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에 속하지 않는 것은 두렵다. 주류에서 배제되는 일은 서럽다. 인종, 직업, 연령. 심지어 어느 연령에 따른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도 그러하다.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산다는 일은 어쩌면 이런 사회적 압력과 기준에 억지로 나를 순응시키고 맞추거나 거부하는 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부합해도 벗어나도 매일은 투쟁이다. 그것은 나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생명과 나름의 주관을 지닌 내가 그런 것에 매순간 들어맞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틈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자아내는 고립감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단지 거기에 그런 기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정답이라 믿어버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가기보다는 군중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뇌에는 무리를 추종하는 습성이 생존 전략의 하나로 녹아들었다.

-<'나'라는 착각> 그레고리 번스















그게 일종의 진화론적 생존 전략이라는 발견은 놀랍다. 즉 인류는 다수의 선택에 기대어 생존해 왔기에 군중논리에 휘말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노선은 위험하다. 모두가 따르는 무리의 규칙, 기대를 벗어날 때 생존에는 위기가 온다. 그 무리에서 제거되거나 배제되는 걸 기꺼이 감수할 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설사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결행의 순간은 어렵다. 
















아사이 료의 <정욕>에서의 욕망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 정욕이 아닌,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에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정욕이다. 등교 거부를 하고 유튜버가 된 초등학생, 이성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정작 그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대학생, 식품 영업부와 침구 전문점에서 일하는 중등 동창들이 만나는 지점은 사람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특이한 페티시즘이다. 사회에서 흔히 연상하는  이성애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욕망의 대상은 그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다수에 설 수 없는 욕망의 접점에서 그들이 소통하게 되고 연대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정욕>은 분명 힘이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작가의 힘은 이야기의 서사력 자체에 있지 메시지에 있지 않다.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비틀린 욕망조차 소수자이기에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사고의 불균형이 언뜻 노출되는 지점이 있다. 사회적 약자는 욕망으로서 분류되는 기준 안에 있지 않다. 그 욕망조차 타고나는 것이라 항변한다면 이 세상 모든  도덕률이 설 지점을 잃는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과 읽게 만드는 흡인력에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한 숙성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해진다. 어떤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위험하다. 이야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스며져 나와야 한다. 서사가 메시지의 방편이 될 때 그건 때로 칼이 된다. 작가는 시종일관 인물들의 이야기에 간섭한다. 이 간섭조차 때로는 작가 자신이 경계했던 일종의 배제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 속에서 모두가 분투한다. 그걸 존중하는 건 당연하다. 다수의 논리를 강요하는 것도 때로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나의 독특한 욕망이 타인의 몸을 매개로 하는 관계성에서 실현될 때 그것은 어떤 한계와 한도를 상정한 상태에서 기능하여야 한다. 상호 합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상대가 독자적으로 성숙한 판단을 내릴 여건이었는지에 대한 고려도 함께 하여야 한다. 


다수는 절대선이 아니다. 소수도 절대선이 아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4-07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정말 감탄하며 읽는 블랑카 님의 글입니다.
‘이야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스며져 나와야 한다.‘ 여기에 기립 박수 칩니다. 바로 제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건 블랑카 님의 문장과 약간 다르게 표현되는데요, 저는 그걸 ‘작품에 작가가 드러나는 순간 싫은 작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작품에 참견하는게 보이는 순간 너무 싫어요. 확 멀어집니다. 블랑카 님이 그걸 우아한 문장으로 표현해주셨네요.

게다가 이 페이퍼의 마지막 문장도 명문입니다. 다수는 절대선이 아니지만, 소수라고 해서 절대선인것도 아니죠.
이 작품을 블랑카 님이 읽고 써주셔서 참 좋네요.

blanca 2024-04-08 08:5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재미있는 책이에요. 다락방님 말씀처럼 손에서 놓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그건 소설의 미덕이죠. 문장도 좋았어요. 분명 재능 있는 작가더라고요. 그런데요. 욕망의 다양성을 얘기하며 슬쩍 소아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입장 표명이 없더라고요. 제가 잘못 받아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다양성의 예시로 든 건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양성과 소수자적 위치와 소외와 거기에 대한 배려 이야기를 끊임없이 작가가 개입해서 하면서 그것의 예시로 든 게 하필 그거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 작가가 욕망을 이야기하며 사실은 가장 민감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아직 숙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의 이야기를 끌고 나간 게 하는 그런 아쉬움과 우려가 들었어요. 다락방님 덕분에 잘 읽었고 오랜만에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고마워요.

다락방 2024-04-08 12:53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블랑카 님. 제가 바로 그 지점에서 엄청 빡쳐버린 거에요. 작가가 하다하다 소아성애를 가져오는구나 하고 말이지요. 세상에 숨겨야 할 성욕, 남들이 배제하는 성욕, 감히 말도 못하는 성욕을 표면적으로는 사물에 대한 것으로 두었지만 슬쩍슬쩍 소아성애를 가지고 오죠. 과하게 그리고 지나치게 배제와 소수자에 대해 말한게 사실은 결국 이것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래서 이 책을 무심코 읽는다면 어느 순간 아 소아성애도 이상 성욕의 하나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이 싫은 제일 처음 이유,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소아성애 가지고 오는거요.
 

유독 뇌리에 생생하게 각인되는 마지막 장면이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속 레빈이 그의 영지에서 일하는 농노들의 모습을 보며 삶의 유한함에 대하여 사색하는 대목, 제임스 조이스 <사자>의 주인공 아내가 십 대 시절 자신을 빗속에서 기다리다 죽은 소년을 떠올리며 오열하는 장면. 이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순간 바로 나는 레빈의 시선으로 광활한 대지에서 노동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내 존재의 미소함을 떠올리게 되고, 남편을 따라 간 파티에서 우연히 듣게 된 노래가 몰고 온, 십대 시절 떠나보낸 첫사랑의 추억으로 울먹이는 여인의 그 먹먹한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모두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한데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실질적으로 그들의 감각적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마법과 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바깥의 이야기와 통합되는 순간, 그 서사는 내 안으로 스며들어 녹는다. 이후 어쩌면 그와 비슷한 상황을 만나게 되는 순간, 그 이야기는 나의 것처럼 숙성되어 새로운 서사로 변환될지도 모른다. 나의 것으로 여기는 많은 이야기들이 그러하다. 어디에선가 들어와 흡수된 것.


















신경과학자 그레고리 번스와 소설가 보르헤스는 우리가 가진 이 거대하고 끈질긴 '자아라는 감각'의 허구성을 간파한다. 우리는 과거의 자기 자신과 현재의 자신, 미래의 자아에 대하여 어떤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정한다. '나'라는 감각은 살아가는 데 있어 거의 절대적이다. 거기에서 떨어져 나오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그건 내가 의존했던 세계가 붕괴되는 충격이다. 어차피 죽음 앞에서 해체될 자아 감각에 우리는 왜 이토록 집착하게 되는 걸까.


그것은 마치 우리가 끊임없이 갱신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의 화자에 대한 통일성 강박으로까지 보인다. 사춘기의 나, 청년 시절의 나, 지금의 나, 노년의 나가 다 각각 분리되어 공중에서 떠돈다면 우리는 마치 다중 화자로 난삽한 소설을 읽으며 길을 잃은 듯한 심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 누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겠는가? 아마 제대로 이해조차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것이 맞다,고 그레고리 번스는 본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나는 다 각각 떨어져서 존재하는 하나의 허구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편의에 의해,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나를 달래기 위해 그런 절대적인 자아 개념에 얽매이는지도 모른다. 일관된 내가 영원하다는 망상은 일상의 고통을 견디게 하니까. 


우리의 자아 정체성은 과거, 현재, 미래의 자아가 한데 엮인 한편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사는 당신이 항상 같은 사람이라는 '필요한' 망상을 유지하게 한다. 

-'나'라는 착각<그레고리 번스>


심지어 현실조차 사회 구성원의 집단적으로 '공유된 망상'이라는 그의 주장은 급진적으로 들리지만 과학자의 엄정한 시선으로 본 과학적 진실이다. 실제 십 년 전 우리의 몸을 이룬 분자들과 오늘 내 몸의 분자는 같은 것이 없다. 보르헤스 또한 그러지 않았나. "어제를 살았던 사람은 오늘은 죽은 사람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은 내일이면 죽을 사람이다." 라고.


그러니 우리의 읽기는 이런 우리의 서사에 틈입하여 우리의 한정된, 편견으로 가득한 서사의 균형을 맞추고 다른 차원으로 확대된다. 단지 내가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 여기고 살다 죽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레고리 번스는 우리가 읽기를 통해 실제 감각적 체험을 하는 뇌의 부분에 불이 들어오고, 우리 내면의 서사가 변화될 수 있다는 실험 결과를 제시한다. 실제의 이야기와 허구의 그것을 우리의 뇌는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다. 이 발견은 우리가 읽는, 듣는 이야기의 선택에도 주의를 기울어야 함을 시사한다. 나쁜 이야기는 우리는 망친다. 음식처럼. 좋은 이야기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리 살아도 절대 모르는 영역이 있다. 구역이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가 내가 차마 떠올릴 수 없는 삶의 비의를 가르쳐 줄 때가 있다. 


"그거 아세요? 미국에서는 하루에 몇 명이 총에 맞아 죽는지... 우리나라 하루 자살자가 몇 명인지... 전쟁으로 죽는 사람들보다 실은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 사람들은 전쟁 이야기를 하지만요. 지금 시급한 건 그런 게 아니에요. 대한민국에서는 하루 평균 36명이 목숨을 스스로 끊어요."

이런 말을 들었다. 나는 아마도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너무 힘들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그 숫자가 충격적이면서도 그럴 수 있다, 그러 경우가 있다, 에 생각이 가 닿았던 것 같다. 매일이 축제인 사람이 있을까. 때로는 정말 버티기 힘들 때도 있다. 


















무거운 책이다. 우리가 쉽게 비난하고 쉽게 무시하고 너무 가까이 느껴서 그 권위를 종종 인정해주지 않는 경찰관, 젊은 여자 경찰관의 이야기다. 과학수사과에서 현장감식 업무를 담당하며 수백 명의 변사자를 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주변에서 비상식적인 대한민국과 사람들의 무서운 밑바닥을 봐버린 이야기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고통을 공감하며 함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 무슨 사건인가 싶어 호기심 그득한 구경꾼들만 바글바글했던 현장에서 절망한 이야기다. 영화 <아바타2>를 꼭 보고 싶어했던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못 보고 간다는 유서를 영화 개봉 3일 전에 남기고 간 이야기다. 상관의 실적 압박에 손님을 태우러 중앙선을 침범한 개인택시 기사에게 6만원의 범칙금을 부과하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라는 반문을 들어야 했던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민중의 지팡이 경찰을 때로 희화화하며 그들에게 과연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권한과 대우를 해줬나? 나도 그런 불신의 눈길을 보낸 적이 있지 않았나? 미국의 경찰들과 비교하며 어떤 사건,사고가 일어났을 때의 그들의 소극적 대처를 입으로만 쉽게 성토하지 않았나? 


그러나 무엇보다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 그 죽음 이전에 그 죽음이 완벽하게 실현되도록 연습까지 하는 그 절망을 삶의 의지 부족으로 치환해서 무조건 살아야 하고 내일에 희망을 가지고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고 쉬운 기만적 답안으로 교체했던 순간이 있지 않았나? 삶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희망 그 자체를 꿈꿀 수 없는 그 바닥을 내가 감히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죽고 싶었던 순간과 죽음 그 자체를 결행한 사람들과의 그 간극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 내가 속단할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피어나는 곳에서 절망의 마침표를 찍는 작가의 마음이, 그러나 여전히 그런 딸의 안부를 간절히 챙기는 아버님의 틀린 맞춤법이 사랑은 참으로 끈질기구나, 여전하구나 싶은 체념어린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사랑이다,는 희망이 아니다. 어쩌면 삶의 그 지독한 중독성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여전히 그 사랑을 기억하며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참으로 지독하다.

















여성 장례지도사인 김수이 작가의 글이다. 표지만큼 정갈하고 담백한 글들은 죽음 이후의 그 의례를 담담하게 전한다. 그것은 삶의 축제의 저 반대편에 가 있지만, 우리 누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결국 통과해야 하는 순도 백퍼센트의 통과의례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그녀가 일했던 장례식장 풍경이 내가 가 있었던 그 장례식장과 너무나 닮아 있어 기시감이 들었다. 그 장례식장행 셔틀이 없어진 이유가 병원에 가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 타고 싶지 않아서라는 이유도 지리적 여건을 감안하면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갔던 장례식장은 병원에 정차하고 마치 종점처럼 서곤 했으니까. 제목처럼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만,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아직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게 희망의 영역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건 엄연히 삶의 심연에 속한다.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곳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럼에도 꿈꿀 수 있을까. 청년들의 절망을 읽을 때마다 기성 세대로 가고 있는 나는 미안하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고 긍정적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 희망과 미래를 노래했던 우리 세대의 책임은 없나, 돌아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면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절대적인 선인도 절대적인 악인도 대체로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그래서 조심스럽다. 인간은 무엇보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그녀는 1927년에 이미 파리에 간 여성이다. 1934년에 남편과의 이혼 과정과 자신의 소회를 이야기한 <이혼고백장>을 발표했다. 가부장제의 위선과 모순을 일찍이 간파하고 그것을 공론화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녀가 쓴 글은 지금 읽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정도로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급진적이었고 깨인 여성이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재능과 미모를 가지고 태어나 독립적으로 대등한 부부관계를 조건으로 내걸었던 결혼 생활 등 그녀의 화려한 전반기의 인생은 그러나, 질병과 빈곤 등으로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나혜석의 인생 그 자체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하나의 드라마다.


나혜석은 배우 나문희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나문희 배우는 어린 시절 본 나혜석이 파킨슨으로 투병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예술적 재능이 흐르는 집안이었던 듯하다. 명배우 조카에게 남긴 마지막 기억이 안타깝다. 
















<경성에서, 정월>이라 했을 때, 나는 무심코 1월에 관한 나혜석의 글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 '정월'은 나혜석의 호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머니로서, 부인으로서, 화가로서, 독신자로서의 정체성에 관련된 나혜석의 글들이 실려 있다. 나혜석은 주로 그림을 그렸지만 작가로서의 필력도 대단하다. 주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묘사하는 데 짧은 단편처럼 생생하고 풍성한 글로 장면을 그려낸다. 자신만의 논리를 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설득당해 버릴 정도다. 결혼생활에 관련한 그녀의 생각은 지금 시대에도 받아 들여지기 어려운 대목이 여전히 있을 정도로 급진적이다. 네 아이로서의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던진 것에 대해서도 그렇다. 뭐라 한 마디로 단정 짓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녀가 결국 벗어던지고 남은 정체성이 그녀 자신 그 자체로서 존중 받고 인정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모두가 침묵하고 체념하며 따랐던 정통 가부장 구조가 한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을 적시한 것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던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돌올한 나혜석의 유산이다. 그녀는 자기가 한 명의 '언니'로서 전인미답의 길에 발자국을 낼 것을 예감했다. 


아직 밝지도 않은 이 새벽에 누가 벌써 수레를 끌고 가는구려. 그 바퀴 구르는 소리가 마치 우레 소리와 같이 내 귀에 들리오. 이 이른 새벽 깊이 든 잠에 몇 사람이 깨어서 저 바퀴 소리를 들었겠소. 이와 같이 만물이 잠들어 고요한 중에 그는 먼길을 향하고 일찍이 일어나서 튼튼히 발감개하고, 천천히 걸어가며 새벽하늘의 고운 빛을 노래하고 맑은 공기에 휘파람 불며 미소하리다.

-나혜석 <잡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02-27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나문희 씨가 조카군요.
호가 정월이라니. 넘 불행한 삶을 살았던지라 어떨까 싶은데 이 책 관심이 가네요. 표지도 예쁘네요.^^

blanca 2024-02-28 09:44   좋아요 1 | URL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어요. 표지도 판형도 참 예뻐요.

등대지기 2024-02-27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누구든 쉽게 비난하지 말자 싶어요. 다들 연약한 인간일 뿐인데! 처음 나혜석을 알게 되었을 땐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아갈수록 멋진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4-02-28 09:46   좋아요 0 | URL
자녀들에 대해서는 분명 무책임한 부분도 있더라고요. 선각자적 면도 있고 참 복합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옛날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놀랍더라고요.
 

영화 <연인>이 개봉했을 때 난 그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미성년자라 볼 수 없었다. 대신 영화의 스틸컷이 실린 일종의 스토리북을 샀다. 그 이미지들로 <연인>이란 영화를 막연히 재구성했다. 그건 뒤라스의 원작도 아니었다. 나에게 <연인>은 성인이 되어 그런 금지된 너머를 마음껏 탐사할 수 있는 권한의 이정표로 역할했다. 


정작 영화도 그 원작 소설도 제대로 접하게 된 것은 훗날 시간이 많이 흐른 후였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에로틱한 정서가 나는 뒤라스의 이야기의 핵심이라 여겼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뒤라스를 오독한 셈이었다. 뒤라스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뒤라스는 연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미처 하지 못한 그 숨겨진, 생략된, 함축된 그 무엇에 핵심이 있었고 거기엔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 무엇이 있었다. 나는 <연인>을 읽기 전에 그녀가 이미 30년 전에 쓴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먼저 읽었어야 했다. 뒤라스의 자전적인 기록에 가까운 이 이야기는 뒤라스가 평생에 걸쳐 추구한 그 정제되고 말하여지 않음으로 말하는 작법의 배경이 되어준다.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도발적이고 비관적인 그러나 숙명적인 이야기다. 주인공인 십대 소녀 쉬잔은 뒤라스의 분신이다. 프랑스령 식민지 캄보디아 남중국해에서 교사였던 어머니와 오빠 조제프와 살아가는 가난한 소녀는 어느 날 갑부 조 씨를 만난다. 그들은 아름다운 쉬잔에 끌리는 조 씨를 이용한다. 그를 통해 조제프가 갖고 싶어했던 번쩍거리는 축음기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얻어낸다. 그들은 조 씨의 초라한 외모와 유약한 심성을 비웃는다. 그러나 이런 가족의 위악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다. 그건 그렇게 되어버린 그 가족의 가난과 절망의 형상화일 뿐이다. 식민지 토지국의 기만으로 끊임없이 바닷물로 범람하는 불하지에 굴하지 않고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쌓으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억척스럽게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가 남매 곁에 살아 있는 한 남매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며 그녀의 조종을 받는다. 그들은 살기 위해 이 처절한 집착과 절망을 공유한다. 이들이 결국 어머니에 대한 "잔인하지만 숙명적인 저버림"을 달성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그것과 만난다. 그건 비단 부모, 자식 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삶 그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다. 결국 우리는 모든 희망을 놓고 떠나가야 한다. 삶 그 자체에 대한 희망과 집착까지 놓고 버려두고 퇴장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왜 울어요?" 쉬잔이 물었다.

"다시 시작될 테니까. 전부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태평양을 막는 제방> 마르그리트 뒤라스


포기하지 않는 희망은 가장 궁극적인 절망이다. 그게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희망은 절망보다 고통스럽다. 그 역설 가운데에 삶이 있다. 그리고 쉬잔과 자크의 어머니, 뒤라스의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는 그 상징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4-02-19 1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의 주인공이 입었던 원피스와 모자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blanca 2024-02-20 08:30   좋아요 0 | URL
너무 강렬하죠. 저는 그 어울리지 않던 높은 굽의 구두도 생각나요. 영화와 소설이 다 강렬했던 추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