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한 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듣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또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이야기를.

                                          괴테 <단편선>

-페터 한트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작가 페터 한트케는 괴테의 목소리로 자신이 할 이야기의 반향을 예고한다. 이 이야기는 분량면에서는 작고 깊이와 무게면에서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이야기"로 확장된다. 폴 세잔에 바치는 오마주라기보다는 세잔이 재창조해낸 생트빅투아르산 을 작가가 직접 오르며 그의 창조의 도구였던 언어와 그 언어로 표현해내고자 했던 사물들에 대한 "꿈꾸기의 선언"들이다. 번역자는 소설가 배수아다. 두 개의 언어가 하나의 다른 분야의 예술인 회화, 그것이 소재로 삼았던 그 장소와 조응하며 빚어낸 이야기의 절창이다. 





페터 한트케의 삶은 편린들처럼 끼어든다. 그에게 아버지는 두 명이었다.  어른이 되고서야 존재를 알게 된 생부, 무책임했던 계부. 글을 쓰는 그에게 독일인 아버지들은 애증의 대상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하지만 명령의 순종의 형태로 거기에 복무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은 차라리 부수적인 것이다. 그는 함부로 그들을 변호하거나 그들의 아들로서의 자신을 변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뿌리를 뽑는 일은 범죄 중에서도 가장 잔악하나, 자기 자신의 뿌리를 뽑는 일은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p.41


작가는 자신의 내면, 그의 삶으로 침잠하는 대신 세잔의 그림, 세잔이 사물을 봤던 방식, 세잔이 경험한 자연 그 자체에 몰입한다. 그의 언어를 투과한 언어들은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한 미지의 그곳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만지고 냄새 맡고 느낄 수 있게 그가 사용한 언어들을 배수아는 자신의 언어의 망을 뚫고 우리에게 준다. 그렇게 독자들은 세잔이 연이어 그렸던 생트빅투아르산으로 들어간다.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이 어떤 실질적인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순간의 공간 이동 같은 경험을 통해 읽는 이들을 변화시킨다. 사물과 언어와 색채의 핵을 향해. 그리고 그의 귀환은 꿈결 갔던 그 체험을 현실로 돌려 놓는 책임을 잊지 않는다.


그후, 숨을 들이마시며 숲에서 멀어진다. 오늘의 인간들에게 되돌아온다. 도시로, 광장과 다리로, 부두와 통행로로, 스포츠 경기장과 뉴스로 되돌아온다. 종과 상점들로, 금빛 광채와 주름 잡힌 자락으로 되돌아온다. 집에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있는가?

-p.130


결국 이것은 사물의 본질을 통과한 후의 우리의 삶으로의 귀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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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줄 것이 없어도 내가 역할을 못 해도 나는 여전히 존중받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 거기에 확신이 없다. 무언가 능력과 가치를 입증해야 어엿한 사회의 성원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강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심지어 연인, 부부, 성년의 자식과 부모 관계에서도 이 의심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에게 설명하기 힘든 모호한 불안을 항상 품고 살게 한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평가받는 사람도 그러한 것들을 잃었을 때의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장담할 수는 없다. 그냥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전적으로 환대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세계는 판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회를 지향하는 게 잘못된 것일까?  무의미한 것일까?







놀라운 책이었다. 입소문은 들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런 책을 알아봐주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이 사회에 희망이 생겼다. 제목처럼 '사람', '장소','환대'의 세 키워드로 우리의 존재, 관계, 삶, 갈등을 고찰하는 책이다. 치열한 탐구와 성찰, 적확한 언어, 적절한 비유가 가독성과 읽는 재미, 앎의 즐거움을 함께 제공하는 책이다. 자신의 분야를 제대로 정성들여 진지하게 탐구한 학자가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허영이나 자기 과시에 빠지지 않고 일반 대중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전달하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것을 해내려고 애쓰고 성취를 이룬 저자의 노고가 곳곳에 보인다. 


노예제, 전쟁, 사형제도, 외국인의 대우, 안락사, 장기공여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공리주의 혹은 각자의 가치 체계에 바탕하여 은연중에 사람의 목숨과 그 가치의 경중을 매기고 있는 것을 드러내며 저자는 그것이 대단히 위험하고 모순된 생각임을 지적한다. 그것은 우리도 어느 순간 그 기준에 따라 분류되어 이 사회에서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나갈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가능성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그 떨쳐내기 힘든 불안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결국 저자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사람이게 하는 것은 그 어떤 전제조건도 상정하지 않은 사람으로서의 무조건적인 환대라고 얘기한다. 이것이 가능할까? 물론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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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04 1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너무 좋았어요. 전 앞면인가 23쇄 보고 너무 감명 받아서요.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희망,이라는 블랑카님 말씀, 100% 공감합니다. 생각보다 우리 사회에 더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은 아침이거든요.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해서라면 온 사회가 고민할 문제이지만, 저는 집 근처의 큰 건물이 죄다 요양원이 되어 가는 현실에 대해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 무조건적으로 환대받았잖아요. 죽음에 가까이 갔을 때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 사회가 이제 고민을 시작하고 다같이 말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blanca 2020-11-04 17:59   좋아요 1 | URL
아, 단발머리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그건 우리 자신들의 얘기이기도 할 거고요.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모두가 피하려고 하면서 철저하게 고독하게 가게 하잖아요. 이 책이 모든 질문에 답을 준 것은 아니지만 쉬쉬하던 질문들을 가감없이 드러낸 용기가 참 좋았어요.

수이 2020-11-04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 읽었는데 무조건적인 환대가 타인과 타인 사이에서_ 접점들이 하나라도 생기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옥 같은 세상인지라 연이어 계속 비극들만 쏟아져 나오는데 눈과 귀를 막는다고 해서 내 세상이 핑크빛으로만 물들여지는 것도 아니고. 이런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서 많이 읽히고 더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찾으면 좋겠어요. 힘들 것이지만 그럼에도_ 블랑카님 말씀 다시 인용하면서.

blanca 2020-11-04 18:01   좋아요 0 | URL
수연님, 안 그래도 읽으실 때 같이 읽으려 했는데 저는 이 책 안 읽어보고 무지 지루하고 어려울 줄 알아서 시작하기 힘들더라고요. 물론 쉽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로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코로나로 특히나 더 많은 생각이 들어요...기침 했다고 할머니 구타한 젊은이 기사 읽으니 그 이십대가 경험하는 지금 이 세상도 한번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서로를 환대하기는 커녕 적대시하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다락방 2020-11-04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도 읽으셨군요! 좋은 책을 읽고 그 감상을 들려주고 그리고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다른 이의 감상을 읽는것은 너무 즐거운 일입니다. 게다가 저도 이 책을 읽고 생각한 게 바로 ‘무조건적인 환대‘ 였거든요. 그래서 더 반가운 마음입니다. :)

blanca 2020-11-04 18:05   좋아요 0 | URL
아, 읽을 것이다, 맨날 생각만 하다 이제서야 읽었는데 그때 다 같이 읽을걸(다락방님 읽으실 때) 좀 후회가... 몇 대목이 잘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이런 책이야말로 독서모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서로의 감상, 경험도 나누고...곱씹으며 메모하며 읽어야 할 책이더라고요. 이 작가가 참 개인적으로 궁금해질 정도로 놀라운 책이었어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글이면 나도 쓰겠다.'와 대척점에 '나는 죽어도 깨어나도 이런 글은 도저히 못 쓴다.'는 마음이 드는 책이 있다. 그저 작가의 이름값에 기대어 쥐어짠 듯한 에세이나 사소설을 대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쓰는 그 자세는 칭찬할 만하지만 그럴 때 쓰고 읽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작가라는 타이틀은 때로 족쇄가 된다. 작가였다 갑자기 작가가 아닌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함정이 되기도 한다. 이후 그냥 써도 그는 책을 출판할 수 있다. 금방 입에 회자된다. 꼭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일정 부분 판매가 담보된다. 이것은 누군가를 어떤 작품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읽는 행위의 환희와 쓰는 일에 대한 경탄을 자아내는 그에 대한 상찬을 하기 위한 도입이다.




하루키를 좋아한다. 물론 그의 작품 전부를 읽지는 않았고 그의 여성에 대한 묘사에는 반박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적 판타지의 반복에 때로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번역의 창을 뚫고 나온 그의 그 간명하고 진솔한 문장은 누구라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전적으로 복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문장은 탁월하다.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으며 급소를 가격한다. 끊임없는 자기 검열의 늪에 빠져 주변부만 맴도는 가식이 없는 것도 좋다. 


<고양이를 버리다>를 처음에 받아보고 솔직히 놀랐다. 책값에 비해 너무 얇은 분량 때문이다. 이건 흡사 어떤 한 책의 몇 챕터 정도를 발췌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하루키와 돈에 대해 혼자만의 억측으로 고민했다. 하루키가 이런 걸 요구한 걸까? 대체 이 책값은 어떻게 책정된 걸까. 한국 독자가 호구인가 싶었는데 유독 우리 나라에서만 이 책이 비싸게 팔리는 것도 아니라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 책을 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하루키를 좋아하더라도 책값을 아껴야 하는 나에게 이 책의 분량은 실망을 줬다. 그래서 빨리 읽어버리고 중고서점에 팔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줄을 너무 많이 그어버려서. 그리고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또 하루키가 이 작은 책을 쓰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절로 수긍이 가서 책값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년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어느 여름날 오후 해변가에 암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것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에피소드에서부터 확장된다. 그러나 하루키가  처음부터 고양이를 버리는 가혹한 처사로 아버지에 대한 선입견을 만드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연유에서건 집으로 돌아와 버린 그 고양이를 발견하고 안도하는 그의 모습에 하루키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닿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무려 세 번이나 징집된다. 아슬아슬하게 난징 함락전의 가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루키는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봐 우려하며 아버지의 과거의 실상을 아는 것에 부담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 솔직함이 과연 하루키답다. 유명 작가가 아니어도 어느 누가 일흔이 넘어 자신의 아버지가 역사적 살육전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공론화할 수 있을까.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부모를 미화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연령대다. 자칫 사실로 밝혀질 경우 자신의 공적이나 명예에도 해가 될까 두려울 수 있다. 그런 두려움에 대한 솔직한 표현의 공명이 크다. 마치 소년 같다. 자신이 모르는 아버지의 실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유보적인 표현도 와닿는다.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다. 쉽게 합리화하지 않는다.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비겁하지도 않다. 분명히 명백한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단호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일본의 현정권은 강경 우익이다. 일본의 문화는 나서서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고발하거나 고백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따를 각오해야 한다. 


게다가 자신이 소설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 거의 몇십 년간을 아버지와 절연 상태로 지내왔다는 고백은 사실 충격적이다. 그 둘의 화해는 육십대의 아들과 구십대의 아버지로 만나 이루어진다. 이것 또한 동양적 효문화 정서에서 쉽지 않은 발언이다. 구구절절한 자기 변호가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 안에서 바라봤던 목표가 가족과의 화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는 솔직한 얘기가 전부다. 그러나 이 책의 전반에는 하루키가 아버지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난 우연한 존재라는 그 자각이 곳곳에 나타난다. 책을 좋아하고 하이쿠를 지었던 청년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라의 부름을 받아 그 지옥 같은 곳으로 차출되었을 때 가졌을 감정들과 느낌들, 모든 아슬아슬한 우연으로 남녀가 만나 마침내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신비로운 과정, 그 아이가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어 다시 이 과정을 찬찬히 복기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길이 군데군데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구태여 많은 문장들 대신 이 수많은 감정, 깨달음, 생각을 수없이 조탁하여 정렬한 밀도 높은 그의 문장들로 충분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집단적 역사 의식 강요 아래 개개인의 고유성과 그 의미를 잊지 않아야 함을,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그것이 무의미와 동급은 아님을 하루키의 글로 읽어 통쾌했다. 그것은 '고양이를 버린' 그 여름날의 아버지로부터 잊혀진 잃어버린 아버지의 한 생애의 역사를 온전하게 복원해 내어 한 인간의 삶의 의미를 창출해 낸 하루키만의 저력에서 나온 것이다. 숱하게 죽어간 전장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당시 자신들의 적이었던 중국의 병사들을 위해서 불단에서 독경을 했던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는 하루키의 윤리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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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0-28 1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이 책이 중고샵에 나오면 사 볼까해요.ㅎ
정말 줄 너무 많이 치면 중고샵에선 안 받아 주는 것 같더군요.
헌책방에선 받아주는지 모르겠어요. 헌책방은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간직했다 폐지로 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ㅠ

하루키는 정말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가 독자와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부정할래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blanca 2020-10-28 20:16   좋아요 3 | URL
줄을 긋는 순간 그 책은 소장각입니다. ^^;; 이게 또 스트레스인게 저는 초반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책은 소장이다, 이러며 줄을 북북 그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 책은 팔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서요. 이래저래 책장만 미어터집니다.

하루키는 정말 작가인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scott 2020-10-28 20: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편집했던 출판 관계자들이 하루키가 책으로 출간하기전에 오래전에 발행되었던 잡지 신문 기사들까지 꼼꼼하게 체크해서 아버지에 군경력상황을 조회하고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을 보냈을정도로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 뒷받침할 증거를 집요할정도로 수집했다고 하네요 마지막 퇴고전까지 여러번 확인과 수정을 해서 편집자들이 백여페이지가 안되는 에세이여서 금방 출간하게 될줄 알았는데 하루키에 철저한 원고 확인과 수정에 두손발을 들었을정도로 하루키는 자신에 글을 세상밖으로 내보내기전에 어떤 허영이나 자만 허세가 없다는 사실을 단단히 못박아두었다고 하네요.
엄청난 프로정신 (작가로서)으로 무장해서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게 여태껏 최정상에 작가로 새책 출간할때마다 일본열도 전 서점을 하루키 책으로 도배시킨다는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blanca 2020-10-29 12:51   좋아요 1 | URL
헉, 그런 디테일한 것을 어떻게 다 아세요? 혹시 scott님 하루키 측근 아니신가요? ^^;; 이게 제가 나이가 드니 어떤 우려, 조바심, 유보를 표현한다는 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거라는 걸 알았어요. 막 주장하고 합리화하고 엄호하고 은폐하고 이런 건 쉬운 거잖아요. 자기가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이게 확실하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도 실책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어른이 최근에 있었던가 싶고. 그런 면에서 하루키는 정말 역시 하루키다, 싶어요. 말씀해주신 얘기 들으니 더욱 존경스럽네요. 배우고 싶어요. 일본에서 일본의 역사적 실책을 이렇게 전면에 내세우며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요.

저는 하루키의 몸 관리에 대한 절제의 이야기도 너무 좋아요. 정말 너무 공감이 가서요.

단발머리 2020-10-29 1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와의 화해 이야기 정말 소설 같네요. 저도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애정과 관심이 예전같지는 않지만, 하루키는 하루키니까요.
하루키가 이 글을 읽는 특별한 경우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테지만, 만약 하루키가 블랑카님의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잘 읽고 갑니다, 블랑카님^^

blanca 2020-10-29 19:30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댓글 읽고 잠시 행복했어요. 상상은 상상이니까요. 영원히 젊을 줄 알았던 하루키가 일흔이 훌쩍 넘었다니 실감이 안 나요. 그 만큼 나도 나이가 든 거겠지요. 여전히 어떤 하루키다움을 잃지 않으며 노인이 되어가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그의 작품과는 별개로요.
 

글만 써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는 비단 지금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이 만연하는 시대는 결과적으로 더 참혹했다. 19세기 런던에 실재했던 '그럽 스트리트'는 생계를 위해 통속적인 글을 마구 써냈던 작가들이 모여 살았던 거리였다. 이는 점차 '저급 문학의 대명사'처럼 회자되었다. 조지 기싱의 <뉴 스럽 스트리트>는 이 거리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비참한 청춘들의 사실적인 이야기다.






이야기는 직업적 문필가들 재스퍼, 리아든, 비펜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 중 리아든은 유일한 기혼자로서 율 가의 에이미라는 자신보다 상류층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이지만 점차 직업적인 쇠락의 길을 걸으며 아내와 불화하다 별거하는 지경에 이른다. 어쩌면 문학적 성취의 측면에서 보면 시류에 편승한 평론, 비평글로 약삭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재스퍼와 대중의 호응이 없는 소설에 매달리는 비펜보다는 꽤 호평을 받은 리아든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리아든은 점차 직업적 매너리즘과 창작열의 고갈로 인한 빈곤한 현실로 지쳐간다. 그는 가난이 얼마나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지를 처절하게 실감하며 절망의 나락에 빠진다. 이상주의와 현실의 간극에서 리아든과 비펜이 결국 패배하는 모습은 가슴이 저릿하다.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이거예요." 그가 계속했다. 

"한 명은 '내 삶을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먹고살까?를 고민하죠."


극한의 빈곤은 인간의 내면에서 때로 '괴물'적인 면을 끄집어 낸다. 당장 내일의 밥값과 집세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너그럽기란 어렵다. 이 사실을 알고도 문학적인 이상주의를 포기할 수 없었던 리아든의 이른 죽음은 경제적 안정을 위해 기꺼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연인을 배신하는 재스퍼의 안온한 결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작가 조지 기싱의 문단과 문학에 대한 시선이 투영되어 있는 부분이다. 실제 그는 글을 쓰며 사는 삶의 극단적인 경제적 부침을 경험한 작가다. 밥을 굶었고 자신과 적절한 수준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 안정된 가정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은 그를 내도록 괴롭혔고 이러한 자괴감은 여러번 리아든과 재스퍼, 비펜의 발언으로 표현된다. 마치 어처구니 없는 농담처럼 그려진 이 젊은이들의 아픈 결말에는 작가 자신의 이러한 세계에 대한 조소가 반영된 것 같다.  몇 번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시구 "우리는 꿈을 이루는 성분, 우리의 짧디짧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으니..."에서의 '꿈'은 중의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헛된 망상일 수도 있고 절대 현실화될 수 없는 이상주의적인 미래로서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뉴 그럽 스트리트'는 여전히 현존한다. 비단 글을 쓰는 일만이 아니라 현실과 떨어져 꿈을 꾸는 일은 여전히 여러 생존과 관련된 문제와 상충한다. 우리는 여전히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가지는 직업을 선호하고 추구하고 돈이 안 되고 성공 가능성이 없고 시장에 팔리지 않는 일들을 폄하하고 그러한 일들을 추구할까 봐 아이들을 단속한다. 시간의 흐름은 이러한 간극의 골짜기의 외피만을 바꿀 뿐이다. 조지 기싱의 결말의 여운이 유달리 무겁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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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0-17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나왔군요. 올해 2월에 나왔는데 그놈의 코로나 땜에 묻힌 것 같습니다.
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작가가 나오는 건 좀 거시기한데
아예 이렇게 작가가 작가를 다뤄준 소설은 관심이 갑니다.
며칠 전 부촌에 사는 사람들의 부동산 탈법을 다루는 뉴스에 그들의 직업이 언급되기도 했는데
소설가도 있었다는 게 새삼 놀랍더군요.
소설가는 뭐 부자되면 안 되는 건 아니겠지만 모르긴 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막강 필력을 가진 사람이겠죠?
드라마에서야 작가를 부자로 그려놓기도 하던데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한편 꽤 멋있고 낭만적이란 느낌도 듭니다.
이 책 읽으면 좀 마음이 무거울 것도 같은데 그래도 언제고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blanca 2020-10-18 09:18   좋아요 1 | URL
이 책 읽는 내내 우울했어요. 등장인물들한테 너무 이입되어 좀 힘들 정도로요. 결말도 너무 우울하고. 무언가 비웃는 것 같고.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하는 게 무언가 너무 허무맹랑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그리고 그것이 허구만은 아니라는 게 더 우울해지고요. 조지 기싱의 다른 책도 좀 읽어봐야겠어요.

Jeanne_Hebuterne 2021-01-06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양귀자 작가가 2000년도 되기 전, 진짜 돈 없는 사람은 돈없다는 말을 못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이 책은 블랑카님 서재에서 처음 보고 바로 주문했어요. 소설이 읽고싶었고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을 떠올리게 해주는-우리는 시궁창에 있지만 그래도 우리 중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지-그런 이야기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검색을 했거든요. 고마워요.

blanca 2021-01-07 09:09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참 좋아요. 결말이 아이러니인 것 같아서 뭐라 그럴까 더 와닿는 것 같아요. 별을 보는 사람들을 다 지게 만들거든요. 그런데 거기에서 어떤 조소가 읽혀요.
 

김금희 작가를 좋아한다. 드물게 문장도 서사의 힘도 두루 갖춘 작가라고 생각하고 과거를 환기하며 현실에 발붙이는 균형감도 잃지 않는 모습이 좋다. 서정적인데 또 현실에 대한 직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아주 달변가라는 점. 글을 쓰듯 말도 하는 작가는 처음 본 듯하다. 자신의 소설을 직접 낭독한 오디오북 <복자에게>도 아주 좋다. 



















대상작이 김금희의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다. 제목에서 왠지 스피아민트 껌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 제목에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 편집자가 제목을 붙여주는 작가가 있는 반면 김금희 작가는 제목을 먼저 정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제목에 큰 의미를 둔다고. 엄마의 죽음 뒤에 거주지를 옮기려고 결심한 중년의 화자가 우연히 받은 전화로 회상하게 되는 학부 시절의 종가의 족보 정리 아르바이트를 함께 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다층적이다. 화자는 그 종가의 손녀딸과 '기오성'과 묘한 기류가 흐르는 일종의 삼각 관계에 빠지게 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이야기다. 노교수의 권위, 보수적인 계층 의식, 또 그것에 대한 소극적인 반발, "시간이 지나 어떤 마음들은 닳아버렸는지도 몰랐다."고 회고하는 마음과 "와 우리 정말 미쳤다!"고 외칠 수 있었던 그 여름의 "페퍼로니에서 왔어."로 묶여 있던 마음에 대한 복기이기도 하다. 저마다 지향하는 바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었더라도 그 어떤 공통의 청춘의 무모한 미숙한 에너지를 공유할 수 있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그 시간이 지나가며 남기는 삶의 궤적에 대한 어떤 담담한 수긍 같은 것이 김금희식으로 아련하게 그려져 있다. 변하고 닳고 사라지지만 그러한 것들이 그려나가는 생의 행로를 돌아볼 때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회한, 그리움이 겹친다. '나 좋은 사람 아닌데요'로 선언하는 작가노트와 불문학자 김화영의 리뷰가 한 세트처럼 되어 있어 완결되는 느낌. 


은희경의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인스타로 비춰진 화려한 뉴요커 친구의 삶에 실제 방문함으로써 느끼는 서로의 간극과 충돌이 어떻게 화해의 지점을 만드는지에 대한 교차 시점의 이야기다. 저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실제로 사는 삶의 불일치를 불편하게 접촉해나감으로써 결국 어린 시절의 소통의 지점을 다시 회복하는 이야기는 사람간의 관계의 그 미묘하게 어긋나고 침범하고 불편을 느끼는 경계를 기민하게 포착해서 드러냄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갖게 한다. 


어머니의 이혼으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모녀의 화해의 여행기를 그린 <실버들 천만사>는 진부한 소재 같지만 권여선 특유의 예민한 촉수가 만들어 낸 이야기의 울림이 역시 크다. 언뜻 작가 자신이 고백한 바와 같이 "민틋한" 이야기는 오히려 그래서 더 공감의 지대가 넓다. 언제나 짓밟히고 억압 당하며 가족 사이의 질척한 관계에서 뒤안길로 밀려나는 여성들의 서사를 복원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빛났다. 제목이 아름다워 찾아보니 김소월 시인의 <실버들>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정한아의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은 다소 서걱거리는 이야기다. 이혼하고 십대 딸을 데리고 친정 아버지의 건물 관리인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된 '나'는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노파와 월세가 밀린 아이 엄마를 퇴거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게다가 딸은 아버지가 있는 호주로 가겠다고 조른다. 저마다의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이 결국 마지막에 가서 어떻게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는지의 반전 같은 결론은 다소 섬뜩하기도 하고 씁쓸하고 안타깝다. 


여성 작가가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과정에서 남성들은 대체로 흐릿하거나 모호하거나 폭력적이다. 그것에는 분명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제대로 정의롭게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진실의 중핵이 내재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수상작에 남성의 시각이 없다는 것 또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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