하는 나이 먹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살게 됐다. 그의 이야기 대부분이 맞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이야기하는 청춘, 중년,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아마 노년에 대한 이야기도. 말로 할 수 있다면 그건 괜찮다는 이야기다. 

















특히 그의 스무 살에 대한 이야기, 그 스무 살을 지나 서른다섯이 된 이야기는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말로 할 수 없었던 그 복잡한 감정의 결을 시적 언어로 형상화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스물에 서른을 꿈꾸는 일은 쉽지 않다. 더더군다나 오십은. 작가는 코로나 시국에 청춘과는 멀어 보이는 오십대가 됐다. 그리고 이십 년 전에 썼던 이 두 책들을 다시 쓰게 된다. 문장을 다듬고 빼고 합치고 더했다. 자신의 과거와 다시 만난다. 그리고 독자는 그걸 읽는다. 작가의 과거뿐 아니라 그 과거를 읽었던 나의 과거와 재회하는 기분은 특별하다. 나는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난다. 김연수가 가교가 되어.
















김연수가 쓴 <청춘의 문장들>을 분명 몇 번이나 읽은 것 같은데 작가가 다시 쓴 <청춘의 문장들>은 다른 책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제 쉰을 넘긴 작가가 추억하는 이십대, 삼십대의 이야기들의 톤이 미묘하게 수정되거나 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삼십대에서 사십대로 넘어온 것도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이렇게 나이듦은 읽기를 변화시킨다. 다시 읽기의 맛은 이런 것일 테다. 똑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들린다. 한정 없이 뻗어 있을 것만 같은 인생의 전망이 터널화되면서 청춘의 문장들은 더 아름답고 애잔하게 느껴진다. 유치하다거나 가소롭기는커녕 더 심오하고 확장되는 묘한 경험이다. 그 치기가 그 자기 중심성이 귀엽다. 다 한때니까. 그 농밀함이 부럽다. 이제 다신 경험할 수 없다. 그 감정의 깊이, 미숙함, 돌연함을.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겪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사람을 스무 살 무렵에 다 만났으며 그 모든 길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걸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그 모든 슬픔을, 그 모든 환희를, 그 모든 외로움을 스무 살 무렵에.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새털 같이 한정 없어 보이던 날들 중 단 하루를 스무 살의 나를 위로하며 보낼 또 다른 중년의 나로 파견 보내고 싶다. 매일 울고 매일 고통스러워하던 그 스무 살의 아직 덜 큰 십대 소녀에게 섣불리 어른 흉내를 내지 말라고 시간이 너를 성장 시킬 것이기에 너는 그토록 빨리 어른이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스무 살은 스무 살로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넌 미래에 이 시절의 너를 미친 듯이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다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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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8-03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리뷰 읽자마자
연수옹 이 책 냉큼 구입했습니다
몇 일 전에 마음산책
폴짝?홀에서
강연을 했는데

자신의 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신숙주, 성상문, 백석 시인 이야기 까지
거의 역사 수업이였습니다 ㅎㅎㅎ

블랑카님 20대로 돌아가시면

북튜버로 ^^

blanca 2022-08-03 09:24   좋아요 1 | URL
헉, 강연 듣고 싶어요. 스캇님 정보력은 아무도 못 따라감요.
 

첫애는 또래보다 이른 시기에 둘째는 또래보다 늦은 시기에 낳았다. 여섯 살 차이라 그런지 첫애를 키울 때의 그 전투력, 엄격함과는 전혀 다른 결로 둘째를 대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곁에 품고 있는 기간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그 아득함이 하루하루가 줄어드는 아쉬움으로 대체됐다. 오십대에 아이를 얻은 지인은 아빠가 아니라 할아버지 같아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신생아의 머리 냄새, 그 통통한 손발을 잡는 시간이 얼마나 황금 같은지를 알 것이기에 한편 부럽다. 그는 육아를 지난한 시간을 죽여야만 하는 소모적인 것으로 오인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들어 가지는 아이는 줄어드는 시간에 비례해 성장하며 부모의 삶의 밀도를 높인다. 나는 몰랐다. 

















팀 오브라이언은 쉰여덟에 큰 아들을 이 년 뒤에 둘째 아들을 얻게 된다. 오랜 기간 아버지가 되기를 망설였고 따라서 인생이 종반부에 왔을 때에 그에게 기적처럼 온 아들들을 키우며 노년과 탄생, 성장의 기간이 겹치는 아이러니를 맛본다. 그는 아들들에게 자신이 베트남전에서 겪은 그 지옥 같은 전쟁의 무익한 폭력과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자기만의 헤밍웨이에 대하여 일종의 인생 수업을 위한 <아빠의 어쩌면책>을 쓴다. 자신이 아들들의 성장의 여정에 길게 동행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사전 예방작 업의 일환으로.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후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한 자료로 아빠의 Maybe Book은 씌어진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운 좋게도 그는 성인이 된 아들들 옆에 아직도 건강하게 생존 중이다. 


지극히 사적으로 보이는 이 책은 그러나 역시 팀 오브라이언의 글답게 모두에게 공명하는 공적 영역으로 심화, 확장된다. 지금도 우리는 전쟁 중이다. 그 어떤 명분으로 포장해도 그건 팀 오브라이언의 말을 빌리자면 "누군가의 자부심은 누군가의 슬픔이다. 누군가의 조국 봉사는 누군가의 죽은 아들이다. 올곧음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그는 용기있게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한다. 정당한 명분을 동원해도 결국 약자들과 민간인을 도살하게 되는 전쟁의 그 잔인한 본질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악의 핵심에 있는 익명화되는 적들측에는 우리만큼 소중한 아들과 딸들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 어떤 전쟁도 결국 아이들을 죽게 한다는 그의 말이 무겁다. 전쟁을 승인하는 자들을 직접 전쟁터에 보내라는 그의 말에는 이십 대 초반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피곤한 군화를 한 걸음씩 옮기며 명령에 복종하여 사람을 죽여야 했던 그의 과거에 대한 회한들이 깊게 투영되어 있다. 그는 무사히 건강하게 평범하고 안전한 삶으로 돌아왔지만 그 자신 증언의 의무를 방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의 평생을 따라붙는다. 


죽을 때가 되면 모든 게 빛을 띤다. 평화로울 때, 이를테면 청춘기에는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들이 언제부턴가 눈물이 날 만큼 소중해지는데, 혹시 늙음을 벌충해주는 장점이란 게 있다면 한때 어이없을 만큼 시시하게 보였던 것들의 진가를 알아보는 즐거움이 그것이다. 

-<아빠의 어쩌면 책> 팀 오브라이언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 하늘이 유한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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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7-19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들들이 성인이면 작가분이 팔십 넘었겠군요. 갑자기 신성우 떠 올랐다는..그도 나이 오십 초반에 첫째 아들을 그리고 올해 둘짜 아들 태어난 것 같던데.. 나이 들어 자식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blanca 2022-07-19 19:06   좋아요 0 | URL
흑, 전 그래도 다시 아이 키우라면 사양 할 거예요.^^;;; 그 숱한 불면의 나날들...

바람돌이 2022-07-19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이들 둘을 모두 좀 늦은 나이에 낳았더니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요. 얘들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걸 못하고 있구나 이런 조바심이 없었다는..... 그래서 심적으로는 참 여유있었는데, 체력이 안돼서 힘들었던 기억이.... ㅠ.ㅠ

blanca 2022-07-19 19:07   좋아요 0 | URL
저는 첫애를 좀 이른 나이에 낳아서 의욕만 앞서고 해서 많은 실수를 했어요. 조바심도 많이 들었고요. 체력과 연륜이 같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느 하나가 항상 모자라요.

그레이스 2022-07-19 18: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팀 오브라이언 책 몇권 있는데 생각이 안나네요 ㅠㅠ

blanca 2022-07-19 19:07   좋아요 1 | URL
저는 요새 읽었던 책도 또 사고 고유명사는 아예 기억도 안 납니다.

coolcat329 2022-07-19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지난달인가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샀는데 이 분이 이런 에세이도 쓰셨군요. 늦게 얻은 아들 끝까지 돌보지 못할까봐 쓴 책이라니 진심이 담긴 책이겠어요.
코맥 맥카시도 늦게 얻은 아들 위해 <로드>를 썼다고 기억하는데(확실치 않지만요😅) 아버지의 특별한 자식 사랑입니다.

blanca 2022-07-19 19:08   좋아요 1 | URL
사실 이런 류의 책들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개인적이나 감정 과잉이기 쉬운데 역시 팀 오브라인이 써서 그런지 정말 깊이가 있더라고요. 줄 엄청 그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