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사람들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5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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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직껏 어떤 여자에 대해서도 그 자신 이런 감정을 가져본 일이 없었으나, 그는 이런 감정이야말로 사랑에 틀림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눈물은 더욱 글썽거리며, 희미한 어둠 속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 밑에 서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 <死者> 중 

제임스 조이스의 초기작인 <더블린 사람들>은 더블린의 중하층 계급인들의 나른한 일상을 덤덤하게 스케치한 열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만큼은 그도 살아날 희망이 없었다.'로 시작하여 역시 '그의 영혼은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로 끝나는 이 단편집은 마치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문을 닫은 듯한 인상마저 준다. 제임스 조이스가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소재로 택한 것은 이 작은 도시가 마비의 중심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년시대, 사춘기, 성숙기, 노쇠기의 민중의 생활은 질벅거리고 침체되어 있으며 극적인 사건도 낭만적인 로맨스도 없다. 발전소 구경을 위해 학교를 빠지고 나룻배로 강을 건넌 소년들은 우연히 맞닥뜨린 노인의 삶의 체념을 들어주어야 했고, 하숙집 여주인이 딸과 맺어주려고 했던 손님은 비겁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헤맨다. 개인은행의 출납계원은 오랜만에 극장에서 만나 어설픈 로맨스를 만들어가다 짐짓 그 정열적인 움직임에 겁을 먹어 발을 뺐다 그녀의 부음기사를 읽고 외로움을 재확인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이야기들은 제임스 조이스가 인간 간의 소통 자체를 믿지 않는 것으로 대변된다. 그는 모든 인연은 설움으로 이끄는 인연이라고 얘기하며 운명에 거슬려 싸우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강변한다. 그의 메시지가 메타포에 실려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작품으로 엘리엇도 극찬한 <사자>는 이런 그의 소통에 대한 불신과 운명앞에서의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사무치는 이해와 죽음에 대한 유리알 같은 통찰이 돌올하게 빛난다. 나머지 단조로운 단편들이 줬던 나른함은 이 작품 앞에서 서곡 역할을 했던 것으로 이해될 정도로 경이롭기까지 한 작품이었다.  

어셔스 아일랜드의 어두컴컴하고 초라한 집에서 늙은 모컨의 자매와 그녀들의 조카가 함께 연 댄스파티의 흥청거리면서도 아늑한 생동감들은 그 파티에 참석한 조카 가브리엘의 아내가 우연히 <오그림의 처녀>라는 민요를 듣고 황홀해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에게 아내의 가치와 그녀와 엮은 추억들에 대한 영롱한 아름다움을 재확인하게 해줌으로써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들과 기대는 하나의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아내는 소녀시절 가스공장 소년공에게서 그 노래를 들었고, 고향을 떠나던 날 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비를 맞으며 창문에 돌을 맞혀 자신이 왔음을 알렸던 추억을 얘기한다. 그리고 그 소년은 죽고만다. 아내는 첫사랑의 애달픈 추억으로 울먹인다. 가브리엘은 지금은 늙어버린 아내가 한때는 한 소년을 죽게까지 한 로맨스를 간직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찰나에 절절하게 스며 시간의 괴력 앞에서 스러지고 만다. 결국 시간의 횡포 앞에서 인간들은 모두 저마다의 오해와 착각을 품고 죽음의 장막 뒤로 퇴장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가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결국 다 그림자가 될 것이고 이런 인식을 하는 나마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자각은 삶 앞에서 몸을 떨게 한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재력, 권력, 사랑 등 세속적인 기준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 레빈이 그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이 찰나에 지나지 않으며 다 스러지고 말것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인식하는 대목이 결말을 장식한 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그것과 절묘하게 맞물리고 있다. 가브리엘은 아내의 사랑의 추억에 질투를 느꼈다기 보다는 비를 맞으며 눈물을 글썽이며 소녀를 기다리는 장면을 떠올리고 옆에 누워 있는, 이제는 결코 젊고 아름다워 그 때 그 소년의 사랑과 동경을 복원해낼 수 없을 것 같은 아내의 모습을 서글프게 느끼며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에게 덮이고 있는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듣는다. 죽음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얘기하며 이 오묘한 대구를 완벽하게 형상화해낸 작가에게 경외를 느끼며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의 마음에도 그런 절절한 추억이, 사무치는 사랑의 기억이 있나 싶어 들여다 보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어 줄 수는 없다,는 작가의 얘기는 내 자신을 덜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젊은 날의 맹목적 믿음이 허무하지만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 같다. 회상 속의 사랑은 언제나 박제되어 가장 아름답고 처절한 모습으로 정지되어 있다. 돌아보면 그 자리에서 잡힐 듯 한데 이미 나는 그 때의 모습도 그 때의 투명한 감정들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이 깨달음을 주렁주렁 달고 늙어가는 일은 그래서 언제나 조금 쓸쓸하다. <사자>를 읽기 위해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을 펼쳐 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 쓸쓸함과 잃어버린 순수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추체험이 오롯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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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0-05-0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느끼기에 알라딘에서 가장 글 잘 쓰는 작가 중의 한 분인 블랑카님, 잠시 잠깐 들러 보는 것만으로도 저를 흥분케하는 님~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해서 이런 재능(어쩌면 노력일수도...)을 선물 받았을꼬... 봄밤 없는 봄날씨를 탓하며 부러워해 봅니다.

blanca 2010-05-07 14:32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님의 과찬은 저를 너무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이 칭찬 먹고 오후를 행복하게 보내렵니다. 감사합니다.!

穀雨(곡우) 2010-05-12 09:46   좋아요 0 | URL
느와르님 말씀에 백배동감. 베스트 오브 베스트.^^

노이에자이트 2010-05-0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나도 알라딘에서 글 잘쓰는 사람이란 평을 받아보고 싶어...블랑카님.부러워라...요즘은 제 서재에 댓글 달러 오는 사람도 없답니다.

blanca 2010-05-10 13:13   좋아요 0 | URL
노자님.ㅋㅋㅋ 댓글 읽다 웃습니다. 제가 부러워할 만한 사람은 아닌데요^^;; 노자님의 박학다식은 어쩌구요? 노자님 서재에 가봐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5-0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조이스...요즘엔 많이 안 읽히는 작가인데...그래도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더블린 사람들은 조금씩 팔리는 편이죠?

blanca 2010-05-10 13:15   좋아요 0 | URL
솔직히 재미는 없더라구요^^;; 더블린 사람들은 조이스 뒤의 단편작가들 대부분 모방한 것 같아요. 한 마을 사람들 모습을 연작형식으로.

노이에자이트 2010-05-10 16:17   좋아요 0 | URL
맞아요.우리나라에도 이문구<관촌수필><우리동네> 박영한<왕룽일가>가 있지요.<원미동 사람들>도 있군요.
 
순례자의 책
김이경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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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있을 법한 것에는 끌리지 않는다.
오히려 믿기지 않는것, 불가능한 것에 그것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
 - 페르난도 페소아 

열 여섯 살에는 모든 불가능한 것들에, 불온한 것들에 끌렸다. 스무 살에는 껍질이 달보드레한 것들에 중독되었다. 서른 살에는 물질의 권능에 사로잡혔다. 서른 중반. 나의 과거를 사로잡았던 모든 것들이 시간 속에 박제되어 있음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나의 사후에도 나를 여전히 미치도록 사로잡는 것은 임을 수긍하게 되었다.  

책에 대한 책은 용모가 매력적인 이성을 알아가는 과정의 포문을 연다. 인간성까지 그럴듯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책에 대하여 썼다는 것만으로 책중독자들의 기본적인 호의는 깔고 가는 셈이다. 이 책의 저자 김이경은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이 첫 소설집임을 고백하는 실책을 범한다. 첫소설. 무엇이든 그 서투름과 설익음을 광고하는 접두어 밑에서 솟아오르기란 쉽지 않다. 그래, 그러니까 이게 겨우 처음이다, 이거지. 누구나 마음속의 이러한 속삭임을 저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처음이라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처음이니까 이러저러할 것이다,라는 구획 안에 재빨리 구겨넣고 적당히 무시해주는 타성을 먼저 학습한다.  

그러나 이 책들에 관한 불온한 상상들을 선포한 저자의 이 첫소설집은 인간성까지 좋은 퀸카를 존재감없는 중매쟁이 덕택에 불시에 만난 듯한 환희를 선사한다. 시대와 지역을 종횡무진하며 책에 관한 역사와 숨은 얘기에 서사를 가미한 열 편의 얘기는 픽션의 형식을 띤 책에 관한 아담하고 내밀한 역사이다. 

저승에서 저마다 자신의 자서전을 기록한다는 저승은 커다란 도서관, 패설에 빠진 조선 사람들의 얘기인 상동야화, 분서의 역사, 인피(사람의 피부) 장정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 일본 에도시대의 걸어다니는 책대여점 가시혼야를 두고 벌어지는 기담, 말하는 사람을 책으로 대여하는 얘기, 장서가들, 중세유럽의 도서문화, 책도둑, 표제작인 순례자의 책 등 애서광들을 달뜨게 할 매혹적인 책에 대한 얘기가 인문학적 해설과 함께 다채롭게 수록되어 있다. 

특히 책을 사랑하는 애인의 어깨피부로 장정한 실제 사례를 통한 책의 몸에 관한 시선과  역으로 사람의 몸 자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읽는 것에 대한 얘기는 문자가 단순히 추상적이고 접촉 불가한 텍스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숨쉬고 호흡하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생명으로 확장되는 체험을 가능케 한다. 전자책의 등장과 각종 영상매체들로 인한 문자텍스트에 대한 경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또한 살아나가는 일 그 자체가 삶으로 엮이고 그 삶이 하나의 텍스트로 치환되어 장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 하나하나에 대한 존귀한 무게감을 실어주는 일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의 역사가 죽는 것이다. 누구나 등에 자신의 삶의 장서를 지고 다닌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의 외할아버지가 나그네들에게 "말하소!"라고 외쳐대며 그들의 얘기를 듣기를 열망했던 것은 우리에게는 본능적으로 삶을 이야기화하려는 경향과 그것에 매혹당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와 보르헤스처럼 천국을 도서관으로 상상한다면 그리고 내가 과연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 도서관의 사서를 꿈꿔본다.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꿈꾸는 힘이 오늘을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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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0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미있겠다.. 이거 확 끌리네요.
당장 살펴보러 가야겠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나는 아침 식사 전에 불가능한 일 여섯가지를 상상하지.

blanca 2010-05-06 12:13   좋아요 0 | URL
마녀 고양이님 이 책 진짜 매혹적이에요. 픽션이라지만 책에 관한 역사에 작가가 상상력을 덧붙인 정도지 소설집이 아니라 책에 관한 소소한 얘기들을 풀어놓은 역사책 같답니다. 추천해요!

로드무비 2010-05-06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순례자의 책> 땡스투가 들어왔던데 혹시 blanca 님이 누르신 건가요?
아주 오래 전 '책에 관한 오브제전'이라는 전시회가 있었거든요.
이상하게 그 전시회가 가끔 생각납니다.
<순례자의 책>과도 통하는 부분인데, 님의 리뷰가 꽝 도장을 찍는군요.

blanca 2010-05-06 12:53   좋아요 0 | URL
로드무비님 제가 맞을 거예요^^ 책에 관한 오브제전이요? 아, 듣기만 해도 가보고 싶어지네요.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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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젖먹이 남동생을 잃은 아홉 살의 나는 진정으로 위로가 필요했다. 슬픔의 당사자들인 가족이 서로를 위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다. 더군다나 누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아홉살의 누나가 땅거미가 걸어들어 오는 그 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방바닥에 엎드려 동생 때문에 운다는 것을. 돌이켜 보면 거창한 위로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너에게도 위로가 필요하고 너의 슬픔을 죄책감으로 덜어내지 말라고 얘기해 줬으면 됐을 것을.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중 

여덟살 생일을 맞는 스코티의 행성이 그려져 있는 케잌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아들을 생일날 교통 사고로 잃게 된 부부는 주문한 생일케이크를 찾아 가지 않는다고 여러 번의 괴전화를 건 빵집 주인을 찾아간다. 큰 외상 없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깨어나지 못한 아들의 죽음 앞 뒤엉킨 슬픔과 충격, 배려받지 못한 아픔에 대한 배신감 등으로 그들은 분노한다. 하지만 막상 그들 부부의 사연을 알고 난 빵집 주인이 진심어린 사과를 하며 따뜻한 계피롤빵을 내어주며 자신의 소외된 삶을 고백하고  부부의 상실감을 다독거려주자 그 기묘한 만남은 밤을 지새우게 되고 다사로운 햇살 같은 것이 된다.  

자식을 가져보지 못한 빵집 주인은 그들 부부의 슬픔을 예단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뿐이라고 덧붙인다. 위로의 계명 같다. 상대의 슬픔을 어떻게 속속들이 공감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그런 기대나 단정은 치워버리고 시작할 일이다. 그저 슬퍼하는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슬픔이 풀어 헤쳐져 저절로 흐를 수 있게 자그마한 통로 하나를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위로에 현란한 테크닉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위로가 무엇인지 모르고 덥석 그것을 거머지고 휘두르려 하면서 상대를 은근하게 조종하려 하지 않았던가? 혹은 위로가 필요함을 알면서도 무심코 눈감아버리는 무의식적 방기를 습관화하지는 않았는지. 위로는 카버의 얘기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것같다. 

그리고 표제작 <대성당>. 이미 김연수가 <<세상의 끝 여자친구>><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로 노골적인 오마주를 바친 작품이다. 아내의 친구를 카버는 맹인으로, 김연수는 인도인으로 설정하였고 카버는 그 불의의 방문객과 화자(남편)가 대성당을 함께 그리는 것으로, 김연수는 인도인이 그린 코끼리 그림으로 소통의 절정을 형상화한다. 

맹인과 정상시력을 가진 사람이 함께 눈을 감고 손을 겹쳐 대성당을 그린다는 상상만으로도 나에게는 카버를 읽을 이유가 충분했다. 그리고 실제 그 작품을 다 읽고 났을 때는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더듬을 수 없는 지점 벼락 같은 것이 쾅 쳤다. 사람의 감정의 파고를 언어로 온전하게 가두어 둘 수 없음이 아쉬울 정도로 그럴 정도로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소통의 장벽을 설정해 놓고 그것을 뛰어넘는 순간의 현현을 보여주는 그 지점, 화자는 외친다. "It's really something" 

 하루키와 김연수의 뜨거운 오마주를 한 몸에 받는 카버는  체호프와 닮아 있다는 극찬을 받았다. 단편소설의 성취를 판단하는 준거점에 떡 버티고 있는 체호프(정말 극렬하게 동의한다!)에 비견되었던 그의 단편소설집을 받아들고 난 감상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이 하나하나 다 흥미롭고 훌륭했다,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드라마틱한 재미도 오헨리 같은 기가 막힌 반전도 없이 조곤조곤 얘기해 나가는 그의 사람 간의 소통에 대한 희구의 체현들이 어쩌면 취향에 안맞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대성당>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이 두편은 작가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기도 한 만큼 이 두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작가에게 큰 빚을 진 것 같다. 그러니 리뷰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인 별점을 찍는 순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야박한 별점과 이 두 작품에 고작 다섯 개의 별점밖에 주지 못할 그 통탄 사이에서 망설여졌다.

김연수의 번역은 의외로 직역이었다. 말미에 밝혀 둔대로 카버의 문체를 살리고 싶었던 탓이었다고 한다. 어색한 부분의 번역투 문장들에 대한 해명이기도 하지만 잘 읽히는 유려한 의역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번역자의 색깔이 불거지고 매끄러운 의역이 좋았지만 원작자의 의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집해 버릴 위험을 고려한다면 직역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읽는 입장에서 번역은 언제나 아쉬운 여지를 남기지만 그 지난한 노고의 과정 그 자체로 고마워해야 할 듯하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소통을 갈구한다. 고독의 향유도 결국은 소통의 열망에 대한 고독한 위장에 불과하다. 일면식 없다 갑자기 비집고 들어오는 낯선 이와 어느 순간의 전부를 공유하며 감정이 오고가는 길목에서 카버가 우리의 소망을 대변한다. 나는 충분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늦어버렸지만. 혼자라도 시나몬롤빵 탐사를 떠나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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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4-1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끝에서 두번째 문단의 번역에 대한 이야기, 공감되네요.
의역이 지나치면 그럴 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 좋다고들 하던데 전 못 읽었어요.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는 글귀에도 동감^^

blanca 2010-04-15 21:5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는 최근들어 의역의 함정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게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요.

이 책은 저에게는 저 위의 두 단편만 너무 좋았답니다.^^;;

후애(厚愛) 2010-04-16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고 주말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세요.^^

blanca 2010-04-16 14:35   좋아요 0 | URL
후애님, 감사합니다. 드뎌 오늘부터 봄이 온 것 같은 날씨이네요. 벚꽃도 참 예쁘고. 후애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마녀고양이 2010-04-16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연수 님 작품 읽기는 포기한지라,,, 그분의 번역작인데, 문체까지 살리기 위해 직역이라면 역시 포기하렵니다.
김연수 님 작품은 묘하게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요. 공감을 형성하는 분들이 따로 있는듯 합니다.

무조건적인 공감은 아는척이 될 수 있는 듯 해여. 상대의 느낌을 같이 받아주는게 아니고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신을 위안하고 그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어요... 빵집 주인 참 좋은 분이네요.

아침부터 시나몬롤 빵이라~ ㅠㅠ. 살 빼야 하는데. 블랑카님. 우리 몸빼 바지 모임 하나 만들까요?

blanca 2010-04-16 14:39   좋아요 0 | URL
예전에는 조언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들어주는 과정에서 이미 위로가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시나몬롤빵이 카모메 식당에도 나오잖아요. 그 때부터 먹고팠는데 제빵 잘하시는 분들은 그거 보고 구워 드시더라구요. 마녀고양이님도 한 번 시도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밴드바지 ㅋㅋㅋ 편한 옷에 중독되면 위험합니다.^^;; 제가 밑위 길이 긴 청바지 없냐고 하니까 옷가게 점원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그런건 딴데 가서 찾으라고 하던걸요.

穀雨(곡우) 2010-04-1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이는 것에만 집착해서 그런지, 전 직역의 고통에 난독증에 빠질 때가 있더군요.
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궤도이탈이 되는 현실을 볼 때는
번역의 고통에 백배동감.
김연수작가의 애정이 듬뿍 담긴 책이라고 하니 읽어 봐야 겠습니다.
그리고 소통에 대한 멋진 생각에 아울러 공감합니다.

blanca 2010-04-16 14:41   좋아요 0 | URL
곡우님. 번역이 작품 자체를 어그러지게 만들고 아예 작가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직역과 번역의 절충점은 참 미묘하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직역이 솔직히 잘 안 읽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곡두님이 어떤 작가분들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집니다.^^

기억의집 2010-04-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나몬 듬뿍 들어간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어요.전 이양반 소설에 매력을 못 느끼겠어요. 이 책 말고 제발 조용히 좀 해줘 읽었는데.....
전 하루키가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더라구요. 노동자문학의 소설가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blanca 2010-04-21 12:02   좋아요 0 | URL
솔직히 체호프라는 극찬까지 받을 정도는 아니더라구요. 기억의집님 하루키는 좋아하세요?

기억의집 2010-04-21 18:57   좋아요 0 | URL
흐흠, 하루키 엄청 좋아해요. 한 20년빠라고 할까나~~~ 근데 요즘 오쿠다 히데오의 올림픽의 몸값 읽으면서 하루키에 대해 약간 삐긋거리기 시작했어요. 하루키가 보는 세상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일큐팔사 3권을 어떻게 끝낼지 모르겠지만...닫혀 있는 세계를 활짝 열어놓았으면 좋겠어요.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박완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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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 프루스트

우리는 삶 속에 포박당해 근시가 된다. 삶의 이미지를 제대로 굴절시켜 줄 광학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가 삶 속에 발을 담그고 있고 잊혀진 추억들과 잊혀진 사람들이 죽음 속에 갇혀 있다면, 소설가들은 삶과 죽음 그 가파른 경계를 유영하고 다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얘기를 듣는다. 경계선상에서 두 세계를 흘낏 둘러볼 수라도 있는 그들의 얘기는 언제나 생경하고도 항상 익숙하게 들린다. 생경한 것은 흐릿하게 보이던 세상이 갑자기 또렷하게 떠오르는 순간이고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결국 그 얘기들은 우리 안에 있었던 것들을 건져 올린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박완서, 이동하, 윤후명, 김채원, 양귀자, 최수철, 김인숙, 박성원, 조경란.
우리 시대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자신의 삶을 기꺼이 소설에 헌납했다. 언뜻 그들의 단편소설들은 소설적 장치를 빌린 자기고백서 같은 성격을 띤다. 소설집이 일종의 에세이이자 작가들의 뼈아픈 자기 성찰록으로 치환되어 떠오르는 것은 소설적 허구의 한계를 깨고 도약하고자 하는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 같아 경이롭다. 이야기가 삶 그 자체로 용해되어 버린다.  

이 책의 제목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박완서의 표제작에서 왔다. 유년시절 작은 어머니의 등에 업혀 본 노을은 두려움과 슬픔으로 채색된다. 이는 이동하의 입을 빌어 한 생의 일몰에 대한 목격으로 연결된다. 서로 다른 작가 둘이 해거름 풍경에서 조우한다. 해가 지며 주홍빛으로 풀어내는 그 아스레함이 애잔하고 처연한 것은 삶의 마침표, 죽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환적 풍경은 삶과 죽음의 현현이다. 유년기 작가 둘의 눈동자는 그것을 어렴풋이 체감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 둘은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사물들과 자연현상들에서 삶과 죽음의 추상적인 화두들을 휘핑크림처럼 걷어낼 수 있는 재능은 글쓰는 자들만의 특권이자 업고이다. 윤후명과도 이 작가 둘은 교차한다. 전쟁에 관한 얘기다. 

우리에게는 도저히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는 전쟁, 전쟁이라는 것이 있지 않았던가.-윤후명 <모래의 시> 중 

6.25의 경험을 공유하는 작가들은 저마다의 이향을 겪는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가 길 위에서 방황한다. 한 명(박완서)은 고향의 개념을 확장하여 사람 사는 곳으로 발을 디딤으로써 귀향의 과제를 완수하고, 다른 한 명(이동하)은 귀향 의지 자체를 포기한다. 이는 의미의 완성을 포기한 윤후명과도 상통하는 대목이다. 나름대로 귀향의 과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 그들은 증언의 욕구를 달래야 했다. 그것이 바로 소설을 쓰는 일로 연결된다. 자기 인생의 증언은 가장 절실하고 진실할 수 있는 작품의 소재가 되지만 그 함정 안에 웅숭그리고 있다 보면 그 자신도 청자도 모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소설 작업의 실마리를 풀어 나갔던 소재가 어느새 소설을 더 넓은 지평으로 확대하지 못하는 하나의 한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것을 깨는 일은 이 소설가들이 영원한 과업으로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양귀자의 요절한 천재 화가 오빠의 얘기가 인상에 남는다. 동네 슈퍼에서 우연히 만난 오빠의 후배에게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스스로 생의 마침표를 찍은 셋째 오빠의 회상은 생을 견디어 나가는 것에 실패한 피붙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천재로서 기억되는데 드라마틱한 방점을 찍은 자살의 선택에 대한 근원적 의문과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여정의 이정표가 된다. 양귀자의 소설은 뜻밖에 최수철의 <페스트에 걸린 남자>에서 조언들을 얻는다. 죽음에 대한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삶의 충동인 에로스와 죽음의 욕망인 타나토스의 만남을 목격한다. 자살충동은 기실 삶에 대한 강력한 욕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얘기는 양귀자의 오빠가 견디어 내지 못한 것은 죽음에 대한 충동이 아니라 삶의 분출하는 충동을 일상의 자잘한 고충들에 녹여내는 일이었다.

언젠가 사라질 시간을 지금 살아주고 있다고 여자는 느낀다. 현재를 살고 있다기보다 사라질 것이 분명한 시간을 살아주고 있다고 느낀다. 언젠가는 이미 먼 과거가 되어 있을 시간을 살아주고 있는 사람들......-김채원의 <등 뒤의 세상> 

브라우닝의 시구처럼 현재는 과거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로 스러지는 길목에서 그저 시간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몸을 싣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죽음도 삶도 결국 시간의 흐름 속 인간의 인식의 한계가 명명한 하나의 참조점 이상이 아니다. 머리로는 알지만 항시 망각하고 말아버리는 이 중요한 진리들을 문장 사이의 공백에 사려깊게 물려 놓은 작가들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렇게 삶을 견디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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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0-04-0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사서 읽고 있어요. 단편이라 심심풀이 땅콩처럼 읽고 있는데, 양귀자선생님때문에 샀어요. 아주 오랜 만에 글 쓰셨다고하셔서 샀지요.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아주 오랜만에 읽는 것이라서 약간 거리감이 있긴 했지만..... 근데 이야기삘은 많이 떨어지신 거 같았어요. 블랑카님 말씀대로 이동하의 작품이 결말이라고 생각해야겠네요^^

blanca 2010-04-08 22:46   좋아요 0 | URL
양귀자 좋아하세요? 그죠, 너무 오랫동안 안 나와서 저는 이런 생각까지 했어요. 소설가가 소설을 안 쓰며 사는 삶은 어떨까, 하고. 그렇다고 안써지고 쓰기 싫은데 계속 억지로 쓸 수도 없고 원래 이런 구석에 관심이 많아서요^^;; 책을 읽고 나면 작가의 삶이랑 일상이 너무 궁금해져요. <모순>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더라구요.

기억의집 2010-04-09 09:44   좋아요 0 | URL
양귀자 선생님은 글 써서 성공했으면 그길로 문단에 몸 바쳤어야했는데, 엉뚱하게 음식점을 내거나 해서 그런데 많이 신경쓰시는 거 같아요. 도서출판 살림도 양귀자 선생님 부군이 운영할걸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처음 출판사 그만두고 차린 출판사가 살림이었는데..

전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불만이 많아요. 주제도 이야기도 소재도 너무 한정되어 있어서... 게다가 이야기의 끈을 단편이든 장편이든, 그러니깐 양귀자 선생의 이번 단편 제목처럼 단절을 이어주어야하는데 그걸 못하더라구요. 장정일씨도 이번 구월의 이틀 실망했어요. 예전과 같은 에너지가 하나 없더라구요.

2010-04-09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9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덕혜옹주 (양장)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 / 역사공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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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갑자기 인다. 그 해궁의 문 옆 향나무 가지에.
파도가 쳐 올라온다. 내 배가 있는 곳간 밖까지.
바다 위로 흰 구름이 북쪽을 향해 흘러간다.
밀물도 북쪽으로 서둘러 흘러간다.
그리운 아내여, 해궁의 회랑에도 바닷물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많은 새들이 무리지어 날개치고 있는가.
당신은 외딴집 붉은 서까래에
내가 준 하얀 진주를 걸어놓고 홀로 한숨짓고 있는가.
 

그리운 아내여, 이젠 오갈 길 마저 끊어져
사랑하는 아이를 나는 그저 안고 내내 서있을 뿐이요. 

- 소 타케유키(덕혜의 전남편)의 시 <한회> 중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 <덕혜옹주>가 일본인 혼마 야스코의 이 책에 빚진 바가 크다는 작가의 고백에 관심이 갔다. 덕혜옹주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이자 일본의 조선왕공족 일본인화의 정책에 의한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간주되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여성사 연구가가 덕혜옹주를 근대여성사 연구의 일환으로 택한 것은 의외이기도 하지만 그 연구가 과연 편향적이지 않을 수 있느냐의 회의를 숙명적으로 업고 갈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런 회의와 우려를 어느 정도 불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녀는 무엇보다 일본 제국주의하에 그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대한제국의 왕족에 인간적인 연민과 죄책감을 간직하고 있었고, 덕헤옹주의 여자로서의 비참하고 유린당한 삶울 지근거리에서 조망하며 진심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다만 덕혜의 남편 소 타케유키가 대마도에서 소년시절을 보낼 당시 유숙했던 히라야마 타메타로 부부가 저자의 외가였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타케유키를 일관되게 호의적으로 그려내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결국 이 책의 무게 중심은 덕혜와 타케유키의 드러나지 않고 증명되지 않은 애정으로 기울고 있다.(작가 자신도 작가의 말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 정책에 의한 결혼이었지만 이 부부가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시인이기도 했던 타케유키의 여러 작품들을 해석하며 추정하고 있다. 사랑을 추측하고 그것의 논리를 세워나가는 모습이 낯설고 거부감이 드는 점이 없진 않았지만 거기에서 흘러나가는 지류들이 파고드는 작은 진실들은 유현했다. 사실과 추측을 엄밀하게 구분하고 시종일관 우리나라 독자를 인식한 듯 겸손하고 조금은 자신없는 듯 머뭇대는 그녀의 얘기들에 그래서 되레 더 공명하게 된다. 

고종이 환갑을 넘어 얻게 된 막내딸 덕혜옹주에 대한 사랑은 그가 그녀를 위해 궁내에 유치원을 만들 정도였다. 아름답고 다사로웠던 유년기는 그녀의 인생의 팔할을 덮어버린 정신병으로의 고통과 고립으로 더 애잔하게 빛난다. 그녀가 행복했던 너무나 짧고 유일한 시간들이었다. 뒤이어 일본으로 강제로 보내져 대마번주의 후예와 결혼하고 딸아이 마사에를 낳지만 그녀의 정신병 발병으로 일본에서도 대부분을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지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야 비로소 오매불망 그리던 낙선재에 와서 여생을 보내다 최후를 맞게 된다. 

덕혜의 삶은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철저히 조연으로 전락한 데에 그 비극의 핵이 있지 않나 싶다. 그녀에게 선택이라는 단어는 하나의 금기어이자 금제였다. 게다가 그녀의 인생을 무자비하게 조종한 것은 조국을 강제로 점령하고 가족을 유린한 일본이었다. 저자가 그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군데군데마다 그녀는 일본의 죄업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통렬히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과도하게 옹호한다는 인상을 떨쳐낼 수 없는 덕혜의 남편 타케유키가 덕혜의 삶 전체가 망가진 근본적인 요인을 결과적으로 희석시키고 있지 않나 싶다.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의식을 의식적으로 떨쳐낼 수 없는 독자의 한계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작품을 일본인이 읽었다면 또다른 감상을 가질 것이다.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일제 감정기의 역사적 사실들이 때로는 생경하고 언뜻 바로 이해되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는 과연 내가 독자로서 제대로 된 자격을 갖추고나 있나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본인에게 한국의 역사를 배워가고 있었다. 3.1운동은 완벽하게 비폭력이었고 질서를 존중하고 공명정대하고자 했던 공약의 완전한 실현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의친왕 이강이 독립국 조선의 일개 서민이 되더라도 일본 황족의 일원이 되지는 않겠다며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 했다고는 대목을 읽었을 때, 다음 문장으로 달음질치려는 나의 시선은 그들의 대의를 위한 투신에 붙잡히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의친왕의 아들 이우가 히로시마 원자 폭탄에 희생되었다는 얘기도 악연했다. 우리가 쓰고 우리가 가르치고 우리가 배우고 우리가 내면화한 역사가 한때 가해자의 후손의 프리즘을 통과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반향은 역설적으로 더 강렬하고 더 의미심장했다. 개별적 역사적 사실들이 외부자의 시선으로 걸러진 진실로 응축되어 스스로 둔중한 울림을 보내고 있었다. 그 울림은 몸 전체로 가득찼다.  

한국의 덕혜님이 오신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아버지가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주 몹쓸 짓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보상을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내가 덕혜님에게, "내가 당신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텐데, 왜 당신은 하지 않나요?"라고 물어도 가만히 계실 뿐이었습니다. 
                   -소마 유키카의 여자 학습원 생활 회고 중.(*그의 아버지는 일본 헌정의 신이라 불리는 오자키 유키오다.)

일본인이 한 얘기다. 정작 친일파 청산과 일본의 보상과 전범 처벌에 대한 더없는 관용을 베출고 있는 것은 우리다. 지금까지도 잊을만 하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논란들, 그것이 과연 미래지향적인 관용에서 덮어두고 갈 문제인지를 직시해봐야 하지 않을까. 풀어내지 않은 고들은 살을 눌러 아프게 한다. 무책임과 무관심, 자기기만, 사리사욕으로 아무리 생채기를 감싼들 굳어진 진물 아래 상처들은 저마다의 고통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인형이 입고 있는 치마.저고리의 색이 바래버린 소매 끝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음새 안에 원래의 색이 남아있어요."라고. 자세히 들여다 보니 정말 망가지기 시작한 이음새 안쪽으로 아름다운 선홍색이 또렷이 보였다.
                                                                                                                                                   -프롤로그 중 

덕혜의 삶은 바래버린 소매 끝으로 떠올랐지만 그 망가지기 시작한 이음새 안쪽의 아름다운 선홍색도 분명 그녀의 것이다. 누구의 삶인들 소중하지 않고 나름의 의미를 지니지 않을까. 그녀 전체를 뒤흔든 시대의 질곡에는 분명 비극적 장치가 난무하지만 아버지 고종으로부터 받은 가없는 사랑들과 딸 마사에를 낳아 키우면서 순간순간 느꼈을 경이들, 남편 타케유키와의 교감들에서 눈물어린 진주나마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아름다운 선홍색 순간순간들이 덕혜에게도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녀를 동정하는 것이 덕혜의 삶 전체를 비하하는 것으로 변질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덕혜를 기억하는 것은 한 비련의 여인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에 대한 말초적인 호기심의 발로가 아니라, 우리가 눙치려 드는 우리의 상처부위를 또렷이 들여다 보고 깨끗하게 닦아 내는 일이다. 가슴을 에이고 시리는 그 느낌들을 소중하게 모아 하나으 진주로 만들 일이다. 역사에서의 자기 반성은 현재를 담고 미래를 기탄없이 조망하는 거울을 닦는 것과 같다. 덕혜의 슬픈 눈동자가 떠오르는 그 거울을 선물해 준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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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04-07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블랑카님의 리뷰가 정말 좋아요.^^
덕혜옹주의 눈, 참 깊고 슬프네요.

blanca 2010-04-08 14:0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눈만 봐도 참, 자신의 슬픈 미래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04-07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비영의 <덕혜옹주>에도 그 쓰시마 남자에 대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했다는데 그런 점이 낫다고 봐요.사실 거의 진부하다시피 한,일본인은 못된 가해자...류의 도식은 좀 질리니까요.권비영 씨가 이 책을 꽤 좋게 평가하더라구요.

blanca 2010-04-08 14:05   좋아요 0 | URL
타케유키가 온갖 비난 속에서도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은 그가 분명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라는 방증 같아요. 이 책이 훌륭한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후애(厚愛) 2010-04-0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를 만들기 위하여> 제목이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리뷰가 정말 좋아요.^^ 감사~
리뷰 잘 쓰시는 알라디너 분들이 정말 부러워요~

blanca 2010-04-08 14:05   좋아요 0 | URL
후애님의 맛깔스러운 글솜씨도 부러운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의집 2010-04-0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시오노 나나미를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을 읽고 무척이나 실망했는데, 노인네의 편협성과 고집불통 그리고 우익적인 시각때문이었어요. 그 책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드니로와 메릴 스트립을 깐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구로사와 아끼라의 팔월의 광시곡이라는 작품에 대해 한 기자가 원폭피해자로서의 일본이 아닌 전쟁가해자로서의 일본에 대해 역사적 책임에 대해 질문을 한, 에피소드가 있어요. 그러자 이 나나미 노인네가 아니 그런 역사적인 문제를 왜 개인한테 묻느냐고 개인이 어떻게 역사를 책임질 수 있느냐는 식으로 글을 전개한 적이 있어요.
글쎄, 저는 역사를 책임지는 것이 어떤 국가나 시스템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어차피 역사라는 게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시각인데, 유명감독이 역사의 책임없이 그런 영화를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보거든요. 우리가 몰랐던, 저 덕혜옹주의 개인사가 일반적인 대중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틀이나 시각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건 개인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꼭 우리가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역사가 아닌 개인의 시각으로 본 역사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그게 역사에 대한 오독이든 아니면 성찰이던지 간에 말이죠. 한국인의 시각이 아닌 일본인의 시각으로 덕혜옹주의 틀이 께졌다면 그건 대단한 일이라고 봐요^^ 리뷰 너무 잘 읽었어요^^

blanca 2010-04-08 14:08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의 긴 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시오노 나나미 책은 솔직히 읽어 본 것이 없는데 저는 왠지 내키지 않더라구요. 무슨 얘기를 들었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는데 아마 기억의 집님과 비슷한 얘기였나 봐요. 무책임한 발언을 했었군요. 그러고 나니 이 저자를 더욱 칭찬해 주고 싶어집니다. 아. 그럼요. 개인을 내세우며 역사의 민감한 부분을 살짝 피해가는 저렴한 센스는 지양되어야겠지요.

마녀고양이 2010-04-08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인생을 만들 수 있는 가치관이나 굳센 성격의 사람이 아니라면, 저렇게 의무에 얽어매히는 자리에는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나'로서 살 수 있는 곳이 가장 소중한거 같아요.

blanca 2010-04-08 14:08   좋아요 0 | URL
저도 최근에서야 자유인으로^^;; 태어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았답니다. 시켜줘도 못할 것 같아요 ㅋㅋㅋ

순오기 2010-04-08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보셨군요, 아직 안 샀는데.... 리뷰를 보니 더 보고 싶어지네요.

blanca 2010-04-08 22:4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리뷰보고 서점가서 바로 질렀어요. 소설을 읽으셨으니 더 깊이있는 독서가 되지 않을까요? 책 표지도 참 이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