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작가란 무엇인가 3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3
파리 리뷰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앨리스 먼로, 트루먼 커포티, 프리모 레비, 수전 손택,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한다. 줄리언 반스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은 두 권 정도 읽어보아 아직은 무어라 말하기 힘든 상태다. 커트 보네거트, 잭 케루악, 돈 드릴로, 르 귄, 존 치버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다시 인터뷰다. 인터뷰어도 시간도 장소도 제각각이다. 작가들의 집으로 찾아간 경우가 많아 그 집, 함께 사는 사람, 채운 소품들에 대한 인상이 작가와의 만남과 더불어 출발점이 된다. 예컨대 아내를 잃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쓴 줄리언 반스는 여기에서 아직 아내와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집에서 행복하다.

 

이제는 늙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글을 쓰게 만드는 설레임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나이가 된 앨리스 먼로는 기대 만큼 따뜻하고 솔직하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열여덟 살때 그녀를 홀딱 반하게 한, 하지만 그때는 응답하지 않았던 남자가 지금 그녀 곁에서 그녀와는 또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자라난 곳에 함께 돌아와 있다. 한창 아이를 키우며 때로는 아이를 재우고, 때로는 학교에 보낸 시간에 열정을 쏟았던 이야기들은 그녀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곳에 다 커버린 아이들 만큼이나 회한을 남기기도 한다. 이야기에는 실패하는 부분이 있지만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그녀의 이야기가 그녀가 써 낸 이야기 만큼이나 가슴을 뚫고 들어온다.

 

트루먼 커포티는 이미 백만장자가 되어 패션 모델 출신의 기자를 맞는다. 앨리스 먼로가 장편을 남기지 못하는 데에 느낌 아쉬움이 트루먼 커포티 앞에서는 가장 어려우면서 절제된 형태로서의 단편의 찬양으로 변주된다.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글은 절대 쓰지 않는다는 솔직한 고백이 놀랍다. 온갖 불길한 전조에 물러서는 모습은 그의 나약한 내면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는 찬란한 젊음을, 비참한 최후의 텍스트를 자신의 모습으로 표현해 낸다. 그의 몰락을 알고 듣는 그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어떤 처연함을 내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드레스덴의 폭격을 관통했던 커트 보네거트의 신랄한 유머는 웅변적이다. 그는 전쟁의 무용함, 아무리 선으로 포장해도 그것은 학살임을 자신이 <제5도살장>을 써서 유일하게 드레스덴 폭격으로 이익을 본 이 지구상의 한 사람이라고 자조적으로 고백하며 역설한다. 훌륭한 작가는 부족하지 않고 오직 신뢰가는 독자가 부족하다며 일을 그만두는 사람들이 복지수표를 수령하기 이전에 독서록을 제출하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위트 앞에서는 이 진지하고 사려 깊은 작가가 얼마나 재미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책에 엄격해야 한다"면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만을 읽는다는 수전 손택의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대부분의 작가들은 관계로부터는 거리를 두지만 세상 그 자체에 대하여서는 멀어지지 않는다. 수전 또한 그렇다. 인간의 잔혹성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엄정한 묘사는 낭비를 싫어하는 작가들의 성향이 열정적 글쓰기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예루살렘상을 수상했다는 돈 드릴로의 일과의 고백은 하나의 아름다운 단편 같아 옮겨적었다.

 

아침에 수동타자기로 일을 합니다. 네 시간쯤 일한 뒤 달리기를 하러 나가지요. 그러면 한 세계를 떨쳐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요. 나무와 새들, 이슬비. 멋진 간주와 같죠. -p.351

 

그리고 그는 보르헤스의 사진을 본다.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무기력과 표류 상태에서 벗어나 마법과 예술, 예언이라는 별세계로 데려갈 안내자로 그를 삼으려고. 마치 르 귄이 베토벤이 자신이 향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거기에 이르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것을 배우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가 내다보이는 작업실 창문 앞에서 진지하고 사랑스럽고 신비한 독자들이 있는 상상을 하고 글을 쓴다는 존 치버의 고백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지막으로 한창 젊고 예뻤던 사강이 라디오 녹음이 있다며 인터뷰를 마치고 소르본 대학으로 가는 여학생처럼 달려나간다. 여기에 그녀의 쇠락과 늙음은 없다. '삶'이 세 명의 인물이 엮어가는 일종의 리드미컬한 진행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삶이 제멋대로라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지극히 사강다운 이야기가 남는다.

 

정확한 인터뷰의 일시가 누락되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의 작가의 이야기인 지를 정확히 추정하기 힘들 게 한 것은 아쉬운 점이기도 하고 의도된 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한때 어느 한곳의 그들의 찰나적인 모습과 생각, 가치관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삶의 찰나의 거대한 은유의 집적 같기도 하다. 다만 언어를 주무르고 이야기를 퍼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이들의 응축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순간이라는 것. 기억할 만한 이야기들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galmA 2015-01-23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커트 보네거트 책보고 울었던 기억도 있네요; 그래서 전작을 다 찾아보고 싶어졌죠. 돈 드릴로는 화이트노이즈 한 권밖에 못 봤는데 그 한권만으로도 그의 전작을 다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읽을 책이 많아 차일피일이긴 합니다만; 르 귄, 잭 케루악, 존 치버는 그 명성에 비해 제 취향이 아니라 읽다가 덮기를 반복하며 계속 시도 중이에요;;
blance님은 그들을 접하신 뒤 리뷰 어떠하실 지 궁금하네요.

blanca 2015-01-23 17:25   좋아요 0 | URL
아, agalma님 얘기 들으니 꼭 읽고 싶어집니다. 커트 보네거트 어떤 책 추천하세요?

AgalmA 2015-01-23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기작)제5도살장-(마지막장편)타임퀘이크 둘 중 선택하기 까다롭네요; 전 타임퀘이크가 더 감동적이긴 했어요. 보네거트 위트를 재밌어하셨으니 (에세이)나라없는 사람부터 읽으셔도 좋겠죠^^

blanca 2015-01-24 09:46   좋아요 1 | URL
<나라없는 사람> 오고 있어요. ^^ 이상하게 거의 다 절판이에요. 제5도살장도 절판이고요.

AgalmA 2015-01-24 10:31   좋아요 0 | URL
네, 작년에 제5도살장 반값할인 때 사람들이 엄청 사대면서 전반적으로 그리 된 듯; 저는 다 도서관에서 빌려봤어요.으힉; 읽고 나신 뒤의 리뷰 기대합니당^^

다크아이즈 2015-01-23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덕에 보관함에 담습니다. 고맙습니다.
앨리스 먼로 좋아하시면 엘리자베스 스타라우트도 좋아하실 듯.
그녀처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라디오 녹음이 있다고 뛰어가는 사강이라.... 영화나 그림 같은 이미지네요.
50년대말이나 60년대 초의 사강일랑가 ㅋ

blanca 2015-01-24 09:48   좋아요 0 | URL
그럼요! 저 <올리브키터리지> 완전 좋아해요, 다크아이즈님! 그런데 왜 다른 책은 전혀 번역이 안 되는 건지, 너무 아쉬워요. 소개에도 화려한 젊음, 황폐한 노년이라는 표현이 눈에 띠더라고요. 비단 사강 뿐 아니라 원래 젊음은 찬란하고 노년은 슬픈 건지...

Nussbaum 2015-01-24 0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과 소설가. 제가 오늘 조금 고민했던 부분의 책이라 관심이 갑니다. 그간 한참이나 소설을 멀리했는데 이제는 좀 소설을 가까이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얼마전 제 노트북에 타자기 소리가 나는 앱을 깔았습니다. 조용한 방에서 타자를 치니 뭔가 새롭기도 하고 그렇네요. 저도 타자를 치면 한 세계를 떨쳐 내고 다른 세계를 맞이하게 되면 참 좋겠습니다~

blanca 2015-01-24 09:48   좋아요 1 | URL
타자소리가 나는 앱이 있어요? 저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저도 타자기 써 보고 싶어요!

AgalmA 2015-01-24 10:24   좋아요 1 | URL
저도 써봤는데 바탕 화면, 글자도 색깔별로 쓸 수 있고 어떤 앱은 눈내리는 화면에 서걱서걱 소리까지 나죠^^
포맷하고 다 날아갔는데 가끔 생각나요 :)
 
애거서 크리스티 자서전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시현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나 보다. 전학와서 사귄 친구와 단짝이 되어 그 친구 집에 놀러갔다 우연히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책을 보게 되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의 책이었나 했다. 단숨에 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이 되었다. 어떤 긴장을 끌고 가는 힘 뒤에 애거서가 슬몃 슬몃 뿌려 놓는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좋았다. 막 달리는 롤러 코스터가 아니라 때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뒤를 짚어볼 수 있게 하는 그녀만의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은 감해지지도 스러지지도 않고 꾸준히 나의 성장과 함께 했다. 그녀가 다른 필명으로 장르 소설이 아닌 본격 소설 작품을 한동안 썼고 그것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어 또 다른 진지한 삶과 여인의 내면에 대한 천착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어 참 반가웠다. 까도 까도 또 깔 껍질이 나오는 양파처럼 이 작가는 무궁무진하고 깊다.

 

그녀는 다행히도 환갑 언저리에 시작하여 장장 15년에 걸쳐 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 두어 나 같은 독자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다.  고고학자인 남편을 따라 유적 발굴에 참여했던 이라크의 님루드에서 시작된 그녀의 삶의 복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파란만장한 문학이다. 전체를 따라 흐르는 그 유쾌한 분위기와 삶의 애착이 참으로 따뜻하다.

 

나는 삶을 사랑한다.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진 듯 절망하고, 날카로운 비참함에 온몸이 꿰이고, 슬픔에 몸서리치기도 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위대한 것임을 여전히 확신한다.- 서문 중

그녀는 뉴욕 출신의 아버지와 영국 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오빠와 언니를 둔 다복한 가정의 사랑받는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인내심 많은 유모와 유쾌한 아버지, 이해심 많고 끊임없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머니 밑에서 그녀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는 행운을 누린다. 유아기와 유년기에 대한 그녀의 묘사는 너무 생생해서 상상놀이에 심취하고 굴렁쇠를 굴리는 어린 애거서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한번도 진지하게 작가를 꿈꿔보지 않았고 음악에도 재능을 보이고 약제실에서도 일했던 그녀가 우연히 어머니의 제안과 격려로 이야기를 쓰게 되는 장면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써 보기 전에는  쓸 수 있는 지 알 수 없다,는 어머니의 조언은 금과옥조다. 디킨스를 함께 읽고 어떤 선택이든 지지해 주었던 그녀의 어머니의 모습이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거의 한 세기 전의 그녀의 어머니의 육아 방식은 자녀의 눈높이에서 성장의 단계마다 아낌없이 호응하고 너그러움을 발휘하는 모습으로 오늘날의 각종 육아서에서 설파하는 가장 이상화된 엄마의 현현 같았다. 어쩌면 애거서가 그렇게도 삶에 대한 굳건한 애정과 신뢰를 보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이러한 행복한 성장 과정이 밑받침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의외로 평생 눌변이었고 소심한 편이었다고 한다. 여행이나 변화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애거서가 그 틀을 깨고 나와 세계일주를 하고 심지어 중동에 가서 유적 발굴에도 참여하는 모습이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누군가 데려다 주기 전에는 산책을 나가지 않는 개 습성을 버리지 않으면 평생 그렇게 살 지 모른다는 그녀의 조언은 울림이 컸다. 그녀의 이야기 속 귀여운 해결사 할머니 미스 마플의 모습은 그녀가 군데 군데 남발하기도 하는 빛나는 조언들 속에 녹아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듣기 싫지 않도록 위트와 자신의 경험을 풀어 놓는 장치가 아주 정교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그녀가 아마추어 작가에서 프로 작가로 나아간 지점에 '돈'이 있었다는 솔직한 고백도 그렇다. 백년해로할 줄 알았던 남편의 외도로 괴로워하다 끝내 이혼을 선택하는 장면은 노년인 지점에서의 회상씬이라 할지라도 너무나 슬프고 애잔하다. 재혼의 대상이 될 줄 모르고 한참 어린 청년과 예쁜 빛깔의 돌을 색깔별로 늘어놓는 장면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의 이름은 맥스이고 그녀와 백년해로하게 되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등장시킨 미스 마플의 <잠자는 살인>을 헌정받게 되는 주인공이 된다.

 

 

나는 지금 대기실에서 피할 수 없는 부름을 기다리며 빌린 시간을 살고 있다. 부름이 내리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꺼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리라. 운이 좋게도 우리는 이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지금까지 너무도 복된 삶을 살아왔다. <중략>

에스키모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찬미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화창한 날 늙으신 어머니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요리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얼음 너머로 걸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처럼 위엄 있게 단호히 삶을 떠나는 것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일이리라.

-에필로그 중

 

 

일흔다섯의 나이에 삶에 관한 한 말해야 할 것은 모두 말했으므로 자서전을 끝내야겠다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되풀이해 읽었다. 그저 언어로 포장한 것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대하여 이토록 담담하고 아름답게 이야기한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늙음과 죽음은 항상 두렵고 소외된 것이라 여겼는데 이 위대한 추리 소설의 여왕이 노년에 이야기하는 그것은 어떤 타협의 지점에서 깊이 있는 울림을 주어 기억해 두고 싶다. 위엄 있게 단호히 삶을 떠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삶의 근사한 대미로 장식될 것이다. 소멸은 물론 분명 어떤 고통을 담보로 하겠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번 존재한 것은 무엇이든 영원히 존재하는 법이라는 애거서의 이야기를 위로로 담는다. 그녀처럼 더없이 행복하기만 한 유년을 가지는 축복은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 아낌없는 헌신과 스러지지 않는 사랑을 가르쳐준 나의 할머니와의 추억들도 엄연히 거기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몇 번이나 다시 돌아가 끝내 하지 못한 포옹과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으니까. 프롤로그가 아니라 에필로그를 장식한 애거서의 어린 시절 사진은 분명 그런 기회가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삶을 예찬할 수 있었던 그녀의 작품들을 읽어 온 시간들이 더욱 더 오롯이 나에게 채워지는 것 같은 시간들, 고마운 이야기였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1-03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사 크리스티라면 실종 사건이 제일 먼저 떠올려요. 어렸을 때 미스터리 모음집에서도 나올 정도로 특이한 사연이었어요. 그런데 무슨 이유로 크리스티가 사라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마도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이 자서전을 읽으면 실종 사건에 관한 언급을 확인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blanca 2015-01-04 10:09   좋아요 1 | URL
저도 어렴풋이 들었는데 자서전에서 이 중대한 사건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요. 찾아보니까 첫남편의 외도후 운전해서 나간 차에서 실종되었는데 어느 여관에서 그 남편이 외도한 상대 여성의 이름으로 묵고 있었다고 해요. 이게 충격에 의한 기억상실인지 아니면 일존의 연기였는지 그 진실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cyrus 2015-01-04 23:50   좋아요 0 | URL
하필 제일 중요한 내용이 없다니 아쉬워요. 그래도 본인에 관한 모든 얘기를 자서전이라해서 무조건 다 알려줘야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ㅎㅎㅎ

라로 2015-01-04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른 나이에 아가사의 팬이 되셨군요~~~초딩때의 독서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해든이도 아가사를 읽히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수준이~~~ㅠㅠ 그러고보니 블랑카님 엄청 똑똑하셨군요!!!

blanca 2015-01-04 10:09   좋아요 0 | URL
아웅, 비비아롬모리님, 똑똑한 것과는 ㅋㅋ 거리가 있었어요. 참, 해든이 혹시 구스범프는 어떨까요? 요새 분홍공주는 거기에 빠져 있는데 글밥이 좀 많아서 부담스러워하긴 하더라고요.

라로 2015-01-06 04:16   좋아요 0 | URL
분홍공주는 벌써 구스 범스를 읽는 다는 말이에요!!! 저도 이번 학기는 분발해야겠네요~~~. 어쩌면 해든이도 읽으라고 하면 읽을지도 모르겠긴 하네요,,,^^;;; 암튼 더 분발해야 겠어요,,,해든이 막내라고 거의 방목!!ㅠㅠ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때로 이런 상상을 한다. 겨울밤이었으면 좋겠고 아주 따뜻한 실내, 밤새 나는 듣기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그런 분위기. 살아온 이야기도 괜찮고 읽은 책 이야기면 더욱 좋을 것같다. 졸면서도 듣고 잘 듣고 있다고 이따금씩 되도 않는 이야기를 덧붙여도 되는 그런 정경. 하지만 되도록 너무 심각하거나 너무 진지하거나 너무 졸렬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면.

 

... 하는 바람을 십분 충족시키는 그런 책이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과 소설가 김중혁의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선별한 소설 일곱 편을 둘러싼 그들의 이야기다. '빨책방'은 정말 책 이야기만으로 이루어진 책 전문 팟캐스트다. 매번 챙겨듣지는 못하고 가끔씩 관심있는 책을 다루었을 경우 골라 듣는 정도였다. 영화평론가라지만 독서의 스펙트럼이나 깊이가 여느 작가 못지않은 이동진의 매끄러운 진행과 유려하지 않은 듯한 말투 뒤에 슬며시 작가다운 촌철살인과 성실하게 언어를 차곡차곡 쌓고 표현하는 김중혁의 착한 반응 들은 때로 두 사람의 친밀감에서 비롯된 재치 있는 위트와 더불어 정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를 한껏 주는 방송이다. 서문에도 나오지만 '독서'는 분명 아주 사교적인 행위는 아니다. 아니, 고독한 일이다. 이것에 소통이 덧대어질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분명 기대이상이다. '읽는 일'을 마치 여러 사람과 생각과 느낌을 나누고 친밀감을 나누는 일로 확장할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이 방송의 최대 매력일 것이다. 미처 읽지 못한 책도 아니 취향의 문제로 영원히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책에 관한 이야기도 괜찮다. 지루하지도 낯설지도 않게 이 두 사람은 다독여준다.

 

특히 이언 매큐언의 <속죄>는 그저 주어진 대로 읽기에 급급해 소설의 깊이와 완성도에 분명 경도되었던 기억은 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던 나에게 다시 한번 이 아름다운 사랑과 속죄의 드라마를 복기하며 제대로 깊이 있게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 좋은 소설을 너무 늦게 읽어 배신감까지 느꼈다는 중혁 작가의 말, 만약 이 소설을 아직 안 읽었다면 여기서 이 책을 덮고 무조건 읽기부터 하라는 이동진 평론가의 추천.  소설의 다양한 층위와 더불어 작가 이언 매큐언의 이력, 영화의 한계 들에 대한 이야기는 <속죄>를 미처 시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이미 시작해버린 사람들에게도, 이미 끝낸 사람들에게도 더 풍요로운 읽기를 가능하게 할 것같다.

 

두 번째로 언급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어떤 추천사보다 화려하다. "사랑과 연애를 다룬 소설 중에서 이 정도로 통찰력 있는 소설도 드물 것 같다."는 이동진의 첨언은 재미없는 부분은 건너뛰어도 무방하다는 독법의 제시와 더불어 당장이라도 이 책을 구하러 뛰어 나가고 싶게 만든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회한의 정서'로 돌아보는 과거로 마지막에 거론된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와도 만나는 부분이 있다.

 

<샐린저 평전>을 읽은 중혁 작가가 작가의 은둔을 고집했던 생애와 종국에는 그를 그러한 고립으로 몰아 넣어 버린 <호밀밭의 파수꾼>을 함께 이야기한 것은 작품이 결코 작가의 삶에서 떼어내어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며 또다른 읽기의 지평을 열어준다.

 

소설과 영화의 완성도 모두 높았다고 평가되는 <파이 이야기>는 각각 작가와 감독의 색채에 대한 진지한 접근으로 그 미묘한 차이와 색깔, 강점을 눈에 보이듯 보여준다.

 

읽지 않은 책이라도 다 읽어버린 책이라도 무방하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도 약간의 스포일러만 감수한다면 전혀 낯설지 않게 데면데면하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해 주고 이미 읽은 책에 대해서는 지루하지 않도록 다양한 시각, 층위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말 그대로 참 좋다. 에세이만 읽은 하루키에 대해서도 '소설도 어디 한번'을 가능케 하는 저력을 갖추었으니 믿고 따라가기만 해도 참 유쾌한 시간이었고 할 수 있다.

 

다 차치하고 이렇게 진지하게 이렇게 장시간 읽은 책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 지면이 죽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그래서 마음이 한없이 노골노골해지는 그러한 위안이 되는 책. 겨울밤에 읽으면 따악 좋겠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4-12-29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저는 신형철의 팥케스트를 간간히 듣고 있을 뿐 빨간 책방까지는 진입을 못했는데...그냥 공허한 공간에 사람의 소리가 노래가 아닌..목소리가 필요할 때
좋더군요. 나즉 나즉 한 것은 그것대로 매력이고요..언젠가 청취..하겠습니다.잘 읽고 배워 갑니다. 포근한 새 해 맞이
하시기를 바랍니다ㅡ(^-^)v

blanca 2014-12-29 12:48   좋아요 0 | URL
그장소님, 저는 아직 신형철의 팟캐스트는 들어보지 못했어요. 맞아요. 라디오에서 그냥 나직나직 사람 목소리만을 듣고 싶을 때 이런 책 관련 방송이 참 위로가 되지요. 덕분에 포근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세실 2014-12-29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정치적 상황 건너뛰고 읽으면 완벽한 러브스토리죠. 저도 재미없는 부분은 건너 뛰었어요^^
<속죄> 읽고 싶네요.

blanca 2014-12-29 12:53   좋아요 0 | URL
세실님, 저는 쿤데라 책은 <불멸>만 읽어봤어요. 그래서 더 호기심이 일어요. 그런데 이 책에서도 그렇고 세실님도 그러시고 재미없는 부분이 있다니 ^^;; 좀 걱정이 되네요. <속죄> 정말 강추입니다! `소설은 죽지 않았다!`고 보여주는 작품 같아요.

섬사이 2014-12-30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동진의 빨간 책방, 저도 매번 챙겨 듣지는 않지만, 가끔 지루한 집안일을 하게 될 때 켜놓고 듣곤 해요.
얼마전에 <다섯째 아이>를 읽고나서 빨간 책방을 들었는데,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과 다른 시각을 알게 되어 놀랍고 기뻤어요.
<속죄>, 꼭 챙겨 읽어봐야겠네요. ^^

blanca 2014-12-30 14:53   좋아요 0 | URL
아, <다섯째 아이>도 다루었군요. 아무래도 방송이 분량이 있고 그냥 흘려듣기는 힘들어서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야 해서 제대로 다 듣지 못해 아쉬워요. 섬사이님, <속죄> 꼭 읽어보세요,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2014-12-30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31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31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31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 자수 여행 - 들꽃을 찾아가는 행복한 자수 여행 1
아오키 카즈코 지음, 배혜영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늘 가까이에서 두고 보는 싶은 들판을 영국에서는 '메도(meadow)'라고 부른다고 한다. 자수 작가이자 원예가인 저자는 이런 영국의 메도를 식물도감을 끼고 찾아다니며 자수로 책의 지면에 옮겨 놓는다. 들꽃과는 먼 주거환경. 이렇게나마 자수 식물 도감을 보니 당장이라도 비루한 손재주로나마 나도 한번 해보고 싶게 만드는 정갈하고 아기자기한 들꽃들.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숙박 시설인 '킹 존스 로지'란다. 전임 정원사가 따로 아름다운 정권을 가꾼다고 한다. 장미아래 저 의자 아래에 앉아 보고 싶다. 어떤 책이든 술술 읽힐 것같다. 저자는 미리 예약을 하지 못해 숙박은 하지 못하고 차와 점심을 대접받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핑크 장미가 도톰하니 만져 보고 싶다.




양귀비, 엉겅퀴, 길뚝개꽃, 수레국화 등이 배합되어 만들어진 정원. 이 꽃들은 보리밭의 잡초로 취급된단다. 사용한 모티프에 대한 해설도 있지만,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꽃밭에 드러 눕고 싶은 정경이다.

<더 페인티드 가든>의 저자 메리 우딘을 직접 만난 저자가 메리 우딘의 정원에서 받은 영감으로 만든 쿠션의 자수들. 코스모스란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 저자를 직접 만나 그의 집까지 초대받는 영광을 누리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으리라. 또 그 감상을 이렇게 자수로 뒷갈무리할 수 있는 저자의 재능도 부럽다.





후반부에는 이 책 전반의 작품 도안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 마로 된 천과 자수실 두어가지도 함께 왔다. 하지만 자수라고는 전혀 모르는 나 같은 초보자가 이 도안을 제대로 활용하고 저자 같은 작품을 만들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실제 자수 강습이 있나 찾아 봤더니 의외로 자수 강습은 드문 편인 것 같다. 사극에 등장하는 아씨들이 수틀 앞에 앉아 있던 풍경이 사뭇 떠올랐다. 예쁘고 정갈한 책이지만 그저 보고 또 보는 수준으로 만족해야기에 아쉽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eanne_Hebuterne 2013-03-28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피터 래빗 시리즈를 그리고 쓴 미스 포터가 떠올라요. '영국', '들꽃', '메도' 라는 코드 뿐만은 아닌 듯 합니다. 결이 고운 감수성과 따뜻한 마음이 떠올라서일거에요. 블랑카님 사진 덕분에 눈이 호강했어요.

blanca 2013-03-29 10:05   좋아요 0 | URL
쥬드님, 저도 이런 것 직접 해보고 싶은데 손재주가 없어서 너무 아쉬워요. 피터래빗 시리즈 저도 좋아해요. ^^

순오기 2013-03-28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자수 책도 있군요. 멋져요~
우린 고등학교 때까지 자수를 했어요, 그때 수놓은 조각이불감은 아직도 그대로 갖고 있지요.
우리 애들 어릴 때 이불로 만들어야지 하면서 세월만 보냈네요.

blanca 2013-03-29 10:06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우아, 고등학교때 만드신 조각이불감이 아직도 있다고요? 볼 때마다 너무 좋으시겠어요. 저희는 자수 시간이 없어서 결론적으로 참 아쉬워요. 자수는 문화센터 강좌에도 잘 없더라고요.

꿈꾸는섬 2013-03-2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거 정말 멋지네요.

blanca 2013-03-30 09:51   좋아요 0 | URL
꿈섬님, 너무 예뻐서 한번 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에요^^;

후애(厚愛) 2013-03-29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안부가 늦어서 죄송해요..
즐거운 주말 되시고 감기조심하세요.

blanca 2013-03-30 09:52   좋아요 0 | URL
후애님, 저는 이미 심한 감기에 걸려 엄청 고생했답니다. 지금 회복 중이긴 한데 모든 일 스톱입니다. 후애님, 요즘 감기 독하다는데 정말 감기 조심하세요.

후애(厚愛) 2013-04-06 15:50   좋아요 0 | URL
감기는 좀 어떠세요?
저도 오늘 감기 기운이 좀 있네요..ㅠㅠ
오늘 대구는 비가 많이 내립니다.
봄비라는데... 왜이리 추운지 모르겠어요.
주말 즐겁게 보내시고 감기 얼른 나으시고 건강조심하세요.^^

blanca 2013-04-08 10:29   좋아요 0 | URL
이제서야 다 나았답니다. 감기 기운 초기에 꼭 약 먹고 낫게 하세요. 저는 목만 따끔거려 그냥 괜찮겠거니 했다가--;; 며칠을 그냥 누워만 있었네요. 또 서울은 꽃샘 추위가 왔어요.
 
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에 읽으려 했던 책은 버트란드 러셀의 자서전이었다. 나이 아흔에도 핵 반대 시위를 하다 투옥되는 모습은 그가 삶으로 치열하게 자신의 철학들을 형상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훌륭함과 저서의 가독성은 적어도 나에게는 정비례관계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나 보다. 

그가 고백하는 방대한 자신의 삶에는 분명 호기심과 경외의 감정이 일겠지만 어마어마하다면 어마어마한 분량과 지루할지도 모를 지엽적인 사실들에 미리 겁먹어 망설이다 엉뚱하게도 러셀 베이커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 러셀 역시 자신의 삶을 서사화했고 그 결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함께. 오십 대 중반에 뒤돌아 본 자신의 삶의 축약본에 <성장>이라는 미묘하고 뭉클한 표제를 붙인 것에도 이끌렸다. 자, 나는 원래 버트란드 러셀의 자서전을 읽으려다 삼천포로 빠져 러셀 베이커라는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의 또다른 삶의 복기에 슬며시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한 발만 걸쳐 놓았다가 온 몸을 다 풍덩 빠트리고 말게 되었다. 그건 하나의 고백이 아니라 나의 할아버지,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를 다시 기억해 내는 일과도 같았다.  

   
 

 여든의 연세로 어머니의 적적함은 끝이 났다. 그해 가을 이후로 어머니의 정신은 시간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러셀은 입을 뗀다. '나'의 태어남에서 나의 삶은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던져 놓은 어미의 노쇠와 망각의 늪으로부터 나의 삶은 거슬러 올라간다. '삶'은 언제나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 기억으로 중량감을 부여받는다. 어쩌면 러셀은 우리보다 더 일찍 삶을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죽음 앞에서 '나'의 '삶'을 드디어 이야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서 왔다는 얘기, 인생이란 결코 기저귀에서 수의를 입기까지의 한 뼘의 여정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러셀의 얘기는 이야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본 논조다. 과거의 얘기. 그리고 그 거슬러 올라가는 물길에서 떠내려간 소중한 것들에 대한 눈물겨운 애도. 이 자서전은 한 편의 성장소설과도 같다.  

러셀의 삶은 어머니의 부름에 대한 응답과도 같았다. 대학을 중퇴한 전직교사인 어머니는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들을 부양해야 하는 고단한 삶 속에서 역시나 장남에게 엄청난 기대와 열정을 쏟아 붓게 된다. 그 열정은 러셀에게 고문과도 같았다. 그의 삶은 프랑스의 국민작가 로맹가리처럼 어머니의 미래와도 같았다. 고작 여덟 살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팔러 길거리를 헤매며 다니는 모습은 꼭 물질적 결핍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아들을 단련시키고 싶어했던 어머니의 과도한 욕심의 한 사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유년이 비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구석도 많았다. 양가 삼촌들의 따뜻한 사랑들과 아름다운 전원 풍경 속에서 가스도, 수도관도 , 냉장고도, 라디오도 없었던 시대만의 행복감을 충만하게 누리는 나날들이었다. 심지어 대공황기에도 개개인의 삶은 불행하다기보다는 나름대로의 소소한 즐거움과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생동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러셀 베이커의 과거는 시대적, 역사적 비극의 테두리 안에서도 개인의 삶이 어떻게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반면교사의 예로 자신의 삶을 내어주는 희생으로도 활용된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여되었던 나날들. 러셀은 종전이 자신의 참전을 방해한 것에 실망한다. 그는 충분히 젊었고 젊음은 무모한 혈기의 과시와 멀어질 수 없었다. 당시 러셀과 어머니가 주고받은 편지들은 참회의 대상이 되고 만다. 짓이겨지는 무고한 생명들 앞에서 그들은 소소한 자신들의 일상사들만을 얘기한다. 대대장의 사열을 땡땡이치고 있다, 공원에서 소프트볼 경기가 있었다, 같은 그의 편지들은 당시 그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원폭 투하를 공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뼈아프게 고백한다. 의도가 어떻게 되었든 생명의 대량 말살을 초래한 잔혹한 행위 속에서 개개의 삶에만 집중했던 것은 '하나의 범죄'였다고 얘기하는 저자 앞에서 어찌 가슴으로 그의 얘기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삶의 고백은 겸허하고 진솔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 러셀은 만난다. 버트란드 러셀과 러셀 베이커. '나'의 삶이 단지 나만의 것이 아닌 더 큰 것의 일부분이라는 인식 앞에서 겸허하게 타인의 고통과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좋은 것들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지적 오만과 허영이 아니라 하나의 의무라는 것을 보여 준 두 거인의 얘기는 언제나 유효한 전언이다. 

마지막 장은 다시 더 나아간 현재이다. 망각으로 출발했던 어머니는 이제 그것조차 제대로 할 기력이 없이 잠만 자게 된다. 요만하게 어렸던 소년 러셀을 찾아 헤맸던 어머니는 아예 아들 이름 러셀조차 잃어 버린다. 여장부 같이 씩씩하고 도도했던 그래서 세상의 모든 몹쓸 것들에서 자식을 사수할 수 있었던 그 어머니는 이제 몸도 영혼도 다 자신이 품었던 아이들처럼 쪼그라들었다. 러셀의 성장은 어머니의 망각에서 출발하여 어머니의 '잠'으로 끝난다. 어쩌면 러셀이 얘기하고 싶었던 우리의 삶도 그런 걸까. 마지막 장을 덮고 바람 한 옴큼이 갑자기 가슴 속을 휙 비집고 들어왔다 나갔다. 삶이란, 인간이란, 어쩌면 이다지도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고 결국 허무한 것일까, 하는.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이 2011-03-31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서전이 흥미진진한 소설같네요. 삶이란 결국 허무한 것이라고 결론짓기에는 아직 너무 젊으시잖아요. 그 허무를 딛고 아름답게 삶을 채색하시기 바래요.

blanca 2011-03-31 21:16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무엇보다 참 재미나더라구요. 예. 감사합니다. 명심할게요.

빵가게재습격 2011-03-31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1-03-31 21:17   좋아요 0 | URL
빵가게재습격님이 와주셔서 기쁘네요.

비로그인 2011-03-31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절친한 벗 중 하나는, 저보다 열다섯 살 가량이 더 많습니다. 그는 내 시간을 선행해 나가고 있어요. 내가 무엇을 하노라면 그는 `내가 네 나이 때 그랬다' 라고 말하고, `나는 지금 어떠하단다'라고 말하더이다.

그런데 얼마 전 만난 그가 말했어요. 기억력이 하루하루 저물어져 가고 있어.
이게 왜 충격적이었을까요. 그는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은, 포토그래픽 메모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 저자의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하고, 배우 이름을 헛갈릴 때, 그만큼이나 나도 무서웠어요. 하루하루가 너무 다르다고. 그래서 `나도 그래요'라고 했더니 웃더이다. `너는 아직 모른다. 네가 지금 기억력이 부족하다 느끼는 건 네 기대치에 못미친다는 뜻이겠지. 허나 내가 느끼는 건 원래 있던 것이 모래처럼 사라지는 거야'

사람의 그릇은 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누군가 무엇이 되는 건, 그 사람의 노력보다는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성향의 문제이고 타고난 무엇인가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떤 이는 자아성찰을 하고 성장을 하는데 어떤 이는 파괴되어 더 자잘해집니다. 결국 인생은 유한하고 우리의 시간은, 지금이 가장 젊은 때에요. 이게 어느 순간은 `지금이 가장 젊고 아름다운 때'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순간은 `이 허무한 순간에 뭘 해도 자승자박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는 게 참 괴상하지요.

blanca 2011-03-31 21:19   좋아요 0 | URL
댓글이 경구 같아요. 참 이쁘네요. 저에게도 그런 벗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내 나이의 모습을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바라봐 주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결국은 성향의 문제. 맞는 것 같아요. 계속 맴을 돌아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이 가장 젊고 아름다운 때. 항상 돌아보면 그렇잖아요. 어떤 이는 성장을 하고 어떤이는 더 자잘해지고. 이 얘기에도 완전 동감해요. 전자가 되고 싶은데 노력해야겠죠?

마녀고양이 2011-03-3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셀은 어머니에게 굉장히 영향을 많이 받았나보군요.
블랑카 님의 리뷰에서 각인된 이미지가 어머니에서 시작하여 어머니로 끝나니까요.
그것도 어머니의 몰락 또는 자유로움으로.

자신에게 그토록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의 무너지는 모습을 본다는게 얼마나 허망하고 슬플지 그려봅니다.
하지만............. 사라진다는 것은 축복이기도 하지요! 그렇죠, 블랑카님? ^^

blanca 2011-03-31 21:21   좋아요 0 | URL
마고님, 사라진다는 것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정말 자연스럽게 사라락 두려워하지 않으며 최후를 맞고 싶어요.

cyrus 2011-03-3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트런트 러셀 자서전보다 먼저 러셀 베이커 자서전을 읽었어야했는데 말이죠 ^^
아시다시피 러셀 자서전이 두 권이라는 점도 있고,, 전에 <로지코믹스>을 재미있게 읽어서그런지 모르겠지만,,
자서전 읽기가 쉽지가 않네요. ^^;;

blanca 2011-03-31 21:22   좋아요 0 | URL
그죠. 두 권의 압박. 이게 참 묘한 게 한 권 읽고 다음 권이 읽기 싫어지면 그 지점에서 어찌나 괴로운지. 읽은 것도 안 읽은 것도 아닌 그 애매한 상태가 넘 싫더라구요. 특히 2권은 서간문이 많아서 별로라는 평들이 있어서요.

비로그인 2011-03-3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트런드 러셀, 러셀 베이커... 러셀이 두 사람을 묶어주네요. 기억이 우리의 삶을 이어주는 것처럼 말이죠. 내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다른 사람이 대신 기억해주는 것, 그것도 삶의 한 특성이겠죠. 말하자면 기억공동체랄까요...^^

blanca 2011-03-31 21:22   좋아요 0 | URL
후와님, 그러니까 제 삶의 복원은 여럿이 모여야 가능할 것도 같아요. 제발 부끄럽지 않은 기억들이기를.

프레이야 2011-03-3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삶은 단지 나만의 삶만이 아니다!
봄날 햇살 따스한 날,이제 곧 해거름이에요.
새로운 마음으로 좋은날들 엮어가면 좋겠어요, 블랑카님 우리.^^

blanca 2011-03-31 21:22   좋아요 0 | URL
아, 깜깜해졌어용. '우리'라는 말이 너무 너무 달콤해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