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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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행기가 난기류에 심하게 흔들린 적이 있다. 이 순간 추락해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 잠시 생각하다 우연히 보게 된 통로 건너편의 백인 아저씨는 유유히 킨들로 뭔가를 읽고 있다. 기체가 요동치는 순간에 그는 그의 그런 태평한 모습이 한 동양인 아줌마의 심리 안정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렇게 여유롭게 있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판단이 섰고 좀 안정이 됐다. 


이후로 나는 킨들을 스마트폰에 다운 받아 어쩌다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아저씨 코스프레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안정을 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도 괜찮다는 착시를 내 자신에게 주고 싶다는 것에 더 가깝다. 비록 그것이 '아노말리'(비정상)적 상황이라 해도 착각한 상태에서 계속 비행할 수 있다면 나는 견딜 수 있다고 주문을 왼다.


이 책에서 승객들을 태운 에어프랑스 여객기는 난기류를 뚫고 착륙한다.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는 이 여객기의 승객들의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산층 소시민을 연기하는 살인 청부업자, 사후 유명 작가가 되는 작가, 죽음을 앞둔 기장, 가족 내 성폭력에 노출되는 소녀, 연령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연인. 그들 개개의 이야기는 독립된 단편처럼 인상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아노말리> 이야기의 핵심은 그런 개개의 삶에 있지 않다. 이들의 분신이 다시 석 달 여의 시차를 두고 착륙하며 서로를 만나게 된다는 데에 있다. 나는 시차를 두고 분열된다. 한 명의 나는 다른 한 명이 그 시간 동안 겪은 일을 알지 못한다. 한 선택에 놀란다. 하지 않은 일에 당황한다. 이건 노년의 내가 이십 대의 내 모습을 만나는 것처럼 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히 충격적인 일이다. 내 모습을 대면하는 나는 생각보다 내 모습을 사랑할 수 없고 거기에 익숙해질 수 없다. 시간의 벽을 두고 분리되어야 하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내가 공존하는 세계는 혼란스럽다. 


<아노말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거대한 비정상적 상황을 정상적이라 착각하며 유지되는 것임을 간파한다. 지금이라도 환경의 재앙과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황에서 우리는 여전히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고 좌절하고 집착한다. 끝에 인용한 니체의 "진리는 우리가 환상임을 망각한 환상이다."는 이 책의 핵심 메시지일 것이다. 이 모든 게 환상이라는 깨달음은 삶 전체를 농담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인간은 그럼에도 여전히 착각하며 살기를 택할 것이라는 작가의 예견은 과장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부터 행동들이 나를 만들었지만, 어떤 움직임도 나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내 몸은 내가 그리지도 않은 선들이 이끄는 대로 사는 데 만족했다. 우리는 가장 힘이 들지 않는 저항 곡선을 따라 살 뿐인데도 마치 공간을 지배하는 양 건방을 떤다. 한계 중의 한계, 어떤 비상도 우리의 하늘을 펼치지는 못하리."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소설가 미젤의 이야기다. 우리의 무능력함과 우리의 수동성을 그리면서도 희망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분명 이 한계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인정과 더불어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블랙코미디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 착각 속에서 여전히 선택한다고 살아나간다고 믿는 우리의 모습의 성공적인 희화화 때문일까. 


에르베 르 텔리에는 수학자이자 언어학자라고 한다. 그의 이런 배경은 다양한 차원의 지적 실험으로 풍성한 읽을 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현란한 지적 유희의 현장 안에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해낸 작가의 공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의 매력은 독자가 몸소 에어 프랑스 여객기에 탄 한 명의 탑승자처럼 스스로를 이야기 속에 넣어보게 되며 일종의 평행우주적 삶의 실험을 해보며 스스로의 삶 자체를 살펴보게 한다는 데에 있다. 과거의 나와 대면한 현재의 나를 가정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노말리>의 미덕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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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04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설정이 굉장히 끌리네요. 이 책도 일단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꼭 읽자 주먹 꽉 쥐면서 말입니다. ^^

blanca 2022-08-04 21:11   좋아요 2 | URL
^^ 저도 설정, 줄거리가 마음에 들어 시작했는데 역시 기대를 충족시켜줬어요. 일단 재미있더라고요.

scott 2022-08-09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노말리 작가
어떤 문예지에 인터뷰가 실렸는데
블랑카님 리뷰 읽으니
읽고 싶어지능 ㅎㅎ


저는 제가 탔던 엘레베이터가 급 멈춰 버린적이 있는데(그 엘레베이터 사방이 유리였음)
당황 하기 보다 밖에서 우리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눈빛이 더 무서웠습니다 ㅎㅎㅎ

blanca 2022-08-09 08:45   좋아요 1 | URL
흑, 알죠. 안 그래도 꼭 읽어보려고요. 해외 인터뷰 기사 검색해 보니 모조리 초반 제공에 돈 내라 하네요. ^^‘‘ 내가 나와 잘 지낼 수 있는지 나도 궁금하다는 말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연세도 있는데 여러 분야에 대한 지적 열정, 인생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는 모습 저도 자극 받았어요. 저는 최근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는데 갑자기 답답해서 마스크를 본능적으로 벗어서 안의 사람들이 저를 보고 놀라더라고요. ㅋㅋ

폭우가 쏟아져 난리네요. 스캇님도 비 피해 입지 않으시기를 바라고 더 이상 비가 안 오기를 바랍니다.
 
책의 엔딩 크레딧 이판사판
안도 유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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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플롯이나 엄청난 문장도 아닌데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만드는 건 작가의 저력인가, 책에 바친 연가이기 때문일까. 어떤 우울감이나 무력감도 한방에 몰아내게 할 정도로 이미 지는 싸움에 뛰어든 무력하지만 아름다운 인생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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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7-12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요! 브랑카님 이리 말씀하시니 읽어보고 싶네요.
보관함에 넣어 뒀어요.ㅋ

blanca 2022-07-13 10:04   좋아요 1 | URL
이상하게 끌리더니만 한번 손에 잡으니 계속 궁금하고...문장도 단문이고 정말 잘 읽혀요.

샛별투 2022-07-13 0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이 참 좋았습니다. 모노즈쿠리, 혼을 담아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할까요? 다만, 일본 원서 제목이 本のエンドロール (책의 엔드롤)로 편집보다는 책을 실제 제작하는 인쇄소를 다뤘음을, 책 표지도 원서의 경우에는 인쇄 현장이었는데 유럽의 도서관으로 바뀐 점이 국내 독자들을 위한 지나친 배려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참 좋았습니다.

blanca 2022-07-13 10:06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저는 이거 드라마로 제작되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담담하니 큰 사고도 없이 그냥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거나 단조롭지 않아서 그 또한 참 신기하더라고요.

persona 2022-07-14 0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말씀하시니 읽고 싶어져요. 일서로 볼 땐 재미가 있을까 없을까 잘 모르겠다 싶었는데요.

blanca 2022-07-15 09:45   좋아요 1 | URL
제가 좀 아쉬운 점이 제가 일어를 1도 몰라서 일어로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참 재미있어요.
 
법정의 얼굴들
박주영 지음 / 모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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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제대로 읽으려던 건 아니었다. 법정에서의 에피소드를 가볍게 다룬 이야기라 생각해서 흥미로운 대목들만 골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중간 정도부터 읽다 결국 다시 프롤로그로 돌아와서 에필로그까지 정독했다. 법조인들의 문장력이 대체로 좋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박주영 판사의 문장은 잘 쓰기 위해 멋을 부린 게 아니라 적확한 어휘를 제대로 포집하기 위한 노력과 법정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사려깊음이 그대로 느껴져 특히 좋았다. 쉽게 쓱쓱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은 읽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에너지의 밀도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촘촘하고 깊이 있고 사색적이지만 우리 주변의 일상에서 유리되지 않은 좋은 글이다.


업무로 법정을 드나들 때 법복을 입은 판사들은 나에게 엄청난 갑처럼 보였다. 그들의 넓고 긴 소매는 그들의 권력과 일반 평범한 사람들보다 적어도 한 뼘쯤은 더 위에 있는 그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들이 내리는 선고 하나로 울고 웃는 민원인들의 모습 속에 삶과 유리되어 무언가를 심판할 수 있는 권력을 단지 시험 성적으로 특정 소수에게 준다는 데에 솔직히 회의가 들었다. 충분히 살고 겪어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들을 저들은 대체 어떻게 판단하고 심판하나 나는 의심했다.

그 우려는 저자의 지난한 사실 증거들의 수집 과정과 합리적 의심이라는 '바'로 통제하는 심증에 대한 엄중한 숙고, 피해자와 피고인의 삶의 서사로 파고드는 공감력, 끊임없이 회의하고 의심하고 읽고 쓰려는 그 성실한 공부의 과정에서 불식됐다. 물론 모든 판사가 박주영 저자 같진 않을 것이고 말과 글로 보이는 모습이 그의 전부이거나 그와 반드시 일치한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법정에서 만난 피고인과 피해자들의 삶은 그들이 그런 상황으로 치달은 데에 대한 사회 공동의 책임의식의 환기라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한다. 


자살을 공모한 젊은이들이 끝내 공감한 유일한 대상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 안면도 없이 만나 죽음에 대한 합의를 이루어 낸 타인이라는 사실, 극한의 빈곤으로 내몰려 정당하거나 적법한 생계 수단을 찾아 헤매어야 하는 소외된 사람들, 최선을 다해 키워내려 했지만 결국 아이와 동반자살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장애아의 어머니. 우리는 범죄의 현장이라는 극단에 가서야 그 얼굴 없던 법정의 얼굴들을 비로소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을까, 깊은 비애가 들었다.


저자의 글이 공감을 얻는 지대는 그가 그들의 바깥의 외부 관찰자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우리의 삶은 연약하여 어떤 운명의 비극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의 이야기도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우리가 단지 이 법정의 얼굴들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어떤 범죄를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가 하나의 사적인 드라마로 머물고 단죄될 때 사회는 그것을 단지 선정적인 스토리로 소비하고 뒷짐을 질 수 있는 편리한 위치로 물러난다. 하지만 우리 모두 그런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사회와 국가가 최소한의 안전망을 갖추고 있다는 공통된 안정감은 구성원의 결속에도 영향을 미친다. 모든 힘든 일이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될 때 우리는 타인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갖기 힘들다. 결국 공익은 사익으로 확산된다. 


"사법절차가 생각보다 무력하다"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는 저자의 건강문제로 인한 갑작스런 휴직으로  "후회는 없었지만 좋은 판사가 되지 못해 아쉽긴 하다"로 맺어 마음이 무겁다. 박주영 판사의 글로 인해 나의 좁은 시야는 조금 더 넓어질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얕은 넓이가 깊이로 확장될 수 있도록 건강하게 오래도록 글을 써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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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6-22 15: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유퀴즈에 박주영 판사님 나오신 걸 봤어요. 저는 그전에 <어떤 양형 이유>를 읽었습니다. 특별한 기억이 남진 않지만 글을 아주 잘 쓰는 마음이 따뜻한 분이구나 생각했었어요. 이번 책도 사두었는데 블랑카 님 역시나 읽으셨네요. 저도 곧 따라 읽도록 하겠습니다.

blanca 2022-06-22 15:09   좋아요 2 | URL
저 다락방님 페이퍼 보고 박주영 판사님 글 읽게 된 거예요. 감사드려요. 그리고 사실 여자인줄 알았어요 ㅋㅋ 챕터를 드문드문 읽는데 문장이 남자 문장이 아니라 여자처럼 섬세하고 눈물도 많고 해서 여자 판사구나, 엄마구나, 이랬다니까요. ㅋㅋㅋ 특히 페미니즘 관련 글. 다시 오십대 남자분이라는 걸 알고 나니 정말 다르게 비범하게 보이더라고요. 저는 <어떤 양형 이유> 읽으려고 준비 중입니다.

얄라알라 2022-06-23 12: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blanca님과 ˝법정˝스님 댓글 주고 받은 후 놀러왔는데, 제목에 ˝법정˝^^

저도 간혹, 문학 외 특정 분야의 경지에 오르신 혹은 인정받는 전문가분이 쓰신 글이, 문학가의 것인양 좋을 때 놀라서(질투나서) 꼼꼼하게 읽습니다.

blanca님 리뷰 읽다보니 ˝~~한 바,˝ ˝바˝는 일상의 단어가 아니라 법조계의 언어구나, 생각이 듭니다.

박주영 판사님께서 blanca님 이 리뷰 꼭 읽으셨음 좋겠어요


blanca 2022-06-23 13:00   좋아요 2 | URL
헉, 이런 우연의 일치가! 맞아요, 저도 그래요. 진짜 읽어주심 좋을 텐데요...

mini74 2022-07-08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밥정용어는 너무 어렵게 쓰는거 같아요. *^^* 당선 축하드립니다 *^^*

blanca 2022-07-09 09: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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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생명의 가치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그 어떤 명분을 붙여도 그렇다.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가장 좋은 건 전쟁 자체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고 차선은 최대한 그런 희생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을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 말콤 글래드웰의 승리했지만 통계로도 잡히지 않을 만큼 많은 민간인을 죽게 했던 1945년 미국의 도쿄 대공습에 관련한 의사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도발적이다. 전쟁 수행 방법에 대한 이견을 보인 두 지휘관 헤이우드 핸셀과 커터스 르메이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은 우리가 내리는 올바른 선택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한다.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부조리하지만 불가피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낸 미국의 일본 공격에 대한 이야기는 원폭 투하를 제외하고는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 모두 일본의 종전 선언을 이끌어낸 것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을 떠올리지만 일본의 패망은 이미 그 이전 반년에 걸쳐 67곳의 일본 도시에 이루어진 소이탄 폭격으로 인한 여파의 누적으로 점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지휘관이 있었다. 헨셀과 르메이. 이 둘의 대조적인 선택과 결말은 드라마틱하다. 이것은 "전쟁 수행방법에 대한 도덕적 논거 발견"에 대한 논란을 촉발한다. <돈키호테>를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꼽았던 로맨틱 가이 헨셀은 폭격기 마피아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인명 살상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기 위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이 함께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조준 시설에 정확하게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폭격조준기를 장착한 폭격대로 전쟁을 수행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바람, 거리, 기압 등 모든 여건이 그것의 효율에 기여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하고 결국 가장 빠르고 저돌적으로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적을 패배케 하는 승자로 남게 되는 르메이에게 밀려난다. 르메이는 헨셀이 가졌던 이상주의와 꿈을 방기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목재 가옥들을 불태워버릴 수 있는 소이탄을 동경에 퍼부음으로써 승리를 거머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궤멸시켰다. 어쩌면 기대한 것보다 더 큰 무공을 세움으로써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반면 실패한 이상주의자로 남은 헨셀은 적을 덜 죽임으로써 패자로 남았다. 말콤 글래드웰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양심과 의지를 적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련의 도덕적 문제가 있다. 그것들은 대단히 어려운 종류의 문제이다. 반면 인간의 도덕성을 적용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도 있다. 폭격기 마피아의 천재성은 그 차이를 이해한 것이다. "군사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워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보다 나은 일을 할 수 있다. " 그들이 옳았다.


승리한 전쟁의 불온한 지점을 지적한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에서 내리는 수많은 선택에 대해서도 어떤 의심을 가능케 한다. 우리가 얻었다고 생각한 것들에서 과연 놓친 가치는 없을까. 그리고 그것은 부수적이고 사소한 것이었을까.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리가 결국 져도 끝까지 사수하게 되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 유의미한 자문을 가능하게 하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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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4-29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커티스 르메이의 유명한 말이죠.
최상의 선택이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이 문제를 전쟁에서는 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도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2-04-29 19:16   좋아요 1 | URL
전쟁을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건 쉬운데 전쟁의 그 불가피성을 인정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건 정말 대단히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전장에 나가는 지휘관의 결정은 어떤 형태로든 비난받고 비판받을 여지가 있어서 작가가 정말 다각적으로 검토한게 느껴지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scott 2022-05-04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전의 말콤 작가가 다루었던 주제가 아닌 [전쟁]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발발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책 ^^

blanca 2022-05-08 08:24   좋아요 1 | URL
저도 생각보다 너무 좋아 깜놀요. 말콤 글래드웰 책을 어느 순간부터 안 읽게 됐는데 역시 이 사람은 탁월한 저술가구나 싶더라고요.
 
달몰이
조에 부스케 지음, 류재화 옮김 / 봄날의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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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어떤 특정 규격과 기준, 범주에 넣기 곤란한 책이다. <달몰이>의 작가 조에 부스케는 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했다 독일군의 포탄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어 남은 생을 자신의 침실에 갇혀 지내게 된다. 나는 그러한 자기 상황에 대한 절망, 연민, 승화의 개인적 경험담일 거라 여기고 책을 펼쳤다. 구체적인 고통의 현시들이 줄을 이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이야기와 멀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몸으로 산 세월보다 침실에 유폐되어 보낸 시간이 더 긴 작가가 내면으로 침잠하여 삶과 고통, 죽음에 대하여 사색하여 길어낸 진실들에 대한 거대한 산문시에 더 가깝다. 그 발견들과 그것을 표현한 언어의 깊이와 밀도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지금 산문을 읽는 것인가, 시를 읽는 것인가가 가끔 헷갈릴 정도로 정제된 언어의 향연이다. 


"그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에 비로소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그의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진실이다. 스무 살에 포탄을 맞고 "나의 유령"이 된 조에 부스케는 그 순간부터 시인이 된다. 그는 그에게 일어난 재난을 그의 바깥에 흐르고 있는 삶의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 사실들을 관통하며 우리는 생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경험한다. 우리에게 우리는 실재가 아니다. 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과거의 내가 겪은 일들은 내 바깥에 있다. 나는 생을 통과한다. 나는 결국 허무로 수렴한다. 나에게 일어나는 불행들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 불행은 나를 지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에게 와닿아 떠나간다. 내 앞에 선 사람들, 내 옆에 선 사람들, 내 뒤에 올 사람들 모두가 경험하는 생의 근본적 속성이다. 조에 부스케는 자신의 불운을 이렇게 해석한다. 자신의 생을 특별하거나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거대하고 심원한 하나의 본질에 합류되는 것으로 전제한다면 그 고통마저 그러한 차원의 것이라고.


네 고통도 의인화해야 그것을 이겨내는 격조차 생긴다.


'나'와 '나의 세계'와 '나의 삶'을 혁명적일 만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게 하는 책이다. 고통의 심연에 빠져 마땅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야망을 "사는 것"으로 치환하는지 보여주는 전범 같은 책. 


"우선 내가 내 심장에서 뜯어낸 책 한 권을 다시 만드는 일"이 바로 이 <달몰이>다. 내가 초래한 것들이 삶이고 내가 사는 것이 나의 삶이라 생각하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 그 경계를 뛰어넘을 때 볼 수 있는 것들을 시인의 빛나는 언어로 보여준다.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발췌된 조에 부스케의 덧붙여진 해석은 멋진 미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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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18 1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덕분에 읽게 된 책 ˝랭스˝.
조에 부스케도 읽게 되면 다 블랑카님 덕분이겠습니다.

이 글이야 말로, 리뷰인지 산문시인지 모호하고, 모호해서 더욱 아름답네요.

˝우리는 생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경험한다.˝ 이 문장은 특히 아름답지만, 솔직히 그 뜻을 제가 다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생각해본 적이 없이 관성적으로 매일을 채워와서 어렵게 느껴지는 지도.


blanca 2022-04-18 12:27   좋아요 1 | URL
그 문장은 저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조에 부스케의 생각을 제 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해요. 이 책 정말 놀라웠어요. 한 번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표시한 곳 위주로 필사를 해봤는데 역시 기분이 정말 오묘해졌습니다. 제대로 잘 읽어냈는지 확신이 안 서지만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수이 2022-04-18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별 다섯개 주신 책들은 제가 다 좋아하는 책들이거나 좋아할 것만 같은 책들이더라구요. 달몰이는 아직 안 읽었으니;;;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22-04-18 12:28   좋아요 0 | URL
제가 후회하는 게 별 다섯 개 책을 엑셀로 좀 추렸어야 하는 건데...이 생각이 갑자기 불현듯 떠올라서...언젠가 작업을 좀 해 보려고 해요. 누가 가장 좋았던 책 뭐였냐고 물으면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려서요. ^^;;

짜라투스트라 2022-04-18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진짜 한 번 읽어봐야 할 듯^^

blanca 2022-04-24 11:53   좋아요 0 | URL
네, 짜라투스트라님 정말 좋았어요. 소장하고 두고두고 읽겠다고 생각할 만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