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율하는 나날들 - 조현병에 맞서 마음의 현을 맞추는 어느 소설가의 기록
에즈메이 웨이준 왕 지음, 이유진 옮김 / 북트리거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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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안전하다는 인식은 환상이다. 이 환상은 곧 깨어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대부분은 다시 그 환상으로 귀환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지금 이 상태가 공고한 것처럼 믿는다. 믿어야 견딜 수 있는 게 일상이므로.


그런데 이 환상에서 매일 반복적으로 깨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조현병도 그 중 하나다. 이 책의 저자 에즈메이 웨이준 왕은 대만계 미국인으로 예일대 학생이었다. 조현정동장애 양극형이라는 복잡한 진단명은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설명하는 서사를 해체한다. 즉 그녀는 스스로의 서사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조직해야 하는 평생의 과업을 부여 받는다. 이민자의 자녀로 남들이 부러워하는 아이비리그 대학생이 되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병 때문에 교정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 사람들은 다른 정신질환보다 조현병에 걸린 사람을 더욱 위협적으로 인식한다. 더 이질적으로 느낀다. 그녀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생긴 위계의 가장 최하위층을 점했던 환자들이 조현병 환자들이었다는 얘기는 정신 질환자들의 공간 속에서도 '한 존재의 파멸적 중단'을 암시하는 조현병에 대한 공포를 암시한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조현병을 진단 받은 저자가 매일 사투를 벌이며 삶 속에서 '조율하는 나날들'에 관한 이야기다. 중단된 학업을 다시 이어가고 다시 사랑을 찾고 우정을 회복하고 길을 떠나고 직업을 가지고 살아나가는 이야기는 묘하게도 무겁거나 비극적이지 않다. 그 안에서 찾아나가는 균형점, 자신의 정신병을 삶에 정체성에 통합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그 안에 있지 않다 할지라도 생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여러 비극적인 일들에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간접적 참조점을 제시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는 일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롭다. 막연한 희망, 위선, 위장의 장막이 벗겨지고 드러난 생의 속살은 차갑고 날카롭지만 우리가 그 안에서 숨쉬는 일에 대한 가치를 일깨워 준다. 슬프고 괴로워도 뚫고 나가는 그 어떤 지점에서 우리 모두는 만난다. 


저자는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믿는 '코타르 증후군'을 경험하게 된다. 살아있기에 아플 수 있고 이별로 인한 상실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아예 해체되는 경험이다. 이 안에서 나는 이미 죽었으므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도 없고 따라서 헤어질 수도 없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고통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묘한 경험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지옥의 형벌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희망조차 없으며 지독한 고통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사실, 상처, 비탄은 그 나름대로 끔찍한 것들이지만, 지옥의 형벌을 받는 죽은 여자에게는 무척이나 인간다우며 살아 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pp.236


에즈메이 웨이준 왕은 섣부른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감히 그 지옥에서 걸어나와 다른 형태의 '조율하는 나날들'을 맞이하기를 기원해 본다. 그녀가 통과한 그녀만의 '조율하는 나날들'이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되든 나는 살아가게 되어 있고, 내 삶이 어떻게 풀리든 나는 것을 견뎌내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그녀의 말이 주는 희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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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무게 - 가족에 의한 죽음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사탐(사회 탐사) 7
이시이 고타 지음, 김현욱 옮김, 조기현 해제 / 후마니타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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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히면 안전할까, 위험할까. 바깥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시로 받는 평가, 비판, 책임의 무게를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이 가정일 수도 있지만 그 구성원들도 각기 다른 개성, 욕망, 꿈을 가진 개인이기에 때로 다툼과 해결 못할 불화 속에 고통을 당하다 뉴스에 나오는 극단적인 비극이 일어나기도 한다. 가족 살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그곳에서 벌어진 결과론적인 사건을 접할 때 언론은 그것을 선정적으로 보도하기에 바쁘다. 그 이면에 깔린 가족의 전사, 사회의 책임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그 사건 당사자들을 철저히 타자화하면서 우리의 안전을 자족하기에 더 쉬운 일이니까. 우리도 언제든 그 비극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삶을 꾸려 나가고 있다는 자각은 위험하니까. 그렇게 쉬운 길을 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만당한 것이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가족 구성원의 붕괴는 특별한 사람들만 경험하는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영원히 건강하고 젊고 언제나 사회 구성원으로 적절히 제대로 기능할 수는 없다. 누구나 늙고 약해지고 병든다. 어쩌면 가족의 의미는 그때부터 다시 재구성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위험하고 불편하게 읽힐 수도 있다. 저자 이시이 고타는 일본의 유명한 논픽션 작가다. 이 책은 저자가 2015년부터 6년간 일본내에서 벌어진 일곱 건의 가족 살인 사건을 직접 취재한 건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사랑스러웠던 아들이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엄마를 공격하고 행복하게 사는 여동생에게 살의를 느꼈을 때 선량하고 성실한 사회 구성원이었던 아빠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나를 학대했던 엄마가 정작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그걸 못 들은 척 하고 죽음까지 방조, 방관했던 자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아무리 전방위적으로 도와주려고 노력해도 끊임없이 가족의 안정을 위협하는 자매의 정신병은 과연 누가 잠재울 수 있을까?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고 학대 당하고 유기 당했던 유년을 간직한 여성은 과연 자신의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은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결말들을 담고 있다. 


처음 가족을 꾸릴 때 사람들이 했던 생각과 의도는 비극의 서막처럼 들리고 지극히 평범하다. 누구나 좋은 아내, 남편, 엄마, 아빠, 아들, 딸이 되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자녀의 혹은 부모의 문제는 경제적인 부담과 함께 맞물려 그 책임감을 통해 개인을 짓누른다. 이 책에서의 가족 살인의 가해자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나누고 개입할 수 있는 부담을 철저히 개인이 소화해내려 애썼다. 개인이 극도의 피로감과 책임감에 짓눌리다 보면 이성적 판단이 어려워진다. 사회적 지원 시스템이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찾아가는 서비스가 아니라 개인이 찾아내야 하고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구조다 보니 끝까지 가족들이 가족 구성원의 장애, 질환을 간호, 간병해야 하는 부담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돌봄의 무게는 시시포스의 돌처럼 회귀한다.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고 현상만을 보여주는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처음에는 이 책이 그런 사건들을 드라마틱하게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회의했다. 그러나 그 가정 내에 들어가 그 가족의 서사를 다시 재구축할 때 비극의 단초를 탐색하고 어떤 타이밍에서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나를 조망할 수 있는 읽기는 많은 시사점을 품고 있었다. 아무도 이야기하고 설명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개인이 모든 걸 안고 갈 수 없다는 깨달음은 우리 사회와 복지 시스템이 기능해야 하는 지점에 대한 깊은 고민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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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02-04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산 책이에요. 읽기도 전에 마음이 무거워요ㅠㅠ;

blanca 2023-02-04 14:30   좋아요 1 | URL
마음이 정말 아프더라고요. 평범했던 가정이 일순간 뉴스에 대서특필되는 가정이 되는 게 사실 특별한 계기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고,병,노쇠에서 촉발되는 이야기들이어서 읽고 나서도 두렵기도 하고 그랬어요. 저자 어조가 내용과는 달리 참 담담해요. 그래서 더 와닿는 것도 같아요.

바람돌이 2023-02-04 1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르포성 책들은 많이 나와줘야 할거 같아요. 그래야 사회적 반향도 일으키고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 끔찍한 문제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를 포착하고 사회적 대책을 마련해야 하니까요.

blanca 2023-02-04 14:31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저도 그 생각 했어요. 사회가 개입하고 나눠야 하는 짐을 온전히 가정 안에서 감당하려다 벌어진 사고들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stella.K 2023-02-04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보면 마음이 무겁겠어요.
우리나라는 찾아가는 서비스란 점이 그나마 일본 보다는
좀 낮지 않나 싶네요. 기능하는 사회란 그런 것이어야 하겠죠.

blanca 2023-02-04 17:34   좋아요 1 | URL
이 책,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좀 그래요. 태어나 살고 늙고 병들고 다치고 죽는다는 게 참 삶의 숙제 같고 주변에 폐를 안 끼치겠다는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게 비극적이고. 시간만 가면 더 편해지고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어렵고 힘들고 배워야 하는 것 투성이인 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3-03-13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3-03-14 18:5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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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는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아니,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실제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나가는 사람의 고통, 회한, 보람, 슬픔은 영영 그 깊이와 무게를 실감할 수 없다. 


여기 마산의 한 청년 용접 노동자가 있다. 또래가 교실에서 수능 공부를 할 때 실습실에서 기판을 납땜하는 연기 때문에 두통을 앓고 이미 졸업 이후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아이는 대학교 교정이 아닌 공장에서 방진복을 입은 첫사랑을 만난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그를 다시 대학으로 돌려보낸 이도  누나 같은 이 친구다. 


우리가 상정하는 대다수의 스물 언저리의 청년이 보내는 대학 교정에서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청년 노동자들의 삶을 관찰자의 공허한 언어가 아닌 당사자의 목소리로 듣는 일은 놀랍고 순간순간 미안해지는 일이다. 정말 이 정도였어? 산재를 당하고도 산재 신고도 하지 못하고 폭염에 정규직 노동자들이 쐬는 에어콘 바람도 사치였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무지가 때로는 죄악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한다.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의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려야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러나 어둡고 처절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짬마다 나타나는 인생의 멘토 같은 아저씨들,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건강한 사랑, 기대하지 않았던 타인들의 따뜻한 배려. 천현우 저자가 그려내는 이 신산한 삶의 풍경이 역설적으로 가지는 온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하는 의미들은 곳곳에 뿌려져 있고 저자의 입담은 그 의미를 한층 더 심오하고 빛나게 만든다.


한 달 정도 지나 마침내 완공한 징검다리를 보게 되었다. 떡갈나무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우리의 창조물에 올라섰다. 행여 볼트 하나 빠졌을까, 용접에 균열이라도 있을까 세심하게 살폈다. 아직 물이 차오르지 않은 널찍한 호숫가를 가로지르는 동안, 보람으로 가득찬 심장에서부터 사방으로 짜릿한 느낌이 퍼져나갔다. 

-천현우 <쇳밥일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의 안전망 사각 지대에서 떨었던 청년이 만든 다리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우리는 단지 그 다리를 건너면 그뿐이었다. 익명의 노동자들이 그 다리를 만들며 용접을 해서 철 사이를 메꾸며 어떤 것을 두려워했고 어떤 것을 꿈꿨는지 그들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꿈조차 사회가 강요한 계층 사다리 안에서 꿀 수밖에 없었던 그 현실에 대한 이야기. 단지 화내고 푸념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커피를 마시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소설을 쓰고 운동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며 하루하루 더 나아갔던 이야기. 


저자는 이 청춘의 노동 일지가 사적인 경험 토로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답해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사소한 것도 아니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내 임금이 내가 열심히 오래 일할수록 차곡차곡 오르고 어제의 불운이 결정된 미래를 몰고 오지 않는다는 믿음만 있다면 한번 해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죽이지 않는 사회. 저자의 마흔 살에는 그런 내일이 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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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03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책 같습니다. 꿈조차 사회가 강요한 계층 사다리 안에서 꿀 수밖에 없다니...비극이네요..

blanca 2023-02-03 19:13   좋아요 0 | URL
작가 필력이 대단해요. 소설을 쓴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스토리텔링이 탁월해서 작가의 이야기가 정말 눈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읽혔어요. 재미와 깊이가 다 있는 책입니다.
 
생에 감사해
김혜자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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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 훌륭한 연기자이기에 앞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처절한 이해와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다. 작가가 되는 건 언어의 표피적 이해 이전에 결국 삶을 제대로 살아야 가능하구나. 유명인의 책에 대한 편견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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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1-18 0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유명인의 책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유퀴즈의 김혜자 님 편을 보고 ‘오 이 책 읽어봐도 좋을것 같다!‘ 싶더라고요. 그런데 블랑카 님 벌써 읽으셨고 이런 평을 써주셨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23-01-18 08:29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저도 유퀴즈 보고 읽은 건데요. 사실 아무래도 워낙 김혜자 배우가 유명한 연기자다 보니 책은 그냥 형식에 불과하겠지, 하고 큰 기대 없이 펼쳤다가 한 분야에서 어떤 일가를 이룬 사람은 인생에 대한 자세 자체가 남다르구나, 싶었어요. 요즘 고민하는 것들에 대한 조언들을 받은 느낌이었어요. 드라마 하나하나에 대한 마음가짐이 정말 감동적이더라고요. 많이 배우고 저 자신도 돌아보게 됐어요.

자목련 2023-01-18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유명인의 에세이는 기피하지만 김혜자 배우의 책은 읽어보고 싶은 책이에요.

blanca 2023-01-18 18:52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나이 드는 것의 헛헛함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일단 김혜자 배우가 출연한 작품들의 스토리텔링이 기가 막혀요. <안나 카레니나> 제가 좋아했던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하는 데 와, 김혜자 배우가 책을 참 좋아하고 수시로 다시 읽고 그러는 것 같더라고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감동 받았습니다.

라로 2023-01-18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예전에 이 책 나왔을 때 읽고 싶다는 글을 썼어요. 그땐 종이책이라 마음만 있었는데 블랑카님의 200자평이 그날 제가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생각이라 넘 똑같아서 저 지금 손이 떨릴 지경이에요!!!

blanca 2023-01-18 18:53   좋아요 0 | URL
보통 기대보다 못하잖아요. 이 책은 정확히 기대보다 훨씬 더 좋았습니다. 연기에 대한 마음가짐이 정말 신성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자신을 포장하고 변호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은 노년의 명연기자에게 참 배울 것이 많더라고요.
 
소송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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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T와 KTX를 구별하지 못했다. 당연히 열차가 지상으로 달릴 것이라 여기고 앉았는데 전광석화처럼 지하로 통과하면서 이따금씩 요동치는 느낌과 번쩍이는 불빛 등에 당황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카프카의 <소송>을 펴들었다. <소송>과 시속 300킬로미터의 고속열차는 이제 뇌리에 깊이 남을 것이다. 둘 다 인생의 거대 은유로.


첫 장부터 '체포'로 출발한다. 은행의 간부로 근무하는 요제프 K는 서른 살 생일에 영문도 모르는 채로 체포된다. <소송>은 그가 이 소송에서 자신을 소명하고 변호하기 위해 1년 간 법원을 찾아다니며 변호사와 화가, 신부 등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이 허무하게 처형으로 마무리지어지는 이야기다. 끝까지 그는 누가 대체 왜 자신에게 소송을 했는지 그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다. 당연히 자신이 무죄라 확신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한 판사",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카프카는 무수한 질문들을 제기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그 어떤 답도 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 모호함이 가지는 기이한 매력이 이 한없이 안개 속 미로를 헤매는 것만 같은 불친절한 이야기의 동력 그 자체다. 대체 이 동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요제프 K의 비극은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직장에서의 페르소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 상담을 해야 하고 심지어 이탈리아 고객의 관광에도 동행해야 한다. 자신이 이유도 알 수 없는 체포와 소송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상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서의 역할을 유지해야만 하는 그 질곡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우리의 모습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다.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도 먹고 사는 문제를 방기할 수 없는 게 생존의 비극이다.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질문들과 시급한 일들은 주변부로 밀려난다. 카프카는 이 지점의 묘한 아이러니를 포착한 것이다. 요제프 K의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려 드는 주변인들의 모습의 묘사는 다분히 희극적이다. 내가 쓰러지면 그런 나를 짓밟으려는 무리들. 그 무리들 앞에서 어떻게든 나의 정상성을 연기해야 하는 압박감. 거대한 사회 체제의 부속품으로 기능하는 우리 인간들이 가지는 고뇌의 상황이다.



소송이란 무엇인가



요제프 K는 이 소송이 무결한 자신에게 제기된 불합리한 것으로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그런 그의 기대를 일거에 깨뜨리는 이 일에 도움을 주겠다는 화가의 말은 언뜻 모순처럼 보이면서 인간 실존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그는 우리 인간이 바라는 석방이 우리의 삶 안에서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존재 자체가 무죄가 될 수 없으므로 "외견상의 무죄 판결", "판결 지연" 등의 미봉책으로 그 심판을 유예하는 것이지 결코 소송 그 자체에서 해방될 수는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소송'은 결국 인간의 실존의 한계, 필멸자로서의 숙명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평온한 일상이 영원할 수 없다. 생로병사의 기본 전제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실존은 그 자체로 유죄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한계, 공허함에서 우리는 어떤 순간이든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고 카프카는 그것을 직시하지 않고는 우리가 삶을 영위할 수 없음을 요제프 K의 소송으로 보여주고 있다. 카프카의 인식은 자의적인 것도 개인적인 것도 아니다. 그 보편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요제프 K가 욕설을 하며 처형 당하는 장면에서는 몸이 떨리는 것이다. 우리도 결국 그런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카프카의 마침표다.


<소송>은 우리가 일상의 지엽적인 문제들로 괴로움을 느낄 때 우리가 정작 중시해야 하는 것이 뭔지에 대한 아픈 각성의 순간을 줄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이미 지리멸렬한 소송의 피고가 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만든 체제가 될 수도 있고 가치 규범일 수 있다. 연약한 육체에 갇혀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기본 명제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들과 마찰하고 때로 복종하고 종종 반역을 꾀할 것이다. 의료 기술의 발달, 다른 유흥거리들로 잠시 눌러 놓을 수도 있다. 그러다 대체 누가 왜 어떻게 그 소송을 제기했는지 알지 못한 채로 결국 죽게 될 것이다. 이 비관적인 숙명 속에 인간이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 사랑할 수 있는 것,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일 것이다. 염세적인 세계관이 절망으로 가지 않는 유일한 출구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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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2-07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3-02-08 10:2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