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 릴케의 로댕, 그 절대성과 상실에 관하여
레이첼 코벳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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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대의 거장 조각가 로댕과 이십대의 낭만파 시인 릴케가 함께 있는 모습은 언뜻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둘의 관계는 거의 부자 관계에 비견될 정도로 친밀했고 서로 주고 받은 영향의 파급 정도가 크다. 릴케가 오늘날의 릴케가 된 데에 로댕과의 교류는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작용을 했다. 릴케가 이십대에 로댕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릴케는 어쩌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된다. 


저자 레이첼 코벳은 스무 살의 어느 날 어머니가 준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우연히 읽게 됨으로써 차후 만개할 이 책의 씨앗을 품게 된다. 릴케 자신도 아직 자리 잡은 시인이 아니었을 때 시인 지망생으로부터 받은 하나의 편지로부터 출발하여 한 청년의 삶을 예기치 않은 곳으로 인도하게 되었듯 릴케의 이 책 또한 저자에게 그런 작용을 하게 된다. 코벳이 로댕으로부터 그런 인도자의 손길을 발견한 릴케의 이야기에 매혹당한 것이 우연이 아니었듯이.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들 앞에 앉아 그 그림들의 붓질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십대 시절의 로댕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는 한 해 전 딸을 잃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릴케의 삶의 출발에 대한 것으로 연결된다. 마침내 파리에 와서 로댕에게 밀려드는 서신을 처리하는 조수가 되어 로댕과 한적한 전원 뫼동에서 함께 살게 된 릴케의 이야기는 아직은 무명의 시인이었던 청년이 이미 엄청난 업적을 이룬 노예술가에게서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림으로써 위대한 시인의 길을 걷게 되는지에 대한 놀랍도록 생생한 연대기의 복원이다. 


릴케는 로댕을 숭배한다. 사소한 오해로 로댕이 거의 릴케를 쫓아내다시피 한 이후에도 릴케는 로댕에 대한 마음을 쉽사리 접지 않는다. 릴케에게 로댕은 아버지이자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하나의 장애물이기도 했다. 로댕의 스승이 "예술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다"라고 했던 이야기는 릴케에게 와서 비로소 실현되었다. 로댕이 늘그막에 추락하는 노추의 모습을 릴케에게 들킴으로써 릴케에게 죽음 앞에서 어떻게 의연해야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반면교사가 되었다는 결말은 서글프다. 


릴케의 시 '고대 아폴론의 토르소'에는 이 책의 제목이 된 시구가 나온다. 로댕과의 애증의 관계에서 마침내 릴케가 얻어낸 삶과 예술의 교훈은 애틋하고 의미심장하다. 예술가가 되는 것보다 삶을 먼저 살아야 한다는 뒤늦은 깨달음은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간직한 릴케의 아름다운 시들에 대한 하나의 대가였을지 모른다. 


릴케와 로댕이 흡사 사랑하는 부자처럼 친밀했던 날들. 로댕은 릴케와의 하루를 마감하며 침실로 떠나려는 그에게 '잘 자' 대신 항상 '봉 쿠라주'라고 했다. 릴케는 처음에 그런 그의 '힘 내!'라는 말이 의아했지만 마침내 늙은 아버지가 아직 젊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이해했다. 삶에도 예술에도 가장 필요한 건 결국 포기하지 않고 다시 힘을 그러모으는 것이라는 얘기는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공명하는 메시지다. 릴케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건 그러지 못했지만 그랬던 날들 로댕이 해줬던 마지막 인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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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1-0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23-01-09 18:2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따뜻한 주말 보냈어용^^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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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마지막까지 약을 먹어주었으니까.˝ 백수린 작가의 반려견 봉봉이와의 이별 장면에서 엎디어 펑펑 울어버렸다. 내가 사랑이라 믿은 그 사랑을 끝까지 지켜주려 했던 상대의 그 마음이 떠올라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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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2-08 15: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백수린 작가의 책을 한 권 읽다가 포기했고 그래서 이 에세이에 관심도 없었는데 블랑카 님의 이 백자평으로 완전 읽고 싶어졌어요. 담아갑니다.

blanca 2022-12-08 17:35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사실 저도 이 작은 에세이집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요, 주책 맞게 막 엉엉 울게 만드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속수무책으로다가요. 사랑이었어요. 사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 - 되찾은 시간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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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릴 시간을 살고 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내가 잃어버린 나의 시간을 찾을 수 있는 읽기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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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이브 - 잭 더 리퍼에게 희생된 다섯 여자 이야기
핼리 루벤홀드 지음, 오윤성 옮김 / 북트리거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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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적인 가해자의 서사가 횡행하는 곳에서 영원히 잊힐 뻔한 무명의 희생자의 삶을 구체화하여 그들도 사랑하고 소망하고 꿈꾸고 실망하고 슬퍼했던 딸, 여동생, 어머니, 아내, 연인이었음을 기억하게 해 준 이야기. 저자가 소망했던 이들의 존엄의 구원은 마침내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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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2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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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미와 뼈대가 있는 소설이 내 소원"이라는 박완서 작가의 말이 여실히 증명된 작품인 것 같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정도로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본주의의 속악함과 가부장제도의 그 주도면밀한 세뇌성을 다층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작품이라 묵직하다. 서문에 인용한 전경자의 <꿈>에 나온 아득한 옛날 왕뱀한테 반한 새끼여우가 마침내 왕뱀을 찾아 땅으로 내려간 날, 공교롭게도 왕뱀은 용 되어 하늘로 오르던 날이었다는 우화 같은 시가 애틋하게도 여운이 길어 한참 머뭇대다 드디어 의사 심영빈의 초등학교 동창 광과 현금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갔다. 


심영빈은 초등 시절 동창 현금을 두고 친구 광과 묘한 애정 다툼을 벌인다. 사춘기에 들어서며 현금에 대해 느낀 은밀한 사랑은그녀의 집 앞에 피어 있던 능소화로 환기된다. 결국 이 짝사랑은 사십 대 중반이 되어 우연히 재회하게 된 현금과의 외도로 귀결된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재벌가에 시집간 나이 차 많은 여동생 영묘의 오빠, 홀로 세 남매를 키워내고 며느리에게 이런 저런 유세를 떠는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한 영빈은 이 모든 책임의 갑옷을 은밀하게 벗어 던지고 현금이라는 여자 앞에서만은 하염없이 욕망하고 설레고 허무해한다. 


불빛을 볼 때마다 가슴이 후둑후둑 오기 직전의 숲처럼 설레곤 했다. 곁에 있어도 한강만큼의 거리가 느껴지는 만큼, 헤어져 있어도 예민한 현 같은 게 당겨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녀, 그 소통의 끈은 미세한 바람에도 오묘하게 떨릴 것처럼 긴장돼 있었고, 영빈은 그 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때 살아 있음의 번뇌와 희열을 오싹하니 실감하곤 했다.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둘의 사랑이 중심 이야기는 아니다. 뼈대는 오히려 동생 영묘의 남편, 영빈의 매제 송경호의 때이른 죽음이다. 재벌가의 후계자였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폐암 진단을 받은 사실은커녕 죽음 자체가 가지는 의미도 모른 체 두 어린 아이와 젊은 아내를 남기고 눈을 뜨고 죽게 된다. 투병 과정, 죽음, 장례식도 하나의 전시 효과처럼 전시되고 사후 유언조차 남길 기회를 박탈하는 재벌가의 추악한 작태를 목도하게 되는 심영빈은 물질이 얼마나 인간의 정신을, 생명을 하찮게 폄하할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자본주의의의 폐해는 추상이지만 남들이 부러워하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집안에서 한 사람의 생의 서사를 무참히 파괴해버리는 박완서의 서사는 현실의 요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우리가 끊임없이 욕망에 휘둘리며 결국 잃게 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심영빈은 자신의 어머니까지 모시며 맞벌이를 한 아내를 두고 외도를 했다는 점, 아내가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낙태를 하고 늦은 나이에 아들을 가지겠다는 일념으로 동창 광의 병원까지 찾아가게 한 가부장제의 방관자였다는 점에서는 분명 비난 받을 여지가 많은 주인공이다. 박완서는 여동생 영묘의 시가의 작태로는 물질만능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심영빈의 유약하고 자기합리주의의 뻔뻔함으로는 가부장제의 뿌리깊은 병폐를 드러냄으로써 이중의 뼈대를 갖춘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어쩌면 그 중간의 그물에 걸린 심영빈은 두 제도의 포로이자 은밀한 공모자로서 역할 했는지도 모르고 그 모습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 출간된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도의 질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서야 전경자의 시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아, 하루가 하루가 아니던 그 옛날"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걸어왔나. 여전히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향해 땅으로 추락하고 우리가 바라던 것들은 그 타이밍을 기가 차게 파악하고 승천해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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