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름답거나 예쁜 걸 보면 이상하게 슬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 대상은 자연이 될 때도 있고 사람인 경우도 있고 심금을 울리는 연주회인 경우도 있다.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일까? 가짜 중에 진짜를 봐서 그런가? 진짜가 있긴 한 건가? 이것도 결국 사라질 텐데...


체호프의 <미녀>를 읽다 무릎을 쳤다. 십대의 소년은 할아버지와 우연히 아르메니아인 마을에 들렀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소녀의 아름다움을 은밀히 음미하다 그만 슬퍼지고 만다.  소녀가 가진 아름다움은 이윽고 늙은 할아버지,  소년 그 자신, 소녀를 모두 불쌍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든 촉매제가 된다. 우리가 사는 삶은 아름다움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없다.  우리 모두 그 삶을 통과해서 사라지니까. 바로 그거였다. 내가 언어로 형상화할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을 체호프는 당연히 해냈다. 그만의 방식으로 더없이 아름답게.


이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묘한 것이었다.  마샤가 나의 마음속에서 불러일으킨 것은 욕망도, 열광도, 쾌감도 아니었으면 어떤 달콤하면서도 괴로운 슬픔이었다. 그것은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마치 꿈처럼 모호한 슬픔이었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자신과 할아버지와 아르메니아인이, 나아가서는 이 아르메니아 소녀까지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네 사람 모두가 인생에서 중요하고 꼭 필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이제는 그것을 영영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체호프 <미녀>



체호프의 모든 단편이 그러하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데 달콤하면서도 괴로운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을 굳게 믿는 친구의 아내와의 외도의 현장을 결국 그 친구에게 들켰을 때에 느끼는 자괴감,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는 주교가 되어서도 자신이 죽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 속에 느끼는 허무, 한 청년의 삶을 저당 잡은 내기에서 그 판돈을 아꼈음에도 패배자의 고뇌를 절절히 경험하게 되는 그 아이러니. 이 모순, 역설, 아이러니 그 자체가 체호프가 우리의 삶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치트키인지도 모른다. 체호프의 이야기는 설사 그게 체호프에게 실패였다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계속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문지혁 작가가 미국에서 한국어 교사를 한 경험과 귀국하여 글쓰기 창작 수업을 한 과정 자체가 두 이야기의 뼈대다. 수업 시간 에피소드들과 군데군데 작가의 어린 시절, 문학에 대한 감상, 가족의 이야기가 잘 버무려져 있다. 실제 학생들과의 교감이 느껴지는 생생한 현장감, 어린 아이를 키우며 경험하게 되는 경이로움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이야기로서의 힘과 잘 정제된 단단한 문장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몰입감이 좋다. 개별적인 자신만의 경험을 확대하고 심화하는 작가 특유의 힘이 느껴졌다. 재미있고 뭉클한 대목이 많았다. 어린 시절을 써내야 하는데 어린 시절 기억이 아예 없다고 했던 학생 무영은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쓰인다. 




장강명 작가의 문장은 리듬감이 있다.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단문의 깔끔한 문장이 읽는 행위 자체에 박차를 가한다. 그가 소설가로 살며 느끼는 단상들, 글을 쓰는 자로서 보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눈치 보지 않는, 포장하지 않는, 솔직담백한 자신의 입장, 의견에 대한 이야기들에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한편 집 청소를 전담하게 되면서 그 일을 조직화한 작가의 노력과 위트에 박수를 보낸다. 청소 동선, 배분이 정말 효율적이라 따라하고 싶어진다. 참, 그러고 보니 두 남자 작가가 다 카버의 이야기를 한다. 서로 다른 시각에서 보는 카버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같다.



내가 하는 경험은 언어화하기 이전에 결코 내면화할 수 없다. 막연하게 무언가 강렬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의 이름을 잃어버렸을 때의 허탈함을 모처럼 세 작가 덕에 잊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는 달콤한 슬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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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04 1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너무 좋습니다 ㅜㅜ 제대로 설명할수 없는 좋음이 있는거 같아요. 미녀를 보니까 체호프 단편을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blanca 2023-05-04 18:22   좋아요 2 | URL
저 이번에 또 느꼈어요. 왜, 톨스토이가 체호프를 사랑했는지, 오죽하면 부인이 그 둘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했다는 풍문도 있더라고요. 이 사람은 뭐지? 이 사람은 대체 어떻길래 이런 글을 쓰지? 나중에 해설로 생애까지 듣고 나니 아, 이래서 체호프구나, 또 싶고요.

다락방 2023-05-04 15: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실린 단편집을 제가 엄청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크- 체호프 좋지! 하며 읽어내려가다, 문지혁 작가가 궁금해집니다. 링크하신 책들 저도 한 번 봐야겠어요. 미국에서 한국어 교사를 한 경험이라뇨. 그러고보니 수키 김이 평양에서 영어교사 한 경험을 쓴 에세이가 있지 않았나요? 그것도 함께 검색해봐야겠어요.

언제나 믿고 읽는 블랑카 님의 글입니다. (저는 장강명은 비호감 ㅎㅎ)

blanca 2023-05-04 18:26   좋아요 2 | URL
체호프 단편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네요. 우리나라 번역된 게 다가 아닌가 봐요. 겹쳐서 읽게 되기는 한데 읽을 때마다 정말 너무 좋아요. 대체 왜 장편을 안 남긴건지...문지혁 작가는 일단 제가 유튜브 구독자라서요. 어디 한번 읽어볼까, 했는데 오랜만에 참 재미있는 한국 소설 만났다 싶더라고요. 그리고 그럴 수 있어요. 저 어떤 지점인지 알 것 같아요. ^^;;;;

coolcat329 2023-05-04 1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저 단편집 읽었는데 <미녀> 내용이 전혀 기억이 안나서 당황했어요. 너무 아름다운 꽃 날씨 이런 거 볼 때 저는 순간 슬퍼지는데 체홉이 저렇게 묘사했군요. 저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blanca 2023-05-04 18:27   좋아요 2 | URL
아, 저 <미녀> 읽고 너무 좋아서 접고 줄치고...체호프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겁니까? 사람까지 좋아질라 해요. ㅋㅋ 저거 읽고 작품 싹 다시 검색 중이네요.

책읽는나무 2023-05-06 1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지 손더스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가 체호프 단편집 펭권 출판사 걸로 한 권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전 앞에 두 개 정도 읽었는데요.
체호프에 대한 리뷰가 더 친밀하게 읽힙니다.
달콤한 슬픔이라니...
저도 빨리 느껴보고 싶네요^^
문지혁 작가와 장강명 작가의 책도 읽어보고 싶구요. <초급 한국어>랑 <중급 한국어> 서점 갈 때마다 눈에 띄었었는데 한국어 교사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었군요. 재밌겠어요^^

blanca 2023-05-07 16:36   좋아요 1 | URL
조지 손더스는 체호프를 부르는 책이죠. 저는 을유문화사 단편집을 읽어서 이번에는 민음사 걸로 읽었어요. 워낙 단편을 많이 쓴 작가라 여전히 아직 읽지 않은 보석 같은 단편들이 많다는 데에 안도를 느낍니다. 체호프는 생각 없이 편안하게 읽다 갑자기 가슴이 찡해져요. 거장이란 이런 거구나, 싶더라고요.

고양이라디오 2023-05-09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희곡 <바냐 아저씨> 읽어보셨나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이 희곡 알게 됐는데 너무 좋아요!

체호프가 읽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ㅎ

blanca 2023-05-09 17:10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희곡집 샀는데 꼭 읽어볼게요.

yamoo 2023-05-12 06: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체호프, 포, 고골 등의 단편집들은 여타 출판사들이 중복출판해서 서로 겹치는 단편들이 너무 많아요. 체호프 단편집 출간된 거의 모든 책이 있는데, 중복된 단편들이 너무 많고 도 어떤 출판사는 제목의 어휘를 다르게 번역해 읽어 봐야 중복 작품인지 알아요.

애드가 알레 포의 단편들도 너무 중복된 책들이 많아요.

저는 체호프의 단편집을 거의 다 읽었는데, 이 중에서 제일 웃기고 재밌었던 건 지만지고에서 나온 유머 단편집입니다. 거기 가물치가 좀 길게 수록되어 있는데, 진짜 웃겨서 죽는 줄 알았네요..ㅎㅎ

blanca 2023-05-12 10:21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가물치> 꼭 읽어봐야겠네요. 제목만 들어도 웃기네요. ㅋㅋ 가물치라니...
 

십대 딸이 가족 카톡방에 뜬금없이(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갑자기 바퀴벌레가 되면 어떡할 거야?"라고 물었다. 이미 오전에 부모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낸 중고등학생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  솔직하게 답변하기 힘들었다. 나는 다리가 많은 바퀴벌레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그런데 하필 내 딸이 바퀴벌레로 변신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줄 수 있을까.



이 질문 참 낯익다. 카프카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쓴 이야기가 백 년이 지나 자신은 알지도 못한 한 아시아의 나라 청소년들의 밈이 될 줄은.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출근 전에 자신이 침대 위에서 거대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황당한 설정은 얕은 판타지가 아니다. 카프카는 그레고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레의 몸으로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의 일원으로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수행해야 하는 책임을 상기하고 그것을 벌레의 몸으로 하지 못하는 데에 대하여 느끼는 죄책감에 주목한다. 벌레로 변한 그를 연민하거나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런 그를 부끄러워하고 피하고 제거하고 싶어한다. 그가 무능력한 가족들의 빨대가 되어주어 집안에 실질적인 경제적 도움이 되어줬을 때에도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보다는 당연시했고 그게 불가능해진 시점이 오자 그를 무시하고 조롱한다.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한 인간이 더 이상 사회가 부여한 외형적 가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그가 느껴야 하는 절망과 소외감을 놀랍도록 명징하고 세련되게 형상화한 우화다. 생명이 생명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을까? 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전제를 전복시키는 이야기는 인간이 잘 살겠다고 만들어 놓은 구조적 헤게모니가 얼마나 강력하고 잔인한지 시사한다. 카프카의 냉소적인 시선은 사랑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기능과 기여로 의존하고 존중하고 존중받았는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예감을 카프카는 현실화시킨다.


십대의 사춘기 아이들은 어쩌면 이런 그레고르의 변신을 둘러싼 가족의 변심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성적으로 평가되는 자신들의 성과로 부모와 불화하고 더 이상 존재만으로 기쁨을 주던 영유아기의 매력을 소유하지 못할 때에도 부모들은 자신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줄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너가 바퀴벌레가 되어도 난 기꺼이 난 너를 안아줄거야, 라고 말할 수 있어야 사랑이겠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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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04-09 15: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딸아이가 (저도 십대 아이) 엄마 내가 서울대에 못 가도 나를 사랑할 수 있어? 라고 말하더라구요. 물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근이지, 라고 카톡 아니 디엠을 보내고난 후 공부를 잘 하는 아이와 공부를 못하는 아이를 대할 때의 엄마 마음이란 건 어떤 식으로 다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는데 수치심과 자랑스러움 그 사이겠구나 싶었어요. 저는 공부를 못하는 딸이었는데 엄마에게 물어보니 공부를 잘 하는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대로 예뻤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여도 뭐 내 새끼니까 공부를 못한다고 그런 걸로 막 애정이 식고 그러지는 않았던 거 같은데? 말씀하시더라구요. 블랑카님이 말씀하신 문장들을 다시 읽어보니 역시 그래도 내 새끼가 공부를 잘해서 인 서울 하는 편이 지방대 가는 편보다는 자랑스럽겠구나 어쩔 수 없이 뼈를 때리더라구요. 있는 그대로 그 존재 자체를 마주하고 사랑하는 일조차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쉽지 않구나 새삼 느낍니다. 아이들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내가 바퀴벌레가 된다 해도, 내가 서울대 아닌 지잡대를 간다고 해도 엄마는 아빠는 나를 사랑해줄 거야 라는 믿음과 그 믿음이 바탕이 되어 내게 물어보았을 때 아이가 원하는 대답을 스스럼없이 해주면서도 다시 한번 통렬하게 깨닫게 되는 거 같습니다. 머리로는 이미 합리적인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만 아이들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은 이미 하나로 올곧게 정해져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고. 바퀴벌레 말씀하시니 떠오른 건데 전 거미나 지네 뭐 바퀴벌레도 그렇고 탁탁 죽일 때마다 아 만일 저게 전생에 우리 아빠였다면 어쩌지, 내가 보고싶어서 지네로 나타난 거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 들더라구요.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카프카의 변신.

blanca 2023-04-09 16:42   좋아요 1 | URL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게 한국 사회에서는 소위 좋은 학교에 보낸 결과론적인 걸로 치환되잖아요. 그걸 민감하게 느끼는 게 십대 아이들이고요. 공부를 잘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조건부적 사랑을 느끼게 되는 시기인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은 사람 그대로 사랑받아야 한다는 기본 명제가 있고, 저도 어려워요. 그런데 최근들어 다시 보이긴 해요. 카프카는 정말 선각자구나 싶어요. 아이를 낳기 전에도 이미 다 알았던 거예요.

페넬로페 2023-04-09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런 질문을 엄마한테 보내는게 유행이라고 하네요.
저도 받았어요.
카프카의 변신을 이미 읽어서 질문이 어떤 의미인줄 알아채고 딸아이가 좋아할 만 한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어요.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blanca 2023-04-09 16:43   좋아요 1 | URL
그런데 왜 갑자기 카프카일까요? 그것도 너무 신기해서요. 저는 안 읽어봐서 이번 기회에 처음 읽었는데, 우아, 입이 딱 벌어지더라고요. 카프카가 카프카했더라고요.

책읽는나무 2023-04-09 15: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딸 아이에게 저 질문을 받았습니다^^
전 변신을 예전에 읽어서인지?
어? 그거 카프카 소설이랑 비슷한 내용인데?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와.. 너 그 책 읽었단 말? 와...... 수선 떨었더니 안 읽었지만 일단 대답해 보라고 윽박질러, 뭔가 좀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냉큼 엄마는 니 방에 밥도 주고 평소처럼 벌레가 아니고 넌 내 딸이다! 세뇌시키며 살 거라고 말해줬더니 씨익 웃더라구요. 역시 뭐가 있군! 생각하고 빨리 말하라고 했더니 역시나 요즘 유행하는 십 대들의 질문이래서, 전 좀 뜬금없으면서 부모의 사랑을 확인한다는 게 아이들답다! 싶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책을 읽지 않은 남편의 반응이 궁금해서 아빠한테도 물어보라고 시켰더니, 박스 안에 넣어 먹이를 주며 키운다.라고 대답해서 응? 무슨 뜻? 그랬었네요ㅋㅋㅋ
전 질문을 받아도 그렇게 깊이 생각해 보질 못했는데 블랑카 님의 글을 읽으니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질문이네요^^

blanca 2023-04-09 16:44   좋아요 1 | URL
아버님 답변 ㅋㅋㅋ 명답이시네요. 아이들 참 엉뚱하죠. 갑자기 카프카 소환...카프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떤 말 했을까 궁금도 하고요...그런데 읽어보니 참 십대 아이들에게 아주 적절한 상황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일까? 저도 돌아보게 됐습니다.

바람돌이 2023-04-09 16: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질문이 요즘 청소년 사이에 밈이군요. 이제 십대 딸이 없으니 이런 거 아무도 안보내네요. 근사하게 답 잘해줄 수 있는데.... 안타깝다. ㅎㅎ
blanca님이 말하는 그런 불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요즘 아이들이 카프카의 변신을 읽는다면 독특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으로 읽는다든가 말입니다. 제가 읽을 때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편화되고 도구화되는 인간존재의 문제 뭐 이런걸로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전자가 더 근사하게 카프카를 읽는 방법이 되지 않을가 뭐 그런 생각이 들어요. ^^

blanca 2023-04-09 16:46   좋아요 1 | URL
저는 이번에 이 유명한 소설을 처음 읽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또 다른 측면으로 읽었어요. 카프카와 아버지와의 관계에 드리운 암운...뭐 그런게 좀 읽히더라고요. 안 그래도 아주 불화했다는 얘기가 있긴 하더라고요. 자식이 나의 자랑이 될 때 가계에 도움이 될 때 지지해 주는 부모의 허울 좋은 사랑이 사실 자본주의의 인간 도구화와 통하죠. 여하튼 덕분에 벼르던 <변신> 읽고 저는 감동 받았어요. ^^

페넬로페 2023-04-09 17:19   좋아요 0 | URL
20대들에게도 유행이예요 ㅎㅎ

새파랑 2023-04-10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새 청소년들 사이에서 카프카가 유행인가 보네요. 요즘 청소년들 수준이 너무 높은거 같아요~!!

blanca 2023-04-10 10:41   좋아요 2 | URL
저는 정말 궁금한 게 누가 가장 먼저 이 질문을 생각해냈을까요? 그리고 그게 호응을 얻은 것도 너무 신기하고요. 뭔가 카프카는 세대와 지역을 넘어 쿵하게 하는 지점이 있나 봅니다.

다락방 2023-04-10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도 피해갈 수 없었군요! 요즘 SNS 에서 이거 엄마한테 질문하고 서로 답변 공유하더라고요. 하하하하.
저는 저한테 질문할 사람은 없지만 만약 정말 너무나 평범한 바퀴벌레라면, 그렇다면 내 소중한 사람이 변했다고 인지할 수 있을까, 인지한다면 사랑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겟어요.

blanca 2023-04-10 13:54   좋아요 0 | URL
카프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능하던 역할을 잃어도 사랑받을 수 있나? 이 질문을 바퀴벌레로 형상화한 것 같기는 한데 단도직입적으로 바퀴벌레가 되면 어떡할 거냐,고 아이가 물으니까 솔직히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뭔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라 더 그런가 봐요. 저는 그냥 ㅋㅋㅋ 이러고 말았어요.

앤디 2023-04-18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일전 이십대의 딸이 이 질문을 했을때 나의 대답은 -나도 ‘바퀴벌레‘로 변해서 딸과 함께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바퀴벌레 다 이미 나는 벌레같은 사람이다

blanca 2023-04-19 12:01   좋아요 0 | URL
아, 아이가 듣고 싶은 답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5-04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좋아요 블랑카님! 블랑카님도 글 엄청 잘 쓰시네요. 알라딘에는 왜케 글 잘쓰시는 분들이 많은지ㅎㅎ 이 글보고 블랑카님하고 친해지고 싶었어요ㅎㅎ <변신>도 다시 읽고 싶어지고요^^

고양이라디오 2023-05-04 12:33   좋아요 1 | URL
역시 제 느낌이 틀리지 않았군요. 페이지를 넘겨보니 이달의 당선작이 수두룩... 멋지십니다^^b

blanca 2023-05-04 18:28   좋아요 1 | URL
기분 좋은 댓글이네요. ^^;; 감사합니다. 꾸벅.
 

나는 심한 저질 체력에 근육량도 형편 없지만 어떻게든 운동을 생활화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이런 사설은 지난 주 일어났던 비극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한동안 운동을 쉬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고 많이 아주 많이 무리했다. 하필 1킬로 아령이 근처에 보이지 않고 평상시 무거워 잘 쓰지도 않는 3킬로 아령이 옆에 있길래 그걸 들고 상체 운동을 아주 열심히 했다.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지지 않아 신 났다. 다음 날 지하철을 타며 모든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다 걸어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아, 나 체력이 이렇게 올라오나봐. 이거야. 그 다음날은 석촌 호수 주변을 다 돌았다. 2.4킬로 정도? 비극의 서막은 그날 오후에 올랐다. 이상스럽게 몸이 가라앉았다. 열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로부터 과장 좀 보태 일주일 후에 깨어났다. 임파선도 붓고 열도 나고 입안은 다 헐고 약 때문에 속은 쓰리고. 내 몸에 가했던 그 모든 하중이 통렬히 나에게 복수했다. 이런 거였다. 결국 이럴 것을. 그 기간 나는 아주 몸에 대해 나이듦에 대해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하루키가 왜 그렇게 몸타령을 했는지 젊은 시절부터 왜 그렇게 몸 관리 연설을 했는지 절절하게 이해가 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기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젊은 작가들이 쓴 이야기. 수상 작가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코멘터리 북에서 성혜령 작가의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혜령 작가는 청소년 시기 암투병을 했다. 지금은 건강히 회복해서 직장도 다니고 있지만 그 경험에서 얻은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유한함에 대한 자각과 정기 검진이 주는 그것에 대한 각성, 나에게서 아주 긴 미래를 상정하지 않는 신중함, 그리고 지금 여기 이 현실이 가지는 의미와 가치. 그런 것들은 정말로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을 품고 나온 작가의 이야기 그 자체도.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는 죽은 자가 산 자의 꿈으로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인데 몽환적이면서도 유쾌하고 또 어쩐지 서글프다. 과거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 속으로 찾아갈 수 있다면 나도 가고 싶은 날이 있다. 그건 아마도 중학교 시절 시험이 끝나던 날이 될 것이다. 나도 주인공처럼 우리가 시험 끝나던 날 사먹던 시장통의 떡볶이를 먹으러 가고 싶다. 주인공의 엄마가 좋아하던 커피포리에 빨대를 잘 조준해 달라 부탁한 마무리에 괜히 콧날이 시큰해졌다. 불가역성을 가능성으로 변환할 수 있는 건 소설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겠지. 


성혜령의 <버섯 농장>은 도발적인 작품이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와 그 친구의 기묘한 복수 여정에 동행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지대에서 긴박한 클라이맥스를 형성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적 복수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제기와 지금 청년 세대들이 당면한 기성 세대와의 갈등의 지점에 대한 복합적 이해, 젊은 여성이 가진 자본으로 다시 그들이 계층화되고 그것이 가로막는 서로의 소통에 대한 예리한 통찰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남자를 과연 죽였을까? 


현호정의 <연필 샌드위치>를 읽으며 내가 왜 앓는 동안 그렇게 음식을 넘길 수 없었는지 그럼에도 단 음료에 집착했는지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나의 개별적 경험이 아니었다. 먹는다는 일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먹여야 한다. 내가 먹는 일은 때로 내가 억지로 연장하는 생으로 인해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이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다. 먹기 싫어도 먹어야 이어질 수 있는 삶이 가진 은근한 폭력성. 그것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단순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니었다. 무심코 넘겼던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를 준 이야기였다. 


일곱 편의 작품이 고르게 잘 읽혔고 현실이 환상, 꿈, 과거와 교차하고 섞이는 서사가 많았다. 우리가 규정하고 확정하는 현실의 근간을 흔들고 진짜는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탐색, 그럼에도 그 탐색을 구조화하는 과정에서 읽히고자 하는 의지가 보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젊다고 할 수는 없는 나이지만 젊은 작가들이 하는 이야기에 여전히 공명할 수 있다는 건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어떤 도전 의식을 일깨운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저 감상하고 감당하는 수준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방향 전환을 모색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나를 깨어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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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4-08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읽고 싶어지는 리뷰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건강이 최고죠. 저도 요즘 아 이러다 갑자기 가는 수도 있구나 실감했어요. ^^;;

blanca 2023-04-08 16:57   좋아요 1 | URL
Persona님, 반갑습니다. 죽음이 사실 멀리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잊고 일상을 살다 한번씩 아프면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cyrus 2023-04-08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주 가는 책방지기가 <젊은 작가 수상작품집>을 읽고 계시던데, 오늘 <연필 샌드위치>에 묘사된 어떤 문장이 뭘 의미하는지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연필 샌드위치>에 대한 그분의 감상을 듣고 보니 초현실적인 느낌이 나더라고요. ^^

blanca 2023-04-09 09:57   좋아요 0 | URL
꿈 속에서 연필로 샌드위치 만드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가 식이의 폭력성 같기도 하고 그 근저에 깔린 돌보는 자의 희생을 감춘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복합적 의미가 연상되는 작품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올해 수상작들은 생각의 여지가 많고 여운도 길었어요.

다락방 2023-04-10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순간부터 젊은 작가상 작품집 안읽어야지 하게 되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를 보니 또 읽어볼까 싶어지네요.
인생의 흐름을 같이 타고 있는 것 같아요, 블랑카 님과 저는요. 그래서 블랑카 님의 글을 읽는 것이 참 감사하고 좋아요.

blanca 2023-04-10 13:17   좋아요 0 | URL
제가 안 젊으니까 ㅋㅋ <젊은작가상 작품집>은 해마다 숙제처럼 읽습니다. 올해 좋았어요. 그리고 그 마일리지로 살 수 있는 코멘터리 북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 놀랐어요. 인터뷰 내용들이 다 참 깊더라고요. 어떤 해는 솔직히 기대 이하인 적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올해는 잘 읽히고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들더라고요. 노안이 없는 젊은 그들이 부럽네요. ^^;;
 

자식을 키우는 일만큼 인생의 부조리를 강렬하게 느끼게 되는 경험은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내가 애를 쓰고 용을 쓴다고 해서 그 아이가 내가 바라는 대로 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양육자가 툭 무언가를 놓아 버리면서(이건 에고가 될 수도 있고, 포장된 모성애가 될 수도 있다.) 그 지점에서 아이는 제 인생의 방향과 소명을 찾아 잘 독립하기도 한다. 양육은 그래서 삶에 대한 연습과도 비슷하다. 내가 원한 바대로 계획한 대로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기를 소망한다.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 기대하지 않은 가르침을 준다.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다. 그 지점이 때로 더 좋기도 하다.





정말 좋은 책이다. 작법 책으로 환원해서 받아들이면 곤란할 정도로 인생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게 더 많은 책. 작가와 관련 없이 그냥 모두가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바르도의 링컨>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한 저자 조지 손더스가 시러큐스 대학 문예 석사 과정에서 25년간 젊은 작가들에게 한 강연의 핵심을 담은 책이다. 그가 선별한 체호프, 고골, 톨스토이, 투르게네프의 단편 일곱 편의 전문이 실제 실려 있고 이 작품들을 함께 읽는다. 그의 사전 안내 사항처럼 이 훌륭한 일곱 편의 단편은 "꼼꼼하게 구축된 세계 축적 모형"이므로 그것을 함께 읽는 과정은 결국 세계와 그 세계 안의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의 위트와 재치를 겸비한 조지 손더스의 안내와 해석, 문제 제기는 전략적 삶의 독해의 지점으로 우리를 끌어들임으로써 시야를 확장하고 삶의 축소성을 해체하고 확장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자잘한 고민들 안에서 갇혀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더 심원한 의미의 삶의 지평을 조감하게 해준다.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읽기를 지켜보는 것"은 우리의 내면을 성찰하는 일이기도 하다. 잠복된 욕망, 잊힌 기억들, 간과한 문제들은 다시 떠오르고 더 나은 해법을 향해 출항하는 여정에 그는 기꺼이 동행한다. 


제사에도 인용된 체호프의 <구스베리>를 통해 그가 처음으로 톨스토이를 만나 수영을 했던 일화를 통한 두 위대한 작가의 교감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던 두 마음은 각자의 위대한 성취를 통해 드러나고 작품을 통해 공명한다. 비를 맞으며 호수에서 수영하는 이반이 행복의 부조리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구스베리>는 결국 체호프가 사랑했던 톨스토이의 모순적인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응축체였던 것일 수도 있다는 저자의 해석은 우리가 결국 쓰기와 읽기를 통해 만나는 지대에 삶의 부조리함을 통한 연결의 실종을 복원하고 의미를 꿈꾸고 사랑을 지향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함을 시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돌아와서, 그 부조리함 속에서 그럼에도 의미와 연결이 가능한 쓰기와 읽기에 대한 희망을 다시 찾는 이야기를 읽게 되어 기쁘다. 조지 손더스의 학생 시절, 교단에서 그에게 체호프를 낭독해 준 대작가 토비아스 울프가 쓰는 일에 대한 모든 무의미한 이야기를 일소시켜준 것처럼 그의 이야기 또한 읽는 이들에게 그런 의미를 준다. 사는 일도 그러하다. 언뜻 부조리하고 불합리해 보이는 나날들, 희망과 이상을 짓밟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 그 가운데에서도 나아갈 이유와 힘을 주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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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3-17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르도의 링컨 사두고 안읽었는데 작가의 다른 책도 블랑카 님은 읽고 이렇게 근사한 페이퍼를 적어 주셨네요. 저는 느끼는 바, 생각하는 바를 항상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스스로 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데, 블랑카 님은 항상 정확하게 표현하시는 것 같아 그 점이 참 부럽습니다.
이 페이퍼도 언제나처럼 너무 좋아서 이 책도 담아갑니다.

blanca 2023-03-17 13:1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저도 쓸 때 그래요. 항상 그 언저리까지 갔다 마는 느낌, 답답해요. 아, 이 책은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었어요. 읽고 또 읽어도 여전히 좋은 책들이 계속 나와서 참 좋아요. 두꺼운 책은 부담 가지고 시작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그 러시아 단편 읽는 느낌도 정말 좋았고, 무엇보다 작가가 글을 정말 잘 쓰더라고요. 문장 하나하나가 비범해서 참 부럽더라고요.

잠자냥 2023-03-17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살까말까하면서 계속 뒤로 밀리기만 했는데 블랑카 님 글 보고 사기로 결정했습니다.
땡투는 블랑카 님께. ㅎㅎ (근데 이번달은 그만 사야 해서 ㅋㅋㅋ 담달에 땡투 들어갑니다~)

다락방 2023-03-17 14:55   좋아요 2 | URL
저도 땡투 누르고 장바구니엔 넣어뒀어요. 문제는 언제 결제할 것이냐... ㅋㅋㅋㅋㅋ

blanca 2023-03-17 18:47   좋아요 2 | URL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소장하려고 줄도 엄청 그었네요.

그레이스 2023-03-27 08:09   좋아요 1 | URL
저도 장바구니에서 계속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구매 버튼을 누르기로!

페크pek0501 2023-03-17 22: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차하고 나면 비 온다는데 저의 경우 책을 사고 나면 꼭 더 좋은 책이 발견된다는...
blanca 님이 좋은 책이라 하시니 꼭 구매해야 할 것 같습니다...^^

blanca 2023-03-18 08:47   좋아요 2 | URL
페크님, 일단 선별한 단편 일곱 편 읽는 재미만 해도 이 책 살 가치가 있는데요, 그 소설들을 함께 읽는 거예요. 감상, 아쉬운 점, 저자의 일화. 정말 강의 듣는 느낌이었어요.
 

나는 절대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모든 것에 과도하게 힘을 줬고 최선을 다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게 될 거라고 맹신했다. 심지어 관계까지.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했던 이야기.
















직장, 사랑,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각종 위계, 계층, 계급, 그래도 진심이고 순수하고 싶은 마음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나날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 공감이 갔다.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이야기지만 그 여성의 마음과 시점에 최대한 근접해 가려 애쓴 흔적과 상대에 대한 마음이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아도 그것 또한 사랑임을 간파한 예리한 시선이 놀라웠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말할 때 우리는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다. 그 사람의 외모, 그 사람이 가진 것들을 모두 포함한 얘기다. 어떤 사랑을 포기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비겁함도 그렇다. 하상수가 찌질하지도 비겁하지도 않다고 느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직장에서의 직군 간의 긴장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소위 금수저인 박미경 대리는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인데 그녀가 무심코 안수영 주임에게 하는 배려들, 이를테면 명품 가방을 선물하거나 안 주임이 예쁘다고 한 목걸이를 선뜻 풀어 준다거나 하는 행동이 가지는 어떤 뉘앙스에 대한 이야기다. 그건 또 다른 의미에서 악의로 인한 행동보다 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실수가 된다. 서로에게 하는 배려가 그 조직의 기저에 깔린 차별을 공고히 하는데 저도 모르게 기여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 그러한 것들이 보인다. 그러면서 그때는 읽지 못했던 것들의 의미와 내가 저지른 실수들과 내가 받은 상처를 다시 복기하게 됐다.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 지점 남자 동기와는 달리 내가 배우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 각종 자질구레한 서무 업무들이 주가 되었던 일, 나와 동갑이었던 남자 아르바이트생, 그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 그 어려웠던 마음. 하루하루 안 힘든 적이 없었다는 안 주임의 눈물나는 고백의 무게들이 가로지르고 간다.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먹고 사는 일의 비장함에 갇혀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서로 주고 받는 정과 사랑, 배려에 갑각류처럼 몸을 움츠렸던 것도 같다. 내 상처에 골몰해 타인들의 상처에 정작 무감각했던 것도 같다. 고마웠던 사람들도 많고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는 추했던 언행의 사람들도 있다. 


사랑의 이해는 내가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의 이득과 손해를 저울질하는 행위와 겹친다. 중의적인 의미에서 그 이해는 의미를 가진다. 전적으로 순수한 감정도 오직 속물적인 계산도 아니다. 조건을 찾아 떠난 사람도 사랑에 모든 걸 맡긴 사람도 다 그 시간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아는 게 핵심일지도 모른다. 생활의 무게, 사랑의 진정성 어느 한 쪽도 소흘히 할 수 없는 인생의 화두니까.


















처음에는 순간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하자, 그것은 하나의 순간이 아닌 동시에 존재하는 많은 순간들이 되었다. 글은 모든 순간에 있었다.

-배수아 <작별의 순간들>


음악 같은 산문.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게 되는 배수아의 글. 독일에서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투야 울타리 너머의 정원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하루하루 그들의 별일 일어나지 않고 오직 문학 안의 텍스트와 교유하는 그 은은한 삶에 가만히 동행하는 듯한 환각을 주는 환상적인 이야기였다. 한 장, 한 장 책장이 줄어들 때마다 '작별의 순간'들로 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마치 삶처럼. 이 모든 지금과 이 모든 열심이 결국 무로 화할 것이라는 끊임없는 자각을 일깨우는 조종 같은 그녀의 문장들이 탐스럽다. 언제나 끝내지 못한 책처럼 물러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다 그러모아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 싶다. 사는 일은 완성하는 것이 아니고 잘 사라지는 일이라고. '작별의 순간들'을 음미하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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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23-02-15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 작가가 쓴 여성 이야기! 그 어려운 걸 해냈단 말인가요? 무척 궁금해지네요^^

blanca 2023-02-15 21:48   좋아요 0 | URL
여성 독자로서 개인적으로 여성 묘사에 대한 아쉬운 대목들이 있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몰입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원작이 좋아서 드라마도 잔잔한 서정성을 갖추게 된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