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땀을 흘리며 시인의 맑고 빛나고 하찮고 스러지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읽었다. 너무 좋아서 빌려 읽은게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줄을 그을 수도 간직할 수도 없고 흔쾌히 다시 살 수도 없는 이 딜레마라니.
당신 같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의 선택은 마을의 불빛들이다. 불빛들은 갓 핀 다알리아 꽃송이처럼 싱싱하다. 세 칸 집 안에 사는 사람들의, 꿈과 노동과 상처와 고통의 시간들의 은유이기도 하다. 아름다움보다는 쓸쓸함이, 기쁨보다는 아쉬움의 시간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도 그들은 말없이 불을 켜고 지상의 시간들을 지킨다.-p.120
바다, 고기떼, 어부, 방조제, 해녀들, 아이들, 그리고 등대. 나는 이런 것들을 마음으로 떠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그것들에 대한 얘기는 나를 매혹한다. 특히 그 틈새에 스며 있는 삶의 곤곤한 맛을 짭조롬하게 버무려 소랑고둥 곁에서 시를 쓰는 시인과 동행하는 여로는 고향을 더듬어 마침내 어머니의 자궁으로 가닿는 듯한 안온함을 선물받는 일이기도 했다.
멸치잡이배들에서 멸치를 털어내다 길밖으로 나오는 멸치에 환호하며 주워담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 소리하는 아내의 윗입술을 돌멩이로 짓찧어 놓은 남편, 그 상처가 살점으로 도드라져 아물어 가며 육자배기 가락까지 절절한 삶의 비애로 축인 할머니의 얘기, 온몸이 흠뻑 빠질 만한 진흙뻘에 널을 밀며 조개를 캐서 자식들을 공부시킨 어머니들의 사연.
그저 풍경을 멀거니 관조하는 여행기가 아니라 그 속에 함뿍 빠져 하늘 한켠 버려진 낮달을 쓰다듬는 것 같은 얘기들.
이 얘기들의 잔상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한 채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연상시키는 이 책을 펴들었다.
유대인 저자 에릭 캔델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후 다달팽이를 이용한 세포내 기억과정을 발견한 공로 등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자서전과 이 기억의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 과정 및 성과가 혼재되어 있는 책이다.
이탈리아의 유대인 화학자 프리모 레비와 비슷한 전철을 밟은 대목이 있지만 에릭 캔델의 삶은 그의 것과는 판연히 다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까지 끌려가 이것이 인간인가! 라고 절규해야 했던 레비에 비하자면 비교적 쉽게 미국으로 망명하여 학문적 지원과 후원의 세례를 받고 마침내 노벨상까지 수상한 캔델의 삶은 부르주아적으로까지 다가온다.
그러니 저자의 드라마틱한 삶을 기대했던 나는 그 대목에서부터 조금씩 김이 빠졌고 인간의 정신영역을 생물학적으로 해부하고 신경회로로 해체하는 과정이 생경스럽게 느껴졌다. 인간의 정신기능을 사변적 형이상학의 전유물이 아니라 생산적인 실험의 영역이라 천명하는 그의 목소리가 적이 건조하게 느껴졌다.
기억을 찾아 가는 여정은 중간까지 왔는데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기엔 너무 덥다고 중얼거려 본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며 읽을 능력도 없고 계속 오독하는 것같아 멈추고 만다. 저자와 번역자의 노고가 우매한 독자 앞에서 스러질 것만 같다.
시인과 과학자가 나란히 걸어가다 소실점 부근에서는 만날 수 있을까? 멀미가 난다.
아,오늘에서야 북해도가 훗카이도와 같은 곳임을 알았다. 북해도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 살 딸내미의 비키니를 주문했다. 가고 싶다,가 아니라 갔다 왔다, 고 말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